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불신종말론
[인간] / 이구승 (@29__THDO3)
사람 하나 사라지는 것쯤이야 이상할 것 없는 동네에서 지금까지 살아낸 어린 아이들의 인생은 도대체 어떻게 망가져 있는가. 그런 걸 누가 알겠는가. 애초에 그런 동네에서 자란 어린 아이들은 자신의 삶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자신들의 삶이 당연하고 정상적인 것인 줄 알고 자라는 아이들이 스스로의 삶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알아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폐쇄된 시골 마을에서 그러한 차이점을 보고 느끼기에는, 아이들이 실현할 수 있는 것들은 그리 많지 않다.
당연한 일이다. 아동용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주인공들에게나 그러한 슈퍼- 파워가 있는 거지 현실에 그딴 게 가능할 리가 없다. 현실 속에 있는 어린 아이들에게 슈퍼 파워가 주어지는 날이 오기를 비느니 차라리 인류가 멸망하는 것을 비는 것이 현실적이다. 정형준은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 그러한 초능력과 같은 힘이 생겨나길 바란 적이 있었던, 어린 아이였던, 지금은 훌쩍 자라버린 청년이라면 누구나 알 수밖에 없는 일이다.
정형준은 언젠가 자신에게 초능력이 생겨나길 바랐던 적이 있었다. 초능력이 생겨나길 바랐던 어린 정형준은 결국 초능력 따위 없는 보잘것없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스물한 살의 정형준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돈도, 명예도, 그 무엇도 가지지 못한 작고 폐쇄된 시골 마을의 힘 없는 누군가일 뿐이다. 정형준이 바꿀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그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던가. 애초부터 자신의 인생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깨달았으면 안 됐던 거다.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정형준은 밑도 끝도 없이 불행한 인생에 처박혔다. 그대로 그 구덩이에 얼굴을 처박은 채로 쉴 수 없는 숨을 가쁘게 쉬어오는 삶을 살았다.
제가 얼굴을 박고 있는 곳이 조그만 숨구멍 하나밖에 없는 구덩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정형준은 가끔 그 사실을 깨우쳐버린 자신을 원망했다. 아니, 가끔이 아니었다. 꽤 자주 있는 일이다. 애초에 자신이 불행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보다 더 좋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면, 정형준은 평생 아무것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이 우물이 정말 좋은 곳이라고 떠들며 살았을 텐데.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에 있는 다른 어른들이 원하는 대로 말이다.
비정상들 사이에 끼어있으면 내가 아무리 정상이더라도 수가 딸리는 쪽이 비정상이 되는 거랬다. 지금 정형준이 딱 그랬다. 정형준은 지금 비정상들 사이에 끼어있는 비정상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맑은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일지도 모른다. 그 물이 정말로 맑은 물로 보인다면, 정신이 단단히 나간 거겠지만.
자신이 살아온 세상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정말 별일이 아니었다. 개소리를 그럴듯하게 써 놓은 책들밖에 없는 집과는 다르게 제 집에는 동화책들과 비디오 몇 개가 남아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제가 살던 세상이 죄 다 개소리라는 걸 깨닫는 것은 빨랐다. 비디오에 녹화된 부모님의 얼굴이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고 동화책 속의 이야기는 납득이 갔다. 그뿐이었다. 화면 속에서밖에 볼 수 없는 부모님의 밝은 표정도 이해할 수 없었고, 어린 애들이나 보는 동화책 속의 세계가 훨씬 더 납득 간다는 사실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삶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열여섯 살이었다.
열여섯 살의 정형준은 자신의 삶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다 저 같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었다. 생각해보자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삶을 살았다면 인류는 이미 멸망하고도 남았을 거다. 어제까지만 해도 잘만 말하고 떠들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죽은 채로 발견되어도 아무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제정신이고서야 할 수 있는 짓거리던가. 모두가 정신이 나갔다. 이곳의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다. 담임 선생님도, 자신에게 한없이 다정하게 굴던 경찰 아저씨도, 항상 인자한 미소로 자신에게 말을 걸던 이장 아저씨도, 그리고 자신의 부모도.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다.
열여섯 살에 어떤 초능력을 꿈꿨다. 자신의 나이에는 맞지 않는 소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매일 밤 자신에게 슈퍼 - 파워가 생기기를 빌었다. 이 정신 나간 시골 마을에서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이 탈출한 이후 평화롭게 살아가는 어떤 날을 꿈꿨다. 매일 밤 꿈꾸고 그려왔지만 단 1퍼센트도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 인생은 간절히 바란다고 되지 않는 일이 너무나도 많은 법이더라. 정형준이 그렇게 간절히 바라왔던 꿈은 조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형준은 여전히 그 시골 마을에 박혀있었고, 제 친구들은 자신들의 삶이 이상할 수도 있다는 의심조차 품지 못한다. 자신의 부모는 1페이지부터 약 800페이지까지 모든 장이 개소리로 이루어진 책-마을 사람들은 교리책이라고 부르더라-을 손에서 떼어놓질 못했다. 바뀐 것은 없었다. 그저 정형준이 조금 더 대가리가 컸고 법적으로 성인이 되었다는 것뿐이다. 열여섯 살의 정형준이 바라던 스물한 살의 정형준은 시골 마을을 뒤엎고 경찰에게 모든 사실을 고발한 이후 자신의 가족과 지인들을 데리고 도시에 나와서 사는 멋있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의 정형준은 단 한 가지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그저 술과 담배를 멀리하라는, 800쪽에 육박한 교리책들 중 몇 없는 제정신인 대목을 치기 어린 반항심에 어겼다는 것뿐 하나였다. 찌질하기 그지없다.
“담배 냄새.”
제 친구는 그런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곤 했다. 그나마 교리를 어긴 친구와 절교를 할 정도로 종교에 깊게 빠진 것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간에 제 친구는 그런 자신을 그리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부정 못 할 사실이었다. 그나마 자신이 마을 사람들 눈에 안 띄게 멀리까지 나오는 정도의 성의라도 보이니 참아주는 거다. 시골 마을은 존나 좁아서 소문이 잘 퍼지지만, 또 존나게 넓고 쓰지 않는 땅이 많아 소문이 잘 나지는 않는다. 정형준이 자주 이용해먹는 시골 촌구석의 특징이었다.
가로등은 사치, 아스팔트는 개뿔 콘크리트조차 깔려있지 않은 마을 공터는 사람 하나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음침하다. 흙 바닥은 습기를 잔뜩 먹어 눅눅하고 질척하다. 거리에 널려있는 휘발유 하나를 집어왔다. 좆같은 구석밖에 없는 시골 마을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다. 휘발유가 거리에 널려있어서 대충 주워오기만 하면 된다는 건 도시에서는 꿈도 못 꾸는 일이다. 애초에 도시에서는 휘발유를 파는 곳도 많이 없지 않나? 잘 모르겠다. 도시에 나가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몰래 다락방 티비에서 방영하던 드라마에서나 본 도시를 자신이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 씨발. 그나마 바깥세상에 대해서 잘 아는 듯이 말했지만 정형준 역시 결국 우물 안 개구리였다. 이 우물 밖에 사는 사람들은 더 좋은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는, 사실상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은 점 하나 없는 우물 안 개구리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이 책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좆같다. 자신을 이렇게나 조그만 세상에 가둔 것이 자의식도 없는 종이 쪼가리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그런 자신의 생각을 잘 알고 있던 제 친구는 그저 자신이 하는 양을 얌전히 지켜만 보고 있을 뿐이다.
“너 이게 몇 번째냐?”
“여섯 번?”
“징하다.”
“뭘.”
“그래서 담배는 안 끊냐?”
“만날 때마다 그거 물어보는 너가 더 징하다.”
“뭘, 또. 친구가 맞아 죽을까 봐 그렇지.”
“신고나 해 줘.”
“…하긴 할게.”
