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로나
[영원의 환상] 밀런 크레이스 & 메이블 할로웨이
“아가씨. 시간 좀 있어요?” 혹시 어느 시대에 살다 오셨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보고 싶어지는, 로맨틱과는 거리가 먼. 센스라고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멘트에 돌아볼 ‘아가씨’가 얼마나 될는지. 누군가는 잘못 걸렸다 속 졸이며 도망갈 테고, 누군가는 별꼴이야 흘겨볼 텐데. “어머, 좀이라면 얼마나?” 자못 도도한 눈을 들어 올렸지만, 입가에
"자." 밀런은 손에 들고 있던 종이가방을 건넸다. 앞면과 뒷면을 확인해봐도 별다른 로고는 인쇄되어 있지 않다. 혹시나 깜빡해서 영수증을 빼지 않았나 찾아봐도 흔적조차 없다. 하긴, 사기를 치려고 했다면 그 정도로 어설플 리 없긴 하지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종이가방 겉면을 세 번 훑어보고, 안을 빤히 들여다본 후에야 고개를 든 메이블이 새삼스럽다는 듯한
둥글납작한 초콜릿을 녹여 다른 모양으로 다시 굳혀내는 행위를 두고 '초콜릿을 만든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마는 그것도 다 옛날 이야기다. 카카오를 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게 아니냐며 유치하게 따지고 들 나이도 아니고. 어떤 모양으로 굳혀서 어떤 재료를 입히고 어떻게 포장할지 고민하고 실행하는 과정까지 포함하면 여간 귀찮고
대기실은 땀이 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서늘한 공기가 맴돌았다. 커다란 도구가방이나 의상을 개미처럼 짊어진 스타일리스트들이 분주하게 대기실을 오락가락 지나다니는 사이, 메이크업을 받는 메이블만이 영상을 멈춰둔 것처럼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있었다. 무대가 코앞이니 바쁜 건 어쩔 수 없고, 딱히 도와줄 생각은 없었지만 만약 좋은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대도
“후회 안 한다며?” “누가 한대요?” 나를 뭐로 보고. 그렇게 투덜거리듯 바라보는 메이블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밀런은 ‘뺨이 퉁퉁 부었네’따위의 문장을 놀림조로 읊어대며 키득거렸다. 저 얄미운 콧대를 콱 깨물어버리면 조용해지려나. 메이블이 그가 자랑으로 여기는 높은 콧대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신나게 목을 울리던 밀런이 말한
"이미 차고 넘치는 죄목에 무단침입죄까지 추가하려니 종이가 모자랄 지경이란 거 알아요?" 침대에 기대어앉은 메이블이 가볍게 빈정거렸다. 언뜻 웃음기가 비친다. 열린 창문으로 몸을 접어넣은 밀런은 틀에 걸터 앉아 창문에 달린 잠금장치를 툭툭 두드렸다. "누가봐도 나 들어오라고 열어둔 거구만." "전형적인 도둑의 변명이네요." "그럼 아니야?" "바람
정수리를 뜨겁게 달구며 이글이글 타오르던 태양은 여전할지언정 순리에 따라 멀어진 행성에는 그 온기가 닿지 않는다. 영생을 부여받은 몸으로는 얼어 죽을 리 없대도 추위는 긍정적인 기분을 들게 하는 감각은 아닌지라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두꺼운 옷을 껴입어야 할 것이다. 움직임이 둔해지겠지만 어쩔 수 없지. 밀런은 좁은 계단을 일일이 오르는 대신 탄력 있
1. 고풍스러운 저택 곳곳이 그 모양새와 어울리게 향기로웠으나 오로지 이 방 하나만큼은 죽음의 냄새로 가득 차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밀런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노인의 얼굴을 바라본다. 벌써 몇 분째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자신과 닮았단 생각은 눈꼽만치도 들지 않았다. 백 번 양보하여 그가 자신의 '진짜 혈육'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푹신한
죽음이란 인간에게 동등하게 찾아오는 가장 큰 사건 중 하나- 였어야 했다. 어느 특이점에 갇혀 생을 반복하기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밀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밀런에게도 죽음은 무섭고도 특별한 일이었고, 그럼에도 명예롭고 화려하게 끝마칠 수 있다면 만족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에 황제에게 바치리라 마음먹어 기사가 되었던 것도 다 옛날 일. 어느 죽음은 그랬
"큭... 크큭... 킥..." 식탁 앞에 앉아 고스란히 엎어진 밀런이 음침한 웃음을 흘려댔다. 그 반대편에 앉아 멍하니 턱을 괴고 있던 메리는 근육으로 부푼 등이 들썩거리는 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접었다. "지금까지 나온 증상에 뭐뭐가 있었죠?" 메리의 목소리는 고열과 갈증에 시달리는 통에 쩍 갈라져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밀런은 여전히
황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레지스탕스의 습격이 시작된 후였다. 혼란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지하수로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사람들이 연기 속으로 젖은 몸을 던졌다. 몸에 달라붙는 새카만 옷을 걸치고 단검을 꽂힌 홀스터를 허벅지에 찬 밀런은 나무 위에 몸을 숨긴 채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빠르게 굴러가던 그의 시선이 낮게 침잠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몸집이 작았고 웅크린 채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자신을 풀어달라며 고래고래 고함치는 사람 옆에서 유독 조용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흐느끼고 있는 듯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그들을 무릎 꿇린 자리는 밀런이 선 곳과 멀었으며 목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가
메이블을 다시 만난다면 내일이나 되어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그때가 되어서나 맛있게 먹었느냐며 거들먹거리려고 했던 밀런은 뒤에서부터 빠르게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켁, 혀를 빼내물었다. 화풀이하는 메이블을 보던 기사들이 용감하게도 그를 불러세운 모양이다. "크 레 이 스 경!!!" 달려드는 작은 폭탄을 피해 도망칠까? 메이블이 크게 소리치며 달려오
사방으로 흩어지는 차가운 공기가 뒷목이 서늘하게 쓸어올렸다. 최근에 장난을 쳤던 사람 중 누군가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기라도 하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들 만큼 죄 많은 인생을 사는 밀런은 오늘따라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메이블의 과격한 훈련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쟤 오늘 왜 저러냐." 터덜터덜 걸어온 밀런이 질색하며 묻자, 그 자리에 서
“뭐든 물어봐도 돼~ 어제 먹은 점심이라든가, 지금 입은 속…” “그건 됐습니다.” 놀림조로 이어지는 말을 단박에 끊은 궁정사관은 실수로 적은 문장 위로 선을 직직 그었다. 아쉽다는 둥 진심인지 빈말인지 모를 한탄을 내뱉은 밀런이 느긋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제 장난을 칠 마음은 조금 가신 모양이다. 궁정사관은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