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슈리체] Dear My Lady

룬의 아이들

룬의 아이들 by 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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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체 아브릴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써보았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세요.
* 글자 수 약 9만 자.
* 소재 주의 : 임신… 이지만 가볍게 다루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 캡쳐 및 업로드, 부분 발췌, 3차 창작 등 상식선에서 대부분 가능합니다.
* 감상타래나 감상평을 남겨주시면 제게 큰 기쁨이 됩니다. (💕)
* 모바일로 보실 경우, 글리프 앱보다 일반 링크로 접속하시면 폰트도 더 단정하고 부분발췌도 되어서 좋아요!
(근데 글리프 부분발췌 기능이 좀 메롱이네요.. 그냥 캡쳐를 추천드립니다.)


리체 아브릴처럼 당차게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모든 여성들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1.

우웁.

리체 아브릴은 무의식적으로 입을 가렸다. 사흘 내내 철야로 의상실에서 일하며, 겨우 저녁 식사라는 핑계를 대고 휴식을 맛보던 중이었다. 지금 제 앞에 있는 도시락은 의상실에 새로 들어온 막내가 근처 상점가에서 갓 사 온 것으로, 상했을 리가 없었다. 그 아이가 악감정을 가지고 도시락에 이상한 걸 뿌리지 않았다면. 다행히도 막내는 리체 아브릴과 관계가 양호했다, 나쁠 것도 없었다.


…그러니 문제는 도시락이 아니라 나라는 건데. 요새 잠이 부족해서 이러는 건가? 리체 아브릴은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최근 들어 바쁜 작업으로 수면에 소홀하긴 했다. 하지만 재봉사로 몇 년째 일하고 있는 지금, 수많은 야근을 거쳤지만 이렇게 음식 앞에서 헛구역질을 한 건 처음이었다. 그러니 더욱 이상했다.


“…기분 탓이겠지.”


그리 말하며 나무젓가락으로 도시락을 뒤적였다. 그와 동시에 또다시 올라오는 토기. 눈을 질끈 감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우욱…. 장장 몇 시간 동안 입에 물 한 모금 대지 않았건만, 이대로라면 위장 속 없는 것도 다 끌어모아 토해내게 생겼다. 망했다, 일단 손을 뻗어 도시락의 뚜껑을 닫았다. 이게…뭐지? 너무 스트레스가 쌓여서 음식에 알러지가 생겼던가? 피곤이 누적되면 면역 체계가 망가져 갑자기 알러지가 생길 수 있다는 글을 본 적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철야는 리체 아브릴한테 너무 익숙했다. 스트레스라고 할 것도 못 되었다. 그게 평범한 리체 아브릴의 일상이니까.


도시락을 닫았음에도 여전히 울렁이는 기분은 가라앉지 않아, 작업실의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 리체의 장밋빛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덕분에 올라왔던 토기도 가라앉는 듯하다. 아… 시원해. 마치 그날 같다. 셋이서 물고기 주점에서 맥주를 마시고, 미유 로제를 갑작스레 쳐들어가고, 말을 탔던 그 날 저녁처럼.


… 잠시만. 그날을 회상하니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는 두 얼굴이 있었다. 그중 하나에…,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하하. 리체 아브릴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제 책상 위 수첩을 뒤적였다. 아냐, 별 거 아닐거야. 기우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무의식적으로 웃음지었다.


리체 아브릴의 몸은 월경 날이 되면 칼같이 상태가 나빠지곤 했다. 몸이 이리도 시계 같으니 굳이 표기하거나 기억할 필요도 없었다. 그럼에도 다가올 죽음의 날을 피하고자 미리 예정일을 캘린더에 표시해 두곤 했는데…. 리체 아브릴은 초조한 마음으로 수첩을 넘겼다. 수첩 속 캘린더 페이지를 보니… 알 수 있었다. 예정일이 지나고도 2주간, 리체 아브릴은 월경을 하지 않았다.


“… 제기랄.”


제발, 아니겠지. 거짓말일 거야. 휘청, 하고 다리가 후들거려 우선 의자에 앉았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기우로 넘기기엔 짚이는 것이 있었다. 몇 주 전, 의상실을 찾아왔던 그 아이. 아노마라드에서 블루 코럴까지 그 먼 거리를 단숨에 찾아왔던 아이. 나를 보고 싶어서 찾아왔다며 예쁘게 웃어 보이는 그 아이와…. 그 아이와 어떤 시간을 보냈던가? 꽃을 선물받고, 함께 샤펠 축제를 구경하고, 손을 잡고,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리고, 과거 이야기를 나누며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그대로 여관에…. 맙소사. 리체 아브릴, 너 미쳤어? 그런 생각에 도달하자마자 제 오른손으로 스스로의 뺨을 후려쳤다.

그건 기억난다. 아침에도 술 기운이 가시지 않아 눈을 꿈벅거리고 있을 때, 널 책임지겠다며 약지에 반지를 하나 끼워주던 그 아이, 조슈아 폰 아르님. 준비를 마치고 찾아오겠다며,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며 반짝이는 눈망울로 그리 말하던 그 아이가…. 겉으론 태연한 체 웃어보였으나 손은 떨리고 있다는 건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날의 일이 단순 교제가 아니라. …청혼이라고? 그리고 그 날의 결과가….

짜악! 리체 아브릴은 두 손으로 제 볼을 힘껏 내려쳤다. 머리가 복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봉사 리체 아브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었다. 설령 제 인생 계획이 무로 돌아가기 일보 직전이라도, 리체 아브릴은 제가 맡은 의상을 완벽하게 제작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은 저녁 10시. 의상을 가지러 올 고오급 귀족분의 하인이 오전 5시에 방문할 예정이었으니 고작 7시간이 남은 것뿐이었다. 그래, 일단은 미뤄둬. 리체 아브릴은 머릿속으로 이 화제를 꾹꾹 눌러뒀다. 일단 7시간 뒤에 생각하는 거야, 마감이 우선이야. 프로 재봉사라면 응당히 그래야 했다. 경력이 몇인데, 아마추어같이 굴 순 없잖아?




“임신 맞네요.”


의원이 리체 아브릴의 손목에 두 손가락을 대고 맥을 짚다 그리 말했다. 리체 아브릴은 새벽 내내 작업을 끝내곤 잠에 곯아떨어지지도 못한 채 병원을 들를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라면 불안해서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지금 들른 진료소는 세 번째로 들른 곳으로…, 그러니까 지금 방문한 세 곳의 의원 모두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자신이 조슈아 폰 아르님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제기랄. 목 끝까지 욕지거리가 올라왔으나 리체 아브릴에겐 지켜야 할 체면이 있었고, 그렇기에 꾸역꾸역 참았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이미 준비된 듯한 억지 미소를 보이며 기계적으로 답했다. 그리곤 의원에게 진료비를 지불하고, 진료소를 나왔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더 가다가 그냥 자리에 주저앉았다.


“…빌어먹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럴 때 생각나는 사람은… 아나로즈 티카람이었다. 아나로즈, 당신도 이런 마음이었나요. 당신이 겪은 일은… 누구든 다시는 겪으면 안 될 일이라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리체 아브릴이 보기에 제 자신은 너무나도 아둔하고 바보 같아, 이런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겨나도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함께 머리를 맞대어 고민해 줄 사람이. 그리고 리체 아브릴의 주변에, 조슈아를 빼면 그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막시민 리프크네.




“뭐냐?”


두 달 뒤의 일이었다. 아노마라드에서 하이아칸의 블루 코럴 섬으로 오려면 마차로 꼬박 한 달을 달려야 했기에, 막시민이 도착하는 데 두 달 밖에 안 걸렸다는 것은 편지를 받아보고 바로 출발했다는 것일 거라. 막시민 리프크네는 제 반경 안에 들어온 사람은 끔찍이도 아끼면서,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매몰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보냈음에도 이리 한달음에 찾아와주었다. 어쩌면… 나도 네 반경에 들어가 있을까. 리체 아브릴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니 마음이 좀 차분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막시민 리프크네를 만나면 당연히 주점으로 향해야 했다. 막시민이 조금이라도 기분이 좋았을 때 이야기를 꺼내야 했고, 그래야 막시민도 자신을 도와줄 테고. …그러니까, 지금 이 테이블에는 맥주 두 잔이 놓여있다는 뜻이었다. 막시민의 몫인 한 잔, 그리고 리체의 몫인 한 잔. 어차피 입에 댈 생각은 아니었으나 막시민 몫만 시킨다면 초장부터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사람을 앞에 두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어. 그러니까 뭔데? 무슨 일이길래 편지에서부터 그리 분위기를 잡은 거냐고.”


막시민 리프크네는 눈썹을 찡그리며 맥주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그는 이상함을 감지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보낸 편지의 내용이 심상치 않았으니까. ‘막시민에게. 가능하다면 빨리, 하이아칸으로 와줄 수 있니? 조슈아에겐 알리지 말고. 자세한 내용은 만나서 얘기해 줄게. 리체가.’ 편지지에는 고작 다섯 줄이 쓰여있었다. 이전에 보내왔던 편지와 다르게 분량이 현저히도 적었다. 조슈아에겐 알리지 말라는 말도 신경 쓰였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빠르게 하이아칸으로 향한 것뿐이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무지하게도.


“나… 임신했다는데.”


푸웁! 막시민은 맥주잔을 들어 꿀꺽꿀꺽 마시다 뱉어내었다. 액체가 코에도 들어간 것 같아, 동반되는 고통에 눈살을 찌푸렸다. 머리도 같이 울리는 것 같아 몇 초간 오른손으로 제 이마를 짚다가… 리체 아브릴 쪽을 노려보았다. 정확히는, 리체 아브릴 앞에 놓여있는 맥주잔을 노려보았다. 손을 뻗어 맥주잔을 제 앞으로 끌어당기곤 그리 말했다.


“그런 녀석이 맥주를 시켰다고?”
“원래 마실 생각 없었어. 너보고 마시라고 하려고 했지.”
“하….”


막시민 리프크네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오른손으로 짚었다. 상대가 누구냐는 질문은 굳이 안 해도 되었다. 들으나 마나 뻔하지, 뭐.


“…그래서. 조군 그 자식은 책임진다냐? 아니, 당연히 그러겠지? 그 녀석 성격에.”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 좀 숨겨줄래?”


막시민 리프크네는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로 리체를 바라보았다. 당연하다, 굳이 이 소식을 들은 사람이 막시민이 아니라도 그랬을 것이다. 조슈아 폰 아르님이 누군가? 아노마라드에서 제일가는 신랑감에, 그 아르님 가문의 소공작이다. 뭐… 친구로 두면 그저 재수 없는 자식일 뿐이지만. 아무튼, 평범한 귀족 가문 영애들이었다면 오히려 쌍수 들고 환영했을 것 같은 소식에, 제 앞에 있는 녀석 리체 아브릴은 미간을 찌푸리곤 웃음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네가 어이없어할 것도 이해해. 이대로라면 미래는 탄탄대로니까, 이만한 꽃길을 마다하는 것도 참 우습긴 하고.”


리체 아브릴은 그리 말하곤 제 입술을 잘근 씹었다. 막시민이 내뱉을 답변은 뻔했다. 그걸 아는 녀석이 그렇게 말해? 라고 타박이나 주겠지.


“내가 널 한두 번 보냐?”


어? 리체 아브릴은 시선을 내리깔다 그제야 깜짝 놀라며 막시민 리프크네를 마주 보았다. 막시민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훤하다, 이거야. 딱 봐도 네 본업 때문이겠지. 내 말이 틀렸냐?”


대수롭지도 않은 듯 그리 말하는 막시민의 말에, 리체는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다. 이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최대한 이성적이어야 한다며 감정을 꽁꽁 싸매고 있었는데, 둑이 터진 듯 훅 하고 감정이 파도처럼 물밀려 왔다. 진료소에서 진단받았을 때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그제야 터져 나왔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는 눈물은 멈출 새를 보이지 않았다.


“야….”


막시민 리프크네는 눈물을 떨어뜨리는 리체 아브릴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여자애가 우는 건 언제 봐도 늘 익숙지가 않았다. 게다가… 마치 몇 년 전에, 자신 앞에서 울어버린 그날의 리체 아브릴과도 겹쳐 보여서. 그래서 마음이 이상했다. 따박따박 따지던 그 여자애가 어느 순간 훅 커서…, 그런… 일을 겪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리체 아브릴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제가 몇 달째 겪고 있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났다.


“나도 알아, 내가 바보 같았지. 내가 조심했어야 하는데. 아니, 그런 걸 다 떠나서…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그 애랑 결혼하지 않고 당장 도망쳐버릴 생각만 하는 내 자신이 참 한심해.”


막시민 리프크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묵묵히 맥주를 마시며, 제 앞의 여자아이가 하는 말을 들었다.


“…사실 내게 이건 기회야. 나는 어려운 집안을 홀로 일으키고 있는 소녀 가장이고, 유일한 일터인 의상실은 빌어먹게도 나를 그리 좋아하지 않고 있고, 분수에 넘치게 수석 재봉사라는 특혜를 받은 덕택에 이 마을에서 내 뒷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려오지. 그런 상황에서 아노마라드의 아르님 소공작과 마음을 나누었고… 공작부인이 될 수 있는 미래를 코앞에 둔 셈이잖아. 블루 코럴 섬을 떠나 아노마라드로 향해서… 나를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 속에 섞여 들어가며, 그 안에서 공작부인으로써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기회.”


제정신이 아니고선 거절할 리가 없잖아? 하하…. 리체 아브릴은 울음 섞인 웃음소리를 흘려보냈다. 막시민 리프크네는 그 웃음의 의미를 읽어보려다 관두었다.


“근데 있잖아, 나는… 아무리 머릿속에 그려보려 해도 그려지지가 않아. 공작부인이 된 내 모습이, 재봉을 하지 않는 내 모습이…. 드레스를 만지지 않고, 남이 만든 드레스를 입기만 하고, 누군가에게 의상 제작을 지시하기만 하는 내 모습이 말이야. 티타임을 준비하며, 축제 예산을 편성하며, 비취반지성의 안주인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며… 재봉을 더 이상 하지 않는 리체 아브릴이, 아니, 클라리체 폰 아르님이. 전혀 상상 가지 않는다고.”


리체는 제 얼굴에서 두 손을 뗐다. 얼굴은 눈물로 범벅되어 있었고, 코는 붉었다. 두 눈에선 눈물이 멈출 새를 보이지 않아,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막시민 리프크네는 리체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괜히 시선을 오른쪽으로 흘린 후, 맥주를 한 입 더 마셨다. 쌉싸름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흘렀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지우는 방법도 있잖아.”


말을 내뱉곤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이런 말은 정말 하기 싫었는데. 평범한 커플들 사이의 소식이라면, 제아무리 막시민 리프크네라도 축하의 말을 건넸을 것이다. 그래, 임신이란 으레 축복으로 여겨지곤 하니까. …그렇지만 제 앞에 앉아 있는 리체 아브릴, 이 녀석이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데 축복이란 말이 나올쏘냐. 이 녀석이 자신 앞에서 이리 얘기를 꺼낼 정도라면 분명 마음속에서 수십 번이고 갈등했을 것이다. … 조군 녀석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뭘 하길래, 얘만 혼자서 마음고생하고 있냐고. 마음이 울렁거렸다.


“…넌 정말 너다워, 막시민.”


리체 아브릴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웃어 보였다. 아까보단 한층 표정이 밝았다. 그리곤 덧붙였다.


“오해하지 마, 기분 나쁘다는 뜻이 아니야. 오히려 기쁜 거지. 아이보다… 나를 더 생각하니까, 그렇게 말해준 거잖아?”


역시 네게 도움을 청하길 잘 했어. 리체 아브릴은 조금 후련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래, 내 선택이 잘못되진 않아서 다행이야.


“네 말대로 지우는 것도 고민했어. 그래…, 그것도 내 선택지 중에 하나긴 했고.”


리체는 시선을 내리깔고 손가락을 뻗어 막시민 앞의 맥주잔을 건드렸다. 맥주잔 표면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이 리체의 손을 타고 흘러내려 손목을 휘감는다. 열기가 오른 손바닥에 차가운 물방울이 닿으니 조금은 정신이 번쩍 드는 듯도 했다.


“아르님 공작 가문은 대를 이을 사람이 절실하지.”
“빌어먹을 소리는 관둬라. 이게 진짜, 넌 지금 네가 뭔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냐? 평생 남한테 도움 하나 안 청하고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가야 성이 풀릴 것 같은 녀석이 웬일로 편지를 보내와서 한달음에 달려왔건만. 뭐? 무슨 말을 하나 보자, 하고 아무말 없이 계속 듣기만 했더니… 허. 고작 그거때문에 낳는다고?”
“아노마라드의 그 아르님을 ‘고작 그거’라고 표현하는 사람은 전 대륙에 너뿐일 거야.”


리체 아브릴은 킥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아득한 여름날… 셋이서 함께 했던 그 여름날의 한 장면처럼.


“착각하지 마, 너 그렇게 착한 애 아니다. 난 너를 잘 알지. 남의 집안 사정 때문에 그간 쌓아온 모든 것이 흔들리는 경험을 리체 아브릴이 또다시 허용할 리가 없지. 그것뿐이었으면 당장 말해. 썩어빠진 사고방식을 쥐잡듯이 잡아서 제대로 된 선택을 하게 만들 거니까.”


이 녀석이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빌어먹을 조군 자식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청혼 같은 걸 한답시고 팔자 좋게 드러누워있는 건 아니겠지? 막시민 리프크네는 그런 말을 덧붙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그는 리체 아브릴을 잘 안다. 사자좌의 리체 아브릴은 제 인생의 중심이 자기 자신인 사람이다. 남을 빛내주기 위한 조연으로만 쓰이다 버려지는 꼴은 용납 못 하는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고작 아르님의 후계자를 위해 그간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리겠다는 말을 한다는 게 납득 가지 않았다.


“더 있지? 진짜 이유는 뭐냐? 빨리 내놔. 에피타이저만 계속 깔짝이고 있는데, 감질나서 돌아버리겠다고.”


리체 아브릴은 자기희생적인 사람이 아니다. 남의 말에 휘둘리는 녀석도, 남의 사정에 제 모든 걸 놓아버리는 사람도 아니다. 그런 녀석이었다면 오래전 막시민 리프크네의 제안에 응했을 것이다. 비 오는 어느 날 밤, 자기와 함께 도망가자는 말도 단칼에 거절하던 리체 아브릴이다. 막시민 리프크네가 아는 리체 아브릴은 그런 사람이다.


“… 세상의 모든 옷은, 쓸모없는 게 단 하나도 없거든?”


리체 아브릴은 그렇게 운을 뗐다.


“옷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야. 실도, 단추도, 레이스도…. 작업하다가 남아도는 옷감은 따로 모아두면 작은 인형 몫의 드레스로 만들 수도 있거든. 오히려 그런 게 수입이 짭짤해. 가격을 올려 불러도 귀족 나리들에겐 껌 값이니까, 그리고 제 아이들에게 지갑이 헤프게 열리는 부모들이 고객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나는 그 어느 것도 허투루 버리지 않았어.”


칼라이소에서의 일은 리체 아브릴에게 유일한 예외였다. 그때는 어차피 모든 걸 두고 떠나야 했으니 가장 최고의 것만 남기자는 마음이었다. 제 손으로 만든 세 벌 중, 두 벌은 폐기하고 남은 한 벌만 그에게 선물했다. 그래서 이따금씩 그때의 일을 회상해 보면, 다이아몬드 러쉬 극장 의상실에 남기고 온 두 벌의 옷이 가끔 마음에 걸렸다. 분명 극장 어딘가에 처박혀 있겠지.


“나에게 ‘자식’…이라는 단어는 그리 친숙하지 않지만, 굳이 말해보자면 그간 내가 만든 의상들이 ‘자식’에 해당되겠지. 내 손으로 그린 도안을 거쳐, 내가 직접 재단한 옷감들로… 단추 하나, 레이스 하나까지 꼼꼼히 이어붙인 나의 작품들. 가끔 주문이 중도에 취소되어서, 의상이 제 주인을 찾아가지 못하면… 나는 그걸 절대 버리지 않고 늘 보관해둬. 나중에라도 꼭 쓸모가 있으니까. 정 안되면 다른 의상이랑 합쳐서 리폼을 해도 되거든.”


리체 아브릴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자신의 배 부근을 응시하다 고개를 들어, 막시민 리프크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물론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이 아이도 어찌 보면 나의 작품이야. 내가 창조했으니까. 내 손에서 탄생한 의상 하나도 허투루 버리지 않는 내가, 이 아이를 버릴 수 있을 리 없잖아?”


그러니 도와줘, 조슈아가 없는 곳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게.


그리고 태어난 아이를 조슈아에게 데려다 줘.

2.

덜컹, 덜컹….


마차가 흔들린다. 주점에서 그런 대화를 나누고 나서 시간이 조금 흘렀다. 리체 아브릴은 일주일째 막시민 리프크네와 함께 마차로 먼 길을 떠나고 있었다. 당분간은 블루 코럴 섬을 떠나야 했다. 이 섬은 너무 좁았고, 어디에 숨은들… 조슈아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니 막시민 리프크네의 도움이 절실했다.


리체는 제 앞에 앉아 잠에 곯아 떨어진 막시민을 빤히 보았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마차 벽에 기대어 잠에 빠져 있는 막시민 리프크네를 보자 어딘가 안심이 되었다. 그날 자신이 그리 말하자 막시민이 뭐라고 하더라. 분명… 인상을 찡그리고, 남은 맥주를 입에 다 털어버리곤… ‘그래.’라고 답했던가. 막시민 리프크네는 한숨을 쉬곤 잔소리를 쏘아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후로 준비는 일사천리였다. 우선 미랭게트 의상실에는 일을 좀 쉬겠다고 말해두었다. 사유는 잦은 야근으로 누적된 만성 피로. 미랭게트 선생님은 탐탁지 않아 하는 표정이었으나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미랭게트 선생님이어도 그녀 역시 사람인지라, 일말의 양심은 남아있는 듯했다. 장장 스물도 안 된 어린애가 야근을 밥 먹듯 할 정도로 부려 먹었는데 당연히 허락해 줘야지. 흥.


아무 말 없이 떠났어야 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제대로 가족들에게 언질도 주었다. 갑자기 사교계에 드레스 주문이 폭주하면서 장기 출장을 가야 한다는 핑계를 대었다. 1년 치 생활비도 미리 건네주었고, 동생 학비도 2학기 분은 미리 값을 치러 두었다. 몽플레이네 씨는 못 보았지만…, 오히려 그게 나았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가끔 날카로울 때가 있으니까. 그 사람에게 들키는 것은 죽어도 싫었다.


그렇게 신변 정리를 끝내고 마차에 오른지 일주일째였다. 리체 아브릴은 창가를 보며, 돌연히 블루 코럴 섬을 떠나야 했던 그 여름날을 떠올렸다. 그때에 비해 한 명이 줄었지만, 그때에 비해 우리는 너무 커버렸지만. 그렇지만… 그때에 비해, 떠나기 전 정리를 제대로 할 수 있었다. 그래, 그게 몇 년 간의 발전이라면 그걸로 만족했다.


막시민 리프크네는 잠을 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자다 못한 귀신이 붙었나.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 풋…하고 웃음이 났다. 리체 아브릴은 숨소리에 맞춰 오르내리는 그 녀석의 어깨를 보며 제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마차에 탄 지 사흘쯤 되었던 날이던가, 우린 지금 어딜 가고 있는 거냐고 물어봤었다. 그때도 여전히 잠에 취해 있던 막시민은 하품을 한 번 하고는 대답했다. 아노마라드. …아노마라드? 리체 아브릴은 되물었다. 어찌 보면 아르님 가문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그 아노마라드였다. 의아하긴 했지만 화가 나진 않았다. 막시민 리프크네가 그리 생각 없는 녀석이 아니란 걸 알고 있으니까.


…의 코츠볼트 마을. 막시민 리프크네는 말을 덧붙였다. 너는 지금 하이아칸을 떠나야 한다고, 그리고 조군 녀석이 생각지도 못할 곳에 가야 한다고. 그 생각은 이미 리체 자신도 하고 있던 생각이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막시민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코츠볼트 마을은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웬만한 귀족들은 그 근방이라도 발 한 번 안 디딜 정도로 초라한 시골마을이라고. 그러니 아르님 가문에서 병사를 풀어 사람을 찾아도 상대적으로 들킬 위험이 적다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네가 몇 개월간 있어야 하는 곳인데, 아예 생판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 가면 불안하지 않겠냐?’ …어? 리체 아브릴은 그때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곤 했다. 거기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가뜩이나 타지에 가서 물이고 음식이고 다 입에 안 맞을 텐데, 몸 상태가 그러니 더 예민하겠지. 근데 어딜 가나 미친놈들이 없을 거라는 보장이라도 있냐? 시골은 더 그래, 지역민끼리 똘똘 뭉쳐서 외지인은 배척하지. 연줄 하나 없으면 그 안에 녹아들어 가기 힘들다.’


…그리로 가면 내 동생들이 있어. 한 다리 건너는 거라고 해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있어야 너도 마음이 편하겠지. 막시민 리프크네는 그렇게 말을 끝내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앞자리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작게 들렸으나 일부러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마차에 신세를 진 지도 꼬박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그 좁은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은… 리체 아브릴에게 꽤나 고역이었다. 공간도 좁았고, 끊임없이 흔들려서 멀미도 났다. 게다가 주기적으로 입덧도 올라왔으니 죽을 맛이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막시민 리프크네도 함께 고생했다. 친구 하나 잘못 둬서 이게 뭔 고생이냐? 그리 툴툴거리면서도 답지 않게 손은 리체의 등을 토닥여줬다. 리체는 그 마음을 알기에 퉁명스러운 말에 상처받을 것도 없었다. 그저 고마움뿐이었다.


“어라, 오빠?”


