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빈윤조] 이상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대하여

To by 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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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rAS-QvlKq6Y?si=xHJ8cvihq5K90wjF

"그러면…. 당신이 본 것들 중에 제일 아름답고 이상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해보십시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텐데… 밤이 모자랄 거예요."


술 내음이 난다. 캐러멜 빛 액체는 색은 그토록 달디 단 꿀 색 같으면서 사람의 정신을 홀랑 빼놓은 것이 분명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이 세계에서 가장 이세계의 것에 가까운 것에게 이상한 것에 대해 말해달라는 이가 있을리가 없었다. 도가빈은 빙그레 웃었다. 서울사는 도깨비. 서울의 김서방. 아주 긴 세월을 닳지도 못하고 꼿꼿하게 서서 세월을 따라 흐르기만 한 자의 인생은 깊고도 얕고 짧고도 길며 가볍고도 무겁기 그지 없어 그 중에 하나를 꼽는 것이 어려웠다. 어차피 술기운이 틀어막은 귀 안으로 제 이야기가 얼만치 흘러들어갈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게맛살을 감싼 비늘이 바르작거리는 소리를 내며 헤집어진다. 붉고 허연 것을 집어 입으로 가지고 들어가면 어린 것이 결을 타고 찢어지며 짜고 단 맛을 남겼다. 굳은 살 하나, 모난 곳 하나 없는 손끝을 입술로 가볍게 쭉 빨아내며 눈알을 데구르 굴렸다. 무드등 불빛에 연한 갈빛의 눈이 태양처럼 반짝이다 사그라든다. 

"좋아요. 그렇지만 아름답고, 이상한 것은 지극히 내 관점이에요. 그러니까 토달지 말아요."

"얼마나 기절할만한 이야기가 많길래 그렇습니까."

"사실 기절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상관없으니까요. 답지 않게 보채는 목소리에 도가빈은, 아니. 도깨비는 짧은 웃음을 안주삼아 삼킨다. 


"그래요, 이 도깨비가 옛날 이야기를 해주지요.

…시간은 그 누구에게도 공평하게 흐르는 법입니다. 물론 길게 사는 것도 있고, 짧게 사는 것들도 있으니 누군가는 시간을 불공평한 것이다 칭할 수 있지만 사실은 하루는 모두에게 똑같은 하루인 셈입니다. 그러니 내게는 아주 많은 것들을 볼 시간과 하루들이 있었지요. 봤던 것들은 또 봐봐야 그 신선함과 충격이 덜하니. 내가 가장 처음으로 봤던 제일 아름답고 이상한 것에 대해 이야기 해봅시다. 언제적인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원래 나이를 많이 먹으면, 언제 그랬는 지는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검사님은 아직 젊으니까 모르겠지만. 나중이 되면 내가 몇 살인지, 지금이 봄인지 여름인지, 가을이었는지도 중요하지 않게 되거든요. …좋아요. 각설합시다. 

언제인지 모를 옛날에 한 마을에 예쁜 아가씨가 살았습니다. 그 아가씨가 얼마나 아름다웠냐면, 산 고개를 두어 개 넘어야 나오는 다른 마을에 사는 바지입은 것들이 아가씨 얼굴 한 번 보겠다고 짚신을 꼬고 그 거친 산을 넘어오기도 했어요. 그 산에는 멧돼지도 많았는데, 다들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라도 아가씨의 예쁜 웃음 한조각, 고운 손길 한 번 보는 것을 영광으로 삼았죠. 아가씨의 부모들은 아가씨의 그 얼굴이 자신들이 손에 넣을 수 있는 가장 큰 보물임을 일찍이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가장 귀한 것, 가장 좋은 것, 흠 없는 것들만을 골라 아가씨에게 먹였죠. 아가씨는 꽃처럼 그리 예쁘게 무럭무럭 자랐어요.

아가씨에게도 시간은 공평하게 흘렀고 어느 새 어렸던 아가씨는 자라 시집을 갈 때가 됐습니다. 그 아가씨의 아비는 자신들이 키워낸 가장 큰 보물을 아주 비싼값을 주고 팔아치웠고, 아가씨는 순응했습니다. 꽃이 피었으면 열매가 맺혀야 하는 법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아가씨의 어미는 그래도 일말의 마음이 있어 그 어머니의 어머니가, 혹은 그 어머니가 내려준 언제부터 내려왔는지 모를 옥가락지 하나를 시집을 가는 아가씨 손에 끼워주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옥가락지는 아가씨의 손가락에 꼭 맞았고 아가씨는 옥가락지를 그 어미라도 되는 양 소중히 끼었죠.

