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에이-미사와

[미사와] 벚나무 아래에는

기록 by G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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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나무 아래에는

"시체?"

"낭만 없네. 사와무라 군은."

동급생의 핀잔에 사와무라는 침묵했다. 대신에 입술이 살짝 튀어나왔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사와무라의 그런 모습을 본건지 못 본건지 사와무라에게 자주 순정만화를 빌려주는 동급생의 말이 이어졌다.

"뭐, 시체란 건 도시 전설이니까."

그걸 알면서 왜 벚나무 아래에 대한 얘기를 꺼낸 것인가. 설마 어제 빌린 만화에 있는 내용인가? 연습한다고 못봤는데?! 순식간에 사색이 된 사와무라가 뭐라 말하기 전에 동급생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시체가 묻혀 있다는 건 구식 전설이란거지."

응? 전설에 구식이나 신식이 있나? 도쿄같은 도시에서는 전설도 구식과 신식을 따지는 건가? 사와무라는 입을 떡 벌리고 동급생을 바라보았다. 나가노에서도 시골 출신인 사와무라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이어졌다.

"우리 학교 벚나무 정말 아름답거든."

그런가? 사와무라는 시선을 돌려 저 멀리 있는 벚나무를 보았다. 확실시 크긴 했다. 아직 때가 아니라 꽃이 피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한꺼번에 꽃이 피면 꽤나 장관이 될 것 같긴 했다. 꽃이 필 때 쯤에는 센바츠도 한창 일거라 제대로 꽃을 볼수 있을 지는 장담 못하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 봤을 텐데 본 기억이 안나네. 사와무라는 한가로이 생각하며 제 감상을 얘기했다.

"비료 잘줬네."

"...사와무라 군. 낭만 없어"

꽃나무가 잘 큰거면 비료 잘 줘서겠지. 이어지는 동급생의 투덜거림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며 사와무라는 벚나무를 계속 바라보았다. 멀리서 봐도 꽤나 여러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였다. 수업시간이 머지 않았는데 괜찮은 건가.

"그러니까."

"응."

"자기를 묻는거야."

"응, 좋은 비, 뭐?"

제 말을 건성으로 듣던 사와무라의 놀란 표정에 동급생은 씨익 웃었다.

"자기를 묻는다고."

사와무라는 제 귀를 의심했다. 설마 이게 신식 도시전설이란건가. 사와무라는 신나게 제 앞에서 이야기를 동급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마음을 묻는거네."

깔끔하게 정리하는 하루이치의 말에 사와무라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지 않아? 도시전설도 신식이라던가 구식이 있고. 도시전설이라서 그런거야?"

"시간이 지나면서 이야기가 변형이 되는 건 흔한 일이니까."

제가 들었던 긴 이야기가 하루이치를 거치니 몇 마디의 말로 정리되었다. 역시 하룻치! 대단해! 사와무라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하룻이치에게로 향했다. 그 부담스러운 눈빛에 하루이치는 헛기침을 했다.

"멀리서 봤는데 사람들이 몇 명 왔다 갔다 하더라고."

그리고 다들 잠시동안 나무 아래에 서 있다가 금새 자리를 비웠다. 그 사람들은 마음을 묻을 수 있다고 믿는 걸까. 벚나무가 마음을 양분으로 삼다니, 차라리 잠자리 시체가 더 양분이 될 것이다. 얼굴에 빤히 드러나는 사와무라의 의문에 하루이치는 쓴웃음을 지으며 얘기했다.

"그냥 행위인거지."

"그냥 행위?"

"다짐 같은거."

사와무라의 시선이 벚나무로 향했다. 멀어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그 아래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은 보였다. 그 모습에 사와무라는 동급생에게 들었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꽃이 피기전에 묻으면 꽃과 함께 사라진다."

"낭만적인 말이네."

"그런가?"

"에이준 군은 다른 생각?"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건가 싶어서."

"물러설 곳이 없다면 어디에라도 매달리고 싶어지니까."

그런가. 사와무라는 하루이치의 말에 작게 대답하며 벚나무로 향했던 시선을 돌렸다.

마음이란게 그렇게 쉽게 사라질리가 없잖아. 사와무라는 네트에 꽂힌 공이 아래로 떨어져 구르는 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잡생각때문인지 공은 생각한 곳을 한참이나 비껴난 곳에 내리 꽂혔다. 당장 때려치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이 상태면 그냥 뛰는게 나을지도. 사와무라는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단 정리를 끝내고, 몇 바퀴를 돌고 난 다음에 씻고 잔다. 사와무라는 지금부터 자신이 할 일을 그렇게 정했다.

