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산물

[좀비] / 유제이 (@7_xstion)

변이성 바이러스의 등장으로 '좀비'라는 감염성 개체가 빠르게 퍼져갔다. 사태 초기 정부의 지침은 외출 자제, 그리고 좀비 발견 시 신고 권장이었다. 인간과 비슷한 형체인데도 말은 하지 못하고, 둔한 움직임으로 인간을 향해 달려들기만 하는 좀비는 생각보다 큰 피해는 끼치지 않았다. 단지 물리면 감염되고, 가는 곳마다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는 게 거슬린다는 점에서 제거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형식상 경찰과 인력이 배치되며 인간을 해칠 기미가 보이는 좀비는 사살이라는 원칙이 자리 잡았다. 사태가 발생한 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감염자와 사상자는 늘어났고, 이미 존재하던 '좀비 바이러스'에서 변종도 생겼다.

그들은 좀비와 비슷한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인간과 비슷한 행동을 한다. 일부는 좀비가 지능을 얻은 게 아니냐며 그들의 위험성을 강조했지만, 빠르게 결과를 발표한 연구원 측은 기존 인간의 판단 능력을 유지한 좀비라고 보았다. 돌연변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좀비의 수만큼 변이 '감염자'가 증가하면서, 세계 기구에서는 2원칙을 제시했다.

바이러스 치료 백신이 개발되어도, 감염자의 판단 능력 회복은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말을 할 수 있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으며, 감정이 있는 경우'는 치료가 가능함을 인지한다. 가장 중요한 '감정'을 고려하여 치료 가능한 감염자는 보호하며, 치료가 불가하다고 판단되면 즉시 사살한다.

과학과 조금 거리가 있는 학과를 졸업했으면서, 사회생활이나 경험해보겠다고 연구 인턴을 지원했던 제 과거를 탓하고 싶었다. 잠뜰의 계약이 끝나고 정식 연구원으로 채용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드디어 자신도 돈벌이할 수 있는 사람이 된 줄 알았다. 1년 차 신입이 되었을 때는 변이성 바이러스의 감염자를 관찰하는 연구원 측으로 이직 되기까지. 백신 개발은 최고 선임들이 몰두할 예정이기 때문에, 잠뜰은 감염자를 적당히 대해주기만 하면 어느 정도의 월급을 받을 수 있다. '망할' 좀비 사태가 끝날 때까지 이 일을 한다면 평생 연구기관 안에서 제 몸을 보호받을 수 있는 직원 신분이니 나쁠 건 없었다. 그러나 감염자를 통한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도록 여러 주의사항이 적힌 파일을 열자마자 머리가 핑 도는 기분이었다. 번거로운 일이 늘어난다고 생각하니 벌써 귀찮았다.

수현은 잠뜰이 '연구원'의 일을 그만둘지 고민하던 시기에 기관으로 들어왔다. 잠뜰이 감염자를 맡는 일을 시작한 지 두 달 지난 무렵이었다. 경력이나 포트폴리오 따윈 모르겠고 단지 친목을 목적으로 찾아 들어간 보드게임 동아리에서, 같은 동네에 살기도 하고 수업도 같은 건물에서 듣는다는 이유로, 심심할 때 불러내어 각자의 공부나 같이하는 등, 같은 학과는 아니었으나 학교 안에서 같이 다닌 후배였다. 시간이 흘러 3학년이 된 수현은 졸업하기에 너무 이른 것 같다고 말했다. 잠뜰이 인턴직을 알아보던 시점이었다. 휴학을 신청한 수현은 아르바이트 다니면서 따로 공부를 시작했고, 잠뜰은 면접 준비하느라 바빴다.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기며 만날 일이 없을 줄 알았으나, 얼마 전 잠뜰의 앞으로 들어온 감염자는 건 학교에서 질리도록 봤던 제 후배였다.

아는 이름이 있으면 그 연구원을 감염자의 담당으로 한다. 많은 사람이 기관에 들어올 것 같았지만, 발견 주소를 기준으로 들이기 때문에 잠뜰의 주변에서는 친분으로 감염자를 맡은 사람은 없었다.

바이러스 사태 초반이었기 때문인지, 지금으로부터 2년 전 처음 본 수현의 팔 곳곳에 물린 흔적은 현재의 감염자들에 비해선 무수히 많은 수준이었다. 좀비가 되지 않고 멀쩡하게 살아있는 수현을 볼 때마다 안심하면서, 잠뜰은 언제나 오른손 다섯 손가락에 물린 흔적을 보며 놀렸다. 너는 손가락 잘리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그러면 수현은 악담하지 말라면서 잠뜰을 무는 시늉을 하며 넘겼다.

