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콜로니. 35
#35. 동거
아이는 등을 한껏 굽히고 골목을 내달렸다. 결 좋은 짙은 갈색 머리가 바람에 흩날리고, 골목 사이로 들어오는 태양광에 반사되며 순식간에 초콜릿 빛으로 물들었다. 아이는 왼팔을 옆으로 뻗고 다른 쪽 팔은 땅으로 향한 채로, 입으로 바람 소리를 내며 세차게 뛰어갔다. 오른손에 쥔 장난감 탱크의 바퀴가 거친 아스팔트 도로 위를 빠르게 굴러가며 드드득, 하고 긁는 소리를 내었다. 엄청난 기세로 달려가던 아이가 별안간 우뚝 멈춰 섰다. 골목 끝에 노란 줄무늬를 가진 고양이가 기지개를 켜는 게 시야에 들어왔고, 아이는 대번에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중대장님, 15m 밖에 적군이 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음성을 바꾸어 한층 더 낮고 굵직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뭐라고? 포격을 요청한다!"
아이가 탱크의 포구를 손가락으로 움직여 고양이를 조준했다.
"대기— 발사!"
아이는 입술을 오므렸다가 펑! 소리를 내며 탱크를 살짝 뒤로 움직였고, 잠깐 정적이 흘렀다. 앞발로 혀를 할짝대던 고양이가 햇빛 아래에 발라당 드러누워 배를 깠다. 이마에 달린 LED가 푸른색으로 반짝이고, 아이는 환호성을 질렀다.
"적군이 결멸되었습니다! 중대장님, 성공입니다!"
아이는 탱크를 돌려서 왔던 길로 우다다 되돌아갔다. 그리고, 골목에 우뚝 선 구둣발을 보고 멈춰 섰다.
"결멸이 아니라, 격멸이라 하는 거야."
아이가 머리를 들어 위를 바라봤고 갈색 눈동자가 반가움으로 물들었다. 한 남성이 주머니에 손을 꽂고 시큰둥한 표정으로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저씨!"
"적군이 고작 15m밖에 안 떨어져 있는데 포격을 요청하는 중대장이라니. 심히 걱정되는 분대구만."
퍼킨스는 제리의 손에 들린 탱크가 흙먼지로 뒤덮인 걸 보며 덧붙였다.
"정비병이 일을 너무 안 하는군. 그렇게 쓰다간 얼마 못 가서 트랙 다 갈린다."
제리는 헤헤 웃으며 장난감을 옷에 문질렀다. 이미 잔뜩 얼룩진 상의가 한층 더 꼬질꼬질해졌다. 퍼킨스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너 이렇게 어른 오라 가라 하는 거 아니야."
"아저씨도 저 오라 가라 많이 하잖아요."
"말 이상하게 하지 마. 난 너 보고 오라 한 적 없어. 저리 가라 한 적은 있어도."
"가라 한 게 아니라 정확히는 꺼지라 했죠."
끊이지 않는 말대꾸에 퍼킨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이건 안드로이드건 할 것 없이, 애들은 정말 성가셨다.
"그래서, 왜 부른 건지 결론만 말해. 얼마 없는 소중한 휴일에 보모 노릇하며 보내고 싶지 않으니까."
제리는 괜스레 골목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곤 담벼락에 바짝 붙어 서서 퍼킨스에게 손가락을 까딱했다. 퍼킨스는 허리를 숙여 아이에게 귀를 가져다 댔다. 제리는 양손을 둥글게 굴려 자기 입과 인간의 고막 사이에 작디작은 통로를 만들고는, 냅다 소리쳤다.
“트릭 오어 트릿!”
깜짝 놀란 퍼킨스가 다급히 얼굴을 떼며 귀를 막았다. 아이는 깔깔대며 인간의 놀란 표정을 따라 했다. 퍼킨스의 인상이 구겨지고 그가 한 소리 하려 입을 벌리는 순간, 아이가 앞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퍼킨스는 눈을 찡그리고 그 손에 들린 물건을 내려다봤다.
“이게 뭔데?”
“보면 몰라요? 사탕이잖아요.”
제리가 손을 흔들자, 포장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퍼킨스가 사탕을 들어 올리며 시큰둥하게 물었다.
“할로윈은 지났어. 지금 주기엔 너무 늦지 않아?”
아이는 어디서 배운 버릇인지, 눈알을 대차게 굴리며 퍼킨스를 흘겨봤다.
“아저씨가 말한 것도 기억 안 나요? 마약 구하러 다니는 안드로이드가 있다면 말해달라면서요. 레드아이스는 몰라도, 이걸 구하러 다니는 안드로이드가 엄청나게 많아졌어요.”
퍼킨스가 사탕 양옆으로 꼬아진 매듭을 잡아당겨 포장을 벗겨냈고, 보라색 사탕이 모습을 드러냈다.
“펄 캔디?”
“어? 알아요?”
“나도 듣기만 했어. 요즘 안드로이드 사이에서 유행하는 선호 식품이라고.”
“역시, 모르는 게 없는 FBI네요.”
퍼킨스가 미간을 추켜세웠지만 제리는 별 뜻이 없었는지 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누가 사고파는 건지는 저도 몰라요. 아저씨가 흥미로워할 것 같아서 얘기 드린 거예요.”
퍼킨스는 자신이 맡은 사건이 아닌 이상 안드로이드 사이에서 어떤 약이 유행하는지 그다지 관심이 가진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마약단속국은 몹시 흥미로워할 거란걸 알았다. 퍼킨스가 사탕을 다시금 포장지에 감싸며 물었다.
“넌 이런 걸 어디서 구한 거야?”
“근처에 사는 노숙자는 다 하나씩 갖고 있어요.”
“그들이 너한테 순순히 줬다고?”
“아뇨? 당연히 훔쳤죠.”
퍼킨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겁도 없군. 마약 중독자한테서 마약을 뺏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긴 해?”
“몰라요. 어떻게 되는데요?”
아이의 순진무구한 눈동자에, 퍼킨스가 속으로 혀를 찼다.
“좋은 꼴은 못 볼 거다.”
“안 그래도 사탕이 없어졌다는 걸 알고 나니까, 완전 눈이 돌아가지곤 왔던 길을 수백 번씩 왔다 갔다 하던데요. 진짜 바보 같았어요.”
제리가 낄낄거렸다. 아이의 지나칠 정도로 철없는 모습에, 퍼킨스가 정색하며 말했다.
