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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왕 5D's/잭크로] 그냥 그런 이야기

그건 그냥 잭 아틀라스다운 결별이었을 뿐이다

** 포스타입에 22.12.26.에 최초로 올렸던 글을 이쪽에 가필수정하여 재업합니다(가필수정하다보니 피어슨의 그림자가 많아졌음)

* 키류/칼리 전 종료~미스티 전 이후에 전원 합류 사이의 이야기

* 잭칼리가 기반에 깔려있어서, 엄밀하게 말하면 잭-?<<<-크로우 같은 느낌

* 키류 전 직후엔 크로우가 있었는데, 미스티 전 도중에 보면 없다가, 그 후 전원 집합(잭 합류)하면 있어서... 역시 잭을 데리러 간 게 아닌가-싶었던.

* 개인 해석을 듬뿍 끼얹었기 때문에, 공식에서 인정한 설정 외에는 전부 팬피셜입니다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환하게 비치고 있던 벌새 모양의 문양이 밝은 보라색 입자로 산란하며 흩어졌다. 시티의 쌍둥이 둘이 밝은 목소리로 잭이 봉인에 성공한 거라느니 이길 줄 알았다느니 떠들었지만, 유세이는 영 표정을 풀지 못했다. 아까부터 쭉 굳은 얼굴이었다지만 처음과 별 다를 바 없는 긴장이 거기에 있다. 커가면서 점점 표정이 희박해진 친구의 얼굴을 못 읽을 리 없으니 확신한다. 하긴, 저 애의 성정상 그럴 만도 했다. 저건 누군가는 목숨을 달리했다는 의미니까. 크로우는 키류의 소멸을 자기 눈으로 확인했다던 유세이의 말을 재차 곱씹는다.

‘다른 사람만 생각하는 건 여전하구만.’

살아남은 것이 저희 편인 것을 저 꼬맹이들처럼 순수하게 기뻐해도 좋으련만. 단면만 보고 희로애락을 표하기에 저희는 이미 너무나도 먼 길을 왔을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나 하면서 크로우는 곁눈질로 친구이며 형제인 이의 얼굴을 훔쳐봤다. 어쨌거나 무언가, 특히 타인에게 골몰하는 유세이는 예의 주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애초에 지금 저 녀석이 멀쩡하게 움직이는 것도 말이 안 될 판이지 않나. 키류를 제 손으로 끝장낸 직후인 속내가 멀쩡할 리 없었다. 우리 친애하는 팀 새티스팩션의 리더님이 몰락한 이후에도 우직하게 곁을 지켰던 마지막 사람인 것도 있지만, 언젠가부터 우울한 얼굴로 감내할 필요도 없는 지독한 책임감을 짊어지기 시작한 저 애는 유독 남의 상처와 죽음에 민감했다. 책임감은 때때로 죄책감과 닮는다. 그건 착실하게 온몸을 옭아내고 등을 꾹꾹 눌러 멈출 수도 없게 한다. 자의로는 멈출 수가 없는 거다. 크로우는 그걸 잘 알았다. 짧게 그러나 짙게 알았던 은사의 얼굴을 문득 떠올린 그는 이제 제 속을 자유롭게 누비던 상념을 끊을 때라고 결론 짓는다.

동시에 크로우는 또 다른 시그너를 떠올렸다.

잭 아틀라스.

자신이야 애초에 난입자였으니 그렇다고 쳐도, 시그너는 아무래도 무언가 연이 있는 사람과 어둠의 듀얼을 벌이게 되는 모양이었다. 잭 역시 그러했을까. 그 녀석이 이겼다는 것은 걔가 아는 누군가의 소멸을 지금 혼자서 쓸쓸하게 지켜봤다는 뜻이기도 하다. 머릿속에서 불타오르는 공장의 이미지가 아른거렸다. 코끝에 탄내가 느껴진다. 은사의 웃는 얼굴이 불로 일그러진다. 기억인가, 환상인가. 크로우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상념을 털었다. 그러나 지난 일이다. 발붙인 곳은 현재. 살아있는 한, 지금을 걸어가야만 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다시금 살펴보면 저만치에 마지막 평원 그림이 있다. 파충류인지 뭔지가. 어둠의 듀얼은 어차피 일 대 일 진검승부. 당사자 외는 전부 들러리다. 장외에선 도울 게 없지. 그렇다면 제가 굳이 있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아니면 이조차 스스로 하는 변명일까. 크로우는 조금 망설이다가 마음을 굳히고서 유세이에게 말을 꺼냈다.

