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TERA_CM

루테라 / 손금

햄쮸님 커미션

 

 

저놈 잡아라!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불을 붙이려는 것도 멈추고, 달려오는 남자에게 발을 건 건 순전히 변덕이었다. 루드빅의 구두에 제대로 걸린 남자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고꾸라졌고, 저 멀리서부터 뒤쫓아온 동양인 소년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그 앞에 섰다. 남자의 손에 쥔 지갑을 낚아채듯이 가져가며 발로 엉덩이를 걷어차는 건 덤! 뒤이어 달려온 헌병대가 남자를 데리고 가면서 대낮의 소동은 그렇게 끝이 났다.

 

 

"나참, 뭔 놈의 나라가 소매치기가 이리 득실거리는지. 난 이하랑, 도와줘서 고맙수다. 저게 내 노잣돈이라 잃어버렸으면 큰일 날 뻔 했거든."

"노잣돈?"

"그, 여기 말로는 뭐라고 하더라? 아무튼 그런 게 있어. 근데 우리 아부지가 도움을 받으면 꼭 사례를 해야 한대서, 내가 돈으로 해주기는 어렵고……."

 

 

아, 그래. 대신 손금이라도 봐줄게. 뭐라 말하기도 전에 하랑이 덥썩, 여전히 담배를 쥐고 있는 루드빅의 손을 잡고는 손바닥이 보이게끔 돌린다. 이런 건 뭐 하러 돈 주고 피우나 몰라. 하랑이 손가락으로 가볍게 담배를 튕겨내자 루드빅이 참았던 실소를 터뜨린다. 그동안 여러 사람을 봐오긴 했으나, 이렇게 제멋대로이면서 어쩐지 제 하고 싶은 대로 놔두고 싶은 사람은 또 처음이다. 제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자신이 누군가 쉽게 말을 걸 생김새는 아니라고 여겼던 루드빅은,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빤히 바라보는 소년의 넉살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손금이라, 그러고 보니 동양에선 손바닥에 난 선을 기준으로 운명을 본다는 얘긴 들었는데.

 

 

"어디 보자, 연애운은 보통이고 직업운도 그다지……. 건강도 그저 그렇네."

 "좋은 건 없습니까?"

 "오, 있다. 하나 있어. 형씨, 생명선이 엄청나게 기네?"

 "생명선이요?"

 "여기 이렇게 엄지 옆으로 길게 뻗은 선 보여? 이걸 생명선이라고 하는데, 길면 길 수록 오래 산다는 의미거든. 하하, 좋은 거 하나 있어서 한시름 놨네!"

 

 

호탕하게 웃은 하랑이 루드빅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곤 몸을 돌린다. 그럼, 인연이 닿으면 나중에 또 보자고! 반대쪽으로 걸어가는 하랑의 발밑으로 아까 바닥에 떨어뜨린 루드빅의 담배가 밟혔다. ……저렇게 령이 많이 붙어있으면서, 생명선은 또 긴 게 저 형씨도 기구한 팔자로구만. 무심코 중얼거린 소년의 말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루드빅의 귓가에까진 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원래라면 의뢰도 없어 따분하게 보냈어야 할 오늘 하루에 할 일이 생겼으니까. 루드빅이 익숙하게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사이, 오후 세 시를 알리는 시계탑 종소리가 들린다. 이 근처에 세시만 되면 갓 나온 애플파이를 파는 브런치 카페가 있다. 미리 기다리고 있지 않으면 단 몇 분만에 동이 나서 살 수 없는, 커다랗고 따끈한 애플파이. 그리고 주말만 되면 그 파이를 사기 위해 줄을 서는 한 여자를 알고 있다.

 

 

"애플 파이 칼로리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습니까?"

 

 

한껏 기대에 찬 얼굴로 애플파이 상자를 품에 안은 테트라의 등 뒤로 조용히 다가간 루드빅이 물었다. 처음에는 기척 하나 내지 않고 뒤에서 부르면 소스라치게 놀라던 그녀가, 이제는 또 왔냐는 눈빛으로 뒤돌아보는 건 소소한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

 

 

"저번에도 알고 싶지 않다고 대답한 것 같은데요?"

 "그랬나요? 참, 다음 주에 공성전이 있는 건 알고 계시죠?"

 "네네, 알다마다요. 그래서 파이 칼로리는 몰라도 이거 먹은 만큼 운동할 생각이었네요."

 

 

꼬박꼬박 다 대답해 주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 테트라답다. 이 이상 행복한 디저트 시간을 더 방해하려 든다면 아무리 그녀라도 불같이 화를 낼지 모르니, 이쯤에서 미련 없이 보내주도록 할까. 아. 무언가 생각났는지 루드빅이 부러 천천히 걷고 있는 테트라의 손을 붙잡았다. 뭐, 뭐예요? 하마터면 파이를 떨어뜨릴 뻔했잖아요! 불만을 내뱉는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그녀의 손을 뒤집은 루드빅의 눈이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엄지 옆에 곧게 뻗은 선. 자기 손바닥에 봤던 것처럼 테트라의 생명선 또한 거의 손목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당신도 길군요."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던 길 가세요."

 

 

먹은 만큼 운동하는 건, 꼭 잊지 마시고요.

 영문 모를 소리에 반문하려는 것도 잠시, 테트라가 기분 나쁘다는 듯이 잡힌 손을 확 빼내며 씩씩거리는 걸음으로 걸어간다. 매번 놀리면 질릴 법도 한데 전혀 질리지 않으니, 신기한 여자야. 루드빅이 작게 웃으며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멈칫한다. 그 동양인한테 밟힌 내 담배가 돛대였군.

