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빈윤조] 잊혀지고 외로운 것에 대하여
어쩌면 도깨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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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3mv69h9MPy8?si=6vCqjPdphcvsj9wR
"그래, 그 인연이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 그 다음의 이야기는 이 다음의 밤에 해주기로 했었지요."
도가빈은 오늘도 어린 아이를 달래듯 침대에 걸터 앉아 누운 이를 바라봤다. 함께 누울 생각이 없다는 양 창가를 바라보며 손만 가만가만 그 머리칼을 쓰다듬어주고 있는 손길이 퍽이나 다정했다. 어린 아이를 많이 대해본 적 없을 것만 같은 이가 어린 아이를 달래는 것이 능숙한 이처럼 손을 움직이며 잠을 살살 불러오는 것이 길게 이야기를 들려줄 마음일랑 한줌도 없어보였지만. 그래도 약조는 약조고, 도깨비는 도깨비라. 오늘도 미련하게 과거에 있던 기억 한 줌을 남 일인양 들고 앉아 주절주절 쥐고 있던 보따리를 풀어놓고 있는 것이다.
"곱고 고운 그 마님이 바깥양반에게 사랑을 받아 태중에 씨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했었지요? 그래요. 마님에게는 그 못되어먹은 도깨비 말고도 아주 고운 아들이 하나 더 있었답니다. 나기를 마님의 외로움과 도깨비의 도력으로 이끌어 태어난 아이였지만 그 누구보다 사람다운. 상냥하고 친절한 아들이었지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을 거예요. 마님은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으니. 그 옆을 꿰어차고 쌍둥아마냥 함께 울어젖힌 도깨비만 아니었어도 그 아들은 더욱 큰 사랑을 받으며 자랄 수 있었을테죠. 그래서 그 도깨비는요, 제 형님이 떠난 뒤에는 항상 미안해했어요. 자기도 어렸다며 변명도 하고 싶어했고요. 그렇지만 어쩌겠습니까. 이미 지나버린 밤들의 이야기인것을.
괜찮아요. 형은 도깨비인 아우를 미워하지 않았거든요. 자신과 달랐어도 한번도 미워했던 적이 없었죠. 아우인 도깨비는 선한 사람들에게는 행운과 재물도 줄 수 있었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줄 수도 있었다고 했었지요? 그래요. 도깨비인 아우 눈에는 제 형이 그렇게 착해보일 수가 없었죠. 오롯이 제 것이었을 것들을 반이나 잘라가는 아우를 한번도 미워하지 않고 고운 것들을 골라 아우가 좋아하는 것들을 입에 넣어주기를 즐겨하는 형님이었으니까요. 단 것을 좋아하는 아우를 위해서 글방에 다녀오는 날이면 저잣거리에서 가장 단 것을 골라 사들곤 그 바깥양반 귀에 들어가지 않게 몰래 둘이 나눠먹곤 했다니까요? 똑같이 잘랐다고는 했지만 늘 아우에게 건네던 조각이 더 컸던 것을. 머리가 더 큰 후에는 아예 제 입에는 들이지 않고 아우의 입에 몽땅 넣어주곤 배부르다 말하던 그 능청은 잊을 수가 없지요.
쌍둥이치고는 도깨비가, 갓 태어나 배운 것이 없어서. 매번 한 박자 늦게 형님을 따라자랐는데도.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어요. 언제나 형님에겐 도깨비가 아우였고. 태어날 때부터 함께한 반쪽이었죠. 도깨비에게는 형님이 반쪽이 아니었는데, 형님에게는 아우가 반쪽이 아닐 때가 없었을거예요? 아마도요. 이건 그냥 이 이야기꾼의 추측이니까요. 혹시 모르잖아요. 형님이 여전히 아우를, 한편으로는 미워하고있을지도 모르는. 예에? 아니, 뭐. 그럴 일이 조금 있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나란히 글공부를 하고, 나란히 자라고, 나란히 잠을 자던 형님과 도깨비가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면 그건 아마도 욕심이었을겝니다. 도깨비는 오로지 마님이 행복하기만을 원했고, 마님이 외롭지 않기만을 원했다면. 형님에게는 책임져야 할 가문이 있었고, 마땅히 잘 치뤄내야할 시험이 있었으니까요. 좋은 형님도 되고 싶었을거고, 좋은 아들도 되고 싶었을거고. 형님은 좋은 쪽으로 욕심이 많았거든요. 도와줄 맛이 나는 사람이었어요? 아무튼 아우는 그래서 형님을 응원해주기로 합니다. 행운이 따르길 빌며, 형님에게 가장 좋은 아내도 골라주었어요. 예에, 아우의 손으로 골랐죠. 가장 어울릴 것 같고, 아름답고, 착하고, 형님에게 가장 잘 어울릴만한 사람을.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도깨비인 아우가 영영 그 옆자리를 꿰차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형님은 사람이고, 아우는 도깨비니까.
