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왕/5Ds-AcrV/잭크로] 배신자(上, 中)
"블랙버드 딜리버리 특별 운송 주간이다!"
* 24년 7월 디페스타에 출간할 예정인 글의 일부입니다. 따라서 이 게시글 자체는 수정되지 않습니다.
** 26회 디페 안내 :
* 이전에 투비로그에 올린 분량에 2만여 자가 추가되었습니다. 이후에 일단 못해도 3만 자는 추가되겠거니, 하는 중.
* 쉽게 요약해서 ~오룡즈크로우와 앜파크로우를 교환해보았다~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배신자라는 키워드를 놓고 본.
* 나이롱 듀얼리스트라서 듀얼로그가 과연 멀쩡한가-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효과는 OCG가 아닌, 원작을 기준으로 했습니다.(근데 듀얼로그 오류 있으면 알려주세요. 마듀/듀링스만 하니까 스펠 스피드 모르겠어요 살려주세요)
* 잭크로라고 썼는데, 의문이 듭니다. 정말로…? CP는 희박한가 싶은데, 일단 쓰는 사람이 잭크로를 파니까 그렇다 칩시다.
* 앜파 시청도 꽤 오래 전이라 뭔가 설정오류 있으면 적당히 눈감아주시길 바라며….
* 개인적인 캐해석이 듬뿍 들어가있습니다. 원작 및 인터뷰 등으로 풀리지 않은 설정은 전부 팬피셜입니다.
*5ds 시공은 113화 <불타오르는 혼, 스카레드 노바 드래곤> 이후 114화 <예거 포획 작전 2>이전 어드메를 상정하고, 아크파이브 시공은 해당작 시작 이전-대략 잭이 프렌드쉽 우승 후 1년 반쯤 지난 시기를 가정합니다.
그랑프리 리그전이 일리야스텔의, 더 정확히는 플라시도의 공작으로 약 3개월 가까이 보류되었다. 팀 파이브디즈에게는 차라리 호재였다. 크로우의 회복과 재활을 위한 시간을 번 덕이다. 팀 카타스트로프 전에서 낫지도 않은 어깨를 무리하게 혹사한 덕에 마사에게도 주치의에게도 무진장 깨지고, 기존의 전치 2개월에 다시 6주를 더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이쪽이 나았다. 잔소리 지옥에서 빠져나오고 새로이 깁스하고 나온 크로우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그래도 이번엔 시간이 있으니 맘은 편하네!”따위를 말해서 진찰실의 의사가 다시 튀어나와 등짝을 때리는 사소한 일이 있었지만,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블랙버드 딜리버리는 그랑프리 예선 중에 운영하지 않았다. 대회에 집중해야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고, 그래서 대회 중에 주 수입원이 끊길 각오를 하고 돈을 모아왔다. 그런데 그 대회가 보류된 지금, 어깨가 이 모양이지만 업무강도를 낮추면 어떻게 일할 수 있지 않겠냐고 크로우가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뜯어말렸던 게 2주를 채 못 간 거다. 살갑게 구는 건 유세이에게만 해당하지만, 제일 아들처럼 대하는 건 크로우인 조라 역시 폿포타임의 재정 전반을 알고 있다 보니 월세를 봐주겠다고 했는데도 그랬다. 먹성 좋은 남자 넷의 식비에 D휠의 유지보수비, 기본적으로 나가는 공과금과 그 위로 얹혀진 병원비. 듀얼과 금전에 관한 계산만 빠삭한 크로우로서는 지난 예선 기간에 일을 쉬었던 것도 자기 기준에서는 아슬아슬했던 모양이었다.
“크로우, 우리 그래도 목돈이 꽤 있지 않았던가?”
“그래, 유세이 말이 맞는다. 쓰지 않을 거면 무엇 하러 돈을 모으냔 말이다.”
“하아, 진짜 뭘 모르네. 그건 정말 비상금이라고. 본선에서 무슨 일이 터질지도 모르고, 급하게 부품 구해야 한다거나 그런 일을 대비해서! 우리가 지금 크러시만 몇 번이 났는데, 당연한 거 아냐?”
이번엔 잭이 입을 꽉 다물었다. 당장 예선 첫 경기에서 휠 오브 포츈을 거하게 해먹은 전적이 있는 탓이었다. 그걸 정비했던 유세이도 조금 머뭇거렸고, 차마 소꿉친구 삼인방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고 있던 브루노조차 그때 새로 사야 했던 부품값을 저도 모르게 입에 담아서 잭의 성난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세 명의 입을 다물게 하는 데에 성공한 크로우는 씩 웃으면서 유세이의 손에 들려있던 블랙버드 딜리버리 점퍼를 뺏어 들었다. 아니, 뺏어 들려고 했지만, 누군가의 손에 막혔다. 잭이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있던 것은 정말 잠시간으로, 표정을 굳힌 채 외치는 모양새는 듀얼 중에 혼히 보이곤 하는 진지함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이 내가 따라간다! 그 어깨로 짐을 들었다간 악화할 게 뻔하지 않나!! 유세이, 이건 너도 납득하겠지?”
“크로우와 2인조로 움직이는 거면, 확실히 괜찮을지도.”
“잭 혼자 보내는 건 불안하지만, 응, 괜찮은 생각 같아.”
“어이, 잠깐. 내 의견은 무시냐? 저 바보놈을 달고 일하라고?”
이 이상으로 크로우를 혹사하지 않겠다는, 그걸 절대 관철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깃든 자색에 유세이는 물론이요, 브루노까지도 긍정했다. 크로우 역시 말미를 적극적으로 물어뜯지 않은 까닭은 그 자신도 반박할 말이 없던 탓이다.
툭하면 투닥거리는 게 일상인 두 사람이라지만 일을 같이하는 동안은 생각보다 별일이 없었다. 쌍둥이와 아키는 그 점에 무척이나 놀랐고, 브루노는 꽤 빠르게 그럴 수 있다고 이해했으며, 유세이는 처음부터 이럴 거라고 생각했던 듯 그저 웃기만 했다. 그야 마사하우스 시절, 이리저리 구르고 부닥쳐서 다쳐온 크로우를 데리고 다녔던 게 저희 중 맏이였던 잭이었으니 차남 격인 그가 보기엔 당연한 일이었던 거다. 그렇게 한 달, 생각보다 경과가 좋았던 덕에 2인조 딜리버리는 빠르게 막을 내렸다.
잭과 유세이가 보머의 연락으로 나스카에 다녀온 사이, 깁스를 풀어도 좋다는 판정을 받은 크로우는 공항에서 둘을 맞이하기가 무섭게 인사 대신으로 등짝을 마구 두들겨댔다. 바다까지 건너가서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녔기에 야밤중에 마크가 그리도 요란했냐는 타박인지 걱정인지를 두 사람은 그냥 받아줬더랬다. 주먹질하는 걸 보니 어깨의 완치 여부는 물을 것도 없고, 가뜩이나 원래부터 외로움을 많이 타고 가까운 사람을 손도 못 쓰고 잃은 경험이 있는 마사하우스의 막내의 심정을 잘 알아서였다.
그러니 지금, 이 상황을 가장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잭과 유세이 두 사람일 수밖엔 없었다.
“젠장, 뭐야 여긴? 톱스인가?! 날 납치하다니 배짱이 두둑한데그래? 설마 꼬맹이들한테 손대지는 않았겠지? 커몬스의 검은 선풍을 알고도 그러는 미친놈은 없을 테지만!”
“어어, 크로우. 진정 좀―아, 유세이, 잭! 도와줘!”
새벽에 겨우 선잠이 들었던 유세이도, 평소라면 느지막이 일어났을 잭도 크로우의 고함에다 쩔쩔매는 브루노의 목소리를 듣고 후다닥 주방으로 내달렸다. 거의 잠결에 뛰어나온 터라 크로우가 내뱉은 문장 사이사이에 낯선 게 섞여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주방에는 2미터에 육박하는, 덩치만 있지 그 값을 채 못하는 저희네 천재 메카닉이 자기보다 한 뼘은 더 작을 크로우를 앞에 두고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발만 구르고 있었다. 두 사람을 발견한 그는 곧 화색이 되며 자기 앞을 가리켰다.
“크로우가 아까부터 알 수 없는 말을 해, 유세이, 잭. 어떻게 좀 해줘. 설마 나처럼 기억을 잃은 걸까?”
브루노의 물음에 크로우에게로 시선을 옮긴 유세이와 잭은 그대로 덜컥 굳었다. 질문에 답을 할 계제가 아니었다.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곤 하는 회색 눈동자에 빼곡하게 채워진 적의가 선명하다. 유세이에게는 낯선 것을 보는 경계심이, 그리고 잭에게는 그야말로 증오와 분노가. 저희에게 향할 리가 없을 감정을 마주한 두 사람이 할 말을 잃은 사이, 크로우는 돌연 내달려 브루노를 돌파했다. 지금까지 대치한 건 그냥 대치하고 있어 줬을 뿐이라는 듯. 팀 새티스팩션 시절부터 유구하게 돌격대장을 맡았던 가벼운 몸은 무서운 속도로 육박해 그대로 튀어 올라 잭의 멱살을 틀어쥐어 내렸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톱스의 개? 멋대로 내 앞에 나타나면 죽여버리겠다고 했을 텐데. 커몬즈 새끼가 씨부린 건 말도 아니다 이건가? 아니, 애초에 날 납치해온 게 네놈 자식이지? 뒈지고 싶은 거면 소원대로 해주겠어!”
사람은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하면 사고가 멈추곤 한다는 말이 있다. 자신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던 잭은 지금, 이 순간 그때의 자만을 꺾어야 했다. 예상치 못한 적의 앞에서 사고회로는 물론이요, 시간 감각조차 완전히 어그러지고 말았다.
크로우와는 원래도 자주 부딪히고 싸웠다. 그냥 서로 고집부리느라 그런 적도 있었고 정말 감정싸움으로도 번져 주먹다짐을 한 것도 열 손가락을 가볍게 넘는다. 공백의 2년이 있긴 해도, 어쨌건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사이다. 그럼에도 지금처럼 날을 세운 크로우는 본 적이 없다. 있었더라도 그건 제게는 향할 리가 없는 증오다. 팀 새티스팩션 시절에, 적을 마주한 크로우 곁에서 봤던 적이 있던가. 그런 어렴풋한 기억밖엔 없다. 그러므로, 새삼스럽게 깨닫고 만다. 알고는 있었지만, 실감한 적이 없었던 거였다. 저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싸움을 한 게 아니라는 것을.
덜걱 굳어있는 잭을 대신해서 움직인 건 유세이였다. 다행스럽게도 저희 세 사람 중에서 완력이 가장 밀리는 건 크로우였기 때문에, 유세이는 어떻게든 크로우를 잭에게서 떼어낼 수 있었다. 조금 더 날뛸 거라고 예상한 것과 달리 크로우는 생각보다는 얌전히 몸을 물렸고, 유세이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가 곧 이어진 친구의 말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대체 넌 뭔데 저 배신자 새끼의 편을 드는 거냐? 너도 커몬즈 아냐?”
“크로우...?”
깜빡깜빡. 감청색 눈동자가 미아처럼 흔들리는 모양새에도 크로우는 냉랭한 태도를 거두지 않았다. 마커를 발견하고서 찌를 듯한 시선은 거둬졌지만 원래 알던 따스한 색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수면시간이 부족해 사고의 회전수가 극도로 낮아진 더러 언제나 제게는 무르게 굴던 소꿉친구가 저를 모르는 사람 취급하고 있다는 충격으로 유세이는 지금의 대화가 전혀 맞물리지 않았단 걸 깨닫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은 채로 멈춰버렸다.
“그, 있잖아. 크로우. 뭔가 이상해서 묻는 건데, 여기는 네오 도미노 시야. 커몬즈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맥락상 새틀라이트를 말하는 것 같은데, 맞을까?”
결국 브루노가 끼어들었다. 날뛰는 게 크로우였다보니 소꿉친구 두 사람에게 맡겼는데, 정작 그 두 사람이 석상처럼 굳어져 아무 말도 못 하는 바람에 D휠 외로는 바닥을 치는 말주변을 어떻게든 끌어모아 본 거였다. 그야 크로우가 저를 모르는 것 같이 구는 것에 충격을 받긴 했지만, 잭과 유세이만큼은 아니니까.
다행히 브루노의 물음은 이 대치를 종결시켰다. 크로우 역시 영민함의 방향성이 정해져 있어서 그렇지, 기본적으로 머리는 좋은 편이었으니. 눈을 깜빡일 때마다 적개심이 한 꺼풀씩 벗겨지다가 기어코 무엇도 담지 않은 회색으로 돌아왔다. 그래봤자 여전히 위화감이 드는 시선이었지만.
미묘한 대치 상황은 차고 입구로 활기차게 들어온 어느 목소리에 깨졌다.
“크로우! 어깨 깁스 풀었다며―어?”
“이게 무슨 상황이야…?”
듀얼아카데미아에서 바로 하교한 듯, 교복 차림의 쌍둥이와 아키가 미묘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눈을 깜빡였다. 새로 등장한 세 사람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크로우가 문득 블랙버드를 바라보았고, 쌍둥이는 육감에 따라서 급하게 새까만 D휠의 앞을 막아섰다. 두 사람의 판단은 옳았다. 눈 깜빡하는 사이에 블랙버드를 향해서 내달린 크로우가 앞길을 막히자 혀를 쯧 차며 이리저리 눈을 굴려댔다.
“뭐야, 뭐야. 지금 크로우 도망치려던 거야? 이게 무슨 일이야, 유세이.”
“젠장, 톱스 꼬맹이들까지.”
