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비녕] 겨울 산책

봄이 올 겨울의 앞에서.

To by 이선

https://youtu.be/kh2piiJJ5SA?si=qorQ5QIRtFeRUCGc

겨울이었다. 문 밖으로 한 걸음만 나가도 코끝이 얼어붙고 입술을 목도리에 파묻으면 숨결이 그대로 맺히는 차갑고 서늘한 계절. 언제 가을이었냐는 양 싸늘하게 얼어붙은 계절은 가만히 서있는 것도 간혹 힘들게 했다. 방한 기능이 좋지 않은 경찰복 안으로는 추위를 나기 위한 핫팩이 서너 개는 들어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봄의 푸르름은 어디가고 겨울의 잿빛만 가득했다. 구름을 만들듯 숨을 길게 내뱉으면 그대로 하얀 숨이 이어진다. 추운 공기가 아주 잠깐 뒷목을 쓸고 지나가면 저도 모르게 쭈뼛하고 돋는 소름에 괜히 뒷목을 문지르게 했다.

"슬슬 들어가세요, 경위님. 더 늦게 들어가시면 집에 가는 길에 눈사람이나 동태나, 뭐 그런 비슷한 거 되실겁니다."

"아. 벌써 교대시간이네. 그럴까…."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아."

"요즘 연말이라고 주취자 신고 많이 들어오니까 출동할 때 주의하고, 문제 생기면 연락하…. 아니다. 연락하지 말고."

들어가기 전에 업무를 인수인계하며 가벼운 잔소리를 뱉다가, 연말임을 다시 떠올렸다. 그래. 연말이다. 여기저기 들뜬 분위기로 신이 나고, 캐럴이 여기저기 울려퍼지고, 누구나 함께 거리를 걷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는. 나도 함께 할 사람이 있는데 연락이 오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절이라는 생각이 들어 말을 끝내기 전에 빠르게 말끝을 꺾자 인수인계를 받던 이가 죽상이 됐다.

"안나오실 거라고 못박는 겁니까? 너무하십니다."

"툭하면 불러내는 너희는 안 너무하고?"

"에에. 저희같은 귀여운 순경은 아직 경위님의 따듯한 품이 필요,"

"병아리도 졸업해야지."

말이 길어진다. 핫팩 서너 개를 경찰복에서 빼내고 패딩 주머니 안에 핫팩을 던져넣으며 말을 끊자 순경들의 입이 댓발 나왔다. 하여간, 요즘 애들은. 내가 순경일 때는 빠릿빠릿하게 네. 밖에 안 했는데. 요즘 애들은 말끝이 길다. 아. 요즘 애들이라고 하는 건 늙어간다는 소리라 그랬는데. 괜히 손끝이 굼떠졌다가 다시 패딩을 몸에 걸친다.

"차 경위님, 올 크리스마스도 예나 보러 가십니까?"

"아니. 이제 산타는 새아빠한테 외주 주려고."

"허얼."

"익숙해져야지, 예나도. 그럼 간다."

몇 년 얼굴을 맞댄 이 경사의 친밀한 물음을 딱 잘라 잘라내자 괜히 옆에서 순경 애들이 눈을 데로록 굴렸다. 그러니까 슬슬 나가줄 타이밍이다. 누군가는 내 뒷모습을 보면서 묘한 시선을 던질테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두 살이던 아이는 이제 열 살이 되었고, 새 아빠는 이제야 비로소 아이의 아빠가 되었으며, 제 있을 곳 잃었던 남자는 돌아갈 집이 생겼다. 언젠가부터 하나의 절대적인 아빠는 사라지고, 아이에게는 새로운 아빠가 생겼다. 그러므로 그제야 비로소 이재는 독립한 기분이 되었다. 못되게도. 나쁘게도.

기지개를 쭉 길게 켜면 굳었던 몸이 늘어났다가 줄어들며 약간의 열을 냈다. 그래. 돌아갈 곳이 생겼다. 이 추운 겨울에 돌아갈 따듯한 방 한켠이 생겼다. 서를 나서며 핸드폰을 들어선 먼저 메세지를 남겼다. 언제 출근하고, 언제 퇴근할 지. 네가 보기 좋도록 캘린더에 정갈한 필체로 적어넣었으면서도 꼬박꼬박 가면 간다, 오면 온다 연락하는 습관은 사라지지 않고 지문처럼 선명히 손끝에 새겨졌다. 쉐어 하우스에서 함께 살았던 2년. 언젠가 문자를 하면 마중나온다던 말에 시작된 메세지는 그 이후로 3년간 어느새 당연하게 되었다.

