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루사와]
덥다.
사와무라는 찌를 듯한 햇빛을 피해 그늘을 찾았다. 그리고 시야에 나무아래에 놓인, 그늘이 진 벤치에 앉아 있는 후루야가 보였다.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이 자신과 비슷한 상황인 듯 했다.
더워.
한 여름의 햇빛은 너무 강렬해서 사와무라가 무언가 더 생각하는 것을 방해했다.
사와무라는 후루야를 한번 부르고는 바로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별 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사와무라가 후루야를 불렀을 때 후루야는 사와무라를 한번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사와무라로서는 이 편이 더 좋았다. 이 더위에서는 아무리 사와무라라도 활기차기가 어려웠던 까닭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사와무라는 그늘 아래에서 활기를 되찾았다. 사람을 힘겹게 만들던 햇빛도 기세가 조금 수그러 들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연습을 해도 될 것 같았다. 연습에 생각이 닿자 사와무라는 지금 이 시간이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폭염으로 낮에는 야외 연습이 중지되긴 했지만 지금이라면 그라운드 몇바퀴정도는 돌 수 있을 것 같았다. 안되면 실내에서 연습하면 되겠지. 편하게 생각한 사와무라는 벤치에서 일어섰다.
"있잖아."
"응?"
벤치에서 일어서자마자 자신을 부르는 후루야의 말에 사와무라는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언제나와 같은 표정의 후루야가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사와무라는 도로 벤치에 앉았다. 후루야는 잠시 무엇을 생각하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와무라는 재촉하지 않았다. 라이벌이자 친구인 후루야의 성격을 충분히 아는 까닭이었다.
"한 사람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려."
여전히 앞만 바라보며 얘기하는 후루야의 말에 사와무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후루야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뭔가 답을 내야 될 것 같았기에 사와무라는 제 머릿 속에 떠오른 단어를 꺼냈다.
"투쟁심?"
말과 함께 사와무라는 아, 이건가 하며 자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이녀석 나 말고 다른 라이벌이 생긴건가? 하고 떠오른 생각이 신빙성을 더 해주었다. 그런데 누구지? 하고 떠오른 생각을 다시 말로 내기전에 후루야가 먼저 말했다.
"아니."
그 단호한 말에 사와무라는 인상을 썼다. 이녀석 스무고개라도 하자는거냐. 설마 내가 연습을 하러 갈려니 방해하는거냐.
"그럼 뭔데. "
억양이 높아진 사와무라의 퉁명스런 말에 후루야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냥 심장이 두근거려. 안 보이면 괜찮은데, 생각하면 또 두근거려. 시합할 때랑은 달라."
조용히 이어지는 말에 사와무라의 두 눈이 커졌다. 잘은 모르지만 후루야의 말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하는거 아냐? 만화에서 봤어."
조심스레 덧붙인 근거에 아래로 향했던 후루야의 시선이 사와무라에게로 향했다.
"좋아하는거?"
"응,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두근거리는거지."
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얘기하는 사와무라의 태도에 후루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좋아하는거구나."
자신의 일인데도 어쩐지 남의 일을 대하는 듯한 후루야의 태도에 사와무라는 가슴을 쳤다. 라이벌이자 친구로서 이런 일을 그냥 칠 수는 없었다.
"고백할거야?"
"고백?"
"좋아한다고 말하는거."
"그럼 뭐가 달라지는데?"
후루야의 질문에 사와무라는 경악했다. 이 녀석 이런 것도 모르는거냐.
"사귀는 거지."
답답해 하는 사와무라의 말에 후루야는 대답했다.
"지금도 사귀고 있는데?"
"뭣?! 후루야 네놈 언제부터!"
"아닌가?"
애매모호한 후루야의 말에 사와무라는 노성을 토했다.
"고개 갸웃거리지마! 그래서 사귀는거야 아닌거야?"
"달라?"
"달라! 달라! 다르다고!"
강조에 강조를 더하며 목소리가 커지는 사와무라의 말에 후루야의 미간에 주름이 더해졌다.
"뭐가 다른건데?"
