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다이크] 크리스마스에 관한 이야기
우리가 몇 번의 크리스마스를 더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https://youtu.be/M8xRrzJjPjU?si=3S7xm3ovh9J2lsxG
회색으로 물든 하늘에서 하얀 것들이 하나 둘 가볍게 떨어져 내렸다. 숨을 가볍게 뱉으면 허공으로 하얀 숨이 부서져내렸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태양이 선명한 여름이었다. 하늘이 새파랗던 여름이 지나고, 높아지는 가을을 지나 재색으로 물드는 겨울이 흐른다. 몇 번의 계절이 그렇게 흘렀다. 오래 살지 못한다는 판정이 목에 걸려있던 나는, 그 목줄이 무색하게도 너와 함께 무사히 몇 번의 봄을 맞이했고, 여름을 맞이했고, 가을을 맞이했고, 다시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다. 손바닥에 배긴 굳은 살이 단단해질 수록. 얼굴에 못 보던 주름이 생길 수록. 나는 너와의 시간이 나무의 나이테처럼 내게 쌓여감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다시 겨울이다. 거리의 사람들은 군견이 거리를 미적거리며 걸어다니든 말든 저마다의 기분으로 들떠 거리를 걸어다닌다. 거리의 티비 속에서는 여전히 능력자들이 화려하게 쇼를 벌인다. 그 모습을 보며 잠시 멈춰서서 박수를 치며 좋아하는 어린 아이들의 눈에, 반짝거리는 앵두전구의 빛이 반사된다. 거리 여기저기에는 느릿한 캐롤들이 울려퍼지고, 다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웃으며 가족의 손을 잡으며 걸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 쉴거야. 다들 출근할 생각 안하고 푹 쉬어도 돼."
"이브도 말임까?"
"이브에는 출근 해야지."
"에혀."
지시사항을 읊어주자 놀기 좋아하는 녀석 하나가 티나게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가볍게 돌려 습관적으로 이반을 쫓으면 티나게 한숨을 쉬는 녀석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여서 가볍게 웃음을 삼켰다. 일을 싫어하든 말든 상관은 없는데 팀장인 내 앞에서 티나게 한숨을 내뱉는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괜찮다는 듯이 눈짓하다 눈이 마주치면 그 이글거리던 불똥이 제게 튀었다. 너는 뭐가 좋다고 저런 놈에게 한소리를 안 하고 가만히 두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저런 불똥도 8년째 받아내고 있으면 이제는 크리스마스의 벽난로마냥 한없이 따듯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이렇게 말하면 너는 드디어 미쳤냐고 하겠지만. 8년째니까.
공간이 일그러지기 전에 적당히 할 필요가 있었다. 고개를 가볍게 기울이면서 한숨 쉰 녀석을 바라보면 알아서 아니이, 하고 말을 길게 끄는 것이 느껴졌다.
"팀장님은 애인이 있으시지만 저는 올해도 혼자라고요. 일하느라 치여서!"
"나도 일하다가 만났어. 네가 못난거야."
담담하게 멀끔한 얼굴로 말하면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하다가 만난게 맞긴 하지. 우승자의 활동도 일의 연장선이긴 했으니까. 너무했나 싶었지만 팀원들도 한마디씩의 돌을 던져 녀석의 입을 깔끔하게 닫게 했다. 생각해보면 이녀석들도 다 제 친구들을 죽이고 입사한 녀석들이었으니까 그럴만 했다. 이래서 말이 중요한데…. 이반은 그렇게 노려본 것 치고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연애한다고 지랄하다 엄한 사람 불쌍하게 만들 생각 말고 혼자인게 외로우면 출근이나 하지 그래." 정도면 무척 순한 말이 아닌가. 음 … 그렇지. 8년이면 이반도 어른이 될 때지. 혼자 수긍하며 남은 전달사항을 모두 전달하자 다들 고생했다며 웃고 퇴근 준비를 했다.
"슬슬 우리도 퇴근할까."
비어가는 사무실에서 이반을 향해 말을 걸면 냉큼 짐을 안 챙기고 뭐하냐는 듯 아침에 챙겨줬던 목도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아침처럼 겨울 바람 한점도 나를 해치지 못하도록 단단히 내 목에 감았다. 물론 감기 쉽게 허리를 숙이라고 정강이를 가볍게 차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나는 네게 허리를 굽혀줄 수 있는데. 아프지 않은 가벼운 애정이었다. 서스름없이 정강이를 걷어차면서도 겨울 바람이 나를 괴롭게 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감아주는 손길은. 네가 내게 주는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밖에 눈이 계속 오네."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부터 내리던 눈은 그칠 생각을 않고 어두운 거리 위로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다. 네가 목도리를 단단히 감아주는 동안 창밖을 보며 속삭이면 너는 여전히 나만을 걱정하며 말했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야겠다."
"네가?"
"내가아?"
"응. 안아줄까?"
"됐거든?"
싫은데. 하고 가볍게 안아들면 놓으라고 또 투덜거린다. 자기는 이제 어린 아이가 아니라고 우겨봐야 너는 아직도 내게 어렸다. 네가 내 시간을 앞지르지 않는 이상, 내가 여전히 시간을 멈추고 홀로 걷는 시간이 쌓여가는 이상 우리의 시간은 벌어지기만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안아드는 무게가 익숙해졌다. 품에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을 안는 것은 어색하게 느껴질만큼.
"올해도 트리 꾸밀거야?"
"작년에 오너먼트들 안 버렸으니까 꾸며도 좋을 것 같은데."
"새 트리 들일거면 하얀색 어때."
"올해엔 그럼 하얀 걸로 살까?"
"작년 크리스마스에 칠면조는 생각보다 별로였어."
"음, 그랬지."
"다른 메뉴 맛있는 걸 고민해봐."
"응, 그럴게."
우리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될까. 나는 장담할 수 없었다. 나는 이례적으로 오래 살아남고 있는 시간 능력자였고, 너는 여전히 나보다 더 어린 공간 능력자였으니까. 수치적으로, 평균적으로. 그 무엇하나 장담할 수 있는 삶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올해도 무사히,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의 집으로 돌아와 문을 잠가 세상과 단절시키고 나면. 나의 고질적인 두통을 멎게 하는 작은 알약병을 제외하고는 우리도 평범한 사람들처럼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수 있었다.
"미리 캐롤도 골라둘까."
"볼 영화도 같이 골라두자. 그리고 그 날엔 밖으로 나가지 말자."
"장을 많이 봐둬야 겠네."
"맛있는 것들로."
"안 먹어본 요리로 할까."
"만들기 전에 메뉴는 알려주고 만들고."
"응, 그럴게. "
"너는 '그럴게' 밖에 할 이야기가 없어?!"
"네가 하고 싶어하는 건 다 하고 싶으니까."
어이없다는 듯이 터지는 웃음 뒤에 쿵, 박아오는 무게까지 싫지 않은. 그래. 나쁘지 않은 크리스마스다. 기대오는 너를 마주 안아주며 생각했다. 우리가 앞으로 몇 번의 크리스마스를 더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올해도 작년처럼, 또 그 이전처럼. 다시 꺼내봤을 때 행복할 수 있는 크리스마스로 만들어주겠다고. 메리크리스마스, 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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