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콜로니. 36
#36. AX400
디트로이트 시내 한복판엔 200년이란 역사를 자랑하는, 미시간주에서 최초로 설립된 고등학교가 있다. 어릴 때부터 사립 교육을 철저하게 받아온 아이가 어려운 입학시험을 거치고 들어와 여타 대학보다도 비싼 학비를 내고 다니는 이 학교는 린우드 지역 한가운데 위치했다. 수십 번의 유지보수를 거친 뒤에도 건물 외관은 과거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했고 덕분에 붉은 벽돌과 검은색 지붕, 그리고 흰색 기둥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중세의 고성 같은 멋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섯 블록 떨어진 곳, 고급 주택가가 늘어선 골목에 한 학생이 콧노래를 흥얼대며 서성이고 있었다. 그가 하얀 손가락을 들어 목 끝까지 채운 후드의 지퍼를 내리자 그 사이로 연한 베이지색 재킷이 드러났다. 소녀는 외투를 벗고 반대로 뒤집어서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도톰한 재질의 새까만 후드가 돌돌 말려 가방 안으로 쏙 들어갔다. 주머니에서 거울을 꺼내 든 아이가 얼굴 이곳저곳을 확인한 후, 볼에 묻은 얼룩을 휴지로 꼼꼼하게 닦아냈다. 열심히 문지른 탓에 뺨이 살짝 붉어졌지만 추운 아침 기온 탓에 홍조가 오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이가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예쁘게 정리하고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까만 스타킹을 고쳐 신은 후, 옷매무새를 한 번 더 정돈한 뒤에 거울을 도로 집어넣었다.
매끈한 광택의 가죽구두가 신이 난 발걸음을 따라 또각거리는 소리를 냈고 검은 치마와 조끼, 그리고 맨 위에 걸친 밝은 재킷은 주름 하나 없이 각이 잡혀있었다. 소녀가 마치 춤을 추듯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높게 올려 묶은 칠흑 같은 생머리가 찰랑이며 양옆으로 흔들리고 등에 멘 분홍색 가방은 위아래로 들썩였다. 가방 지퍼에 달린 열쇠고리는 내용물이 떨어진 듯 동그란 쇠고리만 남아 아이의 발걸음에 맞춰 달랑거렸다.
골목 끝에 다다르자, 차가 다니는 대로와 함께 넓은 인도가 나왔고 아이는 자신과 똑같은 복장을 한 학생들이 도로를 가로지르는 걸 보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모래 빛의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묶은 친구를 보자마자 반색하며 뛰어갔다.
“캐롤!”
캐롤이라 불린 아이가 자신을 껴안는 손길에 깜짝 놀라 물었다.
“민디! 왜 거기서 나오는 거야?”
민디는 캐롤의 얼굴에 볼을 비비며 헤실댔다.
“그냥. 오늘은 다른 길로 등교할까 해서.”
캐롤은 얼굴을 찡그렸다. 덩달아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가늘게 좁혀졌다.
“미쳤어? 이 근처에서 살인사건 일어났단 얘기도 못 들었어?”
“못 들었는데.”
“이번 달에만 안드로이드가 두 대나 죽었대. 사이코패스가 네 동네에 산다고.”
“우와. 어떻게 죽었대?”
잔뜩 흥이 돋은 민디의 목소리에 캐롤이 콧등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신난 거야?”
“내가? 난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캐롤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민디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봤다. 민디는 무해한 표정으로 방실방실 웃기만 했다. 캐롤은 오늘따라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친구의 모습에 수상하기 짝이 없단 목소리로 물었다.
“아침에 뭐 했어?”
“아무것도 안 했는데. 밥 먹고, 걸어왔지.”
하지만 캐롤은 민디의 숨결에서 묘한 냄새를 맡았다.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캐롤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민디의 입에 자신의 입을 맞대었다. 민디는 조금 놀란 눈으로 바라봤지만, 캐롤은 금방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는 제 입안에 남은 익숙한 흙 내음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너 진짜…. 단단히 미쳤구나.”
캐롤이 비난 서린 목소리로 말했지만 민디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딱 한 대만 피웠어. 별것도 아냐.”
“용케 그러고 등교할 생각을 하네.”
“이래 봬도 성실한 학생이니까.”