“장난이 아냐. 그러다 진짜 죽을 수도 있어. 중독자는 자기가 뭔 짓을 하고 다니는지도 모른다고. 될 수 있으면 옆에 가지 않는 게 상책이야.”
칭찬은커녕, 잔소리를 들은 제리는 대번에 기분이 상해선 입술을 비죽였다.
“그렇지만 전 아저씨한테 가져다주려고 그런 건데…. 아저씨가 뭐든 정보가 있으면 말해달라 했잖아요.”
“난 정보만 알려달라 했지, 이렇게 위험한 행동을 하라 하진 않았어.”
“전 어린애라고요. 제가 길거리에 나다니는 것 자체가 위험한 행동이에요.”
퍼킨스가 코웃음을 쳤다.
“알긴 하네. 근데 왜 계속 여기서 사는 거야?”
“말했잖아요. 보육원은 애들이 너무 시끄럽다니까요.”
“안드로이드 전용 시설도 생긴 거로 아는데? 언제까지 밖에서 살 거야?”
제리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툴툴댔다.
“거기 가봤어요? 무슨 닭장처럼 다닥다닥 붙어서 답답하고, 좁고, 냄새나요. 완전 불쾌하다고요.”
그리고 제리는 의문 섞인 눈으로 퍼킨스를 올려다봤다.
“그런 건 왜 갑자기 신경 써요? 위험성으로 따지면 저 같은 어린애가 마약에 빠삭하단 것 자체가 더 위험한 거 아니에요? 여태까진 제가 뭘 하고 다니는지 전혀 관심도 없다가, 왜 갑자기 궁금해하는 거예요?”
무척이나 합당한 지적에 퍼킨스는 할 말을 잃고 아이를 내려다봤다. 가끔은 제리가 내뱉는 신랄할 말투가 아이 특유의 솔직함 때문인지, 아니면 그런 성격으로 프로그램된 안드로이드이기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퍼킨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야, 여태까진 별로 안 궁금했으니까.”
“지금은 궁금해졌고요?”
“그래. 그러니 물어봤지.”
제리는 순수해 보이는 눈망울을 몇 번 깜빡이더니 눈을 접어 웃었다.
“그래도 아저씨는 발전이 있네요. 다른 인간들은 전혀 발전이 없어 보이던데.”
어른에게 내뱉기엔 상당히 부적절한 말투에 퍼킨스가 이마를 찌푸렸다. 하지만 눈치 빠른 제리는 미리 선수 치며 항복한다는 듯 양손을 내어 보였다.
“알았어요, 알았어. 이제 훔치거나 그러지 않을게요. 그리고 시설에 들어가긴 할 거예요. 밖에서 자기엔 너무 추워졌으니까.”
퍼킨스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더는 말을 얹지 않았다. 그가 제리에게서 건네받은 사탕을 주머니에 집어넣는데, 그 속에서 벨 소리가 들려왔다.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한 퍼킨스는 잠깐 기다리라는 듯 손가락을 들어 올리고 전화를 받았다. 노먼의 목소리가 곧장 귓가로 꽂혀 들어왔다.
[리처드! 어디야?]
“왜.”
[한잔해.]
별것도 아닌 걸로 비장하게 말하는 상대의 제안에, 어이가 없어진 퍼킨스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싫어. 귀찮아.”
[제발…. 내가 살 테니까.]
또 뭔 일이야, 젠장. 퍼킨스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파트너는 마치 고양이에게 목이 물려 죽어가는 생쥐처럼 기운 빠진 목소리로 애걸했다. 퍼킨스는 눈을 들어 아직 중천에 떠 있는 해를 쳐다봤다.
“저녁에 봐, 그럼.”
[아니. 지금 봐야 해.]
“왜? 뭔 일인데 그래?”
[집에서 쫓겨나서 갈 데가 없어.]
“뭐? 쫓겨나? 그거 네 집 아니었어?”
퍼킨스의 의문 섞인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로 짙은 탄식이 들려왔다.
[그러니까…. 내 말이…….]
퍼킨스는 아까까지만 해도 관심이 없었지만, 이제는 엄청나게 궁금해졌다. 그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어디로 가면 되는데?”
[어디든. 네 집 앞도 상관없어.]
“나 지금 집 아냐. 헤일메리로 와.”
[집이 아냐? 어딘데?]
“알 거 없고, 20분 안에 도착하니까 먼저 가 있어.”
노먼이 뭐라 중얼거렸지만, 퍼킨스는 이미 수화기를 귀에서 떼고 전화를 끊었다. 그가 시선을 내려 제리를 보았다.
“난 간다. 더 할 얘기 없지?”
제리는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그리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퍼킨스는 그를 빤히 응시하다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 밥은… 티리움 충전은 어디서 하냐?”
“미드타운에 배급소가 있어요. 맛은 별로지만 그래도 먹을만해요.”
“맛 같은 게 있어? 너희는 맛을 못 느끼는 줄 알았는데.”
“무슨 소리예요? 다른 안드로이드는 몰라도 저는 완전 미식가라고요! 전에 엄마랑 살 때 먹은 티리움이 제일 맛있었어요. 배급소에 있는 건… 조금 밍밍해요. 색깔도 이상하고, 배도 금방 고파져요.”
“그런 데서 주는 건 농도가 낮아서 그래.”
“아저씨는 먹어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요?”
“아는 안드로이드가 말해줬어.”
“저 말고 아는 안드로이드가 있어요?”
퍼킨스가 픽하고 웃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안드로이드를 아는지 들으면 놀랄 거다.”
그리고, 그중 대다수는 날 죽이지 못해 안달이라는 걸 알면 더 놀랄 거고. 하지만 퍼킨스는 어린애 앞에서 말을 아꼈다. 제리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퍼킨스는 조금 고민하다가 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뽑아 들었다.
“근처 충전소 가서 괜찮은 걸로 하나 사 먹든가.”
제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퍼킨스는 약간 불안해진 마음에 충고했다.
“다른 거 사지 말고 티리움만 사. 아니면 다음부턴 없어.”
“어…. 원래 그러려고 했는데, 아저씨 얘기 들으니까 괜히 장난감을 한 대 더 장만해도 될 것 같고….”
퍼킨스가 돈을 다시 지갑에 집어넣으려는 찰나에 제리가 지폐를 낚아챘다. 그리곤 엉성한 차렷 자세로 손을 눈썹 위로 올렸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알아 모시겠습니다, 대장!”