한 달 만에 드디어 마차에서 내려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리체와 막시민이 마차에 내려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고 있자, 조금 멀리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오빠 맞잖아? 여기는 무슨 일이야?”


타닥, 탁. 멀리 서 있던 여자아이가 두 사람이 서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리체 아브릴은 뛰어오는 여자아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왜 웃냐?”
“아니, 딱 봐도 네 얼굴이랑 판박이잖아. 킥킥… 남매가 쌍으로 똑같이 생겼네.”
“허. 어디가? 불쾌하네.” / “뭐야? 불쾌한 건 나라고!”


여자아이는 발이 참 빨랐다. 한달음에 달려와 빽 소리를 질렀다. 킥킥… 리체 아브릴은 웃음을 흘리고는 사과했다. 아무리 그래도 앞으로의 미래가 창창한 아가씨한테 그렇게 말하다니. 내가 악담을 했네. 잘못했어, 미안해? 그리 말하면서도 웃음기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흐흥. 사과해 주시니 용서해 드리죠.”
“야. ‘그렇게’ 말한다는 게 뭔 뜻이냐?”


막시민이 딴지를 걸었지만 리체는 가볍게 무시했다.


“그나저나, 오빠가 여기에 온 건 오랜만이네.”
“그래. 잘 지냈냐? 뭐, 무소식이 희소식이니까. 어련히 잘 지냈을 거라 생각한다만.”
“그럼, 별일 없었지.”


몇 년 만에 대면한 듯한 남매는 고작 2-3일 떨어졌다가 만난 것처럼 데면데면했다. 리프크네 남매들에게는 그게 보통이었다. 여자아이는 오히려 제 오빠의 옆에 서 있는 사람에게 더 관심이 갔다.


“옆에 있는 언니는 누구야? 설마….”
“뭘 상상하든 그런 거 아니니까 쓸데없는 생각은 집어넣어라.”


리체 아브릴 역시 어떤 말을 들을지 예상이 갔으므로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크흠, 리체는 헛기침을 작게 내뱉고는 표정을 관리했다. 그리곤 밝은 미소를 띠며 저를 소개했다.


“안녕. 리체 아브릴이야, 네 오빠 친구지.”
“일마 리프크네예요!”
“이 녀석은 당분간 여기서 지낼 거니까 그런 줄 알고 있어.”
“여기서? 흐음… 뭐, 그래!”


일마 리프크네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코츠볼트 마을에서 동네 거지로 살아오며, 일마는 막시민 못지않은 눈치를 지녔다. 아니, 눈치만이라면 막시민을 능가할 정도이리라. 아무래도 시골 동네에서 여자아이로 사는 삶은… 꽤나 많은 것을 경계해야 하니까. 막시민 리프크네는 유년 시절 어디든 누워 퍼질러 자도 안전한 삶을 살아왔겠지만 일마 리프크네는 그렇지 못했다. 그게 가난한 소년과 가난한 소녀의 차이였다. 조심해야 할 것이 어림잡아 두 배는 더 많았다.


리체와 막시민, 일마는 셋이서 나란히 걸었다.


“다른 녀석들은 별일 없고?”
“그으럼. 걱정 붙들어 매셔. 리하르트는 오늘 트리비아 아주머니네 주방을 털 예정이라던데.”
“…푸핫!”


리체 아브릴은 웃음을 터뜨렸다. 일마 리프크네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제 오빠를 쏘아 보았다. 막시민 리프크네는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핫, 아하하하하하….”


웃음이 멈추지 않아 이제는 두 팔로 배를 꽈악 잡고 웃어 댔다. 야…! 리체의 건강 상태를 의식한 막시민이 눈초리를 주자, 그제서야 리체는 깨달았다. 아, 맞다. 나 조심해야 했지. 그래도 웃긴 걸 어떡해. 최대한 멀쩡한 척해보려 했지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킥킥… 그 트리비아 아주머니 말이야, 실존하는 인물이었구나?”
“뭐예요, 오빠가 또 멀쩡한 사람 이름 두고 이상한 짓거리했어요?”
“푸하핫… 아, 이건 나랑 너네 오빠가 처음 만났을 때 있던 일인데….”


리체는 그렇게 몇 년 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막시민은 발끝으로 애꿎은 돌멩이만 괴롭혔다.




그 시각, 조슈아 폰 아르님 역시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소공작의 두 발이 디딘 곳은 하이아칸의 블루 코럴 섬. 방문한 목적은 제 연인이자 예비 약혼자를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마차에는 아르님 공작 가문이 새겨져 있지 않았다. 그저 평범하고 허름한 듯한 마차였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좁디 좁은 블루 코럴 섬에서 하루 만에 소문이 퍼져버리고 말았을 테니까. 아르님 공작 가문의 후계자가 이 섬에 당도했다는 소문 말이다.


몇 달 만에 찾아온 블루 코럴 섬은 언제나 변함없었다. 몇 달 전에도, 몇 년 전에도. 그 모습 그대로였다. 조슈아는 거리를 바라보며 지난 일을 회상했다. 아, 저기 식당에서 리체를 만났지. 일부러 변장을 하고 있었고, 살면서 처음으로 남이 끼얹은 물 벼락도 맞아보고. 그런 생각에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리체가 보고 싶었다.


걷다 보니 리체가 일하는 미랭게트 의상실이 코앞이었다. 그 맞은편에 자리잡은 꽃집이 조슈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꽃을 사 가면 좋아해 줄까? 기뻐해 줬으면 좋겠는데. 장미 꽃다발을 받아들고 퉁명스러운 듯, 그러면서도 얼굴을 붉히는 리체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 모습을 실제로도 보고 싶었다. …다만, 꽃다발 째로 사진 않았다. 조슈아 폰 아르님에게도 눈치가 있고, 리체가 무얼 싫어하는지 뻔히 알고 있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받는 것…이라기보단 남들의 구설수에 휘말리는 것, 그걸 참 싫어했다. 그러니 리체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로만, 그리고 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정도로만. 조슈아 폰 아르님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중요한 건 리체니까.


“장미꽃 한 송이만 주십시오. 포장해서.”


예, 예. 고개를 끄덕이는 주인장에게 조슈아는 값을 건넸다. 그리곤 꽃 한 송이가 포장될 때까지 가게 앞에서 기다렸다. 이 자리에서는 미랭게트 의상실이 아주 잘 보였다. 그리고 2층도. 미랭게트 의상실의 2층에는 창문이 크게 나 있는데, 리체 아브릴은 늘 창문을 옆에 둔… 꽤나 좋은 자리에 앉아있곤 했다. 수석 재봉사니까. 그래서 조슈아는 항상 리체를 만나러 가기 전에 꽃집에서 꽃을 기다리며 미랭게트 의상실 2층을 바라보곤 했다. 그건 애가 타면서도 꽤나 즐거운 기다림이었다. 제가 온 줄 모르고 작업에 열중하는 리체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까.


리체는 의상 얘기를 할 때면 눈이 반짝였다. 그런 리체를 바라보는 건 조슈아의 기쁨이었다. 생각해 보면 항상 누군가의 시선을 받기만 했지, 제가 누군가에게 시선을 보내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소공작 조슈아 폰 아르님을 앞에 두고도 다른 생각에 푹 빠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던가. 그런 점까지 좋았다.


돌이켜보면… 리체에 대한 마음을 자각한 것은 칼라이소의 다이아몬드 러쉬 극장이었을 터이다. 죽음을 앞두고도 공연을 하겠다고 억지를 부렸던 때, 막시민과 크게 다툰 그 때. 사향 향수병이 바닥에 떨어져 액체가 카펫을 물들이고, 방 안이 진한 향기로 가득 차 어지럽던 그때. 막시민 리프크네는 방을 나가버렸지만 리체 아브릴은 떠나지 않았다. 도리어 옷을 내밀었다. 순백의… 무대 의상을.


조슈아는 어릴 적부터 영민했다. 데모닉이었으니까. 무언가를 원하며 제게 다가오는 사람들의 얼굴만 보아도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다, 아르님 공작 가문의 후계자에게는 일평생 날파리가 참 많이들 꼬였다. 그간 얕게 스쳐 지나간 인연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조슈아가 두려워 일찌감치 가까이 오려고 들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 그리고 조슈아의 배경이 탐이 나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 억지웃음을 짓는 자들. 전자에는 익숙해졌으나 후자는 진절머리가 났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수많은 손이 제게로 뻗어오는 인생이었다. 각기 다른 손들은 제 옷을 벗기려, 제 주머니에 손을 한 번이라도 넣어보려, 제 재킷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려 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등 처먹으려 하는 사람들 천지였다는 말이었다. 그게 재물이던, 명예던, 아르님 가문의 무언가이든 간에. 조슈아 아일브레탄트 폰 아르님은 가진 것이 너무 많은 자였고, 그렇기에 동시에 빼앗길 것도 많았다. 남들은 무언가 하나라도 빼앗아가지 못해서 안달하고 있는데, 리체 아브릴은 도리어 제게 옷을 지어줬다. 누군가의 마음이 담긴 선물을 받는 일은… 인생에서 꽤나 드물었고, 그래서 귀했다. 그 마음이 고마웠다. 그게 사랑의 시작이었다.


“포장 다 되었습니다.”
“고맙소.”


주인장이 건넨 장미꽃 한 송이를 건네받았다. 그리곤 다시 의상실을 올려다보았다. 아까부터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게 무엇이지? 생각해 봐, 조슈아 폰 아르님. 1초도 채 지나지 않아 연산을 마쳤다. 그래, 확실히 이상한 점이 있었다. 지금은 오후 10시고, 평소 같았으면 리체가 철야 작업을 했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리체 아브릴은… 보이지 않았다. 조슈아는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를 따져보았다. 자리를 옮긴 건가? 아니면 일이 일찍 끝나 집으로 향했을 가능성은? 아니면 잠시 창고에 있을 지도 모르지. 아니, 잠을 떨칠 겸 차라도 마시려고 탕비실에 들어가 있는 걸지도 몰라.


다행인 점은 의상실 2층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는 점이었다. 적어도 사람 한 명은 있다는 뜻이니까. 게다가 1층은 불이 꺼져 있어, 리체의 상사인 미랭게트 선생이 지금 의상실에 자리하지 않는다는 점도 다행이었다. 조슈아는 미랭게트 의상실 출입문 옆에 붙어 있는 작은 종을 흔들었다. 우당탕, 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2층에서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조슈아는 삐걱이는 마룻바닥 소리의 주인공이 리체일 줄만 알았다.


“저… 누구세요?”


조슈아의 예상과는 달리, 문을 연 사람은 리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양 갈래로 땋아내린 갈색 머리의 소녀. 조슈아의 얼굴을 보고 멍한 듯 바라보다 몇 초 만에 정신을 차리곤 질문을 던졌다. 조슈아 역시 놀랐으나 짐짓 아닌 척을 하며 태연한 듯 미소를 지었다.


“늦은 밤에 실례합니다, 레이디. 혹시 리체 아브릴 양을 불러주실 수 있을까요?”
“리체 언니요? 그 언니… 여기 그만뒀는데.”


그 말을 듣자 조슈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소녀는 시선을 데굴거리며 말했다. 그만둔지 꽤 됐어요. 으음… 한 달 정도는 되었던가. 언니가 어디 사는 지 아세요? 알면 한번 찾아가 보세요. 저희 얘기도 전해주시고요! 리체 언니가 없어서 의상실이 요 며칠째 비상이에요, 언니만 소화할 수 있는 주문들이 잔뜩 들어와서…. 마음이 혼란스러워 뒷이야기는 귀에 잘 들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문제는 없었다. 구태여 다시 복기하고자 한다면 언제든 머릿속 카세트테이프를 재생하면 될 일이었다. 그는 데모닉이니까. 조슈아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숨기고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네, 고맙습니다. 수고하세요. 그리곤 몸을 돌려 무작정 걸었다.


리체가 의상실을 그만뒀다.


한 달 전에.


…왜?

3.

리체가 코츠볼트 마을로 온 지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 어제는 참 정신없었지…. 리체 아브릴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제 옆에는 일마 리프크네가 색색 소리를 내며 아직 잠들고 있었다. 이 집안을 둘러보지 않아도 리프크네 일가 사람들은 여전히 잠에 빠져있을 것 같았다. 그리도 잠을 좋아하는 막시민 리프크네의 가족들이니까. 그리고 지금은 새벽이기도 하고. 창 밖의 빛으로 어림잡아 보았을 때 아마도 새벽 6시 즈음이리라. 리체 아브릴은 항상 이때면 일어나곤 했다. 출근은 10시지만 씻고 출근 준비를 해야 하기도 했고, 동생과 어머니가 하루종일 먹을 음식을 준비해야 하기도 했다. 아침, 점심, 저녁, 그렇게 세 끼를. …당분간은 일찍 일어날 필요 없겠네. 그런 생각을 했다.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며 숨을 내쉬다 보면 괜스레 제 몸의 감각들에도 신경을 쓰게 된다. 발가락에 닿는 이불의 감촉이나, 배가 꼬르륵거리는 소리 같은 거. 평생을 살며 잘만 해오던 호흡도, 의식하는 순간… 엇박자로 쉬진 않을까, 그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고 말게 된다. 스읍, 후우. 몇 초간의 텀을 두고 숨을 마시다가 내쉬었다. 그에 맞춰 가슴께가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간다. 너도 지금쯤 나와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을까? 리체 아브릴은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제 몸 안에 새로운 생명이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생명이 지금 자신과 함께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것이. 아니, 말은 똑바로 해야지. 태아의 폐는 임신 34주 차에 생긴다고 한다. 그러니 그저 리체 아브릴이 들이마신 숨으로 산소를 공급받고 있는 존재. 아직은 그것에 불과했다. 주체적으로 호흡을 할 수 없는걸 보면 뇌나 심장이랑 별다른 것도 없는 것 같았다.


임신한 여자는 자연스레 모성애가 생기고 아이에게 애틋해진다고들 하는데. 그런 건 다 연극 속의 허상 같았다. 누가 이런 개뻥을 지어내서 널리 널리 퍼뜨린 거지? 모성애는 개뿔이…. 배 속의 이 녀석이 제 몸을 불법점거한 지도 약 세 달하고도 조금의 시간이 더 흘렀는데, 좀처럼 익숙해지지도 애정을 갖게 되지도 않았다. ‘그냥 어딘가 이상하고, 그럼에도 내가 만들어버린 녀석’…. 그 정도의 인식이었다.


리체 아브릴은 눈을 감고 미랭게트 의상실을 떠올렸다. 의상실에서 일을 하다 보면 다양한 의뢰주들의 요청서를 받는다. 그들은 의상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여러 요구사항을 꾸역꾸역 넣어 요청서를 작성한다. 그런 요청서를 받아 볼 때마다, 리체 아브릴은 한숨이 나왔지만 일단 그들이 원하는 대로 디자인을 했다. 원래 의뢰주가 까라면 까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의상 시안을 짜서 보내버리면 답장은 이렇게 온다. 이 레이스를 달아주세요, 리본 재질은 벨벳 공단이면 좋겠어요, 이런 단추를 달아주세요…. 그런 답장을 받으면 화가 머리끝까지 뻗치곤 한다. 하, 이런 복고풍 레이스는 이십여 년 전에나 유행하던 거라고! 여름 옷에 벨벳 리본이 말이 되나? 그리고 휴양지용 원피스에 무거운 단추를 몇 개나 달려고 하는 거야! 그럼에도 묵묵히 그들의 요청을 따랐다. 그렇게 완성된 작업물을 보내면 돌아오는 답은? ‘이전 디자인이 나았네요, 그 디자인으로 진행하고 재봉사님 재량껏 디벨롭해 주실 수 있나요?’


그 답장에 모든 의욕이 상실되어, 돌아온 의상을 두 손으로 붙잡고 망연자실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날에는 아무리 의상실의 고참 언니들이라도 리체 아브릴을 건드리지 못했다. 심기라도 불편하게 만들었다간 폭발할 테니까. 리체 아브릴은 그런 과거를 떠올리며 작게 키득거렸다. 아아, 지금이랑 별반 다른게 없는 듯해. 어딘가 언밸런스하고, 이상하고, 그럼에도 내 손으로 만들어버렸는데… 내가 만들었다고 당당히 말할 수도 없는 그런 녀석. 그런 원피스와 제 배 속 아이가 꽤나 닮아 보였다.


그럴 때는 어떻게 했더라? 그럴 때는… 우선 절망을 충분히 했다. 적당히 좌절을 하고 나면 한숨과 함께 ‘그래도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래도 해야지, 어떡해. 그런 생각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건, 리체 아브릴이 그 이상한 원피스를 수용할 마음가짐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시 원피스를 책상에 펼치고, 요리조리 살릴 궁리를 했었다. 그래, 레이스랑 벨벳 리본은 일단 떼는 거야. 그 괴상한 단추도. 그리고 허리 부분에 라인을 넣고, 어깨에 끈은 없애버리자. 과정은 중요하지 않아. 시작이 어땠든, 중간에 얼마나 틀어졌든… 마지막 결과물만 완벽하면 돼. 그게 이 옷을 만든 재봉사 ‘리체 아브릴’이 해야 할 일이야.


…아, 이거다.


리체 아브릴은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곤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생각했다. …그래, 너도 황당하겠지. 자리 잡고 보니까 이렇게 모성애라곤 지지리도 없는 사람이 엄마라니 말이야. …윽, ‘엄마’라는 말은 앞으로도 한참은 익숙지 않을 듯했다. 그럼에도 말이야, 나는 모성애 따윈 없지만… 창작자로서의 사명감은 가지고 있거든. 내 손을 거쳐간 의상이 몇 벌인지 아니? 어떻게 보면 그 아이들이 네 이복자매들일지도 모르지. 모두들 내 손을 거쳐 좋은 사람들에게 갔단다. 그러니까… 나는 내 책임감을 잘 알고 있다고. 이 모든 것의 시작이 어땠든, 너를 무사히 낳을 거라고. 그게 창조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이자 최고의 책임이야.




조슈아는 날이 밝자마자 리체의 집 앞으로 찾아갔다. 사실 밤을 어떻게 보냈을지도 모를 정도로 제 모든 의식을 정신에 집중해 몸은 내팽개쳐 뒀다. 대충 근처에 있는 여관을 하나 잡았던가. 당연히 잠은 청할 수 없었고, 새벽 내내 이 묘하고 이상한 일을 곱씹기만 했다. 손에 있던 장미꽃 한 송이는 어디 길바닥에 떨어뜨린 건지 보이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집의 대문을 두드리자 잠시 후, 끼익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빼꼼하고 얼굴을 내민 사람은 앳된 얼굴의 소년, 리체의 남동생이었다. 붉은 머리칼에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 조슈아가 사랑하는 그녀를 너무나도 똑닮은 남자아이. 그래, 문이 열릴 때 가족이 나올 수도 있다는 건 이미 예상 범위 내였다. 조슈아 폰 아르님은 어젯밤처럼 단정하고 예의 발라 보이는 미소를 띠며 인사했다.


“안녕. 나는 네 누나… 리체의 친구인데. 아침에 찾아와서 미안해. 혹시 안에 리체 있을까?”


‘누나’라는 말을 듣자마자 소년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모습에서 리체가 겹쳐 보였다. 아이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조금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근데 저희 누나, 지금 집에 없는데.”


의상실에서 출장인가? 간다고 했거든요. 그게 언제더라, 한 달 전이었어요. 당분간 일이 너무 바빠서 집에 못 들어온다고…, 생활비도 학비도 전부 준비하고 가버렸는데. …아. 마치 어제저녁 같았다. 그렇지만, 이것도 예상범위 내에 있었다. 의상실을 그만뒀다는 것부터가 이상했으니까, 이런 상황도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라고 보았다. 그러니 어제처럼 얼빠지게 대처하진 않을 것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히 답했다. 그래? 그러면 나중에 누나가 돌아오면 말해줘, 친구가 잠깐 찾아왔다고. 나중에 또 보자, 어머니께도 안부 전해드리고.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곤 문을 닫는다.


조슈아 폰 아르님은 연산을 시작한다.


두 가지 명제가 상충한다. 하나, 리체는 의상실을 그만두었다. 둘, 리체는 의상실 출장을 떠났다. 이 중에서 참은 무엇이지? 전자는 참이 확실했다. 리체가 의상실에 없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것이니까. 후자는 거짓이겠지. 두 번째 명제는 그 안에서 또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아야 했다. ‘리체는 의상실 출장을 갔다’, 그리고 ‘리체는 떠났다’. 이 중에서 후건인 ‘리체는 떠났다’는 증명되었다. 후건이 참이라고 해서 전건 역시 참일 것이라는 보장이 있나? 리체 아브릴은 의상실을 그만두었다. 이는 명백한 참이다. 그것이 ‘리체는 의상실 출장을 갔다’의 반증일 것이다. 그러니, 후건 긍정의 오류로 ‘리체는 의상실 출장을 갔다’가 거짓일 것이다! …왜? 가족들에게까지 비밀로 하며 블루 코럴 섬을 떠나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리체 아브릴은 재봉사라는 자신의 직업에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리 쉽게 의상실을 그만둘 리가 없었다. 그런 리체가 의상실을 그만둘 만큼, ‘의상’보다 우선시할 만큼 중요한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그 무언가는 ‘도피’와도 연관성이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리체가 집을 떠났을 리가 없으니까. 또한 결코 흘러 넘길 수 없는 중요한 단서, ‘한 달’이라는 것이 걸렸다. 말해줘, 리체. 한 달 전에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골똘히 생각하고 있으니 저 먼 치에서 아르님 가문의 기사들이 다가왔다. 그렇다, 조슈아는 블루 코럴 섬에 혼자 방문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아르님 가문의 소공작이 아노마라드에서 하이아칸까지 가는 것인데, 호위 기사 하나 없이 움직일 수 없다는 이유로 집사장이 박박 우겨댔기 때문이었다. 출발 직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동행이 부담스러웠으나,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이번에는 오히려 그들과 동행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저녁, 조슈아는 그들에게 섬의 수색을 부탁했다. 그 수색의 결과를 곧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속이 조금 울렁거렸다. 마치… 어린아이가 아카데미 성적표를 받기 위해 교실에 줄지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결과가 궁금하면서도 동시에 궁금하지 않았다. 알고 싶은데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런 기분은 난생처음이었다. 기사는 조슈아에게 보고를 올린다. 수색 결과, 리체 아브릴은 지금 블루 코럴 섬에 없다고. 블루 코럴 섬 내 부재를 예상했긴 했으나 더욱이 명확한 결과로 확정 지어지자 머릿속에서 종이 뎅 하고 울린 기분이었다.


리체는 어디로 갔을까. 어떻게 갔을까, 왜 갔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왜’겠지만, 그보다는 ‘어디로’였다. 일단 찾아내기만 하면 자초지종을 물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조슈아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리체가 어디로 갔을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리체가 태어난 곳은 블루 코럴 섬이었고, 늘 항상 제 삶의 터전인 이곳을 벗어나고 싶지 않다고 했으니까. 어쩌면 ‘어디로’보다는 ‘어떻게’에 초점을 두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리체는 말을 몰지 못한다. 그러니 필시 마차를 탔겠지. 리체는 한 달 전에 사라졌으니, 이를 기준으로 예상 반경을 세울 수 있었다. 마차를 기준으로 최소 하루에서 최대 한 달이 걸리는 곳. 그 영역 범위 내에 리체가 있다.


하이아칸의 블루 코럴 섬에 없는 것은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하이아칸 전체는? 조슈아는 제 머릿속에 대륙 지도를 펼치고 가장 가까운 곳부터 가장 먼 곳까지 그려보았다. 가장 가까운 가능성은 하이아칸. 가장 먼 가능성은… 아노마라드. 대륙 지도를 기준으로, 블루 코럴 섬은 오른쪽 아래에 존재했고 정반대인 왼쪽 위에는 아노마라드가 있었다. 마차 기준으로 한 달이라는 시간은 아노마라드에서 하이아칸의 블루 코럴 섬까지 향할 수 있는 시간이다. 마치 조슈아 자신이 리체를 만나기 위해 꼬박 한 달을 달린 것처럼.


조슈아는 가설을 세워보았다. 리체가 아노마라드에 갔다는 가설. …왜? 아니, ‘왜’는 미뤄둬야 한다. 그걸 지금 우선시해서는 안 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리체가 아노마라드에 갔을까? 가능성은 있지만 낮았다. 하이아칸에서 아노마라드까지 가기에는 국경을 넘어야 했으며, 수많은 관문을 거쳐야 했다. 국경을 넘는 데에는 무수히 많은 서류가 필요하기에, 초행길이라면 감히 엄두에도 못 낼 것이었다. …잠깐, ‘초행길’?


조슈아 폰 아르님은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리체가 혼자 떠나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리체의 도피를 도와줄 ‘조력자’가 있었다면. 그렇다면 리체가 아노마라드에 비교적 쉽게 갈 수 있었을까? 답은 0.1초도 되지 않아 나왔다. ‘그렇다’. 거기까지 생각을 하고 나니 생각에 물꼬가 트인 듯 더욱 빠른 계산이 가능했다. 가족에게도 도피 사실을 숨긴 리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 이전에 아노마라드와 하이아칸을 오간 경험이 있는 사람. 그래, 가장 가능성이 높은 답이 나왔다. 막시민 리프크네, 막군이 있는 곳에 리체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조슈아가 낼 수 있는 가장 최적의 답안이었다. 조슈아 폰 아르님은 굳은 얼굴로 기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지금 바로 아노마라드로 가야겠습니다.”

4.

“일마, 가서 접시 좀 꺼내 올래?”
“응.”