박슬기의 말에 정형준이 픽 웃었다. 제 집에서, 자신의 친구 집에서, 교회에서 빼돌린 수 권의 책들을 한곳에 모은 정형준이 그 위로 휘발유를 부었다. 얇고 투명한 종이 쪼가리에 휘발유가 축축하게 젖어 든다. 필터까지 타들어 간 담배꽁초를 그 위로 던지자 불이 확 옮겨붙었다. 이래서 가을에는 담배꽁초 조심히 버리라고 하는 거구나. 존나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나 하며 정형준이 형체를 잃고 타들어 가는 책들을 바라본다. 입꼬리를 죽 늘여 웃은 정형준이 멀찍이 떨어져 그 꼴을 바라보는 박슬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재밌냐, 너는.”
“재밌어 보이냐?”
“잘 모르겠다.”
“어, 나도 잘 모르겠다.”
근데 슬기야, 이런 거라도 안 하면 진짜 죽을 거 같아서 그래. 정형준의 말에 박슬기가 괜히 죄 없는 흙 바닥을 신발 앞 코로 툭툭 찼다.
“…그렇다고 책 태우는 게 뭔 의미가 있냐.”
휘발유에 축축하게 젖은 종이가 타들어 가며 검은 연기를 뿜어낸다.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던 박슬기가 말했다.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는다. 아니, 물음이 아니라 타박에 가깝다. 걔는 자신의 이 모든 행동이 쓸데없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박슬기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정형준이 하는 일은 이 미친 시골 구석에 단 일 퍼센트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테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책 몇 권 훔쳐서 갖다 태우는 게 뭐 얼마나 큰일이라고. 담배를 피우는 것도 그랬다. 교리에 어긋난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굉장히 큰 반항 같고, 사회가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질 것 같지만 정형준이 피우는 것은 그저 담배 한 대다. 대한민국에 사는 만 19세 이상 성인이라면 누구나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것 말이다.
존나 의미가 없다. 차라리 이따위 짓을 할 시간에 자신 혼자 마을을 탈출하는 것이 빠르다.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본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열여덟, 자신에게 슈퍼 - 파워 같은 것이 생기는 것을 비는 것보다 시골 마을에 존나 큰 유성 조각이 떨어져서 다 죽는 게 빠르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로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루트는 많았다. 007 마냥 첩보 요원 같은 민첩함이 있어야만 탈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이 마을이 비정상이라는 사실 하나만 알고 있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게 탈출이었다.
그래서 성인이 되기까지 기다렸다. 성인이 되면 독립할 수 있으니까, 라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런데 정형준은 왜 성인이 된 지금도 이곳에서 나가지 않고 있는가. 답은 간단했다.
“신? 좆까라 그래. 그런 기적이 진짜 올 거라고 생각하냐, 너는.”
“…뭔 말을 그렇게 하냐.”
“슬기야. 우리 신은 졸업 좀 하자.”
내가 그놈의 신을 안 기다려본 줄 아니. 그 신이라는 것만 내가 10년을 기다렸어. 처음에는 신이라는 게 궁금해서, 다음에는 그게 진짜 있는 건가 해서,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딴 게 정말로 존재한다면 날 좀 구해줬으면 싶어서. 그런데 그 10년간 신이라는 건 코빼기도 보이질 않더라. 내가 신을 향해 가졌던 감정이 동경과 기대에서 증오와 원망이 될 때까지 신이라는 건 단 한 번도 내 인생에 나타난 적이 없었어. 애초에, 신이 있는 게 말이 되니.
정형준의 말에 박슬기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이유를 정형준은 잘 알고 있었다. 박슬기는 21년 평생을 신이 있다고 믿고 살아왔다. 중간에 그 신이라는 존재가 조금 바뀌는 일이 생기기는 했지만, 아무튼간에 걘 아직도 신을 믿었다. 정형준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믿던 신이 개뻥구라라는 걸 알게 된다면 신은 애초에 없다-는 식으로 사고방식이 흘러가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던가? 아무래도 박슬기와 자신의 사고방식은 꽤 많이 다른가 보더라. 박슬기는 아직도 신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정형준이 보기에는 멍청한 짓이었다.
“넌 도대체 이 세상에서 믿는 게 뭐가 있냐?”
“음?”
“신도 안 믿지, 귀신도 안 믿지, 인간도 안 믿지…. 너 나는 믿긴 해?”
퉁명스러운 박슬기의 목소리에 정형준이 입을 열었다.
“난 나도 안 믿어.”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는 비릿한 기름 냄새와 재 냄새만 돌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축축한 흙에서 올라오는 비릿한 냄새뿐이던 공터에는 이제 매캐한 냄새밖에 나지 않는다. 지독한 침묵이다. 정형준은 담배를 한 개비 더 꺼내어 물었고 박슬기는 다 타버린 잿더미를 발끝으로 헤집을 뿐이었다.
박슬기는 정형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른다. 박슬기는 신도 믿었지만 게 중 가장 믿는 것은 자신이었다. 자신 외의 인간들은 절대 믿지 않는 인간 불신자가 바로 자신이었다. 그리고, 정형준은 자신보다 더한 놈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의심하고 경계하며 사는 것이 정형준이다. 박슬기는 정형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애의 머릿속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궁금하다. 박슬기에게 정형준은 평생토록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존재였다. 뭐,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기는 하다만. 정형준이 조금 더 알 수 없다고 할 수 있겠다.
박슬기와 정형준은 소꿉친구였다. 이 조그만 시골 마을에 동갑내기가 얼마나 있겠는가. 자신들 역시도 해봐야 자신과 정형준, 그리고 황수현까지 셋뿐이다. 그리고 정말로 놀랍게도 박슬기는 자신을 제외한 두 동갑내기들 중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다. 교육이라고 해봤자 다 같은 교육을 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왔는데. 우린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달라졌는지. 담배를 입에 문 채로 깊이 빨아들이는 정형준을 보고 있자면 참 궁금했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긋났길래 서로를 이렇게 알지 못하는지. 우린 왜 이렇게 달라졌는지.
박슬기는 정형준과 황수현의 중간 그 어디쯤에 있었다. 황수현은 마을의 종교에 빠져있었고, 정형준은 종교와는 진즉에 담쌓았다. 박슬기는 그 둘 중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다. 정형준 말을 듣고 보니 교리책이라고 부르는 그 두껍기만 한 책에 적힌 내용은 하나부터 열까지 죄 개소린데, 그런 조잡스러운 종교에 빠져있는 황수현을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마을이 좆같다고 제가 할 수 있는 반항이란 반항은 죄 하고 있는 정형준도 이해할 수 없다. 그냥 그 사이 어디엔가 끼어서 유들유들하게 살아가면 되는 거 아닌가? 박슬기는 정말로 그들의 사고방식이 궁금했다.
황수현은 자신들을 믿는다. 박슬기는 정형준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정형준은 본인 또한 믿지 않는다. 기묘한 동갑내기들의 관계는 그렇게 21년을 흘러왔다. 나름 평탄하다고 생각했다. 겉으로 티 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 불화와 다툼이라는 거다. 그런데 그 흔한 불화나 다툼도 없었으니 평탄한 거겠지. …그래, 그렇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정형준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인간불신종말론
정형준이 사라졌다. 비가 미친 듯이 쏟아붓던 그 날부터 며칠째 정형준이 보이지 않았다. 황수현에게 달려가서 정형준을 보았느냐 물었다. 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을 한 황수현을 붙잡고 정형준네 집을 찾아갔다. 걔네 아빠는 의아한 눈빛으로 ‘좋은 곳에 갔을 아이를 왜 찾느냐’고 말했고, 어머니는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기대도 한 적 없었다. 사람 하나 사라지는 게 도대체 무슨 큰일이냐는 눈빛을 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보자니 구역질이 올라왔다. 황수현은 그제서야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다들 알고 있었다. 사라지는 사람들이 사실은 다 죽은 거라는 걸, 제물이 되어 죽은 시신은 화장도 하지 않은 채로 뒷산에 묻어버리고는 그것을 ‘좋은 곳에 갔다’고 칭한다는 것을 말이다. 때로는 제물을 자처하는 사람이 있기도 했다. 보통은 아니었지만.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제사를 지냈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보다 더 자주 사라지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자면 참 기묘한 일이었다. 어렸을 땐 그게 당연한 건 줄 알고 살았는데. 그게 아니랜다. 그제서야 기묘함을 느꼈다. 그동안 우리는 어쩌면, 무시했던 건지도 모른다. 아무렇게나 공통점 없이 사라지던 마을 사람들, 소리소문없이 사라져서 아무도 모르게 뒷산에 파묻히는 시체들, 그리고 그 사실들을 알고 있지만 경찰 역시도 아무 말이 없는 곳. 그런 곳에서 우리는 살았던 거다. 그 사라지는 사람들이 내가 될 일은 없을 것이라 굳게 믿으면서 말이다.