“유세이, 내가 잭 그 녀석 데리고 올게. 저 파충류 그림 쪽에서 합류하면 되는 거지?”

그의 말에 유세이는 눈을 조금 치떴다. 먼 데를 헤매던 시선이 여기에 고정되며 보이는 빛깔은 의외로 다채롭다. 한 바닥의 놀라움과 한 움큼의 걱정과 한 톨의 망설임. 차례로 떠오르다 섞이는 눈빛은 이내 길을 잃었다. 어차피 유세이가 바로 답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서 크로우는 오 분 십 분 정도야 기다릴 작정이었다.

오히려 거기에 반응해온 건 루아였다.

“엥, 크로우는 같이 안 가?”

“후후, 꼬맹아. 넌 잭이 좀 얼빠진 놈이란 걸 알 필요가 있어.”

“그렇지만, 킹인 걸? 아, 하긴 생각해보면 유세이가 더 대단하긴 해!”

“으하하, 너 그거 꼭 나 있을 때, 걔 앞에서 말해봐. 표정 볼만 하겠는데?”

왜 같이 가지 않느냐고 볼멘소리하는 걸 보니, 그 잠깐 새에 크로우에게 정을 붙인 모양이다. 실로 천진한 아이다운 친화력이었다. 아니지, 크로우가 아이들과 쉽게 친해지는 건가. 유세이는 문득 몇 년 전, 듀얼갱으로 지내던 한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크로우는 구역 내 아이들과 곧잘 어울려 놀아주곤 했지. 아이들도 크로우를 잘 따랐어. 상념은 곧, 시시각각으로 옭아오는 압박감과는 어울리지 않는 호쾌한 웃음소리에 밀려났다. 난데없이 유리창이 깨져 놀란 것처럼 유세이는 현재로 끌려온다. 모래와 폐허의 냄새가 갑자기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주한 회색 눈동자. 쌍둥이와 웃고 떠들면서도 때때로 이쪽을 향해 곧게 머무는 시선은 답을 독촉하고 있었다. 가게 해달라고.

기실 크로우는 제 허가 없이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허락을 얻고자 함은 이건 자신이 강력하게 주장한 거라고 판을 까는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중에라도 제가 말리지 못했다고 후회할까 봐, 그 순간에 “내가 억지부렸어. 넌 휘말린 거야.”라고 말하기 위해서.

그래, 그런 생각을 떠올릴 정도로 저는 망설이고 있었다. 사실 지금도 말리는 게 맞지 않을까 절실하게 고민 중이다. 시그너를 맞서는 다크시그너는 그에게 있어 어떤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저에게 있어 키류가 일종의 실패이자 오해이며 미련인 것처럼, 잭이 마주한 다크시그너는 그 잭 아틀라스의 영혼이 향할 곳을 현시한 이다. 어릴 적부터 그 누구에게도 굴복하거나 감화되지 않았던 그 잭 아틀라스가 말이다. 그런 사람을 스스로 먼지로 되돌린 상실의 자리에 크로우를 보내도 되는 걸까. 유세이에게 있어 두 사람 모두 소중한 가족이므로, 특히나 크로우에게는 늘상 그늘진 죄책감이 따라다니고 있어 더 그랬다.

“괜찮아, 유세이. 다녀올게. 예전에도 말했잖아. 너희가 어디론가 멀리 가더라도 난 항상 여기에 있을 거라고.”

시간은 촉박하고 고민은 끝이 없다. 아무래도 제가 우유부단하게 굴고 있다는 걸, 이대로면 해야 할 일마저 뭉개버릴 기세라고 여겼는지 갑자기 크로우가 제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이더니, 송곳니가 빼죽 보이게 웃었다. 아이들 앞에선 곧잘 어른스러운 체를 하는 그 얼굴이 딱 자기 나이처럼 애교 있게 보이는 그 표정. 하도 오랜만에 본 그것에 돌연 맥이 탁 풀렸다. 허락을 구하는 건 역시 시늉이었나. 헛웃음마저 났다. 얘는 제가 안 된다고 해봤자, 의견이 다르다는 둥 아무 말이나 주워섬겨다가 갔을 거다. 유소년 시절을 함께 보낸 사이 특유의 깨달음이었다. 이러면 차라리 말은 편히 뱉을 수 있었다. 선택지가 하나뿐인 것을. 잭과 저, 그리고 크로우는 각자마다 끝내주게 고집부릴 때가 있는데, 그런 순간은 마사조차 두 손 두 발 다 들었지 않았나. 마사도 말리지 못하는 걸 우리가 어떻게 말리나.