리체의 말에 일마 리프크네는 찬장을 뒤적인다. 벌써 리체 아브릴이 코츠볼트 마을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것도 이 주가 다 되었다. 이제는 배도 꽤나 불러와, 리체 아브릴을 본 누구든 ‘임신했네’라는 생각을 할 것 같았다. 좁디좁은 이 시골판에서 ‘그 남매네 큰 애가 여자를 데려왔더라’하는 소문은 테이블 위에 물컵을 쏟은 것보다도 빠르게 퍼져나갔으나, 리체 아브릴은 개의치 않았다. 블루 코럴 섬에서도 숱하게 겪은 일이었다. 게다가 일마와 마찬가지로 밑의 아이들도 리체 아브릴을 ‘흠, 그렇군.’ 정도의 생각을 하며 받아들인 것 역시 멘탈 관리에 도움이 되었다. 막시민의 동생들 다웠다.


“야, 오늘 아침 뭐냐?”


잠에서 깬 막시민이 하품을 하며 주방으로 걸어들어왔다. 각자도생을 가훈으로 제각기 살아가던 리프크네 남매들에게 최근 변화의 바람이 하나 불었다면, 리체 아브릴을 필두로 모여 삼시 세끼 밥을 같이 먹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실 이제는 조슈아가 어린 시절 방문했을 때와는 다르게 그들도 몸이 컸기에 더 이상 도둑질로만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도둑질은 간식 정도의 요깃거리로만. 그렇기에 마을의 일손을 도와주고 음식을 받는다던가 보수를 받는 식으로 진행하였는데, 그런 이야기를 듣고 리체는 ‘그럼 그냥 다 같이 밥을 먹는 게 낫지 않아?’라 말한 것이었다. 그날부로 각자에게 담당 끼니가 정해졌다. 아침은 리체와 일마, 점심은 막시민과 안톤, 저녁은 루돌프와 리하르트. 막내 두 명은 어리니 패스하는 걸로. 여덟 명 몫의 식사를 만드는 게 귀찮긴 해도, 하루에 한 끼만 만들면 나머지는 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건 참 이득이었다. 리체는 쉬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일마가 주장했지만, 오히려 움직이는 게 마음 편하다며 자진해서 맡았다.


“크림스프랑 오믈렛.”
“맛은 보장된 거냐?”
“새삼스레 왜 이래? 내 요리 실력 알면서.”


막시민과 리체의 시시콜콜한 대화를 귀로 들으며 일마는 속으로 웃었다. 일마 리프크네에게 리체 아브릴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기둥’같았다. …어머니는 어릴 적 여의고 아버지란 작자는 집을 나가 돈도 뭣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한 일곱 남매였다. 어쩌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아빠보다 오빠 막시민 리프크네를 더 아빠같이 여겼을 지도 모른다. 그런 오빠도 열여섯이 되자 바빠졌는지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집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간간이 제 안부를 알리는 편지와 생활비는 보내왔지만. 어쨌든 남은 아이들을 보살피는 역할은 막시민 리프크네에서 일마 리프크네로 자연스레 이관되었다. 그래서 일마 리프크네는 무의식적으로 두려움을 키우고 살아온 것 같기도 하다. 책임이라는 것은 단순히 긍정적인 감정만으로 품을 수 없으니까.


일마 리프크네는 어릴 적부터 마을의 아이들을 볼 때마다, 자매가 있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정확히는 언니가 있는 아이들. 언니의 옆에 딱 붙어서 언니가 일러주는 것을 배울 수 있는 아이들. 마치 어미 새가 입에 먹이를 넣어줄 때까지 입을 활짝 벌리는 아기 새 같았다. 가난한 소녀로서, 경계할 것이 많았던 소녀로서 인생을 보냈던 일마 리프크네에게는 그런 존재가 필요했다. 오빠는 ‘가난한 아이’의 삶은 알려주었으나, ‘가난한 소녀’의 삶은 알려주지 못했으니까. 그런 것은 직접 부딪혀서 알아내야 했다. 그래서 일마 리프크네는 한평생 ‘언니’를 갈망했다. 그런 일마 앞에 갑자기 리체 아브릴이 나타난 것이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늘에서 뚝 떨어진 ‘언니’는 사람의 마음을 잇는 것을 참 잘했다. 포승줄로 사람을 묶어 한 명씩 낚아오듯, 일곱 명의 남매를 단숨에 모아버리고 그 중심의 밸런스를 적절히 맞췄다. …만약에, 일마 리프크네에게 진짜 언니가 있었다면 분명 리체 아브릴 같은 사람일 것 같았다. 정말 이상적인 언니.


“언니가 평생 여기서 살았으면 좋겠다.”
“일마, 너 잠 덜 깼니? 킥킥…”
“허! 그럼 나는 저 녀석이랑 평생 얼굴 보고 살라고?”
“뭐야? 나야말로 사양이거든?”


저 둘은 또 시작이네. 일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리체는 혼자 들판을 걷고 있었다. 노을빛으로 물든 하늘을 보니 자연스레 노을 섬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아나로즈 티카람, 이카본 폰 아르님. 이카본의 아이를 가진 아나로즈는 그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아이를 몰래 낳아 키웠다. 그 이야기를 들었던 어릴 적 리체 아브릴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노발대발했었다. 나 원 참. 나도 별 반 다를 거 없었잖아…. 리체 아브릴은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야 당신을 이해할 수 있어요, 아나로즈. 오늘따라 왼쪽 가슴에 단 루비 브로치 속 붉은색이 선명한 듯했다.


리체는 제 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나는 아나로즈랑은 다른 선택을 할 거야.


이해를 하는 것과, 똑같은 전철을 밟는 것은 별개였다.


“네가 멜오렌 티카람처럼 되는 건 바라지 않거든.”


아나로즈 티카람의 딸, 멜오렌 티카람. 태어났다는 사실을 이카본이 영영 알 수 없었던 아이. 그렇게 잊힐 뻔했던 존재. 똑같은 일이 일어나도록 하진 않을 것이다. 아르님 공작 가문으로 보낼 거니까. 그런 리체의 말에 화답을 하는 건지, 옅은 태동이 느껴졌다. …그래, 이제 그럴 시기가 되었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제 뱃속 존재가 생명이라는걸.


“…응. 내 아이는 그렇게 만들면 안 되지.”


엄마가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아직은 감이 오지 않았다. 아직은 제 몸을 점거하고 있는 룸메이트 같은 느낌인데. 바뀐 거라곤 불법 점거에서 합법 점거로 바뀌었다는 소소한 요소뿐이었다. 제대로 책임지기로 결심했으니 양 측의 합의에 따라 일시적으로 거주를 허용했다는 셈 쳤다.


그래도 이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은 있었다. 이 마음을 모성애라고 하는 걸까? 잘 실감이 안 되었다. 의상을 만들 때도 비슷한 마음을 느낀 적이 있었기에. 이 원피스가 좋은 사람에게 가서, 예쁘게 입혔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 그때의 감정과 지금의 감정은 무엇이 다를까? 아직은 구분이 어려웠다.


“네가 태어나면, 내게 가장 소중한 걸 줄게.”


아이에게 정을 붙여버릴까 봐 차마 태명조차 짓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 노을 섬에서 아나로즈 티카람이 제게 선물한 루비 브로치. 그것을 아이에게 주고 싶었다.

“여기서 뭐 하냐?”


익숙한 목소리에 몸을 돌려보니 막시민 리프크네가 있었다.


“그냥, 산책.”
“방바닥에 드러누워 한참을 쉬어도 모자란데 몸을 또 움직인다고?”
“가만히 있는 건 답답한 걸 어떡해.”


에휴. 막시민 리프크네는 들판에 털썩 앉아 한숨을 쉬었다. 그런 막시민을 보고 리체 역시 들판에 앉으려 하자….


“야.”


눈살을 찌푸리곤 제 겉옷을 벗어 바닥에 펼쳐두었다. 여기에 앉으라는 듯이. 시선은 일부러 땅바닥으로 보내며 리체를 향해 손바닥도 내밀었다. 리체는 킥킥 웃고는 막시민의 손을 지지대 삼아 천천히 바닥에 앉았다. 이럴 것까진 없는데. 그런 리체의 말에 막시민은 허… 하고 대꾸하고 말았다.


“그날 생각난다. 우리 둘이 대판 싸웠던 날.”
“네가 조군 옷을 눈물로 한바탕 적셔둔 날 말이냐?”


리체 아브릴은 키득거렸다.


“네가 그랬지, 가문의 비극이 대물림될 수도 있다고. 엄마가 나에게, 그리고 내가 내 자식에게.”
“그래. …그땐 내가 말이 좀 심했다.”
“됐어, 틀린 말도 아니었잖아.”


…있잖아. 리체는 조금 골똘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 애 말이야. 태어나고 나면 엄마가 옆에 없는걸 텐데, 괜찮을까.”
“안 괜찮을 건 뭔데?”
“엄마가 없으면 비교될 수도 있잖아, 다른 애들이랑. 부러울 수도 있고.”


허! 막시민 리프크네는 눈알을 굴렸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하나. 약간의 뜸을 들이다 이야기를 시작했다.


“잘 들어. 우선… 맨 처음으로 짚고 싶은 건, 사람은 제각기마다의 결핍이 있다는 거다. 결핍 없는 인간이 이 세상에 어딨어. 그리고 나에게 없는 것을 가진 누군가를 볼 때, 질투하는 건 당연한 거다. 전에 칼라이소에서 말했지? 질투는 모든 이의 천성이라고. 아이에게 모든 것을 온전히 갖추게 하고 싶은 마음은 어쩌면 부모 될 자로서 자연스레 드는 생각일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건 애초에 처음부터 불가능한 거였다.”


그때 칼라이소에서 했던 대화가 차르륵…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듯했다. 그 시절 그런 대화를 나눴던 우리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구나.


“알잖아. 그렇게 머리가 잘 돌아가고, 얼굴도 반반한데 재력까지 있는 조군 자식이… 네가 보기엔 제 삶에 만족을 한 것처럼 보이더냐? 걔는 언제나 내가 되고 싶다고 그랬다. 이 마을에서 어릴 적부터 나무껍질과 풀뿌리를 뜯어먹던 거렁뱅이 자식을 동경했다고. 너는 조슈아를 질투했고, 조슈아는 나를 질투했다.”
“…그러면 너는?”
“…알 거 없어.”


막시민 리프크네는 고개를 돌렸다.


“너도 알잖아. 그 녀석 돈 무지하게 많은 거. 적어도 나나 너처럼… 어릴 때부터 오늘 끼니는 뭘로 때워야 할지 고생하는 꼴은 안 봐도 될 거다.”
“…그건 정말로 다행이라 생각해.”
“그리고 그 녀석 성격에 애한테 매몰차게 대하겠냐?”
“큭큭…. 그래, 조슈아는 다정하니까. 분명 좋은 아빠가 되어주겠지.”


막시민의 관점대로 생각해 보니 아까보단 훨씬 마음이 놓였다.


“세상에 나쁜 부모는 많아. 자식의 하는 꼴이 제 맘에 들지 않을 때 손을 휘두르는 부모는 이 세상에 천지지. 이미 배를 곯고 있는 자식들을 방치하면서도, 강아지 주워오듯 주위 갓난아기를 죄다 주워와서 나한테 떠넘기던 어른이 있었던 건 잊었냐? 곁에 없다는 걸로 과도한 죄책감 갖지 마라.”


넌 생각이 너무 많다. 그 말을 끝으로 막시민 리프크네는 입을 다물었다. …네가 그렇게 말해줘서 안심이야. 리체 아브릴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5.

이 주의 시간이 또 흘렀다. 리체와 일마는 마을 회관에 있었다. 일마 또래의 여자아이들 세 명과 함께.


“자, 봐. 이렇게 하면 깔끔하게 레이스를 달 수 있지?”


리체가 옷감 위로 능숙하게 바늘을 움직였다. 소녀들은 반짝이는 눈으로 그 모습을 보고 천천히 따라 했다. 그쪽이 아니라 이쪽에 바늘을 찔러봐. 리체가 다른 아이들을 세심히 지도해 줄 때마다 그 모습을 보던 일마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일마 리프크네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봤지? 이게 우리 언니 능력이야. 너네 언니 아니고 우리 언니야. 이미 일마의 마음속에서 리체 아브릴은 거의 가족과 다름없었다. 언니, 나는 어쩌면 언니 같은 사람을 일평생 기다렸을 지도 몰라. …우리 그냥 이대로 계속 살면 안 되나?


“리체 언니는 어디서 바느질을 배웠어요?”
“나?”


소녀의 질문에 리체 아브릴은 두 눈을 깜박거렸다. 그리곤 곰곰이 생각했다. 어렸을 적부터 바느질을 아예 못하는 건 아니었다. 지금처럼 능숙하게는 아니더라도, 엄마한테 배워 해진 옷을 기우는 작업은 했으니까. 그렇지만 옷을 만드는 기술, 그러니까 재봉은 의상실에 들어가서부터 배웠던 것 같다. 막내였던 리체 아브릴을 붙잡고 여러 언니들이 가르쳤던 것 같다. …리체는 알고 있었다. 언니들이 가끔 리체의 속을 뒤집긴 해도 상냥한 사람들이었다는 걸. 한번 리체가 불같이 화내고 나면 언니들은 리체의 책상 위에 과자나 초콜렛 같은 것들을 올려두었다는 걸. 물론 리체를 아니꼽게 보는 마틸다 언니 같은 사람은 예외였지만.


“나도… 언니들에게.”
“리체 언니의 언니들?”
“응. 의상실에서 일을 할 때, 언니들이 알려줬거든. 그러니까 너네도 이걸 잘 기억해뒀다가, 다른 동생들에게도 알려주도록 해.”


의상실 언니들이 베푼 마음은 리체 아브릴에게 머물렀다가, 일마와 소녀들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이 소녀들의 동생들에게 이어지겠지.


이것이 여자아이들의 내리사랑일까, 일마 리프크네는 그런 생각을 했다.




허름한 마차가 한참을 달려 코츠볼트 마을에 도착했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화려한 옷 대신 어두운 망토를 걸치고 있는 남자가 내렸다. 망토의 후드를 깊게 눌러써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조슈아 폰 아르님은 한 달을 내리 달려 코츠볼트 마을에 기어코 도착했다.


조슈아는 그 무엇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열 살짜리 어린아이이던 시절, 이곳을 누빈 기억은 당연하게도 머릿속에 여전하게 남아있었다. 그 기억과 지금을 대조해 볼 때, 별반 달라진 게 없다는 생각을 했다. 조슈아는 그 시절이 마치 어제였던 것처럼 길 하나도 헤매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걷다 보니 나오는 건 게딱지마냥 작은 집. …아, 보수 공사를 자체적으로 했는지, 예전보다는 그래도 ‘집’같은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집의 대문에서 나오는 사람, 막시민 리프크네. 막시민과 조슈아의 시선이 마주쳤다.


“…막군.”


몇 달 만에 보는 친구였으나, 조슈아는 웃을 수 없었다. 막시민도 웃지 않았다.


“…네가 수도에서 묵고 있는 숙소 쪽으로 연락을 넣어봤는데, 답이 안 와서. 이곳에 있을 것 같아서 찾아왔어.”
“……일단 들어와라.”


막시민은 제 오른손으로 대문을 좀 더 활짝 열었다. 실례할게, 조슈아는 그리 말하며 집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후드를 눌러쓰고 있어도 알고 있었다. 조슈아의 표정은 누구를 찾는 듯 초조한 얼굴이라는걸. 막시민은 마음속으로 ‘제기랄….’ 하고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그래, 데모닉 조슈아를 두고 수 싸움이라니 가당치도 않지. 오히려 이만큼이나 시간을 번 게 다행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조슈아와 리체, 둘 중에 한 명이 양보를 해야 할 때가 왔다.


집안 평상에 걸터앉은 조슈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본론부터 말할게. 리체는 여기에 있지?”
“……그래.”


이미 예상했다는 듯, 조슈아의 낯빛은 바뀌지 않았다.


“리체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할 수 있을까.”
“그건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쯧…, 막시민 리프크네는 혀를 찼다. 그게 자신에 대한 모욕이 아니라는 것을 조슈아 역시 알고 있었다. 그저 막군이 곤란해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여기에 잠자코 있어. 일단 의향이 있는지 물어볼 테니까.”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막시민은 대문 밖으로 나가기 전에 뒤를 돌아 물음을 던졌다.


“만약에 말이다, 쟤가 너랑 대화하기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데?”
“…그렇다면, 깔끔히 물러갈게.”




마을회관의 문이 열리고, 막시민이 들어왔다. 리체와 일마, 그리고 소녀들은 갑자기 들어온 막시민을 보고 의아한 듯한 얼굴을 했다. 그야, 방금까지만 해도 걸스나잇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뭐야, 막시민. 여기는 왜 왔어?”
“…야.”


막시민 리프크네는 곤란한 듯 머리를 쓸어넘겼다. …아, 이런 말을 전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니. 입에 아교라도 붙인 듯 잘 떨어지지 않았다.


“…뭐야, 왜 사람을 앞에 두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데?”
“…그 녀석, 너 찾으러 왔다.”


리체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해, 일부러 다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리체가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경악하는 표정을 짓고 있을까, 혹은 두려워하고 있을까. 아니면 눈물을 뚝뚝 흘리는 건 아닐까.


“…그래.”


그제야 막시민은 리체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리체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네가 대화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거부하면 그 즉시 꺼지겠단다.”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더 어떤 걸 할 수 있겠어. 됐어, 난. 이쯤에서 만족해.”


리체 아브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들아, 미안한데 오늘은 먼저 가볼게. 일마도 일어나렴. 리체는 그리 말하곤 막시민보다 먼저 문을 열고 나갔다.


그건 꽤나… ‘어른’같은 표정이었다. 막시민은 리체를 뒤따라갔다.


“…괜찮냐?”
“그럴 리가. 그냥, 진실을 알게 되는 날이 몇 개월 더 당겨지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려고.”




후우. 조슈아 폰 아르님은 숨을 가만히 고르고 있었다. 리체가 여기에 있다. 그 생각에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기도, 아니 끓어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리체를 찾아 이곳으로 오는 한 달은 조슈아에게 꽤나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왜 갑자기 블루 코럴 섬을 떠난건지 그 의중을 알 수 없어 두려웠고, 혹여나 사고라도 당했을까 봐 무서웠다. 샐러리맨 같은 작자가 또다시 리체의 목숨을 위협했던 걸까, 그랬다면 내게 왜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을까, 혹시 그런 게 다 아니고… 그냥 내가 싫어서 도망친 걸까, 싫다면 왜 싫은 걸까. 그리 좋아하던 재봉을 그만둘 정도로 내가 싫었을까, 아니면 내가 블루 코럴 섬에 적잖이 방문해 그에 대한 뒷소문이 돈 걸까.


멀리서 타박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조슈아는 무의식적으로 평상에서 일어났다. 끼익, 대문의 중첩부에서 쇳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 앞으로 3초. 대문이 열리고 나면 알 수 있을 거야. …두려웠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막시민일까봐. 리체가 너와의 대화를 거부했다고, 그런 대답을 들려줄까 봐.


“…조슈아.”


문이 열리고 들어온 건, 몇 달 만에 다시 만나는… 그리웠던 연인이다. …아. 천재 중의 천재라 불리는, 데모닉 조슈아는 입 밖으로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저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을 뚝뚝 흘릴 뿐이었다. 모든 퍼즐이 짜맞혀졌다. 리체 아브릴이 의상실을 그만두어야 하는 이유, 블루 코럴 섬을 떠나야 했던 이유, 그리고 자신이 아닌 막시민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던 이유. 사랑하는 연인, 리체 아브릴은 조슈아 폰 아르님의 아이를 임신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르님 공작부인이 되길 거부하고 있다. 리체는 조슈아에게 다가가 두 손으로 그의 볼을 감쌌다. 조슈아의 기다란 속눈썹이 깜박일 때마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울지 마.”
“…미안해. 혼자 고민하게 둬서….”


어떤 말을 먼저 해야 할까, 뇌 내에서 연산을 수십수백 번을 돌렸으나 결과는 똑같았다. 일단 사과부터 하자. 내가… 리체를 상처 입혔어. 몇 개월 내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감히 가늠할 수도 없었다. 제 선조인 이카본 폰 아르님과 같은 과오는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그 다짐을 지키지 못했다. 눈물 때문에 흐린 시야 사이로 리체의 얼굴을 얼핏 보니, 그녀 또한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왜 이렇게 핼쑥해졌어…, 바보.”


그리 말하며 리체 역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러면서도 옅은 미소를 띠는 리체 아브릴은 끝내 잔인한 말을 뱉어버린다.


“조슈아 폰 아르님. 난 너랑 결혼 못 해.”
“…응.”
“왜냐하면 나는 널 질투하거든.”
“…응.”


엔젤릭 조슈아는 ‘응’이라는 답 밖에 할 수 없었다. 그게 이 관계에서, 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말의 최선이었다.


“…우리 예전에 이별할 때 말이야, 네가 나한테 준 드레스 기억나니?”


리체는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네가 그랬지, 이 드레스를 무릎으로 줄이라고. 곧 그게 유행할 거라고. 그리고 몇 달 뒤에 진짜 그게 유행이 됐잖아. …난, 그때 기분이 조금 상했어. 꽤나 열받았을 지도 몰라. 네가 아닌 나한테. 의상을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조슈아 폰 아르님이 예측한 유행을… 재봉사 리체 아브릴은 알아채지도 못한 거잖아. 그게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인지 너는 모를 거야.”


… 드디어 말해버렸다.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감추고 있었던 진심을. 막시민 앞에서도 터놓지 못했던 말을. 리체는 이 말을 하며 어쩐지 해방감을 느꼈다.


“…응.”
“리체 아브릴은, 아르님 가문의 공작부인이 될 수 없어. 의상을 만들 거야. 지금보다 더 많이. 하이아칸에 돌아가서, 의상실을 세우고… 미유 로제보다 유명해질 거야. 그리고 내가 직접 고안한 디자인으로… 전 대륙의 유행을 선도할 거야. 너를 이길 거야. 그렇게 하고 싶어. 이해해 줄래?”


조슈아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이게 리체 아브릴이었다. 제가 사랑하는 여자는 이런 여자였다. 조슈아 폰 아르님은… 천천히 몸을 굽혀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는다. 다른 쪽 무릎은 세우고, 상체를 숙여 리체 아브릴의 손등에 입을 맞춘다.


“그게 내 아가씨의 뜻이라면 기꺼이.”




“할 말 다 했으면 들어가도 되냐?”


막시민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대문 밖에서 들려왔다. 끼익,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리며 막시민과 일마가 들어왔다. 일마는 조슈아를 흘겨봤다.


“조슈아 오빠, 그렇게 안 봤는데….”
“…안녕, 일마. 오랜만이다. 많이 컸네.”


자리에서 일어난 조슈아가 멋쩍은 듯 일마에게 인사했다. 흥! 일마는 제 오빠처럼 미간을 찌푸리곤, 리체 아브릴 등 뒷쪽으로 가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누가 언니를 고생시켰나 했더니, 조슈아 오빠였잖아? 어릴 적 희미하게 쌓인 정이 와장창 무너지는 듯했다. 그런 일마의 마음을 다 알겠다는 듯, 조슈아는 슬며시 웃었다.


“커플 사이에 끼어서 나만 고생이네, 어휴.”
“막군….”


막시민 리프크네가 투덜거리곤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막시민이나, 조슈아나, 리체나… 셋 다 표정은 아까보다 한결 나았다. 셋 다 마음의 짐을 덜어서 그런 것 같았다.


“리체와 함께 있어줘서 고마워.”
“쟤가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지, 너까지 고마워하는 건 뭐… 염장질이라도 하는 거냐?”
“야, 내가 평소에 고맙다고 말 많이 했잖니!”


큭큭…. 조슈아와 리체는 웃음을 터뜨렸고, 막시민은 쯧, 하고 혀를 찼다.


“언제까지 거기 마당에서 서 있을 거냐? 나머지는 들어와서 얘기해.”


막시민이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조슈아와 리체, 일마도 뒤따랐다.

“리체의 의견을 존중해. 하지만 출산 때까지라도 아르님 가문에 머물러 주면 좋겠어. 이건 양보할 수 없어.”


2차로 또 한바탕 눈물을 터뜨린 조슈아는 조금 부은 눈을 하고 그리 말했다.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래, 그럴게.”
“언니….”


일마가 속상한 얼굴로 리체를 바라봤다. 리체 언니랑 헤어지기 싫어! 어떻게 만났는데. 일마 리프크네는 조금 많이 아쉬웠다. 소녀들은 언니라는 존재를 만나 제 삶의 삼 년 후, 오 년 후를 가늠하곤 한다. 그리고 언니의 자리에 자신을 대입해 보며 무지의 두려움을 해소하곤 한다. 일마 리프크네는 평생 그런 대상이 없어, 한 치 앞도 모른 채 하루하루를 나아가기만 했다. 일마에게 리체 아브릴은 처음으로 만난 이정표이자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수정구슬이었다.


“조슈아. 일마도 데려가도 돼?”
“물론. 막군도 오지 않을래?”
“날 갑자기 왜 데려가냐?”
“비취반지 성은 넓으니까, 리체가 의지할 수 있는 아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좋잖아. 그리고 너 호화롭게 생활하는 거 좋아하지 않아?”


조슈아는 슬며시 웃었다. 막시민은 쳇…, 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조슈아와 리체, 막시민과 일마의 비취반지성 행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일마가 맡던 ‘가장 대리’의 역할은 자연스레 남동생 루돌프 리프크네에게 이관되었다. 떠나는 네 사람을 배웅하기 위해 리프크네 남매들이 마차 앞에 쪼르르 모였다. 루돌프 리프크네는 마차에 타려고 하는 일마 리프크네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일마 리프크네는 뒤를 돌아 루돌프를 흘끗 보고는 엄지손가락을 따봉 모양으로 치켜세웠다. 루돌프, 너도 할 수 있어. 나도 거쳐온 길인데 너는 못 하겠니? 동생들 잘 챙겨. 루돌프는 일마의 응원에 마지못해 ‘응….’하고 대답했다.


