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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왕 5Ds/크로우+브루노] 십시일반

"누군가의 호의와 연민이 있어서 내가 살아남았다는 거지."

** 투비로그에 23.02.25.에 올렸던 글을 가필수정하여 펜슬에 재업로드했습니다.

** 무척 맘에 드는 글이다보니 기합이 들어가버렸습니다만, 후회는 없다. 제목도 어찌어찌 맞게 자리를 찾았다 싶습니다.

* 시계열은 85화 <폿포타임의 오래된 시계> 후 ~ 크래시타운 스토리아크 이전의 어드메.

* 태그포스 4, 5, 6의 일부 내용을 입맛대로 차용하면서(노머니 야요이 관련), 크로우의 과거를 날조합니다.

* 제로 리버스 관련으로 언급된 구체적인 설정은 개인 팬피셜(잭-유세이-크로우 나이 차이만 공식)

* 때때로 오탈자 및 비문 수정됩니다


폿포타임의 차고는 넓은 편이었다. 옛날에는 시계 공방이었다고 했으니 필요한 부품 따위를 들이거나 멀리서 들어온 의뢰품을 두거나 하는 공간이 필요했던 걸지도 몰랐다. 처음 이곳을 보러 왔을 때는 세 명의 D휠을 놓고도 공간에 여유가 있어 엔진 개발을 할 작업장으로 삼을 수 있겠다며 단순한 생각으로 좋아했고, 지금은 이곳의 주요 수입원을 지탱하는 데에 있어 필수적인 공간이 되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차고의 최소 사분지 일은 블랙버드 딜리버리가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블랙버드 딜리버리의, 당일 보내는 게 아닌 짐은 폿포타임 차고 겸 작업장의 한구석에 운송장과 함께 부려져 있는 게 보통이다. 그렇지만 오늘은 무언가 달랐다. 짐수레 하나를 확실하게 채울 수 있을만큼의 상자들이야 왕왕 보는 거지만, 거기에는 따로 송장이 붙어있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런 적이 있던가, 하며 여기서 지낸 지 이제 두 달을 넘긴 브루노는 괜히 쌓여있는 짐을 기웃거렸다. 이 철제 지붕 아래에 사는 이들은 서로 제각각인 시간표를 살고 있어서 그렇지, 모두가 제 나름껏 하루하루를 착실하게 쳇바퀴 돌리듯 지내니 이런 식으로 평소와 어긋나는 일은 드물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걸 더 잘 알고 있을 잭이나 유세이는 별다른 말이 없더랬다. 브루노는 각자 소일거리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을 흘긋거렸다. 그렇다면 제가 모를 뿐이지 이 불규칙성조차 어떤 커다란 주기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브루노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유세이에게 질문을 던지려고 입을 열었다. 아니, 정확히는 열려고 했다. 시도만으로 그친 까닭은 위층과 연결된 철제 사다리가 깡깡 소리를 내서다. 저걸 쓰는 인원은 사실상 한 명뿐이었다. 드물게도 이 시간까지 보이지 않았던 크로우. 다른 때면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일하러 나갔을 테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딜리버리가 쉬는 날인 모양이다. 사다리 한중간에서 훌쩍 뛰어내린 그의 차림새를 보면 작업복이 아니었다.

크로우는 시멘트 바닥에 가볍게 착지하고선 차고 안을 가볍게 둘러보았다. 잭도 유세이도 분명 크로우가 온 걸 알았을 텐데, 그쪽을 돌아보지 않는다. 다른 때면 벌써 인사를 하고 남았을 시간인데도. 크로우 역시 굳이 두 사람에게 말을 붙이지 않고 눈을 갸름하게 떴다가, 문득 눈이 마주친 브루노를 쳐다보기 무섭게 씨익 웃었다. 그건 장난을 떠올린 막내의 표정이기도 했지만, 미묘하게 결이 달랐다.

“유세이, 브루노 좀 반나절만 빌려 간다. 나 없는 사이에 잭이 헛짓거리 못하게 잘 봐두라고. 특히 저기 맞은편 커피숍 간다 싶으면 다리를 콱 분질러버려.”

“잠깐! 그 말은 마치 이 내가 골칫덩어리라는 게 아닌가, 크로우!”

“헹, 내가 뭐 틀린 말 했냐?”

“…새틀라이트 다녀오는 거지? 그리고 진정해, 잭. 우리 수입원 대부분은 크로우가 벌어오는 게 맞으니까. 별수 없지.”

“윽! 그렇지만 저 짐은―”

“거긴 널 끌고 가봤자 소용이 없다고 말했었잖아, 멍청아. 브루노, 가자. 따라와.”

“어, 으응….”

쭉 무시를 일관하는 듯했던 잭이 크로우의 발언에 펄쩍 뛰었고, 거기에 유세이도 미적미적 말을 얹었다. 원하는 반응이 맞았던 걸까. 철제 둥지의 막내는 한결 상쾌한 얼굴을 하고서 브루노에게 손짓한다. 핑퐁처럼 빠르게 오가던 대화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 채 눈만 데루룩 굴리고 있었던 팀 파이브디즈의 메카닉은 저를 손짓으로 부른 크로우 곁에 얼결에 서 놓고는 그제야 셋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깨달았다.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해서 내려온 크로우와 그런 그를 절대 보려고 하지 않았던 잭과 유세이. 그래서 크로우는 그런 두 사람의 주의를 억지로 끌어낸 거다. 차근히 직전 정경을 곱씹으면 내도록 어색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또렷해졌다. 크로우의 도발에 잭이 반발하는 거야 늘상 있는 일이래도 오늘의 그것은 평소에 인사처럼 주고받는 투닥거림이 아니라 어떤 명백한 방향성을 가진 호소였고, 크로우에겐 확연히 유한 태도를 보이던 유세이는 이 아침 내도록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아까 말끄트머리에 붙은 사족은 거진 비꼬는 어투가 아니었는가. 꼭 토라진 아이처럼.