"너! 그 사귄다는거 친구 사이인거지? 친구랑 연인은 달라."
"뭐가?"
후루야의 물음에 사와무라는 주춤거렸다. 그리고 후루야는 사와무라의 대답을 기다렸다.
"언제나 같이 있고, 손잡기도 하고?"
거기에 덧붙여서 키스한다던가 하는 장면도 봤지만 거기까지 후루야에게 말하기는 부끄러워 사와무라는 얼머무렸다.
"그럼 연습 못하잖아."
"씨끄럿! 암튼 다르다면 다른거야. 알고 싶다면 만화책 빌려다 줄게."
선심쓰듯 말하는 사와무라의 말에 후루야는 다시 질문했다.
"그럼 고백하면 뭐가 좋아?"
"뭐?"
"고백하면 날 좋아해주는거야?"
"그, 그렇지 않을까? 인정하기 싫지만 너 잘생기긴 했고, 야구는 나만큼 잘하고."
"나보단 느리잖아."
"뭐 임마! 시비거는거냐."
답답해진 사와무라는 이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 라이벌을 내버려 두고 그라운드에서 뛰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날 좋아해 주는거야?"
"그렇겠지."
이미 마음은 연습으로 향한 사와무라의 성의 없는 대답에도 굴하지 않고 후루야는 다시 물었다.
"그럼 고백해도 되는거네?"
"아, 그렇지만 상대방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음 해도 안될걸?"
뒤늦게 떠오른 가능성에 사와무라의 마음은 다시 그늘진 벤치로 돌아왔다.
"그런거야?"
"그런거다."
"그럼 없으면?"
"해보고. 사귀거나, 차이거나?"
여전히 맹한 라이벌의 질문에 사와무라는 다시 답답해졌다.
"그럼 좋아하는 사람있어?"
"불똥이 왜 나한테 튀어?!"
"있어?"
갑자기 왜 자신에게 화살을 겨냥하는 건지 모르겠다 생각하며 사와무라는 신중히 대답했다.
"...나한텐 야구가 우선이다."
"없는거네."
"이자식! 너 시비거는거지?!"
사와무라는 자신을 맞춘 화살에 씩씩거리며 벤치에서 일어섰다. 연습하러 갈거다. 저녀석따윈 이젠 몰라. 사와무라는 굳게 다짐하며 일어섰다. 그때 다시 후루야가 사와무라를 붙잡았다.
"있잖아."
"왜?!"
또 쓸데없는 말을 하면 이번엔 대답도 없이 갈거라고 생각하며 사와무라는 후루야를 바라보았다. 후루야와 사와무라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좋아해."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후루야는 사와무라를 바라보았다. 사와무라의 두 눈동자가 커졌다. 그 놀란 얼굴이 귀여웠다. 지금 자리에 일어나 저 얼굴을 감싸 안으면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좋아해."
상대가 없다면 괜찮다고 했다.
"뭐?"
사와무라의 두 눈이 깜박였다.
"좋아해. 사와무라."
후루야의 심장이 세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굴이 빨개진 사와무라는 농담하지마 라고 큰소리로 외치고는 등을 돌려 뛰어갔다.
"아닌데."
후루야는 볼멘소리를 내며 벤치에서 일어섰다. 사와무라가 갈 곳은 어차피 뻔했다. 그리고 그 모든 장소는 학교안으로 한정 되어 있었다. 지금이라도 쫓아가면 될까. 쫓아가자. 그렇게 결정한 후루야는 천천히 그늘 밖으로 나갔다.
"아, 후루야 군."
운동장으로 향하는 길에 맞은 편에서 걸어오던 코미나토가 후루야를 불렀다.
"무슨 일 있어?"
다짜고짜 묻는 코미나토의 말을 후루야는 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얼굴, 무서워서."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건네는 말에 후루야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그러나 만지는 것으로 자신이 무슨 표정일지 알 수 없었다.
"무서워?"
아, 그럼 표정이 이상해서 사와무라 그런 말을 한 걸까? 연속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잠길 찰나
"에이준 군도 무시무시한 얼굴이었다니까."