상황에 완전히 짓눌린 탓인지 루카와 아키는 침묵을 지켰고, 눈 앞에 펼쳐진 이 모든 촌극을 이해하지 못한 루아는 연신 의문을 내뱉었다. 그렇지만 질문에 답해 줄 사람이 없는 물음이었다.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유세이나 잭을 대신해서 브루노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그게, 아까부터 크로우가 뭔가 좀 이상해….”
“난 이상한 게 아냐! 젠장할, 이렇게 된 이상―잭 아틀라스, 듀얼이다! 내가 이기면 이 같잖은 납치극을 끝내. 블랙버드에도 손대지 말고. 알았어?”
“크로우! 난, 그러니까―”
“닥쳐! 배신자 새끼의 말은 안 들어. 듀얼, 할 거냐 말 거냐.”
결국 크로우가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빽 지르고선 잭을 지목해 듀얼을 신청했다. 평소라면 걸어오는 도전은 뻐기듯이 받아들이는 잭이었으나, 지금은 채 갈무리하지 못한 당혹으로 어조마저 흔들렸다. 기어코 재촉하는 으르렁거림에 잭은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가, 떴다.
“받아들이지.”
“그렇게 나와야지. 썩어빠져도 듀얼리스트라면.”
냉랭한 목소리에 쌍둥이 중 누군가가 히익 숨을 삼켰다.
블랙버드에 올려져 있던 듀얼디스크를 꺼내든 크로우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셔플부에 덱을 밀어 넣었다.
그나마도 듀얼이란 이야기가 나오고서는 모두가 침착한 면면을 되찾았다. 특히나 유세이는 지금까지 튀어나온 대화를 되짚어가다가 발견한 모순 때문이라도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 중이었다. 저 ‘크로우’가 먼저 듀얼을 신청해서 다행이었다. 그가 누구인지, 왜 저희들의 크로우와 똑같은 외견으로 전혀 영문 모를 말을 하는 건지는 이 듀얼로 밝혀질 것이다. 잭의 말을 인용하자면, 듀얼이야말로 영혼과 영혼이 부딪히는 것. 타인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방법이기도 하니까.
“라이딩 듀얼을 했다간 내가 도망이라도 칠 것 같았냐?”
“…난 널 납치한 것도 아니고, 지금 네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정말 하나도 이해를 못 하겠다.”
“시치미 떼기는. 선공 결정은 코인 토스로?”
“그렇게 하지. 부탁해도 괜찮나, 유세이?”
“그래. 앞면은 잭, 뒷면은 크로우로. 던질게.”
코인 토스를 부탁하며 잭이 그에게 던진 코인은 아주 오래된, 저희가 마사하우스에 있을 적에 쓰던 물건이었다. 저 역시 가지고 있고, 말은 안 했지만 크로우에게도 있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유세이는 코인을 튕겨 올렸다. 손을 치우자 나타난 것은 뒷면.
“선공은 크로우.”
“좋아, 그렇다면―듀얼!”
“듀얼!”
두 사람의 외침과 함께 듀얼디스크의 초소형 모멘트가 빛을 내기 시작했다. 라이프 4000의 표기와 함께 덱이 셔플되었고, 첫 손패를 뽑아 든 잭과 크로우는 곧 정면을 주시했다.
“내 차례다, 드로우!”
뽑은 카드를 흘끔 바라본 크로우는 곧 카드를 낸다.
“나는 흑창의 블래스트를 일반소환. 필드에 BF가 존재하는 것으로, 북풍의 오로시, 모래먼지의 하르마탄을 각각 특수소환하겠어.”
익숙한 몬스터의 연속소환.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크로우의 블랙페더 덱은 빠른 소환과 전개가 특징인 속공덱이니까. 팀을 이루면서 서로의 덱을 외웠던 그들은 자연스럽게 현재의 필드를 읽고, 다음에 이어질 크로우의 말을 상상했다. 현재 필드상 몬스터의 레벨 합은 7. 아머드윙을 불러낼지도 모르지만, 필드에는 하르마탄이 있다. 그러므로,
―하르마탄의 몬스터 효과, 발동! 내 필드 위의 블랙페더 하나의 레벨을 이 카드에 더할 수 있어.
레벨 2의 하르마탄에 오로시의 레벨 1을 더하면 필드에는 레벨 8이 갖춰진다. 그렇게 되면 곧장 블랙 페더 드래곤을 싱크로 소환할 수 있다. 효과 대미지를 가한다면 그걸 막을 벽이기도 하며, 어쩌면 중력붕괴를 이용해 잭의 싱크로 소재 소환을 막아 에이스를 봉인하고, 본인은 블랙페더덱 특유의 빠른 전개로 다시 필드를 재구축하려는 걸지도 몰랐다. 파워덱을 속공덱이 이기려거든 빌드 구축을 막는 것이 제일이니까.
그렇지만,
“레벨 2 모래먼지의 하르마탄에 레벨 1 북풍의 오로시를 튜닝!―칠흑의 날개, 하늘을 뚫고 비상해라! 싱크로 소환! 날아오너라, 어썰트 블랙페더-흰무지개의 쿠니요시!”
"뭐라고?"
“어썰트 블랙페더?”
갑작스러운 레벨 3의 싱크로 소환, 그것도 들어본 적이 없는 카드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너나 할 것 없이 의문을 외쳤다. 일단 이름에 블랙페더가 붙는 걸 보면 블랙페더는 맞는데, 기억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크로우는 저런 카드를 가지고 있던 적이 없었다. 요 몇 개월 동안 팀전을 위해서 서로의 덱을 외우고, 미세조정을 하더라도 팀원에게 보고하고 있었으니까 틀림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크로우는 효과 발동을 선언한다.
“이 카드는 한 턴에 한 번, 패에서 BF몬스터 한 장을 묘지에 보내는 것으로 상대에게 300포인트의 대미지를 주지!”
“큭! 겨우 이정도에서 끝이 아닐 터!”
“당연한 소릴! 있는 효과는 알뜰하게 써먹지 않으면 안 돼! BF몬스터를 싱크로 소재로 했으므로 이 카드는 튜너로도 취급한다!”
겨우 300포인트지만 크로우치고는 꽤 성급한 공격이었다. 그리고 크로우는 아직 턴 엔드를 선언하지 않았다. 블랙페더의 무지막지한 전개력을 잘 알기 때문에 도발하듯이 외친 잭의 말에 크로우가 씨익 웃었다. 잭은 그 웃음에 직감한다. 아직 싱크로 소환이 남은 거다. 필드에는 레벨 3의 튜너와 레벨 4의 BF몬스터.
“레벨 4 흑창의 블래스트에 레벨 3의 흰무지개의 쿠니요시를 튜닝!”
아머드 윙인가. 아니면,
“칠흑의 날개를 펼치고 뇌명과 함께 달려라! 전광의 참격! 싱크로 소환! 빗발쳐라, A BF-소나기의 라이키리!”
또다시 전혀 들어보지 못한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직감적으로 이것이 크로우의 에이스임을 파악한 잭은 크로우의 남은 손패 두 장에 주목한다.
“나는 한 장을 덮어두고, 턴 엔드. 어디 덤벼봐, 배신자 새끼야.”
이 한 턴으로 잭은 저와 대치 중인 크로우가 저희의 크로우가 아님을 절절하게 깨달았다. 유세이 또한 마찬가지일 터. 이 자의 전개는 지나치게 처절하고 묶여 매달려 무겁다. 왜 모양이 같고 알맹이가 다른 크로우 호건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해석은 유세이가 해줄 것이므로, 그 점은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저 쨍쨍하게 쏘아보는 눈과 살의를 꾹꾹 눌러 담은 배신자라는 말이 유독 아팠다. 저 크로우가 언급한 잭 아틀라스 역시 그를 버려두고 떠난 것이 틀림없고, 그렇다면 저 역시도 배신자라는 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새틀라이트에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시티로 향했던 과거의 저 자신은 틀림없이 각오했었더랬다. 유세이는 넘어오겠지만, 남은 평생 크로우나 마사는 보지 못할 것이라고. 실제로도 언질조차 없이 건너갔으니 그 둘은 유세이나 래리 정도를 통해서 제 소식을 들었을 거다. 마사는 결국 저를 응원하리라고 생각했지만, 크로우는? 그 물음을 잭은 언제나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재회한 직후, 답지않게 긴장했지만 크로우는 마치 어제 만난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굴었다. 안도했던 것도 같다. 우리의 평소와 똑같았으니까. ‘킹’이 아닌, 잭 아틀라스 본인으로 있자고 결심한 것도 그 흐름에 박차를 가했다. 그래서 지금껏 잊고 지낸 화두였다.
그렇지만 크로우는 정말로 괜찮은 게 맞았나? 사실은 저희의 크로우도 내심 저자처럼 저를 배신자로 여기는 게 아닌가? 원래 정이 많은 녀석이라, 그 정도의 잘못은 그냥 눈 감은 건 아닌가. 팀 새티스팩션을 가장 먼저 박차고 나가며 키류에게 학을 뗐던 녀석인데도 크래시 타운에서 재회한 과거의 리더에게 어떠한 거리낌도 보이지 않았던 녀석이니 불가능한 가정은 아니었다.
덜컥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제 덱의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하던 것과는 아예 다른 차원의 막막함이 발밑을 뒤흔든다. 그 흔들림 속에서 잭은 본인 차례를 선언했다.
“나의 턴! 상대의 필드에만 몬스터가 있을 때, 이 녀석을 특수소환 할 수 있다. 이 방법으로 소환했을 경우, 공격력과 수비력은 원래의 절반이 된다.”
손패에서 레벨 5의 바이스 드래곤을 필드로 내놓는다. 곧이어 마법카드를 패에서 발동했다.
“그리고 콜 레조네이터를 발동, 덱에서 레조네이터 1장을 넣는다. 나는 레벨 3의 다크 레조네이터를 선택, 일반소환한다.”
싱크로 소환의 영창을 위해 듀얼디스크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든 순간, 크로우와 눈이 마주쳤다. 깜빡깜빡. 저희가 어썰트 블랙페더를 마주했을 때처럼 의문이 스며있는 눈동자였다. 남아있는 경계심은 필드의 몬스터 레벨의 합계가 8이기 때문이겠지. 잭은 영창을 위해 숨을 들이마셨다. 겨우 한 턴으로 저쪽은 저희의 크로우가 아님을 확신하였듯, 저 크로우 역시 그가 그토록 싫어하는 잭 아틀라스와 제가 같지 않음을 알게 될 거였다.
“왕자의 고동, 지금 여기에 대열을 이루니, 천지명동의 힘을 보아라! 싱크로 소환! 나의 영혼, 레드 데몬즈 드래곤!”
이것으로 에이스 격돌이다. 일반 가정집치고는 상당히 넓은 폿포타임의 창고가 레드 데몬즈와 라이키리의 솔리드 비전으로 꽉 찼다.
“그리고 나는, 장착마법 거대화를 발동.”
“잭?”
한 턴 만에 벌어질 에이스끼리의 격돌이고 크로우에게 리버스 카드가 한 장 있으니 이 배틀 페이즈를 흥미롭게 관전 중이던 유세이는 잭의 선언에 깜짝 놀랐다.
답지 않은 플레이 미스였다. 물론 지금 잭의 라이프는 3700으로, 대미지를 입지 않은 크로우보다 라이프가 낮으니 거대화의 공격력 2배 조건은 만족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공격력 6000이 된 레드 데몬즈가 공격력 2600의 라이키리를 격파하더라도 크로우의 라이프는 남는다. 그러면 거대화의 다른 효과로 인해 레드 데몬즈의 공격력은 절반인 1500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이번 공격이 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아니, 잭 아틀라스는 결코 ‘이게 먹히지 않는다면’ 따위의 무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격한다면 반드시 끝장을 낸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하지. 유세이는 지금 순간에서야 소꿉친구가 얼마나 동요했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같은 결론에 도달한 듯, 저쪽에선 아키가 루아에게 조곤조곤 설명하고 있다. 루아의 얼굴에 놀람과 의아함이 번갈아서 바쁘게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루카는 A BF의 등장 이후 대충 상황을 파악한 건지 불안하게 눈만 굴리고 있어, 시선이 마주치고서 안심하라는 의미에서 슬몃 웃어줬다. 그렇지만 오히려 괜찮다는 미소가 돌아온 걸 보면 지금 제 표정도 볼만한 걸지도 몰랐다.
“…잭, 엄청나게 동요했나 봐. 유세이도 표정 계속 안 좋은데, 괜찮은 거야?”
“괜찮아. …아마도.”
“무리하지 않아도 돼. 음, 그래도 어떻게 된 건지는 조금 알겠어. 평행우주, 려나?”
“그렇겠지.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기도 하고.”
평행우주. 같은 존재지만 다른 세계의 사람. 유세이를, 브루노를, 아키를, 루아와 루카를 모르는 크로우 호건이 존재하는 어떤 세상.
그 사이에 잭은 기어코 공격을 선언했다.
“레드 데몬즈여, 라이키리를 공격해라! 앱솔루트 파워 포스!”
“함정카드 오픈! 블랙페더 커스드 가드! 내 필드 위의 BF가 전투 또는 상대의 효과로 파괴될 경우, 대상의 레벨을 하나 깎고 공격력을 400 내리는 것으로 파괴를 무효화한다!”
“그렇지만 대미지는 받아줘야겠다! 너의 라이프는 이제 600!”
크로우가 발동한 것은 역시 한 번도 보지 못한 함정카드였다. 잭 역시 크로우의 남은 라이프를 자신만만한 투로 외쳤지만, 연신 시선이 흔들리고 있었다. 자신의 플레이 미스를 장착선언 직후부터 알고 있어 그런 듯 했다.