담당자가 할 일은 감염자의 상태를 기록하는 것밖에 없다. 단지 거슬리는 건, 최소 세 시간마다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잠뜰은 수현이 밥을 먹을 때마다, 지루해서 방을 돌아다닐 때마다, 갑자기 하늘이 보고 싶다는 등 뜬금없는 소리를 할 때마다 어떤 행동과 말을 하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이상해 보인다고 판단될 때, '지금 가장 생각나는 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건네어 답변을 받아야 했다. 잠뜰은 이 질문이 감염자의 치료에 도움이 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감정'이 치료 가능성을 판단할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면, 수현이 언제 갑자기 이상해질지 확인하기 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치료 불가'인 좀비를 마주한 동료 연구원들의 말에 의하면, 감염자는 이전과는 다른 답변을 내놓는다. 잠뜰은 수현이 언제 변할지 확인해야 했다. 물론 변하지 않길 바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친절하게도 기관은 감염자가 숙면을 취하면 따로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평범한 인간도 휴식은 필요하니까, 감염자의 몸에 이상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장치만 따로 둔다고 했다.

"황 좀비. 지금 가장 생각나는 것 세 가지 말해봐."

"…."

"너는 여기를 탈출하고 싶어?"

"아니."

"어차피 곧 죽을 텐데."

"그런가. 그럼 탈출해야지. 그때 누나가 말했잖아, 밖에 있는 애들은 인간을 해치려고 하지 않는 이상 굳이 건들지 않는다고. 나도 얌전히 있으면 죽지는 않을 거야."

"여기 안 남아도 괜찮겠어? 나는 연구소 밖으로 나갈 수 없고…. 아마 이 사태가 끝나야 만날 수 있어. 그게 몇 년 걸릴지는 몰라."

"누나도 그때까지 버틸 수 있잖아. 나도 버틸게. 지금 나는 생사가 너무 중요한 사람이라서, 무슨 말을 더 해줄 수가 없네."

"너 좀비라니까."

"하긴, 난 얼굴색부터 다르고 키도 좀 커졌지. 그래도 나 잘 살아있잖아."

"…그래. 잘 살아있네."

수현이 기관에 들어온 지 반년이 지났을 때, 잠뜰과 수현의 정상이면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대화다. 다음 날부터 수현은 가장 생각나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내가 살아야 한다는 것'밖에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새로 들어오는, 잠뜰이 세 번째로 담당하기도 하는 감염자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잠깐 나간 날에, 수현은 사라졌다.

잠시 교대한 동료의 얘기로는 카메라에 찍힌 수현의 마지막 모습은 이미 감정이 없는 상태였다. 잠뜰은 두 달 전부터 알고 있었다. 수현은 더 이상 과학잡지에 실린 야구 만화를 찾지 않았고, 기분전환에 도움 될 단편 예능이 보고 싶다면서 잠뜰을 부르지도 않았다. 동료가 잠뜰에게 알고 있었냐고 물었을 때, 잠뜰은 몰랐다고 했다. 단순한 변덕인 줄 알았다는 말에 주변 사람들은 친하면 그럴 수 있지, 하고 넘어갔다. 잠뜰처럼 친분으로 감염자를 맡은 연구원은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에, 잠뜰이 수현을 모른 척했다는 사실 또한 알지 못했다.

감시카메라가 의무로 설치되어있으나 수현은 늘 카메라를 등지고 잠뜰과 대화했다. 툭하면 우리 학교는 어떻게 됐을까, 하고 묻던 수현이기 때문에 잠뜰은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 듯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 떠났는지는 몰랐다.

덕개는 좀비 사태가 시작되면서 연락이 끊긴 아는 동생이었다. 첫 만남은 그가 일하던 카페에서 잠뜰과 수현이 진상을 퇴치해준 게 고맙다며 음료를 공짜로 만들어주는 연으로 시작되었다. 가끔 과제를 하기 위해 덕개가 있는 카페에 가면 그는 매번 자신의 카드로 계산한 다음에 음료 두 잔 만들어줬다. 덕개의 말에 의하면 같은 학교에 다닌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 휴학했다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했고, 그 뒤로 어느 학과인지 들어본 적도 없어서 진실인지는 몰랐다. 덕개는 수현이 사라진 지 일 년 지나서 잠뜰이 있는 기관으로 들어왔다.

"너가 여기를 왜 들어와? 죽은 듯 소식도 없이 살아가더니."