퍼킨스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발을 돌렸다. 골목을 나서는 그의 뒤쪽에서 바보같이 헤헤 웃으며 신나게 뛰어가는 아이의 뜀박질 소리가 들려왔다.
퍼킨스가 캔필드 가로 들어섰을 때, 이미 건물 앞엔 노먼의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근처에 대충 차를 대고 내려선 퍼킨스의 눈에 ‘헤일메리 펍’이라는 주홍색 간판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건 바 테이블에 앉은 익숙한 뒤통수였다. 노먼은 종이 울리는 소리도 듣지 못한 건지 멍한 눈으로 TV에서 중계되는 풋볼 경기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퍼킨스가 옆에 앉자, 노먼이 드디어 머리를 돌렸다.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은 눈가엔 피로와 음울함이 묻어났다. 퍼킨스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휴일 동안 뭘 한 거야? 몰골이 말이 아닌데.”
노먼은 대답 대신 가게 주인, 메리를 향해 손을 올렸다. 메리가 닦던 접시를 내려놓고 다가왔다.
“이제 주문할 거예요?”
“네…. 두 잔만 주세요.”
메리가 메뉴판을 가져갔다. 퍼킨스는 앞에 놓인 견과류를 집어 먹으며 물었다.
“왜 미리 시키지 않고?”
“또 누가 내 술에 장난질 칠까 봐. 불안해서 시킬 수가 있어야지.”
“여기에 그럴 사람이 누가 있어.”
“그때도 그런 사람은 없을 줄 알았어.”
“그럼, 지금은 왜 마시는데?”
“뭔 일 나면 네가 알아서 집에 데려다줄 거니까.”
퍼킨스는 눈알을 굴렸다. 가만 보면 자신을 보모 취급하는 건 제리가 아니라 서른네 살이나 처먹은 이 자식이었다. 심사가 뒤틀린 퍼킨스가 냉담하게 받아쳤다.
“집에서 쫓겨났다 하지 않았어?”
그 말에, 노먼은 잔뜩 울상을 짓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지나치게 이상한 파트너의 반응에 퍼킨스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무슨 일인데 그래?”
“코너.”
“코너? 걔가 뭘 어쨌다는….”
“나 코너랑 살아.“
퍼킨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노먼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노먼은 무척이나 피곤해 보였고, 그 때문인지 ‘랑’과 ‘에서’라는 조사를 헷갈린 듯했다. 게다가 ‘코너’라는 발음은 퍼킨스의 귀에 다르게 처리되어 들려왔다. 이러나저러나 노먼의 특이한 억양은 오랫동안 붙어 다닌 자신도 가끔 헷갈렸으니까. 퍼킨스가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래. 나도 네 집에 가봐서 알아. 그리스월드 가랑 미시간 가 교차로에서 살잖아. 아, 혹시 축제 때문에 잠을 못 잔 건가? 그쪽 거리가 좀 혼잡하긴 해도 네 층수 정도면 딱히 소음 문제도 없어 보이던….”
노먼이 고개를 저으며 재차 말했다.
“아니. 코너에서 사는 게 아니라 코너랑 산다고. 코너랑. 함께. 산다고.”
하지만 노먼이 얼마나 정확한 발음으로 얼마나 또박또박 말하든, 퍼킨스는 평생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단어의 조합 사이에서 생소한 외국어라도 들은 듯 눈매를 찌푸리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안드로이드? 코너? DPD에서 온 그 안드로이드, 코너?”
몹시도 멍청해 보이는 질문에, 노먼은 헛웃음을 흘렸다. 조금 전까지 매우 심각했는데 상황을 짐작조차 못 하는 파트너의 얼굴과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없는 제 처지에 그저 웃음밖에 안 나왔다. 퍼킨스는 갑자기 비실대는 노먼의 모습에 훨씬 더 의아해진 심정으로 물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노먼은 대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냥, 처음부터 말하기로 했다. 엊그제 코너와 같이 신분증을 찾으러 가며 잠깐 나눴던 대화부터 시작해서, 그날 밤 또다시 코너와 마주친 것, 새벽에 나눈 이야기와 노먼의 제안, 그리고 계약서 작성까지. 노먼 나름의 논리적인 사고 흐름대로 설명해 가며 왜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지 전달하려 애를 썼다. 하지만 대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날카로워지는 퍼킨스의 눈꼬리에, 노먼은 말하는 중간중간, ‘그래. 나도 아니까 일단 판단하지 말고 들어봐.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가 뭐냐면….’이라는 어구를 매 문단마다 끼워 넣어야 했다.
이야기를 끝마친 노먼은 퍼킨스의 한심함이 가득 담긴 눈빛을 마주하고도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적어도 어제였다면, 그러니까 아직 코너와 사는 것이 노먼 본인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온 건지 제대로 알기 전이었다면, 노먼은 파트너의 저 표정이 편협함에서 나오는 과도한 걱정이라고만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노먼은 정확히 38시간, 코너와 함께 살아봤다. 그리고 이 생활을 앞으로 한 달을 지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앞이 막막해져 왔다. 노먼은 전날 있던 일을 떠올렸다.
계약서에 서명을 마친 후, 노먼이 욕실에서 나왔을 땐 거실 불은 꺼졌고 집 안은 조용했다. 안드로이드는 벌써 제 방으로 들어갔는지 닫힌 문 아래로 빛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노먼은 그대로 침실로 들어갔고, 옷을 갈아입은 뒤 커튼을 치고 침대 위로 기어올랐다. 역시 아까 잔 거로는 부족했는지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쏟아져 내렸다. 이 집 안에 자신 외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이 약간은 신경 쓰였지만, 룸메이트와 생활한 게 처음도 아니었기에 금방 익숙해질 거라 여기며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노먼은, 고작 세 시간 만에 방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젠장! 뭐 하는 거예요!"
노먼이 쿵쾅대는 심장을 움켜쥐며 제 앞으로 바짝 다가온 코너의 얼굴을 밀치려 했지만, 코너는 곧바로 허리를 펴서 인간의 손을 피했다. 그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기상 시간입니다."
"오늘은 휴일이라고요! 오후까지 잘 거니까 나가요!"
"인간의 몸은 휴일과 주말이 나뉘어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휴무일에도 출근일과 동일하게 기상 시간을 맞추는 것이 건강에 좋습니다."
"난 어제 4시에 잤다고요!"