한숨과 함께 유세이가 한 박을 두고서 드디어 답했다.

“…그럼 잭을 부탁할게, 크로우.”

“엉, 맡겨만 줘!”

형식상이나마 허락을 따내기가 무섭게 크로우는 블랙버드에 올라탔다. 말의 마침표가 찍히기도 전이다. 곧, 땅거미가 진 저쪽의 지평선을 향해 새까만 동체의 블랙버드가 쏜살같이 멀어졌다. 저 두 사람의 일은 이제 뽑아버린 손패다. 어쩔 수 없지. 지금까지의 유대를 믿는 수밖엔. 크로우가 굳이 이런 형식을 취한 것은 역시 제가 저희 일에 괜히 신경 쓰지 말라는 배려가 맞았다. 유세이는 마음을 다잡고 아키가 있을, 도마뱀의 형상을 한 지상화 쪽으로 D휠의 앞머리를 틀었다.


현실감이 없었다. 잭은 품에 안아 들었던 무게감이 재처럼 흩어지는 감각에 몸서리치면서도 그 자리를 벗어날 생각조차 못 하고, 한참을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듀얼에 이겼어도 뒷맛이 안 좋았던 적은 살면서 꽤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어떤 것도 지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삶에서 레일 이탈은 이미 몇 차례 겪은 바 있다. 개중 치기 어린 선택도 있고, 비겁한 삶의 길을 택한 적도 있었다. 어느 쪽이고 경로를 벗어난 끝을 짐작하고 감내했다. 영혼의 심지를 꺼뜨리지 않기 위하여 오로지 이 손으로 움켜쥐던 진흙탕이다.

이번은 달랐다. 레일을 엇나가기로 한 것은 스스로 의지였다. 이것이 잭 아틀라스 인생의 마지막 선택이라고 결사의 각오를 하지 않았나. 그 후에 찾아올 죽음을 정면으로 맞이할 셈이었다. 그 순간엔 이런 미래는 상상하지 않았다. 감히 타인이 잭 아틀라스를 삶의 코스로 다시 떠밀 줄이야. 한 번 버리려고 했던 삶에 내동댕이쳐진 것도 모자라서 그 타인은 제가 구둣발로 짓밟으려 했던 가치마저 다시금 고쳐 달아주었다. 당신은 잭 아틀라스로 서 있으라고. 이토록 절절한 고통 속에 던져놓고서는.

그러나, 고통은 곧 삶이다. 잭 아틀라스는 사기질이 까득 갈리도록 턱을 악물었다. 모든 것을 압도하는 힘이란 곧 폭력이고 고통이며 그것은 살아간다는 것과 동일했다. 그 힘의 고삐를 재차 쥐라고 했다. 그것을 다시금 고결하게 세우라 했다. 그것이 당신의 영혼이라며.

그렇다면 이제 잭 아틀라스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치열하게 앞을 보며 살아가는 길뿐이다. 먼 길을 비치는 영혼의 등대는 산산이 부서졌으나 이미 빛을 비추었고, 그 순간의 반짝임으로 조타장치는 단단히 방향을 잡았다. 다시는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영혼을 뒤흔든 고통의 순간이 영원히 숨 쉬는 한.

고통으로 명동鳴動하던 영혼의 떨림은 차차로 갈무리된다. 잭은 담금질된 제 혼을 선연히 느끼며 천천히 심호흡한다. 시야 한쪽에 들어온, 바닥에 떨어진 안경을 주우려고 몸을 굽히는 순간 어디선가 D휠 특유의 엔진음이 들렸다. 모먼트 엔진을 갖춘 탈 것으로 저를 마중 나올 사람이라면 한정되므로, 유세이인가 하고 무심히 고개를 돌린 잭은 멈칫했다. 본 적 없는 새까만 D휠이 이쪽을 향해 오고 있다. 뒤늦게 운전자를 확인할 생각이 났다. 시선을 조금 위로 옮기고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대체 몇으로 달리기에 헬멧을 쓰지 않는가-였고, 한 박자 느리게 무언가를 깨달은 그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났다.