그제서야 위기감을 느꼈다. 정형준은 눈에 띄게 반항심을 가진 애였다. 이 마을에 적대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걘 이 마을에 진절머리를 냈다. 아무리 숨긴다고 숨겨도, 이 작은 시골 마을에서 그게 숨겨지는 일이던가. 정 씨네 막내아들이 사탄이 들렸다는 소리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알음알음 이 마을에서 퍼지고 있었다. 다들 그저 사춘기이니 곧 그러다 주님의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대며 무시했을 뿐이었다. 아, 여기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은 “주님” 부분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겠다.
아무튼간에, 그런 정형준이 성인이 되어서까지 반항심을 그득그득 품고 다니며 하지 말란 짓들은 죄 하고 다녔으니, 마을 어른들 눈에 그게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사람들 없는 곳에 가서 몰래 피는 담배 한 대를 정말로 아무도 몰랐을까. 부모님이 그걸 모르기는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하더래도, 흡연자는 그 특유의 이질적인 냄새가 난다. 은은한 담배 냄새. 정형준에게서 나던 은은한 담배 냄새가 코끝에 스치는 것만 같았다. 걘 여기에 이제 없는데. 다시는 이 마을에서 맡을 수 없다는 생각에 괜시리 울적해졌다.
슈퍼 - 파워를 꿈꾸던 걔는 이제 여기에 없다. 그런 허황된 꿈을 가질 정도로 이 마을이 싫었던 걔를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다. 황수현은 그제서야 깨달은 것 같았다. 우리 역시도 그 망할 제물인지 뭔지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놈의 종교는 꾸준하게도 어린애라고 봐주는 일이 없었다. 그러니, 우리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종교를 신실하게 믿으면 신실하게 믿으니 좋은 곳에 가라며 제물로 바치고, 종교를 믿지 않으면 사탄이 들렸다면서 제물로 바친다. 이런 씨발. 빠져나갈 구석이 없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 묻혔을지도 모르는 걔를 위해서 뒷산에 올라 닿지 못할 말을 지껄이는 것뿐이었다. 국화꽃을 구할 곳이 없어서 대충 하얀색 들꽃을 꺾어갔다. 가장 최근에 파헤쳐진 흔적이 있는 곳에 대충 걸터앉았다. 황수현과 박슬기 사이에는 짙은 침묵만 흘렀다. 이제까지 겪어본 적 없는 기분이다. 지금까지 사라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만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일을 당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박슬기는 사람을 잘 믿는 편이 아니었다. 제 부모마저도 쉽게 믿지 않아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자신을 키우는 데 꽤나 진땀을 빼곤 했었다. 그런 자신이, 멍청하게 제물이 될 것이라 생각한 적 없었다.
그런데 씨발. 자신 스스로도 믿지 않던 인간 불신자가 사라졌다. 스스로마저도 믿지 않는 애가 하루아침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생존은 멍청하고 똑똑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무차별적인 폭력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안전하지 않다는 감각이 이제서야 들었다. 우리들 중 한 명이 이미 사라지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안전하지 않다. 우리 또한 언제든지 그들의 타겟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그저 그들의 제물 후보들 중 하나일 뿐이다.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있잖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글쎄. 넌 방법이 있어?”
“잘 모르겠다. …야, 수현아. 이제 좀 그런 생각은 들어. 정형준이 그렇게 반항할 때, 우리가 같이 해줘야 했지 않았나…, 같은 생각.”
“이제 와서? 아니,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같이 해줬으면 뭐가 달라져? 그냥 손잡고 죽으러 가는 것밖에 더 되냐고.”
“그래도. …그래도 이렇게 혼자 죽어버리는 것보다는 좀 낫지 않았을까.”
박슬기의 말에 황수현이 눈을 끔뻑였다. 나는 잘 모르겠다…. 황수현이 중얼거렸다. 답답하기는 해도 이해가 가는 말이었다. 황수현은 지금까지 자신이 믿는 그 미친놈의 종교가 진짜라고 믿으면서 살아온 애였다. 평생토록 그게 옳다고 믿으면서 살았고, 그것만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살았다. 뭐, 박슬기 자신 역시도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만. 아무튼간에 지금까지 21년 평생을 제 종교에 대해 어떠한 의심도 없이 살아온 사람에게 갑자기 네 종교는 개 쓰레기라는 것을 알려준다는 것은 글쎄, 당장에 자신을 죽이려 들지 않는 것만 해도 감사할 지경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박슬기는 그에게 사실을 알려줘야만 한다. 뭐, 의무감 이딴 것보다는…. 그저 당장 누구에게라도 이 마을이 정신 나간 곳이라는 걸 알리지 않는다면 자신이 미쳐버릴 것 같아서, 라고 말해둘 수 있겠다. 정형준이 신을 믿지 않는 이유를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정말로 신이라는 게 있었다면 우리는 이미 구원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었다.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목숨을 가지고 우리는 이 귀중한 하루하루를 신이라는, 증거도 없는 실체를 숭배하느라 낭비하고 있었다. 신을 믿지 않는다던 정형준은 사실 그 누구보다 가장 똑똑한 애였다. 그리고, 그 애가 사라진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박슬기가 황수현의 어깨를 툭툭 쳤다. 박슬기가 해야 할 일은 뻔했다. 이 미친놈의 마을에 퍼진 집단 숭배를 멈출 방법이 제게는 없다. 그렇다면, 박슬기는 자신이, 그리고 자신의 이 불쌍한 친구가 이 마을에서 안전하게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입이 바싹 마르는 것만 같다. 그런 박슬기의 마음을 아는 건지, 기가 막힌 타이밍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걸로 입이라도 축이라는 걸까. 빗방울이 툭, 툭 떨어지며 옷을 적시는 것을 빤히 바라보던 박슬기가 입을 열었다.
“야 수현아. 우리, 나가자.”
“나가자고? 뭘?”
“이 마을. 나가자고.”
제 말에 황수현이 별 미친 소리를 다 들었다는 듯이 자신을 바라본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것이 어쩔 수 없다. 자신이 지금 있는 곳이 그리 썩 좋은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서도, 그 바깥이 이보다 더 최악일 가능성을 생각하느라 벗어나지 않는 것. 저와 황수현이 지금 딱 그 꼴이었다. 이 마을이 도시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평화롭고 안전한 곳이라고 세뇌당하며 자랐다. 교리책을 읽으며 이것이 우리가 사회에서 꼭 지켜야 하는 것들이라 배우며 자랐다. 그렇게 산 세월이 21년이다. 이것들이 모두 거짓이라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흙이 비에 젖으며 흙 특유의 비린내가 올라왔다. 오늘따라 이 냄새가 끔찍하게 싫다. 이 속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몸이 묻혀있을지 상상만 해도 안 좋다. 우리는 이 사실을 뻔히 알고도 그동안 모른 척 해왔다. 어른들의 일이라고만 생각했으니까. 그 대상이 우리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그런데, 이제 그 대상이 우리가 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고양이한테 쫓기던 쥐도 궁지에 몰리면 오히려 고양이를 공격한다고 했다. 어차피 죽기밖에 더하겠냐는 거다. 인간 평균 수명 팔십 년, 그리고 우리는 그중에 겨우 사 분의 일을 살았다. 벌써 죽기에는 아깝다.
“들어봐. 여기에 있으면 어쨌든 간에 죽어.”
“안 죽을 수도 있잖아.”
“…넌 아직도 마을 사람들을 믿어? 정형준이 죽었어. 우리가 그, 제물인지 뭔지가 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가 없다니까.”
황수현이 앓는 소리를 낸다. 빗소리가 더더욱 커졌다. 옷은 이미 다 젖은 지 오래였다. 차라리 이게 나았다. 누군가가 자신들의 대화를 듣는 것보다야, 젖더라도 빗소리에 목소리가 묻히는 것을 바라는 편이 낫질 않겠는가. 손끝이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불쾌한 감각에 박슬기가 눈을 찌푸렸다.
