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먼 신념
미션
황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레지스탕스의 습격이 시작된 후였다. 혼란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지하수로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사람들이 연기 속으로 젖은 몸을 던졌다.
몸에 달라붙는 새카만 옷을 걸치고 단검을 꽂힌 홀스터를 허벅지에 찬 밀런은 나무 위에 몸을 숨긴 채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빠르게 굴러가던 그의 시선이 낮게 침잠한다.
'꼭...'
먼 옛날, 충성을 맹세했던 황실을 뒤로하고 도망 나오던 그날이 떠오르지 않는가. 시간이 지나 그날의 광경은 더는 선명하지 않았으나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울음과 비명만큼은 귓가에 남아 간헐적으로 과거를 속삭였다.
밀런은 욱신거리는 어깨의 통증을 무시한 채, 도망치는 레지스탕스를 뒤쫓는 한 기사의 발을 걸었다. 간신히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크게 휘청인 기사는 보이지 않는 와이어의 존재를 눈치챘다.
"이 근처에 크레이스가 있는 것 같다."
함께 하던 몇몇 기사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밀런은 그곳에 눌러앉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 마음껏 착각하라며 와이어 몇 줄을 교묘하게 설치해두고는 매끄럽게 몸을 움직여 자리를 벗어났다.
누구 좋아하라고 나 잡아봐라 놀이를 즐기고 있겠어? 지금 밀런은 몹시 바쁜 몸이었다. 죽음에서 되살아난 지 몇 시간도 채 안 됐지만, 황성으로 붙잡혀 들어간 반역자들은 죽음보다 못한 꼴을 면치 못하고 있었을 게 뻔했다.
이미 지하수로는 아수라장이 된 것 같고, 다시 한 번 침입하기에는 이미 바짝 약이 오른 경비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밀런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기둥을 타고 올라 천장에 거꾸로 매달렸다.
'지금 들어가기는 글렀군.'
진입자들이 제대로 할 일을 했기를 바라야겠지. 그가 할 수 있는 남은 일은 빠져나가는 동료의 뒤를 봐주는 것 정도였다. 이번 습격으로 레지스탕스의 전력을 회복하느냐, 아니면 또 다른 인질을 내어주느냐는 아직 미지수지만.
킹스가드의 발목을 붙들고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던 밀런은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멈춰 섰다. 80년 전 고정된 페널티로 남들보다 좁은 시야를 갖게 된 밀런은 어딘가에 몸을 숨길 때면 근처에 와이어를 쳐 사람들의 접근을 파악했다.
"......!"
팅-.
그런 와이어를 일부러 건드리는 손길이 있었다. 다가오려다 무심코 걸려든 것과 손끝으로 튕기는 감각의 차이를 모를 리 없었다. 밀런은 반사적으로 단검을 빼 들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 뭐야."
하지만 곧 맥이 쪽 빠져 팔을 늘어뜨렸다. 익숙한 얼굴이 양손을 반짝 든 채 서 있었기 때문이다. 곱슬거리는 검푸른 머리카락과 탁한 백색의 눈동자. 마냥 무뚝뚝하게만 보이는 얼굴로 뻔뻔한 말들을 잘도 내뱉는 남자였다.
"놀라셨습니까?"
"안 놀라게 생겼냐?"
다가오게 된 경위는 뻔했다. 킬리언이 능력을 사용하고 있으면 와이어에 걸려도 그 진동이 밀런에게 닿지 않았을 것이고, 밀런을 발견한 그가 먼저 이능력을 푼 것이다.
밀런이 투덜거리며 단검을 집어넣는 모습을 본 킬리언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평소대로라면 장난에 걸렸다는 사실에 즐거워하며 언제 왔느냐 질문을 던졌을 텐데. 게다가 늘 화려하게 시선을 끌며 날아다니던 그가 별 소동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움직이는 것도 낯설었다.
"이틀 새 소식이 없으셨던데."
킬리언이 밀런의 곁으로 다가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걸었다. 그러자 밀런은 와이어의 인식범위에서 킬리언을 제외하며 대답했다.
"죽어있었어."
"누구에게...?"
"당연히 폐하가 고이 기르는 개들 중 하나지."
지겨운 싸움이었다. 한때 동료라 부를 수 있었던 자들의 손에 죽는 건 흔한 일이었다. 이미 사라져버린 고통에 몸부림치고 겁에 질려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도 다 한때의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죽음을 마냥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도 없었다. 킬리언이 느꼈던 위화감, 밀런이 침묵을 자처하는 원인은 이것이었다. 밀런은 다른 레지스탕스의 활동을 지지하기 위해 적진 한복판에 발을 들였으나 명백히 몸을 사리고 있었다.
"엄호하겠습니다."
밀런이 잠시 멈춰있는 사이, 킬리언이 나서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뜬금없는 행동에 조금 놀란 밀런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얼떨결에 그의 뒤를 따르다가 비실 웃음을 흘렸다.
"하이고. 누가 누굴 지킨다고. 다 컸네, 다 컸어."
꼭 자신이 킬리언을 키워낸 것처럼 말하는 밀런이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뻐기는 것은 그의 전매특허였다.
"어깨 부상도 있으니 더 다칠 생각은 마세요."
"잔소리까지 하고... 이런 게 성장의 증거일까. 하지만 이의는 있는데. 무모하게 싸우는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며칠 전에 죽었던 것은 일부러 내어준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쳤던 것뿐인데. 킬리언은 평소에도 뒤가 없는 것처럼 무모한 방식으로 전투에 임하고는 했다. 밀런은 괘씸하다는 듯 킬리언의 무릎 뒤를 가볍게 걷어찼다.
