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블

우리의 기상은 한 데 모여

미션

로나OC by 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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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풍스러운 저택 곳곳이 그 모양새와 어울리게 향기로웠으나 오로지 이 방 하나만큼은 죽음의 냄새로 가득 차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밀런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노인의 얼굴을 바라본다. 벌써 몇 분째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자신과 닮았단 생각은 눈꼽만치도 들지 않았다. 백 번 양보하여 그가 자신의 '진짜 혈육'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푹신한 침대에 잡아먹힐 듯이 파묻힌 앙상한 노인은 총기를 잃어 탁해진 금색 눈동자를 굴려 밀런을 올려다보았다. 세월에 곪아버린 노인과는 달리 젊디 젊어 생기가 넘치는 얼굴이 보인다. 노인은 그 얼굴이 옛날의 자신을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 가문의 대를 이을 사람은 너뿐이다. 지금껏 내가 쌓아온 부와 명예가 모두 네 것이 될 것이야.""

"......"

밀런은 노인을 응시한다. 웃음기 하나 없이 무정한 눈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밀런은 뜬금없이 나타난 개인 사병에 둘러싸여 이 저택으로 인도당하고 이 방에 밀어넣어져 이런 개소리를 듣는 지금까지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설령 이 노인이 먼 옛날에 핏덩이였던 자신을 성당 앞에 아무렇게나 내버렸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그에 대한 원망이나 반가움, 연민조차도 느끼지 않았다.

그는 마치 나무토막같았다. 대체 어떤 사람이 말라비틀어진 나무토막을 눈 앞에 두고 감정을 가질 것인가? 당장 작품을 위한 소재에 허덕이는 미치광이 예술가라도 되지 않고서야. 밀런이 평소처럼 귀를 후비적거리며 조롱아닌 조롱을 하지 않는 것은 죽어가는 한 인간에 대한 아주 사소한 예의였을 뿐이다.

노인을 바라보고 있어도 마음은 콩밭에 가있고, 노인이 지껄이는 가문의 이름-원래 자신의 성씨가 되었을지도 모를-은 0.1초도 지나지 않아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이곳에서는 숨쉬는 시간마저 아까워 죽겠는데 여기에 대답을 해줘야 할까? 그래, 그냥 뒤돌아 떠나버리자. 그게 세상에 이로울테다.

거기까지 판단을 마친 밀런이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노인이 말한다.

"영생을 사는 네가 가주직을 잇는다면 가문은 영원하겠지."

움찔, 밀런이 멈췄다. 그를 자극하기 위해서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면 노인은 정말 탁월한 수완가라고 할 수 있겠다. 기어코 밀런 크레이스의 입을 열게 만들었으니.

밀런은 입꼬리를 비틀어올렸다.

"잘 들으세요, 영감."

마치 인사를 건네듯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노인의 귓가에 속삭인다.

"세상에 영원따위는 없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름 모를 가문의 소멸을 알리는 특보가 신문기사에 실렸으나, 밀런은 읽지 않았다. 밀런은 여전히 성당에서 자란 고아였고 부모의 이름이나 얼굴따위는 추호도 알지 못했다.

멍청하게도. 요즘 세상에 누가 핏줄에 집착하다가 모든 일을 망친담?

2.

"헉...!"

밀런은 다급하게 숨을 들이키며 벌떡 일어났다. 식은땀이 맺힌 얼굴을 닦을 새도 없이 주위를 둘러보면, 두터운 종이 위로 글을 끄적이고 있는 나나레가 보였다. 밀런은 의식을 잃기 전, 정체 모를 몽롱한 압박감이 숨통을 조여오던 것이 떠올라 손을 들어 제 목을 더듬거렸다. 온 몸에서 느껴지는 이 기묘한 감각은 설마...

"...나 뒈졌냐?"

[ 말투 한 번 고상하기도 하지. 뒈진게 아니라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거란다. ]

"미친... 그거나 그거나."

정말이지, 살면서 처음 당해 본 개죽음이었다. 물론 보통 사람에게는 '처음'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없겠지만. 밀런은 제 다리에 덮여있는 이불을 들어 얼굴을 벅벅 닦고는 침대에서 벗어나 물병을 찾았다. 물컵에 따르는 번거로운 과정을 넘기고 물병째로 들어 목구멍에 물을 들이부은 밀런은 그 한 병을 다 비우고 나서야 갈증이 가시는지 개운한 얼굴이 되었다.

"와~ 이번엔 진짜 예상도 못했다. 내가 지금 불사의 몸이라는 사실에 딱 1초! 감사해준다."

아무리 친구를 도우려다가 맞이한 죽음이라지만 이건 너무 폼이 안나잖아. 허탈한듯 우스운듯 꿍얼거리며 땀에 젖은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밀런을 흘끔 바라본 나나레는 옆에 둔 쪽지에 다시 글을 써 들어보였다.

[ 그럼 1초 뒤에는 어쩔거니? ]

"뭘 어째."

밀런은 어깨를 으쓱인다.

"하루라도 빨리 꺼져버리라고 빌거야."

3.

"저번에 나나레의 도움을 받아 도망친 건 좀 치사했어요."