저 셋 사이에 뭔가 불화라도 생긴 걸까. 피가 이어진 가족은 아니지만 혈육처럼 끈끈한 유대를 보이는 세 명인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저들이 심각한 일로 싸운 건지 아닌지조차 짐작이 가질 않는다. 저 두 사람을 보면 뭔가 큰일 같은데, 정작 크로우를 보면 그건 아닌 것도 같고. 아니, 잠깐. 문지방을 넘다 말고 브루노가 멈칫했다. 그것보다 잭과 유세이가 크로우에게 심통이 난 거라면, 지금 제가 그를 따라갔다간 나중에 봉변당하는 게 아닐까? 덜걱 멈춘 발소리를 들은 크로우가 고개를 한참 꺾어 올려다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웃어 보였다. 그걸 인제서야 깨달았느냐는 놀림이 그득한데, 브루노는 거기에 대고 무서우니 폿포타임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사실 저 두 사람보다 저를 택해준 게 기뻤던 거다. 기억도 뭣도 없이 얹혀살고 있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뭐든 하겠다는 맘도 있고, 크로우가 저를 꽤 기꺼이 믿어준다 싶어서이기도 했다.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에 크로우는 손끝으로 저편을 가리켰다. 브루노는 눈만 껌뻑였다. 그 반응에 크로우가 짧은 한숨과 함께 단어 하나를 뱉었다. 새틀라이트. 새틀라이트?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나서야 브루노는 그 이름에 얽힌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그래, 유세이나 다른 사람들 입으로 전해 들은 그곳이다. 어찌 보면 모든 것의 시작점인 곳. 지명을 읊은 크로우의 표정이 어쩐지 안개처럼 흐렸으므로, 브루노는 그 이상 묻지는 않기로 했다.

 

그리하여, 진노랑색 스쿠터와 블랙버드가 나란히 도로를 달리고 있다. 블랙버드가 맞춰서 달린다기보다는 그 뒤에 상자가 가득 쌓인 짐수레가 연결되어 있어 그랬다. 제아무리 모먼트 엔진을 썼다곤 해도 스쿠터가 낼 수 있는 출력은 고만고만해서, 라이딩 듀얼 용으로 개발된 D휠의 최소 주행 속력에 비할 바가 안 될 테니.

하긴 그걸 참작하더라도 크로우가 유독 서행하고 있긴 했다. 블랙버드 딜리버리가 추구하는 바는 신속과 안전이라고 몇 번이고 들었지 않았나. 실제로도 크로우가 그 슬로건을 유언 실행하는 건 알았다. 일하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화물 수량과 그걸 배달하는 데에 걸린 시간을 생각하면 대강 견적이 나오니까.

브루노는 그걸 나름대로 분석했더랬다. 일종의 소일거리이자 백 퍼센트 흥미 위주의 탐구였다. 블랙버드 뒤에 연결한 짐차는 다른 것과 달리 동체가 되는 D휠과 단단하게 연결되어 두 구조물의 합보다는 길게 연장된 D휠이나 다름이 없었고, D휠을 자기 손발의 연장처럼 자유롭게 다루는 크로우는 그 무게감에만 적응하면 고공 점프 같은 묘기가 아닌 한에야 정말 뭐든 해냈다. 다시 말해, 그 중량을 가지고 말도 안 되는 속력으로 내달린다는 뜻이다. 사고 없이.

그러면 지금 실어 나르는 게 귀중품은 아닐진대(귀중품 운송요청은 늘 시티에서 들어왔다. 한 건의 예외 없이), 왜 이리 천천히 움직이는 걸까. 이게 단순히 제 스쿠터와 보조를 맞추는 것은 아니라는 감은 있었으므로, 브루노는 얼마 없는 정보를 요모조모 만지작거렸다. 예외적인 현상들과 조각난 단어들을 가지고는 결코 답이 나오지 않을 텐데도. 이것도 그럴싸하고 저것도 말은 되는 듯하다며 마구잡이로 뻗어나가던 상념은 덜컥 끊겼다. 블랙버드의 우측 지시등이 깜빡인 탓이다.

생각에 잠겨있느라 표지판을 놓쳤던 모양인데, 바로 오른쪽에 나들목이 있었다. 브루노는 허둥지둥 속도를 슬며시 줄여가며 핸들을 꺾었지만, 정작 크로우는 직선으로 달리던 속도를 하나도 줄이지도 않고 예사롭게 코너링했다. 어차피 빠지는 길은 1차선이라 나란히 갈 수 없으니 뒤로 쳐진 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이제부턴 아직 내비게이션 지도가 업데이트되지 않은 초행길이라는 게 새삼 떠올라 조금 긴장하고 말았다. 지금껏 말로만 들었던 새틀라이트로의 첫 방문이다.

숨을 들이쉬면 비리고 짭짤한 바다 내음이 폐부에 진하게 고여 들었다. 폿포타임에 있을 적에 마주한 바람에도 짠 내가 꽤 섞여 있어 이게 바닷바람이구나 했는데, 아예 바다와 면을 맞댄 곳에서 불어오는 것과 비교가 안 됐다. 모먼트 엔진 전용도로에서 벗어났으니, 제한속도가 생겼다. 사실 비포장도로도 군데군데 있고, 포장도로여도 아스팔트가 깨지거나 패 있다 보니 여기서 전용도로처럼 달렸다간 동체가 뒤집힐 것 같아서 속력을 낼 엄두가 안 났다. 그런 감상을 내놓자, 크로우는 코웃음을 쳤다. 여기서 나고 자라 D휠 걸음마를 뗀 사람이 사방팔방에 널렸는데 정말 그러겠느냐고. 달리면 그냥 달리는 거지.

결국 말만 그랬을 뿐 크로우는 굳이 그가 평소에 부리곤 하는, 묘기에 가까운 속도를 내지는 않았다. 따지라면 시내 규정 속도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일까. 그 덕에 브루노는 폿포타임의 세 사람이 뜨문뜨문 말해줬던 새틀라이트를 천천히 뜯어볼 여유가 생겼다.