캐롤이 체념한 듯 한숨을 쉬곤 걸음을 옮겼다. 민디가 캐롤을 따라붙으며 팔짱을 끼고 헤헤 웃었다.
“주말에 엄마 출장 간다는데, 우리 집에 올 생각 없어?”
“없어. 난 누구처럼 똑똑하지 않아서 시험공부해야 해.”
“내가 도와줄게.”
“필요 없어. 넌 항상 내 공부보다 다른 거에 관심 있잖아. 너랑 있으면 한 페이지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어. 내 성적이 떨어진 건 다 네 탓이야.”
“뭐? 그거 칭찬이지?”
민디의 능글맞은 목소리에 캐롤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들러붙지 좀 마! 그리고, 우리 지금 늦었다고!”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본 캐롤이 깜짝 놀라 민디를 버려두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민디는 멀어지는 친구의 뒷모습을 멀거니 보다가 활짝 웃으며 쫓아갔다. 그리고, 곧장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행인과 거세게 부딪혀 넘어질 뻔했다.
“아, 씨발!”
민디가 어깨를 부여잡고는 남자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그대로 휙 지나쳐 달려 나갔다. 남자는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멀어지는 학생을 바라봤다.
“와. 요즘 애들 진짜 무섭네…….”
“그러게. 부모 얼굴 좀 보고 싶군.”
퍼킨스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노먼은 팔뚝을 쓸어내리며 가던 길로 다리를 내디뎠다.
“이 근처였던가?”
“조금 더 가야 해.”
“이쪽이 지름길입니다.”
코너가 손을 들어 대로변의 사잇길을 가리켰다. 퍼킨스는 한낮에도 어두컴컴한 골목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봤다.
“확실해? 길이 있을 것처럼 안 생겼는데.”
“재차 말씀드리지만, 제 메모리엔 디트로이트 시내 모든 골목과 거리의 데이터베이스가 저장되어 있고 일주일에 한 번씩 업데이트를 거쳐 공사 지역과 출입 제한구역을—”
“네네. 알았어요. 이쪽으로 가요.”
안드로이드의 말이 길어지기 전에 노먼이 먼저 퍼킨스의 팔을 잡아끌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코너는 인간을 따라가며 물었다.
“새로 발견된 시신의 부검 결과가 방금 들어왔습니다. 따로 확인하실 건가요, 아니면 제가 브리핑해 드릴까요?”
“간략하게 해 봐.”
퍼킨스의 말에 코너가 줄줄이 설명을 시작했다.
“안드로이드 모델은 AX400. 갈색 머리와 푸른 눈 등, 앞서 발견된 피해자와 동일한 외형을 갖고 있으며 파손된 머리에서 복구한 고유번호를 통해 신상을 파악해 냈습니다. 램 울버트가 고용한 가정부 안드로이드로, 사흘 전 실종신고가 된 상태예요. 피해자는 장을 보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고 집에서 340m 떨어진 거리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사인은 두부에 입은 외상이며 머리에 박힌 조각으로 추정해 보건대 벽돌 같은 물체로 내리쳤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됩니다. 최초의 부상으로 인해 행동 불능상태에 빠졌고, 때문에 반격하거나 저항하지 못한 것으로 보여요. 그 뒤에도 범인은 총 마흔일곱 번, 추가로 머리를 가격한 듯싶습니다.”
“머리 외에 다른 손상 부위는 없나?”
“없습니다. 성폭행을 시도한 흔적 역시 발견하지 못했고요.”
이번엔 노먼이 고개를 돌려 질문했다.
“사망 시각은 어떻게 되죠? 마흔일곱 번이나 내려친 후에야 사망한 건가요?”
“사망 시각은 11월 21일, 오전 7시 42분이에요. 피해자는 최초의 부상 이후 4분 34초 뒤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사망 후에도 최소 열여섯 번의 추가 가격이 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노먼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얼굴과 머리를 중점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증오와 혐오를 드러내는 방식 중 하나예요. 게다가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소를 선택한 점, 앞서 발견된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파이프와 벽돌 등, 근처에 떨어진 물건을 흉기로 사용한 걸 보면 기회형 우발 범죄일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겠네요."
퍼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문과 발자국을 남기고, 여기저기 흔적을 흘리고 다니는 꼬락서니를 보면 상당히 미숙한 편이야. 아니면 걸려도 상관없다 생각할 정도로 멍청하거나. 파손된 부위를 생각하면 키가 그리 큰 편도 아닌 것 같고, 성적인 동기마저 전혀 보이지 않는 걸 감안하면…. 범인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AX400 모델과 체격이 비슷한 인간일 가능성이 높겠군.”