잭은 저 운전자를 알았다. 못 알아볼 리가 없다. 사위가 새까맣게 저물었는데도 혼자 석양을 짊어진 녀석이 어디 흔해야 말이지. 다만, 놀란 지점은 그게 아니었다. 벌써 2년도 넘게 만난 적 없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잭 아틀라스의 영혼이 명멸한다.

이전, 마사와 마주했을 때는 시티로 나서면서 평생 못 보리라고 각오했던 은인이자 부모를 다시 볼 수 있게 됐음에 순수하게 감격했다. 크로우의 건은 다르다. 기쁘냐면 기쁘고 두렵다면 두렵다. 어느 쪽으로도 대답할 수 있는 복합적인 감정이 크게 너울진다. 언젠가 다시 면을 맞대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했다. 얼마 전 다크시그너로 부활한 키류가 유세이를 습격했던 때에 먼발치로 얼굴을 봤으니까. 그래서 칼리와의 듀얼 도중에 죽음을 각오했을 땐, 뒤늦게야 그런 기회는 없을 거라고도 여겼던 것 같다.

잭 아틀라스는 답지 않게 긴장했다. 긴장한 스스로를 인지하는 건 실로 오래간만이다. 담금질 되어 침착해진 영혼이라곤 하나, 근간을 전부 무너뜨렸다가 다시 세우려고 짙붉게 타올랐던 정동이 겨우 가라앉았을 뿐이지 않은가. 오래전에 버렸다고 생각했던 죄책감이 그 틈을 비집고서 치솟는다.

누구보다 외로움을 많이 타고 홀로 남는 걸 싫어해서 혼자 남겨졌다 싶으면 냅다 울어버리던 저 애의 한 줌만 한 어린 시절도, 훌쩍 커버린 십 대 중반에도 여전히 여린 데가 남아있음도 알고 있으면서, 작별을 언질 주지 않았다. 알릴 수도 있었으나, 찾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제 선택이지 않았던가. 저 애를 저버리고 영원한 이별을 알리지도 않고 시티로 훌쩍 떠났던 제가 도대체 무슨 표정을 하고서 저 앞에 서야 하나.

그사이에 새까만 D휠은 미끄러지듯 멈추어 섰다. 나름대로 생각해두던 말이 전부 엉켜서 목 안에 응어리져 걸린다. 표정을 갖추는 건 더더욱 무리여서 하릴없이 표정이나 굳혔다. 제 기억보다 마커가 배는 더 늘었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녔냐느니, D휠을 탈 때는 헬멧 쓰는 게 당연하지 않냐느니 따위의 잔소리할 타이밍이 아닌 것쯤은 안다. 거기에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도 불확실한 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크로우는 어디 동네 마실 나온 것마냥 여유롭게 정차하고 스탠드를 세우고서 D휠에서 내렸다. 그리고 다섯 걸음. 잭에게서 세 발자국 앞에 선다. 잭은 얼굴근육에 경련이 올 정도로 뻣뻣하게 굳는다.

그러면,

“여, 오랜만.”

하고, 잔뜩 얼어있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지독하게 태연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칫하면 지금이 팀 새티스팩션을 탈퇴하고 얼마 안 됐던 시절인가 착각해버릴 것 같다. 그렇지만 도망쳐서는 안 된다. 이미 한 번 택하고 고꾸라진 길을 다시 걸을 수는 없었다. 잭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가 놓으며 묻는다.

“…날 원망하는 게 아니었나?”

“뭐래. 내가 왜?”

경쾌한 발걸음으로 남은 거리를 바투 채운 크로우는 그대로 옆구리를 팔꿈치로 장난스럽게 쿡 찌르며 말을 이었다.

“넌 네 꿈을 이룬 것뿐이잖냐. 축하할 틈도 안 주고 말이야, 어? 아, 근데 얼마 전에 유세이한테 털렸다며?”

“네놈!”

놀리고 화내고 웃고. 아무것도 바뀐 게 없었다.

―라고 잭은 생각하겠지. 뭐, 지금은 머리를 굴릴 여유가 없을 뿐이겠지만. 어깨며 어디며 할 것 없이 잭의 온몸을 꿰어 누빈 긴장의 끈이 완전히 녹아 사라진 꼴을 확인한 크로우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들쑤실 생각으로 온 게 아니었으니까.