잠뜰은 덕개가 들어오지 않았으면 했다. 수현 다음으로 세 명 정도가 들어왔는데, 전부 수현과 같은 증상을 보이며 '치료 불가' 상태가 되었다. 그냥 이 방에 저주가 깃든 것 같기도 하고…. 잠뜰은 마지막 감염자가 격리시설로 옮겨진 뒤에 허전해진 방을 들여다보았다. 잠뜰이 있는 연구실의 한쪽은 투명한 유리창이 있고, 그 너머로 보이는 건 연한 회색빛을 띄는 작은 공간. 자취한다고 생각하면 될 정도로 어느 정도의 생활에 필요한 가구와 물품은 전부 있었다. 침대 시트와 창문 커튼은 소독을 위해 빼둔 상태였다. 당시 잠뜰은 다음 감염자의 안녕을 미리 기원했다.

그러나 덕개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 괜히 그런 생각을 했다고 후회했다. 기적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게 당연하지만, 덕개가 기관에 들어온 이유 자체가 유별났다. 감염자 정보에는 보통 들어온 사정과 목적이 적혀있다. 잠뜰은 동료와 오가며 공유한 기록을 통해 여러 감염자의 정보를 자주 봤지만, 저마다 완전한 좀비화가 아니라는 이유로 연구 및 치료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덕개의 경우는 달랐다. 기록지를 한 번, 덕개의 팔을 한 번. 사람들은 대부분 방어를 위해 팔을 들며 상체나 손에 물린다. 그러나 덕개는 물린 흔적이 없다.

변이성 감염자는 항체에 관한 연구를 위해 연구기관으로 간다. 사태 초기부터 바빴던 기관들은 항체 변이가 일어난 지 가장 오래된 자들로 가득 차며, 더는 새로운 감염자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대부분 백신 개발 시의 치료를 위해서 격리시설로 따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덕개 또한 격리될 예정이었겠지만, 잠뜰이 있는 연구기관으로 왔다는 뜻은 다른 이유가 있다는 소리다.

"나 면역이야."

시간이 지날수록 좀비의 수가 감소하고, 사람이 물리는 경우도 크게 줄었다. 정부는 하나의 감염 질환으로 정정하며 일상생활의 회복을 권장했다. 좀비를 피해 다니며 멀쩡하게 산책하고 출근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다고 좀비와 감염자가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어쩐지 요즘 신입 연구원들이 여러 자료를 들고 뛰어다니며 분주하다 싶었더니.

사태가 잠잠해지면서 본격적인 백신 연구도 시작되었다. 그리고 백신의 주성분에 도움 될 약이 주기적으로 유통되고 있었다. 캡슐 형태의 약을 일정 기간에 걸쳐 복용하면 감염자와 비슷한 상태에 접어든다. 인간 형태를 유지하며 좀비의 바이러스를 지니는 것이다. 좀비의 감염 세포를 가지고 있으나 면역이기 때문에 물릴 걱정은 없고,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한 인간이기 때문에, 큰 변수가 생기지 않는 이상 좀비가 될 일은 없다. 잠뜰은 그 약이 보일 때마다 '면역화'의 약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제품으로, 기관에서만 따로 소지하고 있다. 그런 알약을 덕개가 어떻게 가질 수 있던가.

덕개가 들어오기 전, 외부에서 불법 약물로 백신을 만들어 판다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면역 캡슐의 시제품을 누가 빼돌린 건지, 이상한 방법으로 변이성 좀비가 급증하여 수도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잠뜰이 한숨 쉬고 있을 때 덕개가 나지막이 말했다. 나도 그거 먹었는데. 시제품을? 아니, 복제품. 밖에서 그거 복제하는 사람들 엄청 많은 거 누나는 모르지? 그런데도 네 몸이 멀쩡해? 그렇게 됐네. 희한하네. 공식적인 백신이 아니므로 좀비가 될 수밖에 없는데, 무턱대고 그 캡슐의 복제품을 먹은 덕개가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있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길가에 버려진 음식을 주워 먹다가 실수로 캡슐을 삼킨 것 같다고 열연하여 기관에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든 외부인이 빼돌려서 복제한 약에 면역 있다는 이유로 해부까지는 하지 않으니까 다행인 건가.

누나 이상한 생각 했지. 아닌데. 맞는 것 같은데. 너 머리 계속 돌아가야 하니까 책이나 마저 읽어.

"박 좀비. 지금 가장 생각나는 것 세 가지 말해봐."

"졸림. 에어컨 바람이 너무 추움. 배고픔."

"영혼 좀 담아. 그리고 내가 수현이랑 똑같은 대답 하지 말랬지."

​"너무 배고파서 밥을 주지 않으면 쓰러져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것도 수현 형을 기억해주는 방법이 아닐까?"

