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MNT

[RoTTMNT/마이키+라프+배리 씨] 닥터 필링스의 미제상담

- 투비로그에 23.04.17.에 올렸던 글을 베리->배리로 고쳐서 올립니다(아니 그야 그 배리라는 말이 바론에서 딴 모양이란 걸 나중에야 알았지 뭐예요)

* 시점은 시즌2 피날레 이후, 더 무비 시작 전을 가정했습니다. 따라서, 시즌2 피날레의 스포일러가 포함됩니다!!

* 시즌2 미시청 시, 이해할 수 없는 조합이 나옵니다!

* 시즌1 버그 버스터즈(우즈키토 박멸작전)의 내용이 일부 나옵니다만, 스포일러까진 아닙니다.

* 그 외, 공식에서 보지 못한 것 같은 설정은 전부 개인적인 팬피셜임을 밝힙니다.

* 라파엘에게서 때때로 읽어내는 맏이의 무언가에 대한 오타쿠필리버스터인데, 아래 노트에 잇는 것으로합니다.


한때는 스플린터도 드랙섬도 죽어버리는 줄만 알았던 슈레더와의 싸움은 결국 모두가 함께였기에 이겨냈다. 비록 그 과정에서 하마토 카라이―그램그램은 돌아가셨지만(스플린터가 그램그램은 승천하셨다고 했는데, 형제 모두는 그 단어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분의 의지와 애정은 우리에게 남아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었다.

하마토 가는 그 이후 나름의 변화를 거쳤다. 형제들은 십몇 년 동안 몰랐던 패밀리 네임을 알았고(동양은 성씨가 이름 앞에 온다고 해서, 그래서 우리는 하마토 어찌고냐 아니면 이름 다음이 하마토냐로 쓸데없는 토론이 벌어졌다), 리더가 레오나르도로 바뀌었으며, 배리 드랙섬은 확고하게 매드독의 대디로 취급됐다. 마이키의 가족이 온전히 모두의 가족이 된 거다. 마이키를 제외한 이들이 그를 부르는 방법은 대체로 이전과 똑같았지만, 드랙섬을 가장 먼저 받아들였던 막내가 그를 대디라고 불렀기 때문에 나머지 형제들은 마구 섞어 쓰던 팝스와 대디를 자연스럽게 구분 짓기 시작했다. 덕택에 스플린터가 대디라고 불리는 횟수는 현격히 영에 수렴했고, 그 건으로 둘이서 싸웠다곤 하는데 결과는 모른다. 여하튼 팝스와 대디가 투닥이는 모양새를 보자면, 저희의 레드와 블루가 싸울 때와 별반 다름없었으므로 사이가 좋은가보다 하며 넘어갈 뿐이다.

그리고 이제, 더는 목숨을 걸 만한 일이 없는 이 평화로운 때가 되어서야 닥터 필링스의 오랜 미제를 해결할 여유와 자원이 생겼다.

마이키는 스마트폰을 열어서, 도니에게 부탁해 잘 잠가놓았던 다이어리 어플을 열고 비밀번호를 입력한다. 막내는 그러면서 가볍게 킥킥 웃었다. 이걸 만들어 달라고 했던 날이 생각나서다.

남에게 해킹당하지 않는 다이어리 어플을 만들어달라는 저의 부탁을 받았던 과학자이자 발명가인 형은 이것이 닥터 필링스의 상담 일지가 되리란 걸 알았다. 가장 내밀한 약점과 취약한 것에 대한 기록. 퍼플의 눈이 약간 위험하게 빛난다. 미켈란젤로는 통제광이고 기록광인 그를 알기에 말을 덧붙였다.

“이건 절대로 보지 말아줘. 그렇게 해줄 거지?”