“…아무도 믿지 마. 나만 믿어.”
“아무도?”
“응. 신도, 지금은 믿지 마. 찾지 마.”
한 번도 응답한 적 없는 신이 이제 와서 우리를 도와줄 리 없잖아. 제 말에 황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미친놈의 마을을 탈출해야만 한다. 정형준을 죽인 마을 사람들이 그의 친구인 자신들을 그냥 둘 리가 없다. 어떻게든. 어떤 이유로든 자신들을 제물인지 뭔지로 바칠 것이 명백하다. 황수현은 신실한 종교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에게는 사탄이 들렸다는 이유로. 이유는 어떻게든 꾸며낼 수 있다. 장례는 무슨, 마을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자신들이 좋은 곳에 보내준 것이니 좋아할 것이라며 자기 합리화를 할 것이 뻔하다. 박슬기는 그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죽고 싶지 않다.
우리가 다를 것이라는 주인공적 사고방식을 버릴 때가 되었다. 우리는 이 넓은 우주에 단 1퍼센트의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그저 한 마리 동물일 뿐이다. 우리는,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마지막 발악이랍시고 깽판을 치는 것조차도 사치인 것이 지금 박슬기와 황수현이 처한 상황이었다. 반항한답시고 교리책을 훔쳐다가 불태우던 정형준은 어떻게 되었는가. 답은 하나였다. 우리는 지금 당장 존나게 튀어야 한다. 이 미친놈의 마을에서 도망쳐야 한다. 반항이고 깽판이고, 그런 걸 생각할 처지조차 되지 않는다. 죽고 싶지 않다면, 선택지는 없다.
*
마을에서 도망치는 루트는 꽤 많았다. 지금까지 왜 정형준이 마을에서 도망가지 않았는지가 의문일 정도로 많았다. 아니, 애초에 그저 마을 장터에 다녀온다며 제 발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도 상관이 없는 곳이었다. 그 누구도 자신들을 막지 않는다. 우리를 막았던 것은 아마도 우리 스스로일지도 몰랐다. 생각해보면 어릴 적 다녔던 학교 역시도 차로 20분은 가야 하는 큰 마을에 있었다.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는 창구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저 우리는 스스로를 그 작고도 폐쇄적인 마을 안에 가둔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알고 싶지 않아 하는 그 실체 없는 두려움 때문에.
입이 썼다. 정형준이 사라진 지 벌써 한 달째였다. 마을에서는 제물이 된 사람들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렇게 정형준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정형준의 어머니는 여전히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이혼을 한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는 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뭐. 박슬기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제 일이 아닌데 자신이 신경써봤자 무얼 하겠는가. 그들의 일은 그들이 알아서 해결할 일이다.
박슬기는 자신의 일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정형준의 부모가 이혼을 하든지 말든지, 자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정형준도 죽은 마당에. 박슬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박슬기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정형준이 사라진 날 이후로 더더욱 그랬다.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에는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걸 알아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으니까. 이 미친 종교에 심취한 마을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그런 박슬기가 내린 판단으로는, 지금 정형준의 부모의 일보다는 자신이 마을에서 하루빨리 탈출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 잔인한가? 잘 모르겠다.
밤이 어두웠다. 작고 폐쇄된 시골 마을에 가로등 같은 것은 사치라고 말했던가? 어두운 밤에 도망치기란 정말로 쉬운 일이었다. 어두운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길이었다. 손전등 하나를 든 황수현의 뒤를 따라가며 박슬기는 고민했다. 가진 돈이라고는 집 금고를 털어서 얻은 제 명의 통장 하나씩이 전부인 자신들이 이 우물을 나가서 잘 살 수는 있을까. 이걸로 도시에서 집 하나라도 구할 수 있는 걸까. 고민하고 있자니 황수현이 제게 말을 걸어온다.
“…솔직히, 나 좀 무서워.”
“…나도.”
“우리가 가진 돈으로 할 수 있는 게 있긴 할까? 우리, 그냥 다시 돌아가면 안 돼?”
“너, 그러다가 죽어. 진짜로.”
“…알았어, 그럼.”
황수현은 마지못해 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에 비춰진 동그란 손전등 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알면서도 모른 척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나가야만 한다. 이 마을에서 도망쳐야만 했다. 이미 시작했으니 더 이상 도망칠 구석은 없었다. 황수현의 등이 그렇게 나약해 보이기는 또 처음이었다. 그런 애를 앞장세워서 걷고 있자니 괜히 불안해져 손전등을 빼앗다시피 가져와 제가 대신 들었다.
들고 있는 손전등을 제외하면 아무런 빛도 없는 이곳에서 앞길을 정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뒤에서 황수현은 따라오고 있었고, 박슬기는 나아갈 방향을 정했다. 같은 곳에서 빙빙 돌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라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럼에도 박슬기는 나아가야만 했다. 이곳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만 한다. 벌써 근처 마을 두 세 개 정도를 지나왔다. 우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만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기계적으로 다리를 움직인다.
텁텁한 밤공기가 온몸에 들러붙었다. 이마에 맺혀있던 땀이 얼굴을 타고 흘러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곧 태풍이 온다고 했었는데 도대체 언제쯤 올런지. 여름과 가을의 중간 사이에 위치한 시점의 날씨는 참으로 기묘하고도 불쾌하기 짝이 없다. 여전히 덥고 미친듯이 습하면서도, 더운 바람이 사정없이 불어댄다. 차라리 시원하기라도 하면 모를까 습기를 가득 머금은 더운 바람은 그리 시원하지 않았다. 총체적으로 씨발이다. 날씨는 좆같고, 덥고, 앞은 하나도 보이지 않아 도저히 방향을 잡지 못하겠다. 방금까지 제 앞에서 걷고 있던 황수현이 왜 돌아가자는 말을 꺼냈는지가 이해가 될 정도의 총체적 난국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기에.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세상에 가진 거 하나 없이 달려드는 자신들이 존나 멍청하고 한심해 보이더라도 우리에게는 이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기 때문에. 박슬기는 도망가야만 한다. 별 좆같은 소리 밖에 없는 교리책 따위, 논밭 바로 옆 수로에다가 던져버린 지 오래였다. 교리책에 적힌 소리들을 곱씹을수록 박슬기에게는 이 마을에서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든다. 하나부터 열까지 좆같지 않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소리들이었다.
아녀자는 남편을 섬기며 어쩌구, 신이 언젠가는 우리에게 응답하실 것이며 그동안 우리는 신을 위해 바르게 살아야 한다면서 하는 행동이 제물을 바친다느니, 주기적으로 헌납을 하여 교리를 세상에 퍼트려야 한다느니…. 전형적인 사이비 식 교리라는 것을 지금까지 몰랐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이런 씨발, 그딴 걸 왜 처 믿어서는. 과거의 멍청하기 짝이 없던 박슬기를 욕하며 발을 옮겼다. 집을 떠나온 지 벌써 네 시간이 흘렀다. 저 멀리 커다란 도로가 보였다. 어떻게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알려주지 않기 위해서 온갖 잠금과 위치 추적을 깔아둔 핸드폰은 이미 꺼둔 지 오래였다. 종이로 된 구깃구깃한 낡은 지도만 보고 시작한 마을 탈출이다. 그리고, 박슬기는 아마도 옳은 방향으로 왔는지도 모른다.
[춘천]
우리가 말로만 듣던 춘천 근처였구나. 우리는 이것도 모르고 살았구나. …생각보다 도시는 가까이 있었다. 춘천까지 5km가 남았다는 표지판을 멍하니 바라본 박슬기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왜, 왜 그래?”
“아니, 그냥…. 다리에 힘이 풀렸나 봐.”
“…좀 쉴까.”
곧 해 뜨겠다. 그렇게 중얼거린 황수현이 제 옆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황수현의 표정은 나름 편안해 보였다. 아까만 해도 곧 죽을상을 하고 있더니, 이제는 조금 살 만 한가보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온 모든 길이 맞았다. 그 확신이 주는 희열은 짜릿했다. 어둡기만 하던,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길이 결국 끝이 났다. 춘천시까지 5km 남았다는 그 말이 왜 그렇게 좋은지. 이제 한두 시간만 더 걸으면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도시로 갈 수 있다는 것이 왜 그렇게, 행복한지.
