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GO

[ZEXAL/Y3] 대지의 노래

그날 저녁, Ⅲ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 늦은 생일 축전을 보냅니다. 다시 한 번, 생일 축하한드아아아아ㅏㅏ!!!!

* ZEXAL 본편이 끝난 후를 다루고 있으며, 트론 일가 관련하여 신나게 날조를 해두었으니 공식에서 보지 않은 모든 사항은 팬피셜입니다.

* 소설 내 사용된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및 해당 신화 <니벨룽의 노래>에 관해서는 고증이 틀린 곳이 있을 수 있습니다.

* 오탈자 및 비문은 발견하는 대로 수정합니다.


하트랜드 학원에 전학생이며 편입생이 우르르 밀려든 것 자체는 화제가 되지 않았다. 이 도시는 여러모로 유명했고, 최근 전세계 듀얼리스트를 대상으로 듀얼 카니발을 성황리에 개최했으므로(비록 물밑에서 많은 사건이 벌어졌지만, 세간 사람들이 보기에는 훨씬-화려한-듀얼이었을 뿐이다. 먼 과거에 KC에서 처음으로 링크스 시스템을 공표했던 날을 회고하는 역사학자도 있었으니까) 전입인구가 늘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게 대다수 의견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공교로운 일이라 함은, 학년도 제각각으로 흩어진 열 명에 가까운 인원 모두가 하나도 빠짐없이 츠쿠모 유마와 아는 사이라는 거다. 친밀한 정도야 제각각이긴 해도 말이다. 가뜩이나 초등부 시절부터 유명했던 유마인지라 초등부부터 고등부까지 소문이 빼곡하게 퍼졌다.

전학 동기(누가 이렇게 처음 불렀는지는 불명이다)들은 호기심으로 몰려든 인파에 아주 개성있게들 반응해주었다. 이미 유명세가 있는 Ⅳ(선생님 몇은 이 애를 본명인 토머스 아크라이트로 불러야 할지 저 닉네임으로 불러야 할지 혼란했다)는 지금까지 대중이 알던 대외적 이미지와는 뭔가 어긋나있었지만 사람 대하는 것 자체는 무척 능숙해 삽시간에 코어팬층이 생겼다. 교내에 성격 괴팍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면 본래는 열에 여덟이 료가를 꼽았지만, 지금은 미자엘의 지명도가 높다. 오히려 그 샤크가 도르베라는 전학생과 함께 미자엘의 뒷덜미를 낚아채 교실에 내던지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더 그랬다. 이야, 역시 성질머리는 다 상대적인 거라니까. 그 샤크가 남 행동 저지하러 나서다니. 물론 그 말을 꺼냈던 선도부생은 무시무시한 눈총을 받아야 했지만(듣기론 방과후 듀얼 신청을 받았고 개같이 털렸댔다). 호쾌하고 적극적인 아리토는 전학 온 지 겨우 사흘 만에 온 학교 학생이 저를 알게 했다. 뭐, 정확하게는 그의 돌출난 언행 때문이었는데, 그야 공개적으로 유마와 코토리에게 “나의 천사!”라고 하며 듀얼을 신청하고 있어서다. 코토리야 대체로 거절하고 있다지만 유마는 달랐으니까. 사흘이라는 정확한 시간이 나온 것도 그날 있었던 교내 공개 듀얼에서 그가 유마를 지정했고 유마 본인도 신나서 덤볐으며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듀얼이 정규 수업 시간을 초과하면서 소문이 쫙 나, 전교생 모두가 해당 증강공간에 액세스해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탓이었다. 덕분에 아리토와 곧잘 붙어 다니는 기라그까지 덩달아 얼굴이 팔린 유명 인사가 됐다. 본인은 썩 나쁘지 않아 했다. 전학 첫날부터 길고양이 보호 클럽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어서, 클럽 멤버인 자기가 유명해지면 이래저래 캠페인에 도움이 된다면서.

여하튼 넘어온 면면들이 하나같이 쟁쟁했던지라, Ⅲ―미하엘 아크라이트는 그 인원 중에선 눈에 띄질 않는가 했지만. 아니, 전혀. 그럴 리가. 이 애 역시 어디 놔두면 튀는 아크라이트다.

