개인 창작 단편

#선착순으로_멘션_온_3개로_짧은_글쓰기 (2021.01.03)

멘션

1. 거울
2.
3. 벽난로


육중한 문을 열자 바깥보다도 캄캄한 실내와 매캐한 나무 냄새가 나를 반겼다. 그 작은 틈새를 못 견디고 휘몰아치며 들어오는 눈바람을 밀어내며 나는 천천히 진득한 어둠으로 들어갔다. 여기도 참 오랜만이네. 걸을 때마다 본인이 오래된 것을 티 내기라도 하듯 나무 바닥이 삐거덕거리며 울었다. 가볍게 발구름을 하며 신발에 들러붙은 눈을 털어내고선 벽면을 더듬거리며 스위치를 찾아다녔다. 어린아이 손에도 닿을 법한 애매한 위치에 있던 스위치를 누르자 불빛이 두어 번 점멸하더니 온 실내가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먼지가 가라앉고 조금 낡은 흔적들도 있지만, 빛이 환히 밝은 그 순간만큼은 흡사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10년 전, 눈처럼 순수했던 그때처럼 어린아이가 되어서. 답지 않게 향수에 젖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담배 연기처럼 하얀 입김이 길게 이어지다 흩뿌려지다 사라졌다.

"추워."

그런 내 기분과는 상관없이 나는 목소리가 굵직한 어른이 되어버렸고, 이 집도 그때와 달라진 점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흔들의자는 푹신한 소파로 바뀌었고, 구석에는 이곳과 어울리지도 않는 전신거울이 서 있었다. 색 바랜 기억을 더듬어 지금의 펜션과 비교해보며 틀린 그림을 찾던 나는 별안간 벽의 끝에 자리 잡은 벽난로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이건 그대로네."

켜켜이 쌓인 벽돌 안쪽은 재 하나 남지 않고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사용했다는 걸 보여주든 안쪽엔 그을음이 가득했다. 10년 전 낡은 풍경 속 현대 문물이 뒤섞인 이 이상한 집에서 이 녀석만은 굳건하게 그 시절을 보존하며 버티고 있었다. 너도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그리운 나머지 벽난로를 손으로 짚자 안 그래도 까만 장갑에 뿌연 먼지가 달라붙었다. 그 모양 그대로 사용한 지 한참 된 모양이었다. 이거 아직 사용할 수는 있으려나. 장식인지도 모를 장작과 불쏘시개를 아무렇게나 벽난로에 집어넣고 라이터로 신문에 불을 붙여 던졌다. 화르르 타오르던 불씨는 신문 한 장만 겨우 잡아먹고선 허무하게 꺼졌다. 눈이 오니 날도 춥고 습해서 불이 잘 붙지 않은 모양이었다. 문득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니 아직도 날카로운 눈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이런 날씨에 용케 예약 취소를 안 하고 이 산속까지 올 생각을 했냐고 허허 웃던 관리인 아저씨의 얼굴이 창문에 비쳐 보였다. 관리인 아저씨도 10년 전과 같은 분이었지만 머리는 눈처럼 하얗게 셌고, 눈가엔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어렸을 땐 해마다 찾아왔던 곳이라 나를 알아보시고 인사도 해주시던 분인데 내가 너무 큰 것인지, 세월 속에 나를 잊은 것인지 처음 보는 사람처럼 친절하게 안내해주셨다. 저 기억 안 나시냐고, 어렸을 때 여기 자주 왔었다고 혼자라도 알은체를 할까 하다가 그러다 기억이라도 안 나시면 어색해질 뿐이라는 것을 알기에 입을 꾹 다물었던 것도 덩달아 생각났다.

잡다한 생각은 묵중한 가방과 함께 내려놓고 나는 다시 불을 붙이려 노력했다. 장작을 다시 쌓아보고, 불쏘시개를 이곳저곳에 찔러넣고, 불씨를 던지기 무섭게 바람을 불어넣기를 몇 번. 노력이 가상했는지 드디어 장작에 불이 붙고 벽난로가 붉은색으로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불은 반가웠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찬바람을 맞다가 열기가 훅 끼치니 얼굴이 다 따끔거렸다. 주춤거리며 일어나 자연스럽게 소파에 기대앉았다. 이 소파도 그리 새것은 아니었는지 앉자마자 푹 내려앉았다. 높이도 낮은 탓에 다리를 쭉 뻗어야 했지만, 여기까지 오느라 축적된 피로도 있고 앞에는 벽난로 열기가 올라오니 노곤하게 몸이 녹기 시작했다. 타닥거리면서 장작이 타는 소리와 창문을 두드리는 눈바람 소리가 마치 자장가 같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올리고 몸을 일으켰다. 피곤은 피곤이고, 적어도 짐은 정리해야 했다.


