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은 심장을 가리키고
미션
죽음이란 인간에게 동등하게 찾아오는 가장 큰 사건 중 하나- 였어야 했다. 어느 특이점에 갇혀 생을 반복하기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밀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밀런에게도 죽음은 무섭고도 특별한 일이었고, 그럼에도 명예롭고 화려하게 끝마칠 수 있다면 만족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에 황제에게 바치리라 마음먹어 기사가 되었던 것도 다 옛날 일.
어느 죽음은 그랬다.
밀런과 루 두 사람의 계약은 거미줄보다도 가는 끈이었고, 언제 끊어질지 모름과 동시에 어느 쪽이 먼저 놓아도 배신했다 억울해할 수 없는 유명무실한 것이었다. 황제의 명령을 받들기 위해.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기 위해. 무의미한 싸움이었다. 그래서 밀런은 자신의 가슴을 찌른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어느 죽음은 그랬다.
선배라는 호칭은 죄인을 부르는 이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한때의 동료가 적이 될 줄 알았다 치더라도 이토록 긴 시간동안 대립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터. 디엘은 등돌린 밀런을 원망했을까? 적어도 킹스가드 제복을 입지 않은 때만큼은 살갑게 굴어줬으니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몸을 두동강낼듯 베어온 검로는 어느 때보다도 차가웠다.
어느 죽음은 그랬다.
친구가 뭣 좀 해보자는데 거절할 성격이던가. 새로 들여온 마약의 효능을 실험해보자며 구슬리는데, 그에게 오랫동안 나나레가 구해다 준 약에 신세를 지고 있던 밀런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 나섰다. 설마 치사량 조절에 실패할 줄은 몰랐지. 어느때보다도 허무해서 지금 생각해봐도 무섭기는커녕 실없는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어느 죽음은 그랬다.
힘이라면 어딜 가도 웬만큼 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밖에서나 통하는 거고. 같은 거리의 시간을 걸어오며 실력을 갈고닦은 체인저는 예외였다. 그들과 싸우는 것은 언제나 외줄 타기와 마찬가지였으니, 속도와 교란을 주 무기로 삼은 밀런일지라도 자신의 무게를 버리고 춤추듯이 달려드는 마샤의 검을 피하기란 쉽지 않았다.
수많은 죽음이 있었다. 그러나 밀런은 적응했다. 밀런에게 반복되는 죽음은 더이상 큰 두려움을 주지 못했고, 온전한 어둠에 빠져들지 못하고 눈을 뜨는 그 순간인 이제 지겹기까지 했다. 밀런은 그것을 시간의 부작용이라 말할 것이다.
눈이 오면 발자국이 뒤덮이듯 결국 시간 속에 모든 놀라움은 묻히고 남는 것은 변하지 않은- 혹은 제자리로 돌아온 밀런 크레이스 뿐이었다. 한 때의 충격을 주었을지언정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밀런의 인생을 드라마틱하게 바꾸지는 못했다. 밀런은 어디서든 마땅히 그러고 싶었기에 망설임 없이 행동했으니까.
만약 그런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존재와 가장 인상적인 시간을 보낸 장소'를 구현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다들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아니, 정작 그 자신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밀런은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어느 봄의 정원에 놓인 하얀 테이블 앞에 앉아있었다. 하지만 이 정원을 소유한 성당은 100만 명이 살해당한 재앙 이후로 쇠락의 길을 걷다 결국 문을 닫고 말았기 때문에, 지금 꿈을 꾸고 있거나... 어쨌거나 그에 준하는 무언가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뜨거운 물에 우려낸 홍차에서는 하얀 김이 났다. 비록 종종 방문하는 후원자들을 위해 준비한 응접실의 홍차만큼 고급스럽지는 않은 값싼 찻잎이었지만 밀런을 비롯한 성당의 아이들에게는 충분했다. 하얀 테이블 앞에 앉아 예쁜 찻잔을 들고 있노라면 꼭 멋진 어른이 된 것 같았다.
"한 곳에 이렇게 잘난 얼굴이 둘이나 있다니, 다른 사람이 봤다면 아주 좋아 죽었겠군."
밀런이 찻잔을 들자 마주 앉아있던 '밀런 크레이스'도 찻잔을 들었다. 똑같은 얼굴을 한 두 사람은 잔을 입에 가져다 대고 홍차 한 모금을 머금어 향을 음미한 후 삼키기까지도 같은 속도를 냈다.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쟤 뭐하냐? 뭐, 멋있기는 하네. 내 얼굴이니까. 그런데 대체 왜 이딴 곳에 떨어진 거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면, '밀런 크레이스'가 입을 연다.
[ 영원한 삶이 욕심나지 않아? ]
"아, 뭐래."
밀런이 심드렁하게 귀를 후볐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목소리는 이어졌다.
[ 내가 하고 싶은 모든 일을 할 수 있잖아. ]
"헛소리죠. 오래 살면 사람들이 나 왕 시켜주냐? 아, 왕 되겠다는 건 아니고."
[ 내가 지키고 싶은 모든 것을 끝까지 손에 쥐고 있을 수 있을 텐데. ]
"결국 빠져나갈 건 빠져나가고 마는 거야."
[ 갑자기 평생에 걸쳐 이루고 싶은 대업이 생긴다면, 이루지 못하고 죽는 순간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
"후회하겠지. 피를 토할 만큼. 네가 나라면 알겠지만 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면 다리에 쥐가 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말이야..."
밀런은 가벼운 손짓으로 허벅지에 맨 홀스터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꿈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이런 건 또 잘 구현해놨네. 별 영양가 없는 감탄을 중얼거린 밀런이 '밀런 크레이스'를 직시했다.
"난 단 한 번도 영원 따위 바란 적 없어. 평범하게 살고 죽길 원하고, 나는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길 원해. 단 한 번의 죽음만이 삶에 집착하게 하고 모든 행동에 신중을 기하게 하며 쉽게 맛볼 수 없는 짜릿한 한순간을 선사하니까."
순간, 날 선 단검이 밀런의 손을 떠나 자신과 똑같은 얼굴에 무자비하게 처박혔다. 선혈이 튀고 실 떨어진 인형처럼 무거운 몸이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갔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밀런의 표정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세상에 둘도 없이 하나뿐인 존재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눈앞에 얼마나 많은 '밀런 크레이스'가 있어도 그들을 모두 극악무도한 사칭범이나 인형쯤으로 여길 수 있었다. 밀런은 자신이 있었다.
"그 사람은 빌어먹을 나르시시스트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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