곱상하고 얌전하고 예의까지 바른 이 애는 첫인상으론 선생님들이 좋은 학생이 들어왔다며 기뻐했고, 얼마 안 가 선택 과목인 역사와 인류 문화사에서 아즈텍 문화와 그 영향을 주제로 열렬하게 발표한 후에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겉보기와 달리 반전 있는 애라며 말이 돌았다. 하긴, 전학생 중에서 유마와 가장 오래 붙어있는 것도 이 애라 더 눈에 띄었을지도 모른다. 본인에게 이 말을 하면 눈이 동그래져 손사래를 치곤 하지만서도.

그런 미하엘이 지금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눈만 굴리고 있다. 강당과 학습동 사이를 잇는 회랑은 막 정규 수업 시간이 끝나 통행량이 많다. 여기에 교내 최대 규모의 고전극 동아리 회장이 구십 도로 허리를 숙이고 간청하고 있으니, 하교 중이던 학생들까지 다 구경이 났다.

“부탁할게, Ⅲ. 네가 제일 적합해! 너 체육 점수도 높고, 저번에 고전 시간에 발표하는 거 보니까 우리 극 이해도도 높을 거고! 제발 우리 주연 대타 좀 뛰어줘!”

미자엘과 발음이 비슷하다고 본명보단 별칭으로 불리길 선호하는(쟤랑 이름을 헛갈리면 기분 나쁘다면서. 늘 웃고 다니는 Ⅲ가 최고로 냉랭한 표정을 지은 순간이었다) Ⅲ는 방금까지 옆에서 같이 떠들던 유마를 흘끗 일별하고선 동아리장을 일으켜 세웠다. 곁에 요즘 하트랜드 학원의 거물이 있는데도 그쪽으론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원하는 인재를 얻어내려고 눈을 이글이글 빛내는 회장에게선 일종의 광기마저 느껴졌다. 솔직히 말해, 미하엘은 이런 눈을 잘 안다. 저희 큰형님도 연구에 몰두하면 저렇고, 자타공인 그의 제자도 늘상 저런 식이다. 그리고 저 눈을 한 사람은 절대 말려지지 않지요. 남 말 할 처지가 아니라는 점은 자각도 없이, 그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일단은 발버둥을 쳐본다.

“그, 선배님. 제가 고전에 관심이 많은 건 맞지만, 무대에는 한 번도 서본 적이 없어요. 게다가 저, 사진 찍히는 것도 부끄러워하는 걸요…. 갑자기 주연 대타를 뛰라고 하셔도 좀….”

“아니! 모든 듀얼리스트는 곧 무대 배우이기도 해! 남들 앞에서 듀얼을 할 수 있는 모두는 잠재적으로 배우이기도 하다!”

이게 무슨 말이야. Ⅲ는 억지 논리를 대체 어떻게 깨부수고 이 난관을 빠져나와야 할지 싶었다. 게다가 저 혼자 시간을 허비하는 거면 모를까, 오늘 유마와 카드숍에서 새로 나온 부스터 팩을 고르자고 이야기했던 참 아닌가. 유마의 소중한 시간까지 낭비할 수는 없다. 그러면서 맘을 굳게 먹고 더 냉정하게 거절하려는데,

“우오오! 멋진 말이잖아! 모든 듀얼리스트는 배우래, Ⅲ! 그렇다면 넌 진짜 훌륭한 배우 아닐까? 회장님, 그럼 나는? 나는? 나도 멋진 배우가 될 수 있어?”

“역시 츠쿠모 유마! 말이 통하네! 그래! 네 절친도 이렇게 말하잖아!!―그리고 유마 넌 이번 극에는 절대 안 어울려서 안 돼. 흠, 나중에 현대극에서 즉흥극 올리면 거기는 괜찮을까. 거기 연출하는 애랑 내가 친하니까 말은 해볼게.”

유마가 이야기에 타버렸다. 눈이 반짝반짝하게 빛난다. 고대 유적 위에 뜬, 광공해가 없어 시야 가득 펼쳐진다던 별바다가 거기 있다. 저걸 가로막을 용기가 Ⅲ에게는 없었다. 아크라이트의 막내에게서 풀 죽은 기색을 읽었는지 회장은 과연 연극부를 이끄는 사람답게 팔을 쫙 뻗어 휘두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게다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 너도 다시 생각할 수밖엔 없을걸? 무려 이번 우리 부 연극에서는 검―,”

“으아아! 잠깐만요, 그거 무슨 의미로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야 너네 형 있지, 그 팬클럽 회원이 우리 연출․소도구 팀에 있는데, 걔가 Ⅳ가 그렇게 말한 걸 들었다고 이야기하더라.”

