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타인데이 (2023)
밀리블
둥글납작한 초콜릿을 녹여 다른 모양으로 다시 굳혀내는 행위를 두고 '초콜릿을 만든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마는 그것도 다 옛날 이야기다. 카카오를 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게 아니냐며 유치하게 따지고 들 나이도 아니고.
어떤 모양으로 굳혀서 어떤 재료를 입히고 어떻게 포장할지 고민하고 실행하는 과정까지 포함하면 여간 귀찮고 정성스러운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어릴 적, 초콜릿을 녹일 때 중탕해야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물을 넣고 끓이다가 울퉁불퉁 덩어리진 실패작을 만들어낸 과거가 있는 밀런으로서는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노동이었다.
그 귀한 초콜릿들을 얼마나 많이 받는지, 혹은 얼마나 비싼 브랜드의 초콜릿을 받는지로 쓰잘데기 없는 내기를 하던 날이 문득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추억들도 빛바래다 못해 바스라진지 오래. 1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이벤트를 모두 챙기고 지나가기엔 밀런은 너무 나이들었다.
언제부터인가 생일마저도 깜빡 잊어버린 채 넘어가기 일쑤였고, 온 나라가 들뜨는 축제정도가 아닌 이상 늘상 같은 하루를 보냈다. 기념일에 선물을 받았다며 기뻐하는 청년을 보고있노라면 귀여울 지경이라, 훈훈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징그럽다며 한마디 들은 적도 있다.
'그런 상술, 난 이제 지겨워 죽겠어.'
분명 발렌타인데이도 그런 말 한마디로 흘려넘겼을 하루 중 하나였을텐데.
"나 이런 상술 좋아하네…."
"뭐라고요?"
"아무것도 아니야."
무심코 중얼거렸던 밀런은 키득대며 모른체했다. 초콜릿은 언제 어디서든 사먹을 수 있는 흔한 기호품인데도, 어째서 손에 들린 이 초콜릿만큼은 특별하게 느껴지는 걸까? 역시 쾰르아 최고의 미녀가 만들어서?
"이렇게 멀쩡한 선물은 정말 오랜만인걸."
"어머, 내가 언제 이상한 걸 줬다고."
메이블은 밉지않게 눈을 치켜떴다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가까이 기울였다. 체온에 섞여 피어오르는 우디 베이스의 시원한 향기는 메이블에게 익숙했다. 그가 자신이 선물한 향수를 뿌리고 나왔다는 사실은 만난 직후부터 알고 있었지만 괜히 샐긋 웃어보인 메이블은 눈짓으로 밀런의 대답을 재촉한다.
밀런은 초콜릿이 든 상자를 가볍게 들었다 내려놓았다. 단단한 초콜릿이 그리 쉽게 뭉개지지는 않겠지만, 혹시나 몰라 괜히 흔드는 일은 없었다.
"독이 안들었다며.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선물'답잖아?"
"그건 당신이 미움받을 짓을 하고 다녔으니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음~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지 않고 많지만 그냥 입아프니 안할게."
가볍게 나불거린 밀런은 다시 상자를 내려다본다. 언뜻 보면 시판중인 초콜릿이라고 해도 괜찮을 멀쩡한 모양새였다. 내가 만들면 이런 모양은 나오지 않겠지. 자신의 한계를 되돌아보며 휙, 한차례 휘파람을 분 밀런은 손을 들어 상자의 덮개를 열려고 했다.
"……."
상자 위에 손을 얹은 밀런이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지금 당장 까서 먹으려나, 맛의 감상이나 물어보려고 기다리던 메이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밀런?"
그 사이, 밀런은 어느새 새삼스러운 감정이 속에 들어찼음을 느낀다. 이걸 뭐라고 하더라. 막연한 생각을 글자로 표현해내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었다. 밀런은 덮개를 열지 않고 그 위를 손톱으로 느리게 긁으며 생각했다.
"이봐요, 밀런 크레이스 씨."
부담스럽다? 비슷하지만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차였지만, 본래 선물이라면 덥석덥석 받아대는 인간이기도 했고. 이제와서 초콜릿에 담긴 마음에 부담을 느낄만큼 양심이 넘치지도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고마움이 컸고, 그 다음으로 즐거움이, 그리고….
그렇다면. 잠시 침묵을 지키던 밀런이 느리게 입을 연다.
"나 슬슬 아픈데."
"몇 번을 불렀는데 대답을 안 한 당신 잘못이죠."
밀런의 발등을 지그시 밟고 있던 메이블이 발을 치웠다. 검은 부츠 위로 선명한 밑창 자국이 났지만 잠깐 장난스레 투덜거렸을 뿐, 금세 잊어버렸다. 밀런은 줄곧 다른 곳을 향했던 시선을 메이블에게 향했다. 메이블은 의뭉스러운 얼굴을 한 밀런을 보곤 턱짓으로 초콜릿 상자를 가리켰다.
"지금 먹으려던 거 아녔어요?"
"음. 그럴까 했는데, 그냥 집에 가져가서 먹으려고."
밀런은 초콜릿을 다시 종이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초콜릿이 망가질까, 상자의 수평을 유지한 채로 조심스럽게 종이가방을 드는 모습이 섬세해서 웃길 정도였다.
그나저나 정말로? 메이블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왜요?"
당연히 따라올 물음을 던지는 메이블에게, 밀런은 눈을 휘며 준비된 대답을 내놓는다. 물론, 그게 정답은 아니었지만.
"아까워서."
어쩐지 쑥스러워졌다고 하기엔, 좀 모양빠지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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