신에게서 탈출할 수 있다. 박슬기는 강하게 그렇게 믿었다. 정형준이 사라지기 전에 제게 했던 말이었다. 우리, 신은 이제 졸업 좀 하자. 그 졸업이란 거,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정말로 졸업한 기분이었다. 스스로 이 정신 나간 신인지 뭔지에게서 빠져나와 내 스스로의 삶을 찾을 수 있다. 나는, 이제 교리책에 얽매인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 그 누구도 나를 알지 못하는 도시에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짜릿한 감각이구나. 그동안 겪어보지도 못했던 도시를 두려워했던 시간들이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로 좋았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오전 5시 48분. 장장 여섯 시간을 걷고 나서야 도로가 보이는 풀 바닥에서 휴식을 취했다. 황수현이 싸 온 자유시간을 입에 물었다. 캬라멜과 초콜릿이 입안에서 뒤섞이며 질척한 감각이 느껴졌다. 더럽게 달았다.
“슬기야, 이거 좀…. 기분 좋다.”
“그치?”
“응. 일탈 한 느낌이고 좋네.”
“야, 이제 우리 더 멀리 갈 거야. 춘천에 도착하면 바로 버스 타고 서울로 갈 거야. 서울에서…, 우리가 그동안 못 겪었던 일들도 많이 겪으면서, 새롭게 살아야 돼.”
“응.”
“다시는 그 정신 나간 마을에 갈 일 없어. …가자마자 우리 핸드폰부터 바꾸자.”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아무래도 그렇지. 정신이 단단히 나갔지, 지금 생각해보면. 어떤 미친 사람들이 스무 살 넘게 먹은 애들 핸드폰에 인터넷 잠금을 걸어두고 그것도 부족해서 위치 추적 어플까지 깔아둬.”
“…난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는데.”
근데 이게 당연한 게 아니래. 도시에서는 청소년한테도 위치 추적 어플 깔면 극성 부모라던데? 진짜로? 응, 진짜로. 내가 너한테 거짓말하는 거 봤냐. 우리 그동안 성인 딱지 달아놓고 아무것도 제대로 해본 게 없었잖아. 우리 이제 놀이공원 같은 곳도 가보고 여행도 가보자.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다.
황수현의 말에 박슬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수현이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해가 뜨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황수현의 눈에는 기이한 감정이 들어있었다. 박슬기에게는 어려운 표정이었다.
“내가 혹시 적응 못 하더래도, 너는 같이 있어 줄 거지?”
황수현의 주어 없는 질문에 박슬기가 몸을 움찔 떨었다.
“…응.”
“그럼 됐어.”
맑게 웃는 황수현의 얼굴 위로 파란 새벽빛이 들었다. 창백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애의 얼굴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가. 잘 모르겠다. 박슬기에게는 이 푸른 새벽의 빛이 꼭 구원인 것만 같았다. 제 인생도 이제는 빛을 볼 날이 왔다는 표시 같았다. 정형준이 가지 못한 길을 결국 박슬기는 왔다. 그 애가 죽고 나서야 도착한 길에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박슬기는, 어쩌면 정형준이라는 인간만큼은 믿었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신과 나 말고는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신은 아무런 도움도 제게 주지 않았지만 정형준은 결국 제게 구원이라는 걸 주고 갔다. 정형준은 기뻐할까. 잘 모르겠다.
아마도 정형준이었으면 자신도 믿지 말라며 몇 번 웃어버리고 말았을 거다. …지금에서야 드는 의문이지만, 걘 도대체 어쩌다가 제물이 된 걸까? 잠시 그런 생각이 떠올랐으나 결국 머리를 절레절레 젓듯이 털며 잊어냈다. 고민해봤자 하등 쓸모없는 짓거리였다. 정형준은 이미 죽었고, 자신은 새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정형준의 부모가 이혼을 하든지 말든지 자신과 상관이 없는 것과 똑같다. 박슬기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이미 죽어버린 정형준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우리 이제 슬슬 걸을까.”
“응.”
짧은 질문과 대답이 오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박슬기가 짐이 들어있는 커다란 가방을 다시 어깨에 멨다. 손전등은 가방에 넣었다. 이제 손전등을 밝히며 자신이 맞는 길로 가는지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춘천까지 5km, 그리고 춘천에 도착해서 가장 빠른 서울행 티켓을 끊고, 엄마 아빠가 창고에 숨겨뒀던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가서 핸드폰도 새로 맞추고, 당장 살 집도 구해야 한다. 할 일이 많았다. 그 모든 일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다만, 박슬기에게는 지금 다시 그 마을로 돌아가는 것이 더 두려운 일이었다. 살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박슬기가 도로를 따라 발걸음을 뗐다. 조금 늦게, 자신보다 더 투박한 발소리가 따라 들려왔다.
*
삼 주가 지났다. 황수현과 박슬기는 도보 3분 거리에 나란히 작은 반지하 단칸방을 구했다. 가지고 있는 돈이란 돈은 탈탈 털었다. 이전에 쓰던 핸드폰은 집과 꽤 떨어진 곳에서 맞췄다. 이것저것 갤러리나 전화부를 옮기기 위해서는 핸드폰을 켤 수밖에 없었으니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번호는 당연히 바꿨고. 음, 그리고 버스로 20분 거리에 알바를 구했다. 경력도 없는 스물한 살을 받아주는 알바가 많을 리가. 결국 버스를 타고 가야만 하는 피씨방에 겨우 알바를 구했다만, 뭐. 지금 자신이 찬밥 더운밥을 가릴 신세던가. 박슬기는 그저 어깨나 한번 으쓱하고 말기로 했다.
피씨방, 평일 오후 5시부터 오전 12시까지 7시간. 시급은 꽤나 좋은 편이었다. 최저시급보다 조금 더 쳐준 만 천원. 요리니 서비스니 뭐니 할 게 많기는 했지만 뭐. 다른 직종에 비하면 꽤나 좋은 대우였으니 엎드려서 절이라도 해야 한다. 주휴수당까지 해서 월에 백오십 넘게 챙겨주는 알바 자리가 어딨다고. 삼 주,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 비하면 굉장히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굴러가는지 알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 박슬기는 삼 주 동안 이곳에서 살아남는 법을 완벽하게 습득했다.
가끔 정형준 생각을 했다. 정형준은 정말로 이 도시와 어울리는 애였다. 정신 나간 사이비 마을에서 그런 애가 태어났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다. 마을에서 다 같이 있을 때는 그저, 그냥…. 정형준이 조금 특이한 애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이에서는 조금 특이하다, 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미안할 정도로 걘 그 마을과 어울리지 않았다. 다방면으로 정신 나간 마을에서 사느라 얼마나 피곤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잠깐 웃음이 나왔다. 그런 마을에서, 정형준이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 안에서 살아갔을 자신을 생각하니 웃음을 멈출 수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멍청한 짓이었다. 정형준이 그 마을에서 벗어나고자 이런저런 일들을 할 때, 그것이 그에게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는 나중에 생각하고서라도 한 번 쯤은 같이 해줄 수 있는 거였는데. 마을에 그들이 믿는 종교가 정신 나간 사이비라는 대자보를 붙이고 다니던 정형준이 떠올랐다. 그것도 사춘기일 적에나 잠깐 그러고 말았다만. …뭐, 그게 먹히지 않음을 알고 난 후의 어떠한 해탈과 포기였을지도 모른다.
박슬기는 그때 어땠던가. 열여섯을 지나 고등학생이 되던 무렵의 박슬기는 그런 정형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애시당초부터 박슬기는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일에 그다지 힘을 쏟으려는 부류도 아니었거니와, 그 당시의 박슬기는 그 정신 나간 종교라는 것-이제는 종교라고 불러주기도 싫다.-에 단단히 세뇌당해 있었으니 말이다. 정형준은 그때부터 자신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었다. 가장 친한 친구였고, 둘밖에 없던 친구였던 걔는 그렇게 서서히 멀어졌다.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어떠한, 다른 종족과도 같았다.