어디는 한창 옛 건물을 철거하느라 압쇄기를 장착한 포크레인이 분주하게 일하고 있고, 저만치 반대편에선 5층짜리 낮은 건물이 올라가는 중인지 인부와 드론이 합세해서 작업용 안전그물과 비계를 설치하고 있었다. 크로우는 여기 공사판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안면이 있는 모양이라 지나가면서 종종 인사를 던지곤 했다. 그가 먼저 아는 체를 할 때도 있고, 저쪽에서 우렁찬 목소리로 “여어, 크로우 아니냐! 오늘 쉰다더니!”라며 반갑게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이웃사촌, 한동네 식구. 그런 말이 문득 떠오를 정도로 정겨운 광경이었다.

그렇게 철거와 건설이 분주하게 일어나는 몇 구역을 지나면 이제 부서지다 만 모양새의 살풍경한 아스팔트 덩어리가 즐비한 데가 나왔다. 브루노는 이제서야 그들에게 들었던 내용과 일치하는 풍경을 마주했다. 회색 폐허. 셋이서 입을 모아 담담히 말한 공통항. 저도 모르게 작게 탄성을 뱉은 모양인지 크로우가 소리 내 웃었다. 브루노, 너 방금 우리 꼬맹이들이 신기한 걸 봤을 때랑 똑같았어, 알아? 그러면서 블랙버드를 스르륵 멈춰 세웠다. 브루노 역시 그를 따라 스쿠터를 세우며 주위를 흘금 둘러봤다. 고만고만하게 살풍경하다. 바닥에 나뒹구는 간판은 아주 오래전에 떨어져, 원래 무슨 이름을 걸었는지 알아볼 수가 없다. 그럭저럭 모양이나마 갖춘 두어 채를 보면 이곳이 숙박시설이 모여있던 거리가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추론을 제시할 수 있을 듯했다.

“다 왔어. 지금부터는 절대 입 열지 말고, 얌전히 짐만 나르면 돼. 대꾸도 하지 마. 알았지? 질문은 일이 다 끝나면 답해줄 테니까.”

냅다 못부터 박은 크로우에게 일단은 위아래로 고개를 열심히 끄덕인 브루노는 호텔인지 모텔인지 삼 분의 일은 허물어진 숙박시설을 한 번 쳐다보고는 입엣말로 크로우의 요청을 복창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짐만 얌전히 나른다. 질문은 일이 끝나고서! 하나도 어려울 게 없는 부탁이지 않은가. 그 사이, 크로우는 터벅터벅 담벼락 근처까지 걸어가더니 냅다 손을 입 앞에 모아서 외쳤다.

“어이, 노머니 씨! 나 왔다구~.”

아니, 무슨 이름이 그래. 브루노는 순간 목젖까지 치밀어 오른 문장을 꿀꺽 삼켰다. 잘못하면 3초 만에 약속을 어길 뻔했다. 덕에 히끅, 하고 목을 울리는 소리가 크게 났는데, 저희 작은 친구는 제 쪽을 돌아보지도 않는다. 이걸 저를 신경 쓰지 않는다고 서러워해야 할지 철석같이 믿어준다고 기뻐해야 할지 가늠이 안 갔다.

크로우가 한 번 더 소리 높여 그 특이한 이름을 불렀고, 이번에야말로 반응이 왔다. 대답 대신으로 슬리퍼를 끄는 발소리이긴 했지만.

담벼락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벽돌과 시멘트 덩어리 몇 개 너머로 시선을 올리면, 눈을 부라린 인상이 사나운 여자가 몇 번이고 수리한 흔적이 있는 현관문을 밀고 나온 참이었다. 가시처럼 싸납게 돋은 저 기세를 마주하면 꽤 많은 사람이 주눅 들 것이 분명하다. 그런 분위기에 반해, 바닥을 사분사분 밟는 동작은 길고양이의 그것처럼 조심스러워서 거칠게 보여도 경계심이 강하고 신중한 데가 있음이 틀림없다.

눈만 좌우로 굴려 가며 주변을 살피던 그가 크로우를 일별하자마자 경계심을 지워 무표정으로 돌아갔다가, 곧 그 뒤에 서 있는 멀대―브루노를 발견하더니 처음의 몇 배는 더 인상을 썼다. 히익, 브루노가 숨을 집어삼켰다. 노머니가 노호하는 것보다 크로우가 진정하라며 양손을 내젓는 게 빨랐다.

“말도 없이 미안하게 됐어. 쟤는 우리집 식객인데, 짐만 나를 거야. 아무 말도 안 할 거고, 여기서 본 걸 말할 배짱도 없어.”

내용으로 볼 때 처음에 제게 부탁한 그거 같은데, 저렇게 들으니 수상하기 그지없다. 무슨 밀거래 현장처럼 되어버렸잖아! 비명을 뺵 질러 공포심이나마 털어내고 싶어도 노머니라는 사람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저를 찢어발길 기세로 뜯어보고 있어 여의찮았다.

체감으론 세 시간 같은 영점 삼 초가 지났다. 겁이 너무 나면 오히려 몇 바퀴는 돌아서 차분해진다고 했던가, 브루노는 맥을 탁 놓아버리고 그냥 머쓱하게 웃었다. 잭이 때때로 “너무 맥아리가 없어 화낼 기력조차 없어졌다”라고 평하는 그거다. 그리고 넉넉히 잡아 오 초가 흐른다. 하아. 상대에게서도 김빠진 한숨이 났다. 이 미터의 싱거운 웃음은 노머니 씨에게도 어찌어찌 먹힌 모양이었다.

“호건, 당신이 끌고 온 놈이라 봐주는 거야. 내가 사내새끼를 홈그라운드에 들이지 않는 걸 잘 아는 사람이 말이지. 쯧, 뭐, 이번에 부탁한 물건이 많은 건 사실이고.”

“양해 감사. 브루노, 얼른 옮기자고.”

