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친구? 친구!

[인간] / 일짱 (AG_love__)

"마법이 쓰고 싶다고?“

놀란 듯 동그래진 새까만 눈동자가 몇 번인가 빠르게 끔뻑거린다. 감기는 눈꺼풀, 그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짙은 녹색빛. 어디선가 따듯한 온기 가득 담은 바람이 불어온다, 흩날리는 연갈색 머리카락. 그 틈으로, 잠깐이지만 보였던 어쩐지 외로운 웃음. 끔뻑, 한 번의 깜빡임으로 그 모든 순간은 거짓이었다는 듯 사라진다. 그저 한순간의 환상이라도 되었던 것처럼 금세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 공룡이 장난스레 입꼬리나 끌어 올린다.

"잠뜰, 너 같은 평범한 인간은 평~생을 걸어도 무리일 텐데?“

놀리듯 얄미운 어투에 허, 황당한 듯한 헛웃음이 터져 나온다. 야,

"너 저번에 몸 바뀌었을 때 기억 안 나냐?“

내가 보기엔, 내가 너보다 훨씬 재능 있어. 퉁명스러운 잠뜰의 태도에, 두 눈 몇 번 끔뻑이던 공룡이 맑게도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연신 키득거리는 목소리에는, 특유의 얄미운 장난기가 섞여 있다.

"글쎄, 그건 내 몸이었어서 가능한 거였다니까.“

그으러니까,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고. 적어도 마법에 대해선 내가 너보다 많이 알지 않겠냐? …이 자식은, 이럴 때 꼭 맞는 말을 해서 할 말이 없게 만든단 말이야. 짜증 나네. 공룡 향해 날카로운 시선 쏘아붙이면, 옅게 입꼬리 끌어 올린 공룡이 뻔뻔스레 어깨나 으쓱인다. 설령, 잠뜰 너한테 재능이 있다고 해도 말이야.

"마법에 중요한 건 재능 같은 게 아니거든.“

깜빡, 꽤 의외의 말에 이번에는 잠뜰이 빠른 속도로 제 눈을 끔뻑인다. 그 모습 가만 응시하던 공룡이, 한 번 더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뭐, 스크롤 정도야 얼마든지 빌려줄 수 있지만.

"그래도, 마법은 안 돼.“

늘어지게 기지개까지 켜는 느긋한 태도와는 다르게, 유독 답잖게 단호한 목소리. 묘한 공룡의 태도에, 잠뜰이 제 입이나 비죽거렸다.

"뭐야, 치사하게. 가문의 비전이다 이거냐?“

그때까지도 잠뜰에게로 가만 고정 되어 있던 새까만 눈동자가 데룩 굴러간다. 글쎄……. 유독 돌아오는 대답이 늦었다. 그에 이상함 느낀 잠뜰이 그 옆얼굴을 빤히 응시하면 마치 그 시선 눈치채기라도 한 듯, 그때까지도 새파란 하늘 잔뜩 담아내던 새까만 눈동자가 문득 시선을 똑바로 맞춰온다. 순식간에 반달처럼 접혀 올라가는 눈동자, 개구지게 끌어 올려진 입꼬리. 공룡 특유의 장난스러운 웃음이 얼굴 가득 떠오른다.

"그런 건 아니고~ 좋을 게 없잖아.“

영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잠뜰이 한쪽 눈가나 까딱였다. 왜? 편리하고 간지난다고 맨날 자랑한 건 너잖아. 으음…. 연신 무언가 고민하듯 양피지 끝자락이나 만지작거리던 공룡의 새까만 눈동자가 또 한 번 데룩 굴러간다. 이번에 응시하는 것은, 푸른 빛 가득 담은 초록 들판. 뭐, 지금이야 그렇게 보이겠지만.