막시민은 진작에 마차 안에 들어가 있었다. 조슈아는 리체의 마차 탑승을 에스코트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리체, 있잖아. 이건 만약의 얘기인데.”
“응?”
“내가 아노마라드의 아르님 공작으로 존재하고, 네가 하이아칸의 디자이너 클라리체 데 아브릴로 존재해 각자의 길을 나아가면서도…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미래가 있다면, 그렇다면 그때는 너와 함께할 수 있을까?”


리체는 골똘히 생각해 봤다. 그런 미래가 존재하긴 하는 걸까. 그런 미래가 오기까지 수십 년은 걸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평생이 걸려도 어려울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상상을 해볼 수는 있잖아? 그런 미래….


“그래. 그게 가능하다면.”


리체 아브릴은 슬며시 웃었다.

6.

이른 아침에 비취반지성 후문으로 낡은 마차가 들어왔다고 한다. 아르님 가문의 사용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아마 두 달 전에 떠난 조슈아 소공작님이 돌아오신 거겠지. 소공작님을 맞이하는 연회가 또 열리겠네, 당분간 바빠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집사장으로부터 전해 받은 소식은 이러했다.


아르님 가문 구조조정.


아르님 가문에서 15년 이상 일한 사용인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용인들에게 퇴직령이 내려졌다. 퇴직금은 평소보다 3배 높은 금액으로 제공되었으며, 다른 귀족 가문에 갈 수 있도록 추천장도 받았다. 또, 1년 후에 다시 돌아온다면 언제든지 채용을 약속하겠다는 약조의 문서까지. 문서에는 공작인 프란츠 폰 아르님의 서명까지 기재되었다. 아노마라드 전체의 역사를 따져봐도 이렇게 사용인을 대규모로 갑작스레 내보내는 가문은 없었다.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아르님 가문의 사용인 중 남은 사람은 전체의 1/5도 되지 않는 듯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비취반지성을 나오게 되었다. 짐 가방을 잔뜩 들고나온 한 사용인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한 시간 전의 이야기다.


프란츠 폰 아르님은 아르님 가문의 공작으로서 수십 년을 살아오며 별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그렇기에 왠만한 일에는 눈 깜박하지 않는 그였다. 그랬던 프란츠는, 두 달 만에 갑자기 집에 돌아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하는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졸도할 뻔했다. 그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아내, 엘자 폰 아르님은 실제로 휘청거렸다.


“놀라실까 봐 일단 일행들은 응접실에 가 있으라고 했어요, 어머니.”
“나는 네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데려온대서 그 아가씨랑 같이 오는 줄만 알았지. 갑자기 손주라니….”


프란츠 폰 아르님도 엘자와 같은 생각이었다. 두 달 전, 아들자식이 결혼 허락을 받고 싶다기에 이제 때가 되었구나 하는 마음으로 승낙했다. 그런데 이런 대형 사고를 쳤다니. 아직 그 아가씨의 얼굴을 보지 못 한 채로 이 소식을 미리 언질 받은 건 다행이었다. 안 그랬다면 제 아내는 충격으로 실신했을 지도 몰랐다.


“…그리고, 놀라지 마세요.”


조슈아는 리체 아브릴의 뜻을 전했다. 아이는 낳아 아르님 가문에 맡기고, 하이아칸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돌아가서 디자이너 리체 아브릴로서 살아갈 것이라는 굳은 의지를 전했다. 허어…. 프란츠 폰 아르님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아노마라드의 아르님 가문 공작으로서, 시대 흐름에 뒤처져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나름대로 열려있는 사고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에게도 너무나 급진적인 이야기였다. 그럴 수밖에. 평생을 애처가로 살아온 프란츠는 단란한 가정을 꾸미는 데 제 오랜 시간을 노력한 자였다. 삶의 목표와 사랑하는 가정, 그 두 가지가 있다면 단 한 번도 저울질해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둘 다 가지면 되었으니까.


“…그러라고 하렴.”


긴 침묵 끝에,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아내 엘자였다. 아내는 자신의 손을 매만지며 이리 말했다. 나도 엘자 드 루치아노였던 시절이 있었는데 말이지. 프란츠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아들 조슈아는 그 말을 듣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졸려 죽을 것 같아.”


리체가 작게 하품을 하자 조슈아는 킥킥 웃어 보였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걸 거야.”
“그런가?”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하곤 침대에 앉았다.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방금 전에 조슈아네 부모님과 오랜만에 대면하고 같이 점심 식사를 했으니까. 긴장을 좀 했는데, 막시민과 일마가 옆에 있어줘서 다행이었다. 식사를 마치곤 당분간 지낼 방을 배정받았다. 조슈아의 옆방으로, 널찍하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는 방이다. 조슈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리체, 사실 여기는 원래부터 널 위해 꾸며진 거였어.


“공작부인… 나 보자마자 울어버리셨지.”


엘자 폰 아르님은 리체 아브릴의 두 손을 맞잡으며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하고 눈물을 흘렸다. 프란츠 폰 아르님은 담담하게 ‘고맙다’라는 말을 건넬 뿐이었지만, 조슈아는 제 아버지가 리체에게 미안한 마음을 애써 숨기려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숨 자 둬.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잖아.”


조슈아는 리체를 조심스레 침대에 뉘여주곤 이불을 덮어줬다. 그리곤 리체의 머리맡 옆에 걸터앉았다.


“시간은 많으니까, 나머지는 천천히 생각하자.”
“그래야지. 에휴, 누구 때문에 하루 종일 마음 졸이던 날도 이젠 안녕이네.”
“…그건 내가 미안해.”
“킥킥…. 내가 자초한 거잖아.”


리체는 조슈아 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기에, 조슈아는 기쁜 얼굴로 상체를 숙였다. 리체는 조슈아의 볼에 입을 맞췄다.


“내가 아버지가 된다니 믿기지가 않아.”
“나인들 믿기겠니? 나도 이 녀석이랑은 아직 안 친하거든?”


리체의 그런 말을 다 듣고 있다는 듯, 뱃속의 아이가 안에서 발길질했다. 윽…, 리체는 고통이 섞인 신음을 흘렸고, 조슈아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리체의 낯을 살폈다. 뭐든지 척척 알고 있는 데모닉이 본인의 무지함을 경험하는,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순간이었다.


“우씨… 야, 데모닉도 별거 없네! 그런 얼빠진 표정을 보고 있다니 열받고 웃기다.”
“…내가 빨리 공부해 볼게. 나 뭐든 잘 배우는 거 알지?”
“흥.”
“나 노력할 거야.”
“말이나 못 하면.”


리체는 자신이 아픈 만큼 조슈아의 등을 퍽퍽 때렸다. 조슈아 폰 아르님은 얻어맞으면서도 웃음을 흘렸고, 툴툴거리는 리체 아브릴의 표정은 밝았다.




“어딜 그리 돌아다녀?”


2주의 시간이 더 흘렀다. 코츠볼트에서 보낸 시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1월 초입이 되었다. 리체는 천으로 만든 무언가를 막시민에게 보이며 답한다.


“공작부인께 가려고. 손목 보호대를 만들었거든. 그림을 좋아하시잖아.”
“몸은 좀 괜찮고?”
“어휴, 말도 마.”


리체 아브릴은 한숨을 쉬었다. 이 보호대를 만드는 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가!


“평소 같았으면 한 시간 안에 세 개나 만들었을걸, 세 시간은 붙잡았어. 눈도 흐릿하고, 집중도 잘 안되고. 손목 힘도 예전 같지 않아서 막 떨리던데.”


리체는 제 손을 살펴보았다. 아까 전에는 바늘에 두어 번이나 찔려 피가 송골송골 맺히길래 밴드까지 붙여놔야 할 판이었다. 프로 재봉사 리체 아브릴이 아마추어나 할 법한 실수를 하다니.


“앞으론 당분간 바늘은 못 만질지도 몰라.”


덤덤하게 말하는 리체를 보고… 막시민은 미간을 찌푸렸다.


“안 슬프냐?”
“슬프지.”
“그런데도 무지하게 태연해 보이네.”
“어쩔 수 없잖아. 내가 이 아이를 선택했으니까.”


사실 리체가 태연해 보이는 건 겉치레일 뿐이었다. 리체 아브릴은 보호대를 만드는 데 세 시간이나 썼다고 했지만, 그중 삼심 분에서 사십 분 정도는 이 상황에 눈물 흘리며 보냈을 시간이리라. 요즘따라 왜 감정이 오락가락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너, 그러지 마라.”
“뭘?”
“체념하는 거 말야. 내가 그랬지, 넌 생각이 너무 많아. 그걸 네 안에 두고 쌓아두기만 하지. 지금도 그러고 있잖아.”
“허! 생각이 많은 건 네 얘기 아냐? 내가 뭘 많다고 그래?”


가뜩이나 짜증 나 죽겠는데 막시민마저 제 속을 긁고 있다.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짜증 난 걸지도 모른다. 애써 덮어둔 마음을 제멋대로 헤집는 것 같아서. 그걸 헤집은 다음 탈탈 털어서 적나라하게 전시하는 듯한 꼴이라서.


“내가 얼마나 괴로운지, 말하면 네가 아니? 해결해 줄 순 있니?”
“해결해 줄 수는 없지.”


막시민은 성큼, 리체 앞으로 한 발자국 다가왔다. 리체는 한두 방울씩 뺨에 떨어뜨린 눈물을 옷소매로 쓱쓱 닦았다.


“근데 들어줄 순 있잖아.”


그 말에 눈물이 더 나, 참으려 해도 참아지지 않았다. 리체 아브릴은 엉엉 울었다. 마치 그거 같았다. 이미 의상실 주문은 쌓일 대로 쌓여있는데 먼저 붙잡고 있는 작업이 끝나지 않아서 뒤의 작업이 계속 미뤄지기만 하는 것 같은 느낌. 고객이 빨리 오케이 사인을 보내줘야 다음 작업을 시작할 텐데. 그런데 제일 열받는 지점은… 앞의 작업이든, 뒤의 작업이든 전부 제가 스스로 선택했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끊임없는 수정의 굴레 속에서 빠져 있는 상황에서도, 그걸 자초한 게 자신이라는 거. 앞의 작업이든 뒤의 작업이든 우선순위를 따질 수 없을 만큼 중요해서, 접수된 순번대로 처리하려 하는데 앞의 작업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마음속에서 불이 날 것 같았다.


“에휴…. 네 자식이 세상 밖으로 나오면, 너처럼 속 곪은 채로 입 다물고 있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줘야겠다.”
“…너 지금 악담하는 거지? 그러다가 네 성질머리를 얘가 배워버리면 어떡해?”
“흠, 내가 뭘 안 건드려도 성깔 있게 살 것 같은데. 이미 엄마한테 물려받았잖냐? 킥킥….”
“이게 진짜!”


울음을 그친 리체 아브릴은 바락바락 화를 냈다. 저 녀석은 우는 모습보단 화를 펑펑 내는 모습이 더 잘 어울린다고, 막시민 리프크네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생각했다.

“어머, 아가. 울었구나.”


엘자 폰 아르님은 리체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상태를 알아채곤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언젠가부터 엘자는 리체 아브릴을 ‘아가’라고 부르곤 했다. 쑥스럽고 당황스러웠으나 자주 불리다 보니 적응한 리체였다.


“늦어서 죄송해요.”
“아니, 홀몸도 아닌데 여기까지 걸음해준 것만으로도 고맙단다.”


아르님 공작부인의 방에는 이젤이 두 개 세워져 있었다. 하나는 엘자의 몫, 이미 그림을 반쯤 그려둔 캔버스가 걸려 있었고 다른 하나의 캔버스는 텅 비어 있었다. 그건 리체의 몫이었다. 세 아이가 여행을 다니던 시절, 리체는 커다란 종이를 펼쳐 놓고 종이의 왼쪽 위부터 오른쪽 아래까지 섬의 지도 전체를 한 번에 그려냈단다. 그런 모험담에 흥미를 느낀 엘자는, 저번 주에 리체를 방에 초대해 함께 그림 그리는 시간을 가졌다. 그 시간이 퍽 즐거웠기에 오늘도 리체를 초대하게 된 것이었다.


“이리 온. 많이 힘들다는 걸 안단다.”
“…요즘은 별것도 아닌 거에도 왜 이렇게 눈물이 자주 나는 지 모르겠어요.”


엘자는 리체에게 조심스레 두 팔을 두르곤, 등을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그럴 수 있어, 그럴 때지. 리체 아브릴은 또 눈물을 왈칵 쏟았다. 오늘만 해도 세 번이나 울었다. 아까 막시민 앞에서 울어버리고 나서 눈물샘은 텅 비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눈물이 강물마냥 계속 쏟아지는 것 같았다. 이게 진짜 강물이었으면 바가지에 퍼서 어디다가 팔아버렸을 텐데, 돈도 안 되고 체력만 쭉쭉 빠졌다. 열받게….


엘자 폰 아르님은 리체가 안타까웠다. 너무나도 작고 어린 아가씨다. 죽어버린 제 첫아이, 이브노아가 아이를 가졌을 때와 비슷한 나이였다. 그런 아가씨가 대륙의 정 반대로 와서, 타 지역에서 고생하고 있었다. 아노마라드에서 태어난 소공녀 이브노아는 하이아칸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 시절의 이브노아 곁에는 엘자 폰 아르님이 함께 있어주지 못했다. 그리고… 하이아칸에서 태어난 리체 아브릴은 지금 아노마라드에 와 있다. 그런 리체 옆에는 친모가 자리하지 않고 있다. 엘자는 리체가 이브노아와 겹쳐 보여 마음이 더욱 쓰였다. 그래서 그런가, 리체만 보면 제가 이브노아에게 해주고 싶은 것들을 하게 되었다. 해주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것을.


“…이거, 드리고 싶었어요.”


울음을 그친 리체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엘자에게 건넨다. 아까 만든 손목 보호대였다. 어머나. 엘자는 작게 놀라곤 눈물을 글썽인다.


“직접 만들어 봤어요.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시잖아요.”


아가, 기쁘구나…. 엘자 폰 아르님은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아름다운 꽃과 화려한 보석, 값비싼 드레스… 엘자 폰 아르님은 그런 것들을 평생 발에 챌 만큼 받아보았다. 단 한 점의 물질적 부족함 없이 산 인생이었다. 그런 엘자였기에 웬만한 선물 세례에는 덤덤했으나, 이 아이가 제게 건넨 것은 감히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것이었다. 귀하고 소중했다.


“내 소중히 쓰마. 고맙다, 정말로….”
“팍팍 쓰세요, 다음에도 또 만들어 드리면 되니까요.”


리체 아브릴은 배시시 웃었다. 엘자의 눈에는 그런 리체가 참 어여뻤다. …다음이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소녀 시절에는 세밀화 그리는 게 그렇게도 좋았지.”


엘자는 제가 그리다 만 캔버스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손끝에 잉크가 묻잖니.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데, 그림을 손에서 놓을 순 없어서 항상 장갑으로 가리곤 했단다. 푹푹 찌는 한 여름에도 장갑을 벗지 않았어. 캔버스 앞에만 앉으면 그렇게도 좋았지. 공작부인이 되고선 이전처럼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단다. 잉크를 덕지덕지 묻히고 캔버스 앞에서 몇 시간이고 앉아 있는게… 고상한 취미라곤 여겨지지 않잖니. 공작부인이 그런 취미를 가져선 안 되니까. 그게 참 마음이 아팠지.


리체 아브릴은 묵묵히 엘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자아이들은, 소녀들은, 여자는… 저보다 먼저 인생을 살아간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이정표를 세운다.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어떤 길을 가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표식을 세워둔다. 일마 리프크네는 리체 아브릴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리체 아브릴은 엘자 폰 아르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너의 선택을 전해 듣고… 프란츠는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단다.”
“아무래도 그러셨겠죠?”
“그렇지만 나는 듣자마자 이해가 되더구나.”
“…네?”


리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자 폰 아르님은 슬며시 웃음 지었다. 그 웃음 속에는 씁쓸함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엘자는 이런 생각도 했다. 이 아이를 만난 게 지금이 아니라 수십 년 전이었다면. 그렇다면…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던 소녀 ‘엘자 드 루치아노’의 미래는 달라졌을까.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내가 아르님 공작부인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화가가 되었을 지도 모르지.”

…그런 너를 지지한다, 아가. 그렇게 말하는 공작부인 앞에서 리체는 무슨 표정을 해야 할지, 답을 찾지 못했다.




조슈아 폰 아르님은 펜촉에 잉크를 묻히곤 막힘없이 선을 그어나간다. 아르님 소공작의 생활 패턴은 요즘 들어 아주 단순해졌다. 아침과 밤에는 장밋빛 아가씨의 곁에 있었고, 점심과 새벽에는 서재나 도서관에 박혀 있었다. 보아하니 오늘은 도서관에서 새벽을 지샐 모양이었다. 수 십만 권의 책이 모여 있는 아르님 가문 도서관은 아노마라드 왕국 도서관과 규모가 엇비슷했다. 네냐플에 비할 바는 못 되었으나 옛 고서부터 최신 이론이 담긴 학술지까지 다양한 분야의 도서가 가득했다. 선조인 이카본 때부터 존재했던 이곳은, 많은 데모닉들을 품은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데모닉이 태어나 이곳에 머무르다 스러지고, 그다음 데모닉이 또 태어나 이곳에 머무르고 스러지고…, 그런 공간이었다.


이 도서관의 오른쪽 구석에는 조슈아만을 위한 책상이 따로 놓여 있었다. 여덟 명은 함께 써도 널찍할 듯한 이 책상에는, 마치 책으로 장벽을 쌓듯 가장자리에 각종 도서들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책 장벽의 중앙에는 커다란 종이가 펼쳐져 있었다. 조슈아 폰 아르님은 제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엇 하나도 소홀히 둘 수 없을 만큼 중요했으나, 어차피 모든 조건이 갖추어지려면 우선 빠르게 해낼 수 있는 것부터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작하게 된 첫 번째 과제, 그게 지금 자신이 몰두하고 있는 것이었다.


“…조슈아 오빠?”


끼익, 하고 문이 열리더니 겨울용 숄을 두른 일마 리프크네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 새벽에 도서관 불빛이 문틈 밖까지 새어 나오길래 와봤더니 오빠였네. 일마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그리 말하곤 책상 쪽으로 타박타박 걸어왔다.


“…이게 뭐야?”


일마 리프크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뭐지? 제아무리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일마 리프크네였으나, 뭔가를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교육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이름이 그 뭐였더라, 네냐플? 막시민 오빠가 다녔다던 그 아카데미의 학생들을 잔뜩 데려와도 이걸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것 같았다. 각종 숫자와 수식과 이상한 그림들이 암호문 같기도, 지도 같기도 했다.


조슈아는 한번 집중에 빠지면 누가 곁에 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칼라이소에서 잔뜩 곡을 써냈던 날처럼, 그때처럼 몰두하고 있었다. 그래야 했다. 문제는 몸이 버티지 못해, 흘러버린 코피가 턱을 타고 뚝뚝 흘러내려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건데. 일마가 깜짝 놀라 조슈아의 어깨를 마구잡이로 흔들자, 조슈아는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


“…아, 일마.”
“집중을 해도 적당히 해야지! 정신 좀 차리고 살아!”


잔소리를 잔뜩 늘어놓는 일마 리프크네를 보고, 조슈아는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재킷 안 주머니 속 손수건을 꺼내 코에 대곤, ‘이제 괜찮으니 걱정 마.’정도로 대답했다. 그런 대답이 성에 차지 않은 듯, 미간을 찌푸리는 일마는 꽤나 막군과 닮아서 웃음이 좀 나오기도 했다.


“참나. 도서관에 있길래 리체 언니를 위한 태교 책이라도 읽는 줄 알았는데.”
“그건 리체가 데리고 온 날에 다 읽었지. 아까도 자장가 불러주고 왔어.”
“우웩….”


일마는 토할 것 같은 시늉을 했다. 그런 점까지 막시민과 똑 닮았다.


“…그래서 이건 뭔데?”
“궁금해? 설명해 줄까?”
“아니다, 됐어…. 어차피 이해도 못 하겠지.”


조슈아는 작게 큭큭거렸다. 이걸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아마 작은할아버지인 히스클리프와 네냐플 교수님들 정도일 것이다. 그러니 이론이 완성되면 이를 아주 쉽게 풀어 설명하는 글도 준비해야 했다. 이건 데모닉이 아닌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제아무리 조슈아 폰 아르님이어도 혼자서 만들 수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항상 리체 옆에 있어줘서 고맙게 생각해.”
“흥…. 그런 말 안 해도 언니 껌딱지로 있을 거거든? 오빠만 없었어도 언니랑 둘이서 붙어 있을 수 있었는데.”


일마 리프크네는 입을 삐쭉거렸다. 조슈아 폰 아르님은 문득 궁금해졌다. 왜일까, 리체가 네게 어떤 존재길래 그리 맹목적으로 좆을 수 있는 걸까.


“리체의 어디가 좋아?”


조슈아는 빙긋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보통의 상황이었다면 리체의 연인인 제가 받았어야 하는 질문을 오히려 남에게 던지고 있었다. 일마 리프크네는 그 질문을 듣고, 잠시 눈을 굴리다가 웃었다. …오빠, 여자아이들은 언니를 갈망하곤 해. 왜인지 알아? 그리 운을 뗀 일마 리프크네는 이정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두 번째 과제의 단서가 되었다.

7.

겨울이 시작되었다. 크리스마스까지 약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시기였다. 리체 아브릴은 테라스에 나가 소복히 쌓이는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리체, 날이 추워.”


어느새 다가온 조슈아가 리체의 어깨에 모피 외투를 걸쳐 주었다.


“안 그래도 이젠 배가 너무 불러서 오래 걷지도 못하겠어. 정원 산책도 못 할 것 같고, 흥….”


리체 아브릴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임신 30주 차부터는 아이가 놀라운 속도로 성장한다고 하던데, 그게 정말이었다. 리체 아브릴의 배는 훌쩍 불렀고, 이전보다 기분이 더 예민해지곤 했다. 조슈아는 그런 리체의 곁을 지키며 케어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데모닉 조슈아는 비취반지성으로 돌아온 날부터 임신과 관련된 책은 모조리 읽었다. 아르님 가문 도서관에 있는 책은 전부 읽었으며, 그 밖에 유통되고 있는 다른 도서들도 죄다 사들여 읽었다.


임신이라는 소재는 연극 무대에도 흔히들 나오곤 한다. 주인공의 탄생을 알리기 위한 장면으로 쓰이거나, 혹은 막이 내리기 직전 등장인물들의 해피엔딩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이 두 사람은 이렇게 잘 먹고 잘 살았답니다, 그런 걸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 아, 또는 불행을 알리기 위한 장치로 쓰이기도 한다. 우아한 성품을 지닌 성녀가 아이를 낳고 사망했다는 그 정도의 소재로. 리체를 다시 만나기 전, 조슈아가 그간 임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 정도뿐이었다. 이브노아의 임신을 곁에서 보지도 못했으니까. 그냥 갑자기 아기가 땅에서 솟은 것처럼, 누나는 그렇게 갑작스레 아이를 데려왔으니까. 관객들은 임신이 숭고한 것이라고 찬양한다. 주인공을 낳고 죽은 어미 캐릭터를 보아도, ‘모성애는 아름다워’ 정도의 감상 그 이상을 내뱉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그 정도였다.


데모닉 조슈아는 그 어떤 문제든 막힘없이 푸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복잡한 수식을 보아도 쉽게 이해하고 마는 그였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리체의 임신은 결코 쉽게 볼 수 없었다. 그 이유라 함은… 첫째로 고통을 겪는 당사자가 조슈아 폰 아르님이 아니었고, 둘째로 지식이 부족했다. 데모닉 조슈아에게 지식의 부족이라니. 그러나 사실이었다. 조슈아는 경험이 부족할 때 지식을 채움으로써 메꿔보고자 했다. 그런데 수 백 권의 책을 읽어보면 무얼 할까, 리체가 매일같이 겪고 있는 부작용 중에는 책에 단 한 줄도 기재되지 않는 증상도 있었다. 그럼에도 연극에선 밥 먹듯 나오는 걸 생각하면…. 아니, 조슈아는 생각을 그만 갈무리했다. 리체 앞에서 생각에 푹 잠겨 있는 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아이 이름 말이야, 생각해둔 거 있어?”
“응?”


리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거 우리가 지어야 하는 거였어? 너네 가문에서 지어주실 줄 알았는데.”
“어제 아버지와 얘기 나눴어. 우리에게 전적으로 맡기시겠다던데?”
“…큰일 났다. 나 작명 센스 없단 말야.”


경악한 듯 입을 벌리는 리체를 보고 조슈아가 킥킥 웃었다.


“리체, 내가 누구야? 걸어 다니는 사전이잖아.”


조슈아는 리체의 볼에 짧게 입맞춤했다. 걱정 마, 리체. 같이 고민해 보자. 어떤 이름이든 예쁜 이름으로 고를 자신 있어. 그 작업은 내가 할 테니, 너는 의미를 부여해 주면 좋겠는데. 맡겨도 될까? 태어날 아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의미 말이야. 네 생각을 내게 들려주면 거기에 맞는 좋은 이름을 찾아볼게. 우리가 함께 이름을 고민하는 이 순간이… 나중에 아이에게 큰 힘이 될 거야.




“…라는 걸 부탁받았는데요!”
“어머나.”


엘자는 푸스스 웃었다. 프란츠도 참, 로맨틱하기도 하지. 리체의 말대로 아이의 이름은 가문의 어르신들이 지어주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아르님 가문의 그 관행도 프란츠의 대부터 사라지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엘자와 둘이서 상의한 이름으로 지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했다.


“그래서, 어떤 답을 들려줄 거니?”
“이제부터 고민해 봐야 해요.”
“생각해 본 적 없었니?”
“전 공작부인만큼 모성애가 있는 사람도 아니에요. 아시잖아요.”


