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록우연] 초속 7cm

우리가 이번의 첫 눈을 함께할 수 있다면

To by 이선

https://youtu.be/7TYmklycjk8?si=RJFQ6MPhau9-M4NY

"우연아~ 추워! 창문 닫아!"

"웅~."

창 밖으로 눈이 내렸다. 고등학교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 보는 첫눈이었다. 어쩐지 아침 자습 때 본 하늘의 색이 영 무겁기만 하더니 결국 한송이씩 눈송이를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바람은 춥기만 하고, 길도 얼어붙을텐데도. 눈은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겨울이기에 볼 수 있는 광경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첫눈이 주는 무게란게 그런건지. 창문을 닫기 위해 잠깐 창가에 섰을 뿐인데 한기가 교복 위로 내려앉아있었다. 담요를 꽁꽁 둘러 하나의 도롱이벌레가 되고 나면 그제서야 노곤함이 몰려온다. 점심시간을 틈타 교실의 컴퓨터를 탈취한 친구들은 분위기를 내겠다며 저마다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틀었다. 그래, 곧 크리스마스 구나. 몰래 숨기고 내지 않은 핸드폰을 꾸물꾸물 꺼냈다.

핸드폰을 켰을 때 습관적으로 확인 하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연락용 어플이다. 예전에는 SNS를 가장 먼저 봤었던 것 같은데. 내가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사이에 혹시 연락이 왔을까봐. 네가 아주 작은 짬을 내서 나를 찾았을까봐. 다행인지 혹은 네가 바쁜지. 네 연락이 와있지 않으면 온갖 마음이 교차했다. 많이 바쁜가. 밥은 잘 먹었나. 운동할 때 힘든 일은 없었나. 코치님이 부르지는 않았나. 나 안 보고 싶은가 하는 많은 걱정들과 마음과 두근거리는 감정들이 그랬다.

그러나 기다리는 것만 하기에는 하루가 너무나도 짧았으므로 책상에 엎드린 상태로 몸을 창가쪽으로 돌렸다. 핸드폰을 제 눈가까지 가져와 창문을 바라보며 핸드폰 카메라를 켰다. 핸드폰 카메라도 충분히 멋진 카메라가 될 수 있었다. 작다면 작은 핸드폰 화면 안에 제가 보는 세계가 가득 찼다. 알록달록한 담요를 덮고 책상에 쓰러져있는 친구들의 둥그런 등허리. 창문과 창문 사이 기둥에 조잡하게 만들어 붙인 크리스마스 트리 모양의 색종이. 그리고 금속의 창틀 너머로 회색 하늘을 눈부시게 수놓는 눈송이들이 제 세상에 가득했다. 눈송이들은 지금 찍으라는 것처럼 하늘에서 지상으로 아주 느리게 나풀나풀 떨어져내렸다. 찰칵. 핸드폰이 작은 소리를 내며 이 순간을 담았다. 지금 흘러나오는 이 캐럴과, 담요 안의 체온이 만들어준 이 따듯함도 네게 함께 가면 좋을텐데.

담요 안에서 꼼질꼼질, 방금 전에 찍은 사진을 네게 보냈다. 네가 언제 발견하든 나를 떠올릴 수 있도록.

[(사진)]

[나는 이게 올해 첫 눈이에요.]

[수업이 다 끝날 때까지 눈이 계속 내리면]

[같이 산책해주지 않을래요?]

고작 열 일곱. 아직은 설레는 것이 더 많을 나이라고 제 나이 핑계를 대고 싶었다. 나는 아직 어리고, 어른이 아니라는 핑계로. 이제는 먼저 성큼 어른이 되어서 더 넓은 세계로 갈 너에게 나를 한 번 돌아봐달라고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우리가 같이 맞이하는 첫눈이라고. 별 거 아닌 것에도 무게를 잔뜩 실어서 네 세상에 내 발자국을 남기고 싶었다.

[우리한테도 이게 첫 눈이잖아요.]

나 하고 싶은게 되게 많아요. 우리한테 주어지는 시간이 많았으면 정말로 좋았을텐데. 우리한테 시간이 많았다면 당신과 작은 눈사람도 만들어보고 싶고. 눈오리도 만들어보고 싶고. 같이 스키장에 가는 이야기를 해도 좋을테고. 겨울방학이 오면 어디로 여행 갈지. 동아리 말고 우리 둘이서 여행을 가면 어디로 가는게 좋을지 같은 이야기들을 잔뜩 나누고 싶어요. 차가워져서 뺨이 빨개지면 그 위로 입술 도장을 찍어보고 싶어요. 아이스크림보다 달지도 모르잖아요.

수 많은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그대로 지워지고 지워진다. 추워서 굼질굼질 담요안으로 파고들면 괜히 네가 남겨둔 연락을 보고 저를 떠올릴 것 같아서 히히, 소리내 웃고 만다. 보고 싶다. 느리게 떨어지는 눈송이 만큼이나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끝에 네가 있으면 좋겠다. 우리가 첫눈을 함께하면 좋겠으니, 눈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펑펑 내리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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