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갑자기
“아가씨. 시간 좀 있어요?”
혹시 어느 시대에 살다 오셨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보고 싶어지는, 로맨틱과는 거리가 먼. 센스라고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멘트에 돌아볼 ‘아가씨’가 얼마나 될는지. 누군가는 잘못 걸렸다 속 졸이며 도망갈 테고, 누군가는 별꼴이야 흘겨볼 텐데.
“어머, 좀이라면 얼마나?”
자못 도도한 눈을 들어 올렸지만, 입가에 띤 장난스러운 미소를 숨기지 못한 상대의 얼굴에 세상 믿을 수 없다는 듯 지켜보던 행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건의 흐름에 따라 행인은 ‘망한 플러팅’따위의 키워드와 함께 불같은 속도로 글을 작성할 뻔했던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처음부터 저들만의 세상에 빠져있던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리를 좁혔다. 눈높이의 차이가 극심한 탓에 가까우면 되레 괴로워지는 처지다. 밀런은 지체없이 팔을 뻗어 메이블의 허리를 감싸 두르곤 자연스레 걸음을 옮겼다.
“오늘 하루 종일은 어떠신지.”
“하는 거 봐서요.”
“브런치 잘하는 카페 알아뒀는데.”
“음. 1차 합격.”
“어렵네. 몇 차까지 있어?”
“비-밀이에요.”
키득거리며 농담처럼 대화를 주고받던 밀런은 문득 눈을 가늘게 좁혔다. 날카로운 햇빛이 새삼스레 존재감을 뽐낸 탓이다. 잠시 머물러가는 짧은 여백 속에서 시선을 멀리 던져본다.
“…….”
후덥지근한 바람이 지나갈 듯 말 듯한 여름의 하늘은 어쩐지 익숙한 색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혹은 어울리지도 않는 핑계였는지. 문장은 생각할 틈도 없이 물 새듯 흘러나왔다.
“우리 여행 갈래?”
활동성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들이었지만, 특별한 일이 없다면 대체로 앉는 쪽을 선호했다. 그래야 서로를 마주하기에 수월하니까. 대화만이라면 걸으면서도 할 수 있지만, 기왕이면 역시 얼굴을 보는 편이 좋다.
“당신이 변덕스러운 거야 하루 이틀이 아니라지만. 이번엔 뭐예요?”
리코타 치즈와 토마토를 한 번에 쿡 찍어 올린 메이블이 물었다. 그때 밀런은 팬케이크 세 장을 겹쳐둔 채 메이플 시럽을 뿌리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걸 들은 것처럼 깜짝 어깨를 폈다. 큼직한 손에 들린 탓에 더 작아 보이는 시럽잔을 내려놓는다.
“음, 뭐랄까… 갑자기 그냥.”
“확실히 갑자기죠. 나쁜 제안은 아니지만.”
궁금해서? 흥얼거리듯 말꼬리를 올렸다. 그런 메이블의 눈은 마치 재미있는 사냥감을 포착한 듯한 모양새였다. 어쩌면 그럴만하다. 늘 뻔뻔하기 그지없는 밀런이 오늘따라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나쁜 짓 하려고요?”
“설마.”
“제가 말한 나쁜 짓이 뭔 줄 알고.”
“…일단 아마 아니.”
“실망이에요.”
밀런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자른 팬케이크 조각을 제 입에 욱여넣었다. 제 발 저린 도둑마냥 유난히도 휘둘리는 모습이 재미있긴 하지만, 슬슬 대답이 듣고 싶었던 메이블이 그의 숨통을 슬쩍 놓아주었다. 밀런은 입에 담긴 걸 꾹꾹 씹어 삼키고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난 말야. 아주 오랫동안 도시를 떠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거든. 시간이 멈추기 전에도.”
높은 탑. 좁은 골목. 복잡한 구조물들. 귀찮도록 발치에 차이는 방해물도 밀런에게는 무기가 된다. 오히려 없으면 곤란했다. 허공에 흩뿌려지는 거미줄이라니, 생각만 해도 우습기 짝이 없다. 바람에 볼품없이 날리는 것 외에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나의 가치가 없어지니까.”
기사 밀런 크레이스가 그랬고, 반역자 밀런 크레이스가 그랬다.
“그런데 이제 상관없잖아.”
지금은 어떤가. 이제 그에게 주어진 건 오직 자유뿐이다. 언제나 자유롭게 살아가고자 결심했던 그는, 인제 와서야 자신의 자유가 얼마나 작았는지 깨달아 가고 있었다. 언젠가 더 먼 곳에 가보고자 했던 욕망은 갑작스레 튀어나온 것치고는 꽤 오래된 소망이었다. 그래, 여기까지는 ‘갑자기’라 할 수 없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왜 꼭 오늘이었느냐, 하면.
“그때 그냥….”
목소리가 툭 끊겼다. 무심코 혀로 틀어막은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움찔 멈췄던 남자가 자신만만했던 금색 눈동자를 슬쩍 굴리고, 눈치를 보듯 메이블을 가볍게 흘겼다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몸을 움츠렸다.
“그냥. 당신 생각이 났어.”
화악, 귀 끝까지 붉게 달아오른 채로 애써 말을 잇는다.
“어디든 같이 가고 싶었어.”
그리고 남몰래 바랐다. 늘 얼어붙은 공기를 두른 채 겨울을 닮았다 일컬어지는 여인이, 사실 어떤 계절의 하늘과도 어울린다는 걸 자신만이 깨달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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