쯧, 하고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시선이 떨어져 나가고서야 폿포타임의 최장신이자 가장 무해한 멀대가 살았다는 듯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한숨을 토했다. 그러기가 무섭게 노머니가 다시 살벌하게 째려봐서 브루노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살려줘! 이 사람, 무서워! 도끼눈에 찍힌 채로 브루노는 삐걱삐걱 몸을 움직였다. 이런 때는 맡겨진 일에 매달려 몰두하면 어찌어찌 된다는 걸 경험적으로 배운(그는 차라리 잭에게 감사하기로 했다! 잭 정도면 상냥했던 거다!) 그는 슬금슬금 멀어지다가 잽싸게 짐차 쪽으로 뛰었다. 평소라면 무거워서 우는소리를 했을 짐의 묵직함이 어찌나 반가운지. 원래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은 건드는 게 아니랬다. 짐을 두엇 옮겼을 즘에 브루노는 노머니 씨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과 달리 발소리 하나 내지 않았으니, 그건 대답 대신이 맞았구나, 하는 감상이 들었다.

노머니 씨의 아지트는 주변 건물에 비해 외양이 그럴싸하고 실내 또한 많이 낡아서 그렇지 멀쩡하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전기나 수도 따위가 망가진 채였던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아 위로 칠 층 짜리 건물을 전부 발로 뛰어다니니 철야를 밥 먹듯이 할 만큼 체력이 있어도 꽤 버거웠다. 둘이서 바지런히 움직여 한 시간이 조금 못 되어 일을 마쳤는데, 이걸 크로우 혼자서 했으면 두 배는 더 걸렸겠지 싶다. 마지막 짐은 다행히 일 층 로비에 둘 물건이라 부리는 건 수월했다. 상자를 내려놓은 브루노가 몸을 일으키며 앓아댔다. 그러면서 출입구 쪽으로 몸을 돌리는데, 어느샌가 나타난 노머니 씨에게 크로우가 흰 봉투 하나를 건네는 걸 목격했다. 흰 봉투. 약간의 두께감. 결정적으로 막 들어온 햇빛이 그 내용물을 엷게 비추어냈다. 돈이다. 거기까지 인식한 브루노는 혀끝에 고인 비명인지 뭔지를 앞니로 씹어 부수고 삼켰다. 아직 크로우와 약속한 묵언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소리 없이 아우성을 치긴 했어도 소리는 내지 않았을 텐데, 일순 두 사람이 이쪽을 봤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건 깃털이 스치듯 찰나였고, 브루노는 허둥지둥 건물을 빠져나갔다. 여기 주인도 크로우도 그런 저를 말리지 않았다.

등 뒤에선 대화가 들렸다.

“그럼 나중에 봐. 도중에 물품 떨어지면 신경 쓰지 말고 연락해.”

“흥, 내 앞가림은 내가 알아서 해.”

“물론 잘 알지만, 빚은 제대로 갚게 해주라.”

다음에 이어진 킬킬거리는 소리는 익숙한 크로우의 웃음이고, 그 아래에 바람 빠지듯 한 건 노머니 씨의 웃음소리 같았다. 그 사람, 대체 어떤 얼굴로 웃는 걸까. 궁금했지만 브루노는 굳이 위험한 다리를 건너지 않기로 하고 얌전히 등을 돌리고 기다렸다.

채 일 분도 지나지 않아 누가 등짝을 팍 쳤다. 비명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만 가감한 손맛은 크로우다. 유세이는 저를 때리지 않고, 잭은 늘 있는 힘껏 때리니까. 그리곤 연이어 토닥토닥. 수고했다는 식으로 등을 두어 번 두드린다. 자리 옮기자. 고개 끄덕이지 말고. 이쪽에 몸을 바투 붙이고 성량을 잔뜩 낮춰 입만 뻐끔거리듯이 속삭인 목소리에 브루노는 알겠다는 표시로 몸으로 가려진 데에다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붙여 보였다.

곧, 노란 스쿠터와 까만 D휠이 새틀라이트 미개발 지구를 떠났다.

 


크로우가 저를 끌고 간 곳은 미개발 지구의 좀 더 깊숙한 어딘가였다. 아까 있던 곳이 숙박 거리였으니 어쩌면 이곳은 주거 지구였을지도 모르겠다. 시야에 들어오는 건물 대다수가 형태가 온전하진 않아도 단독주택 아니면 층이 낮은 연립으로 보이니 타당한 추론일 거다.

개중 3층짜리 빌라가 있다. 옥상이 다 허물어져 꼭대기 층은 주거 공간으로서 효용을 완전히 잃었지만, 일이 층은 멀쩡한 건물이었다. 크로우는 거기가 꼭 자기 집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태연하게 발을 디뎠고, 브루노는 너덜너덜한 건물이라도 얼마든지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을 좀 전에 목격했던 터라 이게 불법 침입이 되지는 않을지 쩔쩔매며 우물쭈물 그의 뒤를 따랐다.

브루노의 걱정과 달리 이곳은 정말로 사람이 살지 않는 듯했다. 노머니 씨의 호스텔은 그럭저럭 누군가 오가므로 먼지가 두텁게 쌓이질 않았는데, 여기는 달랐다. 얼추 멀쩡해 뵀던 외장과 달리 실내는 다 삭아버렸다. 벽지는 제대로 존재했는지조차 알기 어렵게 퇴색했고 식탁이나 소파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구 몇 개는 먼지와 뒤섞인 채로 골격이나 간신히 남아 여기에 언젠가 누군가 살았음을 알렸다. 이 층 천장 일부가 무너졌던 건지 뻐끔하게 뚫린 데가 있고, 그 아래만 비바람으로 먼지가 엉겼다가 마르기를 반복해 시꺼멓게 굳었다. 근처에서 올려다보면 하늘도 잘만 보였다. 크로우는 거기 떨어진, 녹이 슨 철골이 박혀있는 콘크리트 덩어리 하나를 대충 털고선 걸터앉는다. 브루노 역시 머뭇거리다가 똑같이 따라 했다. 자기가 거기까지 깔끔 떨지 않는 성격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곁눈질로 브루노가 착석하는 걸 확인하고서, 크로우가 고 싸인을 냈다.

“오래 기다렸겠네. 묻고 싶은 거 다 물어봐.”