"크네."

밤이라 그런건지, 아니면 가까이 와서 그런지 나무는 생각보다 컸다. 이 정도면 백년 이상 된 나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와무라는 나무 밑을 보았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나무 아래의 흙은 파헤쳐 졌다가 도로 덮힌 흔적들이 여기 저기 있었다. 제일 확실한 건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땅을 파고 그 안에 제 마음을 묻는 것이라 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기 어려우니까 누가봐도 흙을 파서 그 안에 묻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묻히는 것은 짝사랑일 수도 있고, 질투일 수 있고, 괴로움일 수도 있다고 했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하는 마음을 묻는 거니까. 뭐든 상관 없는거야. 그러면서 그때까지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와무라를 보며 동급생은 깔깔 웃었다.

하루이치는 다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사와무라는 이해했다. 그러나

"그리 쉽게 살라질리가 없잖아."

"뭐가?"

"우와앗"

"진정, 진정해. 사와무라!"

갑자기 뒤에서 들린 말에 사와무라는 대경실색했다. 그리고 놀라는 저를 붙잡는 팔과 낯익은 목소리에 놀란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돌아보았다. 미유키였다.

"놀랐잖습니까!"

"내가 더 놀랐다. 이런 데 있어서."

사와무라의 역정에 미유키는 그때까지 잡고 있던 사와무라의 팔을 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어, 찾으셨습니까."

"아니."

"그럼?"

"글쎄, 그보다 너. 여긴 왜 온거냐."

말을 돌리는 미유키의 말에 사와무라는 인상을 썼다. 그렇지만 웃으면서 저를 바라보는 미유키는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낮에 신식 도시전설을 들어서요."

"신식 도시전설?"

"벚나무 아래에 마음을 묻는다는거요."

불퉁한 사와무라의 말에 미유키는 웃었다.

"뭡니까."

"너도 묻으러 온 거?"

미유키의 물음에 사와무라의 두 눈이 깜박였다. 그리고 사와무라는 다시 나무 밑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이 나무 아래에 묻고 싶은 것이 있는가. 이 나무 아래에 묻어서 없애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묻으면 사라질까요."

"사라지길 바라는거겠지."

망설임 없는 미유키의 대답에 사와무라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미유키를 지나쳐 위로 향한 사와무라의 시선에 벚나무의 줄기와 잎, 그리고 피기 위한 준비를 하는 꽃망울이 보였다. 지금이라도 꽃망울이 터져 꽃잎이 흩날릴 것 같았다.

"꽃이 피기전에 묻으면 꽃과 함께 사라진다고 하더라고요."

"너한테도 묻고 싶은 마음이 있는 줄 몰랐는데."

"선배는 없습니까."

사와무라는 꽃망울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미유키에게 물었다.

"있었지."

의외의 대답에 사와무라의 시선이 미유키에게로 향했다.

"그래서 여기에 매달리는 심정으로 오기도 했었고."

"의외네요."

"도망칠 구석이 없으니 그렇게 되더라고."

가볍게 웃으면서 대답하는 미유키의 모습에 사와무라는 발 끝으로 흙을 파헤쳤다.

"구멍 파게?"

"아무도 없을 때 해야 제일 효험이 있다던데요."

"이왕 들킨거 그냥 하지?"

"부정 탑니다."

"괜찮아. 난 그냥 했으니까."

"그래서 성공했습니까?"

"아니."

"부정 탔네요."

여전히 아래를 보면서 퉁명하게 말하는 사와무라의 모습에 미유키는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사와무라의 발 끝은 여전히 흙을 파헤치고 있었다. 차라리 손으로 파는게 더 빠를 것 같은 그 움직임을 보며 미유키는 침묵했다. 얕은 구멍이 생기고 그 옆에는 작은 흙 산이 생겼다.

"선배가."

"응."

"그 때 제대로 묻었으면 사라졌을까요."

"아니."

미유키의 단답에 사와무라는 발 끝으로 흙 산을 찼다. 그리고 무너진 흙더미에 애써 팠던 구멍이 덮였다.

"묻었어?"

"아뇨."

"왜?"

"부정 탔으니까요."

사와무라는 경쾌하게 답했다. 사와무라에게 미유키는 어쩔 수 없는 녀석이네 라고 푸념했다. 그리고 사와무라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 웃음에 미유키도 웃고 말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벚나무 아래로 꽃잎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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