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
과거시점
"이미 차고 넘치는 죄목에 무단침입죄까지 추가하려니 종이가 모자랄 지경이란 거 알아요?"
침대에 기대어앉은 메이블이 가볍게 빈정거렸다. 언뜻 웃음기가 비친다. 열린 창문으로 몸을 접어넣은 밀런은 틀에 걸터 앉아 창문에 달린 잠금장치를 툭툭 두드렸다.
"누가봐도 나 들어오라고 열어둔 거구만."
"전형적인 도둑의 변명이네요."
"그럼 아니야?"
"바람 들어와요."
메이블은 밀런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못들은 척 작게 투덜거렸다. 어깨를 으쓱인 밀런이 온전히 방 안에 발을 들이고 창문을 닫았다. 메이블은 그제야 자신이 보고있던 수첩에서 눈을 뗐다. 정말 자신의 죄목이라도 적혀있는 건가. 밀런이 슬쩍 흘끔거렸지만 내용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밀런은 관심을 끊고 고개를 돌렸다.
메이블도 뒤늦게 수첩을 덮었다. 밀런이 수첩의 내용에 대해서 집요하게 궁금해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금세 흥미를 잃자 새삼스레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여기 와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대."
킹스가드의 임무 중 일부는 극비로 취급된다. 황제를 지켜야할 자들이 황성을 떠나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어느정도 위험을 감수해야하고, 사사건건 그들을 방해해대는 집단이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가장 귀찮은 방해꾼 중 하나가 지금 당장 눈앞에 있고.
"마침 근처에 있었거든. 그쪽 동선 얻는 것 정도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어디 쥐새끼라도 풀어둔 모양이죠."
"낮말로 들었으니 아마 새가 아닐까."
시답잖은 농담을 늘어놓으며, 밀런은 밤바람 묻은 로브를 벗어 의자에 걸쳐두곤 메이블이 앉은 침대에 다가섰다. 메이블은 그런 밀런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엇을 하려나, 가만 지켜보며 수첩을 침대 옆 협탁에 올려놓자 밀런이 킬킬 웃으며 침대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럼 굳이 여기까지 온 이유는?"
"글쎄... 심심해서?"
"심심하다고 자진납세하러 오는 사람도 드물걸."
자진납세까지는- 밀런이 대답인지 변명인지 모를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메이블이 움직였다. 철그럭, 하고. 휴식을 위한 침대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어느새 메이블의 손에 들려있었다. 메이블이 밀런의 팔목을 낚아채고, 금속으로 된 그것을 들이밀기까지는 재빨랐으나 밀런에게도 어느정도 시간이 있었다.
밀런이 몸을 틀어 바닥을 구르거나, 하다못해 메이블의 손을 강하게 쳐내기만 해도 그는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밀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모든 저항의 수단을 스스로 내려놓는다. 이윽고 밀런은 제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보곤 두 손을 모아 들어 보란 듯이 흔들었다. 짤랑이는 소리가 울렸다.
"이거 봐. 이래도 날 기다린게 아니라고?"
"당신을 상정하고 준비해온 게 아니거든요?"
"매정하긴."
"이상한 취향 들이밀지 말아요."
취향. 취향이라. 밀런의 눈동자가 도로록 굴러갔다. 딱히 싫어한다고까진 못한다만, 이런 얘기를 하면 쫒겨나려나.
밀런이 생각하는 그 짧은 시간동안 이상함을 느낀 메이블이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들었다. 밀런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싱긋 웃었다. 역시 이 말은 안하는게 낫겠군. 대신 벌어지지 않는 손목을 팽팽하게 당기며 우는 소리를 낸다.
"불편해! 이러면 놀러온 보람이 없잖아."
말꼬리를 늘이는 모양새가, 무언가 바라는게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암시하고 있었다. 되도않는 투정을 부리는 밀런을 보는 메이블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그래서-?"
메이블이 은근하게 물음을 던지자 밀런은 기다렸다는 듯 두 팔 사이에 공간을 두어 들어보였다. 그 제스처를 몰라볼 메이블이 아니었으나, 빙글빙글 웃고있는 얼굴을 보자면 마음이 자꾸 튀어나가려 했다.
모른 척 해볼까. 메이블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그의 의도대로 몸을 들이민다. 무릎걸음을 한 메이블이 밀런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자 밀런은 팔을 내려 가두었다. 얇은 허리를 감싸안은 밀런의 표정이 만족스레 차올랐다.
"이대로 잡혀있으려고요?"
"잡힌 건 네쪽이지."
"그러시겠죠."
체인저이자 레지스탕스에게 사용하기에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수갑이다. 그가 상처를 각오한다면 맨손으로도 억지로 뜯어낼 것이고, 능력을 사용한다면 자면서도 풀겠지. 잡아둘 수 없다. 목이라도 찔러 한차례 정신을 끊어내지 않는 이상.
메이블의 머릿속에 그를 해칠 수 있는 방도 몇 개가 순식간에 스쳤으나, 그 모든 가능성을 흩뜨렸다. 밀런이 메이블의 손에 순순히 붙들렸던 것처럼.
얄팍한 믿음, 어정쩡한 나태함, 오랜 권태따위가 살얼음처럼 위태롭게 그들의 시간을 이루었다.
"내가 떠나기 싫게 해보든가."
"이미 떠날 마음 만만인 주제에?"
"이걸 들키네."
밀런이 장난스레 키득거리며 메이블과 눈을 마주쳤다. 코끝이 닿을 듯- 숨소리가 짙어질 무렵, 그는 속삭인다.
"머물러서는 다음을 기약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붙잡혀 있는 건 잠깐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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