"그나저나 어디로 가는 거야? 문은 이쪽이 아닐 텐데."
밀런은 가물가물한 기억을 떠올렸다. 황성을 아예 싹 무너뜨렸다가 다시 세운 것이 아니라면, 지금 그들이 향하는 길 끝에는 의무대가 있었다. 철수하자는 게 아니었나?
밀런이 의아해하자 킬리언이 여상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구출이 아닌 복수를 위해 움직이는 자들이 있어요."
"...하."
내 그럴 줄 알았지. 밀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의무대로 향하는 길에도 기사들이 지천으로 깔려 수색을 진행하고 있었다. 밀런이 멀찍이서 와이어를 촘촘히 깔아 붙잡으면, 기척 없이 다가간 킬리언이 그들을 기절시키는 것으로 하나하나 해치워나갔다.
황성측 인원이 아닌 레지스탕스 동료를 발견한 건 의무대 코앞에 다가갔을 즘이었다. 복수를 결심한 건 혼자만이 아니었는지 근처도 그리 한가하지만은 않았다.
그 중, 기둥 뒤에 서서 검을 든 채 핏발선 눈으로 열린 문을 바라보는 남자가 있다. 분노에 잠식당한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밀런은 저 모양새를 아주 잘 알았다. 지금은 늙어 죽었을 누군가도 자신을 보며 꼭 저런 식으로 감정을 표출하곤 했다.
'너 때문에 이 나라에 재앙이 내렸어!'
그렇게 절규했던가. 밀런은 쓴 것이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것 같아 괜히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 어떻게 하실래요? ]
킬리언이 소리 없이 입을 움직였다. 입술 모양을 읽어낸 밀런은 별 고민 없이 답한다.
[ 잡아. 저런 녀석이 죄목을 더 늘리면 골치 아프니까. ]
순간, 킬리언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언제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마치 지금까지 옆에서 함께 뛰었던 그는 허상이었던 것만 같다. 밀런은 더이상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고개를 돌리고 숨어있는 레지스탕스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숨죽이고 십몇 초를 기다리니 기어코 마음을 다졌는지 남자가 안쪽으로 달려들려고 했다. 그러자 허공을 비집고 나온 듯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킬리언이 그의 칼 든 손을 쳐 떨어뜨렸다. 밀런은 남자가 주춤한 사이, 그의 몸을 기둥과 함께 와이어로 묶어버렸다.
"이거 놔!"
밀런은 버둥대는 남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남자는 그제야 밀런과 킬리언의 얼굴을 확인했는지 울음 섞인 표정으로 그들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밀런씨, 저 좀 풀어주세요. 저 새끼들이 아녜스를 죽였다고요. 이건 정당한 복수예요...!"
"하지만 이 나라는 그 정당함을 인정하지 않아."
"상관없어요!"
"상관있어."
밀런은 딱딱하게 굳힌 얼굴로 남자를 주시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의 쾰르아는 옳지 않고 어딘가 비틀려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 돼."
남자는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끅끅 울기 시작했다.
"왜 저놈들은 되고 저희는 안되는 거죠?"
그 말을 들은 밀런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의 억울함을 이해하지 못할 건 없었다. 감히 살인을 허락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이며, 감히 그것을 저지르는 자는 또 누구인가. 밀런은 의무대 안의, '아녜스'를 죽인 킹스가드를 정당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럼에도' 죄를 지은 자들이었다.
그 때, 남자의 몸을 묶었던 와이어가 느슨해졌다. 휘청이며 풀려난 남자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연한 눈으로 밀런을 올려다보았다. 밀런은 조용히 허벅지에 찬 단검 중 하나를 꺼내어 그에게 건넸다.
"갈 거면 날 죽이고 가든지."
"안됩니다."
그것을 저지하려는 건 옆에 서 있던 킬리언이었다. 킬리언은 남자에게로 뻗은 밀런의 팔을 잡고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밀런은 뻣뻣하게 버텨냈다.
"하... 너무 진부한 대사 아니에요...? 가려거든 날 밟고 가라... 이럴 때 소설 흉내라도 내고 싶었어요?"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린 남자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한차례 질끈 깨물더니 악에 받쳐 소리쳤다.
"내가, 내가 못할 줄 알아?!"
남자는 밀런의 손에 있던 단검을 낚아채 그를 향해 휘둘렀다. 밀런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 궤적을 따랐고, 이내 빠르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단검은 밀런의 손바닥 한가운데를 관통해 멈추었다.
밀런이 정말로 찔릴 줄 몰랐던 남자가 멈칫거리며 몸을 빼려 했지만, 밀런은 찔린 그대로 저릿한 통증을 무시하며 손을 움켜쥐었다. 식은땀이 배어 나와 맺히고 새빨간 핏물이 팔뚝을 타고 흘러내렸으나 밀런은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가 죽은 사람이 복수를 원할 리 없다고는 안 하겠는데... 네가 신세를 망치길 원한다고도 못하겠다."
그들의 입장은 좋지 않았다. 가장 나쁘게 말하자면, 그들은 온 나라의 원망을 사는 존재들이었으니까. 단 하나의 빌미로도 수많은 구설에 오르고 발붙일 곳 없이 쫓기는 삶이었다.
죄인의 신분이란 그토록 불합리했다. 만약 이 남자가 킹스가드였다면 살인을 방관해서라도 그를 달랬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지금 당장 가장 고통스러운 것을 꼽으라 한다면 눈 앞에서 갈피를 잃은 남자의 표정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
- 성인
無題
백청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