"뭐래. 그리고 쓸데없이 연기하는 걸 보아하니 확실히 인간이군."

"그럼 내가 하루아침에 좀비로 변하겠어."

"지금은 좀비 맞잖아. 이 누나한테 화도 내는 걸 보아하니 멀쩡한 것 같다."

"거 봐, 아직은 괜찮다는 거지."

그리고 지금은 좀비가 아니라 감염자. 어 그래 감염자 덕개야. 그리고 아직 괜찮다는 게 무슨 소리니, 계속 멀쩡해야지. 식판을 받은 덕개가 유리 너머 앉아있는 잠뜰을 노려보며 숟가락을 들었다. 오늘은 왜 전자레인지에 돌린 것 같은 도시락 세트가 나와 있지? 무슨 소리야, 어제만 내가 된장국 끓인 거잖아. 아…. 그러니까 잔말 말고 먹어. 잠뜰은 앞에 있는 노트북을 한번, 조용히 즉석 볶음밥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덕개를 한번 번갈아 보며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오늘도 멀쩡한데, 도대체 뭘 적어야 하는 거지. 잠시 고민하다가도 손가락은 금세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현이는 여섯 달 지나고 좀비 됐는데. 넌 일곱 달 지나도 멀쩡하네. 덕개는 밥 먹다 말고 그런 잠뜰의 옆모습을 조용히 구경했다.

연구실 문 너머에서는 다른 감염자의 상태를 대신 확인해달라며 잠뜰을 불러내는 소리가 들렸다. 덕개가 밥을 잘 먹고 있음을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처럼 가운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한번 훑어보며 덕개의 건너편에 있는 방출 입구에 카드키를 대었다. 덕개가 있던 H-14 실의 간판이 문 너머로 사라졌다.

갑자기 좀비가 나오는 영화가 한 편 보고 싶다며 노트북을 빌려달라는 P-15 실의 요구에 맞게 찾아다 준 잠뜰이 구시렁거리며 덕개의 방으로 다시 들어왔다. 지 담당이 왔을 때 달라고 하지, 왜 나한테 부탁하는 거야. 뭐 하고 왔어? 있어, 귀찮은 거. 어느새 도시락 다 비우고 책 읽고 있던 덕개가 잠뜰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비 노트북들은 왜 계단밖에 없는 지하에 보관하는 거야. 까득 이를 가는 잠뜰의 중얼거림에 상황을 파악하고는 다시 책을 편 덕개였다. 책 읽는척하지 마, 어차피 너 피 뽑을 시간이야. 잠뜰은 들어오면서 챙긴 채혈기의 포장지를 뜯었다. 능숙하게 자리에 앉아 준비하는 잠뜰을 가만 보다 덕개가 입을 열었다. 누나.

"수현이 형 소식은 안 궁금해?"

"전혀. 니가 처음 들어왔을 때도 나는 수현이는 알아서 살고 있을 거라고 말했어."

"왜 그랬는지는 모르고?"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알아도 너한테는 얘기할 필요 없어."

"왜? 나도 그 형이랑 같은 처지니까 알아두면 좋잖아. 혹시 몰라, 나도 갑자기 누나를 기억 못 할 수 있고."

"그거는 감정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기억을 잃는 거잖아. 그리고 넌 수현이랑 다르지. 걔는 이미 좀비가 됐을지도 모르는데."

여기서 내가 할 일은 너 같이 들어온 사람들 지켜보면서 돈이나 버는 거야. 덕개와 잠뜰 사이의 유리창 하단에, 사람의 팔 하나는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문이 열렸다. 피 뽑게 이리 와. 그 바늘 좀 어떻게 해주면 안 돼? 예방주사 맞는 것보다 더 크단 말이야. 이건 예방주사 맞는 게 아니잖아. 이 주 만에 검사를 위해 팔을 내민 덕개는 두 눈 질끈 감았다. 잠뜰은 그런 덕개를 무시하고 일을 빠르게 끝냈다.

혈액이 담긴 튜브를 위층의 연구실에 제출하고 돌아온 잠뜰은 간만에 쉬자며 의자에 몸을 대었다. 혹시 모를 호출에 대비에 소리를 최소로 줄인 이어폰에서는, 바이러스 사태가 일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노래를 낸 유명 아이돌의 수록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두 번째 후렴이 끝나기 전 덕개의 목소리가 이어폰 너머로 들렸다.

"나 예전에 수현이 형 봤어."

"황수현? 언제?"