"그 전에 좀 주무셨다고 하지 않았나요? 필요 이상의 수면은 뇌혈관계에 악영향을 미치므로…."
노먼은 신음을 흘리며 이불을 덮어썼다. 그가 잇새로 웅얼댔다.
"이 집을 관리하라 했지, 집 주인까지 관리하라 하진 않았어요….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꺼요."
코너는 잠잠히 있더니 이내 문 쪽으로 걸어가며 넌지시 답했다.
"저도 오늘과 내일 휴가계를 제출했으니, 12시에 다시 깨우러 오겠습니다."
노먼은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코너가 문을 닫자, 방안은 다시금 고요해졌다. 그리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일어난 탓에 노먼은 아주 약간 성질이 나 있었고, 마음을 가라앉히려 부단히 애를 쓰고 나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노먼이 완전히 눈을 뜬 건 12시가 되기 조금 전이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깊이 잠들지 못하고 여러 번 깬 바람에, 꽤 오래 잤음에도 잔 것 같지가 않았다. 노먼은 잔뜩 피로한 눈으로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침대 위에 가느다란 선을 만드는 걸 지켜봤다. 그의 귀로 다시 한번 짤그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먼은 저 소리가 안드로이드가 가끔 손장난을 치며 동전을 튕기는 소음이라는 걸 대번에 알아챘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거슬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자신이 원래 이 정도로 예민했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오랜만에 누군가와 같이 살게 돼서 평소보다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어차피 이런 건 시간이 지나면 적응될 문제였기에, 노먼은 머리를 흔들며 이불을 걷고 침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는 코너와 마주쳤다.
"일어나셨군요."
노먼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마주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코너."
"지금은 오후입니다. 점심을 차리려 했는데 냉장고에 요리를 할 만한 재료가 없습니다."
"됐어요. 제가 차려 먹을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노먼은 늘어져라 하품하며 그를 지나쳐 욕실로 들어갔다. 코너는 살짝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노먼이 씻고 나오는 동안 코너는 집주인이 잠들어 있어서 잠깐 미뤄둔 청소를 시작했다. 환기를 위해 집 안의 모든 문이란 문은 죄다 열어젖힌 그가 시야에 거슬리는 물건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커피 테이블에 올려진 컵 두 개를 싱크대에 가져다 놓고, 늘어놓은 책을 책장에 꽂고, 선반 위에 굴러다니는 펜을 보관할 만한 곳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는 무심결에 서랍장을 열었다가 눈가를 찌푸렸다. 온갖 잡동사니부터 전자 제품을 담았던 빈 각,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닐포장지와 수명이 다한 건전지가 바닥에 나돌아다녔다. 코너는 서랍을 닫으며 자잘한 건 우선순위 뒤쪽에 미뤄두기로 했다. 이런 것까지 정리하려면 하루 이틀로는 부족하니.
일단은 밖에 널려 있는 물건들을 싹 정리한 코너는 마른 헝겊을 가져와 의자를 딛고 올라섰다. 거실 천장의 전등 위로 손을 뻗은 코너는 욕실에서 나오는 노먼과 눈이 마주쳤고, 노먼이 살짝 질린 얼굴로 코너를 올려다봤다.
"그렇게까지 본격적으로 하는 거예요?"
코너는 대답하는 대신 역으로 되물었다.
"전등을 닦은 지 얼마나 되셨죠?"
"전등…을 닦을 일이 있나…?"
노먼은 안드로이드의 표정을 보고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코너는 몰랐겠지만, 노먼은 분명 그 얼굴에서 경멸의 감정을 읽어냈다. 코너는 말없이 전등을 닦았고 노먼은 머쓱한 기분으로 물었다.
“제가 도와줄 건…….”
“없습니다. 앉아계세요.”
코너가 단호하게 말했고 노먼은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것처럼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부엌으로 가서 찬장에서 그릇과 시리얼을 꺼내 들고 식탁에 앉았다. 코너가 손을 멈추고 노먼에게 말했다.
"청소 중에 식사하는 건 권장하지 않습니다. 먼지가 기관지로 들어가면 감염성 질환의 발병률이 증가합니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잠시 청소를 중단하겠습니다."
“제 폐 건강은 아주 괜찮으니 그냥 하던 거 계속하세요.”
하지만 코너는 의자에서 내려왔다. 그는 잠시간 다른 일을 할 게 있는지 둘러보다가 노먼의 방으로 들어갔다. 노먼은 상체를 옆으로 기울여 코너가 자신의 침구를 정리하는 걸 바라봤다. 노먼이 엉거주춤 일어나며 말했다.
“코너, 됐어요. 제 방은 제가 정리할 테니….”
코너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이불을 내려놨다. 그리고 밖으로 나올 듯 문 쪽으로 몸을 틀더니, 방문을 탁 소리 나게 닫았다. 노먼은 안드로이드의 얼굴이 문 너머로 사라질 때 그 표정에 드러난 성가신 기색을 똑똑히 보았다.
노먼은 별수 없이 자리에 앉아 우유를 그릇에 부었다. 한 손으론 기계적으로 음식을 입에 넣는 동안 다른 손은 전자 잡지의 페이지를 넘겼다. 기사에 실린 칼럼에선 안드로이드 전용 복지시설과 인간의 시설을 분리하는 것과, 같은 논점으로 아동 안드로이드의 보육 시설을 인간 아동의 보육원과 분리해야 할지에 대한 논쟁을 담고 있었다. 노먼은 잡지에 시선을 떼지 않고 한 손만 이용해 다 먹은 그릇을 정리하고 싱크대에 올려두었다. 그는 거실로 가서 기사를 마저 읽으려다가, 무심코 방문을 쳐다봤다. 자신이 그릇을 그대로 두고 가면 분명 코너가 나와서 치우겠다고 할 터였다. 노먼은 지금 설거지를 끝내는 게 낫다고 여기고 싱크대로 가 물을 틀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릇이 달그락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코너가 후다닥 문밖으로 나왔다.
“뭐 하시는 겁니까?”
“설거지요.”
평범하게 대답한 노먼은 그릇을 닦는 손을 멈추지 않았고, 코너는 미간을 좁히며 따졌다.
“설거지는 제 담당입니다. 계약서를 보시면 설거지를 포함해서—”
“제가 먹은 건 제가 치울게요.”