유마가 듣고 있는 자리에서 검 따위의 흉흉한 소재가 나오는 건 정말로 바라는 바가 아니어서, Ⅲ는 양손을 마구 내저어가며 말을 끊었고, 목적어가 사라진 채로도 회장은 말을 잘 받아줬다(뭔가 눈치챈 듯 잠깐 눈썹을 꿈틀했을 뿐).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유마만 눈을 끔뻑일 뿐이다. 미안, 유마 군. 그건 그렇고, Ⅳ형님!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그런 유마를 곁눈으로 일별한 Ⅲ는 벌써 집에 가 있을 작은형님께 속으로 고함쳤다. 이건 절대로 어릴 적에 그랬듯이, 제가 귀엽답시고 내리부은 괴롭힘이다. 절대로다. 저래 봬도 Ⅳ형님은 발이 넓어 주워듣는 소문이 많다. 거기에 이런 데로만 적극적으로 잘 굴러가는 머리까지 합쳐지면 이렇게 되는 거다. 예전도 아니고 그가 주연 배우의 다리가 부러진 것까지 사주하지는 않았겠지만, 우연히 주어진 상황을 파악해 적극적으로 막내 괴롭히기에 썼을 법하다. Ⅲ는 학원 네트워크에 홍보지가 돌던 연극을 떠올렸다. 그래, 거기엔 검무가 한바탕 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고, 그래서 저도 극이 오르면 꼭 한 번은 보러 가겠노라고 저녁을 먹으면서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들에게 말했던 것 같다. 그게 이렇게 돌아올 줄은 생각도 못 하고.

‘볼 생각은 했어도 제가 출 생각은 없었는데요….’

이 연극에 참여하고 싶은지의 여부를 물으면 솔직한 심정으로는 꽤 있다. 그야 저는 원래 고전에 관심이 많고, 고고학과 오컬트 그 양쪽을 모두 포괄해 좋아하며, 때문에 그런 시대의 유물을 가까이 보고 만져볼 기회가 있다면 열렬하게 환영한다. 이번 연극은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를 압축‧각색해 꾸민 것으로, 소품팀에서 고등부 고고학 클럽과 연계해 관련 연구자와 인터뷰하는 등 소품 고증에 무진 애를 썼다고 했다. 그래서 문서와 영상으로 남아있는 많은 자료를 검토해 지크프리트의 검―발뭉 혹은 그람 혹은 노퉁―을 재현했고, 그 퀄리티는 역사 선생님께서도 보장하셨다. 물론 현대인이 들 수 있는 크기로 만들었으니 미니어처이긴 하겠지만 어차피 신화 속 무구라는 건 재현될 수 없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가로막는가. 별 게 아니다. 세상 온갖 유일무이를 수식할 단어를 다 긁어모아 달아줘도 아깝지 않은 사람, 츠쿠모 유마에게 미하엘 아크라이트라는 자가 지닐 어떤 상像을 일그러뜨리고 싶지 않았다. 자기만족일지언정 그 점은 확고하다. 첫인상이 최악 중 최악이었을진대 이 애는 오로지 그 넓고 청량한 마음으로 저를 기꺼이 등 맡길 동료로 여겨주었고, 제 거짓말에도 몇 번이고 속았다가 진상 앞에서 체면 차림 같은 것 하나 없이 슬퍼하고 오열하며 통곡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필요만 하다면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저와는 다르게. 한때 가족의 복수라며 덤벼들었던 저를 눈물 많고 먹먹하게 여린 사람으로 보아주고 있으므로, Ⅲ는 감히 그 환상의 장막을 찢지 않고 얌전히 틀 안에 들어있었다. 하나도 괴롭지 않은, 안락하고 따스한 공간이다. 영원히 막을 내리지 않을 극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걸 감안하면, 이 선배의 말도 크게 틀리지 않네요.’

모든 듀얼리스트는 무대 배우인가. 하긴, 기억을 더듬으면 저 선배도 나름대로 상위권에 있는 실력자이긴 했을 거다. 프로 듀얼리스트를 노리지 않아서 공식 대회에는 나오지 않는다지만, 친목 대회나 비공식 전에는 종종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곤 한댔다. 생각이 자꾸 다른 곳으로 튄다. Ⅲ는 창밖으로 보이는 시계탑의 시침을 보고서야 파드득 정신을 차렸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일단 고민할 시간을 주실 수 있을까요?”