“아까 그, 노머니 씨, 라고 했나? 그 사람은 누구야? 크로우가 빚을 졌다는 건 무슨 말이고?”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온 질문에 크로우가 킥킥 웃었다. 평소보다 색이 엷지만 즐겁다는 기색은 있다. 짧게 웃은 그는 브루노를 보지 않은 채로 느긋하게 답했다.

“그걸 묻겠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도 그게 본명인지는 모르지만, 노머니 씨라면 그냥 옛날부터 저 호스텔에 터를 잡은 사람이야. 그때도 유명했지. 남자를 미친 듯이 싫어해서 여자나 애들 아니면 그 구역을 지나가지도 못했어. 지금은 성질 많이 죽이신 거지.”

“어, 그럼 크로우는?”

“나? 나는 뭐, 알잖아. 우리 꼬맹이들. 애들을 돌보고 있었으니까 봐준 게 아닐까? 하긴, 이유를 물어본 적은 없네. 그래도 대강 맞긴 할 거야. 그때도 B.A.D.지구의 크로우하면 꽤 알아줬거든. 옛날에 우리(나랑 잭이랑 유세이. 거기에 한 사람 더 있는데 넌 걔 모르니까)가 이름 좀 날렸는데, 그 덕을 봤지. 여하튼 그래서 노머니 씨는 면 대 면으로 만나기 전부터 날 알았다더라고. 그러니까 그 사람은 크로우 호건 말고, 애들 보호자인 까마귀를 본 거겠지.

그리고 빚 이야기라면 내가 좀 실수해서 세큐리티 신세를 질 것 같다 싶었을 때 우리 꼬맹이들을 종종 맡겼거든. 대충 그런 이야기.”

이럭저럭 앞뒤가 맞아떨어졌다. 그렇다면 왜 부려진 짐에 송장이 없었는지, 그 흰 봉투가 준비되어 있었는지도 수긍이 간다. 브루노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 가설을 검증받아본다.

“그래서 물자랑 생활비를 보내는 거구나?”

그러면 크로우는 시원스럽게 인정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엉. 시티하고 새틀라이트가 합쳐졌다고 해도 말이지, 이쪽 녀석들이 아, 그러십니까-하고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새틀라이트 사람이면서 시티(외곽이긴 하지만 말야)로 바로 넘어온 우리가 좀 특이한 경우긴 할걸. 온실 속 화초라거나 시티촌놈이라면서 비웃는 놈들이 꽤 많아. 뭐, 그렇게 따지면 시티놈들도 마찬가지고. 걔들이야말로 오히려 야만스럽다느니 하면서 호들갑이나 떨고. 그러니까 노머니 씨네처럼 새틀라이트 사람이 있을 만한 데가 하나라도 더 있는 게 낫다는 말씀.

아차, 이거 유세이까진 그렇다 쳐도 잭한테는 절대 말하지 마. 자기가 벌지도 않으면서 마사하우스 말고 다른 곳에 돈 나가는 거 알면 장난 아니게 투덜댈 거야.”

부감하듯 객관적인 어조가 막판에 가서 확 뒤집혔다. 저희네 이야기로 흘러와서다. 하긴, 물건까진 그렇다 쳐도 아예 현금 원조가 있었다는 걸 알면 잭이 어떻게 나올지가 훤했다. 상상만으로도 귓가가 쩌렁쩌렁 울리는 기분을 느끼면서 브루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고채도로 번쩍이는 여러 감정이 넘실거려 이를 살며시 물었다가 놓았다. 잇새로 잠깐 부숴 삼키지 않으면 탄성인지 뭔지가 튀어나올 것 같다. 그렇지 않은가. 아침부터 지금까지 놀라운 일투성이였는 것을. 언제나와는 달랐던 세 사람에는 당황했고, 그랑프리 준비자금과 마사에게 보내는 지원금 외에 폿포타임의 금고지기가 따로 챙기는 후원 내역이 있다는 사실엔 놀랐으며, 소꿉친구이자 가족이기도 한 두 사람에게 밝히지 않은 것을 제가 듣게 된 것은 기뻤다. 저를 퍽 기껍게 여겼으니 말해준 게 아니겠나. 제가 크로우에게 가까운 사람이라는 걸 실감하게 된 것은, 지금쯤 폿포타임에서 창울悵鬱하게 토라져 있을 잭과 유세이에겐 미안하지만, 정말로 가슴 뿌듯하게 행복한 일이다.

“그럼 잭이나 유세이를 데리고 오지 않은 건, 후원을 숨기려고 한 거구나. 응? 잠깐만. 잭은 그렇다 쳐도 유세이는 괜찮지 않아?”

“아까 그 이유도 있지만, 노머니 씨는 내 옛날 시절 지인이잖아. 그래서 안 되는 거야. 그 사람하고 어떻게 만나서 알게 됐는지 설명하려면 결국 옛날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잭은 내가 그런 이야기 하는 거, 안 좋아하고, 유세이는 쓸데없이 이상한 걱정이나 해. 그러니 말할 수 있겠어?”

아, 그래서였구나. 브루노는 드디어 명쾌해진 인과관계에 속으로 탄성을 냈다. 허물없이 굴다가도 어쩌다 세 사람 사이에 떡하니 놓이는 어떤 골짜기. 어린 시절을 함께 컸다곤 하지만, 떨어져 있는 기간이 있었다는 건 들었다. 어쩌면 이 셋은 그 기간에 관해 깊게 이야기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제삼자로 보면 명백했다. 잭은 크로우가 과거에 여전히 발이 묶여있는 건 아닌지를, 더 나아가 저희와 함께하는 지금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돌아 떠나지는 않을지를 겁내고, 유세이 역시 같은 맥락에서 자신들이 흩어져 있던 시간이 크로우에게 있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남아있는 건 아닌가를 걱정한다. 어찌 보면 가까운 사이라서 생긴 문제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그런 생각이 표정에 다 드러난 듯싶다. 그것도 아니면 작업할 때 종종 그러듯 혼잣말로 튀어나왔거나. 어쨌건 크로우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쯧, 하고 혀를 찼다. 영 못마땅한 목소리다.