“그렇지만 그 거대화, 이제 패널티 쪽을 받으셔야지?”
크로우의 말대로 필드 위 레드 데몬즈의 공격력은 1500으로 내려가 있었다. 라이키리의 공격력 역시 떨어졌다지만 2200이므로 단순히 비교했을 때, 열세에 몰린 건 잭이었다.
“…카드를 한 장 덮어두고, 턴을 종료―그리고 아마도, 이 말을 내가 해봤자 의미가 없겠지만, 미안하다.”
턴 종료 선언과 함께, 말미에 붙은 흐린 목소리에 차례를 받아 드로우를 하려던 크로우의 손이 멈칫했다.
“…내 차례다! 나는 BF-극북의 블리자드를 일반소환. 이 카드가 일반소환에 성공하면 내 묘지에서 레벨 4 이하의 BF몬스터를 수비표시로 특수소환할 수 있어. 되살아나라, 흰무지개의 쿠니요시! 그리고 레벨 3 흰무지개의 쿠니요시에 레벨 2 극북의 블리자드를 튜닝!”
싱크로 선언을 외친 크로우의 표정에 문득 아차 싶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 여기서 무언가의 플레이 미스가 벌어진 듯 했다. 유세이는 그걸 확인했지만, 정작 맞은편의 잭이 확인했는지는 불명이다.
선언은 무를 수가 없으니, 크로우는 마저 영창을 입에 올렸다.
“검은 열풍이여, 유대를 맺는 순풍이 되어라! 싱크로 소환! 날아서라! A BF-오월비의 소하야!”
필드 상황을 한 번 더 훑어본 그가 고개를 내젓고는 선언했다.
“오월비의 소하야가 싱크로 소환에 성공했을 때, 내 묘지의 A BF 하나를 특수소환 할 수 있어. 내가 불러낼 건 흰무지개의 쿠니요시! 그리고 여기서, 소나기의 라이키리의 몬스터 효과 발동! 내 필드의 BF몬스터의 수까지 상대 필드의 카드를 파괴할 수 있지! 내가 선택하는 건, 거기 리버스 카드와―제길. 거기 너, 진짜로 톱스의 킹, 잭 아틀라스가 아닌 거지?”
필드의 BF는 라이키리를 포함하여 세 마리. 잭의 필드를 전부 쓸어버리기엔 충분한 숫자였다. 제일 먼저 리버스 카드를 가리켰던 손끝이 레드 데몬즈에게로 향하려다 말고, 돌연 ‘크로우’가 자기 머리를 막 헝클어뜨리더니 대뜸 삿대질했다. 차라리 그들이 익숙한 질감과 온도감으로. 거기에 긴장이 풀린 건지, 잭이 반 음은 삑사리가 난 채로 소리쳐 답했다.
“그렇다고 계속 말했지 않았나! 심지어 이제 더는 ‘킹’이 아닌데도!”
“그럼 좋아. 듀얼은 속행한다!”
“당연한 것을!”
“남의 영혼을 멋대로 파괴해선 안 될 일이니까, 나는―”
“둘 다, 플레이 미스 나는 상태로 듀얼하는 건 그만하는 게 어때? 나중에 후회하게 될 거야. 그리고, 크로우, 음, 당신은 우리 이야기를 좀 들어줬으면 하는데.”
첫 단추부터 삐걱이는 듀얼이었으니, 유세이는 두 사람을 말리면서 ‘크로우’를 향해서 말했다. 저희의 그 활달한 친구와는 다른 존재라는 걸 안 이상 너 같은 호칭을 쓰기는 꺼림칙해서 어정쩡한 존칭이 되어버렸지만.
“오케이, 나도 뭔가 오해한 거 같으니까.”
역시 환한 미소가 돌아오지 않는 건 낯설었다.
당신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가 평행우주는 아닐까, 라는 가설을 설명함과 동시에 그간 있었던 사건의 흐름을 일러주고 나니 크로우는 금방 이해했다. 정확히는 “역시 어려운 건 잘 모르겠지만, 뭐랄까, 유세이라고 했나? 너, 우리 쪽에 신지라는 동료가 있는데 걔처럼 똑똑한 것 같으니까 네 말이 맞겠지.”라며 웃은 정도지만. 어쨌거나 더는 납치니 뭐니의 소동을 일으키진 않았다.
그러자마자 제일 먼저 달려들어서 다시 자기소개를 한 건 루아와 루카였다. 평행우주여도 크로우는 크로우인지라 아이들 특유의 밝음에 싱글거리며 받아줬다. 두 사람의 부모가 애들을 놓고 해외에 돌아다닌다는 말에 “톱스놈들은 하여튼 애들을 방치하고 말야!”라면서 성을 냈고, 아키의 아버지가 국회위원이라는 말에 눈을 부라렸다가 이내 “여긴 내 쪽 세계랑은 다르댔지.”하며 바로 분노를 갈무리하는 헤프닝도 있었다. 처음에 영문도 모르고 날뛰는 저를 상대했던 브루노에게도 가타부타 없이 깔끔하게 사과를 끝내고서, 크로우가 블랙버드를 가리키며 물었다.
“블랙버드가 나한테 있다는 건, 이 세계에는 피어슨이 있었지만 죽었다는 거겠지. 혹시 윗대가리한테 사냥당했어?”
여전히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저어하던 유세이와 잭에게는 차라리 한숨 돌릴 기회였다. 다만 화제가 화제인지라 두 사람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다가, 결국 유세이가 이전에 크로우에게 들었던 내용을 떠뜸떠뜸 설명했다.
“그래? 그랬구나…. 혹시 묘지는 어디에 있는지 알아?”
“같이 찾아갔었으니까.”
“…블랙버드에도 운행기록이 있을 거다.”
“좋-아. 그러면, 이제 너희 둘 이야기만 남았지? 어쩌다가 우리가 형제 같은 게 된 건지도 좀 궁금한데.”
이제 더는 피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자신이 기억하는 범위에서, 처음의 객관적인 역사의 사실이 아니라 단락적이고 주관적인 기억과 추억을 꺼내놨다. 이제 만 3년이 되어가는, 잭의 시티 행을 밝히는 중에 다시 날뛰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크로우’는 생각보다 무심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다만,
“제로 리버스였나, 그건 확실히 내 세계에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거 하나로 이렇게까지 달라지나 봐? 그렇지만 잭 아틀라스. 어느 세계가 됐던, 네가 배신자인 건 변함이 없잖아. 오히려 더 심하지 않아? 고향까지 세탁했으면 말이지. 정말 딴판인가 생각했던 잠깐이 아까울 정도야.”
잭의 이야기가 끝나자 지독하게 서늘한 눈을 하더니 사실적시와 독설 어드메쯤 되는 말을 내뱉었다. 신분 세탁을 한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렉스 고드윈 장관이었으나, 그에 반대하지 않은 자신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한 잭은 당연히 할 말이 없었고 크로우는 그대로 몸을 돌려 블랙버드를 끌어냈다.
“여기 있어봤자 다들 불편하기만 할 것 같으니까 내가 나갈게.”
“크로우?”
“아니, 불편하긴! 아무리 그래도 크로우를 노숙하게 둘 순 없는데!”
“아, 그, 그러면 우리 집은 어때? 손님방으로 빈 곳이 꽤 있으니까―. 엄마아빠도 크로우면 괜찮다고 할 거야.”
“아니면 우리 집도 괜찮아, 크로우! 그치, 루카?”
“응응! 크로우가 있어 주면 우리도 좋아, 안될까?”
유세이가 재차 당황하고 브루노와 아키가 허둥대며 일단 되는대로 말을 던져댔다. 쌍둥이 역시 앞의 두 사람의 말이 썩 통하지 않는 것 같자, 일단 매달리고 봤다. 아이들까지 그렇게 나오니 크로우는 잠깐 망설이는 듯했다. 그렇지만 직접 입을 열진 않았으나 분명히 제 쪽으로 뻗어졌던 손을 발견한 순간, 그 머뭇거림은 분노로 단숨에 휘발됐다. 대답으로 내세운 것은 서늘한 조소다.
“내가 배신자 놈하고 한 지붕 아래에서 먹고 잘 정도로 성격이 좋은 게 아니거든. 너희는 분명 좋은 동료들이니 잭 아틀라스에 관해서도 나한테 좋게 말하려고 애쓸 거고. 그리고 내 감인데, 하루 이틀이면 원래대로 돌아갈 거란 말이지. 그러니까, 서로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자는 거야.”
이번에는 누구도 적극적으로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블랙버드의 엔진음이 아예 들리지 않게 되었을 무렵에야 너나 할 것 없이 막혔던 숨을 뱉어냈다. 먹구름과 비의 이름을 가진 블랙페더를 다루던 크로우는, 정말 그것과 비슷한 무게를 달고 있던 모양이다.
정신을 차린 면면은 곧 잭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뜩이나 하얀 편인 잭은 아예 핏기 하나 없이 백지장처럼 멀겋게 질려있었다.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그가 그런 식으로 볼 것 없다며 손을 내젓다가, 마찬가지로 묘하게 표정이 안 좋은 유세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건 그렇고, 유세이 너 역시 얼굴이 영 아니다만.”
“아니, 그, 나 자신이 좀 싫어지려고 해서….”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싶어서 눈짓으로 되물으니, 드물게도 똑 부러지지 않은 목소리가 어물어물 흘러나왔다.
“크로우가 예전에 해줬던 말을, 이렇게 확인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 내가 크로우의 인생에 나쁜 시작점을 준 것만은 아니었다는 걸 알아서, 그거는 기쁘지만, 그렇지만, 지금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자기혐오로 어두워진 소꿉친구의 낯빛을 들여다본 잭은 언젠가 그랬듯이 폭력으로 그를 제재했다. 머리 위로 휙 들린 손을 보고 어금니를 물어 충격을 대비했던 유세이는 생각보다 약한 강도에 잠시간 눈을 끔뻑였다.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고 소리도 상당히 살벌했지만, 아무래도 잭 역시 이만저만 충격을 받은 상태라 그런지 힘이 덜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유세이는 그 사실을 굳이 입에 담지 않았고, 사려 깊은 마사하우스의 둘째가 그러리라고 예상했으므로 잭은 그대로 일갈했다.
“멍청한 소릴! 후도 유세이, 네 존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했는지 그 점에 자신을 가지도록! 게다가 그런 마음가짐은 저쪽 세계의 크로우에게도 틀림없이 실례다. 같은 사람은 확실히 아니지만, 그 녀석 또한 크로우 호건. 허투루 살아온 삶이 아닐진대, 그 발버둥을 동정해선 안 돼!”
“…그것도 그렇네. 고마워, 잭. 네가 심적으로 더 괴로울 텐데 말야.”
“흥. 어차피 너와 크로우, 둘 다 따지고 보면 내 동생 격 아닌가. 맏이로서 이정도는 당연하다.”
“우와, 잭이 그렇게 말하니까 완전 이상해~.”
“루아! 그치만 그것도 확실히 그러네. 뭔가 폿포타임에서 야무진 사람이라고 하면 크로우니까.”
물론, 잰 체도 거기까지였다. 팔짱을 끼고 떡 버티고 선 그에게 루아가 진실의 입을 연 탓이었다. 거기에 루카의 다이렉트 어택 추가타까지. 곧 맥 빠진 웃음과 농이 오간다. 쌍둥이 덕에 팀 파이브디즈는 일시적으로나마 평소의 분위기를 되찾았다.
눈가에 버석버석하게 낀 불안감은 오로지 ‘크로우’가 말했던, 하루이틀이면 알아서 돌아올 것이라는 언급으로 눌러둔 채다. 어쨌든 그의 직감은 대체로 들어맞는 편이었으니까.
그리고 정 안 된다면 붉은 용의 힘이라도 빌려서 차원을 뚫고 데려오면 될 거라는 막연한 믿음 또한 있었다. 이런 웃기지도 않는 사태로 동료이자 가족을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제시된 기한을 넘으면 그때는 우격다짐으로 시도해볼 거다. 때론 상대의 리버스 카드를 보고도 무작정 덤벼들어야 할 순간이 있는 법이다. 모두의 눈동자에는 그런 의지가 담겨있었다.
크로우는 문득 잠에서 깼다. 체내시계가 잠을 쫓은 게 아니고, 낯선 느낌을 감지한 몸이 저절로 긴장하며 눈을 뜬 거다. 폿포타임에서 이전처럼 잭과 유세이와 함께 산 이래로 이런 식으로 깨어난 적은 없다. 이건 새틀라이트에서 살던 시절의 그 감각이었다. 언제 어떤 위협이 들이닥칠지 몰라 잠이 얕던 시절의. 때문에 크로우는 굳이 눈을 뜨지 않고 손끝만 슬그머니 움직여 자신의 현 위치를 파악하려고 시도했다. 묶여있지는 않지만, 역시 기분 탓이 아니었다. 시트로 추정되는 천의 감촉은 확실하게 제 방의 물건이 아니다. 이건 납치일까. 그다지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전에 유세이가 납치된 적이 있으니.
‘아니, 잠깐만. 그건 이상하잖아.’
뭔가 아귀가 안 맞았다. 정말로 납치라면 자신이 내도록 퍼질러 잤을 리가 없다. 자랑은 아니지만, 위기 감지에는 자신이 있었다. 듀얼리스트로서도 톡톡히 덕을 보는 직감이 낯선 사람의 침입에 반응하지 않았을 리 없다.