“그래! 단칼에 거절하지 않았다면 그걸로 좋아. 일주일이면 될까? 더 빨리 답 줘도 좋고. 이건 내 연락처. 아, 익명 앙케이트 수집할 때 쓰는 계정이니까 수신전용이야. 내가 이걸로 연락하는 일은 없을 거니까 안심해. 이 정도면 될까?”

멋대로 척척 연락처를 등록하면서 한다는 말이 저래서 Ⅲ는 물론이고 유마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회장님은 후배들을 한껏 귀여워하는 표정을 하곤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하하! 너는 아주 대놓고 낯가림이 심한 애고, 그건 너네 형도 그렇잖아? 익명 다수 말고, 사적인 일 대 일은 약해, 너희 형제 둘 다. 그런 사람한테 개인적인 부탁을 할 거면 이 정도는 준비해야지.”

그래 놓고선 산뜻하게 안녕을 외치고 떠나버렸다. 남겨진 두 사람만 눈을 깜빡이다가 시선을 마주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할 말을 알았다. 역시 하트랜드 학원. 듀얼리스트란 역시 덱 레시피 수만큼 다양하고 독특하기 그지없는 생물인 것이다.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은 탓에 오늘 약속은 무산되고 말았다. 각자 집에서 막내라 가족 일정에는 발언권이 약하기도 하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족을 아끼는 두 사람인지라 집에 뭔가 일이 있으면 그걸 우선해서다. 츠쿠모 가에선 사흘 전에 급하게 시외로 출장을 나갔던 아카리가 오늘 점심 무렵 집에 돌아와 저녁까지 내리 잤다가 조금 전에 일어난 참이라고 연락이 들어와 있었고(이틀 철야였다고 한다), 아크라이트 가에선 크리스토퍼가 독일 학회에 갔다가 오늘 저녁에 돌아온다 했다. 어느 쪽이고 저녁까지는 틈이 났으니 그 막간을 틈타 카드 가게를 가려고 했던 거다.

Ⅲ는 영 아쉬운 맘을 이기지 못하고 시무룩한 얼굴로 말끝을 눅눅히 뭉개며 고개를 숙였다. 점심시간에 같이 도시락을 먹으면서 무슨 카드가 나올지 기대된다며 수업 다 끝날 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느냐고 즐겁게 웃던 유마의 표정이 절로 떠오른 탓이다. 그 두근두근함이 좀 더 활짝, 샛노랗게 피어나길 기대했던 저 자신의 심정도.

“미안해요, 유마 군. 제가 붙들리지만 않았어도….”

“엥? 그게 Ⅲ 잘못도 아니고, 카드 가게가 갑자기 사라지지도 않을 거니까 괜찮아! 형하고도 며칠 만에 보는 거라며.”

“그야 그렇지만요….”

“그러니까 거긴 나중에 같이 가는 걸로 하자구. 그럼 내일 봐!”

“네, 아카리 씨랑 할머님께도 안부 전해주세요.”

“응!”

물론 언제나 그랬듯이, 츠쿠모 유마는 미하엘 아크라이트가 습습한 과거에 마냥 젖어있게 두지 않는다. 그 애는 볕이 잘 드는 양지 같아서 매번 이렇게 저를 현재로 끌어당겨 몇 발자국 앞에 선 미래를 보게 했다. 단 한 번, 그가 꺾여 무너졌던 시기를 제외하면.

여기는 각자 집으로 향하는 갈림길. 작별 인사를 주고받고서도 유마는 뒤로 걸으며 Ⅲ에게 양손을 머리 위로 들어 휘휘 내저어 또다시 인사를 했다. 이쪽에서 슬몃 웃으며 답장으로 손을 마주 흔들어 주고서야 그는 몸을 빙글 돌려 전속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모험가였던 부모를 두었고 어린 시절 종종 그 여행길에 동참했다던 사람답게 가볍고 경쾌하게 멀어지는 등이다.

내일 또 보자는 말이 얼마나 다정하게 와닿는지, 그리하여 내일 다시금 해가 뜨리란 걸 믿을 수 있다는 걸 저 애는 모를 것이다. Ⅲ는 괜한 감상에 젖은 채로 귀로에 오른다. 무거운 의제를 끌어안은 탓에 발걸음이 유독 무겁다.