뭐든 기록하고 저장해야 하며, 숨겨지고 감춰진 건 모조리 제 앞에서 해체되어야 한다고 믿는 도나텔로는 오만 우거지상을 쓰면서도 선선히 그의 본능에 위배되는 부탁을 따랐다. 닷새쯤 걸려 만든 어플을 깔아주면서 여기엔 백도어도 없고 패킷 탈취하는 모듈이나 관리자 슈퍼 코드도 심어놓지 않았다고 말했다. 마이키는 그 말을 믿는다고 했고, 도니는 목 안으로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연기력이라곤 전혀 없는 형에게선 그 어떤 징후도 찾을 수 없었지만, 혹 도나텔로가 거짓말을 했더라도, 저는 계속 믿고 있을 셈이었다. 그는 스스로 냉담하다고 표현하지만, 글쎄, 닥터 필링스의 관찰에 의하면 도나텔로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정하고 신뢰에는 신뢰로 응답하고 싶어 한다. 만약 그가 이 어플에 뭔가 손을 써놨다고 해도, 그날 밤 다시 고쳤을 거다.

도니의 기술력으로 잠가둔 어플이니만큼 가족들은 닥터 필링스와의 상담일지가 얼마나 안전하게 그 안에서 잠들어 있는지 알고, 또 믿는다. 마이키는 스크롤을 쭉 내려 미해결 목록에 딱 하나 남아있는 항목을 누른다.

라프, 라파엘. 우리 형제의 맏이.

겨우 일 년 남짓 사이에 저희 형제 모두는 나름대로 바뀌었다. 성장과 성숙. 미켈란젤로는 그 두 단어의 섬세한 차이를 알았고, 저희들의 그것은 어딘가에 웃자람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일 년 사이에 제일 많이 바뀐 사람을 고르라면 그건 단연코 라파엘이었으니까.

맨홀 아래 지하도에서 저희끼리 치고받고 몸싸움하며 놀던 때에서 거의 변하지 않았던 시절, 라파엘은 그 덩치만큼 격정적이고, 쉽게 충동질 당하며, 앞뒤 안 가리고 몸부터 뛰어들었다. 뭐, 우리 나머지 형제들이라고 안 그랬다는 건 아니고. 여하튼 깃발을 들고 돌격을 외치는 건 언제나 맏형이었다는 뜻이다. 그게 논리적으로 맞던 틀렸던, 도나텔로도 그런 것에 말로 태클을 걸었을지언정 같이 뛰어드는 쪽이었다.

물론 이 사실은 닥터 필링스의 상담일지에 한 줄의 고백으로 기록되어있으며, 내담자와의 비밀 유지조항에 따라 그 어떤 가족에게도 공개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도니는 결코 그걸 털어놓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 바로 그 점이 문제다. 감정적 문제에 취약하며 저희 중 가장 많은 단어를 알면서도 스스로 느낀 감정의 분류와 정리에 둔한 도나텔로조차 닥터 필링스의 내담 요청은 기꺼이는 아니어도 받아들이고, 또 속내를 털어놓는데, 어느 날부터 라파엘이 그것을 관뒀다. 그 누구보다도 닥터 필링스의 내담을 기꺼이 받아주던 맏이가.

도나텔로의 어플리케이션은 그의 성격이 반영되듯 통계를 자동으로 내주는 기능이 붙어있는데, 그게 문제 확인의 시작이었다. 어느 날을 기점으로 내담 기록 횟수가 곤두박질친다. 정확히는, 감정적인 조언은 구하지만, 털어놓지는 않는다. 딱 한 부분을. 그들의 형제가 때때로 장난스럽게 교활하다고까지 칭하는 커뮤니케이션 스킬로도 라파엘의 꽉 다문 입은 열리지 않았고, 그 단단한 침묵 앞에서 마이키는 약간의 당혹스러움과 자신의 무력감을 느꼈다. 맏형은 저에게 비밀을 만드나? 하지만 마이키는 누구든 가장 내밀한 속내가 있다는 걸 알고, 저는 비밀 보관함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말하지 않을 수는 있다. 내담은 취조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라파엘 본인을 공격하는 원인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나.

라파엘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자신에게 주먹질을 할 때가 생겼다. 마음-속-라프와의 말다툼 끝에 그리 되었다고 했다. 한창 맏이다워지면서 신경줄이 타들어 가던 큰형을 알았으니, 미들즈는 그냥 조금 놀라고서도 맏이의 주먹은 역시 너나우리를 가리지 않고 공평하다며 가벼운 우스개처럼 넘겼다. 실제로도 화가 난 맏형에게 얻어맞은 전적이 있기에 그랬을 거다.