    

*

  

테트라는 유독 안개 지역의 시야를 보는 것을 두려워했다. 사람의 형체도 아주 가까이 와야만 보이는 이 뿌연 안개가 두렵다나 뭐라나. 하지만 그럴수록 적이 팀에 가까워지기 전에 안개 속으로 먼저 발을 들여놔야 한다고, 모의 공성전이 있을 때마다 루드빅이 늘 상기시켜 주곤 했다. 그럼에도 역시 실전에선 아직 그 마음가짐이 제대로 다져지지 않은 모양인지, 땀에 젖은 테트라의 손이 연신 치맛자락에 문질러진다. 누군가를 지키려면 그만큼 대범해져야 한다. 이론상으로는 분명 알고 있지만, 처음부터 능력자로 키워지지 않은 그녀로선 단기간에 이뤄내긴 힘든 일이다.

 입이 심심하네. 공성전에서만큼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 루드빅이 그녀와는 전혀 상반되는, 여유 넘치는 모습으로 골목 안을 바라본다. 지금부터 30초 후, 여기서 생겨나는 센티넬을 잡기 위해 90퍼의 확률로 적이 올 것이다. 공성전은 언제나 최대한 빨리 성장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이 곳에 오는 적 또한 상대 딜러일 테지. 기습으로 없애버린다면 상대 팀의 큰 전력 손실은 물론, 기울어가는 판의 전세 또한 역전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순간, 루드빅의 눈이 반짝였다.

 

  

"쫓아라!"

  

 

기다란 다리가 기세 좋게 상대의 어깨를 가격했다. 곧바로 다음 콤보를 넣으려던 차, 루드빅의 시야에 가격당한 상대의 뒤로 형체가 하나 더 들어온다. 젠장, 딜러가 아니었나. 급하게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그의 공격을 한 대 맞고도 버틴 상대가 루드빅의 팔을 붙들었다. 이대로라면 영락없이 공격을 맞아 쓰러지는 건 자신이 될 텐데.

  

 

"루드비히!"

 

 

 정확히 루드빅의 급소를 노린 날카로운 물체가 테트라가 만든 방어막에 가로막힌다. 아니, 막은 게 확실한가? 테트라가 잠깐 눈을 깜빡인 사이 파지직. 급하게 만들어낸 방어막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내 그 물체가 장갑을 낀 그녀의 손을 반쯤 관통한다. 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골목에 울려 퍼지면서 그제야 정신 차린 루드빅이 테트라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뒤늦게 쫓아온 지원군이 합세하면서 더 이상 누군가 다치는 일은 벌어지진 않았지만…….

 며칠 전만 해도 설레는 마음으로 파이 상자를 꼭 껴안고 가던 테트라의 손이 너덜너뎔해져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가 멘토로 삼은 제 실수 때문에. 원래 피 냄새가 이리도 비릿하고 속이 울렁거렸었나? 평소 의뢰인을 없애버릴 때는 여태껏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았던 이 냄새가, 이 혈흔이.

  이다지도 붉었던가.

  

 

*

 

  

다행히 신경까진 건드리지 않아서 손을 쓰는 데 무리는 없겠지만, 흉터는 남을 거야.

 

 

어쩌다 보니, 테트라의 보호자 역할로 의사와 얘기까지 나누고 온 루드빅이 피곤한 듯 마른 세수하며 침실 옆에 앉았다. 천하의 명의인 까미유 데샹마저 없애지 못할 흉터라니, 운이 없었다고 해야 할지 살아남은 게 용하다고 해야 할지. 정작 상처의 주인공인 테트라는 쌕쌕 숨소리까지 내며 새근새근 자고 있었지만 말이다. 몸이 찌뿌둥해서 빨리 퇴원하겠다는 걸 겨우 말려놨더니, 이렇게 잘 잠들 거였으면 뭐 하러 그 난리를 친 건지.

 붕대로 칭칭 감아놓은 첫날과는 다르게 흉터만 선명하게 보일 뿐, 점차 아물어가는 테트라의 상처를 보니 이전처럼 파이 상자는 혼자 잘 들고 다니겠네, 싶었다. 다만,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건.

  

 

"끊어졌군."

 

  

손목까지 쭉 뻗어있었던 그녀의 생명선이 중간에 생긴 흉터로 인해 마치 반쯤 끊어진 것처럼 보인다. 애초에 동양의 운세니 뭐니, 이런 걸 믿는 성격도 아니었으나 하필이면 다른 것도 아닌 생명선이어서일까. 심지어 똑같이 생명선이 길게 나 있는 자기 손바닥은 이리도 멀쩡한데. 웃기지 않은가? 처음 테트라를 만났을 때 루드빅은 그녀의 목숨을 빼앗으러 온 헌터였다. 그런 헌터가 본인이 죽이려 했던 상대에게서 목숨이 구해지게 된다니. 이건 어디 삼류 연극으로나 나올 법한 소재인데.

 루드빅의 손가락이 느릿하게 흉터 부분을 쓸어내렸다. 아마 이번 일 말고도 테트라는 루드빅과 엮인 것을 후회하게 되는 일이 앞으로 더 생길지도 모른다. 어쩌면 손이 아닌 다리, 배, 혹은 아예 꼼짝하지 못할 만큼 만신창이가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내 생명선은 아직 멀쩡하지 않습니까."

  

 

나와 같이 있으면 위험해질 수는 있어도, 죽게 놔두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큭큭. 본인이 내뱉고도 우스운지 고개를 숙인 루드빅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정정하자. 이딴 건 삼류 연극으로도 쓰지 않을 소재라고.

 

햄쮸(@ haemjjyu33) 님 커미션

 

카테고리
#기타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