 

먹구름 같은 맘을 안고 집에 돌아왔지만 유순한 표정으로 현관에서부터 저를 반겨온 큰형님 덕에 Ⅲ는 활짝 웃었다. 날짜상으로는 닷새, 학회 둘째 날에 메인 세미나를 맡아 그 준비로 정신없었던 기간을 포함하면 보름은 제대로 보지 못했던 Ⅴ다. 무릎을 굽혀 저를 다정하게 안아준 그가 가방을 뺏어 들었다. 어린애가 아니라고 가볍게 불퉁거렸지만 나이가 많이 떨어진 형제는 자연스럽게 제 말을 무시했다.

“그런데 미하엘, 토머스에게 듣기론 오늘 늦을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빨리 돌아왔구나. 무슨 일 있었니?”

“네? 어, 그게요….”

“야, 왔으면 빨리 와서 식기 좀 놔!”

아직 이야기를 꺼낼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하고 안절부절못하는데 때맞춰 저쪽 주방에서 인기척을 느낀 Ⅳ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런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맞춰주는 작은 형님께 이번은 나이스를 외친 Ⅲ는 큰형님의 물음을 홀랑 까먹은 체하며 종종걸음으로 부엌으로 향했다.

의외라고 해야 할지 아크라이트 가에서 요리에 제일 능숙한 건 Ⅳ였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고개를 갸웃할 거다. 생김새로만 봐서는 Ⅴ나 Ⅲ가 잘할 거라는 편견을 가지기 쉬우니까. 그렇지만 아크라이트 가의 연혁을 따지면 그게 이치에 맞았다. 크리스토퍼는 부친 실종 당시에 난데없이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사태여서 집안일에 신경 쓸 틈이 없었고, 미하엘은 타고나기를 요리 솜씨가 궤멸적이었다. 그러니 아직 어린 동생을 돌봐야 했던 토머스가 집안일 전반을 맡게 되는 건 필연이었다. 그 결과가 지금이었고.

물론 Ⅳ의 성격상, 항상 자진해서 요리하지는 않았지만(이 가족은 어느 쪽이냐면 차라리 사 먹는 편이었다. 아니면 반조리 식품이거나) 뭔가 기념할 일이 있다 싶으면 팔을 걷어붙였다. 오늘은 보름간 코빼기 한 번 마주치지 못한 큰형을 위해 나선 모양이다.

저녁은 꽤 호화로웠다. 그야 메인 디쉬가 무려 슈바인스학세다. 고급 요리까진 아니어도 제대로 만들려거든 손이 많이 가는 통구이는 막 오븐에서 나와 기름이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소리가 났다. 곁에는 흑맥주와 레드와인 그리고 논알콜 샴페인(분명 Ⅲ용인)까지 있었다. 제철과일과 이것저것을 얹은 샐러드와 버터에 구운 아스파라거스며 양파에 버섯들은 덤이다. 만찬을 앞에 두고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Ⅳ를 보니, 바이론도 Ⅲ도 이제서야 그들의 차남이 어제 늦은 오후부터 부엌에 박혀있던 이유를 알게 됐다.

그야 하루 전부터 일부러 껍질을 말리고, 살코기엔 닿지 않게 구멍을 잔뜩 내고, 고기에 향을 입히고 간을 하려면 이만저만 귀찮은 게 아니지 않은가. 조리 과정도 속까지 고루 익히려거든 약불에 적어도 두 시간은 뭉근히 익히고, 바삭함을 위해서 초고온 오븐에서 두 번에 나누어 바짝 구워야 했다. 사이드를 차치하고서도 이만큼 품이 든다. 정말 드물게도 의욕이 만만했던 모양이다. 늘 툴툴거려서 그렇지, Ⅳ 역시 가족을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라는 걸 이런 데에서나 느낀다.

화기애애한 시간이었다. 한때 영영 잃은 줄만 알았던 시간은 형태를 조금 달리하여 여전히 이 손안에 있다. 그 행복을 만끽하는 가족들 면면은 확실히 엷은 온기가 깔린 것이다.

식사도 이제는 거의 종반으로 접어들어 접시에 한가득 담겼던 슈바인스학세는 뼈만 남았고, 다들 남은 사이드나 안주 삼아 술을 홀짝이고 시답잖은 소리나 해댔다. 이 잔을 마지막으로 하겠다며 크리스가 레드 와인을 자작했고 거기에 바이론이 잽싸게 편승했으며 토머스가 다시금 자기 맥주잔을 내밀어 건배를 종용했다. 술이 얼큰하게 들어간 가족들을 보며 미하엘 역시 제 몫의 논알콜 샴페인 잔을 내밀었다. 모양도 내용물도 제각각인 유리잔들이 쨍, 하고 소리를 냈다.