‘표정 보니까 딱 알겠던데, 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바싹 마른 얼굴은 두 번 볼 건 못 된다. 여기서 잭과 맞붙은 녀석은 어떤 의미로든 잭 아틀라스에게 있어 무거운 존재였을 거다. 제 잘못이 아니더라도 그런 이의 죽음은 무겁고도 무겁기 마련인데, 그런 사람을 자기 손으로 끝장냈다? 울고불고 난리 났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말야. 하여튼 유세이도 그렇고 잭도 그렇고, 정신력 하나는 알아줘야 했다. 쉽게 꺾일 놈은 아니라지만 말야. 걱정한 보람이 없구만. 구르고 깨지고 화려하게 해 먹었어도 너덜너덜한 건 겉모양만 그런 듯 몸은 멀쩡해 뵈고, 살아갈 의지도 충분한 상태라면 그걸로 됐다.

‘그건 그렇고, 원망하냐, 라.’

겉으로는 투닥거리는 말싸움을 하고 있지만, 크로우는 조금 전 잭이 던진 직구를 다시금 곱씹고 있었다. 그걸 정면으로 물어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렇다고 대답했으면 사과라도 했을까. 했을 거다. 무려 그 잭 아틀라스가 고개를 숙이는 걸 볼 수 있었을 건데, 그런 기회를 놓친 게 아쉽냐면 그렇지는 않았다. 애초에 제 대답이 통째로 거짓말은 아니었으니까 사과받아도 헛스윙인 것을.

그건 그냥 잭 아틀라스다운 결별이었을 뿐이다. 오래전, 마사하우스를 나오면서부터 각오하고 있던 일인데 뭘 새삼스럽게 원망 따위를. 잭은 처음부터 새틀라이트에서 썩을 놈이 아니었다. 키류를 벗어나는 것으로 증명된 게 아니었나. 새트라이트 따위에 쟤를 가둬서는 안 된다. 시티로, 더 위로 갈 녀석이지. 그리고 시티로 갈 거라면, 이곳의 너저분한 것들은 놓고 가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네게서 잘라내야 할 과거라고 무언의 선언을 받았고, 유세이는 필요하니 뒤따라오라고 종용받았다. 그냥 그런 이야기다.

아주 옛날, 그 광장에서 잭이 저를 끌어내 마사하우스로 데려갔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으로 이어졌을 뿐이다. 그 손이 있었기에 지금의 크로우 호건이 있다.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체념이라고 부를지 모르겠지만, 원래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 훨씬 많지 않은가. 오히려 평생 볼 수 없으리라 여겼다가, 이렇게 만났으니 근래의 재앙 중에 드물게 좋은 일이다. 우연히 송신한 전파에 잭 아틀라스의 이름을 외치는 관중들의 함성을 들었던 순간 겨울 바다에 빠진 듯했던 그 차가움을 기억하는 한, 눈앞에 잭 아틀라스가 실재하는 것은 손이 델 정도로 뜨겁기까지 한 것을. 그래도 인제 와서 일희일비하기엔, 사태의 경중을 아는 어른이 됐다.

크로우는 상상보다 훨씬 침착한 스스로에게 만족하며 잭의 등허리께를 팡팡 쳐댔다. 도중에 윽, 하는 침음을 들었지만 못 들은 척한다. 이쪽도 늑골이 나갔는지만 앓는 소리 하나 안 내고 있으니까.

“자자, 보니까 완전 멀쩡하네! 걱정해서 손해 봤어. 그럼 유세이 있는 데로 가자고.”

“이 잭 아틀라스, 이런 곳에서 쓰러질까 보냐. 원흉을 갈기지 않고는 속이 안 풀려.”

“뭐, 그건 동감. 내 몫도 남겨라.”

“그건 네가 하는 걸 보고 생각하지.”

아, 정말로 그리운 공방이다. 그렇지만 딱 여기까지. 유세이는 잘 모르겠지만 어차피 잭은 이 사태가 끝나면 다시 시티로 돌아갈 테니까. 혼자는 여전히 싫지만, 멋대로 갑자기 남겨지는 건 더 싫다. 형제이고 소꿉친구인, 기억 속의 이 거리감을 확인한 것으로 충분했다. 떠날 사람에게 가까워져봤자 미래의 자신이 힘들어지는 건 불 보듯 뻔하다. 이참에 잭 녀석을 저희 쪽 꼬맹이들을 시티로 안전하게 보낼 연줄로 삼을까 따위를 생각하면서 크로우는 잭의 잔소리를 못 이기는 척 이번에는 제대로 헬멧을 썼다.

흑과 백의 D휠이 나란히 저편을 향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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