그 말에 노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소년 범죄는 까다로운데."
"성인일 수도 있지. 요즘 젊은 놈들은 체격만 좋지, 나이를 통 어디로 먹는지 모르겠다니까. 일단 현장에 가서 목격자와 면담 좀 해보고. 피해자의 고용인도 만나보고나서 판단하자고."
노먼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걸어갔다. 골목은 점점 더 좁아지고, 어둑해졌다. 사람 한 명만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길폭이 좁아지자 노먼도 슬슬 안드로이드의 판단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코너. 정말 이쪽이 맞아요? 감식팀이 기다리고 있는데, 헤매서 빙빙 돌 바에야 그냥 확실한 길로 가는 게…."
코너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더 가면 린우드 대로가 나와요. 못 믿겠으면 노먼은 돌아서 가십시오. 제가 먼저 도착해서 당신이 왜 또 늦는지 설명하고 있을 테니까요.“
노먼이 울컥하는 표정으로 반박했다.
"또라뇨? 제가 오늘 늦은 건 당신이 강제로 차려준 밥을 먹느라 그런 거잖아요! 전 원래 아침을 안 먹는다고 몇 번이나….“
"안 먹는 게 아니라 베이글이나 시리얼로 불규칙하게 때우잖아요. 차라리 굶으면 모를까, 당신 정도의 나이부턴 뭘 섭취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깨울 때 바로 일어나기만 했어도 여유롭게 식사할 시간이 됐어요."
"내 나이가 어때서요? 난 아직 30대라고요!"
"언제까지고 젊을 거라 착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나이부터 인체는 노화하기 시작합니다. 지금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퍼킨스 요원 정도가 될 즈음엔 링거를 꽂고 다녀야 할 거예요."
"여기서 날 왜 끌어들여?"
졸지에 얻어맞은 퍼킨스가 황당한 표정으로 항의했지만 코너는 말없이 노먼을 주시했다.
"돌아서 가시든가, 앞으로 가시든가 빨리 결정하세요. 당신 때문에 저까지 지각하고 싶진 않으니까요."
노먼은 얼굴을 구기고 결국 가던 길로 몸을 돌렸다. 그의 뒤로 코너와 퍼킨스가 따라왔다. 골목은 매우 좁아졌다가 아주 살짝 넓어지고 다시 좁아지는 게 반복되며 쭉 이어졌고, 노먼은 옆에 늘어선 건물을 올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불법 증축 아니에요? 이격이 최소 2m 이상은 되어야 할 텐데 어째 한참 붙어있는 것 같은-"
위쪽을 바라보며 모퉁이를 돌던 노먼의 발밑에 무언가가 채이고 노먼은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허둥대며 손을 아래로 뻗었으나 순식간에 조여드는 목깃에 노먼은 컥, 하는 소리를 내었다. 코너가 팔을 끌어당겨 노먼의 뒷덜미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고, 고마워요. 코너….“
노먼은 아릿한 목울대를 손으로 쓸며 콜록댔으나 안드로이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유달리 주변이 고요했다. 이상함을 느낀 노먼이 뒤를 돌아봤지만 코너는 노먼을 보고 있지 않았고, 퍼킨스 역시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노먼의 발치만 바라봤다. 노먼은 그들의 시선을 따라갔다. 머리가 으깨어진 안드로이드의 새파란 홍채가, 노먼의 발 아래서 그들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네. 저희가 조사하는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 같습니다. 사망한 지 오래되어 보이진 않고, 위치는…."
퍼킨스가 머리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코너가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글린 코트 2469입니다."
"글린 코트 2469, 증거대응팀의 지원도 부탁드립니다."
퍼킨스가 전화를 끊었다. 노먼은 쪼그려 앉아 시신을 살피는 중이었다. 그가 쓴 안경 주위로 파란 불빛이 반사되어 얼굴에 비쳤다. 노먼은 고개를 숙여 안드로이드의 부러진 두 팔을 유심히 살폈다.
“방어한 흔적을 제외하곤, 머리만 집요하게 노렸어. 아무래도 이 얼굴이 범인에겐 자극제가 되는 것 같네. 폭력성도 그렇고, 정신도 그리 안정적이진 않아 보여.”