건배를 마친 후 크리스가 아직 채 풀지 않아 부엌 한 켠에 부려진 흑맥주 박스를 일별하고선 말을 툭 던졌다.

“네가 어쩐지 사 오라는 맥주 종목을 콕 찝는다 했어, 토머스.”

“뭐 어때. 이건 흑맥주랑 마셔야지. 그래도 고기라서 일단 레드 와인을 꺼냈는데, 진짜 그게 넘어가?”

“맥주는 거기서 물보다 많이 마셔서 물렸어. 아버지, 술은 거기까지 마시는 걸로 해주세요.”

“와인 셀러 잠갔으니까 꿈도 꾸지 마십셔.”

“너흰 뭐 이런 때만 죽이 척척 맞니. 그렇지, 미하ㅇ―”

“과음은 건강에 안 좋아요.”

굳이 독일에 다녀온 사람에게 독일 향토 음식으로 승부를 걸어온 둘째가 기가 막히고 귀엽다는 눈으로 보고 있는 맏형과 그걸 어떻게 레드 와인하고 먹느냐고 기가 질린 눈을 한 둘째는 슬슬 몰래 두 번째 와인을 털어가려는 부친을 발견하자마자 언제 서로 엇섰느냐며 협공했다. 혼자서 한 병 반 드시지 않았느냐고 타박이 이어져, 바이론은 막내에게 구조선을 요청했지만, 웬걸. 아내를 닮은 환하고 단호한 미소나 돌아왔을 뿐이다. 아들들 모두가 웃는 낯으로 화를 내는 건 그 사람과 참 닮았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저 웃음 앞에서 저는 꼼짝도 못 했으므로 바이론은 공격 대상을 변경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미카, 아까 현관에서 크리스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던 듯했는데?”

한창 어렸을 때의 애칭을 꺼내 들면 아이 티가 진하게 나도록 눈이 동그래진다. 그러다가 허둥대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서 웃고 만다. 물론 곧이어 굳어진 표정이 된 막내아이 덕분에 형들도 저도 덩달아 웃음기를 지우고 경청할 준비를 했지만서도.

 

Ⅲ는 미소가 바싹 마른 얼굴을 하고 전후를 설명했다.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일 먼저 말을 던진 건 Ⅳ였다.

“뭐야, 별일 아니네. 그냥 해. 너 그런 거 좋아하잖아.”

“애초에 따지면 Ⅳ형님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거잖아요!”

“눈치챘어? 내가 발이 넓―야! 때리지 마! 너 손 매운 거 몰라?!”

“자자, 둘 다 진정하고. 그래서 넌 어떻게 하고 싶은 거니, 미하엘.”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유마 군한테 밉보이고 싶진 않아요.”

Ⅳ형님이 부러 말을 얄밉게 하는 거야 늘 있는 일이라 저도 평소처럼 그러나 낮의 야속함을 담아서 꽝꽝 쳐댔더니 괜히 우는소리나 해대셨다. 익숙하게 저희 둘 사이를 가르고 온 Ⅴ가 넌지시 물은 말에 Ⅲ는 이번에는 순순하게 지금 속내를 털어놓았다. 정말로 모르겠다고. 그러면 Ⅳ가 어깨를 으쓱이며 막내를 흘긋거렸다.

“내숭도 정도껏이지.”

“Ⅳ형님은 입 다물어주세요. 형님께 듣고 싶지 않아요.”

일부러 꾸며낸 겉모양을 전면으로 내세웠던 작은 형님께서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다고 단칼에 내치자, 이건 자기도 납득하는지 Ⅳ는 따로 반박해오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 Ⅴ가 막 장고를 끝낸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지만 Ⅴ가 입을 여는 것보다 바이론이 빨랐다.

“그렇지만 말이다, 얘야―,”

그건 의외의 구조선이었다. 남아있는 뒤틀림 중 하나로 방목을 택하고 유지한 그가 지금의 아들들에게 무언가 조언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나 다름이 없어, 꺼내지도 않은 말을 뺏긴 Ⅴ는 물론이요 Ⅳ와 당사자인 Ⅲ마저 놀란 얼굴을 했다. 그걸 못 본 체하며 바이론이 옛날처럼 다정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가 알고 만난 츠쿠모 유마는 그런 애가 아니지 않니? 걔를 죽이려고 한 우리조차 기꺼이 용서해준 애인걸. 그 츠쿠모 카즈마의 아들이야. 내가 보기엔, 네가 용기를 가지고 뛰어들 때 같아 보이는구나. 그 애 말을 빌리자면―알지?”