노먼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고, 고작 그릇 하나와 컵 두어 개뿐인지라 설거지는 금방 끝났다. 노먼은 옆에 놓인 수건에 손을 닦으며 코너의 어두운 눈을 바라봤다. 노먼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별로 많지도 않잖아요. 다음엔 당신이 해줘요, 그럼.”
그러면서 그는 식탁에 앉아 잡지를 들어 올렸다. 코너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결국 발을 돌려 노먼의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노먼은 눈으로 그의 등을 좇다가 머리를 흔들고는 기사를 읽어 나갔다.
잠시 뒤 방 청소를 마친 코너는 거실로 돌아와 아까 닦다 만 전등의 먼지를 말끔하게 제거하고, 먼지떨이로 천장을 쓸고, 의자를 옮겨 선반 장 앞으로 가져갔다. 노먼은 애써 신경을 끄고 잡지에 집중하려 했지만, 자신은 여유롭게 앉아있는 동안 코너 혼자서 바지런히 노먼의 집을 청소하는 모습을 보니 내용이 통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눈을 들어 코너가 선반 위의 물건을 내리려 의자에서 몇 번이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지켜봤다. 보다 못한 노먼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다.
“제가 내려놓을 테니 위에서 넘겨줘요.”
책을 한 가득 팔에 안고 있던 코너가 노먼을 잠시간 바라보더니, 그에게 건네주었다. 노먼은 묵직한 무게에 휘청하면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코너는 연이어 선반에 올려진 장식품과 공구 상자, 그리고 이게 왜 저기 있나 싶은 약병까지 전부 쓸어 담아 노먼에게 넘겨주었고 노먼은 먼지가 잔뜩 쌓인 물건을 바닥 한구석에 몰아두며 조그맣게 중얼댔다.
“이렇게까지 꼼꼼하게 안 해도 되는데…….”
하지만 코너는 인간의 말을 깡그리 무시한 채 헝겊으로 선반 위를 쓱 쓸었다. 그러고는 그걸 보란 듯이 노먼의 눈앞에 내밀었다. 노먼은 안드로이드의 싸늘한 표정에, 마치 위생관리국에 신고당한 음식점 주인처럼 몸을 움츠려야 했다. 노먼은 제 집에서 이런 멸시를 받는 게 너무 억울해서 울컥하는 마음에 쏘아붙였다.
“이 정도로 청결에 신경 쓰는 안드로이드였으면, 사무실이나 경찰서에선 대체 어떻게 지냈어요?”
“거긴 거주지가 아니니까요. 여기는 노먼과 제가 맨발로 걸어 다니고, 앉고, 누워서 생활하는 곳이니까 위생 상태도 달리해야죠.”
코너는 더 설명할 가치도 없다는 듯 선반을 벅벅 닦기 시작했다. 노먼은 주변을 둘러봤다. 필요한 것만 갖춰져 있는 간결한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피해자든, 용의자든, 범죄자든, 혹은 탐문수색 대상이 된 시민의 집이든 간에, 부동산 중개업자보다도 남의 집을 더 자주 방문하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데이터상으로 노먼은 자신의 집이 미국 시민 평균치에 비해 상당히 깨끗한 편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 기계의 눈에는 전혀 아닌 모양이었다. 코너는 노먼의 집을 마치 병원 멸균실로 만들려 작정이라도 한 듯,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곳곳에 소독약을 뿌려가며 선반 위에 올려진 물건 하나하나 뽀득뽀득 닦아대고 소파와 러그의 배치마저 바꾸며 청소기를 돌렸다. 그러고는 부엌으로 가 냉장고까지 싹 정리했다. 오래된 양념통을 버리고, 유통기한이 지난 치즈를 치우고, 뜯지도 않은 영양제를 쓰레기통에 집어넣고는 인간이 주변에서 알짱대며 같이 청소하려 애쓰는 걸 귀찮다는 듯이 바라봤다.
코너는 하루 종일 집안을 뒤집어엎은 것으론 부족했는지, 저녁이 되자 노먼에게 신용카드를 요구했다. 화장실 청소 솔이 다 해진 데다가 밀대의 조임쇠가 망가졌으니, 떨어진 세제와 주방용품을 살 겸 나갔다 오겠단 거였다. 노먼이 지친 목소리로 애원했다.
“이제 그만 좀 해요…. 오늘 다 할 필요는 없잖아요.”
“어차피 오늘 안에 다 하지도 못합니다. 휴일 내로 끝내지 않는다면 평일에 퇴근하고 와서 마저 정리해야 해요. 당신이 좀 더 집안 관리에 신경을 썼었다면 진작에 끝났겠지만, 그렇지 않으니까요.”
“주말에 하면 되잖아요.”
“주말이 되면 또 할 게 쌓여있겠죠. 청소는 미룰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노먼은 이미 어둑해진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예정에도 없던 휴일 맞이 대청소에 잔뜩 기진맥진해진 노먼은 결국엔 코너랑 같이 밖으로 나갔다. 코너는 마트를 돌면서 노먼에게 어떤 용품이 후기가 좋고 어떤 세제에 어떤 성분이 들어가 있는지, 어떤 게 그저 상술에 불과한 제품인지 일일이 설명해 주었고, 노먼은 코너가 건네주는 청소도구와 욕실 세제, 그리고 음식 재료 등을 카트에 몰아 담으며 청소와 관련한 코너의 철학 강의를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들었다. 쇼핑을 마친 노먼은 푸드코트에서 파는 피자를 저녁으로 먹었고, 이제 코너는 피자의 부족한 영양성분에 대한 장황한 설교를 노먼의 귓가에 늘어놓았다. 노먼은 대충 고개를 주억거리며 피자를 남김없이 해치웠다.
둘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욕실과 세탁실 청소로 2차전을 벌였다. 코너는 자꾸만 계약서를 들먹이며 나머진 자신이 할 테니 노먼 보고 들어가라 했지만, 노먼은 자기 욕실은 자기가 정리하는 게 맞다며 코너 본인의 구역이나 신경 쓰란 말과 함께 등을 떠밀어 내보냈다. 정오에 시작한 작업은 자정까지 이어졌고, 코너가 밀대를 창고에 집어넣는 걸 보고 나서야 노먼은 해방된 기분으로 청소 포를 쓰레기통에 던져넣을 수 있었다.
