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lf or All
내가이걸진짜백업해둬야할까?지옥으로꺼져라
정수리를 뜨겁게 달구며 이글이글 타오르던 태양은 여전할지언정 순리에 따라 멀어진 행성에는 그 온기가 닿지 않는다. 영생을 부여받은 몸으로는 얼어 죽을 리 없대도 추위는 긍정적인 기분을 들게 하는 감각은 아닌지라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두꺼운 옷을 껴입어야 할 것이다. 움직임이 둔해지겠지만 어쩔 수 없지. 밀런은 좁은 계단을 일일이 오르는 대신 탄력 있는 와이어를 밟고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뺨에 닿는 바람이 제법 차다. 곧 무심한 겨울이 오려나 보다.
높은 종탑 위에서 맞는 바람은 사람들 사이를 스치며 무뎌진 것들보다 조금 더 날카롭다. 밀런은 열린 창가에 선 메이블을 제 곁으로 끌어들였다. 벽 뒤에 몸을 숨기는 건 저격수의 눈에서 벗어나기 위한 오랜 습관이었으니 여간한 적수 없는 기사에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었지만, 웬일로 제복 아닌 원피스를 차려입어 다리를 훤히 드러낸 메이블에게는 필요하리라 여긴 까닭이다. 금세 춥지 않다는 말이 돌아오긴 했어도 자기만족을 낙으로 삼는 밀런으로서는 이걸로 충분했다.
생각해보면 밀런은 메이블에게 남들보다 조금 더 너그러운 구석이 있었다. 똑같이 짓궂은 장난을 치고 못된 농담을 던지며 심기를 살살 건드리다가 타이밍 좋게 내뺀다고는 해도, 밀런에게 배려란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더 해주는 것'이었다. 이리 오라며 손짓하는 대신 직접 손을 뻗어 끌어당기는 그 사소한 행동이 특별함을 만든다면 이해할까? 뭣 모르는 사람이 "사고 다 쳐 놓고 뭐가 너그러운 건데?" 라고 물어도 통상적인 대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다른 질문을 하나 해보자.
“이젠 절반이 아니라 전부를 내게 주면 안 될까?”
이 만들어진 특별함에 사랑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가?
"...야, 메이블. 너는..."
밀런의 목소리가 늘어진다. 내려다본 연하늘빛의 머리카락은 시린 겨울 하늘과 닮았다. 날 좀 보라며 얼굴을 들어 올리고 싶은 마음을 굴뚝같았으나 오늘만큼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자신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언뜻 그 도도한 아가씨답지 않은 말을 이미 들은 적이 있다. 아마 지금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결론 아닌 결론에 도달하면 멋대로 굴 수 있을 리 없다.
밀런의 표정이 변했다. 하지만 그 일그러지는 얼굴에는 곤란함이 아닌 다른 것들이 담긴다. 그래도 보여줄 만한 건 아니지. 밀런은 손을 들어 제 입가를 더듬더듬 쓸어내렸다. 곧이어 한숨 같은 목소리가 흐른다.
"이미 안다고 말해놓고 그러냐..."
사랑이라 쓰인 이름표는 그 어디에도 붙지 않는다. 밀런 크레이스의 마음에 메이블 할로웨이는 없다. 설령 있다 한들 그 자리는 메이블이 말한 곳이 아니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 사실이 안타깝고 미안하다. 하지만 메이블을 연민하고 동정하는 건 주제넘은 역할이었다. 밀런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시선을 돌려 먼 하늘을 바라본다.
"네가 손을 잡아달라고 하면 잡아줄게. 껴안아달라고 하면 그럴 거고. 몸을 달라 하면 내가 아는 한 가장 즐거운 밤을 만들어 줄 테고, 설령 사귀어달라 해도 난 보통의 연인 행세를 해줄 수 있어. 난 내가 생각해도 괜찮은 남자니까. -하지만 이렇게 말은 해도, 이미 눈치챘을 거야."
평소처럼 너스레를 떨던 밀런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지독한 침묵 속에 바람 소리만이 매섭게 귀를 스친다.
"이건 네가 바라는 '전부'가 아니라는 걸."
메이블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요청이라도 밀런은 그 모든 것을 들어줄 수 있었다. 메이블이 원한다 해도 달콤하게 지껄이는 사랑에 합당한 무게는 없을 것이고, 밀런이 말하는 두 사람의 사귐은 결국 하나의 연극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메이블은 특별했다. 그렇기에 밀런은 거짓을 고하지 않는다. 지금 이 자리에 선 메이블이 고백으로써 바라는 대가는 몇 달 사귀고 말 진부한 연애가 아니니까.
"내가 준다던 그 반쪽은 거두지 않을게. 그냥 가지고 있어도 좋고, 다시 돌려줘도 좋고, 내팽개쳐도 좋아."
지금 당장 창밖으로 날 밀어도 빚으로 달아두지 않을게. 밀런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메이블을 내려다본 밀런은 어색한 손짓으로 허공을 휘젓다가 결국 그의 등에 살며시 얹었다. 툭툭 쓰다듬는 솜씨는 평소와 달리 조심스럽기 그지없다. 서늘해진 날씨에 따라 걸친 도톰한 코트 위로는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렇게 하면 조금 더 따뜻해질 거라 믿는 것처럼 마냥 쓸어내렸다.
종이 울렸다. 뎅뎅 시끄럽게 고막을 두드리는 소음 속에서 밀런은 속삭인다.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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