"마법은 기적 같은 게 아니니까.“

뭔 헛소리야? 연속적인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의 행렬에 잠뜰의 미간이 옅게 구겨진다. 공룡의 말은 원래도 영 허무맹랑한 부분이 있었지만, 이 정도로 알 수 없는 말들만 늘어놓지는 않았었는데. 무엇보다, 답지 않게 묘하게 체념한 듯한 얼굴. 그것이 지독하게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법은,

"일종의 저주야.“

그제야 시선 똑바로 맞춰 온 공룡은 이상할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어디선가 매서운 바람이 불어온다. 그런 주제에도 피부 위로 맞닿아 오는 초록빛이 가득 담긴 바람은, 이상할 정도로 부드럽다. 잘 알고 있는 감각이다, 미약하게나마 느껴지는 익숙한 온도. 그 탓에 잘 정돈되어 있던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휘날린다. 꼭, 무언가 감추고 싶기라도 한 듯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 탓에 시야가 완전히 차단된다. 잠뜰은 이 바람이 어디로부터 기인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할 정도로 다정한 온도, 은은하게 감도는 초록빛이나 코끝 찔러오는 짙은 녹음 같은 것들. 공룡의 얼굴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잠뜰은 그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올라 있을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건, 자신에게도 익숙한 감각이었으니까.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지독한 외로움, 환하게 웃는 공룡의 얼굴에는 분명 그런 것들이 가득 묻어나오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잠뜰은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아마도, 자신은 지금 저 웃는 표정을 쉽게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우리는 친구? 친구!

-by 일짱-

활짝 웃는 공룡의 얼굴이 깨끗한 액자 속에 담겨 있다. 잠뜰이 그것을 시선만으로 뚫어버릴 듯 꼿꼿하게 응시한다. 간간히 들리는 훌쩍거리는 소리, 고요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검은 양복 단정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액자 앞에서 깊게 고개를 숙인다. 유서 깊은 가문의 유일한 도련님이 사망했다. 그에 대한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지만, 이상할 정도로 그를 기리는 장례식은 아주 단출하고 조촐하게 진행되었다. 잠뜰의 시선은 여전히 액자 속 환하게 웃고 있는 공룡에게로 고정된다. 반사된 조명 탓에, 공룡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잠뜰은 알고 있었다. 그래, 분명 본 적 있다. 액자 속 활짝 웃는 공룡의 저 얼굴은, 지독하게 익숙한 것이었으니까. 그제야 사진에서 시선 떼어낸 회백색 눈동자가, 그 옆으로 향한다. 액자의 바로 옆, 가장 가까운 위치.

쫑긋, 솟아오른 새하얀 토끼 귀. 그를 제외하곤 온통 검은색의 사람. 또렷하게 빛을 내는 주홍빛 눈동자가 마치 잠뜰의 시선을 예측하기라도 한 듯, 정확하게 눈동자를 맞춰온다. 잔뜩 눈물이라도 흘린 듯, 벌겋게 부어오른 눈가가 일순 부드럽게 휘어 접혀 올라간다. 다정하게 접힌 눈꼬리와 동시에 스며드는 짙은 보랏빛. 쉿. 곧게 뻗은 검지 손가락이, 부드러운 호선을 띄는 입가 위로 얹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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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쩡가에서 무슨 마법을 쓴 거예요.“

저택으로 돌아간 차 안, 또렷한 목소리가 고요하게 가라앉은 침묵을 깨트린다. 덕개와 라더가 놀란 듯 고개를 돌린다, 세 사람분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혔다. 공룡은, 절대로 죽었을 리 없다. 잠뜰이 내린 결론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만, 적어도 이 사실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액자 속 담긴 사진은,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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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깊은 가문인 만큼, 쩡가는 꽤 구식의 구조로 이루어진 저택이었다. 곳곳에 여러 가지 비밀 장치들이 숨겨져 있고, 개중에는 쩡가의 유일한 후계자인 공룡조차 접근할 수 없는 공간도 몇몇 있었다. 꼭, 소설책에서나 나올법한 마법의 저택. 감춰진 비밀, 숨겨진 이야기. 그런 것들은 어린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아주 충분한 요소였다. 운 좋게도, 공룡의 유일한 친구라는 명목으로 서로의 저택에 제집 드나들듯 접근할 수 있었던 잠뜰은 남들보다 그 저택을 탐방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금지된 서고에 들어갔다가 무서운 유령 사서를 만나기도 했고. 건드리면 안 될 금단의 마법을 건드려, 저택을 통째로 불태워 버릴 뻔한 일까지. 온갖 사건들이 있었으나, 그곳에서의 기억은 대부분 즐거운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그 틈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기묘한 기억. 신기한 것들 가득한 쩡가의 저택에 비하면 그닥, 감명 깊은 일은 아니었으나. 이상하게 무의식 깊은 곳에 진득하게 눌어붙어 있는, 기억 하나.