백번 양보해서 그럴 틈도 없이 약물로 재웠다고 해도 문제다. 자신의 방은 거실 겸 주방을 지나 계단을 오르고 잭의 방을 지나쳐서 와야 한다. 보나마나 밤샘 중이었을 유세이와 브루노를 잭이 눈치채지 못하게 제압하고 올라온다? 아니, 유세이도 잭도 그렇게 만만하게 살아온 녀석들이 아니다(브루노는 열외다. 그 친구는 덩치만 컸지, 저희네 다이치보다 싸움을 못 한다). 제아무리 팀의 메카닉 둘을 제압했다손 쳐도, 그 잭 아틀라스의 육감을 뚫고 제 방으로 쳐들어오는 건 그의 덱을 바닐라 몬스터 온리 덱으로 덤벼 이길 확률과 같다고 봐야 한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걸까.
생각이 뱅뱅 돈다. 이럴 바에야 행동하는 편이 낫다. 발목을 묶어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끊는 게 좋다는 걸 그리 짧지 않은 삶에서 몸으로 배웠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자신이 평상복차림인 것을 확인했고, 홀더에도 덱이 들어있다. 손끝으로 헤아린 숫자도 틀림이 없다.
인기척이 있는 방은 맞지만, 시선이나 경계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크로우는 속으로 천천히 셋을 세며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 덤벼들면 바로 박차고 도망칠 수 있게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켰으나, 그는 곧 망연히 힘을 뺐다. 깜깜한 방에는 곤히 자는 아이들 셋이 전부였다.
“뭐야 이거.”
어둠에 눈이 익을 때까지 기다린 그는 이불 너머 아이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애들이다. 팀 새티스팩션 시절에도 정찰은 저의 몫이었기 때문에 사람 얼굴을 기억하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택배일까지 하고 있으니, 오가며 봤던 사람들은 거진 다 기억하고 있다고 봐도 좋았다. 아이들이라면 더더욱.
어쩌다가 면식도 없는 아이들의 집에서 자고 있었던 건지, 점점 더 영문을 모르게 됐다. 그렇지만 일단 안전 하나는 확보됐다고 생각해도 될 거였다. 아이들이 저렇게 천진하고 편안하게 잠든 곳이 위험할 리가 없으니까. 크로우는 아이들이 깨지 않게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 방을 빠져나왔다.
살펴본 결과, 이곳은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최소 4인 가구. 보호자의 흔적은 보이지만 정작 그 보호자가 보이지 않는다. 애가 셋 딸린 집치고는 단출한 편이고, 가구는 어디에서 주워서 맞춘 것처럼 통일성이 없다. 리폼한 흔적도 꽤 보이니까 짐작이 맞을 거다. 창밖의 풍경은 제 기억 속의 새틀라이트와 흡사한데 이 집은 B.A.D.의 여느 건물보다 상태가 좋아서, 최소한 과거로 날려왔다든가 하는 소설 같은 상황은 아닐 것 같았다.
잡다한 정보만 얻었지 실제로 도움이 될 내용은 없어서 크로우는 그냥 뒷목을 갉작이다가 동트는 것을 보고는 거실 겸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 애들도 깰 텐데 아무리 보호자가 없어도 그렇지, 아침밥을 굶길 수는 없었다. 여기 있는 식재료도 이상한 건 없어 보였고 애들 먹이려고 챙겨뒀을 테니 멋대로 썼다고 해도 봐주겠지, 뭐. 혹시 나중에 보호자가 와서 뭐라고 하면 그때는 어떻게든 갚아주면 될 일이다.
햇살이 눈꺼풀을 간질였다. 아만다와 프랭크는 너나 할 것 없이 눈을 번쩍 떴다. 막내인 태너는 아직 꿈나라 속인지 이불 한 귀퉁이를 뭉쳐서 끌어안고 뭔가 웅얼거리고 있었다. 크로우의 자리는 이불이 대충 던져진 채였고, 문 너머로 둔탁하게 칼이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 따위가 들린다.
“태너, 일어나!”
“일어나~.”
얼른 태너를 깨우고 크로우를 꽉 끌어안고 아침인사를 건네자. 그렇게 또 언제나와 같은 행복한 하루가 시작될 거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다고 투정 부리는 막내는 맏이인 아만다가 나름대로 크로우의 흉내를 내며 다 같이 아침 인사를 하러 가야 한다는 말에 벌떡 일어났다. 제일 늦게 일어난 주제에 이부자리 정리도 안 하고 가장 먼저 달려 나간 태너의 뒤를 아만다와 프랭크가 치사하다고 외치며 뒤쫓았다.
“크로우~ 좋은 아침!”
“좋은 아침! 크로우 형!”
“크로우 오빠, 잘 잤어? 오늘 아침은 뭐야?”
세 사람은 여느 때처럼 앞치마를 두르고 조리대에 서 있는 그들의 보호자를 끌어안으며 힘차게 외쳤다. 이제 “요리하는 중에는 덤벼들지 말랬지, 너희들!”이라거나 “거의 다 됐으니까 접시 가지고 와.”라거나 그것도 아니면 “세수하고 손 씻고 와.”라며 환한 웃음이 돌아와야 할 때였으나, 오늘은 뭔가 달랐다.
식칼을 조리대 안쪽으로 조심스레 밀어놓고, 가스버너의 불을 확실히 끄고서 저희 쪽을 향한 얼굴은 어쩐지 낯설고 난처한 표정을 하고 있다. 히끅. 태너가 숨을 잘못 삼키며 딸꾹질했다. 덜컥 손이 떨어졌다. 눈앞에 있는 건 크로우인데 크로우가 아니다. 아만다는 망연하게 제 왼편의 프랭크를 바라보았다. 겁먹은 눈동자. 그 안에는 똑같은 표정을 한 제 얼굴이 비친다. 그걸 깨닫자마자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셋은 거의 동시에 울기 시작했고, 아만다만 우는 와중에 겨우겨우 정신을 다잡고 그래도 내가 맏이라며 두 사람을 질질 끌어 자기 뒤로 보냈다.
“어, 그…. 얘들아?”
낯선 크로우는 저희에게 손을 뻗으려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른다는 듯이 주춤거리며 손을 거뒀다. 그 순간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실례―는, 이게 뭐야. 크로우, 대체 무슨 일이야. 네가 아침부터 애들을 다 울리고?”
“으, 으아아앙! 신지!”
품에 식료품이 든 봉투를 안은, 신지라고 불린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눈 앞에 펼쳐진 상황에 갸웃거리다가 일단 자기에게 달려온 세 아이를 품에 안고 다독였다. 크로우는 새로 얻은 정보를 복기했다. 일단, 이 아이들의 보호자는 ‘크로우’가 맞는 모양이다. 최소한 뒷모습은 자신과 똑같다. 얼굴을 보고 운 걸 보면, 어쩌면 여긴 마커가 없을지도 모른다. 신지라는 사람은 ‘크로우’와 꽤 친하고, 아이들도 따르는 걸로 보아 나쁜 놈은 아니다. 크로우는 우선 양손을 들어 자신은 해를 끼칠 의사가 없다는 걸 표시하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신지, 라고 했나? 내가 좀 이상한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일단 그냥 들어줘. 믿어줄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너희가 아는 ‘크로우’가 아니야.”
“뭐?”
네 쌍의 눈이 덜컥 이쪽을 향해서 크로우는 답지 않게 주눅 들고 말았다. 애들을 울린 탓이 더 클지도 몰랐지만.
“진짜로. 그래서 지금, 그 꼬맹이들 이름도 몰라. 여기의 ‘크로우’한테도 마커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 때문에 놀랐지. 미안. 그래도 내 직감이긴 한데, 하루이틀 지나면 뭔가 원래대로 되지 않을까는 싶거든?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내가 좀 무섭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같이 있게 해줄래? 무리는 말고. 싫으면 싫다고 해. 하루이틀 노숙쯤이야 간단히 해치우니까.”
버릇이 든 탓에 자꾸 꼬맹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을 뻔해서 크로우는 또다시 뻗었던 손을 물리면서 아이들에게 시선을 맞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질문에 머뭇거리며 서로를 바라보던 아이 중 조금 의젓해 보이는 여자아이가 손을 들더니, 대답 대신에 똑같이 질문을 던졌다.
“우리를 쫓는 게 아니고, 요?”
“미쳤다고 너넬 쫓아? 아니, 나가야 한다면 내가 나가야지. 여긴 어떻게 봐도 너넬 데리고 있으려고 마련한 곳인데. 좀만 둘러보면 알아. 여기의 내가 너희한테 얼마나 진심인지.”
반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듯이 외치자 아직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던 아이들이 눈을 깜빡거리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저에게 달려들어 안겼다. 그 여파로 주저앉고 말았지만, 꼬마들이 괜찮으면 일단 다 된 셈이라 겨우 그 등을 토닥거릴 힘을 냈다. 최소한 이제 저를 무서워하지는 않는 듯했다.
“우리 크로우도 형하고 똑같이 마커가 있어!”
“우리가 아는 크로우가 아니어서 깜짝 놀랐지만.”
“놀랄 만큼 우리가 아는 크로우 오빠랑 똑같은걸!”
“그러냐. 그러면 다행이고. 일단 밥부터 먹자. 다 식었겠다.”
“아하하, 진짜로 똑같잖아~.”
“신지, 였지. 너도 온 김에 같이 먹자. 식사는 원래 왁자지껄하게 같이 먹는 게 더 맛있는 법이야.”
“이게 진짜 뭐람….”
아이들은 품에서 꺄르륵 웃으면서 즐겁게 외쳤고, 그 덕에 마음의 짐을 내려둔 크로우가 편하게 웃으며 아직도 멀뚱하니 서 있는 신지에게 식사를 권했다. 상궤를 벗어나는 폭탄 발언과 평범한 일상이 빚어낸 환장의 콜라보레이션에 얼빠진 표정의 손님은 곧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 식탁에 앉게 됐다.
아이들은 참으로 무구하게도 자기들의 보호자 쪽이 아닌 크로우에게 낯가림을 금방 풀고선 저희가 으레 굴던 그대로 매달리고 칭얼대고 까르륵 웃으며 아주 바쁘게 표정을 빙글빙글 바꿔댔다. 아니, 꼭 표정만은 아니다. 물리적으로도 그렇다. 쉴 새 없이 재잘재잘 떠들면서 이리저리 잡아 끌어댔다는 뜻이다. 크로우는 고사리 같은 손에 순순히 끌려다니면서도 이 꼬마들, 타인에게 너무 경계심이 없는 건 아닐까, 하는 괜한 오지랖이나 주워섬겼다. 물론 금방 기각한 문장이긴 했다. 어린애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바보가 아니다. 애들이 애들답게 구는 때란 믿을 만한 보호자가 있을 때라는 것을 저는 몸소 체험해왔지 않은가. 보호자와 피보호자, 어느 쪽으로도 말이다.
반면에 제 기이한 이야기 자체는 믿어주었을지언정 신지라는 친구는 최소한의 경계심은 잊지 않은 것 같았다. 은근히 자기 말을 안 하는 것도 그렇고, 어쨌든 저를 시야에서 벗어나게는 못하게 하려는 것도 그렇고. 다만 그런 낌새를 눈치채게 해서야 아웃 아닌가, 싶은데 거기까지 말해줘야 할 의리가 있는 것도 아니라 입 다물기로 맘먹었다. 여기가 저의 새틀라이트와 동일한 이름으로 취급되는 곳이라면, 저 정도 나이를 먹을 때까지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나름대로 산전수전 겪어 관록이 있는 놈이라는 뜻이니.
크로우의 그런 인상은 두어 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갈아치워졌다. 신지는 한 시간 반 남짓할 즈음에 애들의 넘쳐나는 에너지를 따라잡지 못하고 그대로 나자빠져 거실 한복판에 드러누워 기브업이나 외치고 있게 됐다. 그러면서 이쪽을 기가 찬 눈으로 올려다보는데, 크로우야 말로 같은 시선을 돌려주고 싶은 참이었다.
“뭐야, 말로 해.”
“아니, 정말로, 크로우가 맞구나 싶어져서….”
“이건 또 뭔 소리람.”
“…이걸로 기가 안 빨리는 네가 신기해.”
“하! 뭘 모르는구만. 난 원래 애들 열 명은 데리고 있었어. 이렇게 예의 바르게 잘 큰 셋 정도야 해 질 때까지 놀아줘도 끄떡없다고.”
녹다운된 신지를 두고서도 오빠/형은 더 안 노느냐고 해맑게 묻고 기웃대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크로우가 그렇게 말하자, 꼬맹이들이 “와아!”하고 환성을 지르며 펄쩍 뛰어들었다. 절대 체구가 크다고 말할 수 없는데도 아이 셋이 덤벼들어 매달리는데도 처음만 잠시 휘청했을 뿐 금방 균형을 잡기까지 했다. 뭐, 모 씨처럼 애들을 한쪽 팔에 매달리게 해 그대로 번쩍 들어 올리는 힘자랑은 무리지만.
시답잖은 이야기가 끝난 직후, 크로우는 신지를 곁눈질해 일별했다. 미미하게 온몸을 감싸던 뻣뻣함이 가셨다. 아무래도 이제서야 경계심을 풀어준 듯한데, 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돌파하게 해줬는지는 몰라도 적대시되는 건 피곤한 일이었으므로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그러고 나면 본격적인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아까 네 설명 말인데, 하면서 운을 뗀 신지는 평행우주니 뭐니를 시작으로 불확정성의 원리며 확률적인 존재 따위의 어려운 단어를 꺼내기 시작했다. 혼자 줄줄 말을 읊던 그가 평균 나이 열 살이나 간신히 되는 아이들이야 그렇다 쳐도 크로우까지 똑같은 표정을 하고 저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는 걸 발견하곤 입을 다물었다가 기어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팍 숙였다. 아니, 뭘 어떻게 하면 그렇게 똑같은 표정을 하는 거야! 누가 누구와 똑같다는 건지 알기 어려운 말에 크로우는 인상을 썼다가 곧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자랑은 아닌데 난 그런 어려운 이야기 몰라.”