리체는 작게 한숨지었다. 이대로 계속 이 녀석이랑 지내다 보면 그래도 모성애가 저절로 생길 줄 알았는데. 여전히 미지의 존재 그 자체였다.


리체 아브릴은 과거를 떠올려본다. 비취반지성에서 한참을 존재하던 소공작이 도플갱어인 카르디라는 걸 알았을 때도, 그를 품은 사람은 오직 엘자였다. 조슈아가 쓰러져 생사를 넘나들고 있을 때에, 엘자는 조슈아가 아닌 카르디의 곁을 지켰다. 그런 엘자를 보고 과거의 리체는 의아해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우리는 그간 저 사람을 없애야만 하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냐고. 그때의 대답이….


“이전에… 나는 어머니란다,라고 말씀하셨죠.”
“그랬지. 그때 네게 짐을 얹어준 것 같아서 미안했단다.”
“그런 건… 괜찮아요. 궁금한 건 이거예요, 전 그때 제가 어머니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것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여전히 이해가 어려운 모양이지?”
“네. …모성애가 뭔가요? 전… 아직도 잘 모르겠거든요.”


엘자 폰 아르님은 수십 년 전을 골똘히 생각해 본다. 약간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조슈아에게 누이가 있었다는 건, 너도 들어봤을 거라 생각한다. 이브노아, 그게 그 아이의 이름이란다. 이브는 참 어여뻤어. 웃음이 많은 그 아이에게… 뭐든 해주고 싶었어. 항상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고, 늘 곁에서 지키고 싶었지. 그 아이는 백치라고 남들이 뒤에서 수군거렸지만, 사실 처음부터 백치였던 건 아니었단다. 다섯 살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으니까… 그래서 갑자기 백치가 되어버려, 많이 놀랐지. 게다가 그 해에는 조슈아를 임신하고 있었단다.


딸아이가 갑자기 백치가 된다고 해서, 그 아이를 내칠 수 있겠니? 본질은 변하지 않아, 내가 사랑하는 아이라는 것 말이지. 모성애란 그런 거란다. 그 아이에게 뭐든 다 해주고 싶은 거, 그 아이의 결점이나 약점도 전부 사랑할 수 있는 거. 설령 내가 죽더라도… 이 아이만큼은 지키고 죽고 싶은 거. 나도 너와 같은 고민을 할 때가 있었단다, 아가. 이브노아의 백치를 알아챈 시기가 그랬어. 아무리 나라도 어떻게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니? 속으로 부정도 해보고, 많은 혼란을 거쳤지. 그렇지만 말이다, 그 아이가 여전히 내 딸이라는 건 변하지 않더구나. 그 아이의 결점을 마음속에서 받아들이기 시작하니까 그다음은 수월해졌어. 이브노아의 백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것마저 사랑하고 나니까, 그 다음 아이가 눈에 들어오더구나. 의사가 낳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했지만… 상관없었어. 내가 죽어도 좋으니, 지킬 수만 있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단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를 사람들은 ‘기적의 아이’라고 불렀지.


“아이가 생기면 갑자기 어머니가 되는 게 아니야. 나는 비로소 그 시기를 거쳐 어머니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모성애가 없는 것 같아 자책하지 말렴. 언젠가 너도 깨달을 수 있는 날이 오겠지. 그렇지 않아도 좋아. 이상하지 않단다, 아가. 엘자는 그리 말하곤 조심스레 리체의 등을 토닥인다. 리체 아브릴은 조금씩 흘러내린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내버려두며, 엄마에 대한 생각을 했다. …엄마, 엄마도 그랬어? 엄마 딸인 나는 여기서, 하이아칸에서 한참 먼 아노마라드에서 이러고 있어. 엄마는 모르지? 엄마 딸이 이만큼 고생하고 있다는 거. 이전에도 몰랐지?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나는 어릴 때부터 우리 식구 먹여 살리려고 아등바등했어. 엄마, 엄마는 그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어?

사각, 사각. 펜이 그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리체 아브릴은 흔들의자에 몸을 맡긴다. 엘자 폰 아르님은 이젤 앞에서 그림에 몰두하고 있었고, 리체는 그걸 옆에서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뱃속 아이 때문에 숨 쉬는 것이 벅차, 제 역시 이젤 앞에 앉아 있긴 무리였다.


엘자 폰 아르님은 오랜 시간 그림을 그렸고, 리체 아브릴은 오랜 시간 의상을 만들곤 했다. 둘은 작품을 만들어본 사람이고, 아이를 잉태하는 경험을 한… 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공작부인이라면… 이 사람이라면, 오랫동안 풀리지 않은 이 문제를 공유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저는… 오랫동안 이 아이를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응?”


리체 아브릴은 나지막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공작부인은 아시겠죠. 그림이든 의상이든… 작품에 몰두하다 보면 내가 만든 이것이 내 자식 마냥 느껴지곤 하잖아요. 최선을 다해서 만들고 싶고, 남들이 혹여나 실수로 손이라도 대면 망가질까 봐 펄쩍 놀라게 되고. 이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한 것도 그 생각의 연장선이었어요. 이미 손을 대 버린 이상, 세상에 내보일 수 있게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데 그 이상으로, 그 앞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이 아이도 나의 작품이니 책임져야 한다, 그 이상으로.


“의상은… 만들면 끝이잖아요. 완성해서 제 주인에게 보내고 나면, 그 옷이 옷장 안에 처박혀있든 남의 손에 들어가게 되든… 그건 제 알 바가 아니었죠. 그래서… 이제까지 태명을 짓지 않은 이유도,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네요. 이름을 지어주고 나면, 제 손을 떠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서,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니? 의상 같다고.”


엘자 폰 아르님은 그렇게 말하곤 빙그레 웃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엘자는 이 장미 같은 아가씨가 퍽 대견했다. 우선 책임감 있게 마주한다는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꾸준히 답을 찾고자 고민하는 자세도. 고민한다는 건 그만큼 소중하다는 거니까. 엘자 폰 아르님은 리체 아브릴이 왜 답을 찾지 못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 뒤의 일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경험이 부족할 때는 지식으로 채우면 된다. 그러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리체가 보지 못한 미래는 자신이 보여줄 테니까.


“아닌 것… 같아요.”
“나는 그림을 그릴 때 마지막 붓 터치를 끝내고, 말린 다음에 바니쉬로 코팅을 하고 나면… 그 그림에 더는 손을 대지 않는단다. 그다음엔 어느 액자에 넣을까, 어떤 공간에 걸어둘까… 그 생각뿐이지. 그마저도 공간에 걸어두고 나면 끝이란다.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지. 네가 의상을 만들 때도 비슷하리라 생각된단다.”
“…아이는, 작품이 아니군요. 낳고 나면 그때부터가 시작이니까.”


리체 아브릴은 엘자 폰 아르님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실마리를 잡은 듯, 진지해진 얼굴이었다. 이렇게 올곧고 단단한 아가씨가 아르님 가문의 일원이 되어주면 참 좋을 텐데. 참 아까웠다. 그러나 리체를 이곳에 매어두는 건, 어쩌면 세상의 손실일 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이걸 왜 확신하는 줄 아니?”


엘자는 이 공간에 리체와 자신만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정확히는, 프란츠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들었다면 분명 화냈을 지도 모르니까.


“나는 데모닉 조슈아의 어머니잖니.”
“헉….”


리체가 깜짝 놀라 작게 소리 냈다. 엘자는 리체가 어떤 지점에서 놀랐는지 알 것 같아 웃음 지었다. 아르님 공작 가문에서 ‘데모닉’이란 말은 금기와도 다름없었다. 아주 예전에… 프란츠가 제 아들은 데모닉이 아니라며 부정하던 때도 있었다. 그냥 조금 남들보다 더 영특할 뿐이라고. 그 아이는 9살에 공화국을 무너뜨릴 계략을 짠 장본인인데.


“내 아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완벽했지. 누가 봐도 완벽했어. 사람은 커가면서 제 결점도 메꾸고, 그렇게 비로소 완성된 형태의 인간이 되어가는 건데. 조슈아는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완성된 거라고 다들 그러더구나.”


그런 아이가 어떨 때는 무서웠다. 아이답게 천진난만한 구석을 찾아볼 수가 없어서, 신이라는 거장이 그려낸 한 폭의 그림 같아서. 처음부터 완전해서… 부모인 우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 같아서. 어쩌면 상처를 줬을 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상처를 주고 말았다. 그날… 카르디인 척 어미를 만나러 온 조슈아에게, 너보다 이 아이를 가까이 두고 있다고 말해버렸으니. 과거의 네 모습보다 지금이 훨씬 편해 마음이 놓인다고 상처를 주고 말았다.


“프란츠와 나는 항상 걱정뿐이었지. 그래서 계속 손을 대고 말았어. 무언가를 계속 해주고 싶어서. 사회성을 길렀으면 해서 아카데미에도 보내보고… 다치진 않을까, 그런 마음에 시골로도 보내보고.”


리체는 골똘히 생각했다. 나는 이 아이에게 뭘 해주고 싶을까. 아나로즈의 루비 브로치를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은 너를 멜오렘 티카람이 되도록 만들지 않겠다는… 나름대로의 상징일 뿐이었기에. 아직은 그 이상으로 무언갈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저도 그렇게 될까요? 저도… 이 아이에게 뭔가를 해 주고 싶어 하고, 그럴까요?”
“그럼. 아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거야, 아가.”




“허….”


프란츠 폰 아르님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게 믿기지 않아 두 눈을 깜빡였다. 아르님 공작의 집무실에는 프란츠와 히스파니에, 그리고 조슈아가 모여 있었다. 집무실 책상에는 조슈아가 아르님 도서관에서 한 달 동안 완성한 도면과 이론 뭉치가 놓여 있었다.


“아마 할아버지는 보자마자 이해하셨을 거예요. 그렇죠?”
“그런 당연한 소리에 대꾸해야 하다니 입 아프구먼.”


히스파니에는 조슈아를 빤히 쳐다봤다.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건… 세상의 흐름을 뒤바꾸게 될 거다. 어쩌다가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게냐?”


어쩌다가 알게 되었느냐는 물음이 아니었다. 어떻게가 아닌 왜. 데모닉 히스파니에는 그걸 묻고 있었다. 데모닉에게 불가능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방법은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이유가 알고 싶었다. 조슈아를 움직이게 한 동기를.


“네냐플에 갔을 때, 데리케 레오멘티스 교수님이 그러셨거든요. 저는 데모닉이니까 마법을 배우면 안 된다고. 마법을 배웠다간 죄다 흡수해서 미치광이가 될 거라고. 그래도 상관없으니 해볼까 하다가… 그런 결말은 리체가 기뻐하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그 말을 들은 프란츠 폰 아르님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일무이한 후계자가 그런 결정을 내렸더라면, 많은 부와 권력을 가진 그 아르님 가문도 가세가 기울어 진창으로 처박혔을 테니. 리체 아브릴이라는 아가씨가 제 아들의 곁에 있어주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르님 가문이 그 아가씨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게 되었는지….


“그러니까, 마법이 아닌 방식으로 해결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상용화하는 데 두 분의 도움이 필요해요. 도와주실 거죠?”


조슈아 폰 아르님은 씨익 웃었다.


세상의 새로운 물결이 시작되고 있었다.

8.

“언니!”


리체의 방문을 비집고 들어온 사람은 일마였다. 두 손에는 과일 접시가 들려 있는 걸 보아, 발로 문을 연 것 같았다. 일마가 먼저 들어오고, 그대로 문이 닫힐 줄 알았는데 막시민 역시 뒤따라 들어왔다.


“야. 일마가 손을 못 쓰면 네가 열어줘야지! 오빠가 되어서 뭐 하는 거니?”
“역시 날 생각해 주는 건 언니밖에 없어.”
“허!”


막시민 리프크네가 코웃음을 쳤다.


“사람한테는 손도 두 개나 달려 있고, 발도 두 개나 달려 있거든? 발로 열기 싫었으면 한 손으로 접시를 들거나 했겠지. 그리고 내가 굳이 안 열어줘도 자기가 알아서 발로 잘 열더만?”
“에휴…. 저거, 사람 되기 글렀어.”


리체가 한숨을 쉬자 막시민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벌써 시간은 한 달이나 흘러, 1월 중후반이 되었다. 크리스마스도 새해도 이들과 함께 보냈다. 이제 정말 아이를 출산할 때까지 한 달 가량밖에 남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아이의 이름을 고민할 수 있는 시간도 한 달 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일마가 사과 조각에 포크를 찔러 리체에게 내밀었다. 리체는 포크를 받아 사과를 우물거리다 제 고민을 내뱉었다.


“아이 말이야, 아직 이름을 못 정했어.”
“조군이 안 지어주더냐?”
“내가 작명 센스가 없다니까 자기가 지어준대.”
“조슈아 오빠 답네.”
“대신 이름의 의미를 정해주면 좋겠다던데. 아이가 어떻게 살아갔으면 좋겠는지, 생각해 보래.”


리체는 눈을 데굴거렸다. 이제 슬슬 정해야 하는데.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라. 생각을 가볍게 툭툭 던지다 보면 괜찮은 게 나올지도 모르지.”
“그래! 으음… 이런 건 어때, 언니. 간단한 것부터 생각해 보자. 머리카락 색이나 그런 거. 한번 상상해 봐도 재밌잖아.”


리체는 비취반지성 2층 회랑에 걸려 있는 초상화들을 떠올렸다. 아르님 가문을 거친 사람들이라면 다들 한 명씩 걸려 있는 초상화.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이 아닐까? 아르님 가문은 그게 흔하다던데.”
“…으음? 생각해 보니 조슈아 오빠도 어렸을 때 머리가 검은색이었지. 지금은 탈색한 건가?”
“흠. 대충 비슷해, 모종의 이유로.”


막시민은 영매 이야기를 꺼냈다간 일마가 기겁할 것 같아 대충 둘러댔다.


“근데 조슈아네 누나는 금발이었어. 공작부인을 닮았나 봐.”
“성별은 어때, 언니. 딸이었으면 좋겠어? 아니면 아들이면 좋겠어?”
“둘 다 상관 없는데. 조슈아라면… 딸이든 아들이든 예뻐할 것 같긴 해.”


그리 대답하며 리체는 머릿속에서 조금씩 상상을 해보았다. 마치 의상을 디자인할 때 그리는 스케치와도 비슷했다. 두루뭉술한… 아직 뚜렷하지 않은 미지의 존재를 한 획씩 그어나가며 또렷하게 그려내는 작업.


“아들이라면…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어. 그렇지 않은 남자는 정말 질색이거든. 몽플레이네 씨 같은 사람 말이야.”
“몽플레이네 씨가 누군데?”
“저 녀석 아빠. 전에 만난 적 있었는데, 웃긴 아저씨였지.”
“허! 너는 그 사람이랑 가족이 아니라서 모르는 거야. 얼마나 가족에게 무심하고 게으른 사람인데?”
“그건 네가 몇 년 전에 말해줘서 이미 자알 알고 있었다.”


리체 아브릴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러고 보면 떠날 때 몽플레이네 씨 얼굴은 아예 안 보고 그냥 와버렸는데. 잘한 건지 모르겠네.”
“내 생각엔 분명 간파하고도 남았다. 추리해 볼까? 네 아버지란 사람은 아무리 가정에 무심하고 너네 집에 한 번도 안 들른 것 같아도, 몇 달에 한 번씩 너네 집 대문 쪽으로 와서 집 안을 슬쩍 보고 가는 사람일 거다. 귀찮아서 책임지고 싶진 않아 해도 자기의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누가 힘들어하면 분명 신경 쓰여 할걸. 그렇게 한 번 집 안을 둘러보다가, 웬걸. 딸애가 없네? 궁금해서 딸애 직장 쪽도 한번 슬쩍 봤는데 일을 그만뒀다네? 그럼 답은 뭐겠냐?”
“야, 소름 돋는 이야기는 관두지 그러니?”


리체가 막시민을 째려봤다. 진실일지 아닐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기에 기분이 더 찝찝했다. 한편 이 추리는 정확하여, 하이아칸 블루 코럴 섬의 몽플레이네 씨는 이미 리체의 남동생을 통해 아브릴 부인에게까지 제 추측을 전한지 오래였다.


“언니, 딸이면?”
“딸이라면… 으음.”


리체 아브릴은 생각에 잠겼다. 어떤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나는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던가? 질문과 동시에 대답이 나왔다. 많지, 아주 많지. 여자아이는 이래야 해, 여자아이는 이러면 안 돼, 그런 이야기는 약 이십여 년을 살면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많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막시민에게 화를 내던 때가 떠올랐다. 너는 여자아이를 사람 구실하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고, 그렇게 막시민을 오해했던 때가 있었다. 칼라이소에서… 저 같은 여자애가 탔던 배는 부정이 타서 저주가 내린대요, 제 스스로 그리 말했던 때도 있었다. 그런 말을 하고도 태연했던 것은… 평생 그런 이야기만을 들었으니까. 그랬으니까, 익숙하니까, 이젠 무뎌졌으니까. …그렇지만, 이 아이만큼은 그런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욕심이 많았으면 좋겠어. 가지고 싶은 건 뭐든 다 가지고, 하고 싶은 건 뭐든 다 하고. 누가 내 걸 빼앗아가면 쫓아가서 혼쭐 내주고 다시 뺏어올 수 있을 정도의 욕심 말이야. 그렇게… 한계를 규정짓지 않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네.”


리체는 웃음 지었다. 내 아이는 정말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그런 리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막시민이 말을 툭 던졌다.


“그건 나도 동의한다.”
“어라. 성격 괴팍하다고 할 줄 알았는데.”
“그건 너한테나 해당되는 거고, 흥. 너나 조군이나, 둘 다 욕심 없는 건 똑같다니까.”
“그래도 나는 내가 살아오면서 욕심 좀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네 관점에서 보니까 그런 거고.”


막시민은 사과 조각을 하나 집어 우적거렸다. 제발 손 말고 포크를 써! 라는 일마의 잔소리에 헹, 하는 이상한 소리로 대꾸하곤 말을 이어나갔다.


“너는 말야, 뭐든지 다 혼자 짊어지려고 해. 가방은 하나밖에 없는데 넣어야 할 짐이 많으면 이미 가방 안에 있는 물건을 죄다 빼버리는 게 너다. 한 마디로, 네 걸 포기해버린다고. 이거 봐, 너네 집안 사정이 어려워졌을 때 네가 가만히 있었다면, 너네 어머니는 그 아저씨를 들들 볶아서라도 돈을 뜯어왔을걸. 근데 넌 가만히 안 있었잖아. 의상실에서 진절머리 날 정도로 일하고, 또 식당에서 급사로 투잡까지 뛰고. 넌 그때 고작 열다섯이었다. 지금도 봐, 아이를 지키겠다고 의상실까지 쉬게 되었잖냐. 수석 재봉사라며, 무지하게 성공했다며. 그렇게 힘들게 일해서 따낸 직업을 쉬게 되면서도 불평이 없지, 넌. 이게 어딜 봐서 욕심이 없는 거냐?”
“윽…. 그야 의상실은 일 년 뒤에 다시 돌아가기로 약속했으니까.”
“말뿐인 약속은 누구든 깨트릴 수 있어.”
“…미랭게트 선생님이 변덕을 자주 부리시는 분은 맞지만.”
“거 봐.”


생각해 보지 않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 말대로, 이 겨울이 끝나고 하이아칸으로 돌아갔을 때… 의상실에서 다시 일할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워낙 기분파인 선생님이니까. 그리고 일 년이라는 공백기가 있어서 손이 잘 움직일지도 모르겠고, 또 자신만큼의 실력을 갖춘 재봉사를 채용했을 수도 있고. 출발하기 전에도 이 부분은 분명 염두에 있던 사항이었다. 그래도 리체는 떠나는 걸 택했다. 이 선택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냥 그뿐이었다.


“조슈아 오빠는? 뭐어, 그 오빠라면 태어났을 때부터 다 가졌으니까 욕심 같은 건 잘 없겠다.”
“그래, 내가 예전에 뭘 들은 줄 아냐? 그 녀석은 이 으리으리한 성보다 시골인 코츠볼트가 훨 좋다고 했었다.”
“그 오빠, 뭔가 얄밉네….”


일마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뭐… 다 가진 자의 여유이자 기만인 거지.


“게다가 조군 녀석은 자기 지위나 목숨에도 별 욕심이 없었어. 이제는 자기 거라는 자각이 있어서 다행이지만.”
“에휴, 그때 너나 나나 정말 고생 많았지….”


리체 아브릴은 그 시절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만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어찌 됐든 좋게 끝났고, 돌이켜보면 소중한 추억이었기에.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막시민은 손으로 사과 조각을 하나 더 집었다. 일마는 옆에서 ‘더러워…’ 하고 작게 말했다.


“네 자식에게 욕심을 가르치는 건 아주아주 중요하다고. 걱정 마라, 조군 녀석이 안 가르치면 나라도 가르칠 테니까. 호구 잡혀서 내 걸 빼앗기지 않는 법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남의 걸 쌔벼오는 방법도 알려주지. 그런 걸 가르치는 데에는 나만 한 사람이 없다, 이거야. 어릴 적부터 히스 노인네의 금고를 뒤적거리던 게 나거든?”


그나저나 조군 자식은 어디로 간 거야? 막시민 리프크네는 중얼거렸다.




그 시간, 허름해 보이는 한 마차가 켈티카 광장을 가로질렀다. 미유 로제 의상실을 지나, 골목을 들어간 후 무기점 근처에서 멈추었다. 잠시 후, 한 남자가 마차에서 내렸다. 긴 망토까지 걸친 데다가 망토의 후드까지 눌러쓰고 있어,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는 무기점 맞은편에 있는 오래된 서점에 들어갔다.


“아직 약속 시간도 아닌데 일찍 오셨군요, 아르모리크 경.”


서점 안쪽 구석에 숨겨진 방 안에는 금발의 영애 한 명이 미리 자리해 있었다. 클로에 다 폰티나, 그게 그 영애의 이름이었다. 아르모리크 경이라 불린 남자, 조슈아 폰 아르님은 망토의 후드를 벗고, 테이블을 기준으로 그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이런. 공녀를 기다리게 했군요, 면목이 없습니다.”
“별것도 아닌걸요. 그러고 보면 마지막으로 뵈었던 게 아르님 공작부인의 탄신 연회였지요. 공작부인은 별일 없으신가요?”
“예, 많은 분들이 염려해 주신 덕분에 많이 건강해지셨습니다.”


조슈아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어머니의 탄신 연회… 분명 카르디가 비취반지 성에서 머무를 때의 이야기였으리라. 듣자 하니 그때 아르님 가문과 폰티나 가문의 우호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소공작과 클로에 공녀가 듀엣을 선보였다고 했는데, 이게 그 얘긴 것 같았다. 그 때문에 두 가문이 결합하게 되는 건 아니냐, 그런 이야기가 한창 사교계에 만연했었다고도 들었다.


“조만간 아르모리크 경의 아이가 태어난다고 들었어요.”
“…사용인들에게 최대한 입단속을 시킨다고 시켰는데, 역시 폰티나 가의 정보력에 비하면 미진했나 봅니다.”
“사람들의 눈을 가려도 향기는 맡을 수 있으니까요. 특히나 장미만큼 매력적인 꽃은 향이 진해, 주위로 쉽게 퍼져나가죠.”


리체에 대한 이야기였다. 조슈아는 표정 하나도 바꾸지 않은 채, 여전히 미소를 띤 채로 본론에 들어갔다. 비취반지성으로 돌아가면 정보가 어디에서 새어나갔는지 반드시 찾겠다고 생각하며.


“오늘은 제 청에 응해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레이디.”
“난생 서신 하나 보내지 않던 아르모리크 경께서 제게 하실 이야기가 있다고 하셔서 꽤나 놀라웠답니다.”


클로에는 부채를 펼쳐 제 입을 가렸다. 조슈아 폰 아르님, 그는 본래 사교계에 얼굴을 잘 비추지 않는 남자였다. 그런 그가 대뜸 폰티나 가로 편지를 보낸 것이다. 정확히는 폰티나 가의 클로에 다 폰티나에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 가능하면 빠르게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조슈아는 망토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두툼해 보이는 종이봉투였다. 그 안의 문서를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는, 클로에 쪽으로 슬며시 밀었다. 클로에는 부채를 접고 두 손으로 문서를 찬찬히 읽었다.


“…이게, 뭐죠?”
“이해하시는 그대로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우아함과 고상함을 잃지 않는 클로에 다 폰티나는… 문서를 읽어 내리자마자 눈빛이 흔들렸다.


“비취반지성의 장미에 대해 알고 계시다니, 이야기가 빨라져서 좋군요. 공녀가 알고 계시다시피, 아이가 다음 달에 태어납니다.”
“아르님 가문의 세대가 교체되겠군요.”
“그렇습니다. 다가오는 봄에 작위를 승계 받을 예정입니다.”
“그 말은 아노마라드 왕궁 대신 회의에 출입이 가능하다는 뜻이겠고요.”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데모닉 조슈아가 보기에도, 클로에 다 폰티나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데모닉만큼의 수준은 아니었으나, 일반적인 귀족의 수준에서 비교하면 그들을 훨씬 웃돌 정도로 비범했다.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불가능할 게 있습니까?”


조슈아 폰 아르님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오늘 만남을 청한 거군요. 아노마라드 왕실은 반대할 테니까.”
“왕실뿐만이 아니라 회의의 모든 구성원들이 그러겠죠.”
“그러나 폰티나와 아르님이 손을 잡으면 가능하고요.”
“그렇습니다.”


아노마라드의 양대 산맥인 폰티나 가문과 아르님 가문이다. 그 두 가문이 힘을 합치면 불가능할 것이 있을까.