"내가 약 먹은 지 얼마 안 됐을 때. 그 형, 학교 잔디밭에 누워 있더라. 근데 좀비가 너무 많이 생겨서 통제 구역이 됐더라. 내가 들어갈 수는 없어서 말은 걸어보지 못했어. 땅 짚고 이리저리 기어 다니던데, 그 형도 이제 갈 때가 된 것 같더라."

"덕개야. 너도 걔랑 같은 처지로 만들어버리기 전에 조용히 해라."

"넵."

수현이 탈출할 때쯤, 신체 내의 바이러스를 항체와 비례하여 극대화하는 약이 거의 만들어졌다. 바이러스에 가장 강력하게 대항하는 항체를 찾아내어 백신을 만들도록 하는 게 잠뜰과 수현을 포함한 모든 인원이 전달받은 내용이다. 초기 기관 입성자들을 대상으로 만든 약이다 보니, 수현이 계속 있었다면 실험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덕개가 먹은 캡슐이랑 다를 게 없는 것처럼 보여도, 감염자 상태에 접어드는 것과 감염자가 좀비화에 도달하는 건 다르므로 큰 문제였다. 하지만 덕개는 사람들이 복제품을 먹고 좀비 된 것과 딱히 큰 차이가 없다고 말하며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 넌 면역이라고 그런 말이 쉽게 나오는 거지. 근데 사실인 걸 어떡해. 소독을 위해 감염자의 방으로 들어온 잠뜰에게 한 대 맞고 나서야 덕개는 조용해졌다.

그리고 현재, 두 번째 극대제와 함께 백신이 만들어졌다. 첫 번째 약은 감염자를 데리고 비밀리에 실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큰 논란이 되었더니, 이번에는 윤리적 문제를 고려하여 바이러스에 노출되지 않은 식물과 미생물로 연구했다고 한다. 극대제를 통해 바이러스에 면역인 항체를 발견하고, 그 항체를 강화해주는 백신까지 투여하면 온전한 치료가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면역 캡슐 시제품의 연장선이기 때문에 덕개가 먼저 복용할 예정이다. 다행이라는 점은 덕개 같은 경우는 이미 면역자이기 때문에 부작용이 일어날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일주일 간격으로 약과 백신을 투여하고, 이 주 동안 상태를 관찰하여, 완전히 치료될 예정인 한 달 뒤에 잠뜰의 방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한다.

치료 및 안정실로 가기 전의 덕개는 매우 멀쩡해 보였다. 오히려 기운이 넘쳐서, 치료가 끝나는 대로 잠뜰의 조수가 되어 믹스커피나 맛있게 타는 동생이 되겠다고 했다. 잠뜰은 인간으로 먼저 돌아오고 오라며 등을 떠밀었다. 그래도 수현과는 다른 상황으로 잘 살아남고 있으니 마음이 놓였다.

면역자를 우선으로 백신을 투여한 지 한 달 지나고, 감염자들의 차례가 되었다. 언젠가 가능할 치료를 위해 격리시설로 이송되는 좀비가 지나칠 때마다 덕개를 잠시 쳐다보는 점만 뺀다면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 물과 우유 그리고 커피 가루의 비율로 만들어진 완벽한 믹스커피를 홀짝이며 잠뜰은 다음 감염자의 파일이 전달되기를 기다렸다. 평소라면 방을 소독하기 직전까지 자료 확인하는 걸 미루었을 테지만, 먼저 소식을 접한 덕개에게 감염자의 이름부터 들었더니 확인하지 않으면 그에게서 한 소리 들을 것만 같았다. 나도 나름 특이하게 들어왔다고 생각하는데, 그 형도 만만치 않더라. 파일이 담긴 메일은 세 시간 뒤에 왔다.

담당 연구원 잠뜰, 이름 황수현, 감염 추정 시기 1년 8개월 전.

특이사항 바이러스 감염의 징조가 보였으나 다시 감염자의 상태로 돌아와, 집중 관찰 및 우선 치료 대상. 기관 관리자와의 대화에서 과거를 그리워하는 감정이 순간적으로 존재했다고 추정되어 감염자의 기관 출입을 허가함.

누나. 왜? 갑자기 동아리방에 가보고 싶어. 있잖아, 모이는 날 아닐 때 덕개까지 불러서 고기 구워 먹고. 갑자기 생각났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 그래서 갔다 와 보게? 엉. 나가면 돌아올 수 있고? 왠지 거기 가보면, 돌아올 방법이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야. 지금 감정도 없는 니가 뭘 아는데. 나 원래 예감은 좋잖아. 어련하셔.

추가로 맡을 감염자가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다며 잠뜰을 불러내는 소리가 들렸다. 잠뜰은 수현을 한번 바라보고, 문을 닫고 나왔다. 감염자 수현의 방문은 잠겨있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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