하나 더 눈에 띄는 건, 라파엘의 식사량이 줄었다는 점이다. 매드독의 아지트에 있는 전기며 수도(심지어 와이파이도!)는 전부 도나텔로가 끌고 와 꾸려둔 것이고, 당연히 숫자에 민감한 사람은 그 하나뿐이라서, 식재료를 포함한 웬만한 소비재 재고관리 역시 그의 몫이었다.

“엥? 뭐야, 아직 여유 있네.”

평소 식재 소비패턴을 아는지라 냉장고가 비었나 확인하러 왔던 도나텔로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마이키가 들었고, 그의 기록(가족들은 이제 그들의 차남이 별별 데이터를 꺼내도 놀라지 않는다, 아마도)과 맞추어 보았을 때, 라프의 식사량이 여느 때의 2/3 정도라는 걸 파악했다. 도나텔로는 그냥 맏형의 성장기가 어느 정도 끝물에 접어들었겠거니, 라면서 성장기 청소년과 성인의 기초대사량 차이에 관해서 주절주절 읊었지만 미켈란젤로의 생각은 달랐다.

도나텔로는 날카로운 관찰안과 인과관계를 파악할 역량이 있지만 타인의 감정을 파악하는 데에는 제일 서투르고, 레오나르도 역시 관찰안으론 형제 중 손에 꼽으며 다른 사람이 무슨 기분을 느끼는지 읽을 줄은 알지만 그걸 인과관계로 엮는 힘이 부족하다. 저들에게 미치지 못하나 그 셋을 균형 있게 가지고 있는 미켈란젤로―닥터 필링스가 보기에 이 모든 것은 라파엘의 마음에 어딘가 상처가 났다는 사이렌이었다. 형제들의 마음의 안녕을 기원하는 그로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해 왔었고, 이것이 막내 미켈란젤로의 한계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썩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하마토 인법을 완전히 해방했던 때를 떠올린다. 잔뜩 부푼 풍선이 터지듯, 그가 울며 비명을 지르던 순간들. 왜 난 이걸 못하는 거야. 내가 너흴 실망하게 하고 있어. 공포와 두려움. 실제로도 작게든 크게든 우리 동생들은 맏이에게 의존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서,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들은 라프가 이런 식으로 우는 것을 처음 보았으니까. 그램그램이 저희와 함께해서 정말 다행이었다고, 모든 것이 끝난 뒤 마이키는 생각했다. 에이프릴을 통해서 흘러나온 카라이의 말을 들은 라프는, 정말 근 몇 개월 중 가장 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다음에 이어진, 보통은 레오의 전매특허인, 난데없이-일을-터뜨리기를 하는 바람에 뭘 더 생각할 여력은 없었지마는. 그때 마이키는 형에게 손을 뻗으면서도 머릿속 수첩에 한 마디를 휘갈겨놨었다. 믿을 수 있는 어른에게 맡길 것.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형제들에겐 닥터 포지티브의 확인-차-내담 회기라는 명목하에 배리 드랙시 대디의 집에 왔다. 에이프릴은 오늘 강의가 꽉 찼고 그 후엔 아르바이트가 있어 저녁이 되어야 올 것이다. 비밀 이야기하기에는 완벽한 조합이 아닐 수 없다.

“안녕, 배리 대디.”

“흠.”

드랙섬은 그 자신은 처음 보는, 마이키의 닥터 필링스 코스튬을 일별하고선 문가에서 살짝 비켜서서 들어오라는 신호를 줬다. 그에게도 닥터 포지티브의 아주 오래간만에 하는 회기라고 약속을 잡았으니 예상 내였던 듯하다. 원래 닥터 포지티브는 지정 코스튬이랄 게 없었으니까.

이전에 본인이 어느 정도 망가졌었음을 인정하지 않았던 드랙섬 남작은 없고, 그들과 함께 웃고 떠들고 화내는 배리 드랙섬이 있을 뿐이라 그는 미리 준비한 차를 놓고 일명 내담 소파에 앉으려다가, 멈칫했다. 무슨 일인지 마이키가 거기에 먼저 앉아서 히히 웃고 있는 탓이다.