“이것이 통과될 수 있도록, 폰티나 공작께서 힘을 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르모리크 경도 참. 그런 말은 제가 아닌 저희 아버지께 가서 말씀하셔야 할 텐데요.”
“공녀께서 워낙 현명하시니, 가주님이 공녀의 말에 귀를 자주 기울이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어머, 그런 감탄사를 내뱉으며 클로에 다 폰티나는 오른손으로 부채를 펼쳤다.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정보가 어디서 새어나갔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서로 한 대씩 주먹을 주고받듯, 폰티나 역시 한 방 먹은 셈이었다. 조슈아의 말대로 폰티나 공작은 사석에서 딸인 클로에의 의견을 경청하곤 했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더더욱. 클로에 다 폰티나는 어렸을 적부터 영민했으며, 폰티나 공작은 이를 잘 알았다. 그렇기에 클로에의 의견을 항상 귀담아듣는 것이었다.


“이것은 폰티나가 아르님을 도와드리는 거겠지요?”
“글쎄요. 거래라곤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지요.”


클로에는 입가에서 천천히 부채질을 했다. 부채 끄트머리에 달린 레이스가 나풀거렸다.


“내용을 읽으셨으니 아시겠지만, 통과되면 이득을 보는 건 아르님이 아닌 폰티나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라도?”
“흐름이 바뀌면, 공녀께서도 작위를 승계 받기 수월해지시겠죠.”


클로에의 손이 멈췄다. 수 초 정지했다가, 다시 천천히 부채질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글쎄요. 그런 것에는 흥미가 없어서.”
“공녀의 생각이 그렇다면 그런 거라고 해두죠.”
“이런 것이 없어도 폰티나의 뜻을 막아설 자는 없을 텐데.”


그러니 제대로 값을 치르라는 뜻이었다. 조슈아는 빙긋 웃음을 지었다. 위기를 기회로, 지금이 좋은 타이밍이었다. 제게 주어진 세 번째 과제를 해결하기에 이보다 적당한 상황은 없었다. 조슈아는 테이블 끝에 걸쳐둔 종이봉투를 정중앙으로 옮겨두었다. 아까 문서를 담았던 그 봉투였다. 그리곤 방을 나갔다가 몇 분 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펜과 잉크 통이 있었다. 서점 주인에게 빌린 모양이었다.


조슈아는 펜촉에 잉크를 묻힌 후, 종이봉투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건축 설계도였다. 여관? …아니, 여관과 비슷했지만 뭔가가 달랐다. 어떤 영역을 어느 정도의 넓이로 건설해야 하는지, 명확한 수치까지 적어나갔다. 평면도에 전개도까지 슥슥 그려댔다. 이를 바라보던 클로에 다 폰티나는 부채질을 멈추고 조슈아의 독주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데모닉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부채를 쥔 클로에의 손이 떨렸다. 데모닉 조슈아가 어렸을 때부터 천재라는 사실은 클로에의 귀에도 잦게 들려왔기에 알고는 있었다. 함께 아르님 공작부인의 연회에서 듀엣을 할 때도 합을 맞춘 적 있으나, 학문이 아닌 예체능 분야였기에 ‘실력이 대단하다’ 정도의 인상에서 그쳤다. 그러나 이건… 인간의 영역을 넘어섰다. 이게 데모닉이구나, 악마와 계약했다는 존재…. 조슈아 폰 아르님은 인간을 초월했다. 어쩌면 신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순간 경외심까지 들게 할 정도였다.


조슈아는 설계도를 완성하곤 봉투를 뒤로 뒤집었다. 뒷면에는 그림을 쓱쓱 그려대었다. 여관의 1층 중앙, 로비의 인테리어는 이렇게 하면 된다는 듯이. 이쪽 천장에는 샹들리에를 달아 두라는 작은 코멘트도 곳곳에 작성해두었다. 건물뿐만이 아니라 정원도, 식당도, 옥상도… 어떤 것을 배치해 어떤 형태로 구현하면 되는지,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해두었다. 마지막으로는 봉투 오른쪽 끄트머리에 세계 지도를 그렸다. 그러곤 네 개의 장소에 체크 표시를 했다. 그중 두 개는 아노마라드 남부의 라이디아와 카울이었고, 나머지 두 개는 레코르다블의 수도, 그리고 하이아칸의 소드 라 샤펠이었다.


“자, 이것을 이곳에 빠짐없이 세우세요. 5년 안이면 충분히 할 수 있겠죠? 여관보다는 호텔(HOTEL)이라고 명명하는 편이 있어 보일겁니다.”


어린아이에게 숙제를 주고 다음 주까지 해올 수 있지? 하고 묻는 선생님같이, 조슈아는 대수롭지 않게 그리 말했다.


“이걸론 값을 치르고도 남습니다. 아마 떼돈을 벌걸요.”
“잠깐, 아르모리크 경. 폰티나 가문은 상단이 아닙니다.”


조슈아는 단호하게 말하는 클로에의 눈에서 불쾌함을 읽었다. 공녀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했다, 귀족은 장사를 하지 않으니까. 그것은 상단의 몫이었고, 귀족이 손을 댈 일이 아니기도 했다. 귀족은 영지민이 내는 세금을 받아먹고 산다. 그걸로 충분했기에 굳이 힘들게 시장에 뛰어들지 않았다. 그게 귀족 사회의 규칙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이래선 곤란하다. 그러니 바꿔야 했다.


“이제는 바뀔 겁니다. 귀족 가문 모두가 각자의 사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흐름으로요.”
“어떻게 단언하시죠?”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클로에는 시선을 내려 조슈아가 그린 지도를 바라보았다.


“레코르다블은 용병 지대라고 알고 있는데, 용병들이 이런 고급 시설을 쓸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군요.”
“레코르다블에 들르는 방문자들을 위한 시설로는 부족할까요?”
“턱없이 부족하죠. 옆에 케이레스 사막이 있어 방문자가 적은 것도 문제인데, 이런 건물을 유지하는 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 테니까.”


클로에가 정답을 말했다는 듯, 조슈아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그렇게 운을 떼는 조슈아는 제 계획을 슬쩍 흘렸다.


“…놀랍군요.”


클로에의 두 눈이 조금 커졌다. 어떤 상황이든 차분함을 유지하는 그 클로에 다 폰티나일지라도, 놀라운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까의 드로잉 퍼포먼스로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놀랐다.


“아르모리크 경은 저를 놀랍게만 만드시네요.”
“이 자리가 공녀께 즐거움을 드렸다면 다행입니다.”
“제게 이런 얘기를 하신 건 왜인가요? 이런 극비는 발설하면 안 될 텐데.”
“오. 할 수 있으면 따라 해 보시죠. 안 말립니다.”


조슈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조슈아의 모습을 보고 클로에는 큭…,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그래. 폰티나 가에는 데모닉이 없으니까. 하고 싶어도 어차피 못 할 거라는 저 오만함과 방자함이 거슬렸지만, 실제로도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수십 년은 붙잡고 있어야 겨우 뒤쫓아 갈 수나 있겠지. 그럴 바에는 데모닉 조슈아가 바꾸는 세상의 흐름에 발맞춰, 그에 어울리는 것들을 준비하는 것이 나았다. 앞으로 아주, 아주 바빠질 것 같았다.


“슬슬 가봐야 할 것 같네요. 오늘 대화 나눈 건에 대해서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조슈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클로에는 그런 조슈아를 보고 고개를 살짝 끄덕일 뿐이었다.


“…아. 가시기 전에 잠깐만.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경.”


문 앞에 선 조슈아 폰 아르님이 뒤를 돌아봤다. 클로에 다 폰티나는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아까 그러셨지요. 요청 주신 건이 성사된다면, 이득을 보는 건 아르님이 아닌 폰티나라고.”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에 다 폰티나는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이 일에 왜 아르님이 뛰어드는 건가요?


“그것은….”


질문을 들으니 자연스레 연장선상에서 생각나는 누군가가 있었다. 생각하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져, 오늘 대화를 나눈 시간 중 가장 화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저의 레이디를 위함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곤 방을 나갔다. 클로에는 사라진 그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비취반지성에 있는 장미의 향기가 전 세계로 퍼질 것 같군요, 라고.

조슈아 폰 아르님은 서점을 나온 후 곧장 비취반지성으로 돌아갔다. 소공작으로서 품위를 지켜야 하므로 뛰지는 않았으나 발걸음을 최대한 빠르게 했다. 조금이라도 리체를 빨리 보고 싶어서. 조슈아는 리체의 방 쪽으로 가, 노크를 두어 번 했다. 네에, 하는 리체의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들리자 벌써부터 미소가 지어졌다.


“조슈아? 어디 갔다 온 거야? 성 안에 없었다던데.”
“응, 잠깐. 일이 있었어.”


조슈아 폰 아르님은 예쁘게 웃어 보이곤 제 연인에게 입을 맞췄다. 아, 역시 리체의 옆에 있는 게 가장 행복했다. 지금 이 순간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해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있지, 조슈아. 전에 말했던 이름 말이야…, 생각해 봤거든.”


리체 아브릴은 오전에 자신이 내린 결론을 이야기했다. …이런 아이가 되면 좋겠어, 그렇게 말하는 리체를 보고 조슈아는 슬며시 웃었다.


“뭐야, 왜 웃어?”
“리체는 정말 현명한 것 같아서.”


조슈아는 다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인 후, 리체의 부푼 배에 제 귀를 대고 말을 걸었다. 들었지? 꼭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란다.

9.

시야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주위가 웅성거리는 것 같은데 그 어떤 말도 알아들을 수 없어 귓가에서 뭉그적거리다가 스쳐 지나갔다. 정신이 몽롱했고, 눈앞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아, 이런 기분을 느낄 때가 있었는데. 언제였지?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중력이 있는 듯, 없는 듯… 리체 아브릴은 알 수 없는 공간에서 서 있었다. 주위는 캄캄하고 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가, 말 수가 줄었군.”


뒤에서 낮은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랑이가 그르렁 거리듯, 긁는 듯한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리체는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돌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으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다. 조슈아를 죽이려 했던 자. 막시민과 리체의 목숨까지 함께 노렸던 자. 샐러리맨.


“그건 당신 착각일 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도 않은 것 같은데, 생각만 하고 있었을 뿐인데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면서 동시에 캄캄했던 주위가 밝아졌다. 몇 년 전 그 여름날, 칼라이소의 부둣가였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주위에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상이 고요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리체는 제 발밑을 슬쩍 보았다. 안타까운 점을 짚어보자면, 리체가 발 딛고 서 있는 곳은 뱃전이었다. 배의 끄트머리, 그러니까 발을 뒤로 잘못 헛딛기만 해도 바다로 풍덩 떨어질 것 같았다. 자신보다 다섯 발자국 정도 앞에 서 있는 샐러리맨은 몇 년만에 다시 보아도… 재수없게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그는 씨익 웃고는 천천히 두 손을 들어 박수를 쳤다. 짝, 짝, 짝. 마치 조슈아의 무대를 보고 박수를 치던 그 때처럼.


“큭큭…. 그래,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지.”
“당신이야말로 여전하네. 내가 검으로 찔렀던 어깨는 멀쩡하고?”
“변함없이… 쓸데없는 말을 하는군.”


샐러리맨은 리체 아브릴의 쪽으로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다가왔다. 리체 아브릴은 뒷걸음질 치지도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리체를 빤히 바라보았다. 리체 아브릴의 녹색 두 눈동자 역시 샐러리맨을 온전히 담았다. 서로를 응시한 지 삼 초 정도 지났을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는 알고 있겠지.”
“뻔하지. 여자가 말 많은 게 싫다, 뭐 그딴 허접한 소리만 할 거지?”


칼라이소에서 샐러리맨이 리체를 들쳐매고 말을 타던 날. 리체 아브릴은 그때의 기억을 선명히 가지고 있었다.


리체는, 그때 하지 못한 말을 하고 싶었다.


“당신은 내 입을 막지 못해. 할 수 있으면 해보던가.”


샐러리맨은 슬며시 웃었다.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날 잡지 못한 것을 제대로 잡아보지.”


샐러리맨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움직이는 데,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보였다. 어쩌면 죽기 직전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 목을 향해 뻗어 오는 오른손이 그때와 똑같았다. 그의 손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아, 그저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있으니 아까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제 두 팔을 뒤에서 손으로 잡았다. 작고 가는 두 손이었다. 리체는 속으로 흠칫 놀랐다. 분명 이 뒤는 바다일 텐데. …내 뒤에 있는 사람은 누구야?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그 작은 두 손이 리체의 두 팔을 오른쪽으로 잡아당겼다. 몸이 휘청거리며 오른쪽으로 쏠렸다.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샐러리맨의 오른손이 리체의 왼쪽 어깨를 움켜쥐었다. 몇 년 전 그날, 샐러리맨이 목을 잡지 못해 제 오른쪽 어깨를 움켜쥐어 느꼈던 고통이… 이번에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리체는 비명을 질렀다.


“밀라르, 행복해야 해.”


차분하고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귓가에서 속삭이다 사라진 것 같기도 했다.

“아가씨, 정신을 잃으면 안 돼요!”
“언니!”


웅성이는 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가다…, 다시 돌아와 조금씩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헉!”


멈춰있던 심장이 다시 뛰는 것만 같았다. 혹은 바닷속에 한참을 가라앉다가 물 위로 겨우 나오게 된 것 같기도 했다. 리체 아브릴은 숨을 헐떡였다.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파악하는 데는 수 초의 시간이 걸렸다. 아이를 낳던 도중에 고통을 견디지 못해, 방어기제가 발동되듯 무의식적으로 다른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조금만 더 힘줘보세요. 거의 다 됐어요!”


누군가의 외침에 리체는 없는 힘까지 다 짜내서 힘을 줬다. 리체 아브릴은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샐러리맨의 헛짓거리 속에서도 살아남은 목숨이야,


이네스가 행복하라고 그랬어.


그러니까… 이런 것쯤이야, 얼마든지 이겨내 주겠어!


멀리서 됐다! 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힘을 많이 써서 그런지, 조금 멍했다.


“리체. …너를 잃을까 봐,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조슈아가 제 곁으로 다가와 이마에 입 맞췄다. 고생 많았어, 그렇게 말하는 조슈아의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펑펑 운 모양이었다.

“고생 많았어요, 엄마. 예쁜 공주님이네요.”


산파가 조심스레 아이를 리체의 품 안에 안겼다. 리체를 닮은 장밋빛 머리칼의 아이. …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너무나도 작고 소중해,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다칠 것 같아 겁이 났다. 이게… 나의 아이. 내가 열 달을 품은 아이. 리체는 엘자의 말을 이제야 이해했다. 이런 기분이구나, 이런 감정이구나.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아이에게 모든 걸 해주고 싶었다. 리체 아브릴은 칼라이소에서의 밤을 떠올린다. 무대에 설 조슈아를 위해 의상 디자인을 그렸다가 지웠다가 했던 날. 그 때의 기분을 다시 한 번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 이 아이를 위한 옷을 만들고 싶었다.


“안녕, 이난나 폰 아르님.”


작품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의 작품을 입게 하고 싶은 존재였다.


장미 신전의 주인이자, 모든 것을 지배하고자 하는 ‘하늘의 여신’ 이난나.


리체가 의미를 부여하고, 조슈아가 찾아준 이름이었다.


너도 그처럼 될 수 있을 거야.



한 달의 시간이 흐르고, 비취반지 성에도 봄이 찾아왔다. 어느덧 3월 말이었다. 리체 아브릴은 제 앞에 놓인 짐가방을 마지막으로 다시 체크했다. 실수로 뭐라도 빠트리면 큰일이니까. 리체는 출산을 하고도 하이아칸에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제발 몸조리는 하고 가라며 공작부인과 조슈아가 붙잡은 탓이었다. 아노마라드에서 다시 하이아칸으로 가기에는 편도만 한 달이 걸렸기에, 리체도 수긍하고 한 달을 푹 쉬었다.


그동안 비취반지 성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소공작인 조슈아가 아르모리크 경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드디어 공작위를 계승하게 된 것이었다. 세간의 사람들은 ‘그’ 아르님 공작 가문이니, 계승식도 화려하게 치를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계승식은 가문 내에서 의식만 간단하게 치르고 끝냈다. 외부인들은 구경도 불가했다. 유서 깊은 아르님 가문의 역사상 가장 단출하고 가볍게 끝난 계승식이었다. 어차피 계승식을 화려하게 치러봤자 리체의 존재를 공표하지도 못 하는데, 그럴 바에는 안 하는 게 낫다는 것이 조슈아의 주장이었다. 전대 공작이던 프란츠 폰 아르님도, 전대 공작부인인 엘자 폰 아르님도 이에 동의했다. 그렇게 해서 만장일치로 간단히 마무리 지어진 것이었다.


그간 리체 아브릴은 푹 쉬면서도 출산 이전과 다름없는 하루를 보냈다. 조슈아와 함께 웃고, 리프크네 남매와 수다를 떨었다. 전 공작부인 엘자와 시간을 보내는 것도 여전했다. 그 하루 일과 중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난나를 만나는 일과가 추가되었다는 것뿐이리라. 당연하게도 공작 가문의 아이이기에 보모가 붙어 있어, 그 점은 참 다행이었다. 리체는 아이를 볼 줄 모르고, 그걸 알려줄 수 있는 엄마는 제 옆에 없었으니까.


이난나는 참 사랑스러웠다. 리체가 이 아이의 엄마라서, 리체의 눈에 콩깍지가 껴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누가 봐도 사랑스러운 아기였다. 엘자 폰 아르님이 ‘어머, 조슈아가 어렸을 때랑 똑 닮았잖아?’라고 말할 정도로, 조슈아를 똑 닮은 예쁘장한 아기였다. 아르님 공작가는 흑발이 많다던데, 머리카락은 리체를 닮아 장밋빛이었다. 두 눈은 아르님의 핏줄답게 검은 눈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난나가 사랑스러워 계속 이곳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었다. 리체는 비취반지성에서의 하루가 얼마나 평온하며 안락한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결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이아칸으로 가야 했다. 이난나를 사랑하니까, 그래서 가야 했다. 하이아칸으로 돌아가면 만들고 싶은 옷이 많았다.


“리체, 짐 싸고 있었어?”


방문이 열리더니, 조슈아가 리체의 방 안으로 얼굴을 빼꼼히 들여다보았다. 마치 그날 같았다. 몇 년 전, 리체가 비취반지성을 떠날 때 조슈아가 드레스를 골라준 날. 리체에게 드레스를 줄이라고 말했던 날… 정확히는 패배의 시발점이던 그날. 리체는 속으로 생각했다. 응, 나 안 잊었어. 하이아칸 가면 도착하자마자 잔뜩 의상을 만들어주마. 나중에 두고 봐, 흥.


조슈아는 리체에게 쪼르르 다가가 제 연인을 꼬옥 안았다.


“편지해야 해, 리체.”
“그럼.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보낼 테니까.”


리체는 조슈아의 품에 갇혀있다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슬며시 웃었다.


“이난나를 잘 부탁해.”
“응, 항상 소중히 할 테니까. 그러니까… 리체는 걱정하지 말고 앞으로 가면 돼.”


조슈아도 마음 같아선 리체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사랑하는 연인은, 의상 제작에 몰두할 때 제일 반짝이는 사람이었다. 그걸 잘 알고 있기에, 보내야 했다. 조슈아는 미랭게트 의상실 2층 창문 안으로 보이던 리체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데모닉 조슈아가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눈치채지도 못한 채, 마네킹 앞에서 의상의 원단을 대어보며 고민하던 모습을. 고민 끝에 찾은 정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화사하게 웃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그 모습이 참 눈부셔서, 언제까지고 보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날도 있었다. 조슈아는 리체 아브릴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것이 그녀를 떠나보내는 일이라도.


“울 줄 알았는데, 안 우네.”
“리체, 내가 울지 않아서 서운해?”
“아니! 그랬다면 나도 울었을걸. 미련이 생겼을 지도 모르고.”
“그래서 안 운 거야.”


조슈아가 리체에게 짧게 입 맞춘다.


“리체, 코츠볼트를 떠날 때 우리 둘이서 나눴던 얘기 기억나?”
“…응.”


리체는 그날 밤을 떠올렸다. 조슈아는 분명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아노마라드의 아르님 공작으로 존재하고, 네가 하이아칸의 디자이너 클라리체 데 아브릴로 존재해 각자의 길을 나아가면서도…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미래가 있다면, 그렇다면 그때는 너와 함께할 수 있을까?’라고. 그렇지만… 그런 미래가 가능한가?


“그런 미래가 올까?”
“올 거야, 반드시. 그것도 네 생각보다 아주 빠르게.”
“…확신할 수 있어?”
“그럼.”


조슈아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난 데모닉이잖아. 데모닉 조슈아에게 불가능은 없거든.”


그 말에… 리체 아브릴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제야 이별이 실감 나는 것 같았다. 조슈아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해서, 그래서 더 안심이 되는 걸지도 모른다. 불가능한 미래를 논하고 있는데, 그 조슈아가 확신하고 있으니까… 불가능도 가능할 것 같았다. 이런 기대는 일찌감치 버리는 것이 맞는데, 그래야 나중에 상처받지 않는데. 제 연인의 표정이 너무나도 자신만만해서… 자신 역시도 약간의 희망을 품어버릴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을 했다.


“리체, 조금만 기다려 줘. 노력할 테니까. 데모닉 조슈아가 그런 미래를 만들어 보일 테니까. 그러니 너는 너의 길을 가면 돼.”
“흑, 넌 정말 미친놈이야….”
“준비를 마치면 데리러 갈게. 데모닉 이카본이 아나로즈 티카람을 데리러 간 것처럼 말이야.”


조슈아가 씨익 웃고는 제 손으로 리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때 문밖에서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제 리체가 슬슬 출발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조슈아는 리체의 짐 가방을 들었다. 사용인을 부를 수도 있었겠지만, 리체가 떠나는 길인 만큼 자신이 짐가방을 옮겨주고 싶었다.


“…조슈아, 잠시만. 그거 내려놔 봐.”
“응?”


조슈아가 짐가방을 내려놓으니 리체가 방 안쪽으로 들어가, 방 안에 딸려 있는 드레스룸 문을 열었다. 리체가 비취반지성에 도착한 날, 공작부인께서 켈티카의 모든 의상실에서 옷을 싹 쓸어와 채워주신 거라 입어본 옷보다 입지 않은 옷이 더 많았다. 리체는 이리로 오라는 듯 조슈아를 향해 손짓했다.


“이번엔 옷을 안 골라주네? 빨리 하나 골라 줘.”


시원한 웃음을 짓는 리체 아브릴을 보고… 조슈아는 참 눈부시다고 생각했다. 제가 사랑하는 여자는 이런 사람이다. 자존심이 짓밟히는 일이 있으면 그걸 동력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피하지 않고, 제대로 마주해 싸우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다시 한번 더 덤벼보라고 손짓하는 사람이다. 데모닉 조슈아는 자신이 일평생 다른 사람들보다 한참을 앞서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는 그런 자신보다 훌쩍 더 앞서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멋있었다.


조슈아는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안쪽을 쓰윽 보았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옷 하나를 집었다.


“이건… 승마복?”
“우리 예전에 같이 말 타던 날 기억나지?”
“그래, 네가 말을 몰고… 내가 뒤에 탔었지.”
“다음에 만날 땐, 말 타는 법을 알려줄게.”


‘다음’은 반드시 있다는 듯, 조슈아는 미소 지어 보였다.

“언니….”


리체를 배웅하기 위해 비취반지성 정문 앞에 모두가 모였다. 리프크네 남매는 리체가 출발한 다음 날에 코츠볼트로 갈 거라고 들었다. 그 말인즉슨, 일마 리프크네도 리체 아브릴과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울상이 된 일마를 보고 리체는 조금 쓰게 웃었다. 함께 있는 동안 자신 역시 일마와 많이 가까워졌기에, 오늘 이렇게 헤어지면 또 언제 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 아쉬웠다.


언니가 동생에게 사랑을 전하면, 동생들은 늘 그 사랑에 보답을 하려고 한다. 가만히 받아먹는다는 선택지는 없다. 무조건 보답하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 게 동생들이니까. 그렇지만 그런 건 흐름이 깨질 뿐이다. 언니가 동생에게 보내는 마음은, 다시 언니한테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동생의 동생에게 전해져야 한다. 그게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여자아이들이, 소녀들이, 여자들이 서로를 이어나가는 방식이었다.


“일마. 마을회관에서 했던 말 기억나지?”
“…응.”
“이젠 네가 언니야.”


이젠 너의 차례야, 네가 언니가 되어서… 너의 동생들에게 마음을 전해주면 돼. 그런 뜻이었다. 일마 리프크네는 리체 아브릴의 똑똑한 동생이었고, 언니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일마 리프크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일마가 루돌프에게 가장 대리 역할을 맡긴 것과도 비슷해 보였다.


“건강하세요, 두 분 다.”


리체는 엘자와 길게 포옹을 했고, 프란츠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눌 사람은… 조슈아와 막시민, 그리고 이난나. 이난나는 조슈아의 품에 안겨 자고 있었다.


“이난나는 오늘도 잘 자네. 조슈아, 편지할게. 밥 잘 챙겨 먹고.”
“응. 너도 항상 건강 챙겨, 리체.”


조슈아와 리체의 대화는 꽤나 덤덤했다. 어차피 아까 전에 하고 싶은 얘기는 다 했으니 그걸로 만족했다.


그리고… 막시민 리프크네.


“…뭘 그렇게 쳐다보냐? 얼렁 가기나 하셔.”
“너 진짜! 어떻게 마지막까지 이러니?”
“뭔 마지막이야? 평생 얼굴 안 볼 셈이냐?”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여튼 낭만이 없어요, 낭만이.”


리체 아브릴은 입을 삐쭉였다. 눈을 좀 데굴거리다, 표정을 풀고 웃음 지었다.