디엘이 뾰로퉁한 얼굴로 말하고는 빨대를 쪽 빨았다. 두 사람 모두 공적인 업무에서 벗어나 제복을 입지 않았으므로 암묵적인 평화가 찾아온다. 서로 갑자기 이능력을 쓰거나 칼을 뽑아들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가지는 건 개인의 역량이었으나, 지금까지 그 불가침조약이 어겨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 죽게 생겼는데 가만히 앉아서 손목이라도 내밀고 있으리? 나 잡아줍쇼~ 하고?"

"그건 그렇지만요."

밀런의 작은 항의에 금세 수긍한 디엘이 한숨을 푹 내쉰다. 그때 나나레에게 당했던 것이 어지간히도 분했을까. 밀런은 킥킥 웃으며 그릇 위에 놓인 커피콩 빵을 반으로 쪼개에 디엘의 입에 꾹 밀어넣었다.

"슬슬 이 짓도 지겹다. 너도 빨리 배신자나 돼버려라."

"자꾸 저주하시네..."

"이게 왜 저주냐? 잘못된 길로 가려는 어린 양을 구해주려는 거지."

나머지 반쪽의 커피콩 빵은 밀런의 입으로 들어갔다. 입 안에 퍼지는 쌈싸름한 맛을 음미하며 몇 번 우물거리고는, 입 안이 거의 비었을 때쯤 밀런이 입을 연다.

"해가 뜨고 지고, 물은 아래로 흐르고, 지구는 돈다."

갑자기 과학교실이라도 여는 건지. 억지로 먹여진 커피콩 빵을 팍팍하게 씹던 디엘이 밀런을 쳐다본다. 밀런은 뻔뻔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세상에는 빌어먹게도 거스르면 X되는 순리가 있단 말이야. 시간이 그 중 하나야. 그래서..."

"아, 그 뒤로는 말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우리가 X된 거지."

"맙소사."

4.

"너는 안아쉬워? 가끔 영생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던데."

베리초코맛 조각케이크를 작은 포크로 쿡 찌른 밀런이 물었다. 가끔 궁금할 때가 있다. 영생이란 것은 그들이 정말로 불사의 몸을 가지기 전까지는 소설 속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로 취급되었고, 영생을 찾으려다가 엉뚱한 독을 먹고 죽은 왕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터무니 없는 것이었는데. 정작 그것을 얻은 사람들은 어떤 기분일까- 하고.

누군가는 말했다. 자신은 이 젊은 몸으로 영원히 살고 싶다고. 세상 지천에 깔린 수수께끼를 풀어 인류를 이롭게 하고 싶다며 포부를 밝히거나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여 온전한 생의 안식을 누리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면 눈 앞에 앉은 이 남자- 칼리드는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밀런이 기다리자, 잠시 고민하던 칼리드가 입을 연다.

"안 아쉽겠어요? 마음 같아선 천년만년 젊은 몸으로 아픈 곳 없이 살고싶지."

역시 얘도 다른 사람이랑 비슷한가. 그렇게 생각할 무렵, 칼리드가 그 좋아하는 케이크로부터 손을 뗐다.

"그냥... 그런 거죠. 사람이니까 드는 거부감라고 해야하나. 남들이 오른쪽으로 가면 나도 오른쪽으로 가고 싶어지는? 그런 마음. 주어진 대로 살아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수많은 것들이 그들을 스쳐지나갔다. 시간 속에 낡고 기울어 스러지는 것들 사이로 우리는 여전했다. 남들이 오른쪽으로 갈 때, 가야만 할 때, 등떠밀릴 때 모든 길이 틀어막혀 가만히 서있는 것 외에는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영생이란, 불멸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인가? 혹은 필멸을 빼앗겨 남은 공허의 형태인가. 그 답의 개수는 고민하는 사람의 수만큼 있을 터.


그리고 밀런 크레이스는 눈을 뜬다.

푹-! 무언가를 찌르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몸에서 난 것이 아니었다. 밀런은 자신의 어깨 위를 스쳐지나간 붉은 얼음 창을 보았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메이블의 얼굴이 보였다. 등 뒤에서 스러지는 망령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 그래. 나는 전장에 서있다.

"하마터면 아무에게 마지막을 줄 뻔했잖아요?"

밀런은 안개가 낀 듯 흐린 정신을 다잡으며 손바닥에 칭칭 감긴 와이어를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자 늘어져있던 와이어가 팽팽하게 조여들며 와이어 사이에 걸려있던 망령들이 순식간에 조각나 사라졌다. 밀런은 헐떡이는 숨을 삼키고 여전히 어둡기만한 눈을 끔뻑였다. 비록 평소처럼 그에게 웃어보일 순 없었으나, 애써 목소리를 쥐어 짜내 말한다.

"-그럴 순 없지. 내 꿈은 자연사거든."

길어진 손톱을 깎고.

머리카락을 다듬고.

어느 순간 생겨난 주름과 새치를 보며 세월을 가늠하고.

너희들과 똑같이 늙었노라 지나간 이들에게 고한 후에.

어스름히 기운 노을빛을 이불 삼은 채.

밀런 크레이스는 영영 죽음을 맞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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