“…쉽게 말하면 똑같은 사람이 있는 다른 세계로 이해하면 될 것 같은데.”
“뭐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면 좋잖아. 어쨌든 보니까 넌 유세이하곤 말이 통할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브루노까지 끼면 아주 끝내주겠네. 아, 근데 이미 알고 있으려나? 아까 똑같은 사람이 있는 다른 세계라고 했지…?”
크로우가 마지막에 말을 어물어물 뭉개버린 까닭은 유세이나 브루노라는 이름을 꺼냈을 때 신지의 눈동자에 떠오른 선명한 의문 탓이다. 그건 난생처음 듣는 단어를 마주한 사람이 보이는 반응이었다. 세간에서 말하는 일반교양 상식은 궤멸적이라곤 하지만, 실제로 머리 회전이 빠르고 사람의 기색을 읽는 데에 특화된 크로우가 잘못 읽었을 리 없다. 신지가 무어라고 말을 꺼내기 전에 그는 이 세계에 유세이나 브루노가 없음을 확신하며 선수를 쳤다.
“―그런데, 여기엔 유세이도 브루노도 없구나? 그러면 시티, 아니지, 톱스 쪽에 후도 박사라고 들어봤어?”
“우리 같은 커몬즈가 박사라고 불릴 만한 유명한 사람을 알 리가 없잖아. 그건 먹고사는데 하나도 쓸모없는걸. 시큐리티 쪽 사람이면 또 모르겠지만.”
“그건 그렇지. 그럼 아키나 루카, 루아를 확인하는 것도 어렵겠, 아니, 잠깐만 설마 잭 그 녀석도 없는 건 아니지?”
시티 출신인 다른 팀원들을 확인하는 건 글렀다 싶었던 크로우가 안색을 바꾸고 다급하게 묻자 신지는 이번엔 진기한 걸 봤다는 얼굴을 하고선 주저하며 답했다.
“음, 잭이면 잭 아틀라스를 말하는 거겠지? …여기의 넌, 그 녀석을 죽도록 싫어했는데, 너하고는 좀 다른가 보네.”
“싸우기는 제일 많이 싸우긴 하지. 보니까 여기는 싫어한다는 표현은 귀여운 수준인 모양이고. ‘내’가 걜 보면 죽이겠다고 했겠지? 어떻게 된 거야?”
정말로 이곳의 크로우 호건이 저와 동질하다면, 신지가 말한 ‘죽도록 싫어한다’는 표현은 한참 돌려 말한 걸 테다. 과연 그는 난처하다는 듯 눈가를 찡그렸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가 아는 걸 대강 설명해줬다. 커몬즈의 별이자 희망이 양쪽의, 그러나 실질적으론 톱스만의 킹으로 불리기까지를.
신지는 제가 아는 크로우가 고스란히 겪었을 이야기를 같은 얼굴을 한 다른 이에게 전하면서 괜히 눈치를 봤다. 자기 입으로 평행우주 가설을 내세웠지만 당장 이 크로우와 그쪽의 잭 사이는 나쁘지 않은 듯했으니 너희는 왜 사이가 나쁘지 않냐고 고자질하는 기분이었다. 저희 크로우와 정말 똑같다고 느낀 이상, 이걸로 이 애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은 거다.
그건 기우였다. 제가 말을 마쳤을 때, 크로우는 “흐음, 그렇단 말이지.”라고 입엣말을 중얼거리고선 손깍지를 껴 뒤통수에 대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툭 뱉었다.
“여기 잭도 내가 아는 그 바보 놈이 맞는 거 같긴 한데, 뭔가 영 걸린단 말이지. 유세이도 없는데 걔가 켕길 게 있나? 뭐, 고민해봤자 소용없겠고, 그냥 직접 물어볼까!”
“뭐?”
지나치게 산뜻하고 시원시원해서 오히려 헛들은 게 아닌가 싶어질 정도였다. 아이들도 지금껏 눈치를 보고 숨죽이고 있다가(그야 크로우가 저희에겐 별말 안 했다지만 잭 이야기가 나오면 기분이 늘 안 좋았던 걸 아니까), 동그랗게 뜬 눈을 몇 번이고 깜빡였다. 처음으로 그들의 크로우와 이 사람의 다른 점을 발견한 성싶다. 거친가 싶으면 실은 다정한 구석도, 쾌활하면서 호쾌한 면모도 다 같았지만 그들의 크로우 호건은 새들로 이뤄진 A-BF를 다루면서도 그 이미지처럼 가볍게 날아오르는 사람은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굴에 도사린 야생짐승처럼 쉽게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행동하기로 맘먹으면 누구보다 빠르긴 했지만. 그런 저희 속을 읽은 걸까. 저쪽 세상의 크로우 호건은 혀를 가볍게 빼물어 킥킥 웃고는 여상스럽게 이쪽 자신이 쓰는 핸드폰을 열어 주소록을 뒤진다.
“이거 봐. 연락처도 그대로 남아있네. 물리적으로 막혀있는 것도 아니고, 연락하고 찾아가는 정도는 간단히 해치울 수 있잖아.”
그러더니 언제든지 나갈 수 있게 자기 덱을 홀더에 넣어 놓고 잭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자신이 듀얼을 신청하면 무조건 받아줄 거라고 확신하는 태도였다. 네 사람은 조용히 그런 그를 지켜본다. 그러면,
“사람 알아보는 데엔 듀얼만 한 게 없거든.”
저쪽에서 전화 받기를 기다리는 사이, 그는 문득 저희를 돌아보며 애교 있게 윙크했다.
잭 아틀라스는 전화벨이 울려 무심코 핸드폰을 열었다가 그대로 놀라 얼어붙었다. 세상이 두 쪽 나더라도 여기로 연락할 리 없을 거라 생각한 인물이 전화를 건 거다. 크로우 호건. 커몬즈에서 지낼 적에 면식이 있었고 서로 호의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도 제가 킹으로 군림하기 전의 일이다. 그는 이제 저를 거의 찢어 죽일 듯이 미워하고 있고, 저는 차라리 아무도 닿지 않는 고독의 탑에 그가 쳐들어와 전부 산산조각 내줬으면 하는가도 싶다고 생각한다.
혹시 잘못 건 게 아닐까(그러면 그가 여전히 제 번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된다. 이건 이것대로 뭔가 아찔하다) 해서 부재중이 찍힐 때까지 기다렸더니, 끊겼던 전화는 채 1초도 되지 않아 다시 울렸다. 이건 크로우가 저에게 연락하려고 건 전화가 맞는 거다. 그 어떤 국면에도 담대하던 손이 조금 떨리는 듯도 했다. 한 번 심호흡을 한 후, 각오를 다진 잭이 전화를 받았다.
― 여어, 뭘 이렇게 꾸물거려. 이번 전화도 안 받았으면 그냥 쳐들어가려고 했다구.
“…무슨 일이지?”
상투적인 말을 꺼낼 틈도 없이 선수부터 빼앗겼고 예상한 것과 달리 쾌활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온 나머지, 대응이 평소보다 몇 배로 무뚝뚝해졌다. 말을 뱉고도 아차했음은 물론이다. 동시에 스스로 조소가 났다. 기껏 연락받아놓고 잭 아틀라스란 작자가 한다는 꼴이 이거라니. 자조와 초조가 동시에 밀려드는데 의외로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아 했다.
― 그냥 얼굴이나 좀 보자고. 아, 하도 고명하신 분이라 쉽게 안 움직이시려나? 제가 가드릴깝쇼?
“…내가 가겠다. 커몬즈가 여길 돌아다니는 게 위험하다는 건 너라고 모르지 않을 텐데.”
― 오, 여기의 잭 아틀라스 님께선 되게 건설하시네.
“견실이겠지.”
반사적으로 그렇게 답해놓고서 잭은 지독하게 밀려드는 위화감에 이를 물었다. 제가 크로우의 목소리를 잘못 알아들을 리는 없다. 그러나 지금 이 전화 너머의 인물은 제가 아는 크로우 호건일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처럼 배신자 잭 아틀라스에게 유쾌하게 말을 붙이고, 비꼬는 어조일지언정 그 아래에 저렇게 다정한 친애를 깔아두는 이가 어찌 커몬즈의 검은 선풍일 수 있겠느냔 말이다.
차마 언어가 되지 못한 오만 감정을 킹은 정면으로 돌파하기로 했다. 상대의 페이스에 휘말리는 건 성정에 맞지 않으며, 어쨌든 그는 모든 것을 제 손으로 뜯어 부수고 헤쳐 나가며 여기까지 왔다. 그것이 질투이건 모략이건. 의문이라고 다를 바는 없다. 상대가 엎어놓은 카드를 보고서도 오히려 덤벼들어야 하는 때는 분명히 있으므로, 듀얼과 치환하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인 거다. 그것으로 약간의 침착함을 되찾은 그는 상대가 무어라 입을 열기 전에 말을 끊었다.
“너는 누구지. 크로우 호건이 맞기는 한 건가?”
그러자 저 너머에서 까르륵 웃음소리가 났다.
― 덱이나 챙겨서 와. 대답은 얼굴 맞대고서 해줄 테니까. 설마 내빼진 않겠지, ‘킹’?
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정말로 제가 아는 크로우 호건인가. 그런 위화감은 대뜸 날아든 도발 덕에 부차적인 요소가 되었다. 잭 아틀라스는 걸어온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그게 어떤 의도를 깔고 있건, 제 앞을 가로막으면 오로지 부수고 나갈 뿐이다. 그러므로 톱스와 커몬즈의 킹은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답했다.
“이 잭 아틀라스 사전에 회피란 없다.”
― 그렇게 나오셔야지.
상대방은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답하고는 장소 하나를 불렀다. 지목된 곳을 들은 잭은 눈가를 찡그렸다. 일 년하고도 몇 개월 전, 프렌드쉽 컵이 열리기 전에 크로우와 마지막으로 봤던 곳이었다. 상대는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뚝 끊어서, 대체 무슨 이유로 거길 지목했는지 캐내지도 못한다. 잭은 은근히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가며 덱을 챙겼다. 사방에 깔린 눈을 피해 커몬즈로 내려가려면 지금부터 준비해도 빠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쯤 마음이 들썽이는 건 사실이었다. 이 고독의 탑 정상에서 꿋꿋하고 지루하게 견디는 와중에 불어오는 바람은 차라리 미쁜 일이므로.
화려한 백금발은 캡모자와 후드로 누르고, 색이 짙게 들어간 안경에 어두운 색조의 트레이닝복을 위아래로 갖춰 입은 잭은 골목과 모퉁이를 몇 번씩 돌며 제게 따라붙은 감시의 눈을 떼어냈다.
‘…흥. 징그럽기 짝이 없군.’
저런 짓거리를 안 해도 저는 실상 커몬즈 그 자체가 인질로 잡혀있어 허튼짓은 할 수가 없다. 그 사실을 윗선도 잘 알 텐데 매번 이렇게 치졸하게 굴곤 했다. 담도 작은 것들이라고 속으로 비웃지만, 잭은 그 무엇보다 프렌드쉽 컵이라는 멋들어진 먹이를 덥석 물었던 과거의 자신을 가장 조소한다. 더불어 현재를 타파하지 못하고 현상을 답보하는 지금의 자신 또한.
오도 가도 못하는 고독의 탑이다. 제가 저 높으신 분들의 장기 말로 쓰이는 것은 알아도, 이 자리를 놓고 내려갔다간 저자들은 더 다루기 쉬운 누군가를 앉혀 더더욱 입맛대로 휘두를 게 뻔해 움직일 수가 없다. 그나마 이 잭 아틀라스이기에 현상 유지나마 하는 거지.
한때 익숙했던 거리는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매캐한 내음으로 가득 차 있다. 늘 눅눅한 데가 있었던 공기가 새삼스럽게 낯설어 잭은 저 자신이 아주 오래 떠나있었음을 감각으로 실감했다.
감시자가 따라오지 않음을 재차 확인하고서 잭은 문 닫은 공장에 딸려있던 창고에 발을 들였다. 거기가 공장이었는지 창고였는지 오기 전까진 아리송했는데, 둘 다 맞는 탓에 헷갈렸던 듯하다.
철 플레이트를 얹혀 만든 지붕은 녹이 다 슬어 군데군데 벌레 먹은 듯 구멍이 나 있고 그 틈으로 톱스 지역에서 쏟아진 광공해 자락이 어스름하게 밀려들어 온다. 지붕 상태가 썩 좋지 않은 것에 비해 벽면은 시멘트를 두껍게 발라 만든 덕인지 그럭저럭 멀쩡했다. 외풍은 없고 그 대신으로 공기가 탁하게 고였다. 바닥은 회수할 가치도 없는 폐자재(쓸만한 것과 팔 만한 것은 이미 커몬즈 사람들이 챙긴 지 오래일 것이다)가 널브러져 있어 한눈팔면 걸려 넘어지기 딱 좋았다.
창고 삼 분의 일쯤을 들어가고서 잭은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러면 수화기 너머로 들렸던 청량한 웃음소리가 난다. 그림자와 그림자가 겹쳐 어두운 곳에서 그를 불러낸 상대―크로우가 걸어 나왔다.
“하하하! 와, 여기는 팀 새티스팩션 결성된 적 없다고 들었는데 그 시절 잭 아틀라스를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근데 너 용케도 안 들키고 조용히 왔다?”
“…넌 누구냐?”