쩡가의 저택에는, 아주 이상한 방 하나가 있었다. 3층의 복도 끝, 가장 구석지고 낡은 방. 조금 낡은 감은 있었어도, 명문가의 저택답게 잘 관리 된 태가 나던 다른 방들과는 다르게 빛 하나 들지 않는 곳. 딱히, 금지된 곳도 아니었던 터라 잠뜰은 어렵지 않게 그 방에 접근할 수 있었다. 문을 열면 뽀얗게 쌓인 먼지가 자욱하게 올라오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방 한쪽 면을 빼곡히 채운, 공룡의 초상화. 명문가 자재들의 초상화가 가득한 건, 딱히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만. 그 그림들은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첫 번째로, 그림 속 공룡이 전부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는 것. 두 번째론, 보통 초상화를 이런 어둡고 먼지 쌓인 방에 쌓아 놓지 않는다는 것. 마지막으로, 당시 공룡의 나이는 고작 10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초상화는 아마도 공룡의 20살쯤 모습으로 추정되는 그림들도 존재했다는 것. 그 기묘한 위화감의 정체에 대해 더 자세히 파악하기도 전, 탁. 잠뜰의 어깨 위로 작은 손이 얹혀졌다.

"야, 너 여기서 뭐하냐?“

급하게 달려오기라도 한 듯, 조금 헝클어진 머리칼이나. 불안한 듯 흔들리는 동공.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묘하게 조급했던 공룡의 태도는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다만, 여전한 어린아이였던 잠뜰은 그 당시 그것을 별것 아닌 일로 치부하고 넘겨 버렸다. 세상에 마법 쓰는 마법사들도 있는데, 그깟 초상화 같은 게 뭐 대수라고. 초상화의 눈이 움직이기라도 했으면 모르겠지만, 고작 미래를 예측한 초상화 몇 점 쯤이야. 흔하진 않더라도 종종 있는 일이었고, 그저 괴상한 취미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일로 어린아이의 이목을 이끌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아예 신경이 쓰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 잠뜰은 공룡에게 그 방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래, 분명 그럴 생각이었다. 마주한 공룡의 표정이 지나치게 외로워 보이지만 않았다면, 분명 평소처럼 억지로 전부 캐내었을 텐데, 하필이면 그날 공룡은 유독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하지만, 그 외면의 대가가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 알았다면. 절대 그런 식으로 그냥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 방에서 봤던 그 모든 초상화들이, 이것을 위해 준비된 일이었다면. 그랬다면, 처음부터 그런 거였다면. 그 당시 공룡의 태도들을 이해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수현 가정교사의 그 태도. 분명하다, 이 죽음 뒤에는 무언가의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

"무슨 속셈인지는 몰라도, 막아야 해요.“

결연한 듯 또렷한 회색빛 눈동자는 망설임 따위 조금도 담고 있지 않다. 이대로 있다간, 어쩐지 영영 중요한 무언가를 놓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붙잡아야 한다. 이딴 식의 결말은 이쪽에서 용납할 수 없었다. 애당초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건 잠뜰의 성미에도 맞지 않았다. 당장, 쩡가로 찾아가야 해요. 곧바로 자신에게 동조해 줄 거라는 잠뜰의 예상과 다르게, 덕개와 라더의 반응은 유독 이상했다. 한참이나 조용해진 두 사람은, 정말로 곤란한 듯 서로 시선을 주고받더니.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슬픈 얼굴로 이렇게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아가씨, 충격받으신 건 알지만. 마법 같은 건….“

먼저 운을 뗀 건 집사장이었다, 아주 조심스러운 주제를 다루기라도 하듯 답지 않게 제 눈치를 봐 오는 모습은 평소라면 아주 좋은 놀림거리였겠지만. 이번만큼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뭐라고. 라더의 황당한 발언에, 잠뜰의 시선은 곧장 덕개에게로 돌아간다. 그때까지도 눈치 보듯 쫑긋거리던 강아지 귀는, 잠뜰과 시선이 맞자마자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아가씨의 마음은 알겠지만.