“이게 무슨 짓이지, 미켈란젤로?”

“난 대디가 이제 괜찮다는 걸 알아요. 근데 내가 고민이 있어서 왔어. 믿을 수 있는 어른에게 닥터 필링스가 공식적으로 도움을 요청합니다.”

굳이 풀네임을 부르면서 을렀지만 완벽하게 실패한 드랙섬은 마른세수를 한다. 저 애가 저렇게까지 말하면서 도와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거절하느냔 말이다. 아직 그들과 덜 섞였을 무렵에, 매드독은 그들의 막내에게 쓸데없이 무르다고 생각했었는데, 저도 별반 다를 게 없던 모양이다. 뭐, 한켠으론 가장 가까이 그들의 팝스가 있었음에도 믿을 만한 어른을 찾아 자신에게 왔다는 우월감도 있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마주했을 때, 드랙섬은 방금 전까지 생각한 그 모든 것을 마이키가 내다보고 이끌었음을 확신했다.

“하아…. 마이키, 넌―, 역시 보이는 것보다 교활한 데가 있어.”

“그리고 그게 내 매력이라고 레오가 그랬죠.”

“말을 말아야지.”

하긴 마이키가 자신을 매드독으로 편입시키기 위해서 해낸 모든 하얀 계략들을 생각해보면 그리 놀랍지도 않다. 굳이 에이프릴의 윗집을 택한 것도, 닥터 포지티브의 상담이라는 명목하에 부러 소음공해를 일으켜 올라오게 한 것도, 그리하여 ‘마이키의 가족’이 되었고 매드독은 드랙섬을 ‘마이키의 가족’으로 받아들였다가, 이제 드랙섬 본인이 기꺼이 하마토 가의 일원이 되기를 택했으니.

한숨을 내쉰 드랙섬은 자세를 바로 하고 턱짓했다. 그때의 빚을 갚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저희는 그런 식으로 동작하는 집단이 아니다. 말해보라는 신호에 마이키는 내담 내용을 발설하지 않는 선에서의 모든 것을 말한다.

“―그렇게 된 거예요, 대디.”

“그건 좀, 심각한 게 아닌가. 그 쥐-아니, 스플린터는, 아니지, 그래, 묻지 않으마.”

작위가 있던, 그러니까 한때 남을 부렸고 의견 개진과 요청 사항을 검토하고 승인했던 자는 쓸데없는 말을 전부 일축했다. 그는 이런 상황에 익숙했다. 옛날에도 자잘한 모든 일은 부하에게 맡겼으나, 그들의 권한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제 앞에 안건으로 올라오는 건 흔했으니. 계급이 없는 사회라도 그 결은 비슷하다. 게다가 아들들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겨우 타협점을 본 저와 루 짓수는 미성년자들에겐 말할 수 없는 종류의 이야기도 꽤 나누었는데(예를 들어, 그가 막 뮤턴트로 변하고서의 일 따위의), 거기서 비롯한 이야기는 꺼내느니만 못했다. 그들의 팝스는 최고를 해내진 못했어도 그가 가진 최선을 다하긴 했으니까. 아주 모자라고 멍청하긴 했어도. 루 짓수의 바보 같음이 지금 사태의 꽤 큰 지분을 차지한다고는 믿어도, 그걸 아들에게 말할 수는 없다.

“일단 나도 시도는 해보겠지만, 긍정적인 답이 나올 거라곤 기대하지 마라. 난 상담사가 아니야. 급식실 영양사지.”

“그렇지만 우리 대디죠. 헤헤. …라프는, 내가 동생이라서 절대로 입을 안 여는 걸 테니까.”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조금 시무룩해진 막내의 머리를, 다른 가족들이 그러하듯이 쓰다듬었고, 마이키는 곧 빵끗 웃었다.