들려오는 밝은 웃음소리와는 달리 잭은 심란해진 채로 말조차 바로 받아치지 못했다. 통화상으로도 어딘가 위화감 들던 것이 면 대 면을 맞대니 지나치게 두드러진 탓이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알았다. 눈앞에 선 크로우 호건은 그가 아는 크로우 호건이 아니다. 갖다 댈 증거는 한발 늦게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언급된 두 명의 잭 아틀라스. 잭이라는 이름은 흔하지만, 거기에 아틀라스를 성씨로 가지는 이는 오로지 저 하나뿐이다. 저와 같은 자가 이 세상에 둘씩이나 있을 리 만무한데도, 저 크로우는 자연스럽게 저와 그자를 나누어 불렀다.
그걸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저쪽 또한 눈치챈 듯했다. 유쾌하게 반짝이던 회색 눈동자가 일순 칼날처럼 갸름하게 뜨이더니, 곧 듀얼디스크 하나를 던졌다. 그걸 받아들었을 때 그자는 이미 제 왼팔에 듀얼디스크를 끼운 후였다.
“뭐, 성질 급하게 굴지 마. 듀얼리스트면 듀얼로 말하자구.”
좀 전까지 아이처럼 무구하게 까불던 분위기는 오간 데 없이 저 낯선 크로우 호건은 아까와는 전혀 딴판인 모습을 하고서 이쪽을 똑바로 바라본다. 시선에 분노가 섞이지 않았을 뿐, 그것은 잭 아틀라스가 아는 크로우 호건이었다. 타인으로 규정한 것이 조금 전이었는데 또 손바닥 뒤집듯이 굴다니. 하긴, 다시 생각해보면 그는 언제라도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긴 했더랬다.
스스로 자신의 크로우와 저 사람을 갈라놓고 생각하는 걸 인지 못한 채로 잭은 의심으로 뭉쳤던 긴장을 풀었다. 대신 집중의 초점을 바꾼 것은 이 듀얼. 저자의 말마따나 듀얼리스트라면 듀얼로 대화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듀얼에서야말로 그 무엇도 속이고 가릴 수 없지 않은가. 영혼끼리의 부딪힘인 것을.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덱을 디스크의 셔플부에 넣고 첫 손패 다섯 장을 뽑아 들었다. 수중에 들어온 카드를 확인하지 않은 채로 잭이 먼저 말을 꺼냈다.
“선공과 첫 공격권은 양보하지.”
“허어, 잰 체하기는. 나중에 질질 짜도 난 모른다. 그러면―듀얼!”
“듀얼!”
듀얼디스크에서 빛이 나고 내장된 입체 홀로그램 장비가 가동해 반투명한 필드를 띄워 보여줬다. 톱스에서 본 것보다 해상도가 좋지 않은 것은 구형이라는 뜻일 거다. 그렇다면 높은 확률로 개조해 시큐리티가 추적하지 못하게 해두었겠지. 물증은 없지만 그 크로우 호건이 그 정도 방비를 안 했을 리가 없으므로 이 방증만을 가지고 잭은 괜한 방해꾼이 오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내 차례다, 드로우! 검은 날개의 패를 발동하겠어.”
크로우는 뽑은 카드와 자기 손패를 한번 쓱 훑기가 무섭게 마법카드를 발동시켰다. 패를 한 장 버리고 덱에서 두 장을 드로우하는 효과다. 그냥 보기엔 초 단위로도 생각하지 않고 가용한 패를 늘리려는 것인가 싶겠지만, 상대는 그런 만만한 이가 아니다. 효과 처리는 순식간이고, 본격적인 메인 페이즈다.
“나는 은신의 스팀을 일반 소환, 연이어서 필드에 BF가 존재하는 걸로 흑창의 블래스트를 특수 소환!”
레벨 3의 튜너와 레벨 4의 블랙페더. 도합 레벨 7이다. 그렇다면 초장부터 그가 즐겨 꺼내던 소나기의 라이키리가 등장하는가 싶어 반사적으로 대항책을 조립하려던 잭은 막 전개되던 생각을 막아섰다. 저 크로우 호건이 제가 아는 그가 아닐진대, 덱이 똑같으리라고 기대하는 건 말이 안 되지 않은가. 비록 눈에 익은 블랙페더가 있지만 제가 모르는 어떤 듀얼몬스터가 나올 거라고 판단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레벨 4 흑창의 블래스트에 레벨 3 은신의 스팀을 튜닝!―검은 선풍이여, 천공으로 날아오르는 날개가 되어라! 싱크로 소환! 블랙페더BF-아머드 윙!”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정말로 어썰트 블랙페더가 나오지 않은 데에는 숨을 삼켰다. 커몬즈의 검은 선풍이 다루는 싱크로 몬스터는 언제나 A BF에 한정되었으니. 일말의 가능성을 버리지 못한 최후는 결국 이러하다. 지금껏 가설과 뒤늦게 붙인 증거라며 허점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둘러댔지만, 이번에야말로 확고한 증거가 드밀어졌다. 잭은 스스로 맘 한 켠을 공허감이 베어 물고 가는 걸 인지한다. 아니라고 머리로는 생각했어도 한편으론 조금이나마 기대를 품었던 게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자유낙하를 하는 듯한 부유감을 설명할 수가 없다.
그 사이 크로우는 잽싸게 카드를 엎어 두었다.
“그리고 카드 두 장을 엎어놓고 턴 엔드!”
종료 선언에 문득 정신이 돌아왔다. 제가 잠시 딴생각을 한 걸 아는 건지 그 외 다른 목적이 있어서 그러는지 회색 시선은 이쪽을 아주 대놓고 품평이라도 할 모양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분노와 증오만 섞이지 않았을 뿐, 선을 넘어오지 않는 것은 의외로 매한가지군 싶다. 씁쓸한 실망을 잇새로 물고 잭은 마음속 기어를 바꾼다. 듀얼리스트가 듀얼에 전력을 다하지 않을 수는 없다. 만약에 저를 부술 자가 나타난다면 그건 저 녀석일 거라고 내심 인정한 자를 상대하고 있으니 더더욱.
“나의 턴! 드로우! 선언했듯, 이 턴에 나는 공격하지 않는다.”
“헹. 솔직하지 못하긴. 탐색전하는 건 서로 똑같지 않나? 따로 보여줄 관객도 없는데 엔터테인먼트 찾다가 망한다, 너? 뭐, 됐어. 그럼 어디 해보라고, 잭 아틀라스.”
가볍게 툭 치고 오는 도발을 무시하고서 잭은 정면의 흥미 가득한 시선을 똑바르게 노려보며 소환을 선언했다.
“나는 튜너몬스터 레드 레조네이터를 소환. 자기 필드에 레드 몬스터를 소환했을 때, 패에서 공격력을 반으로 줄여 레드 울프를 특수 소환할 수 있다. 레벨 6인 레드 울프에 레벨 2인 레드 레조네이터를 튜닝!―왕자의 포효, 지금 천지를 뒤흔든다. 유일무이한 패자의 힘을 그 몸에 새기도록 해라! 싱크로 소환! 사나운 영혼, 레드 데몬즈 드래곤 스카라이트!”
“빨리도 등장하셨구만.”
크로우는 직접 확인하러 왔던 그 첫 번째와 마주하며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조금 다른 레조네이터, 조금 다른 관련 테마군 몬스터 그리고 제가 아는 레드 데몬즈이면서 그렇지 않은 레드 데몬즈까지. 다른 세계의 똑같은 사람이라고 설명 듣긴 했지만, 결국 다르지 않은가.
이 잭 아틀라스는 저에게 낯설다. 여기로 암행해 오느라 부러 골라 입은 어울리지도 않는 저 차림새 때문은 아니고, 기억과는 다른 사소한 것들이 툭 튀어나온 못처럼 두드러져 스스럼없이 굴기에는 걸리적거렸다. 피스트 범프처럼 가볍게 친 도발이 되돌아오지 않고, 저기서 안광을 빛내며 도사리고 있는 것은 그가 아는 새틀라이트의 당당한 두 별 중 하나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시선의 꿰뚫음이 낯익으면서도 그 방향은 낯설다 못해 이상할 정도다. 크로우가 기억하기로 언제나 저 시선의 종착은 유세이였는데, 여기의 잭 아틀라스는 그걸 크로우 호건에게 보낸다. 이곳에 후도 유세이가 없는 여파일까 생각하면 좀 씁쓸해진다. 철제 둥지 아래 형제들과 재회해 지내는 잭 아틀라스와 다르게, 저자는 쭉 혼자였던 거겠지. 고독은 때로 어떤 갈구를 낳는다. 그것을 온몸으로 겪어오며 살았던 제가 보기에 이곳의 잭 아틀라스는 천공의 별이라기보다는 하늘을 지탱해 어깨로 딛고 있다던 그의 성씨에 관계된 어떤 신화 속 인물이 생각나게 한다.
‘어떤 신벌에 갇히다니, 답지도 않게 말야.’
새틀라이트는 물론이고 결국은 시티조차도 너를 가둘 수가 없었고 그건 누가 봐도 자명한 일인데, 대체 이곳의 자신은 저 녀석의 무엇에 그렇게 화가 났던 걸까. 물론 가설은 있었다. 그걸 전달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전해 들은 그 모든 것에―잭 아틀라스답지 않은 것에 짜증이 나서 한 대 후려갈기려고 만나려 한 거다. 듀얼로도 맨주먹으로도.
크로우는 눈만 내리깔아 엎어 둔 두 장의 카드를 일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 역시 잭 아틀라스임은 틀림없어 덱의 알맹이가 조금 달라져도 그 전법은 대비할 만하다. 저쪽이야 저를 아주 낯선 타인으로 여기는 감이 있으니 그게 유리한 고점이겠지. 하여간 흑과 백, 시와 비는 꼭 나누어 따져야 하는 놈이다.
속으로 실소를 금하지 못하는 사이, 질 낮은 홀로그램 비전으로도 서로의 에이스 몬스터라 불리기 충분한 덩치들은 잘만 불려 나와 창고가 꽉 들어찼다. 잭은 유언 실행으로 그대로 배틀페이즈 선언 없이 메인페이즈2로 이행했다.
“카드 세 장을 세트하고 턴을 종료. 자, 네 턴이다.”
“좋-아. 아까도 말했지만, 공격권 넘겨준 거 후회하면 늦는다구?”
“흥. 킹에게 이언은 없다!”
“그래, 그래야 잭 아틀라스지, 아무렴―내 차례다! 드로우!”
남들이 꺼내는 “이래야 킹이지!”라는 말은 수도 없이 들었지만 이 자가 말하는 것은 어떻게 들어도 의미가 달랐고 덕분에 명치께가 영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사람은 제각기 적재적소가 있기 마련이다. 현재 정세와 국면을 몇 번씩 읽더라도 지금의 제가 양쪽 모두의 희망으로 서 있는 것이(비록 저쪽에서 무슨 꿍꿍이속을 가지고 있음은 알아도) 최적이라는 답이 나왔다. 갑갑한 적은 있어도 그 판단을 의심해본 적은 없었는데, 저자가 뭔가 말할 때마다 자꾸만 또 다른 길이 있지는 않았을지 의구심이 솟았다. 지금처럼 커몬즈의 선풍과 대립하는 게 아니라, 어쩌면 함께 싸워나갈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달군 쇠를 삼킨 것처럼 속을 태워댔다.
자기가 남 속을 긁는 줄 아는지 모르는지, 크로우는 그대로 자기 턴을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푸른 화염의 슈라를 공격 표시로 소환! 그리고 뒤집어 놓았던 카드를 발동하겠어. 함정카드 오픈. 델타 크로우-안티 리버스! 상대 필드에 세트된 마법/함정카드를 전부 파괴한다!”
“그렇게 두진 않는다! 카운터 함정 발동! 레드 바니시! 이 카드는 마법 또는 함정카드의 효과를 무효로 하고 파괴한다!”
“흐응, 역시 방어책이 있었구만. 그렇다면 배틀이다! 아머드 윙으로 레드 데몬즈 스카라이트를 공격하겠어.”
“하! 내가 아는 크로우 호건에겐 자폭 같은 취미는 없다만, 너는 다른가?”
“미안하지만 아머드 윙은 전투로는 파괴되지도 않고, 전투대미지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무슨 꿍꿍이지?”
“너 같으면 말해주겠냐? 어쨌든 아머드 윙과 전투를 한 스카라이트에게는 쐐기 카운터가 올라갔어. 이대로 차례를 마친다. 자, 그럼 어디 한 번 이쪽 킹의 실력 좀 볼까? 네 턴이라구, 잭.”
잭은 눈썹을 꿈틀했다. 이 자, 사람 성질 긁는 데 뭐가 있다. 심지어 웬만한 어중이떠중이들이 긁어대는 것보다 확실하게 저의 역린이 뭔지 알고서 일부러 찔러대고 있다. 이건 치기 어린 도전자의 단순한 관심 끌기나 괜한 허세 부림이 아니었다. 명백한 도전장이다. 얼굴에 대고 던져진 흰 장갑을 얻어맞고 가만히 있는 것은 이 잭 아틀라스에게 있어서 존재하지 않는 선택지나 다름없다.
“흥, 그렇게 압도적인 힘에 찌그러지고 싶으면 소원대로 해주겠다. 나의 턴! 드로우!”
“―여기서 아머드 윙의 몬스터 효과 발동! 쐐기 카운터가 올라간 몬스터의 공격력과 수비력을 이 턴 동안 0으로 한다. 끼어들어서 미안했어. 마저 진행해보셔-.”