이어지는 코미나토의 말에 후루야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일 있냐고 물으니까 화내더라고."
진짜 화났어. 라고 덧붙이는 코미나토의 말에 후루야는 낙담했다. 어째설까. 사와무라는 좋아하는 사람 없다고 했는데. 그리고 그제야 후루야는 자신의 질문에 사와무라가 했던 대답을 기억해냈다.
"무슨 일이야?"
코미나토의 재촉에 후루야는 대답을 망설였다.
"후루야 군."
"차였어."
"응?"
이번에는 코미나토가 후루야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후루야는 자신의 대답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차였다고?"
대신에 되묻는 코미나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야구를 하자는 말은 아닐테고, 뭐에 차인거야."
조심스레 다시 물어오는 코미나토를 후루야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상시라면 이렇게까지 물어오지 않을텐데 이렇게 까지 하는 것을 보면 사와무라가 많이 화가 난 듯 했다.
"화 많이 났어?"
"에이준 군? 응. 사람을 뭘로 보냐고 하더라고."
걱정어린 코미나토의 말에 후루야의 표정이 우울해졌다.
"그냥."
"그냥?"
"좋아한다고."
"그 말만으로?"
코미나토는 자신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후루야를 보면서 난감해졌다. 아무래도 저 좋아한다는 게 단순한 좋아는 아닌 듯 했다. 그런 종류였다면 에이준이 그렇게 화를 낼리가 없으니 말이다.
"그 전에는 뭐라고 했는데?"
"심장이 두근거린다고 했어."
역시나, 코미나토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루야는 자신이 던지는 공처럼 고백도 빠르고 정직한 직구로 한 모양이었다.
"에이준 군이 화내도 어쩔 수 없는거야. 그건."
어째서? 라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후루야를 보며 코미나토는 이번엔 밖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에이준 군과 자신이 무슨 입장인지는 생각해봤어?"
"투수?"
아니, 그 전에 우선 같은 동성이라는 것 부터 시작해야 되지 않을까라는 지적이 입으로 튀어나오기 직전에 코미나토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아냐?"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얼굴인 후루야를 보며 코미나토는 다시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집어 삼켰다.
후루야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와무라를 찾으러 가다가 만난 코미나토에게서 지금 사와무라를 만나면 안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좋아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생각해 보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렇지만 사와무라는 좋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때 자신은 그 말에 수긍했다.
"그러니까, 좋아하는건데."
그리고 고백을 하고 연인으로 사귀거나, 차이거나. 라고 사와무라는 말했었다.
- 그런데 차이면 친구로 지낼 수 있는건가?
그리고 그제야 후루야는 전혀 생각지 못한 결과를 떠올렸다.
후루야는 다시 사와무라를 찾았다. 새하얗게 변한 얼굴은 후루야를 아는 사람들 마다 그를 붙잡게 만들었다. 그러나 후루야는 그 말들을 무시하고 오로지 사와무라만을 찾았다. 운동장에도, 연습장에도, 식당에도, 기숙사에도 사와무라는 보이지 않았다. 저녁이 다되어 가는데도 어디에도 사와무라는 보이지 않았다. 나때문이라는 생각에 후루야는 자책하며 학교 여기저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루야가 마침내 사와무라를 찾아낸 곳은 운동장이 보이는 옥상에서였다.
"왔냐."
화났다는 코미나토의 말에 후루야는 사와무라를 찾으면 무슨 말을 들어도 괜찮다고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찾은 사와무라는 태평하게 후루야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응."
그리고 그 말에 후루야는 안심하며 사와무라에게 다가갔다. 옥상 펙스를 붙잡은 아래를 바라보는 사와무라의 곁에 후루야는 섰다.
"열심히 뛰더라."
"응."
사와무라는 여기서 후루야 자신이 뛰어다니는 것을 본 것 같았다.
"화 안내?"
사와무라의 말에 후루야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가 돌아왔다. 어째서? 자신이 사와무라에게 왜 화를 내야 되는거지? 후루야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너 아래에서 뛰어다니는거 다봤거든."
