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 먹을 수 있는 것

To by 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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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수 있는 게 없다. 오늘 점심 뭐 먹을래요? 라는 간단한 물음은 어느 순간부터 선화에게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 되었다. 먹을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렸을 때 콩이나 편식하며 살 때는 몰랐는데 검사 한 번 달아보겠다고 열심히 살아온 죗값을 몸이 일찍 치뤘다. 갑작스럽게 생긴 몸의 변화는 알러지 반응을 만들었고, 알러지 때문에 선화는 못먹는 음식들이 생겼다. 처음부터 알러지가 있었으면 그냥 모르고 살았을 텐데. 좋아하던 음식들이 몸에 들어오면 몸이 스스로를 공격한다니. 처음 알러지가 생겼을 때 선화는 미칠 노릇이었다. 온갖 견과류가 들어간 파이, 빵은 고사하고 재료가 섞여들어갈까봐 보통의 베이커리에서도 쉽게 빵을 고르지 못하게 됐다. 스스로 굽는 행위는 애초에 떠올리지도 않았다. 요리에 재주가 없는데 괜히 시도 했다가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기라도 하면 그것만큼 낭패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케이크건, 베이글이건, 바깥에서 먹는 것은 모두 금지다. 견과류만 그럴까. 한국은 동해와 서해, 남해가 있는. 무려 삼면이나 바다인 나라 답게 음식에 해산물이 들어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냥 그런 해산물이라면, 그러니까 회를 직접 떠서 먹는 거라면 오케이. 안심하고 먹겠지만 갑자기 전복이라도 같이 취급하는 고급진 곳으로 음식점이 바뀌면 언제 어떻게 알러지 반응이 일어날지 모르게 되는거다. 그러니까, 세상의 식당이 시한폭탄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20대의 선화는 그렇게 살았다. 심지어 첫 부임지는 무려 제주도였다! 그냥 삼면이 바다인 대한민국에서도 온통 둘러보면 전부 바다가 보인다는 그 제주도. 귤은 정말 먹을만 했는데 그 외에는 정말로 … 힘겨운 날들의 반복이었지.

그런 삶을 살아내다 보니 안그래도 조막만했던 살이 쏙 빠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누군가는 의도를 가지고 다이어트를 한다지만 선화에게는 귀찮음과 생존 그 사이의 문제였으므로. 마트에 가서 장을 보면 그냥 재료 째로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주로 샀고. 조리된 식품을 사기보다는 그냥 원물을 먹었다. 당근스틱만 씹어먹는다거나, 오이만 먹는다거나, 과일만 먹는다거나 하는.

그러므로 한바탕의 불미스러운 사건이 선화를 폭풍처럼 쓸어내고 지나간 이후로는 선화가 원하든 원치 않든 하루를 바삐 움직이기만 해도 피곤할만큼 체력이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먹은게 없으니 어쩔 수 없지. 그래서 한강은 채식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요리를 해다가 서울에서 춘천까지도 바치고, 서울로 이사온 이후로는 행복동에서 강남까지 싸다 바쳤다. 처음에는 그것이 한강의 일이었다. 자신이 맡게된 첫 환자이자 친한 친구가 선 채로, 그리고 산 채로 말라죽어가는 꼴을 보기에는 그정도까지 매정하지 않던 한강의 친절함이었다. 선화는 초반에는 그것이 못내 불편했으나 살려고 먹었다. 냉장고에 엄마도 아니면서 온갖 반찬 종류를 바리바리 한강이 싸다가 넣어주면 도시락통에 밥이랑 그것들을 적당히 담아서 일주일을 살았다.

어느 날 부턴가는 그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 바뀌었다.

이강이와 함께 병원을 개원한 한강은 무슨 큰 숙원사업을 떠맡기는 사람처럼 반찬통들을 자기 차에 싣는게 아니라 이강이 차에 싣고 이강이를 보냈다. 이선화는 그것이 못내 이상했다. 그런데 그렇게 얼굴을 계속 마주하게 되다 보니 좋든 싫든 정이 들어버린 걸 어떡하나. 이선화는 골몰했다. 이게 좋아하는 감정인지, 일시적인 것인지, 아니면 오래 갈 것인지 구분할 것이 필요했다.