“그리 안정적이지 않다고 말하기엔 완전 작살을 내놨는데. 앞서 발견된 피해자들보다 훨씬 잔인하게 폭행했어. 그리고…….”
퍼킨스가 허리를 숙여 피해자의 부서진 어깨와 뜯겨나간 귀를 살피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손상 범위와 강도가 마치…. 반쯤은 이성을 놓은 것으로 보이는데. 약을 했거나, 미쳤거나. 둘 다일 수도 있겠군.”
노먼이 무릎에 팔꿈치를 기대고 양손을 깍지 꼈다. 그가 허공 어느 한 지점을 응시하며 천천히 읊조렸다.
“기존의 프로파일과 종합해보면 범인은 불안정한 가정에서 자랐을 가능성이 커. 학대받은 경험이 존재할 가능성도 있고.“
“학대한 대상이 안드로이드일까요?”
코너의 질문에 노먼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면요. 증오범죄는 대체적으로 본인에게 큰 상처를 입힌 사람과 비슷한 대상을 범행 목표로 삼아요. 이전에도 안드로이드가 인간을 공격하는 일이 종종 있었으니, 해당 안드로이드에게 직접적인 폭력을 당했을 수도, 아니면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폭행을 당하는 모습을 목격했을 수도 있고요.”
“그럼 범죄 기록 데이터베이스에서 AX400 안드로이드가 인간을 공격한 사례를 찾아보겠습니다. 그중 10대에서 20대 나이의 가족이 있는 피해자를 중점으로 조사해 볼게요.”
“아직 프로파일이 확정 지어진 건 아니니까 일단은 가능성을 열어놔. 정리한 자료는 노먼이랑 내게도 넘겨주고.”
“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코너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노먼이 그의 다리를 손으로 툭 쳤다.
“조금만 기다려요. 저 지금 조사하고 있잖아요.”
코너가 노먼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약간 성가신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군소리 없이 곧바로 검색을 중단했다. 어쨌거나 자료검색은 현장을 살핀 후에 해도 늦지 않으니. 그렇다고 당장에 시신을 조사하기도 여의찮았다. 골목은 좁았고, 노먼과 퍼킨스가 가로막고 있는 탓에 코너는 둘 중 하나가 비켜날 때까지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코너는 제 앞에 일이 떨어질 때까지 손놓고 기다리기만 하는 안드로이드가 아니었다. 그가 고개를 빼 들어 골목 너머를 쳐다봤다. 어둑한 길이 끝나는 지점에 햇빛이 비쳐 들어왔고, 벽 한쪽에 세워진 쓰레기 컨테이너가 콘크리트 바닥에 짙은 그림자를 형성했다. 바닥에는 쓰레기봉투 한 개가 찢어진 상태로 놓였고, 컨테이너의 겉면에는 손자국, 그리고 새파란 피가 튀어있었다. 그 혈흔은 30m 떨어진 이곳까지 점점이 떨어져 얼룩을 남겼다. 필요한 단서를 습득한 코너의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 돌아가며, 사건이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흰 선으로 이루어진 AX400의 실루엣이 코너의 시각 장치에 나타났다. 하얀 인영은 쓰레기봉투를 들고 컨테이너에 버리려 했으나 뒤에서 나타난 다른 형상이 그의 머리를 거세게 내리쳤다. 피가 튀고, 안드로이드는 봉투를 놓친 채 컨테이너를 오른손으로 짚었다. 범인이 한 번 더 머리를 내려치는 충격에 안드로이드가 바닥에 넘어지며 손자국을 남기고 곧바로 일어섰다. 그는 코너가 서있는 방향으로 도망치면서도 팔을 들어 공격을 막으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안드로이드는 한번, 두 번, 세 번 넘어졌다. 마지막으로 바로 이 지점에서 쓰러진 안드로이드의 위로, 범인의 흰 형상이 수십번씩 흉기를 내리치는 모습이 비치고 시뮬레이션이 종료되었다.