 

드랙섬 본인이 라프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간 너무 티가 난다는 걸 이유로, 마이키는 자기가 아주 자연스럽게 라프를 그리로 혼자 보내겠다고 했다. 여전히 에이프릴이 오래 집을 비우게 될 날을 잡아서. 어떻게 하려나 봤더니, 책장 옮기는 걸 도와달라는 핑계로 부를 거란다. 실제로도 최근 책장을 늘리고 재배치해야겠다고 맘을 먹었던 터라 드랙섬은 헛웃음을 지었다. 교활한데, 도무지 화가 나지 않는 교활함이다. 오히려 이게 그 오렌지색 막내의 진짜 미스틱 파워는 아닌가 싶기까지 할 정도다.

매드독 중 가장 먼저 ‘마이키의 가족’을 받아들였고, 먼저 받아들였으므로 스플린터와 그의 사이를 정말 많이 중재(주로 물리적으로)했던 레드는 의심 1그램도 없이 찾아왔다. 오자마자 “그래서 책장이 어디 있다고요?”부터 묻는, 사 형제 중에서 성실함을 맡은 빅맨에게 드랙섬은 방 하나를 가리키며 재배치할 구조를 설명했고, 드랙섬 본인의 능력으로도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을 전혀 떠올리지 못한 채 라프는 짙은 고동색의 원목 책장을 날랐다.

“도니가 가진 책하곤 꽤 다르네요.”

“그럴 수밖에. 걔와 나는 전공이 다르지. 그건 좀 더 오른쪽으로.”

“예얍. 팝스는 2단 합판 책꽂이 하나면 됐는데.”

“하! 그 멍청한 놈하고 비교하는 거냐.”

평탄한 잡담이 이어졌다. 마음을 풀면, 말이 많아지는 타입이긴 하다. 미켈란젤로가 예전의 그는 닥터 필링스의 상담 시간에 아주 솔직한 사람이었다고 한 말을 기억한다. 실제로 라프는 이전 그가 단순히 ‘마이키의 가족’일 때보다 훨씬 저와 말을 편하게 주고받고 있고.

‘그리고 이 덩치는 맏이지. 썩 믿음직한 상사가 없는.’

드랙섬 남작에게는 형제가 따로 없으나, 그는 한때 최고 책임자였다. 그리고 최고 책임자와 맏이는 결이 같은 단어이기도 하다. 특히나, 집안의 유일한 어른이 썩 믿음직하지 못한 방임형 아버지일 경우는 더더욱.

최고 책임자란 아래에 딸린 자들의 생계와 목숨을 책임진다. 맏이는 어른이 없는 자리에서 동생들의 목숨을 책임진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대체로 성인이 선택해서 맡으며 책임지는 범위는 딱히 혈육이 아니고, 후자는 미성년일 때부터 그냥 태어나면서 그렇게 된 것이고 책임의 범위도 가족이다.

“여기서 도망쳐!”

“우리가 시간을 벌어주마!”

“두 분 없이는 못 가요!”

“라파엘, 하마토가 있는 한 희망은 있다.”

그러니까 저희 같은 삶을 사는 중이라면, 맏이인 미성년자에겐 독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있다. 그때처럼. 울먹거리다가, 기어코 고개를 돌렸던 표정을 드랙섬은 지금도 기억한다. 그는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형제들 중 그런 결정을 내리게 시켜야 한다면 그건 라파엘이었다는 점에선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마이키에게서 들은 바를 섞으면, 견적이 나온다. 그러니까 루 짓수도 이번에 아예 리더를 옮긴 거다. 라파엘은 리더가 아니어도 여전히 맏이니까. 그런데 이제 설명이 없었던 것 같으니, 언젠가 사달이 나겠지.

잡담거리도 떨어졌고, 이제 일감도 없다. 드랙섬은 드디어 오늘의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때임을 안다. 닥터 필링스처럼 세심한 사람은 못 되니, 그냥 들이박을 수밖엔 없다.

“라프, 최고 책임자로서의 힘듦은 나한테는 털어놔도 된다.”