혀까지 빼물고 윙크까지 날리는 꼴에 이번에야말로 울컥했다. 스카라이트의 효과를 미리 읽고 이런 수를 마련한 거라면 교활하기 그지없는 자다. 이렇게 된 이상 틀어막는다고 틀어막힐 힘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속이 풀리지 않는다.
“함정카드 오픈, 레드 크리스탈! 이 턴, ‘레드’ 몬스터는 전투나 효과로는 파괴되지 않는다. 연이어 레드 데몬즈 스카라이트의 몬스터 효과 발동! 한 턴에 한 번 이 카드 이외의, 스카라이트 이하의 공격력을 가지는 특수 소환된 몬스터를 전부 파괴한다! 앱솔루트 파워 플레임!”
“아~ 역시 그렇게 나오나. 그렇지만 읽고 있었다구. 필드에 BF 싱크로 몬스터가 있는 것으로 이 카드는 패에서도 바로 발동할 수 있어. 카운터 함정, 블랙 버드 클로즈! 나는 푸른 화염의 슈라를 묘지로 보내고 스카라이트의 효과를 무효로 하고 파괴한다! 뭐, 눈치 빠른 누구씨 덕분에 파괴는 면했지만 무효화는 그대로니까 이 정도면 평타지. 어쨌든 카드 효과로 나는 블랙 페더 드래곤을 특수 소환할 수 있지. 검은 질풍이여! 숨겨진 마음을 그 날개에 나타내어라! 날아올라라, 블랙 페더 드래곤!”
잭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직전 턴에서 크로우가 제 카운터 함정을 소비하게 한 것은 지금을 위해서가 틀림이 없었다. 비록 낌새가 이상해 만일을 대비해 발동한 레드 크리스탈은 제 몫을 톡톡히 해줬지만 먼저 자원을 까인 것은 영 씁쓸하다.
그래도 곧장 마음을 털어냈다. 스카라이트의 효과에 휩쓸릴 것을 감안해 아직 일반 소환조차 하지 않아둔 것은 다행이지 않은가. 아직 저의 턴은 끝나지 않았고, 지나간 일을 질질 끌어서야 될 것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레벨 8의,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싱크로 몬스터가 나왔기에 지금은 무슨 일에든 대비할 수 있게 해야 했다.
잭은 뽑았던 카드를 필드에 내놓았다.
“나는 레드 스프린터를 소환, 이어서 뒤집어 놨던 카드 오픈! 레드 리본의 효과로 묘지의 레드 레조네이터를 특수 소환한다! 레벨 4의 레드 스프린터에 레벨 2의 레드 레조네이터를 튜닝!―붉은 영혼, 여기에 하나가 되니. 왕자의 외침에 진감하라! 싱크로 소환! 나타나라! 레드 와이반!”
“내 아머드 윙의 공격력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는데, 설마 이게 끝은 아닐 테고?”
“그걸 말할 사람이 어디 있냐고 네 녀석이 먼저 말했지?”
도발을 위함이 분명한 비꼬듯이 던지는 말에 이번엔 잭이 입가를 들어 올려 웃으며 받아쳤다. 그러자 한순간 경악으로 물드는 얼굴이 퍽 유쾌해서 정말로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저쪽도 아마 이런 심정으로 자꾸 성질을 긁어대고 있었나 싶다.
크로우 역시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한순간으로, 금방 표정을 다시 고치고선 또 잽을 날렸다.
“그래도 이번 턴, 또 공격을 못 했네? 처음이야 직접 포기한 거고, 이번은? 파워비트덱이 울고 가겠어, 아주.”
까드득. 말이 해석되는 것보다 영혼이 분노에 휩싸이는 게 더 빨랐다. 이의 사기질이 갈려나가도록 이를 문 잭은 으르렁거리듯이 턴 종료를 선언했다.
“―이것으로 턴 종료다. 동시에 스카라이트의 공격력과 수비력은 원래대로 돌아온다.”
“자, 이걸로 5턴 째인가? 내 차례다, 드로우!”
“…똑같이 갚아주지. 여기서 레드 와이반의 몬스터 효과 발동!”
“뭐?”
“레드 와이반은 상대 턴에 한 번 자신보다 공력력이 높은 몬스터가 2체 이상 존재할 때, 그 중에서 공격력이 가장 높은 몬스터를 파괴할 수 있다! 나는 블랙 페더 드래곤을 파괴!”
“으윽, 쪼잔하게 굴기는…. 아머드 윙으로 레드 와이반을 공격!”
다섯 턴 째가 되어서야 겨우 LP가 변동됐다. 겨우 100이긴 해도 판이 움직인 증거이며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난투가 시작될 징조이기도 했다. 상대보다 적은 LP에서부터 역전승을 이뤄내는 것이 주된 운영법인 잭 아틀라스에게 있어서 이 상황은 오히려 평정심을 끌어내는 호재나 마찬가지였다. 크로우 역시 겨우 100포인트 가지고는 일희일비하는 일 없이 카드 하나를 덮어두며 턴을 마쳤다.
“카드를 한 장 뒤집어놓고 턴을 마친다.”
“나의 턴! 드로우! 다시 한번, 스카라이트의 몬스터 효과 발동! 이 카드 이하의 공격력을 가진 특수 소환된 몬스터를 전부 파괴한다! 이번에야말로 버틸 카드가 없겠지, 크로우! 거꾸러져라, 아머드 윙이여!”
“크윽….”
속공 마법이건 함정 카드건 발동할 낌새가 없어 보여 잭은 이대로 공격을 감행하기로 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이 이상 무슨 수작을 부려댈지 모르는 자였다. 자원이 갖춰지게 뒀다간 상대하기 영 불편한 덱이 블랙 페더 아닌가. 공세가 이쪽으로 기울었을 때 끝을 보는 게 맞다. 지금 손에 들어온 카드는 차라리 이번에 큰 대미지를 주고서 다음 턴에 확실하게 숨통을 조를 목적으로 두는 것이 나을 거다. 블랙 페더 중에선 LP를 코스트로 삼는 것도 있으니 더더욱.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크로우를 향해 잭이 선언했다.
“몬스터 효과로 파괴한 카드 수만큼 스카라이트의 공격력을 500씩 오른다. 파괴한 카드는 하나! 즉, 스카라이트의 공격력은 3500이 된다. 가라, 스카라이트! 크로우에게 다이렉트 어택!”
“젠장!―이라고 할 줄 알았냐? 다이렉트 어택을 받을 때, 이 카드를 패에서 소환할 수 있다! 열풍의 기브리를 수비 표시로 특수 소환!”
“흥, 겨우 목숨을 건지는 정도 아닌가! 레드 데몬즈 스카라이트여, 수비 몬스터를 분쇄하라! 작열의 크림즌 헬 버닝!”
공격 선언이 재차 선언된 순간이었다. 기브리를 꺼내며 짓눌리는 자 특유의 절박함을 내비치던 얼굴이 한순간 바람이 불어와 구름이 밀려나듯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쭉 웅크리고 있었다는 양.
“이때를 기다렸다! 함정카드 발동! 블랙 소닉! 내 필드의 BF가 공격받았을 때, 상대 필드의 앞면 공격 표시 카드를 전부 제외한다!”
“뭣이!”
스카라이트가 뿜어낸 지옥의 업화가 파스스 사라지고 잭 아틀라스의 에이스 몬스터는 그대로 윤곽이 비틀리며 이차원으로 유배되었다.
한순간의 일이었다. 레드 데몬즈 스카라이트가 제외됐다. 이 상황 그 자체는 머리로 이해했지만, 그 외의 것들이 채 따라오지 못한 듯 잭은 눈을 부릅뜨고서 텅 빈 필드를 쳐다보았다. 그러기를 수 초, 그가 소리 높여 껄껄 웃기 시작했다. 눈꼬리에 눈물마저 맺힐 정도로 숨 가쁘게 웃어댄 잭은 거의 살기마저 감도는 눈으로 크로우를 노려봤다. 웬만한 사람들은 바로 오금이 저렸을 시선이지만, 낯익은 이방인은 태연자약하게 시선을 마주했다. 오히려 네 에이스를 제외하는 것이 최초의 목적이었고 그걸 달성했으니 유쾌하다고 으스대는 눈이기까지 하다.
그렇기에 손패에 남아있는 체인 레조네이터가 영 아쉽기만 하다. 스카라이트가 아니고 타이란트였다면 저 함정을 압도적인 힘으로 찢어발길 수 있었을 텐데. 도전자보다 몇 이라도 상관없이 LP가 낮다는, 평소와 같은 환경이 갖춰져 있다는 걸 이유로 저도 모르게 최대 전력을 잠재워버린 건 실책이 분명했다.
“하하핫! 그래, 역시 크로우 호건을 상대하려거든 성급하면 안 됐다. 어차피 비공식전인 것을, 그대로 망설이지 말고 타이란트까지 내보이는 게 맞았어.”
“타이란트? 스카레드 노바 드래곤 같은 거려나.”
그리고 여기서 듣지 못한 이종의 드래곤이 다시 나왔다. 문맥상 저 낯선 이름도 레드 데몬즈일 것이다. 그렇다면 단 하나는 확신할 수 있게 된다. 듀얼 중 잠시 보았던 블랙 페더 드래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레벨 8 싱크로 몬스터는 그리 흔한 게 아니다), 무엇보다―
“이 세상에 레드 데몬즈 드래곤이 둘 있지 않다. 그렇다면 또 다른 레드 데몬즈를 알고 있는 너는 필시 이방인이겠지.”
“저기, 묻고 싶은 게 많은 건 알겠지만 말야. 아직 듀얼은 안 끝났잖아? 얼른 턴 넘겨주지 그래?”
“그랬지. 내 차례는 끝났다.”
부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정곡인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말대로 듀얼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저 역시 남 앞에 당당히 내놓았던 에이스가 제외됐답시고 꼬리를 말고 서렌더할 인종은 아니었다. 듀얼은 속행한다. 그 의도를 담아 턴 종료를 선언했다.
그러면 상대는 생생한 눈을 하고서 송곳니가 언뜻 보이게 웃는 거다. 잔뜩 고양한 듀얼리스트의 영혼은 여기 현현한 것이다. 둘 다 필드 상태는 엉망진창으로 뭐 하나 제대로 남아있는 게 없다지만, 여기서 영혼과 영혼이 거칠게 날뛰어 격돌하며 거기서 비롯한 빛무리가 사방으로 비산하고 있음이 확실했다. 이런 끝내주는 경험은 몇 해에 걸쳐도 한 손에 꼽을 정도밖에 겪지 못한다. 서로가 그런 확신이 있기에 더더욱 신명 나게 달아오르는 것이다.
“내 차례다! 드로우! 나는 극북의―,”
― 거기까지다! 불법 듀얼 중인 커몬즈 둘!
“쳇. 시큐리티 놈들. 딱 좋을 때 찬물을 끼얹네.”
크로우가 카드를 뽑고 막 블리자드를 소환하려는 찰나에 창고 비스듬한 위에서 확성기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턴을 꽤 주고받고 화려하게 치받아댔는데 지금 등장하신 거라면 추적 방해 장치가 오래 버텨줬다고 봐야 할 거다. 하필이면 이제 탐색전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즐거워질 순간에 찾아온 게 최악이면 최악일 뿐이지.
“…저런 잡것들에게 방해받다니. 차라리 전부―”
“너 미쳤냐? 몰래 왔다며? 톱스 씨가 여기 온 거 들키면 너만 끝인 게 아니잖아.”
“윽.”
오랜만에 영혼이 자유를 누리는데 그걸 방해하는 불청객에게 잭이 나설 것같이 굴자, 크로우가 대뜸 명치 언저리를 팔꿈치로 찍어버리며 바닥에 널브러졌던 후드 점퍼와 모자를 건넸다. 듀얼 중에 방해된다고 치웠던 변장을 어찌저찌 뒤집어쓰기 무섭게 곧 조명등이 쏟아졌다. 얼핏 레이저 같은 것이 비쳤던 것도 같으니, 멀리서도 보이는 크로우의 마커를 스캔하려고 한 듯했다.
― 거기 마커, 어? 왜 식별 정보가….
“헹, 백날 뒤져봐라. 내 정보가 나오나. 야, 이쪽!”
아무래도 마커로 읽혀야 할 정보가 뜨지 않는 모양이다. 확성기를 켜둔 채로 말이 새어 나올 만큼 시큐리티는 당황한 듯 싶고, 그 틈을 타서 크로우가 잭을 끌어댔다. 처음에 그가 서 있었던 부근 그늘에 까만 D휠이 있다. 잭도 익히 알고 있는 블랙버드였다. 영문도 모른 채로 눈만 깜빡이고 있자, 크로우가 스로틀을 잡은 채로 씨익 웃었다.
“뒤에 타라고. 너 태우고도 쟤들한테 안 붙잡힐 자신이 있단 말이야. 여기서도 얘는 피어슨의 역작일 거 아냐? 그럼 잡힐 리가 없지.”
“이건, 정말로 유쾌한 밤이로군.”
“어어, 그러냐. 그건 잘됐네. 꽉 잡아라. 혀 깨물어도 난 몰라!”
그 후 헬리콥터 세 대가 전혀 모를 두 사람이 타고 있는, 잘 알고 있는 D휠을 추격하다가 놓친 데까지는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몸을 숨긴 곳은 커몬즈와 톱스 경계선에 있는 폐건물이었다. 톱스 사람이 세우다가 도산하는 바람에 어영부영 남아있게 된 곳인데 낮 동안 시큐리티가 순찰오는 지역에 포함되다 보니 톱스 쪽에선 설마 커몬즈가 들락날락할 리 없다고 생각해 방치했고, 커몬즈 쪽에선 이 건물이 톱스의 것이었으니 여전히 톱스가 관리 중일 거라 믿어서 평소엔 그다지 다가가지 않는 장소다.