산 고개를 넘어서까지 퍼진 칭송을 따라 산을 넘고 강을 지나 아가씨는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그때는 흔한 일이었어요. 아가씨의 흑단같이 길던 머리는 그 날 둥글둥글 말려 하나로 올라갔죠. 여린 목덜미가 그 무거운 머리를 이고 버티고 섰어요. 아가씨는 이제 더이상 아가씨라 불리지 못하고 마님이라 불렸습니다. 마님은, 그래도 그다지 행복한 삶을 살진 못했어요. 망해가는 양반집에서 태어난 아가씨에게 주어진 것은 얼굴 뿐이었고, 그것은 공평한 시간에 의해 차츰 야금야금 잡아먹혔으니까요.

한 시진이 멀다하고 들락거리던 바깥양반의 걸음이 일주일, 또 한 달, 그러다 계절을 넘어갈 쯤에 한 번 들리게 되었을 때. 몇 개의 산을 넘고 몇 개의 강을 지나와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마님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어미가 남겨준 옥가락지 하나 뿐이었죠. 그래서 마님은 옥가락지 하나를 금이야, 옥이야. 문지르고 쓰다듬고 기도했죠.

아. 검사님. 그거 아십니까? 모든 기도는 아주 약간의 힘을 가지고 있고. 그 기도가 쌓여 신도 만들고, 용도 만들고, 하여간 검사님 같은 인간들이 알 바 없는 그런 존재들이 만들어진다는 것. 그래서 무당들이 섬기는 신을 위해 그리 애타게 기도를 올린다는 것. 갑자기 기도 이야기는 왜 하냐구요? 

보세요, 그 때의 아낙들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릿발이 흩날리게 했는데 외롭고 딱한 마님이 방 안에서 그리 예쁘고 아끼던 옥가락지에도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예. 어느 달빛이 가득했던 밤. 옥가락지 낀 손이 이불 밖으로 나와 달빛을 오롯하게 받았던 그 새벽에. 어느 도깨비가 태어났습니다. 도깨비는 그 때 보았던 마님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곱고 둥근 이마에 밤하늘보다 어둡고 빛이 나던 검은 머리칼. 말라붙은 하얀 입술과 동그란 코끝. 숨을 얄팍하게 쉬는 숨소리까지. 무엇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는데 왜 이 사람은 그토록 슬픈 마음을 지니고 있을까. 참 희한하다고도 생각했죠. 어린 도깨비는 외롭지 않기를 바라느냐 꿈에 대고 물었고 마님은 그러길 바란다 소원했죠. 어이쿠. 어린 도깨비는 그것을 계약삼아 마님의 소원을 이루어줍니다.

사실, 태어나게 만든 것을 어미라 생각하는 것은 모든 생물들에겐 하나의 법칙이잖아요? 마님의 기도 때문에 삶을 얻었으니 어린 도깨비에게는 그 마님이 어미와 다를 바가 없었죠. 그 바깥양반을 꼬셔 마님과 하룻밤을 자게 하고. 마님의 태중에 씨를 심어 아이가 들어앉게 해주고. 괜히 질투가 나 애가 둘인 양 도깨비는 아주 작아져 함께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인간 같은 삶이었어요. 그러니 참 아름답고 이상한 삶이었죠. 마님은 옥가락지 대하듯 도깨비를 대했고, 아들을 대했고. 사랑받았어요.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되었죠. 도깨비는 생각보다 쓸모가 많거든요. 선한 사람들에게는 행운과 재물도 줄 수 있었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줄 수도 있고. …물론 지금은 제가 그럴 수 없으니 검사님을 돕고 있잖아요? 그러니 그런 눈은 하지 마십시다. 저도 준법정신 있는 도깨비라고요? 자아… 그래서 어디까지 이야기 했죠? 아. 그래요. 