그래도, 반짝거리는 집안을 보니 다소 뿌듯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노먼은 땀과 먼지로 범벅된 옷을 벗고 후들거리는 두 팔을 겨우겨우 움직여 샤워를 끝마쳤다. 인간이 욱신대는 어깨를 끌어안고 침대에 엎어지는 걸 본 코너는, 노먼의 방문을 대신 닫아주며 내일은 창고와 서랍장의 물건을 정리해야겠다고 중얼거렸다. 노먼은 코너의 말을 못 듣고 반쯤 기절한 상태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노먼은 또다시 제 코앞까지 얼굴을 디밀고 깨워대는 코너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나야 했고, 또다시, 어제 일의 반복이었다.
하지만 코너는 오늘만큼은 노먼이 도와준답시고 근처를 서성이는 걸 두고 보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인간이 이미 청소를 끝낸 구역을 되짚어가며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구석에 아직도 미세한 먼지 부스러기가 쌓여있단 사실을 일일이 지적해 댔고, 노먼은 결국 걸레를 바닥에 팽개쳤다. 코너는 떨어진 걸레를 주워 들고 나머진 자신이 끝낼 테니 노먼더러 집 밖으로 나가 있으라 했는데, 그때 그는 ‘방해’와 ‘훼방’이란 단어를 쓰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노먼은 자신이 안일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 고작 한 달뿐인 데다가 집도 넓으니 딱히 부딪힐 일이 없을 거라 믿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노먼은 이미 대학교의 좁아터진 기숙사에서 무척이나 지저분한 동기와도 살아봤고, 워싱턴에서는 매우 깔끔한 애인과 살아본 전적도 있었다. 거기에 더해 이미 어릴 때부터 모르는 아이들과 살을 부대끼며 생활한 경험이 있기에 노먼은 누군가와 같이 지내는 것에 그렇게 까다롭게 구는 성격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노먼이 여태껏 봐 온 코너는 행동이 크지 않고 침착한 데다가 대부분의 경우 조용했다. 그러므로 안드로이드 한 대 집안에 초대하는 것쯤이야, 별일도 아니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의 짐작은 완벽히 잘못된 것으로 판명 났다. 노먼은 코너가 그렇게 말이 많고, 시끄럽고, 부산스러운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게 됐다. 다른 종족에 대한 무지의 대가는 부족한 수면과 몸살, 그리고 지대한 스트레스성 두통으로 나타났고, 노먼은 이 괴로운 심경을 토로할 곳이 필요했다. 비록 이야기를 듣는 상대가 엄청난 판단과 심판의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볼지라도.
노먼은 퍼킨스에게 끊임없이 하소연했다.
“그래서 아깐 또 뭔 일이 있었는지 알아? 내가 소파에 앉아서 빵 봉지를 뜯자마자, 무슨 새 차 뽑은 인간이 보조석에 과자 들고 올라탄 개념 없는 인간을 보듯 날 노려봤다니까. 난 안드로이드가 그런 눈빛을 할 수 있는지 처음 알았어. 더는 못 참겠어서 여긴 내 집이고, 이렇게 눈치 보면서는 못 살겠다고 하니까 또다시….”
“계약서를 들이댔겠지.”
“그래! 농담이 아니라 진짜 태블릿을 부숴버리고 싶었다고! 그놈의 계약서 쓰는 게 아니었어. ARI로 어떻게 해킹이라도 해서 삭제해 보려 했는데 어찌 알고 계약서 사본을 사이버라이프 가장 깊숙한 보안실 하드에 업로드시켰다는 거야. 그러면서 수줍게 웃는데, 진짜 소름 돋아서…….”
노먼이 격분할수록 퍼킨스는 오히려 여유작작하게 술만 홀짝였다. 노먼이 새로운 룸메이트에 대한 기나긴 험담을 마치자, 그의 휴대폰에 저장된 계약서를 한 장 한 장 넘겨보던 퍼킨스가 딱 한 마디로 모든 상황을 결론지었다.
“잘됐네. 넌 정신 좀 차려야 해.”
노먼은 맥이 빠져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도 퍼킨스가 저 말을 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직접 들었을 때 오는 자괴감의 크기는 생각보다 더 컸다. 파트너의 시무룩한 얼굴을 본 퍼킨스는 고개를 저으며 약간은 위로하는 투로 얘기했다.
“이러나저러나 그 자식의 얘길 듣는 순간, 너는 이미 게임 끝이었어. 지금 와서 후회한다고 바뀔 건 없어.”
“무슨 소리야?”
“다시 돌아간다면, 네가 과연 그 녀석한테 같이 살잔 소리 안 할 것 같아?”
노먼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강하게 부정했다.
“그 안드로이드의 정신 나간 결벽증을 미리 알았다면, 절대로—”
퍼킨스가 계약서의 맨 마지막 장을 노먼의 눈앞에 들이대며 말을 잘랐다.
“정 뭐하면 50조항이 있네. 내 동의만 있으면 코너를 쫓아낼 수 있단 거잖아? 네가 원하면 해주지. 걔가 왜 날 제삼자 증인으로 세웠는진 모르겠지만, 이게 계약서의 유일한 구멍이야. 그 틈을 노리자고.”
노먼이 입을 벙긋대다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코너는 계약을 어기지 않았어. 솔직히 가정부 안드로이드도 그보다 완벽히 청소할 수는….”
“상관없어. 청소의 완성도는 상대적인 거야. 뭐든지 트집 잡아서 허점을 노리려 하면 충분히 가능해.”
“그건…, 그렇지. 그런데… 그건 조금 비인간적인…….”
머뭇대며 말을 잇지 못하는 노먼의 모습에 퍼킨스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넌 절대 못 해. 아마 그 순간으로 돌아가도 또 코너한테 정확히 같은 제안을 하고 앉았겠지.”
노먼은 괴로워하면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가 테이블에 얼굴을 묻으며 웅얼댔다.
“아니야. 다시 돌아가면 적어도 계약서는 안 쓸 거야.”
“포기해. 이미 늦었으니. 그냥 눈 딱 감고 한 달만 버텨. 다시는 누군가를 입양할 생각, 하지도 말고.”
“절대 안 해…….”
퍼킨스는 다소 측은하게 노먼을 바라봤다.
“그래도 좋은 면을 봐. 조금 귀찮지만 어쨌든 가정부가 생긴 거잖아?”
“차라리 가정부를 고용했으면 고용했지, 이건 직장동료가 내 집을 청소해 주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불편해서 미쳐버릴 것 같아.”
“그 녀석 나름대로 너한테 은혜 갚는 거라 생각해. 고마우니까 뭐든 해주려 하는 거야.”