“뭔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그냥 걔들이 날 과보호하는 거야. 젠장, 내가 뭐 아직도 마사하우스 있던 시절의 꼬맹이인 줄 아나. 자기들만 수수깡처럼 쑥 컸다 이거지, 아주.”

“하긴, 평소 똑 부러진 걸 보면 크로우가 막내라고 생각 못하지. 난 잭이 제일 어린가 했었어.”

“네가 봐도 그렇지? 하여간 허우대만 멀쩡해선. 걘 시티에 있을 때 너무 오냐오냐 큰 거야.”

곧 웃음이 터졌다. 남들에게 잘 닦인 트로피로 내세워진 킹을 모르는 브루노와 애초에 걔를 마사하우스의 잭 아틀라스부터 봐왔던 크로우에게 있어서 저희 금발자안의 멀대는 그런 인상인 거다. 깔깔 웃으며 의미 없는 하이파이브를 주고받고선, 브루노가 숨을 가다듬다 말고 그래도 잭이 멋진 건 사실이지 않냐고 말을 툭 밀어냈다. 크로우는 입술을 비죽이다가 한참 뒤에야 거의 기어드는 목소리로 “걘 듀얼하려고 태어난 놈이니까.”라고 중얼거렸다. 크게 굽어져서 그렇지, 듀얼리스트에게 있어선 최상의 긍정이 돌아와서 브루노는 다시금 파안했다. 속으로만. 여기서 크로우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본전도 못 찾는다. 평소에는 그렇게 맞서고 부딪히지만, 저 둘이 사실은 사이가 좋은 게 맞는다고 새삼 생각했다.

그러다가 돌연, 어느 의문 하나가 보글보글 떠올랐다. 꽤 오래전부터 제 속에 가라앉았던 물음이다. 쉽게 파헤칠 것이 아니라는 예감 때문에 매번 삼키고 있었더랬다. 그렇지만 잔뜩 몽그라져 마음의 껍질이 얇아진 지금이라면. 이 분위기에 힘입어, 브루노는 묵직한 그것을 슬그머니 입 밖으로 내어본다.

“있지, 크로우는 어째서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다정한 거야?”

“엥?”

직전의 웃음은 뚝 끊기고, 회색 눈동자가 둥그렇게 뜨였다가 곧 몇 번을 깜빡였다. 질문을 듣기는 했으나 그 내용을 소화하는 데에 버벅거리는 모양새였다. 초침이 한 바퀴를 돌았을 무렵에야 크로우가 바닥 어디 한구석으로 시선을 내리깔더니 뒷덜미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초조함인지 머쓱함인지 구별이 안 된다. 또 한참을 그러고 있던 그가 겨우 우물우물 말을 돌려줬다.

“음, 내가 다정하다고…. 정말 다정한 건지 솔직히 모르겠지만, 브루노 네가 날 그렇게 본 이유는 알 것 같네. 그건 내 나름대로 뭐가 있긴 한데, 남한테 말해본 적이 없어가지고….”

크로우가 이만큼 머뭇거리는 건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괜히 들쑤신 걸까. 다정함은 대체로 상처에서 비롯한다. 접근 불가한 기억 섹터에서 비롯했을 저 문장 하나가 자꾸만 호기심을 팔랑였을 뿐인데, 이 물음으로 크로우가 괴로운 추억을 곱씹게 된다면 답 같은 거 듣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말하려는 찰나에 크로우는 여전히 시선을 바닥에 꽂아둔 채로 손을 내저었다. 그리곤 천천히 고개를 든다. 눈이 맞고,

브루노는 숨을 집어삼켰다.

거기엔 탁색이 있다. 너무 많은 것이 겹쳐서 흐려져 버린, 이곳 풍경을 옮겨 담은 듯한 회색이다. 무기질의, 부서지는, 폐허를 닮은. 그 모든 서술은 현재 느끼는 감정을 투명하게 직정直情하는, 브루노가 익히 보아 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잿빛의 온도감만은 그가 아는 포근함에 근접했으므로, 브루노는 거기서 침착하게 범람이 가라 들길 기다린다. 흙탕물이 서서히 가라앉아 마침내 침전할 것이 침전하고 떠오를 것이 떠오르듯, 거기 혼란은 차차로 무풍지대가 된다. 습습한 바닷바람이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진 다음의 일이었다.

크로우는 이제는 말하기로 맘먹었다는 듯 숨을 짧게 한번 내쉬고선 화두를 던졌다.

“유세이한테 어디까지 들었나 모르겠네. ‘제로 리버스’는 알지?”

“응. 후도 박사님이 유세이를 포드로 탈출시켰고, 마사 씨가 그걸 발견했다는 건 들었어.”

“마사는 그때 고아가 된 애들을 꽤 거뒀어. 잭도 그때 찾았었대. 공원에서. 두 살쯤 이랬던가. 마사 말로는 부모님이 잭을 지키다가 죽은 게 아닐까 했고. 어른 둘이서 아이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나 뭐라나. 얼굴을 알아볼 상태는 아니었다지만, 마사가 그렇게 봤으면 맞겠지.”

유세이 건은 이미 알았고, 잭 이야기는 이번에 처음 들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크로우 차례겠구나, 하는데 어째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침묵이 길었다. 본인 이야기는 역시 하기 어려운 걸까. 그렇게 얌전히 기다리자니 크로우가 이쪽을 향해 쓰게 웃었다. 어깨를 한 차례 으쓱한 그가 다시금 먼 데로 시선을 옮기더니, 말을 멈춘 적이 없다는 듯 여상한 목소리를 하고선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나는 걔들하고 여섯 살쯤인가? 그때 만났어. 유세이가 날 발견했고 잭이 끌고 갔었지. 진짜 무서웠는데, 그때. 난데없이 우악스럽게 잡혀서 질질 끌려갔으니까.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마음먹은 일엔 정말 막무가내야, 걔는.”

“아니, 잠깐, 타임라인이 왜 갑자기 그렇게 뛰는 거야?”