“…막시민. 다 네 덕분이야, 도와줘서 고마워.”
“네가 우리 집에서 먹고 자고 했던 건 1엘소도 놓치지 않고 이 녀석한테 다 청구할 거니까 걱정 마라.”
“이 녀석이 진짜! 조슈아, 한 푼이라도 쟤한테 주기만 해봐!”
“그럼. 아르님 가문의 재산은 다 이난나 몫인데, 막군에게 넘길 수는 없지.”
“이거 그냥 부부사기단이잖아?”


푸하핫… 세 사람은 웃음을 터뜨렸다. 미의 극치호를 타고 하늘을 항해하던 그 시절의 세 사람이랑 별반 다를 것 없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리체 아브릴은 비취반지성을 떠났다.

10.

1년의 절반이 여름인 하이아칸은 시원한 바람과 적당히 따뜻한 날씨로 인기가 많은 휴양지였다. 그 어떤 국가든 돈 좀 있는 귀족 가문들은 죄다 하이아칸에 별장 한 채 씩은 마련하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하이아칸은 모든 국가의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그러면서도 하이아칸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보여주는 장이라는 뜻이었다.


대륙의 귀족들은 매년 5월이면 하이아칸의 수도 ‘소드-라-샤펠’에서 열리는 페스타 델라 무지카 축제를 즐기러 모이곤 했다. 그들은 각 나라와 지역에서 최신 유행식으로 된 의복과 헤어스타일을 휘감고 왔기에, 그런 그들이 모이는 하이아칸은 ‘유행의 콜로세움’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각국의 유행이 하이아칸 내에서 순위를 다퉜고, 축제가 끝날 때 즈음이면 그중에서 어떤 유행이 우위를 점했는지 알 수 있었다. 축제가 끝나고 나면 귀족들은 자기들의 나라로 돌아가곤 했다. 하이아칸에서 알게 된 새로운 유행과 함께. 그렇게 전 세계로 유행이 퍼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하이아칸 본연의 문화가 유행의 선도주자를 달리는 것은 아니었다. 하이아칸에 모이는 귀족들 중 과반수는 아노마라드 왕국인이었고, 그중 수도 켈티카 출신이 많았다. 켈티카 광장에는 유서 깊은 의상실이 하나 있다. 장미골의 미유로제 의상실. 아노마라드 출신 귀족들은 대부분 미유로제 의상실에서 한 벌쯤 의상을 맞춰 오곤 했고, 그렇게 ‘유행의 콜로세움’에서 언제나 승리하는 건 그들이었다. 미유로제 의상실에서 만드는 의상이 세계의 유행이었다.


그러나, 그 당연한 듯한 유행의 성공가도도 2년 전부터는 깨졌다.


판도가 바뀌었다.


2년 전, 페스타 델라 무지카 축제를 즐기러 모인 귀족들의 각 별장으로 하나의 상자가 발송되었다. 모든 별장이 빠짐없이 이 상자를 받았다.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은… 귀부인들을 위한 의상 한 세트, 그리고 카드 한 장. 카드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 이 의상은 하이아칸에 들러주신 고귀한 여성들을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아주 고급스럽고 값진 재료로 제작된 이 의상은 아주 비싼 금액으로 책정되었으나 특별히 당신께는 무료로 보내드립니다. 입어주시는 것만으로도 영광일 것입니다. 하이아칸에서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의상실 Dear.I 올림. >


그날, 의상을 받아본 모든 귀족들은 집안의 하인을 시켜 이 의상실에 대해 당장 정보를 알아오라고 시켰다. 형편없는 의상이었다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카드에 쓰인 문구대로 의상은 품질이 썩 훌륭했고 놀랍게도 자신의 몸에 딱 맞았다. 그 의상실에 가서 치수를 잰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았을까? 게다가 가장 놀라운 점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태의 의상이었다는 것이다! 그간 귀부인들은 대부분 한 벌로 되어 있는 형태의 드레스를 입곤 했다. 상의와 하의가 붙어있는 형태로, 보통 상의와 하의가 분리되어 있는 건 남성복 뿐이었다. 그러나 상자 속 의상은 상의와 하의가 분리되어 있는 투피스 형태였던 것이다. 게다가 자수도 촘촘하고 세련되었다. 하인을 시켜 근처 다른 집안 귀족들은 어떤지 물어보니, 놀랍게도 그들이 받은 의상은 색도 패턴도 디자인도 조금씩 달랐다고 한다! 의상 디자인이 겹치는 걸 극도록 싫어하는 그들의 눈에도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각 집안들의 하인들이 모여 집단 지성으로 하이아칸 전체를 뒤지기 시작했다. 수도인 ‘소드-라-샤펠’을 벗어나 그 옆 블루 코럴 섬까지 뒤지자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블루 코럴 섬의 중심 광장에 위치한 의상실 ‘Dear.I’은 허름하진 않았으나 보기에 규모가 큰 의상실도 아니었다. 블루 코럴 섬에서 오래 산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유명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개업한지 세 달밖에 되지 않은 신생 의상실이라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의상실의 디자이너인데, 20대로 보이는 어린 나이였던 점, 그리고 장밋빛 머리칼에 아주 예쁘장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 역시 화제가 되었다. 그렇게 그날부터 의상실 [Dear.I]는 귀부인들의 주문 예약을 넣으러 찾아온 하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 해 ‘유행의 콜로세움’에서 승리한 것은 미유 로제가 아니라 Dear.I였다. 각국의 귀부인들은 각자 최소 한 벌씩 Dear.I의 옷을 품에 안고 출신국으로 돌아갔으며, Dear.I가 선보인 투피스 열풍이 전 세계를 휩쓸었다. 또한 Dear.I의 유일한 디자이너의 이름 역시 함께 퍼지기 시작했다. 클라리체 데 아브릴. 그게 그 디자이너의 이름이었다.


“클라리체 선생, 저희 마님이 의상 제작을 의뢰하고 싶으시다는데 지금 예약하면 언제 진행할 수 있습니까? ”
“맞춤형 제작이신거죠? 앞으로 2주간은 꽉 찼고, 2주 뒤 목요일로 잡아드릴게요. 참고로 저희는 맞춤형 제작의 경우 프리미엄 비용을 받고 있어요. 마님께 전해주시고요.”


하인이 고개를 끄덕이곤 의상실을 나갔다. 리체 아브릴은 하인을 배웅하곤 그제야 한숨을 쉬었다. 아, 아침부터 정신없었어. 이제야 좀 쉬겠네.


비취반지 성을 떠난 지도 벌써 햇수로 3년. 의상실을 개업한 지는 이제 막 2년이 되었다. 평범한 소녀 가장 리체 아브릴이 의상실을 개업까지 할 수 있었던 건 아르님 공작부인의 투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슈아 폰 아르님은 모르겠지만. 비취반지성에 머물 당시, 엘자가 리체에게 투자를 하고 싶다며 먼저 제안을 했었다. 그렇게 투자금을 받아 하이아칸으로 돌아온 그 해. 내년 페스타 델라 무지카에서의 한 방을 노리기 위해 1년 간 미친 듯이 폐관 수련을 했다. 하이아칸으로 돌아오자 때마침 운 좋게 축제가 열리고 있었고, 축제 기간 동안 하이아칸의 모든 귀부인들을 살펴보며 그들에게 어울리는 디자인을 그림으로 그렸다. 경력이 얼만데, 의상 수치는 눈대중으로 슬쩍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축제가 끝나고, 여름부터 겨울까지 몇 백 벌의 의상을 제작하고 또 제작했다.


그렇게 리체는 그다음 해 축제에서 계획을 실행했으며 예상대로 잭팟을 터뜨렸다. 전 대륙의 사교계 귀족들 중에 디자이너 클라리체 데 아브릴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게 되었다. 리체 아브릴은 조수 역할을 해주는 재봉사를 몇 명 두긴 했으나, 이대로라면 손이 정말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리체가 생각해낸 묘수는 ‘사이즈 분류’였다. 44, 55, 66… 이런 식으로 여성의 체형에 맞게 여러 사이즈를 미리 정하고, 해당 사이즈에 맞는 의상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귀부인 한 명 한 명의 치수를 재고 그에 맞게 맞춤 의상으로 만들 필요가 없었으니까. 의상 디자인을 하나 정한 뒤, 그 디자인에 맞게 44 사이즈 3벌, 55 사이즈 3벌, 66사이즈 3벌… 이렇게 가을겨울 내내 미리 만들어놓고 5월 축제 기간에 판매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귀족들은 의상이 겹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의상은 당연히 ‘맞춤형’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방법이 필요했다. ‘콜렉션’ 전략. 그 해에는 공짜 의상 대신, 여러 의상 디자인이 담긴 카탈로그를 만들어 각 별장에 보냈다. 카탈로그 표지에는 ‘Dear.I의 S/S 신상, 여신 시리즈’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내용은 그러했다. 이 시리즈 속 디자인을 디자인 별로 각 9벌씩, 한정된 수량으로 판매합니다. 카탈로그에는 약 10개 정도의 의상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각 디자인마다 ‘불의 여신’이니 ‘사랑의 여신’이니 하는 이름이 달려 있었다.


리체의 예상대로 올해에는 작년보다 더 많은 귀족들이 리체의 의상을 구매하러 모였다. 맞춤형 의상이 당연시된 귀족들에게 클라리체 데 아브릴이 제시한 새로운 형태의 패러다임은 오히려 그들을 더 열의에 불타오르게 했다. 의상이 겹치는 것? 그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구하기만 하면 전 대륙에서 클라리체 데 아브릴의 ‘불의 여신’ 디자인을 가진 단 9명의 사람 중 하나가 되는 건데! 이제 그들에게 리체 아브릴의 의상은 단순히 의복을 넘어서, 가문의 능력을 증명하는 과시의 대상이었고 수집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올해 5월, 개업 후 두 번째로 맞는 ‘페스타 델라 무지카’ 시즌 판매를 무사히 끝낸 참이었다. 드디어 리체 아브릴에게도 축제가 끝나 숨돌릴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다. 축제가 끝나면 대부분의 귀족들이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기 때문에, 블루 코럴 섬에 남아있는 일부의 귀족을 상대로 맞춤형 의상만 조금씩 제작할 예정이었다.


리체 아브릴은 제 두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가 했다. 3년 동안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이건… 꿈인가? 아니, 현실이었다. 리체 아브릴이 직접 만들어 낸 현실. 햇수로 3년간 쉬지도 않고 달려,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리체는 만족하기는커녕, 열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


“더 열심히 해야지.”


앞으로도 만들고 싶은 게 많았다. 리체는 흔들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는데. 잘 도착했으려나?”




아르님 공작이 소공녀를 끔찍이도 아낀다는 사실은 아노마라드 켈티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분명 미혼이었던 조슈아 폰 아르님에게 아이라니. 세간 사람들은 ‘그래서 그렇게 계승식을 빨리한 거야!’ 하고 뒤에서 얘기하곤 했다.


아이의 존재가 알려진 건 약 3년 전 어느 날. 아르님 공작이 생후 6개월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를 안고 아노마라드 왕궁 정원을 걷는 모습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보통 귀족 가문의 경우에는 귀부인들도 아이를 직접 안거나 옆에서 돌보지 않는다. 보모가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그러나 아르님 공작은 그렇지 않았기에, 더욱이도 남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날부터 아르님 공작이 아이와 함께 켈티카 광장이나 시내를 단둘이 걷는 모습이 종종 발견되었다.


그런 모습이 보일수록 사람들이 품는 의문은 단 한 가지였다. 아이 엄마는 누구지? 아르님 가문에서 일한 사용인들에게 수소문을 해봐도, 그들 대부분이 1년간의 업무 공백기가 있었기에 모르겠다는 답밖에 들려주지 않았다. 알려주고 싶어도 몰라서 못 알려주는 것이었다. 1년 전 아노마라드 국왕 탄신제에서는 용기 있는 님스게른 남작가문 첫째 영식이 조슈아를 향해 ‘아르님 공작부인은 안 오셨나 봐요?’하고 능청스럽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질문을 들은 아르님 공작은 눈은 웃지 않은 채, 입으로는 아주 부드러운 곡선을 그려내 웃었다. 사람들이 그의 웃음에 넋이 잠깐 나가 있는 동안, 그는 몸을 돌려 회장 뒤를 나가고 말았다. 탄신제가 끝나고, 왜인지 그 영식은 더는 사교계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이난나, 여기 나와볼래?”


그 사교계의 모두가 주목하는 조슈아 폰 아르님이 여기에 있다. 그는 비취반지성을 걸으며 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딸아이의 목소리도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어디 갔는지는 짐작이 갔다. 조슈아는 비취반지성 2층의 어느 방문 앞으로 걸어갔다. … 리체 아브릴이 썼던 방이었다. 본래 리체 몫의 방 옆에 있는 자신의 방은 계승식을 마친 후 더 이상 쓰지 않았으며, 아버지가 쓰던 방으로 물건을 전부 옮겼다. 아르님 공작이 되었으니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리체가 쓰던 방은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해뒀다. 리체가 쓰던 책상도, 그 책상 위에 놓여진 펜 하나까지도. 물건 배치는 최대한 그대로 놔두되 먼지는 없어야 했기에, 이 방에 청소를 하기 위해 출입하는 사용인들은 항상 긴장하곤 했다.


조슈아는 방 문을 열고 안으로 성큼 들어간다. 안에는 딸아이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더 안쪽에 있을 테지. 조슈아는 방 안쪽으로 들어가 방 안에 딸린 드레스룸의 문을 열었다. 널찍한 드레스룸은 다양한 드레스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칼라이소의 다이아몬드 러쉬 극장 속 의상실처럼 빼곡하게, 하지만 그때보다는 훨씬 정갈하게. 드레스룸 안쪽으로 옷을 헤치며 들어가 보니, 아이는 소파에서 그림책을 읽고 있었다. 여기가 이난나의 아지트였다.


“아빠!”


조슈아를 발견한 이난나는 소파에서 폴짝 뛰어 내려오곤 조슈아에게 달려가 다리에 매달렸다. 조슈아는 미소 지으며 아이를 안아 들어 올렸다. 이제 생후 약 27개월 정도 된 이난나는 슬슬 문장을 제대로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물론 발음이 분명치 않긴 했으나, 아빠인 조슈아와 평소 대화를 많이 해서 그런지 단어를 배우는 속도가 빨랐다. 그런 이난나를 보고, 히스파니에는 ‘데모닉도 아닌 일반 아이인데 이 정도로 문장력과 감정 표현이 뛰어난 걸 보면, 네가 아이랑 라포 형성을 솔찬히도 잘 해둔 것 같구나.’라는 평을 내렸다.


“이난나, 책 읽고 있었어?”
“응! 아빠, 안 바빠?”
“오늘은 괜찮아. 특별한 일이 있어서 하루를 비웠거든.”
“특별한 일?”

뭔지 알겠다는 듯, 이난나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이난나는 조그마한 두 팔로 조슈아를 와락 안았다.


“엄마가 선물을 보냈구나!”


이난나는 제 방 침대 위에 걸터앉아서 발을 동동 굴렀다. 잔뜩 신이 난 이난나는 몸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뚝이마냥 왔다 갔다 하며 기울였는데, 그 움직임에 따라 장밋빛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들뜬 이난나의 모습을 보고 조슈아는 큭큭 웃었다.


조슈아가 손짓을 하자, 사용인이 큰 상자를 가지고 왔다. 이제는 못 참겠다는 듯, 이난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우와아!”


이난나의 두 눈이 반짝였다. 상자 안에는 이난나 몫의 옷이 잔뜩 들어있었다. 리체는 매 달마다 이난나 몫의 옷을 네 다섯 벌 정도 만들어 보내곤 했다. 리체의 선물을 열어보는 날은 아르님 가문 부녀에게 한 달 중 가장 중요한 이벤트이기도 했다. 계절에 맞춰 원단도 디자인도 달라지는 리체의 옷 선물은 놀랍게도 늘 이난나에게 잘 맞았다. 길지도 짧지도 않게 딱 맞았다.


“뭐가 제일 마음에 들어?”
“으음….”


리체의 옷 선물을 받고 나면 부녀가 늘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초상화 그리기였다. 리체가 만들어 보낸 옷 중에 가장 마음에 든 옷을 이난나가 직접 고르면, 그 옷을 입은 이난나를 조슈아가 그림으로 그려 리체에게 보내곤 했다. 이난나는 상자 안까지 머리를 넣어 힘껏 두 팔을 휘적거리다가, 옷을 쥐고 상자에서 나왔다.


“이거!”


조슈아는 아무 말 없이 빙긋 웃었다. 이난나가 고른 건 귀여운 원피스도, 레이스가 잔뜩 달린 치마도 아니었다. 직접 리체가 뜨개질로 뜬 듯한 니트 반팔과 무릎까지 올 듯한 면 반바지. 리체에게 옷을 처음으로 골라준 날, 그때 입고 있었던 옷이랑 비슷했는데… 하는 생각을 했다. 평범한 소공녀라면 절대 입지 않을 것 같은 옷을 지어 넣은 것이 리체다웠고, 그런 옷을 스스로 선택한 이난나 역시 리체의 딸 다웠다.

“아빠아, 얼마나 기다리면 돼?”
“응, 곧 완성이야.”


이난나는 리체가 지어준 옷을 차려 입고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조슈아가 함께 골라준 빵 모자도 쓰고 있었다. 조슈아는 이젤 앞에서 이난나의 모습을 유화로 그리고 있었다. 어차피 데모닉 조슈아의 기억력으로는 1초만 봐도 그려낼 수 있기에, 이난나가 모델마냥 앉아 있을 필요는 없었다. 그건 데모닉의 관점에서 보면 꽤나 비효율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슈아는 비효율적이더라도 이러는 편이 부녀 사이의 좋은 추억을 쌓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이난나는 아까처럼 몸을 흔들거리며 재잘거렸다.


“있지, 우리 막군한테는 언제 가?”


어느샌가부터 이난나는 막시민을 막군이라고 불렀다. 막시민 삼촌이 아닌 그냥 ‘막군’. 조슈아와 막시민이 서로를 조군, 막군이라 부르는 걸 옆에서 듣고 따라 한 모양이었다.


“왜? 막군이 보고 싶어?”
“아니이! 막군은 맨날 나 놀리구, 괴롭히고… 근데! 물고기 잡는 방법 알려준댔어.”
“물고기를? 막군이 물고기를 잘… 큭, 잡긴 하지. 응.”


조슈아는 키득거렸다. 코츠볼트에서 함께 물고기를 잡았던 어릴 적이 생각나서였다. 근데 그건 그냥 남이 쳐둔 그물에서 건진 것뿐인데 잡았다고 할 수 있나? 어렸을 적엔 막군의 억지 논리에 넘어갔지만 이제는 제대로 반박할 수 있는데. 조슈아는 붓을 내려놨다. 왕궁 화가가 그린 듯, 한 폭의 완벽한 초상화가 완성되었다. 조슈아가 이난나에게 손짓하자 이난나는 의자에서 내려와 쪼르르 조슈아 곁으로 다가왔다.


“조만간 코츠볼트로 같이 가보자.”
“응. 물고기 잡고 싶어.”
“물고기 잡아서 먹으려고?”
“아니?”


이난나는 씨익 웃음 지었다.


“난 커서 해적이 될 건데? 그러려면 물고기랑 친해져야지!”


밤에는 비가 왔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조슈아는 리체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이난나는 이미 잠든 지 오래였다. 조슈아는 최근 데모닉의 좋은 점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는 슬슬 세상의 모든 것이 궁금해 ‘왜?’하고 하루에 수백 번도 더 묻는 딸아이에게 막힘없이 답변해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는 과거 일을 아주 또렷이도 기억한 덕에, 아이에게 옛날이야기를 생생히 들려줄 수 있다는 것. 오늘 저녁에는 이난나에게 열일곱 시절의 모험 이야기를 들려줬다. 리체와 막군과 함께 했던 항해, 배를 타고 하늘을 날며 바다를 갈랐던 그 여름날. 분명 몇 개월 전에도 몇 주 전에도 며칠 전에도 들려준 것 같은데, 이난나는 그게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종종 앵콜 요청을 했다.


아르님 공작으로 살아가는 건 꽤나 바쁜 일이었다. 게다가 제게 주어진 숙제를 수행하는 것까지 염두에 두면 쉴 새가 없었다. 그러나 조슈아 폰 아르님은 데모닉이었고, 그래서 남들보다 효율적으로 업무 처리를 할 수 있었다. 조슈아는 몇 가지 업무 프로세스를 개선했고, 그렇게 확보한 시간을 이난나와 함께 보냈다. 아무리 바빠도 매주 일요일만큼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 노력 중이었다.


조슈아는 천천히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리체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그에게 늘 어려운 일이다. 제아무리 데모닉 조슈아래도 쉽지 않았다. 조금 더 좋은 표현이 있지 않을까, 조금 더 마음을 담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오랫동안 붙잡곤 했다. 매 달마다 쓰는 편지인데 언제나 새롭게 어려웠다.


사랑하는 나의 리체에게. 지금 비취반지성에는 비가 내리고 있어. 리체가 이 편지를 받아볼 때 즈음에는 하이아칸의 날씨가 괜찮았으면 좋겠다. 오늘은 이난나와 함께 초상화를 그리며 시간을 보냈는데, 이난나가 해적이 되고 싶다고 그러지 뭐야. 요즘 이난나는 우리의 모험담에 아주 푹 빠져 있는데, 그 영향이 아닐까 싶어. 그나저나 요즘 하이아칸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죄다 네 얘기를 하고 있던데, 우리 사랑스러운 아가씨가 이번 샤펠 축제에서도 어마어마한 활약을 했나 보네. 그런 네가 자랑스러워.


나도 전할 소식이 있는데, 네가 비취반지성에 머물 시기 때부터 준비했던 것 중 하나가 최근 마무리가 되었어. 함께 동봉하는 자료는 나라에서 호외로 뿌릴 자료인데, 내일부터 켈티카를 시작으로 아노마라드 전역에 퍼질 예정이야. 기쁜 마음으로 보내.


[아노마라드 왕국에 영광의 축복 있으리라!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헌법 중 일부를 다음과 같이 개정한다. 개정될 헌법은 내년 1월 1일부터 적용될 것이다. 하나, 민법 56조에서 가주 권리의 승계를 ‘성인식을 마친 장성한 사내’에서 ‘성인식을 마친 장성한 왕국민’으로 확장한다. 둘, 민법 120조에 해당하는 부부 동성제를 폐지하여 결혼 시 부부간의 성씨 통일을 하지 아니하며, 본래의 성씨로 돌아가고 싶은 자들에 한 해 서류 수리를 허한다. 또한, 금해부터 아노마라드 왕국에서 공무를 수행하는 이들의 최소 모집 요건을 ‘남성’에서 ‘왕국민’으로 확장한다. … ]


후일 이 편지를 받아 본 리체는 ‘미친….’하고 중얼거렸다는데 데모닉 조슈아는 모를 일이었다.


- 불가능할 것 같은 미래의 한 가지 조건 : 조슈아가 조슈아 폰 아르님으로, 리체가 클라리체 데 아브릴로 존재할 수 있는 미래.


조건 하나가 충족되었다.


시대가 변화하고 있었다.

11.

1년 반이라는 시간이 더 흘렀다. 11월 중순이 된 어느 겨울날, 조슈아는 폰티나 가문의 행사에 와 있었다. 아르님 공작가의 4년 전 작위 계승에 이어, 드디어 폰티나 공작가 역시 세대가 교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르님 가문과는 달리 공개적으로 화려히 개최된 작위 계승식에, 아노마라드에서 내로라하는 귀족들은 대부분 참석했다. 조슈아 폰 아르님도 빠질 수는 없었다. 폰티나 가문은 이번 작위 계승식에 어마어마한 돈을 들였는지, 야외 정원에서 개최되는 행사임에도 마법사를 고용해 실내처럼 따뜻함이 감돌게 했다.


“아빠, 지루해.”


이난나가 옆 의자에 앉아서 작게 하품을 했다. 이제 아기 티를 벗어나 어린이로 접어들었기에 종종 이렇게 공식 석상에 함께 하곤 했다. 조슈아가 이난나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조금만 참아보자. 곧 갈 수 있을 거야.”
“으응.”
“그러고 보면 오늘 오후에 히스파니에 할아버지가 오신 댔는데.”
“정말?”


소공녀 이난나 폰 아르님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집안 어르신들은 이난나를 예뻐하다 못해 데리고 나들이를 종종 다니곤 했는데, 이난나는 그 중 히스파니에와의 나들이를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히스파니에는 이난나를 데리고 나갔다 돌아오면 늘 어디에 갔다 왔는지 말해주지 않아 조슈아가 알 턱이 없었다. 이난나에게 물어봐도 완고하게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아, 그 두 사람의 비밀이겠거니 싶었다.


“봄이 되면 히스 할아버지가 배 타러 가쟤. 가도 돼?”
“아빠는 놔두고 어딜 가려고?”
“아빠는 집에 계속 있어야지.”
“그렇지. 프란츠 할아버지는?”
“프란츠 할아버지도 같이 갈게. 가도 돼?”
“음… 그래, 큭큭…. 두 분이 함께면 걱정은 없겠다.”


무언가 좋은 생각이 난 듯 이난나가 조슈아의 귀를 향해 손짓했다. 조슈아가 상체를 숙여 귀를 대어 주자, 이난나는 고사리 같은 두 손을 모아 조슈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집에 가면 엄마한테 편지 쓸래. 해적 옷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어!”


조슈아는 그 말에 조금 쓰게 웃었다. 리체의 존재는 아직까지 대외적인 곳에서 비밀로 붙여야 했으니까.


“좋은 생각이네. 집에 가서 같이 써 보자.”
“으응.”
“그리고 조금만 기다리면, 이렇게 귓속말하지 않아도 될 거야.”
“정말? 얼마나?”
“음. 이난나가 내년에 배 타러 갔다가, 해적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면?”