"아까, 수현씨가 얼마나 펑펑 우셨는지 아시잖아요.“

지금 저택을 찾아가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또렷한 잠뜰의 눈동자는 그대로 덕개에게로 고정된다, 그 시선이 여간 부담스러웠던 것인지 뭔지. 덕개가 시선을 슬, 피할 때까지도 계속. 서로의 기억 틈에 있는 기묘한 여백, 이상했다. 이건 너무나도 이상했다. 물론, 수현의 눈가 아래가 새빨갰던 건 맞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가 펑펑 울었다는 의미가 될 순 없었다, 그럼에도 덕개와 라더는 마치 실제로 그 장면을 목격한 듯 무척이나 서글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마치 마법 같은 건 모른다는 듯한 저 태도. 잠뜰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건 평소와 같은 둘의 질 나쁜 장난이 아니다. 저 둘은, 정말로 전부 잊어버린 것이다. 마법이 존재한다는 사실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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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소리조차 전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새까만 밤. 마찬가지로 새까만 로브 푹, 눌러쓴 여즉 어린 아가씨는 제 키의 5배쯤 되는 거대한 정문 앞에 섰다. 잠뜰은, 그 뒤로도 그 두 사람에게 제 기억을 공유하려 부단히도 애썼으나. 이야기하면 이야기할수록, 두 사람의 시선에는 어쩐지 묘한 동정이 섞여들 뿐이었다. 아마, 친구를 잃고 큰 충격에 빠진 자신들의 주인을 안쓰럽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그런 다정한 점은 싫어하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곧게 뻗어 나가던 푸른 덩굴도, 하늘에서 펑펑 내리던 새하얀 눈도. 밤하늘을 가득 수놓던 불꽃도, 전부 이렇게 제 기억 속에 선명한데. 그 색색깔의 기억들을, 그저 단순한 충격에 빠져 내뱉는 헛소리로 치부하는 것은. 그렇기에, 잠뜰은 결국 두 사람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룡까지 포기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두 사람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혼자라도 움직인다. 원래도 사용인들의 눈을 피해 혼자 빠져나오는 것 하나는 자신 있었다. 그것이, 이 야심한 시간에 어린 아가씨 혼자 굳게 닫힌 정문 앞에 서게 된 까닭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일단 도착하긴 했다만….

"어떻게 들어가지?“

평소에는 친구라는 자격으로 당당히 들어왔기에, 언제나 활짝 열려 있던 정문이었다. 덕분에, 이렇게 굳게 닫혀 있는 모습은 차마 예측조차 하지 못했다. 불행 중 다행인지, 쩡가는 사용인들을 거의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잠뜰의 이 수상한 행색이 들켜 쫓겨날 일은 없겠지만. 이래서야, 건물에는 접근도 하지 못하고 돌아가야 할지도 몰랐다. …담이라도 넘어야 하나? 아니면, 어디 개구멍이라도. 조금의 꼼수라도 부려볼까, 잠뜰이 열심히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순간이었다.

"아가씨.“

또각또각, 정갈하고 일정한 발걸음 소리. 듣는 이의 귀를 편안하게 해주는 귀족 특유의 나긋나긋한 음성, 그 소리의 주인 곧바로 알아챈 잠뜰의 고개가 재빠르게 돌아간다. 쫑긋, 솟아오르는 새하얀 토끼 귀.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와, 투명할 정도로 맑은 눈. 얼굴 가득 떠올라 있는 다정한 표정까지.