따로 졸지도 않았는데 오 년은 족히 건너뛴 이야기에 반사적으로 양손을 허부적거리며 말을 가로막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유쾌한 웃음소리가 따라왔다. 그에 반해 눈동자에는 웃음기 하나 없다. 유쾌하기는커녕 오히려 깜깜한 듯하다. 아까 가라앉은 어둑한 것이 거기 고여있다는 것처럼. 숨통을 틀어막힌 사람처럼 브루노는 입을 다물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문제. 잭이 유세이보다 한 살 많고, 유세이보다 내가 한 살 어려. 그렇다면 제로 리버스 때 나는 몇 살이었게?”

“…….”

“내가 어떻게 살아남은 건지도 몰라. 부모가 지켜준 건지 그냥 운이 좋았던 건지. 뭐, 어쨌든 대충 따져봐도 난 그때 젖먹이였겠지. 포드에 이것저것 기록이 남아있던 유세이나, 미아 방지 카드인지 뭔지에 이름하고 생년월일 같은 게 쓰여있었던 잭이랑은 다르게 증거는 없지만 말이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니 애초에 꺼낼 수 있는 말이 있기는 한지. 브루노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있다. 혹, 제 기억의 공백 속에는 그 답이 있을까 궁금했지만, 존재 여부도 불확실해 써먹지도 못할 것은 제껴두는 게 나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헛된 공상이 아니므로.

자아낼 말을 찾지 못해 축축하게 고여가는 침묵을 흩어버리듯, 바람이 한차례 크게 불었다.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에 머리칼이 헤집어지고, 하늘 위에는 바람결에 구름이 흩어진다. 그러면 아까까지는 흐렸던 햇살이 재차 선명하게 내리쬐는 것이다. 뚫린 천장 바로 아래에 있는 크로우에게도. 빛이 닿아 새삼스럽게 밝혀진 자리에서 브루노는 크로우의 눈동자가 마냥 어둑한 게 아니었단 걸 깨닫는다.

아까는 착각이었을까. 아니, 그보다는 일순간 존재했던 색과 모양이었다는 설명이 옳을 것이다. 깊은 물은 그저 깊은 물이다. 자체로 투명하지만 때로 바닥을 헤아리지 못해 검게 보이는 것처럼 잠시 그렇게 보였을 뿐, 본질이 아닌 일시적 현상으로.

브루노는 기계공의 정연한 논리로 사고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 아래로 차곡차곡 쌓은 논거는 우습게도 제 잃어버린 기억에서 기인한다. 지금은 읽어 들일 수 없는 기억 섹터이건만, 브루노는 그 안에서 제가 고독과 절망에 나뒹굴었다가도 기어코 다시 일어난 눈동자와 마주친 적이 있다고 확신한다. 지금 닿을 수 없다 뿐이지 거기에는 확고하게 존재하는 기억의 부피와 질량이 있다.

그러므로 알 수 있다. 이 친구는 가장 자유로운 바람이면서 동시에 깊은 용소龍沼다. 손쉽게 절망을 입고 까만 골짜기에 몸을 누이는 평안을 누리는 대신, 맨손으로 열렬하게 절벽을 올라 작열하는 태양 아래 태워지는 생의 나날을 택했다. 그렇다면 사람이 절망을 이겨내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브루노는 폿포타임의 이 작지만 강인한 친구가 그 답을 알고 있으며, 지금 제게도 알리려 함을 알아챘다. 그 사실을 크로우 역시 눈치챘기에 그는 이번엔 명백히 밝게 웃었다.

“부모도 잃은 젖먹이가 어떻게 잭과 유세이를 만날 때까지 살아남았냐면, 그건 혼자가 아녀서야.”

“무슨 뜻이야?”

“누군가의 호의와 연민이 있어서 내가 살아남았다는 거지. 누군가 어린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으니까, 자기가 그날 먹을 끼니를 한 입 덜어 줬으니까. 그런 식이었던 거야. 뭐, 나도 겨우 말귀를 알아먹을 즘에 그 섹터에 있던 아저씨 아줌마한테 전해 들은 거지만.”

거기서 크로우는 잠깐 말을 끊고 숨을 들이마셨다. 이다음에 이어질 말은 온 의지를 담아 전신전령으로 또박또박 바르게 발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묵직한 의무감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다시 한 호흡.

“나는 부모는커녕 내 숨을 붙여준 사람들의 이름이나 얼굴도 제대로 몰라. 그렇지만 그 익명의 사람들이 건넨 호의로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거라면, 나도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어야겠지.”

“크로우….”

“자자, 그런 표정 짓지 말라구. 거창하게 잰 체를 좀 했는데 이렇게 잘 정리해서 결심한 거, 몇 년 안 됐어. 그 몇 년도 제대로 해냈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 없고 말이지. 나, 꽤 모자란 보호자였을 걸. 우리 꼬맹이들이 착해서 내 밑에서 잘 있어 준 거지.”

꼬맹이들. 보통은 불특정 다수를 지칭하는 호칭이건만 애정 가득히 담긴 어조와 합쳐지면 바로 그 면면이 떠오른다. 며칠 전에 폿포타임에 그 이름처럼 비둘기 떼처럼 우르르 몰려와 까르르 웃고 떠들며 화사했던 그 애들이었다. 말로만 듣던 마사 씨를 처음 뵈었던 날이기도 했다. 새틀라이트는 마땅히 사진이랄 것도 없었고, 있어야 마사가 옛 시대의 카메라(젊으실 적 골동품점 친구에게 받은 선물이랬다)로 하우스 아이들을 매해 찍어 당신께서 앨범에 곱게 모셔둔 게 다였으므로, 자기들은 사진 같은 걸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더랬다. 세 사람의 증언과 표정으로 구성한 다정함은 척박한 땅에서 아이들을 거둬 키운 강인함을 더불어 거기 문가에 서 있었고, 브루노는 연원도 모를 감동을 삼키며 그가 오래전 키운 세 아이와 지금 돌보는 아이들을 안온하게 바라보는 눈길을 회상했다. 그 눈이 얼마나 익숙했던가. 그건 크로우가 꼬맹이들을 언급할 때마다 보이는 시선이었다. 그걸 떠올리면서 브루노는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아니야.”

“뭐? 지금 우리 애들이 안 착하다고??”