열여덟, 박슬기의 생일날이었나. 정형준은 그날 자신에게 11시에 유 씨 아저씨네 밭 옆 공터로 오라는 문자를 보냈다. 이제야 깨달은 거지만, 그 공터는 항상 정형준이 교리책을 불태우거나 담배를 태우던 곳과 같은 장소였다. …그니까,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정형준은 그 공터를 자신의 아지트나 다름없이 사용하고 있었던 거다. 그곳에서 박슬기는 진실을 알았다. 내가 믿는 신은 정말 존재하는 신이 아니었고, 우리는 다들 거짓된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 말이다. 그래, 말하자면 트루먼 쇼 같은 거였다. 그 쇼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쇼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우리의 삶은 그 영화와 다를 구석이 단 한 가지도 없었다.
박슬기는 그 후로도 신을 믿었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지만, 신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종교에 심취해 무엇이 잘못된 행동인지도 분간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부모님과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황수현을 보고 있자면 신을 찾을 수밖에 없더라.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인간들은 그럴 때 신을 찾게 되곤 한다.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상황에 놓여질 때, 그것을 대신 해줄 사람을 찾는 것이다. 박슬기가 그랬다. 다시 말하지만, 정말로 멍청한 일이었다. 3년간 그놈의 신은, 지난 18년간 그랬듯이 단 한 번을 응답하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정형준이 사라졌다.
그제서야 걔가 옳았다는 걸 알았다. 신은 이 세상에 없었다. 신이 없는 이 세상에서 돈도 권력도 없는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일은 없다. 우주에 단 일 퍼센트도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한낱 미물이 무얼 하겠는가. 박슬기는 결국 정형준이 사라지고 나서야 혼자서라도 이 마을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민은 길었지만 결단은 빨랐다. 박슬기는 그렇게 황수현을 끌고 마을을 떠나왔다.
사실은 잘 모르겠다. 박슬기는 지금 자신의 생활에 백 퍼센트 만족하고 있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점이라고 한다면, 황수현이었다. 저를 따라 자신과 도보로 3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에 반지하 단칸방을 구했고, 자신을 따라서 제가 일하는 옆 건물 카페에 일자리를 구했다. 그럼에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일주일에 서너 번 얼굴을 볼 적마다 걘 그리 좋은 표정을 짓고 있지는 않았다. 너는 이 생활이 정말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마을에서 떠나오는 것이 맞는 일이었는데, 넌 왜 그렇게 울상인 건지.
궁금증은 곧 후회가 되고 자책이 된다. 정형준이 사라진 이후로 박슬기가 마음이 급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게 이 세상의 진실을 알려준 친구는 괘씸죄로 제물이 되었고 그다음 차례가 누구일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 괘씸죄의 화살이 언제 제게 돌아올지 모른다는 말이다. 박슬기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도망가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사라졌을 때 그 괘씸죄를 대신 맞을 것이 뻔한 황수현 역시도 같이 탈출시킨다. 그것이 박슬기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그 애를 데리고 나왔다. …그런데, 내가 정말 옳은 일을 한 거였을까.
사람마다 행복해지는 방법이 다 다르댔다. 박슬기는 그곳에서 나온 지금에서야 진정한 행복을 찾은 것만 같았다. 솔직히 진정한 행복이란 거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그 마을에서 빠져나온 이후부터였단 거다. 박슬기는 지금까지 자신이 이렇게까지 꿈이 많은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 그저 어른들의 말대로 얌전한 여자아이로 커서 시집을 잘 가야 한다는 그런 구시대적인 개소리를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정도로 박슬기는 꿈이 크고, 자신밖에 모르는 애였다.
그럼 황수현의 진정한 행복은 뭐였을까. 고민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을 문제라는 것을 알면서도 박슬기는 고민했다. 솔직히 말해서, 남의 진정한 행복 같은 거 알고 싶지도 않고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다만, 이것 또한 어떠한 박슬기의 꿈과 같은 거였다. 정형준이 없는 이 세상에서 황수현과 함께, 그 정신 나간 마을 같은 건 잊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그 애를 이끌어주는 것. 박슬기는 그것을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한 지 오래였다. 머리가 아팠다. 황수현은. 정말로 그 마을에 다시 돌아가고 싶은 걸까.
고민을 하고 있자니 열두 시가 다 되어갔다. 피씨방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가끔 짜파게티나 만두라면 같은 음식 주문이 들어오는 것을 제외하면 딱히 할 일은 없었다. 그저 박슬기는 그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을 지켜보고, 컴플레인이 들어오는 게 있는지 확인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보통은 이 시간에 공부를 하고는 했는데. 어른들이 극구반대한 덕분에 가지 못했던 대학에 가보고 싶었다. 가진 건 좆도 없지만 뭐, 그래도 공부라도 해서 대학이라도 나와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조금 더 생겨날 것 아니겠는가. 오랜만에 공부하려니까 재밌기도 하고. 오늘따라 공부가 손에 안 잡혀서 문제지, 뭐.
결국 박슬기는 시계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문제집은 이미 가방 속에 처박은 지 오래고, 컴퓨터에 띄워진 디지털 시계를 바라보며 1초, 2초, 3초…. 그렇게 시간이나 죽이고 있는 거다. 서울에 도착한 이후로 이렇게까지 시간을 허비한 적이 없었는데. 그런 생각이나 하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손님이라도 왔으면 좋겠다.
‘딸랑-’
귀신같이 손님이 올 줄 알았으면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거였는데. 씨발, 거…. 차마 뱉을 수 없는 욕설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박슬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11시 57분, 열 시가 넘은 탓에 신분증 검사를 해야 했다. 요새도 가끔 미성년자들이 피씨방에 열 시 넘어서 오더라. 물론 박슬기는 열 시가 넘으면 미성년자는 피씨방에서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일을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누가 봐도 미성년자가 아니더라도 신분증 검사를 꼭 해야 한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고. 누가 봐도 성인의 덩치를 가진 손님은 물에 푹 젖은 우산을 들고 있었다. 비 오나, 그나저나 도대체 이 야밤에 얼굴 가릴 일이 뭐가 있다고 모자를 쓴담.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입에서는 익은 안내 멘트가 흘러나온다.
“어서 오세요. 우산은 저쪽에 꽂아두시고요, 신분증 보여주세요.”
“아, 네.”
이게 사회생활이라는 건가.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손님을 빤히 바라보던 박슬기가 전기에 감전되기라도 한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마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목소리.
“…정형준?”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아 사정없이 떨리는 목소리가 부끄러울 틈도 없다. 씨발, 진짜 정형준이야?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온갖 생각이, 정제되지 않은 말들이 자꾸만 목구멍에서 튀어 나가려는 것을 참기 위해 입을 꾹 다물었다. 바쁘게 눈을 움직였다. 황수현보다는 조금 작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월등하게 큰 키, 모자에 가려지지 않은 눈에 익은 하관, 그리고 낮으면서도, 또 특이하게 울리는 목소리. 괜히 초조한 마음에 박슬기가 입안 점막을 이로 꽉 깨물었다. 피가 배어 나오는지, 비릿한 쇠 맛이 입안에 퍼졌다.
“…?”
신분증을 꺼내려던 손이 굳었다. 여지껏 땅만 바라보고 있던 그 사람이 입을 열었다.
“…박슬기?”
아, 맞다.
얘는 정형준이 맞았다.
*
이번 년도의 마지막일 수도 있는 태풍이 온다고 했다. 마을을 떠나올 때와는 사뭇 다른 공기가 느껴졌다. 여전히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지만, 괜히 뼈를 시리게 하는 서늘함이 있었다. 에어컨이 틀어진 24시간 카페 안에 있으니 당연한 말일 수도 있지만. 오늘따라 추웠다. 서울에 온 이후로 단 한 번도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신 적 없던 박슬기는 오늘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물론 디카페인으로. 잠은 자야 하지 않겠는가. 내일도 당장 다섯 시부터 자정까지 일을 해야 하는데 잠은 푹 자야지. 그런 생각이나 하며 박슬기가 제 앞에 앉은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형준은 변하지 않았다. 가로로 길게 죽 올라간 눈매 하며,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는 버릇 하며. 기쁨은 있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공허한 눈동자까지. 단 하나도 변하지 않은 정형준 그대로였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출근한 다음 타임 알바생 덕에 기다려달라는 구차한 변명 따위도 하지 않고 바로 찾아온 24시간 카페에 앉은 박슬기가 빨대를 만지작거렸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잠시 고민하고 있자 정형준이 먼저 입을 연다.