아빠의 말에 만족한 듯 이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악단이 연주하는 곡이 달라졌다. 슬슬 행사가 시작될 모양이었다. 태연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면서도 다른 생각에 잠긴 조슈아였으나, 갑자기 딸아이가 옷소매를 옆에서 잡아당겨 딴 생각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아빠! 저거.”
“응?”
“저거 옷.”


이난나가 가리키는 손가락의 끝에는 클로에 다 폰티나가 있었다. 정확히는 리체의 옷을 입은 클로에 다 폰티나. 조슈아의 두 눈이 조금 커졌다.


리체는 작년 봄 시즌을 시작으로 매해 5월, 그리고 9월에 ‘S/S 시즌’과 ‘F/W’시즌 컬렉션을 공개하곤 했다. S/S 시즌엔 페스타 델라 무지카 축제 시즌에 맞춰 공개했다면, F/W 시즌엔 하이아칸의 수도 ‘소드-라-샤펠’에서 자체적으로 패션쇼를 개최했다. 연극이나 오케스트라만 주야장천 즐기던 귀족들에게 ‘패션쇼’라는 새로운 유형의 콘텐츠가 제공되었으니 그들이 어찌 열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무튼 클로에 다 폰티나가 오늘 입은 옷은 리체의 올해 F/W 시즌 컬렉션 중 하나였다. 해당 의상은 승마복에서 착안한 의상으로, 재킷에는 허리에 라인을 넣어 선을 살렸고 활동성을 겸비할 수 있도록 남성의 정장 마냥 바지를 매치한 세미 정장 스타일의 의상이었다. 단, 승마복과는 달리 몸에 너무 달라붙지 않게. 해당 컬렉션이 공개되었을 때 아노마라드 내에서는 반응이 반반으로 갈렸다. 귀족 여성들에게 바지라니! 세상이 말세라며 어떻게 다리를 드러낼 수 있냐, 왜 남성같이 옷을 입냐는 의견도 있었고, 요즘은 치마를 무릎 위로 줄여 입는 스타일도 있는데 바지를 입는 게 뭐 어떠냐는 이야기도 있었다.


다른 나라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간 아노마라드에서 평민이 아닌 귀족 여성이 입을 수 있는 바지라곤 승마복밖에 없었는데 새로운 의복의 선택지가 늘어난 셈이었다. 해당 의상은 아직 아노마라드 내에서도 찬반이 강해, 튀는 것을 좋아하는 몇몇의 여성들만 입고 다니는 상황이었다. 그런 옷을 클로에 다 폰티나가 완벽하게 소화했으니, 앞으론 흐름이 바뀔 것 같았다.


오늘의 클로에 다 폰티나는 금발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 포니테일로 묶었고, 리체의 디자인대로 카키색 재킷과 크림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평소에 늘 머리를 풍성하게 늘여뜨리고 드레스 차림을 하던 클로에였기에, 사람들의 이목을 더욱이도 끌었다.


이번 폰티나 가문의 작위 계승식에는 아노마라드 국왕인 체첼까지 참석했다. 마치 기사 서임식처럼, 클로에가 체첼 앞에서 기사마냥 한쪽 무릎을 꿇었고, 체첼은 칼을 빼어들어 클로에의 왼쪽 어깨에 칼을 대었다. 조슈아는 슬쩍 고개를 들어 이난나를 보았다. 이난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클로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저 언니처럼 되고 싶다….”


이난나가 중얼거렸다. 조슈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거구나. 정답이라고 말하는 듯 머릿속의 종이 울렸다.


일마 리프크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여자아이들은, 소녀들은, 여자들은 언니들을 통해 미지의 세계를 경험한다고 했다. 그게 한 치 앞도 모르는 삶을 살아가는데 등불처럼 이정표 역할을 해준다고. 왜 미지였을까? 왜 소녀들은 세계를 알 수 없었을까? 그것은 소녀들의 세계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과거의 조슈아는 그렇게 추측했다. 만물에 통달한다는 그 데모닉임에도 완벽하게 이해하진 못했다. 경험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논리와 추론을 통해 낼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이었다. 미의 극치 호의 존재를 모르는 자는 배가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 어떤 나라에서 살아간 사람들은 여자가 공직에 종사할 수 있다는 것도, 여자가 가주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모르겠지.


조슈아 폰 아르님은 클라리체 데 아브릴을 생각했고, 일마 리프크네를 생각했고, 엘자 폰 아르님을 생각했다.


생각하고, 생각해서… 세상의 질서를 바꾸었다.


이게 맞는 선택인지 알 수 없었기에, 데모닉 조슈아는 정답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게 정답이었다고, 제가 보고 있는 이 상황이 그렇게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이난나 폰 아르님의 세계가 넓어졌다.


얼마나 많은 소녀들의 미래가 오늘 바뀌었을까?




“막군!”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장밋빛 머리칼을 양 갈래로 땋아내린 이난나 폰 아르님은 오랜만에 비취반지성에 들른 막시민 리프크네를 향해 뛰어갔다.


“야, 뛰지 마라. 다쳐.”
“싫어! 근데 왜 오늘은 일마 언니랑 같이 안 와?”
“걔는 요즘 장미골에서 일하느라 정신없다.”
“어! 장미골, 엄마 라이벌인데.”
“뭐, 그렇지.”
“이기는 편 우리 편~”


이난나는 막시민을 향해 양 팔을 벌렸다. 막시민은 어깨를 으쓱하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난나를 안아 올렸다.


“에휴…. 근데 싫어는 뭐냐?”
“싫은 건 싫은 거지? 다 내 마음대로지?”
“어휴, 지 엄마랑 똑 닮았네. 쯧, 그러니까 그 성질머리가 분명 유전될 거라고 말했건만.”
“에엑.”


이난나가 주먹으로 막시민의 어깨를 퍽퍽 두드렸다. 꽤나 손이 야무져 아팠다.


“아야.”
“계속 그렇게 우리 엄마 욕할래?”
“네 엄마도 사람 패는 걸 참 잘했지.”


막시민은 이난나를 안고 창문 너머로 성 밖을 슬쩍 훑어보았다. 오늘은 아르님 가문에서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그 행사를 위해 많은 귀족들이 모여, 비취반지성 정원에 사람이 바글거렸다.


“너는 저기 안 가도 되냐?”
“오고 싶으면 오고, 오기 싫으면 안 와도 된대. 아빠가. 다 마음대로 하라는데?”
“오호. 자기는 어렸을 때 그렇게 못 했다고 아주 애를 풀어놓고 키우는구만. 그래서 넌 갈 거냐?”
“원래는 갈 생각 없었는데 구경 가고 싶어졌어. 지금 가자!”
“그 옷을 입고?”


막시민 리프크네는 이난나를 슬쩍 보았다. 멜빵바지를 입고 있는 소공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같이 공적인 자리에서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옷이므로 가십을 좋아하는 사교계의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댈지도 몰랐다.


“하긴, 뭐 어떤가 싶다. 여기서 너한테 뭐라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
“그치? 뭐라고 하면 걸레 자루로 혼쭐을 내주면 괜찮지 않을까?”
“… 걸레 자루 만져본 적은 있냐?”
“없지. 하지만 막상 하려고 하면 잘 할걸?”
“너는… 이런 데에서 묘하게 네 아빠를 닮았다니까.”

비취반지성에 모인 귀빈들의 표정은 다양했다. 어떤 사람은 불신의 표정을, 또 어떤 사람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 아르님 가문에서 열리는 행사임에도 참석한 일부 귀족들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은 분명 이 행사가 <사업 설명회>였기 때문이리라. 한 귀족은 혀를 찼다. 허! 귀족이 품위를 알아야지. 상단 따위가 하는 사업에 귀족이 뛰어든다는 게 말이 되나? 어려서 그런지 사리 분별이 안 되나 보지? 그러나 그런 생각을 속으로만 하고 입 밖으로 낼 수 없던 건 분명 이 행사의 주최가 아르님 가문인 것도 맞지만, 정확히는 아르님 가문과 폰티나 가문의 합작 사업이기 때문이었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이 행사의 주역, 조슈아 폰 아르님과 클로에 다 폰티나가 등장했다.


행사 진행을 맡은 조슈아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인사했다.


“아노마라드의 중추를 담당하는 여러분들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금일 귀빈 여러분들을 모시게 된 연유는, 아르님 가와 폰티나 가가 앞으로 진행하게 될 사업을 설명해 드리고자 모시게 되었습니다. 우선,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분들을 위해 오랫동안 아르님 가문에서 개발한 기술을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이 기술을 귀빈 여러분들께 처음으로 선보일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어디선가 칙칙…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웠다. 이런 소리를 어디서 들었던가? 알듯 말듯 했다. 소리는 리드미컬하게 반복되었으며, 점점 커졌다.


“소개합니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리가 나는 그 ‘무언가’는 성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던 것인지, 이제 또렷이 볼 수 있었다.


비취반지 성은 마치 반지처럼 고리 모양의 숲이 성을 둘러싸기에 붙여진 이름. 그 숲의 가장자리를 따라, 어떤 거대한 물체가 성을 돌고 있었다.


“아르님 가문에서 개발한, 교통수단 ‘기관차’의 프로토타입입니다.”


- 불가능할 것 같은 미래의 또 한 가지 조건 : 조슈아 폰 아르님이 ‘아노마라드’에서, 클라리체 데 아브릴이 ‘하이아칸’에서 지내면서도 ‘함께할 수 있는’ 미래.


증기기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누군가는 경외심을, 누군가는 두려움을, 누군가는 놀라움을 느꼈다. 이게 그 ‘데모닉’이구나! 사람들이 벙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조슈아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것은 프로토타입일 뿐, 시제품에서는 더 빠를 겁니다. 아르님 가문이 내년 봄에 선보일 첫 번째 노선은 아노마라드의 켈티카에서 출발해, 남부의 라이아다와 카울을 지나갑니다. 케이레스 사막을 거쳐 레코드라블의 수도에 향하고, 마지막으로는 하이아칸의 소드-라-샤펠까지 도착합니다. 케이레스 사막의 경우 최대한 안전한 경로로 지나가기 위해 가장자리를 위주로 선로를 놓았으니 안심하십시오. 열차 제작과 선로 공사는 모두 마쳤으며 지금은 다섯 개의 기차역을 건설하고 있는 중입니다. 내년 봄, 모든 기차역이 준공되면 즉시 운행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각 국가의 이해관계가 상충한 가운데 전폭적으로 아르님 가문을 지지해 주신 위대한 아노마라드 국왕 폐하께 이 모든 영광을.”


짝, 짝, 짝. 사람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조슈아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리곤 클로에를 향해 손짓했다. 뒤에 서 있는 클로에 다 폰티나가 앞으로 성큼 나왔다. 클로에는 사람들을 훑어보다 입을 열었다.


“이에 맞춰 폰티나 가문은 각 정착역 근처에 새로운 건물 시설을 설립합니다. 이름은 ‘폰티나 호텔’. 여관과는 차원이 다른 호화로운 숙박 시설을 제공할 예정입니다. 또한, 아르님 가문과 손을 잡고 물류 유통 사업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이제 거리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물건을 더 빨리, 더 많이 보낼 수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물건을 신속하게 구해오는 것도 가능하겠죠.”


클로에의 말을 받아 조슈아가 마무리 멘트를 지었다.


“이제 시대가 변화했습니다. 모든 사업은 먼저 시작한 사람이 우위를 점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하며, 이상으로 사업 발표회를 마무리 짓겠습니다. 오늘 선보인 ‘기관차’에 흥미가 있으신 분들은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씩 탑승하셔도 좋습니다.”


사람들은 바로 깨닫고 말았다. 이제 사업을 하지 않으면 뒤처지겠구나.


- 불가능할 것 같은 미래의 마지막 조건 : 디자이너 클라리체 데 아브릴이 귀족 사회에 들어올 때, ‘공작부인이 일하는 게 말이 되냐’며 폄하 당하지 않는 미래.


일을 하기 때문에 공작부인이 될 수 없다면, 나머지 사람들 역시 죄다 일하도록 분위기를 바꾸면 되잖아?


그날부로 아노마라드 귀족 사회에는 사업 열풍이 불었다.

12.

“할머니!”


그리고 찾아온 다음 해 3월 중순. 이 주간의 모험을 떠난 소공녀, 이난나 폰 아르님이 비취반지성으로 돌아왔다. 해적 같은 차림새를 한 이난나의 가슴팍에 루비 브로치가 반짝거렸다. 그간 이난나는 얼굴도 본 적 없는 어머니가 제게 선물했다던 이 브로치를 참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자신의 보물이지만, 그렇기에 이번 모험을 떠날 때 꼭 가져가야 했다. 히스파니에 할아버지와 프란츠 할아버지를 따라다녀왔는데, 이난나의 기준에서도 아주 성공적인 모험이었다. 세 사람의 목적지는 이카본 군도의 페리윙클 섬. 3월이 막 되자마자 출발했는데, 슬슬 지려고 하던 페리윙클 섬의 아몬드 꽃을 아주 운 좋게 볼 수 있었다.


이난나의 페리윙클 행 모험에서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을 굳이 꼽아보자면, 섬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은 것이 부담스러웠다는 것 정도일까. 배를 타다가 중간에 갈매기가 해적 모자를 빼앗아 간 것도. 그 때문에 아주 엉엉 울었다는 건 아빠에게 비밀이었다. 프란츠 할아버지가 우는 이난나를 한참 달랬고, 히스파니에 할아버지는 그런 프란츠를 물 건너 불구경하듯이 보기만 했는데… 결론적으로 이난나가 속상한 마음을 풀 수 있던 것은 히스파니에 할아버지가 ‘배 조종법을 알려주겠다’며 회유한 덕분이었다. 아무튼, 마무리만 훌륭하면 되었지.


두 할아버지의 손을 양손으로 잡고 성에 들어온 소공녀는 할머니를 보자마자 손을 놓고 달려갔다. 프란츠는 조금 서운하다는 듯한 얼굴을 했고, 그걸 본 엘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난나는 할머니인 엘자 폰 아르님의 품에 폭 안겼다.


“이난나, 잘 다녀왔니?”
“응! 재밌었어요.”


이난나는 엘자의 손을 잡고 비취반지성 2층 계단을 올랐다. 쭉 올라가 가장 동쪽에 위치한 방의 문을 열었다. 이곳은 원래 쓰지 않는 방이라, 한창을 텅 비어있던 방이었지만 최근 엘자가 사용하기 시작했다. 엘자만을 위한 화실로. 방 안은 이젤 여러 개와 다양한 미술용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할머니, 다음 경매회는 언제지요?”
“이 주 뒤란다.”


엘자는 지난겨울, 경매회에 제 그림을 출품해 보았다. 항상 혼자서 그리고, 보고, 벽에 걸거나 다시 보관하고 마는 그림들을. 제 실력이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어느 정도일지도 궁금했다. 선대 공작부인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엘’이라는 가명까지 사용하곤 했는데, 그렇게라도 해서 출품을 무사히 마치고 나니 뭔가…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것만 같아서, 소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경매회 결과, 해당 그림은 예상보다 높은 금액으로 판매되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라, 그림을 사간 페어웨이 백작이 각종 사교 행사를 돌아다니며 무명 화가 ‘엘’의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시작하여 ‘엘’의 팬층이 켈티카 시내에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맞다, 아빠는요?”
“네 아빠는 하이아칸에 갔단다. 어제가 기관차 첫 운행 날이었거든. 갔다가 오면, 아마 일요일 즈음엔 오지 않을까?”
“하이아칸!”


이난나는 두 눈을 반짝였다. 하이아칸, 엄마가 있는 곳. 이난나 폰 아르님은 제 모친인 클라리체 데 아브릴이 항상 궁금했다. 이난나의 장밋빛 머리카락을 보면 다들 어머니와 똑 닮았다고 해줬으니까. 그래서 늘 어머니와 관련된 걸 볼 때면 큰 관심을 갖곤 했다. 드레스룸도, 루비 브로치도, 어머니의 디자인도.


“아빠가 돌아올 때, 엄마도 함께 올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네 아빠한테 들은 게 없었거든.”
“오면 좋겠다….”
“그간 엄마가 안 와서 서운했니?”


엘자가 조금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슬쩍 물어봤다. 이난나에게 엄마란… 대단한 사람, 멋있는 사람. 그리고 더 알고 싶은 사람.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빠와 막군에게 충분히 들었다. 아빠가 초상화도 그려줬다. 자신과 똑같은 머리색에 웃음이 예쁜 사람. 녹색 두 눈동자가 반짝이는 사람.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고 싶었고, 품에도 직접 안겨보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만나지 않아도 괜찮았다. 매달 엄마가 보내주는 옷으로, 엄마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뇨, 괜찮아요. 그리고 이제는 만나고 싶을 때 언제든 만나러 가면 되잖아요?”


배도 탔는데, 까짓것 기관차는 못 타겠어?

기관차가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벌써 레코드라블의 수도에 도착했다. 이다음 역은 드디어 하이아칸의 수도 ‘소드-라-샤펠’이었으나, 여기서 다시 출발해 종착역에 도착하기까지는 또 몇 시간을 달려야 했다. 이 역에서 약 20분간 정착한 후, 다시 출발하겠다는 기관장의 안내가 들렸다. 조슈아 폰 아르님은 기관차에서 잠시 내렸다. 사야 할 것이 있었다.


몇 시간 뒤에 리체를 만날 거라고 생각하니 손이 조금 떨렸다. 장장 5년을 떨어져 얼굴도 못 봤으니까. 오늘 소드-라-샤펠로 나와줄 수 있냐고, 그리 한 달 전에 편지를 보냈는데. 받았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조금 생겨났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갈무리했다. 아니, 받았을 거다. 분명. 일부러라도 확신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조슈아는 뒤를 돌아 기관차를 바라봤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자신이 만든 작품. …증기기관을 만드는 것은 제아무리 데모닉인 조슈아에게도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마법이 만연한 이 세계에서 과학은 주류 분야에 해당되지 않았다. 그러나 마법을 배울 수는 없었기에 선택지가 이것밖에 없었다. 기존 논문들을 죄다 찾아와 읽었고, 아르님 가문 도서관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길이밖에 없는 개념에 시간을 붙이면 어떻게 될까, 그 생각으로 새로운 단위 측정 체계를 정립했다. 그리고 미의 극치호가 금을 원동력으로 나아가듯, 새로운 에너지 원동력이 필요했다. 여러 고민과 실험 끝에 ‘증기’에서 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조슈아는 자신이 개발한 기관차에 이름을 붙였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잊히면 안 되는 것이 있었다. 어쩌면 속죄의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리체가 떠나고 나서, 조슈아는 이 이름의 주인에게 찾아갔다. 정확히는 주인의 후손에게. 매몰차게 거절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흔쾌히 승낙해 줬다. 그 덕분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주인장, 장미 한 송이만 포장해서 주십시오.”


네, 하는 꽃집 주인에게 은화를 건넸다. 오늘은… 건넬 수 있을까. 돌이켜보면 리체가 비치반지 성에서 머무르던 몇 달 동안, 조슈아는 자신이 직접 꽃을 준비해 건넨 적이 없었다. 준비할 것이 많아 그걸 생각할 겨를이 되지 않았었기에. 그래서 그게 종종 마음에 걸렸다. 다시 만나면 꼭 리체를 닮은 장미꽃을 선물하겠다고… 그런 다짐으로 달려온 그간의 시간이었다.


“다 되었습니다.”


조슈아는 꽃집 주인이 건네는 장미 한 송이를 받아들었다.


이제 곧, 리체를 만날 수 있다.

아르님 가문이 엄청나게 빠른 교통수단을 만들어냈다는 소문은 이미 하이아칸 전역에 퍼진지 오래였다. 몇 달 전, 의상실에서 일하는 재봉사 하나가 ‘아노마라드의 아르님 공작이 이상한 교통수단을 만들었대요! 켈티카에서 하이아칸까지 이틀하고 반이면 도착한다는데요? 그래서 수도에 요즘 짓고 있는 커다란 건물도 그거 때문이래요!’라 말해, 마시던 물을 뿜을 뻔했다. 리체의 의상실 Dear.I에서 일하는 재봉사들은 조슈아와 리체의 관계에 대해 대충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그야 디자이너님은 항상 ‘아노마라드’나 ‘켈티카’, ‘아르님’에 대한 얘기만 들으면 움찔거리셨으니까.


아무튼 리체 아브릴은 그 소식을 듣긴 들었고 지난달에는 조슈아의 편지까지 받았다. 이 날 소드-라-샤펠의 기차역에 와달라는 내용이었다. 사실 편지를 받기 전부터, 재봉사들에게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을 현실로 만들어 낸 제 연인은 정말… ‘미쳤다’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이 마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해? 리체 아브릴은 감도 오지 않았다.


5년 전, 비취반지성을 떠나왔을 때… 어쩌면 조슈아랑 앞으로 다시는 못 볼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을 조금은 했다. 조슈아는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미래가 분명 올 거라고 말했지만, 아노마라드와 하이아칸은 너무 멀었으니까. 그런데 그 결과가… 이거라니! 소식을 들은 그날, 리체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미친 거 아냐? 제가 사랑한 사람 ‘조슈아 폰 아르님’은 정말 말을 허투루 하는 사람이 아니구나, 이 사람은 진심이구나, 나를… 사랑하는구나. 내가 별을 따달라면 진짜 따줄 것 같잖아.


리체 아브릴은 기차역 승강장에 서 있었다. 처음 운행하는 기차를 구경하기 위해, 이미 자신 말고도 주변 외에 사람이 아주 빼곡했다. 괜히 긴장이 되어서, 손끝이 떨렸다. 멀리서 칙칙 폭폭…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소년이 이거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렸으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관차가 아주 빠른 속도로, 그리고 엄청 큰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바람에 리체의 장밋빛 머리칼이 흩날렸다. 리체 아브릴은 열차를 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건 기관차가 신기해서가 아니라, 기관차의 차체에 흰색 도료로 새겨진 것 때문에.


리체 아브릴의 눈에 들어오는 건…


페리윙클 꽃의 마크, 그리고 옆에 쓰여 있는 기관차의 이름.


T I K A R A M.


그게 기관차의 이름이었다.


천천히 기관차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제일 먼저 내린다.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친다. 짝, 짝, 짝…. 주위가 소란스러웠으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리체 아브릴을 한눈에 발견하곤 웃으며 다가온다. 그러곤 품에서 꽃 한 송이를 꺼내 리체 아브릴에게 내민다. 크림색 종이로 포장되어 붉은 리본으로 묶인 장미꽃 한 송이.


“사랑하는 우리 아가씨, 당신을 만나러 내가 왔어요.”




“…와, 여긴 진짜 여전하네!”


리체는 비취반지 성에 돌아오자마자, 2층으로 올라갔다. 자신이 예전에 머물렀던 방, 그곳에 아이가 분명 있을 거라고 조슈아가 확신했기에. 문을 열고 5년 만에 다시 들어온 방은 놀랍게도 제 기억 속 방이랑 똑같았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종이는 5년 전, 리체가 끄적거렸던 의상 디자인 그림이었다. 아, 지금 와서 다시 보면 쪽팔린데!


“아니, 이걸 안 버렸어? 부끄럽잖니!”
“큭큭…. 어떻게 버리겠어.”


조슈아는 뿌듯한 얼굴로 웃어 보이곤 방 안쪽 드레스 룸으로 손짓했다. 리체는 성큼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드레스룸의 문을 열기가 조금 무서웠다. 나를 보고 아무 반응도 없으면 어쩌지? 데면데면한다던가, 아니면 왜 이제 왔냐고 원망하면 어쩌지. 그런 생각뿐이었다. 리체가 머뭇거리자 조슈아가 다가와 볼에 입을 맞췄다.


“괜찮아, 리체.”
“…응. 다녀올게.”


떨리는 손으로 드레스 룸 문을 열었다. 그 안은 아주 많은 의상으로 빼곡했다. 갑자기 5년 전 기억이 떠올라서 괜스레 웃음이 지어졌다. 아, 그때 공작부인께서 켈티카에 있는 모든 의상실에서 죄다 옷을 쓸어오셔서 정말 놀랐는데. 맞다, 이젠 공작부인이 아니시지. 아무튼.


“…엄마?”


드레스룸의 안쪽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상이 너무 많아서 얼굴은커녕 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아이가 내 아이구나. …응, 내가 품고 낳은 아이, 내가 이름의 의미를 지어준 아이, 내가 매일같이 마음에 그리며 옷을 지어 보내던 아이…, 이난나구나.


“…응, 엄마야. 너무 늦었지, 미안해.”


리체가 그렇게 답하자, 안쪽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조슈아가 편지에서 이난나는 엄마를 찾지도 않고 잘 지내고 있다고 그랬는데. 생각보다 엄마가 많이 보고 싶었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니 리체 역시 눈물이 뚝뚝 흘렀다.


“아니! 흑, 안 늦었어.”


울음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난나의 목소리는 또랑또랑해서, 진짜 나를 많이 닮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흑, 보고 싶었는데. 그치만 괜찮았어.”
“…나는, 읏, 네 곁에 못 있어줬는데.”
“왜냐하면 엄마가 항상 옷으로 말해줬잖아, 사랑한다고. 옷으로 안아줬잖아. 나는… 흑, 알아. 엄마가 날 사랑하고 있다는걸. ”
“…우리 딸, 똑똑하네….”

…엄마가 그쪽으로 갈게, 리체 아브릴은 그런 말을 하곤 옷걸이를 하나씩 넘겼다.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어, 엄마.”


털썩,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에 누운 모양이었다.


“…어쩜 이렇게 똑똑하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리체 아브릴은 천천히 드레스 룸 바닥에 앉았다. 그리곤 몸을 천천히 뉘이곤, 이난나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 자신과 똑같은 머리칼을 지닌 아이, 이난나 폰 아르님. 잔뜩 울어 코 끝과 얼굴은 붉게 올랐지만,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미소를 띤 아이였다.


“안녕, 엄마.”
“안녕, 우리 딸.”


- Dear My Lady,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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