스피드 월드의 강제성을 듀얼로 뿌리치고(“네놈은 듀얼 하는데, 왜 난!” “‘내’ 덱은 아무도 모를 거 아냐, 이 고집불통아!”) 고가도로를 뛰어내렸다가 언덕을 타고 오르기를 몇 번 하던 앞자리의 이 친구가 도망쳐 숨을 만한 곳 아냐고 물어와서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제가 꺼낸 답이었다. 양쪽 모두에 산 경험이 있으면서도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에 떠올릴 수 있었다고 첨언 하면서. 이 자가 저희 세계의 크로우였다면(그랬으면 이런 사태조차 없었겠지만) 이런 말을 꺼내지도 못했을 텐데, 속내가 참 술술 흘러나왔다.
멀리서 들리던 헬리콥터 로터 소리가 점점 흐릿해지다가 뚝 끊겼다. 몇 바퀴 순회하며 찾다가 저희를 발견하지 못하니 그냥 톱스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원래 시큐리티가 순찰하는 주목적은 적법한 공권력이 제공하는 윗놈들의 볼거리였으니 비참한 운명을 씹을 사냥감을 발견하지 못하면 돌아가는 건 당연했다.
“갔군.”
“갔네~. 웃기는 놈들이야. 우시오였다면 좀 더 끈질겼을 텐데. 저런 비열한 목적으로 듀얼 하지도 않을 거고.”
“…….”
“아. 아아-, 기분 진짜 이상해! 내 앞에서 과묵한 잭 아틀라스라니! 네가 유세이도 아니고! 뭐, 솔직히 대충 짐작은 가. 너 남 목숨으로 협박이라도 당하고 있어? 웬만한 걸로 약점 잡힌 게 아니라면 잭 아틀라스가 이렇게 납작 숙이고 있을 리가 없는데.”
모르는 이름이 또 나와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 크로우가 갑자기 마구 소리를 치나 싶더니 냅다 정곡을 찔렀다. 제 딴엔 감상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예고도 없이 훅 치고 들어온 말에 잭은 반사적으로 제가 느꼈던 인상을 뱉고 말았다.
“그러는 너는, 가볍군.”
“뭐야, 지금 작다고 시비 거냐?”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고, 너는 내가 아는 그 녀석보다 훨씬 자유로워 보인다. 정말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군.”
“…아, 정말. 착실한 잭이라니. 너무 이상해. 뭐, 그러는 너는 내가 아는 걔보다 지쳐 보이니까 대충 그런 차이려나.”
인상을 팍 쓴 크로우에게 서둘러 부가 설명을 덧붙이자 표정이 확 풀리고서는 볼멘소리하듯 저런 답이 돌아왔다. 상당히 의외인 말이어서 잭은 몇 번 눈을 깜빡거리다가 슬그머니 물었다. 이 크로우에게는 어쩐지 말을 붙이기 참 쉽다고 생각하면서.
“이 내가 지쳐 보인다고?”
“엉. 거울 보고도 모르나? 있지, 내가 아는 걔는 말이야. 사람 좀 빡치게 하는 구석이 있긴 한데 그래도 엄청 반짝반짝 빛이 나거든. 그러니까 그냥 바보다 싶을 정도로 앞만 보고 달리는 게 훨씬 보기 좋아. 걔 답고. 면전에 대고 말한 적은 없지만 말이지!
뭐, 이 얘긴 됐고, 네 이야기로 돌아와서―근데 너는 뭔가 참고 있잖아. 잭 아틀라스답지 않게. 안 어울리는 짓을 하니까 지치는 거야. 하긴, 여기는 유세이가 없댔나? 그럼 별수 없었을지도. 나로서는 역부족이었을 테니까.”
“잠깐만.”
“왜?”
문득 그냥 넘겨짚을 수 없는 말이 들려와 잭이 말을 끊었다. 지금껏 제게서 주도권을 뺏기지 않고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굴어왔던 것과는 달리 자기 스스로 한껏 깎아내리는 발언도 그렇고, 제아무리 크로우 호건이라 할지라도(비록 당사자는 아니지만) 제가 인정한 긍지 높은 듀얼리스트를 역부족이라고 칭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두 가지 정정할 것이 있다. 첫째, 너는 이 나에게 너 스스로를 훌륭하게 증명해냈다. 그러니 자기 비하할 이유가 없지. 그리고 둘째, 크로우 호건은 이 잭 아틀라스가 인정한 듀얼리스트다. 그걸 깎는 건 누구라도 용서치 않아.”
“나도 내가 어디서 안 빠지는 편인 건 알아. 그렇지만 이 건은 다르지. 난 내 분수를 안단 말씀. 유세이가 없다는 말은 솔직히 안 믿기니까 톱스 어딘가에 생존한 부모님하고 사는 거 아닐까 싶거든? 언제 한 번 찾아봐. 걜 만나면 너도 생각이 좀 바뀔 거니까.”
“날 쓰러뜨리러 올 라이벌이라고 하면 크로우 호건 하나뿐이다.”
“넌 후도 유세이를 만나본 적이 없잖아. 존재도 모르는 걸 어떻게 원하겠어. 네가 여기의 나한테 집착하는 것도 다 그래서일걸. 아니, 근데 억지 부리는 꼴은 완전 똑같네, 이거. 같은 놈 맞긴 하구나?”
그토록 선명한 혼을 가지고 생생하게 덤벼오던 자가 지금은 산들바람에 흩어지는 재처럼 굴고 있다. 그 낙차에 잭은 아찔해졌다. 동시에 그쪽 세계의 잭 아틀라스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불합리한 분노마저 느꼈다. 왜 이 녀석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정면으로 부딪쳐보지 않았느냐고. 그러자 문득 번개가 내리치듯, 어떤 생각이 스쳤다. 달궈진 분노는 삽시간에 드라이아이스처럼 차게 식어 핏줄을 다 얼렸다.
“…하나 묻지. 너도 ‘나’를 배신자라고 생각하나?”
이번에 묻는 ‘나’라는 단어를 조금 힘주어 발음했다. 눈앞의 자신이 아니고, 그의 심상 속에 있는 ‘잭 아틀라스’라는 의미를 담아. 이 자는 총명하고 타인의 기색에 기민했으니 이런 차이에서 비롯한 의도를 놓칠 리가 없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마주하고 있던 회색 눈동자에서 모든 감정이 지워졌다. 무감하게 펼쳐진 구름 낀 하늘. 그걸 마주한 잭은 속으로 장탄식을 뱉고 만다. 설마 싶었는데 저 세계의 잭 아틀라스 역시 크로우 호건을 배신한 것이다. 그는 그저 자신이 그의 잭 아틀라스가 아니기에 제삼자를 대하듯 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상흔을 직접 뒤적인 이상, 이 크로우 호건 역시 분노를 터뜨리지 않겠는가. 잭은 타인이라는 이름 아래 잠시 잠재워둔, 이제 다시금 몰아닥칠 익숙한 천둥 번개를 각오했다. 그러나,
“글쎄. 어차피 시티로 갈 녀석이 갔을 뿐인 걸 배신이라고 할 수 있나? 너도 그랬겠지만, 걔도 내 세계에서는 새틀라이트의 별이었어. 유세이하고 마찬가지로. 그런 애들이 더 나은 곳으로, 자기가 가질 자격이 있는 세계로 가는 게 뭐가 배신이라는 거야. 그건 그냥 당연한 일이야.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거기에는 분노는커녕 케케묵은 상처의 흔적조차 없었다. 아니, 이자는 상처마다 전부 다 잘라내 지상에 던져놓고 날아오른 것이다. 곱씹어 끝없이 타오르는 대신으로. 훨씬 더 가볍게 창공을 향하려고. 잭은 그에게서 가볍다는 인상을 받은 게 틀리지 않음을 재차 실감했다.
“너는, 대체 어떻게 그렇게 다 내려놓을 수 있는 거냐….”
어째서 이쪽이 참담해지느냐고 개탄스럽게 말을 뱉자, 저쪽은 오히려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 어조야 이전과 비교해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눈길이나 표정에 써느렇게 서리가 얹은 듯했다. 누구를 향한 건지 모를 얼음 화살 끝은 팽팽한 침묵 속에 당겨지다가 곧 시위를 떠났다. 살이 시위를 떠나며 비어버리는 것처럼 크로우의 표정은 금방 능청스럽고 여유로운 태도로 되돌아갔다.
“―이야, 다른 세계라는 거 무섭네, 이런 속내도 털어놓을 생각이 들게 하고. 뭐, 다른 세계로 넘어온 블랙버드 딜리버리의 특별 서비스로 쳐줄까. 내려놓는 방법 말이지. 그거야 몇 번 잃어보다 보면 저절로 알게 돼. 가볍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어. 모든 걸 다 끌어안고 갈 수 없다면 버릴 건 버려야지.”
“…….”
“표정 보니까 알겠네. 여기의 나는 절대 안 그러지? 나도 전후 사정은 대충 들었거든. 여기의 크로우 호건은 어쨌든 다 자기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건 애들 생떼지. 지가 애야? 일단은 애들 보호자라는 자각이 너무 없어. 그렇게 굴 수 있는 건 애들 뿐이야. 그걸 지키겠다고 보호자로 나섰으면 각오했어야지. 쯧. 여튼, 말이 좀 샜는데, 그런 맥락에서 너한테 화가 났을걸. 가서 아무것도 안 할 거면 대체 왜 가버린 거냐고. 왜 자기를 떠났냐고.”
어깨를 으쓱하며 동의를 구하듯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크로우는 돌연 저보다 십몇 년은 더 살아온 듯이 보였다. 인상의 낙차에 멀뚱히 눈만 깜빡이고 있자 곧 그가 재밌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왜? 뭔가 경험치의 차이가 보여?”
“…조금. 아니, 꽤 많이. 나이는 비슷하지 않나?”
“살아온 역사가 다르니까 그런 거 아냐? 돌보던 애들 무덤 같은 거 만들어본 적도 없고, 믿고 따르던 사람이 눈앞에서 죽는 걸 본 적도 없던 모양인데. 뭐야, 반응 보니까 너도 그런가 보네. 그래, 뭐. 이 세계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시티랑 새틀라이트도 계속 연결된 채였으면 여기 같은 식이었을 지도.”
냅다 사람이 죽는 이야기가 툭툭 나와서 경악하고 있으면 저쪽은 제 반응이 재밌는지 또 킥킥 웃었다. 분명 웃고는 있는데 눈에 비치는 건 깊은 애도인지라, 잭은 문득 가슴에 묻은 무덤이라는 문학적 표현은 실은 상당히 현실적인 묘사였다는 생각을 했다. 크로우는 침울해진 분위기를 가만두지 않고 곧장 바람이 모든 걸 쓸어내듯 뒤집었다.
“아, 그래. 이건 너한테나 물어야겠더라. 혹시 마사 알아? 고아원이나 여하튼 애들 돕는 일 하는 사람.”
“마사? 적어도 면식이 있지는 않군.”
“와! 이 세계는 진짜 미쳤나 봐! 여기의 나도 마사를 모르는데 너도 모른다고? 뭐가 어떻게 된 곳이야, 여기는. 그래, 마사가 없으니까 너나 여기 나나 그렇게 커버린 거야….”
“아니, 대체 그건 무슨 말이냐. 것보다 그런 사람, 소문만은 들어 본 것 같은데…. 잘은 모르지만 아마 톱스 외곽 쪽에 보육원인지 뭔가 있긴 할 거다.”
“그래? 흐응. 세계가 달라도 역시 마사. 굳이 외곽에 있다는 건 지금도 몰래 커몬즈 애들 돕고 있을 거란 뜻인데. 좋아, 거들어볼까.”
“뭐? 설마….”
언제 심각한 이야기를 꺼냈냐는 양 누구를 묻더니 자기 혼자서 척척 결론을 내고 발랄하게 웃는 모양새가 장난치기 직전의 일곱 살배기 같아서 잭은 아연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해도 두 번씩이나 그렇지는 않았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뛰어난 듀얼리스트가 지닌 직감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정답을 어슴푸레하게 짚어냈다.
“정답! 애들 키우는데 물자가 얼마나 드는 줄 알아? 블랙버드 딜리버리 특별 운송 주간이다!”
“네 녀석 미쳤나!”
지금 톱스 시큐리티의 물자를 털겠다고 선언한 게 아닌가. 진짜 이 작자는 목숨이 열 개는 되는 건가 싶어 뜨악한 표정으로 쳐다보니 또 배시시 웃는다. 자신만만하다 못해 절대 걸리지 않으리란 태도다.
“왜, 양쪽의 킹이신 ‘잭 아틀라스’께서 인정해주신 실력도 있는데? 아니면, 뭐, 새삼 시티-가 아니고 톱스지, 여긴. 톱스 물 먹어서 법이 어쩌고저쩌고할 거냐? 너도 그런 놈 아니잖아.
아, 맞다. 여기 나랑 관계 개선할 의지가 있는 거라면 말야. 너도 마사한테 미리 줄 좀 대놔. 그게 나중에 도움 많이 될걸? 아니면 애라도 키워보던가~. 어쨌든 애들 돌보는 사람치곤 나쁜 놈 없다는 게 크로우 호건의 지론이거든. 그럼 안녕!”
네가 루아나 루카도 아니고 집에는 혼자서 잘 들어갈 수 있지? 그렇게 대답도 듣지 않고 냅다 블랙버드를 타고 쌩하니 사라진 크로우의 뒷모습을 잭은 한동안 망연히 바라만 보았다. 문자 그대로 바람의 이름을 딴 카드를 다루던 사람다운 기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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