"역시나, 찾아오실 줄 알았어요.“

쏴아, 어디선가 조금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 탓에 푹, 눌러썼던 로브가 벗겨져 잠뜰의 맨얼굴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상대는 조금도 놀라지 않은 듯 부드럽게 눈꼬리나 휘어 접을 뿐이었다. 그 틈으로, 선명하게 새겨지는 은은한 보랏빛. 그래, 잠뜰이 아주 잘 알고 있는 익숙한 감각.

"…가정교사님.“

빛 하나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수현이 천천히 제 모습을 드러낸다. 탁, 경쾌한 손가락 튕김과 함께 두 사람 사이로 은은한 불빛 하나가 솟아올랐다.

"궁금한 게 아주 많으시단 얼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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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마법사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왔죠.“

타박타박, 기다란 복도를 수현이 거침없이 걸어간다. 등불 하나 들고 있지 않음에도, 수현이 가는 걸음마다 은은한 불빛 같은 것이 자연스레 따라붙는다. 마법을 모르는 누군가가 본다면, 기겁할 광경마저. 잠뜰에겐 이미 너무나도 익숙한 일이었다.

"어떤 날은, 세상을 구할 영웅이자 신으로서. 또 어떤 날은, 세상을 불태울 악마이자 괴물로서.“

이건 익숙한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공룡에게 꽤 자주 들었던 이야기였으니까. 어째서 마법 가문인 걸 숨기냐는 질문에, 공룡은 언제나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마법사란,

"사람들에게 미움받기 딱이거든요.“

여전히 부드러운 호선을 띈 입꼬리는, 이런 말을 내뱉으면서도 아주 당연한 이야기마냥 덤덤한 태도다.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다정하게 웃어오던 사람들은. 무언가 조금만 일이 뒤틀려도, 순식간에 태도를 뒤바꾸고 마법사들의 탓을 하기 일쑤였고.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조차, 그들의 탓으로 돌려 수도 없는 마법사들이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곤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언제나 반항 한 번. 작은 거부조차 할 수 없었다. 마법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해치는 순간, 다른 마법사들까지 덩달아 피해를 입을 것을 알았으니까. 그럼에도, 저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그들을 온전히 미워하기 어려웠으니까.

"덕분에, 지금은 쩡가가 유일한 마법 가문이 된 거지만요.“

지난한 세월의 역사 동안, 마법사들은 서서히 자신의 몸을 감추기 시작했다. 애당초, 대가 끊기니 마법이 이어지지 않아 그 수가 많이 줄었던 것도 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자신의 마법을 숨기고, 세상 틈으로 조용히 섞여 들어가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썼다. 그마저도,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자신들 또한, 그저 이름뿐인 가문의 명맥을 유지하는 게 다였던 이유는. 그 누구에 눈에도 띄지 않고, 그저 조용히 살아가기 위해서. 마법 가문이라는 이름을 포기하지 못한 까닭은, 스러진 마법사들의 의지를 잇는 마지막 길이었으니까. 이런 사정은 알지 못할 어린 아가씨는, 아마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겠지만. 옅게 웃은 수현이 천천히 잠뜰과 시선을 맞춰온다.

"그러니, 마법사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지우는 건 지나치게 익숙한 일이에요.“

3층의 복도 끝, 가장 구석지고 낡은 방. 발걸음 멈춘 수현이 부드럽게 눈꼬리를 접어 올렸다. …아가씨,

"지금이라도 돌아가신다면. 전부 없던 일이 될 수 있어요.“

영영 어두운 진실이나 현실 같은 건 모르는 채로, 그저 여태껏 살아왔던 세상에서. 즐겁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실 수 있을 테다. 그럼에도, 수현은 알고 있었다. 이 어리고 고집 센 아가씨는 절대로 돌아설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싫어요. 이대로는 찝찝해서 밤에 잠도 못 자거든요?“

그렇기에, 제가 선택한 사람이라는 사실도. 잠뜰의 대답에 수현의 입꼬리가 만족스러운 듯 끌어 올려졌다. 그게, 아가씨의 선택이라면.

