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1차 BL
브루넷 헤어에 꽤나 미남인 젊은 남자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곧 에바데일의 지도를 배경에 띄우며 힘찬 목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에바데일! EMN 기상 캐스터 마크 로빈슨입니다.]
[다소 쌀쌀한 아침입니다. 가벼운 안개로 깔려있고, 기온은 영하 5도까지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런 추위는 오늘 하루만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로빈슨이 손가락으로 화면을 터치하자 오른쪽 상단에 일주일 날씨 스케줄이 떠올랐다. 새빨간 배경에 눈보라가 치는 이모지, 그 밑엔 '경고'라고 적혀있었다. 캐스터는 전과는 다르게 조금 진지한 얼굴로 이어 붙였다.
[국립 기상청에 따르면 에바데일은 앞으로 일주일 동안 혹독한 눈보라에 시달릴 예정입니다. 이미 어젯밤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으며 오늘은 더욱 많은 눈이 내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눈의 양은 최대 70cm에 달할 수 있으며, 강풍과 함께 교통 마비와 단전 등의 피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지방 정부는 주민들에게 불필요한 외출을 자제하고 안전을 위해 집 안에 머무를 것을 권고하고, 도로 상황이 악화될 수 있으므로 운전을 삼가도록 당부하고 있습니다. 만약 집 안에 머무르는 것이 어려울 경우 시청, 에바데일 고등학교 체육관, 그리고 에바데일 제일교회 등 지정된 대피 장소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비상 상황 발생 시에는 주저말고 911에 전화하시기 바랍니다.]
[에바데일 모닝 뉴스는 이번 눈보라 상황에 대해 최신 정보를 주기적으로 전달하여 시민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안전하고 건강하게 지내시길. EMN 기상 캐스터 마크 로빈슨이었습니다.]
뉴스는 다시 스튜디오로 전환되었다. 백색소음 같은 앵커의 목소리를 들으며 헤임은 와삭와삭 쿠키를 갉아먹었다. 오스카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풀썩 기대며 앓는 소리를 냈다.
"으으... 눈보라가 제일 싫은데."
창 밖엔 잠시 눈이 그친 것인지 커다란 제설차가 눈을 밀어내고 있었다. 오스카는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한번 털고 핸드폰을 들었다. 오스카는 중얼거리며 손가락으로 빠르게 타자를 치며 텅 빈 화면을 채워나갔다.
"아... 지금 뭐가 떨어졌더라... 시리얼, 우유...."
헤임은 마지막 쿠키 조각을 입에 밀어 넣고 손을 탈탈 털었다. 잠깐의 달콤함으로 머리가 조금 굴러가는 것 같았다. 무거운 팔을 소파 등받이에 걸친 헤임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생각을 해야 해. 불청객의 방해에 잠시 미뤄진 얘기들이 머릿속에서 카드 뉴스처럼 쏟아졌다. 그을린 가죽 향, 서점, 제 0의 서, 바닐라 라떼..아니 이거 말고. 라떼 폐기. 위장, 인센스, 주문......
'전형적인 컬트로군.'
이런 집단의 목적은 뻔했다. 신의 대리인 행세를 하는 주둥이만 현란한 인간과 그 인간을 맹목적으로 믿는 이들. 이들은 악마를 추앙하기도, 혹은 어떤 무용한 가치를, 정말 질이 나쁘다면 약한 자를 착취하며 추앙하기도 했다. 악마의 입장에선 그저 10000mAh 보조배터리 비슷한 것이었지만 헤임은 컬트 집단을 꽤 꺼렸다. 답은 간단했다. 또라이니까. 지옥의 존재들보다 더 음험하고 끔찍한 욕망을 품은 필멸자들은 그에게 불쾌한 골짜기나 다름 없었다. 악마가 괜히 악마가 아니다. 악마란 타고나길 악에서 태어난 생명들이다. 그들의 땅은 불경함과 어둠이 가득하며 이루는 신체 요소 또한 악덕으로 가득 차 있다. 인간과는 다르게.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그저 사회 관념에 따라 최소한의 선에 맞춰 살아간다. 그렇기에 인간이 악마보다 더 커다란 악의를 가진다는 것은...헤임에겐 영 꺼림직했다. 건방지기도 했고.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위에 열심히 설명한 것처럼 헤임은 컬트를 꺼렸기에 상대적으로 정보도 없었다. 그런 헤임의 눈에도 이건 전형적인 컬트 같았다. 그을린 가죽 향이 나는 나무라면 역시 퍼거우드 일 것이다. 퍼거우드 향은 누군가를 홀려 꾀어내는데 효과가 좋았으니까. 그외... 술법에 대한 여러 생각들이 오가지만 역시 조금 더 자료가 필요하다. 어느 방향으로 생각하든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된다.
왜?
왜 하필 오스카일까?