미하엘은 그 말에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져 고개를 푹 숙이고선 작게 위아래로 고갯짓했다. 등 위로 토닥이는 손길들이 닿았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약속대로 연극부 회장은 그 외 일절 연락하지 않았고 따로 눈앞에 알짱거리지도 않았다. 유마 역시 연극에 관한 이야기는 잊은 듯이 굴었지만, 때로 교내에 붙은 포스터에 눈길을 주는 걸 보면 단순히 제가 말을 꺼낼 때까진 모른 척해주려는 모양이었다. 그 누구도 제게 묻지 않으므로 Ⅲ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매일 밤 옥상 대신 마당으로 나가, 츠쿠모 가에 하룻밤 머물 적에 유마와 함께 지붕 위에서 올려다봤던 것처럼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았을 하늘에는 답이 있을 거라는 듯이.

 


답을 주기로 한 날까지 이틀이 남았다. 이제 초조함보다는 공허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남들에게 신경 쓰이지 않게 평소처럼 굴었을 텐데, 유마가 어깨를 툭 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Ⅲ, 기분전환도 할 겸 저번에 못 간 카드 가게, 갈까?”

유마 군의 기분전환에 사귄다면 얼마든지라고 생각하면서 자동 인형처럼 고개를 냅다 끄덕였는데, 뒤늦게야 유마가 기분전환의 대상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과연 너를 위해서인지 나를 위해서인지. 예사롭게 이런 걸 해치워내는, 유마의 부러지지 않는 마음은 늘 눈이 부시다. 쏟아지는 빛을 겸양하지 않아도 된다고 바로 그가 이야기했으니, Ⅲ는 습관적으로 움츠러들던 마음을 다잡았다.

이번에는 예정대로 카드 가게에 갈 수 있었다. 오히려 지금 와서 좋을지도 몰랐다. 원래 가려고 했던 날은 부스터 팩 발매일이라 손님도 많았던지라 하교 시간에 맞춰 왔으면 매진돼서 없었을 거라고 점원이 설명해줬던 거다. 원래 출시일에 반짝 사람이 몰리기 마련이고 트레이딩해서 자기 덱을 꾸리는 일이 더 비일비재해, 오늘은 저희를 제외하면 손님이 네댓 명뿐이었다. 노렸던 부스터 팩 상자도 삼 분의 이가 약간 덜 되게 차 있어, 이 정도면 직감에 따라 뽑을 만했다. 걱정거리가 있건 말건, 듀얼리스트가 새로운 카드를 만날 자리에선, 특히나 그걸 직접 드로우할 때는 잡상이 낄 여지가 없었다. 유마도 Ⅲ도 점원에게 값을 미리 치르고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심호흡이 끝난 두 사람은 진검승부에 들어간 듀얼리스트의 비장함을 입고 부스터 팩을 척척 집어냈다.

퇴근 시간에 맞물려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해서 카드 개봉은 근처 공원에서 하기로 했다. 빈 벤치에 앉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구매한 팩 하나를 집어 들었다.

증강현실이 실생활에 흔히 쓰이며 듀얼에 이르러선 듀얼몬스터즈의 공격 여파까지도 재현해내는 지경인데, 사람은 아날로그 감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지 부스터 팩은 그 옛날 초대 듀얼킹 시절과 마찬가지로 얇은 비닐을 찢어 열게 되어있다. 물론 듀얼리스트 모두는 입을 모아 말할 것이다. “이게 더 짜릿하잖아!”라고.

희비가 엇갈리는 개봉식이었다. 아, 이거 필요했어! 라거나 얘는 내 덱엔 안 맞는데, 이거 토도로키 군이 쓰는 카드군 아냐? 앗, 이거 캐시가 쓰면 되겠다-라고 두 사람은 한참을 재잘재잘 떠들어 가며 개봉한 카드들을 분류했다. 카탈로그는 집에 있다 보니 미리 몇 장 받아온 봉지에 나눠서 담고 나니 시간이 꽤 흘렀다.

“다섯 팩 열어서 덱에 바로 넣을 수 있는 게 세 장이라~. 아쉽다. Ⅲ는 그래도 좀 나왔지?”

“아, 저도 쓸 건 두 장뿐인데, 따로 수집하는 카드가 나왔어요.”

“그래서 그렇게 기뻐했구나?”