아이가 크고, 자라고, 남편이 죽고, 마님이 혼자 남게 되어도. 도깨비는 떠나지 않았어요. 마님 옆에 줄곧 함께였죠. 어쩔 수 없잖아요? 옥가락지는 마님의 것이었는걸. 도깨비는 어쩌면 마님의 평생을 함께 해주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요. 사실 그 밖의 삶 따위엔 관심이 없었죠. 하지만 어느 봄. 봄볕이 아름다웠던 봄. 마당에 심어둔 벚나무에서 하얀 꽃잎이 산들산들 내려오던 그 봄에. 마님이 손에서 옥가락지를 빼냈어요. 그리고는 도깨비 손에 가만 쥐어주었죠. 마님이 말했어요.

이제 나는 외롭지 않다.

어린 도깨비는 참 희한타 생각했죠. 이제 마님 곁에는 바깥양반도 없고, 아들도 없고, 이곳을 돌보는 손도 하나인가 둘 밖에 없었단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외롭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는 게. 그 웃음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행복해보인다는게. 저를 떠나보내는 것에 한점의 후회도 없는 것처럼 구는게. 참 이상했고, 그래서 아름다웠어요. 흐드러지는 꽃비 아래에서 마님은 말했어요.

그러니 이제 너의 삶을 살아.

그때, 마님이 저를 뭐라 불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어린 아들과 이름을 비슷하게 지어줬던 것 같은데. 이젠 그 목소리도 희미하고, 이름도 희미한데. 그 웃는 입술만큼은. 그 날의 햇살만큼은. 그 다정한 손길만큼은 기억에 남죠."


도깨비는 손을 뻗었다. 술잔을 쥔 허윤조의 손에 제 손을 겹치고 술잔을 도력으로 느슨하게 빼내 테이블 위에 올린다. 손끝에 맺힌 은근한 물기를 제 마른 손으로 훑어 닦아내며 웃는다. 그래. 그 다정한 손길만큼은 기억에 남고 말고. 그 지독한 온기는 언제고 기억 속에 남아 저를 '사람'으로 있을 수 있게 하지 않았나.

결국 그 마님은 도깨비를 낳았다는 오해로 마을 사람들에 의해 산채로 불질러졌다는 이야기는 아름답고 이상한 이야기에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이므로 제 입에 집어 삼킨다. 탄내를 맡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제 주변에 있는 것이라고는 시신 뿐이었을 때를 기억한다. 그래, 내기를 하자. 너희는 저 이를 살려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목숨을 받아가리. 도깨비가 악귀가 되어 소멸의 직전에서 돌아왔을 순간이 불같이 맺히고, 떨어지고, 삭아버린다. 안된다 말하던 목소리를 기억한다. 어이쿠, 다 낡아빠진 기억이라 잊었을 줄 알았는데. 참. 그 목소리 한번 선명하다.


"있잖아요, 허윤조 씨.

사람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을 압니까? 도깨비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언젠가 자신을 떠난 사람이 다시 되돌아올 때를. 그래서 자신을 다시 찾을 때를. 몇 번의 봄과 겨울이 지났는지 모르겠어요. 시대가 바뀌고, 왕이 바뀌고. 권세가는 몰락하고, 산은 사라지고 나라의 경계가 무너지고 다시 그어지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그리운 손이 나타나 그 도깨비에게 손을 내밀덥니다. 내가 외로워서 그래요. 하며 손 내밀던 그 손을 잡았을 때. 아, 내가 그리워하던 사람이 돌아왔구나. 하고 온 몸에 전율이 흐르던 날이  그 도깨비에게도 있었습니다."


당신을 다시 만나는 순간들은 늘 아름답고 이상하지. 더 이상 꽃잎이 나리지 않아도. 모두 다 타고 남은 재가 꽃잎인 양 나리지 않아도. 아름답고 이상하지. 제가 기함하는 피비린내 속에서라도 당신은 참으로 아름다워서 하나도 신경쓰지 않게 하지. 참 이상한 일이지 않나. 참 이상한 일이고. 오랜 기다림이 끝나는 아름다운 일이지. 


"그래서 그 인연이,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 그 다음의 이야기는 이 다음의 밤에 해주지요. 벌써 이리 늦지 않았습니까? 어린이는 자야 할 시간이에요."


자아, 주무십시다. 오늘은 밤하늘이 어둡고, 달빛은 밝으니. 아마 푹 잘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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