집단 혹은 개인인 사이코가 오스카를 노린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스카는 제물 특유의 가둬 키워진 돼지 같은 달큰한 냄새도 나지 않았고, 흔히 제물들에게 걸어두는 보호 마법 같은 것도 없었다. 악마를 소환하는 것이 까다로운 만큼 제물에겐 제약이 많았다. 제물이 먹는 음식이 조금 달라졌다고 제물을 받지 않는 까탈스러운 악마들도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발람이 교육 받으라고 할 때 받을걸....'
하필 모르는 분야를 탐구해야 할 일이 생기다니! 헤임은 지옥으로 돌아가면 곧장 도서관으로 뛰어가 2주 동안 처박혀있을 것을 스스로 다짐했다. 물론 그것 또한 소멸하지 않고 돌아가야 가능한 얘기겠지만. 생각이 어젯밤까지 이어지자 헤임의 턱에 힘이 꽉 들어갔다. 아무리 헤임이 정말, 정말, 정말 남은 마력이 까마귀의 눈물만큼이었다고 하더라도 인간을 상대로 무승부가 난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헤임은 서늘한 두 손으로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리며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냉정해져야 했다.
'인간이 내 술법을 눈치챘다면 어설픈 놈은 아니었을 것이다. 적어도 코에 하얀 가루를 묻힌 채 하루종일 훌쩍이며 허접한 주문을 읊는 10대 무리는 아냐.'
'그런 놈이 왜 오스카를 노리지?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하지만 헤임은 생각을 지우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소멸 전에 술사를 죽이는 것이다. 지금은 호기심을 죽여야 한다. 오스카를 노리는 이유는 헤임에겐 필요 없다. 헤임은 그저 저 멍청한 놈을 미끼로 술사가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기다리면 된다. 헤임은 커다란 눈동자를 왼쪽으로 굴려 겉만 번지르르한 미끼를 바라봤다. 오스카는 어느새 머리에 후드를 뒤집어쓴 채 다운 재킷에 팔을 꿰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아, 식료품 사러 나갈 건데, 같이 나가실래요?"
"식료품? 응, 구경하러 갈래."
"아, 그런데...."
오스카는 순간 이 동네가 얼마나 작은 마을인지 망각했다. 소도시의 단점. 서로를 전부 알고 있는 마을에서 새로운 사람이 등장한다? 심심한 사자들이 가득한 굴에 화려한 분장을 한 피에로가 육즙 많은 배를 흔들며 들어가는 꼴이다. 게다가 헤임을 보라. 월요일 오전 8시 뉴욕의 성난 직장인 틈에 세워놓아도 모두 한 번쯤은 돌아볼 저 빛나는 얼굴을! 오스카는 고민에 빠졌다. 헤임을 두고 나가기엔... 또 누군가 찾아올까 걱정되었다. 저 성격에 다른 사람하고 마주쳤다가 싸움이라도 붙으면....슬래셔 영화라도 찍을까 두렵다. 저 작고 마른 남자는 한손으로 오스카의 커다란 몸을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난 아기강아지처럼 다루지 않던가. 오스카는 한숨을 푹 쉬고 헤임을 바라봤다. 여전히 인간 같지 않은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운 얼굴. 그는 한숨을 쉬며 팔짱을 꼈다.
"여기서 맨얼굴로 다니면... 안될 거예요. 네. 가릴 걸 좀 찾아봐야겠어요. 잠깐 제 방으로 가요"
헤임은 오스카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이를 악물고 몸을 움직이다 보니 중력에도 점차 적응이 되었다. 헤임은 발소리를 내지 않으며 오스카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 벽장 문을 열자 온통 우중충한 옷들만 가득했다. 블랙, 차콜, 네이비, 그레이, 또 블랙. 그나마 운동화 몇 개가 이 옷장의 색깔 다양성을 책임지고 있었다. 오스카는 옷들을 넘기며 검고 푹신한 목도리, 검은 스포츠 브랜드 로고가 박음질 된 하얀 모자, 가슴에 커다란 E가 박힌 네이비 바시티 재킷,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밀라가 물려준 CK 빈티지 선글라스를 손에 쥔 채 벽장을 닫았다.
"저기... 이걸로 어떻게 가리면 될 것 같아요."
"허."
헤임의 눈꼬리가 더 매서워졌다. 논리적으로 따졌을 땐 이게 맞다. 당연히 얼굴을 가리고 행동에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 하지만... 하지만! 어쩐지 패배감이 너무 깊었다. 마치 이름 모를 술사에게 쫀 것처럼 보이지 않은가. 한껏 불퉁한 표정의 헤임은 커다란 눈으로 오스카와 그의 손을 번갈아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후, 헤임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헤임은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커다란 목도리로 머리 전체와 코, 입, 목을 칭칭 감았다. 그리고 선글라스까지 낀 헤임의 얼굴은 완벽하게 가려진 상태였다. 손을 덮는 오스카의 커다란 바시티 재킷까지 입자 헤임의 피부는 아주 극소수의 부분을 제외하곤 노출 되지 않았다. 분명 저를 노려보고 있을 헤임을 애써 모른 척하며 오스카는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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