덜그럭, 쨍그랑. 그 말을 들은 라프의 어깨에 과하게 힘이 들어가더니, 물 마시고 있던 컵이 떨어져 깨졌다. 속으론 한숨이 나왔지만, 1달러샵에서 사 왔던 싸구려였으니 신경을 껐다. 라프는 꽤 드라마틱한 반응을 했던 것치고, 심호흡 한 번에 꽤 멀쩡한 모양새를 하고서 몸을 돌렸다.

“어, 그,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대디. 지금 매드독의 리더는 레오잖아요.”

아, 이 뜻이었군. 드랙섬은 마이키가 부딪혔던 벽이 무엇인지 직접 확인하고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묘하게 어긋나면서도, 위험을 감지한 소동물처럼 날카롭게 서 있다. 근육은 긴장으로 뭉쳤고 숨은 조금 얕다. 누가 봐도 방어적인 태세다. 마이키는 이렇게조차 끌어내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허를 찔렸고, 그 말을 한 사람이 어른이어서 여기까지 입질이 왔을 뿐. 그는 이제 마이키가 제게 쥐여 주고 간 비장의 카드를 꺼낸다. 반응이 오면, 이 말을 하라고, 분명 먹힐 거라고 장난꾸러기처럼 웃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막내가 널 걱정했다. 혼자서 속앓이하는 것 같다고. 자기가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면서 내게 부탁했어.”

“아, 마이키, 닥터 필링스….”

이마를 팍 짚은 것치고 중얼거리는 말에는 패기가 없다. 오히려 헛웃음과 일말의 씁쓸함마저 엿보인다. 그건 마법의 주문을 건네던 상자 거북의 얼굴과 일치한다. 과거의 남작 드랙섬은 인내심이 썩 없는 편이었으나, 이제 급식실의 악마들을 상대하며 그럭저럭 인내심이라 불릴 것을 조금이나마 갖춘 그는 잠시간 더 라프를 기다린다.

드디어 기어가는 목소리가 비죽 삐져나왔다.

“그렇지만, 난 맏이라구요. 말 더럽게 안 듣는 탱탱볼 같은 동생들이 있는.”

“그리고 난 너희의 두 번째 보호자다. 뭐, 루 짓수를 보면, 어떤 의미에선 첫 번째라고 해도 좋겠군. 어쨌든 결론은, 난 네 슈퍼바이저란 뜻이지. 그리고 상급자는 아래 직원의 고초를 들을 의무가 있고.”

“우와아…. 이거 닥터 필링스랑 도니에다 레오까지 섞은 무언가 아냐?”

“회피하지 말고, 말해.”

정말 이상한 걸 봤다는 듯이 일그러뜨린 얼굴은 아까보다 긴장이 가시긴 해서, 드랙섬은 그냥 이 스타일을 지켜가기로 했다. 솔직히 다른 방법은 모르기도 하고(그렇지만 그는 적어도 지금 자신이 루 짓수보다는 낫다고 자부한다). 라파엘은 한참 동안 눈을 굴리고, 다리를 떨다가, 급기야는 손톱을 잘근잘근 물기 시작했다.

“근데, 그냥, 사실인 거잖아요. 난 맏이고, 내 동생들을 책임져야 한다고요. 그건 그냥 당연한 일인데.”

“그리고 네가 여전히 미성년자인 것도 사실이지. 나와 그-스플린터의 보호가 필요한.”

“―오, 나더러 퇴각하라고 외쳤으면서?”

한순간 까만 눈동자에 불티가 튄다. 차라리 이게 낫군. 드랙섬은 그들의 맏이가 꽤 욱하는 성질이라는 걸 안다. 적으로 봤을 때도 알았고, 가족으로 지내면서도 마찬가지다. 논리적으로는 그때 그 판단이 맞는다는 걸 라프 역시 알 거다. 그렇지만, 닥터 필링스의 조언에 의하면, 감정은 흘러나가야 한다. 가둬지면 그것은 썩고 곪아 스스로 물어뜯게 된다. 그때 느꼈을 분노와 좌절의 메아리가 차라리 밖으로 뿜어지게 해야 한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한 번 불이 붙은 것이 연쇄적으로 터진다.