-

빛 하나 들지 않는 방안은, 여전히 관리 된 기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이전과 한 가지 달라진 점이라면. 벽에 줄지어 있는 공룡의 초상화 중 중간 지점이, 텅 비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잠뜰은 그 초상화의 행방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 빈 자국 쓸어내리고 있으면, 탁. 또 한 번 경쾌한 손가락 튕김 소리와 함께 어두컴컴하던 방안이 순식간에 환한 불빛으로 가득 찬다. 이어 보여지는 풍경에, 잠뜰은 순간 경악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방 안에는, 공룡뿐만 아니라 수십여 명의 사람의 초상화가 가득 차 있었다. 공룡과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부터 다 늙은 시절까지. 전부 웃는 얼굴의 초상화들이.

"마법사들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많을수록 좋지 않아요.“

그 사람에게 어떤 나쁜 마음이 없다고 해도, 결국엔 양쪽 모두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니까요. 말은 전해지는 법이니까요. 의도 없이 선한 말 하나조차,

"마법사에게는 목숨의 위협이 되기 마련이죠.“

그러니까, 이 초상화들은 그때를 대비한 대안이에요. 언제라도, 존재를 지울 수 있도록. 어쩐지 씁쓸한 보랏빛 눈동자가 줄지어 놓여진 초상화들로 향했다. 이번만큼은, 이 초상화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언제라도 모습을 숨기고, 사라질 수 있도록. 원래라면, 장례식과 함께 타인의 기억에서 마법까지 전부 지우는 것이 원칙이지만….

"아가씨, 전에 도련님과 몸이 바뀌신 적 있으시죠?“

아마도, 그 탓에 아가씨에게 미약한 마력이 남아 버린 것 같아요. 덕분에 대형 마법에서 아가씨만 제외된 것 같고요. 물론, 원인을 알았으니 다시 기억을 지우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런 건, 바라지 않으시죠?“

그제야 또렷한 회백색 눈동자가 똑바로 시선을 맞춰온다. 이 모든 걸 듣고도, 두려움이나 망설임 따위는 조금도 없이 선명한 눈동자.

"…이 얘길, 저한테 왜 해주시는데요?“

희미하게 웃는 수현의 표정은, 평소같이 부드럽고 다정하지도 않았고. 언제나처럼 완벽한 얼굴도 아니었다, 하지만 잠뜰은 되려 그런 모습이 더 인간답다고 생각했다. 원래라면, 말해 줄 생각 같은 건 없었어요. 그저 기억을 아가씨의 기억까지 지워 깔끔하게 끝을 볼 생각이었죠. 느긋한 수현의 대답에 잠뜰의 미간이 옅게 구겨진다. 그럼, 왜-

"하지만, 도련님은 인간이니까요.“

잠뜰의 말 끊어먹은 수현이, 가볍게 어깨나 으쓱인다. 인간은, 외로우면 죽어버리는 생물이잖아요. 본디 마법사란 고독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 해도, 그 고독을 조금 덜어줄 친구 하나쯤은.

"눈 감아 줄 수 있거든요.“

일순 부드럽게 휘어 접히는 눈가와, 상냥한 호선을 띄는 입꼬리. 그 위로 곧게 뻗은 검지 손가락이 얹혀진다. 깜빡,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동그랗게 뜨인 회백색 눈동자가 빠른 속도로 끔뻑인다. 다만, 아가씨.

"기회는 한 번뿐이에요.“

이번 일은, 도련님의 의지가 더 강했거든요. 그러니까, 저도 이 이상으로 도와드리진 못 해요. 다치실지도 모르고, 성공하지 못하셔도 책임져 드릴 순 없어요. 그래도, 괜찮으세요?

