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시작
개인미션
“뭐든 물어봐도 돼~ 어제 먹은 점심이라든가, 지금 입은 속…”
“그건 됐습니다.”
놀림조로 이어지는 말을 단박에 끊은 궁정사관은 실수로 적은 문장 위로 선을 직직 그었다. 아쉽다는 둥 진심인지 빈말인지 모를 한탄을 내뱉은 밀런이 느긋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제 장난을 칠 마음은 조금 가신 모양이다. 궁정사관은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준비되셨으면 입단시험에 무엇을 하셨는지 여쭙고자 합니다.”
궁정사관의 말을 들은 밀런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까딱까딱, 손장난을 치던 밀런의 손끝이 궁정사관의 입을 가리켰다.
“아… 그 말, 그때도 들었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준비라는 게 말이야.”
밀런의 입이 스르르 벌어졌다. 날카로운 이가 짐승의 것처럼 위험스런 빛을 내고, 새까만 목구멍으로부터 과거가 흘러나온다.
바야흐로, 밀런이 아직 기사라 불리기 전의 이야기다.
밀런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눈을 꾹 감았다가 뜨고, 자신의 앞에 선 상대를 본다. 그 또한 몸을 좌우로 돌리고 다리를 툭툭 터는 등 스트레칭을 하며 시작시각을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시험장에 선 것은 단둘뿐. 장외패를 결정짓는 경계선의 높낮이 차 아래에 시험관들이 서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주위를 둘러본 밀런이 팔을 내리자 시험관 하나가 말한다.
“준비됐으면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밀런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준비가 안 됐으면 시작 안 합니까?”
“예? 뭐… 시간이 더 필요하다면….”
“뭐,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요.”
밀런이 언제 의문을 제기했느냐는 듯 고개를 돌리자 시험관의 표정이 조금 나빠졌다. 인성 부문이 있었다면 아마 지금 몇 포인트는 깎였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밀런은 그런 것을 사소하게 챙기지 않았다. 평생 숨기지 못할 거면 처음부터 하지도 말라는 게 그의 지론이라면 지론이었다. 애초에 뭔가를 숨기는 것 자체가 그의 성미에 맞지 않기도 했다.
보여줄 거면 확실한 걸 보여줘야지. 밀런이 입을 다물고 서자, 상대도 검을 빼 들고 자세를 취했다. 몇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그럼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시험관의 말이 끝나자 상대 기사는 다리에 힘을 주어 바닥을 디뎠다.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짝다리를 짚은 밀런은 언뜻 무방비해 보였다. 하지만 킹스가드라는 높은 벽을 앞둔 사람에게 방심하지 말라는 둥 충고를 줄 이유는 없었다. 이 시험장까지 왔다면 이미 그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게 정상이다. 어디 황제를 지킨다는 게 호락호락한 일이던가?
여기까지 생각하는 데에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기사는 물 흐르듯 이어진 상념을 지워내고, 이내 다리에 모았던 힘을 폭발시킨다. 그는 밀런을 향해 쏘아져 나가 딱 죽지 않을 정도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베어낼 셈이었다. 그러니까… 온몸을 막아서는 날카로운 통증은 적어도 1초 이내에 이루어진 생각 속에는 없었다는 말이다.
“......!”
기사가 뛰어든 그 자세 그대로 허공에 멈춰 섰다. 넘어지지도 않고, 다시 몸을 제대로 세우지도 못한 채. 그가 할 수 있는 건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파르르 떠는 것이 전부였다. 밀런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어가 허리춤에 찬 단도를 빼 들어 기사의 목을 겨누었다.
“그게 첫 번째 대련 결과였지. ‘아라크네’는 준비시간이 길면 길수록 끝을 당겨오는 능력이거든.”
밀런은 시험관과 기사가 기다리는 동안, 그 시험장에 와이어를 설치했다. 기사가 조금 움직이기만 해도 그대로 함정에 걸려들도록. 와이어는 밀런이 허락하지 않은 적에게는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오래 단련하여 기감이 예민하거나 감각계열의 이능력을 지닌 기사가 아닌 이상 와이어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와이어를 제거하지 않고 유지하기만 해도 능력을 발동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각인이 빛나기 마련이었지만, 밀런의 각인은 갈비뼈에 있는데다가 혹시라도 빛이 비칠까 봐 붕대까지 둘둘 감고있었다. 그것까지 포함하자면 밀런의 준비시간은 좀 더 길게 잡을 수 있었다.
궁정사관은 자신의 갈비뼈 부근을 팡팡 두드리며 하는 밀런의 말을 꼼꼼히 적어내렷다. 그리고는 아까 들었던 것 중에 신경 쓰였던 단어를 건져낸다.
“첫 번째라면 두 번째도 있었습니까?”
“그렇지. 만약 불시에 들이닥친 위협에는 어떻게 대처할거냐고 해서 말이야.”