“으악, 폭력 반대! 아니, 그 뜻이 아니라!”

“그럼 뭐?”

브루노는 뭘 부정했는지 듣지도 않고, 냅다 지레짐작으로 달겨들어 멱살부터 쥐어 끌어내린 크로우의 손아귀에서 마구 흔들리면서도 오해라며 열심히 손사래를 쳐댔다. 그러면서도 속으론 헛웃음을 치고 마는 거다. 위협은커녕 겨우 부정의 말 하나, 그것도 헛짚은 걸 가지고 둥지를 습격당한 어미 새마냥 사납게 날을 세우는데, 어디가 못난 보호자였겠느냔 말이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으니, 당연히 완벽한 보호자라는 것도 허상이며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열심인 보호자, 폭우 속 우산과도 같은 보호자는 있음직하다. 어떤 재앙의 도래, 거기서 무너져내린 세상은 법도 사회도 없었댔다. 물상이 파괴되고 추상이 무너진 곳에서 아이들은 그 누구보다 연약하다. 피막이 여물지 못한 그 애들에게 거기 있음으로 무조건 부어지는 애정과 누추하게나마 안심하고 잘 수 있는 잠자리와 넘치지는 않아도 배곯지 않을 식량을 제 몸을 갈아서라도 마련하는 보호자는 귀하다 못해 천금이었을 터. 크로우는 곧잘 제 행위의 가치를 폄하하는 나쁜 버릇이 있어, 저렇게 말해봐야 귓등으로 듣지도 않을 거였다. 네가 새틀라이트 길바닥 생활의 무엇을 아느냐고 콧방귀나 뀌겠지.

그렇지만 브루노에겐 확신이 있었다. 그런 폐허를 나는 알고 있노라고. 내 잠긴 기억 어딘가엔 틀림없이 그런 누더기가 된 세상이 있고, 언젠가의 나는 그 공기를 직접 마시며 치열하게 살았을 거라고. 특히, 오늘, 재건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새틀라이트를 마주했기에 더더욱 그리 말할 수 있었다. 이 아무것도 건질 수 없어 보이는 회색 도시가 가슴뼈 안쪽이 시리도록 와닿으며 절절한 것은 결단코 남의 이야기를 들어 얻는 간접적 경험일 수가 없으므로.

그런 확신을 꾹꾹 담아, 브루노는 설파했다.

“크로우는 그 애들한테 충분히 좋은 어른이었을 거야! 다른 사람은 그 자리를 채울 수가 없어!”

“……. 그렇다면 좋겠지만. 응, 뭐. 적어도 우리 애들이 외롭지는 않았다고는 생각해―뭐어, 지금은 마사가 돌봐주니까 겨우 외로움 하나 막아주던 나 때보단 훨씬 낫지!”

그래, 이렇게 이야기할 것 같았다. 브루노는 오해를 풀고 금방 기색을 누그러뜨리고서 저 대신에 훨씬 믿음직한 보호자 품에 들어간 것을 순수하게 기뻐하는 얼굴을 하는 크로우를 슬몃 들여다본다. 그렇지만, 크로우, 외로움은 너에게 큰 문제였잖아. 그게 아이들을 잡아먹게 두지 않은 건 절대로 작은 일이 아니었을 거잖아.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른 말을 꾸욱 눌러 삼켰다. 저 애에게 외로움이 사소한 적은 한 번도 없었을 테니. 사람은 누군가를 덧대어 산다. 심지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생판 타인에게 자각도 없이 목숨을 이어 붙여져 온 사람에게 있어, 고독이란 그야말로 죽음과도 같았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다만 많은 일을 겪어낸 그는 그저 무섭다고 틈바귀에 낑겨 들어가 눈을 감고 우는 애가 아니고, 과거는 과거로 소화해 가벼워진 몸으로 현재를 날듯이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꺼내야 할 물음은 형태를 달리해야 한다.

― 크로우, 너는 지금 외로워?

브루노는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이 답은 저희의 둥지로 돌아가면 확인할 수 있을 테니.

 


가벼워진 짐차를 끌고 기억 속의 풍경이 되감기듯이 길을 되짚어가면 이제 눈에 익은 분수와 광장이 보인다. 구름이 조금 있었던 아까와는 달리 이제 하늘은 완전히 개어, 사방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D휠과 스쿠터는 날이 좋아 활짝 열어둔 차고 문을 미끄러지듯 통과해 깔끔한 솜씨로 주차했다. 헬멧을 D휠 손잡이에 대강 걸쳐두며 크로우가 밝게 인사했다. 아침의 뾰족한 분위기 따윈 벌써 잊었다는 듯이.

“여, 다녀왔어~.”

“어서 와, 크로우. 브루노.”

“늦어. 대체 지금의 새틀라이트 어디에 이렇게 오래 돌아다닐 곳이 있단 거냐.”

“야, 거기 볼거리 없는 건 내가 제일 잘 알거든? 브루노한테 너네 부끄러운 이야기나 좀 알려줬다, 왜.”

“뭣이?! 브루노! 무얼 들었건, 다 잊어라! 전부 헛소리다!”

“악! 왜 날 때려? 폭력 절대 반대!”

그러면 이제, 아침나절에 여기를 나섰을 때보다 확연히 침착해져 평소나 다름이 없는 유세이와 아직 조금 불퉁한 티가 나지만 뾰족하니 거칠게 모난 데는 다 가라앉은 잭이 두 사람을 맞이한다. 거기서 치받는 말은 정말로 여상하기 그지없는 언제나의 폿포타임이다. 잭과 크로우 사이의, 차라리 사이가 좋아 가감 없이 구는 설전에 튄 불똥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브루노 역시 여느 때와 같았다. 아침의 제가 보면 안온한 익숙함에 눈물이 다 날 정도로. 그러면서도 브루노는 이번에는 크로우의 눈동자 그 어디에도 그늘 한 점 없는 것을 확인하며 내심 싱글벙글했다. 지금 여기서 크로우 호건은 외롭지 않다. 너와 내가, 우리가 가까이 있음을, 그렇게 서로 온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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