"무슨 당연한 걸 물으시는 거예요?“

여기까지 와서, 도망칠 리가 없잖아요. 곧바로 돌아오는 즉답에, 결국 수현이 졌다는 듯 짧게 웃음소리나 터트렸다. 어쩌면, 이번에는 정말로 다른 결과가 기다릴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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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 그 멍청한 자식! 재촉하듯 땅을 박차는 발걸음은 갈수록 더 다급해진다. 사건의 전말을 다 들은 잠뜰은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공룡이 지금 몸을 숨긴 이유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잠뜰 자신이었다니. 얼마 전, 쩡가로 편지 하나가 날아왔댄다. 뽝가의 아가씨인 잠뜰, 자신에 대한 신상정보와 그가 마법사와 내통하고 있다는 악의적으로 교묘하게 사실을 편집한 찌라시 글과 함께. 그 정도야, 쩡가의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공룡은, 아마도 문득 두려워졌던 것 같다. 지금이야 이런 애들 장난 수준의 협박이지만, 정보는 확실하고 착실하게 어딘가에서 새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언젠가 잠뜰이 고작 자신과 함께했다는 사실만으로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이, 공룡의 근본적인 두려움의 원인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 이번 사건은 공룡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요청이었고. 수현으로선, 그걸 거절할 방법 따윈 없었다. 어디까지나, 쩡가의 사용인인 자신의 역할에선 지금 아가씨에게 언질을 드리는 정도가 최선이라고.

공룡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자신도, 제 탓으로 인해 공룡이 위험에 빠진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분명 죄책감을 가지게 됐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이제 와서 그깟 협박 따위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애초에 공룡이 아니더라도, 그런 내용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뽝가의 저택으로 날아오곤 했다. 그런 것들이 무서웠다면, 자신은 진즉에 저택 안으로 틀어박혔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이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고작 마법사랑 함께 어울렸다는 것만으로 사람들에게 핍박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애당초 대다수는 마법이 진짜겠냐며 코웃음을 치고 넘길 확률이 훨씬 높았다. 공룡도 이런 사실들을 몰랐진 않았을 텐데, 그럼에도. 그럼에도 공룡이 이런 선택을 한 까닭은. 문득, 그때의 그 웃음이 생각나는 이유는.

태어나길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니라고 분류되는 사람. 세상을 혼자 겉도는 듯한 외로움. 아마, 잠뜰로선 평생을 걸려도 전부 이해할 수 없을 그런 고독 같은 것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이라면, 그런 고독쯤 누구라도 가지고 있다고. 이 당연한 사실 하나 깨닫지 못한 멍청한 자식을, 만나면 반드시 한 대 쥐어패 줄 거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멋대로 사라질 생각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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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지도 않고 달려 겨우 도착한 곳은 새파란 들판이었다. 거대하게 솟아오른 커다란 나무 한 그루, 그 아래 그늘진 곳은 공부가 싫어 도망친 어린아이들의 가장 안락한 아지트 중 하나였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그곳에는 아주 익숙한 뒷모습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새까만 검은 로브를 눌러 썼지만, 그 형체만으로도 정체를 알 수 있는 아주 익숙하고 지겨운 사람.

​"야, 이.“

미친놈아! 곧바로 공룡에게 거의 뛰어들듯 달려든 잠뜰이 멱살을 틀어잡았다. 그 탓에, 반동으로 벗겨지는 검은 로브. 흩날리는 짙은 고동빛 머리칼, 놀란 듯 확장되어 끔뻑이는 검은 눈동자.

"…잠뜰, 너. 어떻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공룡의 표정에도 아랑곳 않은 잠뜰이 틀어잡은 손에나 더 강하게 힘을 줬다. 이렇게나 생생한데, 눈앞에 선명하게 살아 있는데. 붙잡고 있으면 제멋대로 도망칠 수 있을 리 없으니.

"공룡, 네가 예전에 그랬었지.”

마법은, 기적 같은 게 아니라고. 무언가 할 말이라도 있는지 뻐끔거리던 공룡의 입은, 그 말과 동시에 그대로 굳게 다물려 버린다. 그런 말을 들은 이상, 다음에 나올 말을 예상하지 못할 것도 아니라. 공룡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저 데룩. 눈동자나 굴려 저 또렷한 회백색 눈을 피하는 것이었다.