“도망 왔네?”
지가 죽을 줄 알고 도망친 사람을 근 두 달 만에 만나서 하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어이가 없을 정도로 무덤덤한 말투다.
“그치. 우린 너가 죽은 줄 알았으니까.”
“우리? 황수현도 나왔어?”
“어, 뭐…. 내가 데리고 나오긴 했어.”
“말하는 걸 보니 그리 반기진 않았나 보네.”
“귀신같네.”
박슬기의 말에 정형준이 픽 웃음을 짓는다.
“황수현을 내가 모를까. 걔한테는 시도도 안 했는데, 애초에.”
“…근데 혼자만 두고 나가긴 좀, 그렇잖아. 어떻게 될 줄 알고.”
“그런가.”
정형준은 다시 입을 닫았다. 몇 시간 같은 몇 초의 침묵이 끝나고 정형준이 다시 말을 꺼냈다.
“죽을 뻔하기는 했지.”
“…뭐?”
“내가 탈출을 할 생각이었으면 진작에 도망갔을 거고, 그러면 너한테 언질이라도 주지 않았겠냐, 슬기야. 진짜로 도망간 거야. 뒈질 뻔해서.”
담배 한 대 태우고 집에 돌아가려는데, 뒤에서 누가 따라오는 소리가 들리더라. 알잖아, 거기 사람 진짜 안 오는 곳인 거. 너 아니면 오는 사람도 없는데 발소리가 나길래 뭔가 싶어서 뒤돌아봐도 사람은 없고. 좀 쫄려서 존나 빠르게 걸으니까 발소리도 같이 빨라지고. 전형적이지 않냐? 거기 어두워서 방향도 제대로 잡기 힘들잖아. 그래서 냅다 산으로 들어가서 빙빙 돌았거든. 나야 산속에 자주 들어가기도 했었고, 뭐…. 내 나와바리 아니냐. 아무튼간에. 나 쫓아오던 사람이 길 잃고 헤매는 것 같길래 뒤에서 몰래 지켜봤지. …나 사탄 들렸단 소리 어른들이 주구장창 해대던 거 너도 알 거 아냐. 뻔하지, 그 제물인지 뭔지 인신 공양을 나로 하려고 했던 모양이야. 뭐, 거의 팔십 퍼센트 넘게 확신하지만.
그래서 봤는데, 씨발…. 나 잡으러 온 게, 황수현 아빠더라. …아저씨가 밧줄 같은 걸 들고 서 있었어. 야, 놀라지 마. 더 충격인 건 뭔지 알아? 황수현네 아빠가 길 잃고 멍하니 서 있으니까 한참 뒤에 다른 사람이 또 올라오더라. 그건 우리 아빠. 잡았냐고 묻던데. …야, 니가 왜 울어? 울어도 내가 울어야지. 뭐, 그다지 눈물은 안 나긴 했는데.
우리는 사실, 잘 모르잖아. 그 종교인지 씨발인지 내에서 서열이 있다는 것만 알지 누가 더 윗 서열인지 이런 거…. 우리 아빠가 황수현네 아빠보다 더 윗 서열이었나 봐. 아저씨가 나 잡아서 이미 묻었다고 구라를 까더라고. 그거 듣자마자 존나 도망갔지. 있는 거라곤 핸드폰 하나밖에 없었는데,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진짜 죽을 것 같아서 도망갔어.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도 모르고 뛰었어. 그러다 보니까 나오더라, 춘천까지 오 키로 남았다는 표지판이. 그때는 좀 울긴 했다.
야, 울지 마. 그럴 줄 모르고 거기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나 괜찮아. 진짜로. 진짜 괜찮다니까. 그런 날이 올 수 있겠다는 것쯤은 열여섯 살 때 이미 알았어. 준비도 나름대로 했고. 계좌번호 같은 것도 이미 외워뒀고, 주민번호도 이미 외워뒀고. 그래도 출생신고는 해 줘서 다행이지, 안 그러냐? 그 덕에 우리가 이렇게 도망 나와서 살고 있지.
킥킥 웃음을 짓는 그 애의 목소리에는 그 어떠한 슬픔도 담겨있지 않다. 그게 더 슬퍼서 박슬기는 조금 울었다. 아니, 씨발 사실은 존나 울었다. 휴지를 가져올 정신도 없이 처 울어서 소매가 다 젖었다. 제 앞에 앉은 정형준은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자신이 맞다는 사실을 인정받아서 기쁜 것처럼, 걘 웃고 있었다. 박슬기는 아마 영영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나는 내가, 그리고 내 부모님이 그런 상황이라는 가정조차도 하기 싫은데. 걘 그걸 실제로 겪었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었다.
수없이 곱씹고 되뇌랬지만 이해할 수 없던 정형준의 말이 떠올랐다. 난 나도 안 믿어. 자식은 부모 또한 자신이라 생각한다 했다. 원래 인간은 사랑하는 대상을 자신의 영역 안에 넣고, 그것을 자신이라 생각해지며 대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정형준은, 걘. 그날 자신이라 생각했던 그의 부모님에게 배신을 당한 셈이었다. 또 다른 자신에게. 그리고 그들을 걱정 없이 사랑한 자신 스스로에게. 난 나도 안 믿는다는 말이 그 당시엔 꽤 서운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것이 배신이라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정형준 걔는 정말로 자신 스스로도 믿지 않아야 했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같잖은 동정이나 합리화 따위 그 애의 생존에는 불필요하다. 눈앞이 흐려지는 것이 영 거슬려 이미 축축하게 젖어버린 소매 끝으로 눈을 벅벅 비볐다.
“야, 그럼 너는…. 너는 아직도 날 안 믿어?”
“난 나도 안 믿는다니까. 아무도 안 믿어.”
“…. 그래, 그렇겠지.”
정형준이 제 몫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켰다. 거추적스러운 종이 빨대 같은 건 이미 쓰레기통에 처박힌 지 오래였다. 얼음을 입에 한가득 물고, 빠드득 소리를 내며 얼음을 씹어 삼킨 정형준이 말했다.
“넌 아직도 인간을 믿어?”
너 스스로를, 타인을, 믿어? 그 말에 박슬기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뭐. 그렇다면 할 말 없지.”
“….”
“근데 슬기야. 믿지 마, 그게 설마 너라도.”
너는 지나가던 고양이가 갑자기 자기를 믿어달라면 믿을 수 있어? 비웃듯이 정형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타인이란 건 결국에 다른 종족이나 다름없어. 의사소통이 가능한, 다른 종족. 그뿐이라고 생각하면 편해. 인간이라는 건 결국 이해한다고 해놓고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야. 공감? 뭐, 그거야 할 수 있지. 그런데 이해라는 건 완전히 다른 영역이거든. 나 스스로도 믿지 마. 누군가한테 너를 믿으라고, 책임질 수 있다고 하지 마.
거세진 빗방울이 사납게 창문을 때렸다. 01시경 태풍 ‘루사’ 서울 영향권 진입…. 오전에 본 뉴스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손끝이 차갑게 식는 것 같아 급하게 컵을 잡았다. 아직까지도 뜨거운 온기가 남아있었다. 손끝을 덥히며 박슬기가 입을 열었다.
“이해할 때까지 알려주면 되는 거 아냐?”
“그게 세뇌라는 거야.”
정형준이 심드렁한 얼굴로 답한다.
“봐, 지금 당장 너랑 나도 서로를 잘 모르잖아.”
“아니 뭐, 다 알 수는 없으니까.”
“응,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거야. 지구를 하나의 거대한 우주로 생각해 봐. 너랑 나는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는데도 이렇게 다르잖아. 그런데, 아주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우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봐. 우린 어쩌면 그냥, 지구라는 우주 속에서 사는 외계인들인 거라고.”
정형준의 긴 말에는 뼈가 박혀있다.