"다 본거야?"
"응, 하룻치 만났을 때 부터. 안에 들어갔을 때는 못봤지만."
"봐 준거야?"
"봐야 될 것 같아서."
어쩐지 힘이 없는 사와무라의 말에 후루야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고백해서 그래?"
"뭐가?"
"화났다고."
"하룻치가?"
"응."
"뭐, 화났지. 라이벌한테 갑자기 그런 말 들으면 화 날만하, 아, 넌 아닌가?"
갑자기 머리를 부여잡으며 끙끙대는 사와무라를 향해 후루야는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손끝이 사와무라에게 닿지는 못했다.
"너, 정말 날 좋아하는거야? 라이벌로 두근거리는거 아냐?"
"아냐."
사와무라의 부정에 후루야는 슬퍼졌다. 자신은 그런 것을 모를 정도로 둔하지않다.
"그럼 내가 여자애처럼 보여?"
"그럴리 없잖아."
사와무라와는 연습이 끝나고 함께 욕실에도 갔었다. 그런데 사와무라를 여자애로 착각하다니, 그럴 일은 절대 없었다.
"너."
"응."
"내가 에이스가 되겠다고 하면 순순히 양보할거?"
"싫어."
단박에 나온 후루야의 대답에 그제야 사와무라는 후루야를 바라보았다. 그 마주쳐 오는 눈동자에 후루야의 심장은 다시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네가 좋아."
"정말로? 친구나 라이벌로서가 아니고?"
"그건 작년에."
"뭐냐, 그건."
후루야의 대답에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 사와무라를 보며 후루야는 손을 뻗었다. 그러나 조금 전과 같이 그 손끝은 사와무라의 주변만을 맴돌았다.
"왜 그래?"
이번에는 사와무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후루야의 행동에 의문을 표했다.
"닿고 싶어서."
그리고 생각지 못한 후루야의 답에 사와무라의 얼굴은 다시 빨개졌다.
"너, 어제까지 이러진 않았잖아."
"그렇네."
그 멍한 대답에 사와무라는 다시 어이가 없어졌다.
"그런데 지금 왜이래."
사와무라의 말에 후루야는 자신의 손과 사와무라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다 생각에 잠겼다. 그 침묵에 사와무라는 다시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해가 넘어가면서 뒤늦게 운동장에 사람들이 모이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들도 이제는 저기에 가야 될 듯 싶었다.
"어이, 후루야."
"지금부터 닿으면 연인으로 닿는거니까?"
"...이, 바보가!"
언제나 바보 소리를 듣는 사와무라가 후루야에게 바보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기준이 뭐야. 기준이!"
"좋아한다고 말했으니까."
사와무라의 항변에 후루야가 무덤덤히 대답했다. 그리고 정론으로 느껴지는 말에 이번에는 사와무라가 침묵했다.
"네가 좋아."
그리고 그 침묵을 후루야가 깨뜨렸다.
"바보무라가 아니라 바보루야로 불려야 돼."
"너만 그렇게 부르는거면 괜찮아."
"이 바보가!"
후루야는 자신의 앞에서 얼굴이 빨개진 사와무라가 좋았다. 화를 내는 것이 아니다. 부끄러워 하는 것이라는 것을 후루야는 알 수 있었다.
"싫어?"
"그게 또 거기로 튀냐?"
사람 감정이 좋고 싫고만 있는 줄 아냐고 포효하는 사와무라를 향해 후루야는 다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손은 사와무라의 뺨을 감싸안았다.
"너!"
"있잖아."
"...말 해."
"닿아도 괜찮아?"
사와무라의 얼굴이 진홍빛이 되었다. 그 색이 너무 예뻐 후루야는 사와무라를 껴안았다.
"닿아도 괜찮아?"
"너 여기까지 해 놓고도 그런 말이냐."
한심하다는 듯한 사와무라의 말에도 후루야는 제 물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닿아도 괜찮아?"
"...몰라."
제 귓가에 닿은 볼멘 음성에 후루야는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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