“내가, 대체, 무슨 심정으로 당신들을 놓고 갔는지 알아? 동생들 목숨하고 당신들 목숨 저울질하는 그 끔찍한 심정을 아냐고! 젠장, 그럴 수밖에 없는 건 알지만! 왜 내 가족의 목숨이, 자꾸 내 선택에 걸려야 하는 거냐고…. 내가 잘 해내지 못하면, 실수하면, 내 동생들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게, 내가, 난….”

“거기까지Enough.”

한순간 위험한 빛이 라프의 눈동자에 비치는 것을 본 드랙섬은 재빨리 다가가 스스로에게 주먹을 꽂으려던 라프의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닥터 필링스의 진단은 옳았던 거지. 깜빡깜빡. 멀겋게 올려다보는 눈동자를 바라본 드랙섬은 조금 고민하다가, 아마 그의 막내가 바랐을 것을 실천하기로 했다. 끌어안기. 그들의 가족이, 하마토 가가, 그래왔듯이.

“최고 책임자는 언제나 그런 법이지만, 그게 고생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지.”

이번에야말로 댐이 무너졌다. 울음이 터진다.

 

한참이 지나서야 울음이 잦아들었고, 훌쩍이는 소리도 서서히 그쳤다. 보통 십 대, 그것도 후반으로 접어들수록 자기가 다 큰 어른인 줄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라프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영 머쓱해 하는 맏이에게 다른 멀쩡한 컵으로 물을 건넨 드랙섬은 이제 몸을 뗐다.

“이젠 좀 낫나?”

“뭐, 네에…. 아니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좀 부끄러운데. 이거 절대 다른 애들한테 말하지 마요. 꼭이요. 이걸 레오가 알면 일주일은 놀려먹을 거야.”

“그러마. 어차피 닥터 필링스가 입 막을 테니.”

“아. 비밀 유지조항.”

“그래, 그거.”

내 나이에서 보면 너는 그냥 애 맞는데, 소리는 어른스럽게 삼키고서 드랙섬은 그냥 라프가 하고 싶은 말을 하게 둔다. 앞서 말했듯, 슈퍼바이저가 하급자의 고초를 듣는 것은 의무다. 그는 스플린터처럼 그 의무를 방기할 생각이 없다.

“울고불고 화내고 하긴 했지만, 맏이라는 걸 딱히 불평하려는 것도 아니고요. 그냥 내가 많이 멍청하던 기간이 있어서, 운이 좋아서 나랑 동생들이 산 거란 걸 아니까, 그게 좀 많이 무서웠던 거고…. 근데, 뭐, 이제 리더는 레오 녀석이잖아요?”

“그렇다고 네가 동생들의 맏이라는 건 변하지 않지.”

“그건 당연하죠. 그런데 레오 그 자식―아니, 걔 이야기하면 진짜 열 뻗치니까 지금은 말고. 그런데, 그래도 걔는 내 동생이거든요.”

동생들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난 뭐든지 할 거예요. 정말 뭐든지.

목소리는 음산하고, 안광이 희번뜩하다. 원래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지키는 쪽으로 돌아선 자의 눈이란 제정신이 아닌 법이지. 드랙섬은 아들들을 탈출시켜야 한다고 말하며 마주쳤던 스플린터의 눈을 떠올렸다. 자기 목숨 거는 짓이라도 해낼 사람의 눈은 저러하다. 역시 언제 날을 잡고, 리더와 맏이에 관해서 루 짓수와 제대로 이야기해야 한다. 지금 이대로는 틀림없이 사달이 나긴 날 테니. 지금 이것도 다 임시방편이다. 그래서, 드랙섬은 해야 할 말을 한다.

“그래. 넌 해내겠지. 네가 이미 쭉 해왔던 걸, 이 드랙섬 남작은 보았다. 그 빌딩에서도.”

“아. 맞다, 그게―대디였지.”

“안타깝게도. 그랬었지.”

잠깐의 침묵. 한때 서로 적대하던 관계였으니,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다. 빅마마의 빌딩, 우즈키토가 든 병을 놓고 다투던 저희였는 것을.