“인간이라는 종족이 실존한다는 걸 믿지 마. 그냥, 생김새가 똑같은 외계인이라고 생각해야 해.”
씁쓸한 표정을 한 채로, 왼쪽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려 웃은 정형준이 컵을 자리에 내려놓았다. 그새 다 녹기라도 한 건지, 컵 안에 잔뜩 들어 차 있던 얼음이 죄 사라져있다.
정형준의 말은 항상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게 오히려 더, 그 애의 말이 맞다는 걸 증명하는 것만 같다. 박슬기는 정형준의 상황을 공감하여 눈물을 흘릴 수는 있어도 걔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같은 지구에 살아도, 인간이라는 종족 특성을 공유하더라도 우리는 다 다른 종족이나 다름 없댄다. 그저, 의사소통이 가능할 뿐인 동물이나 다름없다고. 슬프게도 틀린 말은 단 한 가지도 없다. 그저, 정형준이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이 상황이 좆같다. 아직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들이켰다. 뜨거운 커피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 진짜 좆같다.
서울이 태풍 영향권에 들어왔다. 바람이 거세게 불긴 하는 건지, 나무가 바람에 맥없이 흔들린다. 정형준은 그저 평온한 표정으로 그 꼴을 바라보고만 있다. 무슨 생각 해? 우리 집 옥탑방인데 비 새겠다는 생각. 그렇게 평온한 표정으로 할 생각이야? 박슬기의 말에 정형준이 어깨를 으쓱한다. 어차피 내가 집에 있는다고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뭐하러 그렇게 전전긍긍해. 모든 것을 해탈해버린 것 같기까지 한 목소리가, 신기하게 오히려 마음을 평온하게 만든다. 내내 조각상마냥 굳어있던 박슬기는 그제서야 카페 의자에 몸을 뉘인다.
“…있잖아, 그럼 넌 황수현이 어떻게 할 거라고 생각해?”
“너네 온 지 얼마나 됐댔지?”
“3주.”
“많이 버텼네.”
“그런가.”
슈퍼 - 파워 같은 거 꿈 꿀 열여섯 살도 아니잖아, 우리. 자학개그랍시고 던지는 말인가, 싶어 박슬기가 눈을 세모나게 뜨자 정형준은 그저 어깨나 한번 으쓱하고 만다. 정형준은, 그러니까…. 황수현이 이곳에 남아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아주 조금도 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걘, 황수현이라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생각해보면 황수현과 정형준은 아주 어릴 때도 많이 달랐다. 성격, 행동거지, 하다못해 식습관까지 같은 것이 단 한 개도 없어서 중간에 낀 박슬기가 고생을 많이 했었다. 매번 같지도 않은 걸로 싸워대면서도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조금도 하지 않던 과거가 떠오른다.
그 뒤로는 그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냐던지, 정형준이 떠난 후 마을이 어땠는지, 뭐 그런 것들. 정형준은 자신의 부모가 이혼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시큰둥했다. 더 이상 자신과 연 없는 사람들이랜다. 담배는 끊었다고 했다. 정말로 반항하기 위해서 피운 담배였다며, 이제는 반항할 것이 없는데 뭐하러 그 맛대가리 좆도 없는 걸 피우냰다. 진짜 정형준다운 발언이라 거기선 좀 웃었다. 울다가 웃으면 머리에 뿔난다며 정형준이 놀렸다. 뭔 여섯 살 꼬맹이도 아니고, 그런 걸로 놀리냐.
정형준은 제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박슬기가 떠드는 말에 몇 번 맞장구나 쳐 줬다. 집이 반지하라 해가 잘 안 든다는 말엔, 다음에 옥탑방에 한 번 살면 반지하가 그리워질 거라는 말이나 해댄다. 미친 새끼 아냐? 이 말을 그대로 돌려줬더니 웃긴 이야기라도 들었다는 듯이 웃어 재끼길래 한 대 쥐어박았다. 진짜로, 정형준은 변한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더니, 그 말이 진짜긴 한가보다. 죽다 살아난 놈이 뭐 그렇게 한결같은지. 죽을 위기까지 겪었으면 좀 변해도 되는 거 아닌가.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안 본 기간이라고 해 봤자 두 달도 안 됐는데, 뭐 그렇게 할 이야기가 많은지. 내일 9시에 출근해야 한다는 정형준의 말에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제게 나중에 시간 나면 제 집에 놀러 오라며 정형준이 카카오톡으로 집 주소를 보낸다. 나 안 믿는다면서, 집 주소는 왜 알려주냐며 쏘아붙이니 절도범을 처벌할 수 있는 한국의 법은 믿는단다. 또라이 새끼가 따로 없다. 허, 비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박슬기의 폰이 한 차례 울린다. 새벽 두 시 사십 오 분. 누군가에게서 연락이 오기에는 꽤 늦은 시간이었다.
“누구냐, 애인?”
“겠냐?”
“하긴. 그럼 누군데.”
당연하게도 자신에게 애인이 없을 것이라 상정하는 정형준의 말에 한숨을 깊게 쉰 박슬기가 핸드폰 액정을 톡톡 두드렸다. 화면 상단의 알림에는 익숙한 이름이 떠 있었다. 정형준이 고개를 빼꼼 내밀어 제 핸드폰을 바라보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럴 줄 알았지. 그 말이 이렇게나 깊게 와닿을 줄 몰랐는데. 지금까지의 정형준의 발언에 대한 평가를 전면 수정이라도 해야 할 셈이다.
[황수현]
나 집에 갈게. 고마웠어. 나중에 나 보러 마을 한 번 와 주라. 얼굴도 못 보고 가서 미안해.
“….”
“내가 뭐랬어. 믿지도, 믿게 하지도 말랬지.”
“그러게.”
의사소통이 될 뿐인 다른 종족이라는 그 말, 진짜 맞는 것 같네. 박슬기가 어깨를 으쓱, 한 번 올렸다 내렸다. 황수현이 결국 다시 마을로 돌아갔다. 황수현이 마을의 종교가 사이비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걔는 그냥…. 그러니까, 도시에서 살기 두려웠던 거다. 마을을 떠나올 때의 황수현이 어땠던가. 사정없이 떨리던 손전등 불빛, 그날따라 유난히 창백해 보였던 얼굴, 제게…, 같이 있어 달라 하던 말. 입이 썼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했다. 우리는 같을 수가 없었는데, 같기를 바랬다. 우리는 서로 외계인인 주제에 왜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는지.
마을로 돌아간 황수현이 어떻게 될지 우리는 이제 알 수 없다. 어떻게 될지, 앞길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황수현이 모르고 돌아갔을 리도 없다. 보복한답시고 당장에 인신 공양을 할 수도 있는 거고, 돌아온 것만으로도 잘했다며 어화둥둥 떠받들어주며 이곳이 도시보다 훨씬 낫다는 자기 합리화에 쓰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황수현은 자신을 믿지 못했다는 것이다. 제가 황수현을 믿지 못한 것처럼, 걔 역시 자신을 믿지 않았다. 쌤쌤이다.
번쩍, 창밖이 밝게 빛났다가 사라진다. 번개가 치는 걸 보니 오늘 하루는 비가 꽤 많이 올 것만 같다. 오늘 강수량이 몇 미리랬더라. 황수현이 돌아간다는 사실보다 더 먼저 그런 걱정이 떠오르는 걸 보니, 우리는 여기까지인가보다. 박슬기가 픽, 웃음을 지었다. 허울뿐인 믿음을 우리는 너무나도 오래 간직하려 애썼다. 진즉에 우리 서로가 다르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우리가 서로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진즉에 알았다면, 무언가가 조금 달라졌을까. 잘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는 이걸 고민해야 할 이유도 알지 못하겠다. 그저, 박슬기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자연스레 관심을 끄게 될 것이다.
정형준의 부모님이 이혼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처럼 말이다. 박슬기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정말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황수현에게 있어 진정한 행복이 가족과 함께 하는 삶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듯이, 박슬기에게 진정한 행복이 구속에서 벗어나 꿈을 펼치는 것이라는 걸 황수현이 이해할 수 없듯이. 우리는 정말로, 서로 다른 외계 생명체나 다름없었다. 너는 인간을 믿는가, 이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박슬기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이제는, 아마 자신 스스로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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