이선화는 좋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 종종 써먹기도 한 방법이었다. 한번 잡아서 살이라도 섞고나면 마음이 딱 정리가 될 것 같았다. 마침 이강이가 몸도 좋아보이고 운동도 꽤 열심히 한다니 하룻밤 같이 자는 거 나쁘지 않을지도. 하는 계산 속이 섰다. 자기도 마음이 있으니까 자꾸 내 반지를 몰래 빼가는 거겠지? 하고 이강이 몰래 넘겨짚기도 엄청 넘겨짚었다. 물론 이강이 몰래 했다. 이강이가 안다면 쬐끄만게 밝힌다고 잔소리를 무슨 한여름 소낙비처럼 내릴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선화는 이강이에게 말하지 않고 조용히 살금살금 이강이 위로 올라갔었다.

무슨. 길을 잘못 든 고양이를 낚아채듯 저를 잡아 채더니 살을 붙여오기 전까지 안 할거라고 우기는 남자는 이선화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에서 진짜로 살면서 처음봤다. 아니. 자자니까? 해도 영 아니라는 듯이 구는 것이 사람을 열받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살이 좀 붙어오면 자주겠다니 뭐 그런 말이 다 있나 싶었다. 다른 남자들은 마른 여자랑 사귀지 못해서 안달이 나있던데 얘는 감사하지는 못할 망정 체력을 키워오랜다. 어이가 없었다. 40kg가 이강이에게는 근육무게일지 몰라도 -실제로 그의 근육 무게가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이선화에게는 40kg이던 시절이 까마득했다. 고3때였나, 그때 겨우 찍었었나? 아니 그 이후로도 공부한다고 바빠서 밥 잘 안먹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40kg라니.

무엇을 먹으면서 살을 찌워야 하나 이선화는 쓸데없는 고민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밥은 지금도 꼬박꼬박 먹고 있었다. 애초에 꼬박꼬박 먹지 않았으면 냉장고를 비울 일도 없었을테고, 냉장고를 비우지 않으면 이강이도 오지 않을테니까. 그러니까 이만큼의 양보다 더 먹어야 증량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이선화는 까마득했다. 이래서 너무 차이나는 사람이랑 알고 지내는 것은 피곤하기도 했다. 그런데 또 뭐라고 하기에는 저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더 묘하게 열받았다. 그렇게 걱정하면 내가 하고싶다고 할 때 해주면 그만이지 않나. 이선화는 씩씩거리며 어두운 새벽에 냉장고를 열었다. 진짜 먹을 수 있는게 없네. 한참을 냉장고를 바라보니 냉장고에서 나오는 서늘한 공기에 코끝이 괜히 간지러웠다.

야식 추천. 같은 걸 검색해봐야 못먹을 음식들만 줄지어서 나온다. 기름이 듬뿍 들어간 걸 먹는 동영상이 동영상 사이트 알고리즘에 가득찼다. 이선화는 질린 얼굴을 했다. 고구마나 한박스 샀다. 감자도. 고구마나 감자는 괜찮겠지. 옥수수도 조금 샀다. 그리고는 입이 심심할 때마다 - 혹은 심심하지 않더라도- 입에 그것들을 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고구마 하나. 그 다음에는 감자에 케첩을 뿌려서 조금. 야금야금.