아아, 그래서 결국에는 그 형님이 명석한 두뇌로 시험을 볼 준비를 다 마쳤을 즈음에는. 그래요, 헤어지게 되었지요. 형님은 시험에 잘 붙었고, 어사화를 쓰고 돌아왔고, 나랏님의 부름을 받아 일을 하러 타지로 가야했으니까요. 형님이 어사화를 쓰고 돌아왔던 날을 도깨비는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있답니다. 보세요. 도깨비가 태어난 커다란 마을 어귀에서부터 장터, 형님과 함께 다녔던 골목골목까지 꽃이 날렸어요. 기가 막힐 정도로 아름답게 꽃들이 활짝 피어났지요! 도깨비가 신났으니까. 날씨야 기가막히게 좋았죠. 누구의 형님이 돌아오는 날인데요? 비 구름일랑 저 멀리로 전날밤부터 부지런히 쫓아냈었죠. 그래서 아주 옅은, 비단과도 같은 구름과 말간 햇살만이 형님이 돌아오는 길을 반길 수 있게 해줬거든요.
그리고 우리 형님은, 고운 옷을 입고 누구보다 당당히 돌아왔지요.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아우를 바라보면서 헤어지는 것을 슬퍼했지요. 비 구름을 멀리멀리 엉덩이를 걷어차 산등성이 너머로 쫓아낸 것이 무색하게 형님의 눈가에는 비 구름이 잔뜩 끼어있던 것을 아우는 꽤 오래 기억했어요. 어쩔 수 없는 거라고. 형님은 대단한 사람이니까 그런거라고. 다른 사람들이 아우는 그 반도 못한다며 손가락질 하는 것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도깨비 아우는 덩실덩실 웃었어요. 기뻤거든요. 형님이 원하는 것을 이뤘으니까. 이제 행복할테니까.
형님이 돌아온 것은 기뻤고, 형님이 그토록 바라던 자랑스러움을 받는 광경은 감격스럽기까지 했지요. 형님의 손을 잡아주며 안아주며 등허리를 쓸어주며 축하를 건네는 그 잔치는 짧았고, 불행한 이는 정말로 단 하나도 없었어요. 그리하여,
형님이 다시 일을 하기 위해 떠나야 하는 날, 함께 처마 아래 앉아서 달을 보면서 형님이 그랬었거든요.
아우야, 너와 떨어지면 나는 외로워 어떡하지.
아우는 깔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어요. 외로움도 피를 타고 흐르는구나. 아니, 어쩌면 사람이라면 늘 다들 외로움을 안고 사는구나.
아이고, 형님. 내가 형님이 외로울까 주머니 가득가득 행운과, 돈줄과, 어여쁜 아가씨와, 형님이 원한다면 외롭지 않게 할 그 자식들의 복까지 모두 빌어줄터인데 뭐가 그리 걱정이실까요.
그렇게 이죽이며 가만가만 부여잡은 손을 아우도 놓아줄 생각 없이 그저 쥐고만 있었지요.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아우에게도 형님은 한 평생 등을 따르던 존재였는데. 그렇지만, 행복할테니까.
그래도 너는 없지 않느냐.