노먼은 힘없이 눈꺼풀을 들어 올려 퍼킨스를 바라봤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퍼킨스가 실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아니, 전혀. 네가 자기를 함부로 쫓아낼까 봐 계약서를 쓸만한 변명거리를 생각한 것뿐이지. 그 자식도 은근히 영악한 구석이 있다니까.”
그게 더 맞는 말 같았다. 코너가 노먼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계약서를 작성한 거라면 노먼이 지금 이렇게 괴로울 리가 없었으니. 하지만 노먼은 퍼킨스가 처음 내놓은 가설을 믿고 싶었다. 그래야 사정이 조금은 나아 보일 테니까.
노먼은 우울한 눈으로 다 마신 술잔을 손안에 굴려댔다. 취기가 올라오면 상황이 좀 긍정적으로 보이리라 믿었는데, 여전히 정신은 명료했고 그의 처지는 변한 게 없었다. 퍼킨스는 오후 내리 이런저런 가십거리를 던져가며 노먼의 기분을 약간이나마 가볍게 만들어주었고, 저녁이 되자 두 사람은 다음 날 출근을 위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댄 노먼은 잠시간 그대로 차 안에 앉아 있었다. 곧장 집으로 들어가 코너의 청소를 도와줘야 할지, 아니면 조금 더 밖에서 죽치고 있어야 할지 고민이 됐다. 하지만 판단은 길지 않았다. 여긴 노먼의 집이었고, 때문에 제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할 필요성이 있었다. 만약 지금까지도 코너가 청소한답시고 집안을 들쑤시고 있다면 노먼도 그를 따라 최대한 빨리 일을 끝내고 마음 편히 쉬는 게 상책이었다. 노먼은 결국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는 중에도 여전히 걱정과 근심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노먼은 코너가 또다시 자신을 쫓아내려 들면 무슨 말로 대꾸해야 할까 입안으로 중얼댔다. 솔직히, 고운 말이 나올 것 같진 않았다. 노먼은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룸메이트 중 가장 난이도가 높은 이 기계를 어떤 방식으로 다루면 좋을지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짜봤다. 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해결책이 떠오르진 않았다. 자신의 자취 역사상, 이리도 짧은 기간 안에 이토록 다양한 갈등과 불화를 만들어낸 존재는 코너가 유일할 것이라 확신하며 반쯤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런 노먼이 도어락을 해제하고 현관문을 열어젖히자마자 느낀 건, 집 안을 가득 채운 진한 버터 향이었다. 빵집 앞을 지나칠 때마다 맡는 그 부드럽고 고소한 향이, 거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차가운 밤바람에 실려 노먼을 스치고 활짝 열린 현관 너머로 빠져나갔다.
노먼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내부를 본 그의 눈이 더욱 휘둥그레졌다. 분명 어제도 꽤 깔끔하게 치운 것 같았는데, 오늘 본 거실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대체 바닥에 무슨 짓을 한 건지 나무로 된 바닥재가 거울처럼 반짝였고 소파와 러그는 기분 탓인가 색이 훨씬 선명해진 느낌이었다. 벽에 붙은 선반엔 갓 지은 신설 도서관처럼 책이 정갈하게 꽂혔고, TV는 새것처럼 반질반질했다. 노먼은 정면에 보이는 창 너머로 엄청나게 높아진 해상도의 도시 전경을 바라봤다. 창문이 열려있지 않았다면 코너가 유리창을 통째로 들어낸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덜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층 짙어진 구운 빵 냄새가 코를 찔러왔고, 노먼은 코너가 오븐에서 파이를 꺼내는 모습을 입을 벌리고 쳐다봤다. 식탁 위엔 최후의 만찬에서 볼 법한 요리가 널렸고 노먼은 저게 진짜 음식인지, 잘 만든 모형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코너는 노먼을 쓱 쳐다보며 파이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연락을 드리려 했는데, 시간 맞춰 오셨네요."
"이, 이게 뭐예요?"
"저녁 식사입니다. 앉으세요."
노먼은 어안이 벙벙해져선 물었다.
"이걸… 언제 다 한 거예요?"
"청소 끝나고 남는 시간 동안에요."
코너가 대수롭지 않다는 식으로 말했다. 노먼은 간단한 요리만 몇 개 할 줄 아는 수준이었지만 이 정도 가짓수의 요리를 하려면 한두 시간으론 어림도 없다는 걸 알았다. 코너는 찬장에서 그릇을 꺼내어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곤 파이를 한 조각 잘라 접시에 얹고, 냄비에서 수프를 떠서 그 옆에 가지런히 놓으며 말했다.
"식기 전에 드십시오."
노먼은 홀린 듯 다가가 코너가 친절히 빼내어 준 의자에 앉았다. 코너는 곧바로 식기를 대령했고 노먼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내용물을 한 스푼 떠서 입으로 가져가자, 허브향으로 감칠맛을 낸 수프가 부드럽게 입안을 적셔왔다. 그제야 노먼은 자신이 꽤 허기가 진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멈추지 않고 거듭 수프를 떠먹었고 코너는 옆에 서서 스테이크를 잘라 노먼의 접시에 얹어놨다. 그 순간, 노먼은 순식간에 체한 것처럼 속이 얹히는 기분이 들었다.
“제발 집사처럼 굴지 말고 좀 앉아 있어요.”
코너는 말없이 인간을 내려다봤으나 노먼은 그가 물러날 때까지 음식을 입에 대지 않으려 작정한 듯 보였다. 코너는 별수 없이 노먼의 맞은편에 앉았고 노먼은 드디어 편한 마음으로 식사를 이어갈 수 있었다.
특별한 날만 방문하는 레스토랑의 근사한 디너코스 같은 요리에, 노먼은 코너의 실력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어제와 오늘, 안드로이드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듣던 '영양학적으로 균형 잡힌 음식'의 표본이 바로 여기 있었다. 육류와 채소, 곡물이 다양하게 어우러졌고, 전부 양념이 적절하게 배어있어 간도 적당한데다가, 재료끼리의 조화 역시 아름답게 살렸고, 한 끼 식사만큼의 정량마저 완벽하게 맞추었다.
하나도 남김없이 음식을 해치운 노먼은 만족스러운 포만감을 느끼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가 감탄한 표정으로 코너를 바라봤다.
"정말, 너무 잘 먹었어요. 요리는 언제 배운 거예요?"