"그래, 네 말대로 마법은 기적 같은 게 아니야.“

예상대로, 결국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들었다. 적어도, 다른 이는 몰라도 잠뜰에게서만큼은 듣고 싶지 않았는데. 하기사, 이렇게 당했으니 마법 같은 거 이제 지긋지긋해 졌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주 따위도 아니야.“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란 듯 동그래진 새까만 눈동자가 잠뜰에게로 시선 쏘아 보낸다. 공중에서 두 사람분의 시선이 마주친다. 끔뻑, 공룡이 연신 동그래진 눈만 깜빡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선명한 목소리에. 또 또렷한 그 눈동자에, 너무나도 확실하게 담겨 있는 굳은 의지 같은 것을 읽어버린 탓이었다.

"네가 예전에 그랬었지. 기술의 발전이 마법보다 더 기적 같은 일이라고.“

반쯤 억지로 친구라고 우겨 데려간 시계탑, 그 위에서 내려다 보이던 화려한 기술의 발전. 순식간에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매혹적인 풍경. 그래, 그 당시 공룡은 그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이라고 생각했었다.

​"근데, 어떤 사람들은 기술의 발전을 보고 악마의 형벌이라고 말해.“

일자리를 빼앗고, 지신들을 죽이려고 든다고. 그렇게 나도 수도 없는 원망을 들었어. 협박 편지, 그깟 거 이미 잔뜩 받아봤다고. 그래도 나는, 그래도 나는 말이야.

"단 한 번도, 스스로 이 삶에 외부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어.“

나를 지지해 주는 수많은 사람들, 옆에 있어 주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끔뻑, 연속적으로 뱉어내는 잠뜰의 말은 당장 완전히 이해하기엔 어려운 것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저 말이 무슨 의도인지 또 모를 것은 아니라서.

"…하지만, 너는.“

​"너도 나를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해?“

잠뜰의 질문에 공룡이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전혀. 그럴 리가 없잖아. 애당초 인간이고 아니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너는-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공룡의 말 뚝, 끊어먹은 잠뜰이 그제야 거칠게 잡았던 멱살을 놓아준다. 마법은 그냥 개개인의 특성일 뿐이야. 너는, 기적을 일으킬 신도 아니고 저주를 불러올 악마도 아니야. 물론, 처음에는 공룡의 마법에 흥미를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 없어도. 애초부터, 그런 것 따위 없었어도.

"너는, 그냥 내 친구잖아.“

인간이고 아니고는 중요하지 않다. 애당초, 타인을 완벽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누구나 이 세계의 외부인이 될 수 있고, 또 누구든 그 타인에 의해 다시금 이 세계의 일원이 되고는 한다. 하지만, 전부 버리고 도망쳐 버린다면 그런 기회 따위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여즉 멍청한 얼굴 하고 있는 공룡에게로 잠뜰이 매서운 시선을 쏘아 보낸다.

"야, 대답 안 하냐?“

끔뻑,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건지 눈 한 번 깜빡인 공룡의 새까만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짙은 녹빛이 스며든다. 잠뜰.

"너, 지금 엄청 중2병 같았어.“

끔뻑,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에 이번엔 잠뜰이 빠른 속도로 두 눈을 끔뻑인다.

"…너는 일단 한 대 맞고 시작하자.“

그 말을 신호탄으로, 마치 약속이라도 된 듯 공룡이 재빨리 뒤로 뛰어오른다. 동시에 휘둘러지는 잠뜰의 매서운 주먹. 그 뒤로는, 그저 당연하게 언제나처럼 엉망진창이 될 때까지 추격전을 벌이게 될 것이다.

"으하학, 잠뜰. 너 같은 컨트롤로는 날 절대 못 잡는다니까?“

새파란 덩굴 타고 나무 위로 올라간 공룡이 시원스럽게도 웃었다. 아마도, 이 제멋대로인 친구는 끝까지 자신을 붙잡을 생각인 것 같으니까. 조금 정도는, 더 어울려 주는 것도 분명 나쁘지 않을 터다. 그래, 언제 나와 같은 일상.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조금만. 조금만 더 믿어보도록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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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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