내가 봐줬지! 밀런이 건들거리며 말을 이었다.
시험관은 가상의 상황을 설정했다. 만약 이곳이 주변에 와이어를 걸칠만한 구조물이 없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적과 마주한 상태라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보고 싶다는 이유였다. 밀런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아무리 그들이 체인저라고는 해도 직접적인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시험을 시작하세요.”
시험관의 목소리가 울리자, 이번엔 몸의 자유가 보장된 기사가 빠르게 들이닥쳤다. 밀런은 여전히 손에 쥐고 있던 단도로 기사의 검을 막아냈다. 기사는 자신의 첫 공격이 막힐 것을 예상했는지 튕기듯이 검을 떼어내고는 검로를 바꾸어 밀런에게 파고들었다.
밀런은 자신의 손끝과 바닥에 와이어를 연결하여 옆구리를 노리는 검을 한 번 막았다. 와이어는 금세 짧은 시간 동안 몸을 피할 순간을 주었다면 충분했다. 밀런은 뒤로 공중제비를 돌아 기사와의 거리를 벌렸지만 기사는 금세 몸을 틀어 밀런을 바라보았다.
밀런은 기사에게로 단도를 던졌다. 단도는 기사가 고개를 약간 트는 것으로 귀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기사는 밀런에게 달려들려다가, 단도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을 피했다.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까, 그대로 바닥에 나가떨어져야 했을 단도가 기사의 등을 노려 날아왔다.
“이건 좀 아깝네- 라고 할 줄 알았지?”
밀런이 짓궂게 웃는다. 단도는 기사의 등을 찌르지 못했지만, 꽁지에 매달고 있던 와이어는 그대로 기사의 몸을 휘감았다. 밀런이 와이어를 잡아당기자 기사의 허리가 휘청거리면서 앞으로 조금 끌려왔다. 밀런은 그가 균형을 잃은 사이 보폭을 크게 디디며 기사의 손을 돌려차 검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단도를 쥔 손을 추켜올려,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의 목을 겨누었다.
“그렇게 두 번째 승리를 차지했단 말씀. 하… 난 역시 짱이야…”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는가 싶더니, 이야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자기자랑시간이 시작되었다. 자신의 머리를 쓸어올리며 자아도취에 빠진 밀런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던 궁정사관이 기록지에 글씨를 끼적였다.
“음. 어떻게 실력을 발휘하셨는지는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면접 때 듣기로는, 기사가 되기 전에는 인형을 만드셨다고 하는데요. 어째서 킹스가드에 들어오자고 생각하셨습니까?”
“그야 당연한 거 아냐? 이게 제국에서 제일 멋진 일이니까. 게다가 난 재능도 있고~ 물론 노력도 했지만.”
밀런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고, 그래서 어딘가 가볍게 들렸다. 정작 무슨 노력을 했는지는 제대로 늘어놓지 않는 것도 그렇고. 궁정사관은 미심쩍은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입을 연다.
“하지만… 킹스가드는 황제폐하께서 죽음을 명하면 그리 행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도 괜찮단 말입니까?”
궁정사관의 말에 밀런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 변화는 궁정사관이 한순간 움찔거렸을 만큼의 압력이 있었다. 밀런은 쩍 벌렸던 다리를 꼬고 두 손을 무릎 위에 걸쳤다. 부드럽게 지어 보이는 미소는 제법 우아했지만, 그의 눈빛은 평범하다고 말하기에 어려운 감이 있었다.
“제국의 지고한 자리에 오르신 황제폐하께서 명하신 것을 이행하는 것만큼 자랑스럽고 또한 명예로우며 훌륭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궁정사관. 부디 내 충정을 의심치 말게.”
불편한 침묵이 흘렸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궁정사관의 기록은 멈추지 않았다. 밀런은 남몰래 흐르는 궁정사관의 식은땀 한 방울을 보더니, 이내 두 손을 머리 뒤에 깍지끼어 받치고 입을 크게 벌려 웃었다. 기사라기에는 한없이 가벼운 이미지로 다시 되돌아온 것이다.
“면접관들도 의심스러웠는지 그렇게 묻더라고! 아하하!”
“그, 그래서 그렇게 대답하신 겁니까?”
“대답했지. 눈에 띄고, 멋지고, 추앙받는 직업이라 선택하긴 했지만 난 이 자리가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사명을 지녔는지 멍청하진 않아. 그럼에도 되기로 한 거야.”
밀런은 시험에 도전하기 위해 장난치는 데에만 사용하던 이능력을 다루고, 검을 잡아 휘두르고, 온몸에 피멍이 들어 터질 때까지 몸을 굴리던 때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사소한 과정에 지나지 않기에, 그는 자랑거리로 삼지 않았다. 밀런이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것은 기사단에 입단하는 그 순간부터였다.
밀런의 눈이 동경에 빠진 어린 이의 것처럼 반짝인다.
“황제의 기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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