그것도 질리는 날이면 퇴근하는 한강에게 전화를 걸어다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의 레시피를 알려달라고 개지랄을 했다. 한강이 대충 지랄 그만하고 감자나 푸드 프로세서에 갈아다 부쳐먹으라고 하면 또 시키는 대로 부쳐먹다가 기름이 뜨겁다고 지랄을 했다. 한강은 그런 지랄도 지랄이 없다면서도 전화를 끊지 않았다. 그래서 전화기에 대고 한탄을 했다. 이강이는 지가 지금 나한테 한 말에 대한 의미를 알까? 하고 더럽게 한탄을 또 늘어놓으면 니가 그렇게 말에 의미를 찾으려고 하니까 안되는 거라면서 한강은 잔소리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치의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선화도 끊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이강이한테 이강이가 나쁘다고 투덜거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먹는 것이 많아지니 자연스레 체력이 전보다 더 붙긴 했다. 그런데 또 그러다가 우울증이 한없이 도지면, 갈 길을 잃으면 길을 잃은 사람처럼 하염없이 밖을 떠돌다가 살이 빠지거나 펑펑 울다가 마시고 먹었던 것들을 다 소용없게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또 속이 텅 비어버리면 어이가 없었다. 선화는 화장실에서 눈물자국이 가득한 얼굴로 거울 앞에 섰다.

그래 나 같아도 별로긴 하겠네. 걘 운동도 좋아하고, 작고 귀여운 애를 좋아하는 거니까.

이렇게까지 청승맞고 푹 물에 젖은 듯한 여자는 취향이 아닐테니까. 쓸데 없이 불러내는 귀찮은 여자도 취향이 아닐테니까. 손을 씻어 물기어린 손으로 거울 속의 제 얼굴을 괜히 크게 문질렀다. 물방울이 맺혀 얼굴이 일그러지고 나서야 거울에서 시선을 뗄 수 있었다.

정말 지긋지긋했다. 이강이는 몰랐겠지만. 물도 억지로 마시고, 억지로 먹고, 한강에게 상담 조금 받아보고, 약도 받고. 약을 먹으려니까 또 밥을 챙겨먹고. 먹고 있으니까 또 생각나서 억지로 먹고. 어느 날에는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모든 것이 귀찮아져서 침대에 누워있었고, 어느 날에는 이강이가 이번 주에는 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힘내서 뭔가를 입에 밀어 넣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잘 버티다가 주말에 이강이가 오면 괜히 얄미워서 이를 세워서 어깨를 깨문 날도 있었다. 다른 남자들은 이러면 불끈 할 때도 있었는데 이강이는 무슨 강아지가 입질하는 걸 보면서 걱정하는 개주인마냥 저를 집어다가 안아서 담요에 싸매고 영화나 봤다. 진짜 이상한 애였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그런 애가 싫지 않아서. 자기가 울면서 전화하면 뛰어오는 애가. 어디서 얼굴도 모르는 여자랑 굴러다니다가도 자기가 전화하면 제깍제깍 뛰어오는 애가 싫지 않아서. 아니, 사실 좀 짜증은 나긴 했지만. 이선화만 삽질하는 것 같아서 짜증이 나긴 했지만 싫지 않았다.

그래서 막판에는 살이 너무 안 붙길래 그냥 1200ml짜리 텀블러를 노려보다가 전부 마셨다. 물배가 가득 찼다. 금방 사라질 무게가 배 안에 냉큼 들어섰다. 선화는 그렇게 체중계 위에 쪼그리고 앉았다. 이게 진짜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고구마도 돌리기 귀찮아 생 고구마를 썰어다가 입에 넣고 우물거리면서 체중계 위에서 찍은 사진을 이강이한테 보냈다. 그리고 이선화는 가만히 문을 바라봤다. 무슨 표정으로, 어떤 각오로, 어떤 생각으로 내가 보냈는지 너는 알고 있겠지. 너는 눈치가 빠르니까. 애꿎은 고구마가 이빨 사이에서 딱딱하게 씹혔다.

이선화는 먹을 수 있는 것이 많이 없었다. 한국은 견과류도 사랑했고 해산물도 사랑했다. 그래서 이선화는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순순히 들어와봐라. 먹을 수 없는 것들 사이에서 찾아낸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열심히 먹었던 것처럼. 이강이를 맛있게 먹어버리고 나서 무슨 감정이었는지 생각해버릴테니까.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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