“네! 사실 이번 부스터 팩에 이 카드가 복각한다고 해서 혹시나 하고 기대했었거든요.”

“헤헤, 그럼 오늘 잘 나왔네.”

카드를 구하러 온 거였다면 꽝이나 다름없는 데도 유마는 Ⅲ의 수집품이 모였다는 말에 코 밑을 슥 문지르며 웃었다. Ⅲ는 제 일을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는 유마를 보면서 기분전환이라더니 정말 그렇게 됐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오늘은 해 질 무렵부터 흐려져 올려다볼 밤하늘이 갑갑하겠구나, 하고 멀건 생각을 떠올린다. 그런 하늘은 아무리 바라보아도 답 따위 떠오르지 않겠지, 하고.

그 순간 장막을 가르는 검처럼, 안개를 풀어헤치는 햇살처럼 계시와도 같은 말이 쏟아져 그의 상념을 양단한다.

“있지, Ⅲ. 난 네가 뭘 선택해도 좋아. 너는 너잖아. 나한테 Ⅲ는 언제까지고 유일하게 Ⅲ야.”

깜짝 놀라 고개를 들면 안온하고 깊은 눈과 마주친다. 아까까진 분명 일곱 살 난 아이처럼 무구하게 웃던 이 애는 사진으로만 뵈었던 그의 부모님과 꼭 닮은 얼굴을 하고서 다정하게, 가만히, 잔잔하게 저를 들여다보고 있다. 푹 잠겨 드는 감각. 절망의 늪과 다르게, 체온과 비슷한 물속에 잠기는 기분이다.

형용할 수 없는 감각에 잠겨 들었던 것도 잠깐이었다. 갑자기 허를 찌르듯 발동한 속공 마법처럼 굴었던 것도 잠시, 유마는 금방 구김살 없는 또래의 얼굴이 되어 히히 웃었다. 미하엘 아크라이트 역시 그에 이끌려 소리 내어 웃었다. 한참을 웃다 못해 눈물이 날 때까지.

 


그날 저녁, Ⅲ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Ⅲ―미하엘 아크라이트는 숨을 들이쉰다. 막이 열린다.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객석은 어둡고 멀지만, 그는 츠쿠모 유마를 단번에 잡아내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손에 든 검을 치켜들며 대사를 읊는다. 이번 작품에서 이 검의 이름은 원전 신화를 따라 세 개의 이름을 전부 쓴다. 슬픔이며 상처, 분노 그리고 필요. 손에서 검의 형태로 구현된 이것은 단순한 소도구일 수가 없다. 제 삶이기도 한 것이다. 그들은 제 삶에 돌이킬 수 없는 화상을 남겨 혼을 일그러뜨렸지만 동시에 슬픔과 분노―이 상처들 없이는 지금의 제가 없을 것임을 이해한다. Ⅲ는 이제는 이들의 필요성을 확신한다. 그 지난한 가시밭을 겨우 긍정할 수 있게 되었다. 검의 이름은 인물의 삶과 함께 바뀌어 간다. 새로운 이야기로, 더 새로운 지평으로―.

인물의 이름과 감정을 빌려 외치는 대사에는 힘이 있다. 등장인물을 입은 이가 같은 궤적의 상처를 지녔다면 더더욱 그렇다.

주연배우가 펼치는 전투 장면에서의 힘차고도 처절한 동작이, 사이사이 뱉어지는 고통스러운 대사가, 마치 자기 것인 듯한 뿜어지는 희로애락이 예스럽게 마련된 극장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 안에서 츠쿠모 유마는, Ⅲ의 가장 빛나는 별이며 불변의 지침은 온갖 상흔으로 너덜너덜해진 대지가 그조차 품어 아름다운 무늬를 입고 단단하게 세워짐을, 그리하여 삶을 향해 전력 승부하기로 결심한 영혼의 반짝임을 마주한다.

“그게 너야, 미하엘. 내가 아는 너.”

상처 입고도, 눈물을 흘리고 분노하면서도, 영원히 누군가를 미워하지는 못하던 상냥한 사람. 그야 화산은 영원히 분화하지 않는 법이며, 과거란, 대지란 그렇게 새겨진 상흔조차 제게 조각된 것으로 여기며 나아가는 존재니까.

그런 네가 무대를 내려오면 품에 가득 안기는 꽃다발을 건넬 것이다. 내가 모를 두려움과 있는 힘껏 맞서 싸운 네게 나 역시 전력으로 함께 하겠노라고 약속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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