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왕 5D's/크로우+아키] 고독의 잔
* 시기적으로 카타스트로프 전 이후 어드메가 되며, 97화 ‘절망과 갈등의 너머에’의 내용이 언급됩니다.
* 논CP임. 커플링 글 아님. 크로우와 아키는 혼자서 살아가보려고 버둥댔던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해서, 둘을 쓰는 것도 즐거운 편.
* 원래 이런 느낌을 쓰려고 한 건 아니었던 듯하지만, 써버린 건 어쩔 수 없지. 언젠간 가필수정을 하거나 아예 뜯어고치지 않을까.
아키가 찾아갔을 때, 폿포타임에는 크로우 밖에 없었다. 그 자체로는 드문 일이었으나, 얼마 전 있었던 사건을 생각하면 당연했다. 영 불퉁한 얼굴을 한 크로우의 어깨에는 붕대와 삼각건이 걸려있다. 지금쯤 블랙버드 딜리버리의 운송업은 이 집에 없는 나머지 세 사람이 분주히 대행하고 있겠지. 아키는 아카데미아 재학생 커뮤니티에 자꾸 갱신되는 그들의 파파라치 사진과, 바로 그 사진 속 주인공을 대표로 유세이가 보내온 메일을 떠올리고 속으로 웃었다.
닥터스톱이라기엔, 가족의 만류였다. 다친 어깨로 무리한 주행을 해댔으니 당연한 결과라며 의사가 잔뜩 면박을 줬지만, 자기는 박살 낼 놈을 박살 냈고 이걸로 병문안 선물은 충분히 마련했다며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외려 의사에게 시속 몇까지는 괜찮냐고 묻는 그 꼬락서니를 보호자 자격으로 뒤에서 지켜보던 잭과 유세이가 내린 결정이었다. 불만은 받지 않는다! 반박은 그대로 반박할게. 목소리의 질감도 높낮이도 다른 두 사람이 호흡 딱 맞춰 그렇게 말하는 모습이 선했다. 그리고 기어코 크로우의 고집을 꺾어 누른 것은 루아와 루카 쌍둥이일 것이다. 어쩌면 마사 씨와 그 아래에 머무는 아이들 카드를 뽑았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크로우의 표정을 보노라면 어느 쪽도 정답 같고, 지금 여기 혼자 남겨진 건 완전히 본의가 아니라는 토라짐이 보였다. 그러니까, 아키, 크로우를 부탁할게. 어조가 곧잘 무뚝뚝해서 그렇지, 누구보다 다정하고 열정적인 유세이의 목소리로 들리는 그 텍스트를 읽지 않았더라도 아키는 자진해서 폿포타임에 왔을 거다. 아카데미아 재학생들은 몇 시간 전부터 계속해서 글을 올린다. 전 킹(여전히 킹으로 부르는 추종자도 꽤 많았다), 떠오르는 샛별, 요즘 얼굴을 보이는 끝내주는 메카닉(이쪽은 D휠 공학 쪽 학우들. 브루노는 모르는 사이에 얼굴이 꽤 팔린 모양이다. 그게 아니면 D휠 관련이라면 반색하고 아무데나 고개를 들이밀었거나). 이들이 시티에서도 이제 지명도가 있는 블랙버드 딜리버리 일을 대신하는 걸 안 시점에서 팀 파이브디즈의 인원이기도 한 아키는 지금 크로우가 혼자 있는 걸 알았고, 블러디 키스에 올라타자마자 유세이로부터의 연락을 받은 거다.
비가 억수로 쏟아졌던 그 날이 되살아난다. 귓가에는 차고를 때려대는 빗소리가 들리고, 익숙하지 않은 라이더 수트에 꽉 조여진 숨통으로도 습한 냄새가 짙던 순간이었다. 혼란한 마음을 끌어안은 채로 있던 중 제게로 들어온 연락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그건 제게 무섭도록 화를 내고 우산도 없이 맨몸으로 나간 크로우가 사과와 더불어 특훈하자고 이야기한 전화였다.
아키가 처음으로 크로우와 친해졌다고 느꼈던 날이었다. 그때까진 유세이를 끼고 아는 사이였던 것이, 확고하게 친우로 자리매김했다고 해야 할까. 최소한 아키에게는 그랬다. 거리감을 좁혔으니까.
그때 철야를 한 건 아니었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고가도로가 지나는 부둣가였고, 비를 좀 그어야 했으므로 필연적으로 빗소리에 다 흘려보내자는 암묵적 약속을 나누고서 두런두런 이야기했더랬다. 서로 결국은 기억할 거면서도. 낙오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게 무서워서 엉뚱한 화풀이를 했어. 미안해. 그렇지만 이 이상으로 사과에 시간을 낭비하진 않을 거야. 각오는 됐어? 비에 쫄딱 젖은 채로 크로우는 웃으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현재를 사는 사람은 자기에게 몰아닥친 풍랑을 기어코 제 날개 아래에 몰아넣고서, 다시금 날았다. 그 날갯짓에 저는 도움을 받기만 했다. 같이 날았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랬다는 걸 뒤늦게야 알았다. 대신해서 출전하고 돌아왔던 그 분함을 잇새로 씹어 물면서. 그래서인지 그 풍광이 도무지 지워지지 않았더랬다. 손톱 밑 거스러미처럼. 그러나, 대체 무어라 말해야 한단 말인가.