어렸을 때 마냥 커 보이던 별장은 어른이 되어서 와도 넓기만 했다. 하긴 그때는 가족들끼리 와서 여러 명이 복작거렸고, 지금은 혼자니까 그런 거겠지만. 새삼 깨닫고 다시 주위를 보니 지금은 넓다기보다는 휑한 것에 가까웠다. 방안에 짐을 풀고 천천히 실내 안을 한 바퀴 돌았다. 세세한 소품이나 기구 같은 것은 많이 바뀌었지만 기본 구조나 배치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옛날 생각이 나서 향수가 몰려오려고 하면 바뀐 점이 눈에 띄어 사그라지는 것이 계속 반복되었다. 그렇게 돌고 돌아 결국 다시 벽난로 앞에 자리를 잡았다. 난 대체 무엇을 기대하고 여기에 온 걸까. 새삼스레 친구들이 말한 대로 내가 지쳤다는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렇게 먼 곳까지 추억 하나 바라보며 구태여 큰돈 써가며 혼자 왔을 리는 없으니까.

가만히 벽난로 열기를 맞으며 앉아있으려니 무작위로 떠올랐던 기억들이 차근차근 쌓이기 시작했다. 처음 이곳에 온 것이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 가족은 겨울마다 이곳에 2~3일 정도 머무르는 게 연례행사처럼 자리 잡혀있었다. 그건 아버지가 산을 좋아해서였나, 아니면 내가 여기 오는 걸 좋아해서였나. 확실한 건 우리 가족이 매년 이곳을 찾았다는 것 하나뿐이다. 무언가 오락 시설이 있는 것도 아닌데 산과 눈만 가지고도 참 재미있게 놀았다. 이 앞에서 고기를 구워 먹기도 하고, 아버지를 따라 빙어를 잡으러 호수로 떠나거나 근처 스키장에서 눈썰매를 타기도 했다. 가끔은 다른 옆 펜션에 놀러 온 가족과 함께 어울리기도 했다. 그중에는 우리 가족처럼 매년 이곳을 찾는 가족도 있었다. 마침 나와 비슷한 또래 아이가 있었기에 만나기만 하면 참 재미있게 놀았다. 정작 그 아이의 이름도 얼굴도 성에 낀 차창처럼 뿌옇게 기억날 뿐이지만. 떠오르는 건 날 부르던 앳된 목소리뿐이다.

추억들은 많았지만 애초에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한정적이다 보니 기억들은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머릿속에서 반복되었다. 지루한 반복 속에서도 변화는 분명 있었다. 부모님은 점차 밖에 나가기보다는 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고, 나와 같이 놀던 그 친구는 언젠가부터 오지 않게 되었다. 아무리 이곳이 좋아봤자 혼자 노는 게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점차 나도 이곳에 오는 게 귀찮아졌다. 이곳에 찾아온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불명확하지만 언제까지였는지 확실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올해는 가지 말까 하고 농담처럼 말을 던진 것이 화근이었다. 어머니는 진작부터 그것을 바랐던 것인지 밝은 목소리로 맞장구를 치며 나에게 의사를 물었다. 그 말끝에는 이제는 중학생이라든지, 학원도 한 번 빠지면 치명적이라든지 하는 말이 붙어있었다. 부모님이 둘 다 그러시다는데 어린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결국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렸고 그 이후 이곳에 온 적은 없었다. 오늘까지 단 한 번도.

"춥다."

분명 눈앞에서 불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데 어쩐지 추웠다. 눈바람이 아직도 세차게 불고 있고 오래된 창문이 그걸 다 막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벽난로에 장작이나 더 집어넣을까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덮었던 담요를 어깨에 두르던 와중, 구석에 있던 전신거울과 시선을 마주했다. 어릴 땐 저런 거울 없었는데.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거울을 보고 있으려니 자연스럽게 내 모습도 보게 되었다. 다 큰 어른이 어정쩡하게 서 있는 모습은 참 볼만 했다. 소파에 눕다시피 앉아있었다 보니 머리는 죄다 헝클어진 채였고 눈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어깨와 허리는 구부정해 추워서 두른 담요가 자꾸만 미끄러져 내렸다. 느릿느릿하게 담요를 여몄지만 그래봤자 인물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 거울을 보는 감상은 그대로였다. 멍청한 눈을 가진 거울 속의 내가 나에게 묻는 것만 같았다. 너는 지금 뭘 하고 있느냐고. 잇새로 새어 나온 한숨은 눈바람과 장작 타는 소리에 가볍게 묻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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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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