그리 말하던 목소리가 그렇게 슬퍼질 수도 있었는데 아우가 감히 모르고 그렇게 말했지요. 그렇지만요. 오늘 저 창 밖의 달처럼 달은 무심하게 지고 해는 더더욱 무심하게 뜨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아우와 형님이 서로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든 말든 저 빛나는 것들은 한줌의 관심도 없이 제 할일을 하죠. 형님은 그렇게 떠났어요. 어머니와 아우를 남기고. 아니, 어쩌면 새로운 길을 찾아 간 것일 수도 있죠.
함께 갈 걸. 그런 후회를 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으나. 도깨비에게도 지켜야 할 마님이 있었잖아요? 어쩔 수 없었죠. 세상은 때로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나는요, 무 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을 믿는 사람이에요. 아마 그 형님도 믿게 되었을 거예요. 안타깝게도 형님과 아우가 다시 재회하게 된 것은 별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거든요."
불 탄 내음이 가득했던 그 집을 기억한다. 형님과 나란히 키를 잰 흔적이 남아있던 기둥도. 어머니와 함께 앉았던 마루도. 함께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눈 그 처마 아래도. 모두 시커멓게 화마에 잡아먹히고 말아. 아무것도 남지 않아. 그 다 떨어진 문짝을 걷어차고 들어가 보이는 것은 짐승처럼 묶여 도망치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까만 재를 모두 들이키고 죽어버린 나의. 어머니. 아아, 우리 형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 나의 마님. 그래, 그랬다. 짐승은 나였는데도, 결국 죗값은 곱디 고운 우리 마님이 치르게 되는 이야기였다.
형님이 떠나고 난 뒤에, 따라할 이를 잃은 도깨비가 점차 나이먹기를 소홀히 여겨 사람들에게 의심을 산 것이 문제였다. 마냥 어리게 남은 것이 문제였다. 남을 따라할 줄 알았어야했는데. 태어난 지 몇십 년 밖에 안된, 새파랗게 어리다 표현하는 것조차 우스웠던 그 도깨비가 결국 제가 아끼던 사람들을 잡아먹고 말았다. 짐승은 나였는데도.
저잣거리에 그 마님의 둘째 아들이, 그 쌍둥이 동생이 나이를 덜 먹는다더라 하는 소문이 도는 것을 알았어야 했는데. 그 말의 뒤로 검은 것들이 뒤룩뒤룩 살을 찌우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는데. 인간을 너무 믿은 탓에, 귀를 닫아버린 도깨비보다. 무슨 일이 날까 두려워 형님이 뛰쳐오지 않게 했어야했는데. 새카맣게 탄 집의 마당에 털썩 주저앉아 귀한 옷에 잿가루를 묻히고 가만히 마님의 시신을 바라보는 도깨비를 향해 손가락질 하는 손가락들이. 흘겨보는 시선들이 쌓여서.
인간이 아니기에 피눈물이 나는 줄도 모르고. 불타 가벼워진 시신을 끌어안고 몇 번을 울다가. 그래. 기억이 흐려졌던 것 같지. 아무래도 기억을 붙잡아둔 것들이 죄 재가 되어 흩날렸으니 그 기억들도 재가 되어 흩날리는 것이 도의에 맞았던 것 같지. 그렇게 소리를 질러댔던 것 같지. 그래, 내기를 하자! 너희는 이 이를 살려내라. 그러지 않으면 너희의 목숨을 받아가겠노라! 김서방이 산신 무서운지도, 토신이 무서운지도 모르고. 서낭당이 무서운지도 모르고. 그 마을에 있는. 이 마님에게 손가락질을 한. 비루한 눈빛을 한 번씩 던진. 그래서 끝끝내 이 집을 불태운 모든 이를 불태우고 반지가 깨져버릴지도 몰랐던 그 상황에. 화마가 넘실넘실 일어나 덩실덩실 도깨비가 춤추듯 춤을 추며 사람들을 죽이려 들 때에.
아아. 그래. 형님이 돌아왔었지. 결코 소식이 없지 않았기에. 그것이 비극으로 치닫을 수 있는 소식이었기에. 사람들의 맨 앞에 서, 급하게 뛰어온 모양인지 단정하게 쓰고 다니던 갓은 어디로 날려버리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상투바람으로 거기에 서서. 도깨비불 무서운 줄 모르고 사람들을 지키는 모양새로 거기에 서서. 손을 내밀어주었지.