[ 영아, 나 이제 들어갈거야. ]

[ 평소보다 조금 더 늦었네요. 마중갈까요? ]

[ 밖에 추워. 얼어버릴지도 몰라. ]

[ 괜찮아요. ]

[ 내가 안 괜찮은데. ]

누군가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 사랑에는 기한이 정해져있다고. 우리는 5년을 꼬박 같이 살았고, 나는 아마도 그 기간의 대부분을 너를 사랑하는데에 썼다. 이전이었다면 사랑에 기한이 있다는 말에 동의했을지도 모르겠다. 너를 만나기 전 제 사랑은 꽃망울 한 번 제대로 틔워보지 못하고 흙발에 짓밟혀 엉망으로 떨어져봤던 것들이 전부였기 때문에. 상하기 쉬운 감정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은 순간이라 그렇게 자조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2년을 겨울 속에 혼자 있었던 그 마음은 죽지도 않고 봄을 기어코 기다리더니 이내 툭, 하고 꽃을 틔워내지 않았나. 그러더니 시드는 법이라곤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는 것처럼 매일을 하얗게 틔워내고 있었다. 그 진흙탕 같던 마음을, 흙발로 밟고 싶지 않다고 조심히 들어온 네가. 깨끗하게 쓸고 닦아 설원처럼 고요한 마음으로 만들었다. 네가 움직이면 그대로 눈 위로 찍힌 발자국처럼 선명하게 남도록. 몇 년을 보고도 여전히 새롭고, 몇 년을 보고도 여전히 좋은 마음 그대로.

답이 오지 않는 것을 보니 외투를 걸치고 있을 네 모습이 떠올랐다. 네 외투에도 핫팩 몇 개 뜯지 않고 넣어둘걸. 춥지 않게.

[ 겨울 감기는 저보다 형이 더 많이 걸리잖아요. ]

뒤늦게 온 답신에 할 말을 잃고 조금 웃고 만다. 너무 멀리 나가면 엇나갈테니, 우리의 집에서 경찰서로 오는 길목을 따라 느릿느릿 걸었다. 주머니 안에서 손끝이 부지런히 핫팩을 주무르고 눌렀다. 안그래도 따듯한 체온 위로 열기를 겹쳐서 차가워져있을 네 손을 데워주고 싶어서. 답을 보내면 또 답을 보내겠다고 찬 공기에 고스란히 손을 내놓을까봐 하고 싶은 말을 손끝에 꼭꼭 가둔다. 그것도 열기가 될 수 있도록.

그래도 나는 너랑 지내면서 전보다 조금 덜 앓게 됐어. 내가 아프면 네가 아플까봐. 너에게 혹여 옮기기라도 할까봐. 겨울 바람 한점이 매섭지 않게 데워주는 네 손길 하나에 다 괜찮게 됐어. 시간은 겨울바람만큼이나 빠르게 흐르는데, 그게 무상할 정도로 너만 떠올리면 여전히 따듯해져서. 어린 사람처럼 몸에 열이 들어차서. 다 괜찮아.

그래. 연말의 거리는 여기저기 들뜬 분위기가 났다. 가게들의 차창에는 알록달록한 전구가 붙어 제각기의 빛을 반짝이고, 어느 가게든 잔잔하고 신나는 캐럴 음악을 내거는. 함께 거리를 걷고 싶은 사람이 떠오르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은 연말의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저멀리 시야에 검은 사람이 오롯하게 맺히면. 수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너만 기다려왔기에 그게 너임을 알았다. 하얀 겨울 아래 가장 겨울 같은 사람. 그러나 여전히 내 봄인 사람.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네게로 향한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그렇지 않은 시간이 더 긺에도 앞으로도 더 함께 걸을 것이기에, 당연히 제 자리인 것처럼 네 곁에 서서.

여전히 그랬듯이 너를 보며 온전한 다정과, 온전한 사랑을 담아 너를 보고 웃었다.

"이재 형."

"영아, 오는 길에 안 추웠어? 금방 갈 수 있었는데."

"마중 나오는 것도 금방이니까 괜찮아요. 형도 춥진 않았어요? 날이 갑자기 추워져서, 걱정했어요."

겨울 바람은 사람을 해치지 못하는데도 언제나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시선은 나를 살핀다. 그 시선을 마주하면 그러고 싶지 않아도 마음이, 얼굴이, 몸이 먼저 네게로 온전히 향하게 되었다. 손을 내밀고, 네 손이 시려울까 제 따듯한 외투 주머니로 네 손을 끌고 들어가며 고개를 네 쪽으로 기울였다. 춥진 않았냐는 말에 따듯한 손으로 네 차가운 손을 감싸쥐고. 다 괜찮다는 마음이 전해지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럼 저쪽 카페 겨울 메뉴로 뱅쇼 나왔던데. 사들고 산책 조금만 했다가 집에 갈까?"

"형이 먹고 싶으면요. 감기에도 좋을테고."

눈처럼 고요한 목소리가 따듯하기만 해서 웃음이 입꼬리 끝에 깊게 고인다. 언제 차가웠냐는 듯이 겨울의 공기는 따듯하게 바뀐다. 코끝까지 얼어붙게 했던 공기도, 숨을 죄 차게 만들던 바람도 무엇 하나 따듯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너와 함께 걸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기분이 들게 한다. 함께 맞이하는 다섯 번째 크리스마스도 늘 그렇듯이 행복할 것이다. 너와 함께 한 겨울은 늘 춥지 않았으므로.

카테고리
#기타
추가태그
#이재비녕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