그 해답이 겨우 발견되었다. 불과 몇 분 전 일이다. 말로 하지 않으면 전달되지 않는 것이 있다. 진지하게 마주 보는 마음은 통한다. 후도 유세이가 전력으로 제게 알려준 것을 이제 혼자 설 수 있게 된 이자요이 아키가, 또다시 받고야 만 마음에 솔직히 응답하기로 한다. 팀 파이브디즈 이름 아래에 뭉쳐, 무언으로 뜻을 나눌 수 있다지만 반드시 표현해 알려야 할 말도 있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 지금, 아키는 홀로 폿포타임에 와서 크로우를 만났다. 혼자 있던 중에 불퉁했던 크로우의 표정은 곧 아키를 살펴보고, 그가 꽤 무섭도록 액셀러레이터를 밟아가며 이곳으로 왔다는 걸 깨닫곤 픽 웃었다.
“엄청 밟아댔나 보네. 이젠 안 쪼는구나?”
“그럼. 누가 훈련 시켰는데 어련하겠어.”
그렇게 응수하며 손을 내민다. 평소의 하이파이브 대신에 로우터치. 크로우가 잠시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순순히 왼손을 얹어 짝 소리를 내주었다. 아무래도 겨우 환자라는 자각을 해준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크로우가 입술을 비죽이며 투덜거렸다.
“나는 다섯 살배기 애가 아닌데 말이지~. 다들 너무 요란스러워. 거기에 아키 너까지 낄 줄은 정말 몰랐고. 유세이야?”
“유세이한테 부탁받은 건 사실이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오려고는 했어.”
언외에 어떤 분위기를 읽어냈을 거다. 크로우는 이게 다쳐서 집지킴이로 남겨진 저를 돌보러(라고 쓰고 감시하러, 라고 읽는다) 온 게 아니란 사실을 깨달은 듯, 자세를 바로 세웠다. 온몸으로 생을 구가해온 단단한 몸은 곧장 어디로든 튀어 나갈 수 있게 긴장하면서도 회색 눈동자에는 한켠으론 뭐든 믿고 맡기는 동료가 저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신뢰감이, 그로부터 오는 의아함이 비친다. 공격하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어느 쪽도 아니게 어정쩡한 채로 서 있는 그에게 아키는 마음이 가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어어, 하고 당황한 목소리가 정수리 위로 내린다. 손을 허둥대다가 어깨를 움직였는지, 짧게 앓는 소리도 났고.
“사과에 쓸 시간이 없다고 했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말할게. 여러 가지로 미안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크로우한테는 내 투정이 하찮았을 텐데, 자기 일로 힘든 사람한테 할 소리가 아니었던 것 같아.”
묵시적 약속이 깨져 쨍강, 하는 소리가 들린 것처럼 폿포타임이 고요해진다. 동시에 제가 그랬던 것처럼 크로우 역시 빗속의 대화 중 어느 것도 잊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남에게 할 수 있는 만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은, 서로가 살아온 이야기는 비에 휩쓸려 흘러가지 않았다. 잊어버렸다면 지금 여기서 침묵을 지킬 이유가 없으니까.
크로우가 아, 랄지 음, 이랄지 침음을 삼키는 소리만 한참 이어졌다. 곧 어깨를 두어 번 툭툭 친다. 아키는 고개를 들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고 있는 크로우가 보인다.
“하여간, 너나 유세이나 쓸데없이 곧아가지고는. 똑같은 사람끼리 만났어, 참. 거기까지 말할 작정이면, 내가 했던 말도 기억하고 있을 텐데?―고독과 싸워서 살아가려는 사람의 발버둥은 아무도 비웃지 못해. 지금을 열심히 살려는 사람을 비웃는 놈은 이 크로우 님이 전부 때려눕혀 버릴 거라고. 시티놈의 배부른 소리로 보일 걸 걱정할 시간에 라이딩 듀얼 연습이나 더 하셔, 팀원 씨. 어디 한 번 내 자리를 뺏어보시던가.”
장난스럽게 말을 던진 크로우가 손을 내밀었다. 아까의 제가 그러했듯, 로우터치다. 아키는 깜짝 놀란 것처럼 눈을 깜빡이다가, 곧 손을 내리쳐 손뼉을 쳤다. 고독의 잔을 마셔본 사람끼리, 이번에야말로 씨익 마주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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