'가자, 가빈아. 가빈아! 가야 한다!'
'내 어디로 갈까요, 형님. 형님. 우리의 집이 모두 다 타버렸습니다. 저들이 이렇게 했습니다! 이불도, 집도, 마당도, 빗자루도, 어머니도 모두 다 타버렸습니다! 나는 이제 갈 곳이, 갈 곳이 없습니다, 형님.'
'내가 아직 있다! 그러니 어디든!'
'…….'
'어디든, 너를 지킬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나머지는, 그 다음에. 그 다음에 생각하자!'
'…형님, 나, 나는요. 다만, 그, 냥.'
'내가 알아. 안다. 가빈아.'
아아, 그 때 알았어요. 아우는. 내가 저런 얼굴이었어야 했구나. 나는 여전히 그대로인데 당신 홀로 세월을 걸어갔구나. 모두가 이상하다 손가락질할만 했지. 그래서 나의 무지로, 나의 죄로 제 기억을 모두 불사르게 두었구나. 하여간, 형님이 나타난 것은 마을 사람들에게는 더할나위 없는 호재였고. 아우에게는 불행이었지. 그래서 도깨비는, 마을 사람 하나 탓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죄임을 알아버리고 말았으니까. 사람을 잡아먹는 악귀가 되진 않았으되, 스스로를 잡아먹는 절망이 되어버렸지. 갈 길 잃은 절망이 두 눈에서 피눈물로 뚝뚝 떨어지는데도. 불길들이 요사스럽게 한낮에도 둥둥 떠있는데도. 제 동생이 피눈물을 흘린다며 다가와 귀한 도포자락으로 피눈물을 닦아주고, 눈도 감겨주고, 더 울지도 못하게. 더 화 내지도 못하게. 얌전하게 제 동생을 만들어다 안아들고 숨겨준 형님이 있었지.
나는요, 다만 그냥. 마님이 외롭지 않게 함께 해주고 싶었고. 당신이 외롭지 않게 언젠가 돌아올 집이 되어주고 싶었는데. 감히 도깨비에게 허락되지 않은 건지도 모르고. 인간인 것처럼 사랑받은 것에 익숙해져서. 결국 제가 죽인 것이 아니냐고. 그렇게 울부짖고 싶었던 때가, 나에게도.
아아. 모든 것을 다 잃고 나서야 잃었음을. 가졌었음을. 이젠 제가 망가트렸음을. 알아버렸을 때가. 이제는 돌아오지 않는구나. 외로움이 벼락처럼 꽂혀 마음 깊숙한 곳에 깊은 생채기를 내고 나서야. 나는 당신들처럼 외로움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이가 되어버렸고.
"도가빈 씨."
아. 과거를 떠올리니 얼굴이 굳었나. 아니면 눈빛이 얼었나. 제가 어떤 모양새인지 분간조차 하지 못했던 도깨비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 하나에 과거로부터 다시금 끌려나왔다. 아직도 떠올리기만 해도 코를 찌르는 탄내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분노로 일렁이던 도깨비 불은 사라지고. 좋은 향수내음과 창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보이는 것이 전부였다.
"예-에."
그래서 나사빠진 웃음을 헤쭉 지어올리면. 당신의 눈에 스치는 것은 어떤 감정인가. 안도인가, 슬픔인가, 걱정인가, 혹은 화인가? 도깨비는 아직도 형님의 표정을 읽는 방법이 가장 어렵기만 했지.
"이제 자야겠으니까 당신도 집에 돌아가요."
"그럴까요~? 뒷이야기는 찝찝해 자기 전에 들을만한 게 안되거든요. 좋은 이야기를 들어야 좋은 꿈이 오는 법이니까요."
평소라면 침대도 넓은데 쉬고 가겠다며 보챌만도 한데. 스스로만 쥐고 있는 조각이 욱신거리기 시작하면. 혹여 당신을 이미 죽어버린 당신과 겹쳐볼까 두려워 그저 가만히 숨을 쉬고 뒤로 물러나게 되기 마련이다.
"자아, 이제 착한 어른은 잠들러 갈 시간이에요. 굿나잇 키스는 필요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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