"배운 게 아니라 레시피대로 조리한 겁니다."
"저는 레시피대로 해도 맛이 안 살던데요."
정말 레시피대로 한 게 맞나요? 코너는 묻고 싶었지만, 무슨 답을 들을지 예상이 갔기에 구태여 입을 열지 않았다. 인간은 자기 합리화에 능한 동물이었고 규칙을 철저히 지켰다고 주장하는 말의 대부분은 자기식대로 재해석한 변칙인 경우가 많았다. 코너는 지적하는 대신 또 다른 진리를 말해주었다.
"요리는 이론과 과학의 영역입니다. 물리화학적 지식을 응용하면 재료가 가진 풍미를 끌어내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노먼은 요리사도 과학자도 아니었기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누군가 자신만을 위해 이런 만찬을 차려준 건 흔치 않은 경험이었고, 덕분에 노먼은 집에 들어오기 전과 달리 상당히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진짜 맛있었어요. 고마워요, 코너."
코너는 인간의 미소 띤 얼굴을 묘한 눈으로 마주 봤다. 그는 잠깐 머뭇대다가 대답했다.
"저는 계약상에 적힌 일을 한 것뿐입니다."
노먼은 코너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접시를 정리하려 하자 코너가 여지없이 막아섰다.
"제가 하겠습니다."
노먼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당신이 차렸고, 제가 다 먹었는데 당신더러 치우라 할 순 없어요."
"하지만 계약서는…."
노먼은 긴 숨을 내뱉었다. 그가 진력난다는 듯 대답했다.
"계약서 타령은 이제 그만해요. 당신이 집안일을 엉망으로 해도, 여기서 나가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코너는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건 노먼에게 공정한 계약이 아닙니다."
"공정이고 자시고, 원래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요. 저울 재듯 완벽하게 공평과 평등을 계산해 따지는 건 사람 간의 관계에서는 성립이 안 된다고요."
안드로이드는 침묵했다. 그는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노먼을 응시했다. 노먼은 그릇을 쌓으며 말을 이었다.
"누구나 살면서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오고, 그럴 때 당신이 해야 할 건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그냥 상대가 내민 손을 잡는 것뿐이에요. 때로는 대가 없는 친절을 받을 줄도 알아야 하고, 염치없이 구는 법도 배워야 해요.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그때 당신이 상대에게 친절을 베풀면 될 일이에요.“
안드로이드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고, 노먼은 그 이마에서 노랗게 돌아가는 LED를 보았다. 노먼은 개의치 않고 그릇을 싱크대로 옮겨다 놓았다. 그동안 코너는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릇을 닦기 시작하는 인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어제부터 노먼이 왜 자꾸 자신을 돕지 못해 안달인 건지 알고 싶었다. 처음엔 코너가 노먼의 물건을 함부로 건드는 게 싫어서 그러는 건가 싶었지만, 방을 통째로 내어준 걸 봐선 그건 아닌 듯했다. 또 다른 가설은 코너의 가사 실력을 믿지 못한 나머지 본인이 하겠다 나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노먼이 청소하는 꼴을 보고 나니 그 역시 아닌 것으로 판정 났다. 그리고 지금, 어렴풋이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단서는 코너가 처음으로 집안일을 맡겠다 했을 때 노먼이 손사래를 치며 뱉은 말 속에 들어있었다.
‘됐어요. 그건 제가 불편해서 안 돼요. 가사는 둘이 분담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간혹, 인간은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를 꺼리는 이상한 특성을 보였고, 이는 그들이 가진 이기심만큼이나 자주 목격되는 특징이었다. 코너는 노먼의 행동에서 바로 그 모순적인 성격을 발견했다. 노먼이 베풀어준 친절에 보답하는 건 코너로선 당연한 일이었고, 코너는 자신이 응당 해야 할 일을 노먼이 대신 지려 하는 모습이 외려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인간의 이타성은 타인의 이타성이 끼어드는 걸 용납하지 않는 듯했다. 한쪽은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선택을 해야, 다른 한쪽이 이타심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는 걸지도 몰랐다.
코너는 그저 완벽한 계산하에 공정한 거래를 주고받길 원했지만 아무래도 노먼은 코너에게 무언가를 베풀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코너는, 노먼을 위해 이기적인 선택을 하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당신이 이 집의 주인이니, 원할 때는 그리하십시오. 그 외의 일은 제가 담당하겠습니다."
인간은 순순히 대답했다.
"좋아요. 제가 먹고 어지른 건 제가 치울 거니까, 당신은 제 눈이 닿지 않는 곳만 신경 써주는 방식으로 도와줘요."
코너는 생각했다. 인간은 잘 모르겠지만 이틀간 이 집을 치우며 코너가 내린 결론은 노먼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이 엄청나게 많다는 점이었다. 추가로 노먼이 설거지하는 속도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돕는 주체는 자신이 아니라 노먼이 될 거란 점이 논리적인 귀결이었다. 하지만 코너는 그 점을 지적하는 대신 고분고분 대답했다.
“네. 그럼 작성해 둔 계약서는 일반적인 룸메이트처럼, 생활 규칙의 지표로만 삼고 상황에 맞춰 바꿔 가는 식으로 하죠. 당신이 어긴 조항들을 생각한다면 저는 이미 이 집에 있을 수 없으니까요.”
그러면서 코너는 그들이 앉았던 의자를 정리했다. 노먼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코너가 더는 말을 얹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노먼은 기계의 이상한 논리로 점철된 원리 원칙적인 말발을 이길 자신이 없었고, 대화가 길어질수록 피로감만 커질 뿐이었다. 노먼은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컵에 남은 거품을 헹군 후 건조대에 얹어놓으려 했다. 그때 옆에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컵을 낚아채 갔다.
노먼이 곁눈질로 쳐다봤으나 코너는 묵묵하게 컵에 남은 물기를 닦아 찬장에 올려놓고는 다시금 손을 내밀었다. 노먼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기계도 인간 못지않게 한 고집 한다고 생각하며, 노먼은 다 닦은 접시를 건네주었고 코너는 그걸 받아들여 꼼꼼하게 손을 놀렸다. 안드로이드와의 동거는 엄청나게 까다로운 일이란 걸 깨달은 인간과, 인간과의 동거는 들은 만큼 쉽지 않다고 결론지은 안드로이드는, 그렇게 나란히 서서 각자 같은 생각을 하며 손을 맞춰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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