그때를 다시 생각하면 라프는 피가 차게 식는다. 밤공기의 차가움과는 완전히 다른, 도니의 표현을 빌려보자면, 세포 하나하나가 급속 냉각되는 듯한 공포. 드랙섬 남작의 손에 쥐여 있던 레오가 떨어지고, 시야가 급속도로 좁혀진다. 레오는 빅마마를 의심했지만, 저는 그걸 무시하고서 빅마마를 믿는 방편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잘못된 선택이 동생을 죽일 것이다. 자신의 잘못된 선택이 동생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그건 태어나서 처음 느낀 지독한 공포였다. 그러나 공포를 느끼고 있을 틈도, 두려워서 울 틈도 없다. 지금, 동생을 구하러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몸을 던졌다. 앞뒤 안 가리고.

라프는 조금 굳은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레오는 대체로 지나간 일을 신경 안 쓰는데, 죽을 뻔했다가 살아온 주제에 금방 까불거리고 자길 안 믿어줬다는 것에만 토라져 있어서, 아마 그게 화가 났던 것도 같다. 나는 뒤늦게 밀려온 공포에 먹혀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쟤는 이제 다 지나간 일처럼 굴어서. 아마 그런 것들이 켜켜이 쌓여가면서, 뭔가로 터졌겠지.

이제서야 천천히 돌아볼 수 있게 된 회상을 드랙섬이 끊었다.

“자, 그럼 여기서 상급자로서 하달하지. 닥터 필링스가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첫째, 자기를 향한 폭력성. 둘째, 식욕 감퇴. 이제 너는 토로할 상급자가 있으니, 두 문제를 우선 점검하도록. 보고는 닥터 필링스―에게 할 수 있을 리가 없겠군. 내게 해라.”

“그럼요, 이걸 어떻게 동생한테 말하겠냐고요.”

마이키의 별명이 나오자 라프는 샐쭉하게 눈을 떴고, 드랙섬은 말을 정정했다. 그래, 앞서 말했듯이, 원래 책임을 논할 때는 윗사람하고만 하는 거다. 책임자는 피보호자 앞에서 약한 소리를 하질 못하니까.

 

집에 돌아간 라프는 별말 없이 막내를 웃으면서 쓰다듬었고, 마이키는 자신이 요청한 외래 상담이 성공리에 마무리되었음을 알았다. 케이스 클로즈드. 닥터 필링스의 미제상담은 이것으로 0건이 되었다.


(예전에 쓴 사족을 그대로 붙여놓기)

어쩌다보니 더무비->시즌2->시즌1의, 역순으로 보고 있는데... 시즌2에선 종종 봤던 마음-속-라프(와 걔가 나오기만 하면 자기를 패는 라프)를 시즌1 8화까지 봤는데도 보지를 못해서, 시즌2와 더무비와 당사자성(맏이)가 섞여 나온 무언가입니다. 라프에게선 트친님의 말을 인용해서 K여고생(1학년)장녀를...자주...느끼기 때문에...

아니 근데 거꾸로 보니까, 시즌1의 매드독 친구들 진짜 너무 어리고 우당탕탕이라섴ㅋㅋㅋㅋ시즌1의 나머지에서 대체 뭔 일이 얘들을 그렇게 깎아냈나도 싶고 그랬습니다. 뭣보다 모두가 책임감이라거나 목숨 달린 일이란 걸 잘 인지를 못해...특히 라프가... 그래서 아마도, 마음속라프는 라프가 리더/맏이의 책임감을 새삼 깨달은 후에 본인이 맏이/리더로서 어떠해야한다-의 강박이 자기를 몰아붙여 나온 결과물 아닌가-라는 가설을 세우고 있고요, 작중엔 안 나왔지만, 아마 스트레스성으로 식욕도 줄었을 거라고 믿어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다 쓰고 나니까, 저건 이제 더 무비로 이어지는데요ㅎ...그렇다면 저희집 타임라인에선 이제...배리대디와 루팝스의 회담이 이뤄지지 못한 상태에서, 배리씨는 하필 학교에 있었고 블라블라 이렇게 되겠네요…

작품 이상으로 해설하는 거 아니랬지만? 오타쿠는 원래 계속 떠들고 싶어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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