범인은 저쪽 골목으로 들어와 자신이 서 있는 뒤쪽으로 빠져나갔을 것이다. 이제 코너는 범인이 남긴 흔적을 찾기 위해 그가 선 곳을 기준으로 뒤쪽과 앞쪽 골목을 세세히 살폈다. 담배꽁초, 껌 종이, 굴러다니는 낙엽, 버려진 휴지 조각, 찢어진 비닐봉투, 분홍색… 털 뭉치? 코너는 눈을 약간 가늘게 뜨고 홍채의 조리개를 조절했다. 노먼이 아래에서 중얼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흉기는 직경 5cm의 긴 막대예요. 경도는 철 이상이고, 모양을 보아하니 아마 배관이나—”
노먼은 자신의 머리 위로 무언가 휙, 하고 넘어가는 걸 느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코너가 반대편으로 가볍게 내려앉는 게 눈에 들어왔다. 옆에 서 있던 퍼킨스가 시선을 돌려 자신의 눈높이쯤에 위치한, 벽에 남은 코너의 발자국을 보고 입을 벌렸다.
“뭐야? 원숭이야?”
코너는 두 인간을 무시하고 허리를 숙여 물건을 집어 들었다. 부드러운 촉감을 가진, 손바닥만 한 토끼 인형이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그건 뭐야?”
“아직 깨끗한 걸 보면 버려진 후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어제 비가 왔으니 오늘 이곳을 지나친 행인이 떨어트린 물건일 거예요.”
코너가 인형의 몸에 붙어있던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들어 올려 길이를 쟀다.
"인형의 주인은 어깨 정도 오는 기장의 갈색 머리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군요."
“이 안드로이드한테서 나온 거 아냐? 갈색 단발, 비슷해 보이는데.”
코너는 머리카락을 좀 더 가까이 들어 살피고는 대답했다.
“이건 인간의 모발입니다. 단백질 구조가 보여요. 합성 섬유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의 모발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DNA 감식은 되나?"
코너는 고개를 저었다.
"모근부가 남아있지 않아서 어렵습니다."
"그래. 일단 담아놔."
퍼킨스가 증거 용기를 꺼내 던졌고, 코너는 봉투를 펴서 증거품 두 개를 따로 담아 넣었다.
조사를 마친 노먼이 자리에서 일어나 뻐근한 다리를 몇 번 접었다 폈다. 그가 안경을 벗고 손 안에 굴리며 말했다.
“이 피해자 역시 각 상처의 깊이가 상당히 일정한 편이야. 기계적이리만치 동일한 힘으로 내려친 걸 보면, 언뜻 흥분한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그저… 놀이처럼 여긴 것 같아. 연민과 동정의 감정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선 경계성 인격장애를 갖고 있을 것 같고.”
“기계적으로 내리쳤다…. 어쩌면 범인이 안드로이드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지문과 발자국은 쉽게 조작이 가능하고, 일부러 흔적을 흘렸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코너의 의문에 노먼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단, 휘두르는 동작을 여러 번 반복하고 연습하면서 손에 익숙해진 모양새에 가까워요. 이쪽을 보면—”
“제 각도에서는 아무것도 확인이 안 됩니다.”
노먼은 그제야 코너가 시신을 전혀 조사하지 못했음을 알았다. 그가 몸을 뒤쪽으로 물리며 손짓했고 코너는 주변에 흥건한 핏자국을 요령껏 피해 노먼이 있던 자리로 다시 넘어왔다.
“봐요. 거의 일정한 세기의 타격이지만 자세히 보면 명확한 차이가 보여요. 뭐, 어쩌면 당신 말대로 안드로이드가 수사에 혼선을 주려 한 걸 수도 있지만…. 여러 면을 종합해 보면 그렇게까지 치밀한 사람은 아닐 것 같다는 게 제 의견이에요.”
범인의 머리를 유심히 들여다본 코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렇네요. 확실히 안드로이드는 아닙니다. 인간을 가장하려 했다기엔 차이가 너무 미묘하군요. 저라면 좀 더 확연히 타격 강도를 조절해서 수사 방향을 틀도록 유도했을 텐데요.”
노먼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고 코너를 바라봤지만, 코너는 그저 무릎을 굽힌 채 시신과 그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며 말했다.
“으슥한 골목에, 누군가 자신을 따라 들어오면 경계할 법도 한데 피해자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다가 뒤에서 급습을 당했어요. 다른 피해자도 마찬가지였죠. 일면식이 있는 사이가 아니라는 가정 하에 범인은 적어도 위협적으로 보이는 인물은 아니었을 겁니다. 어린 아이를 제외하고, 사회통계적으로 딱히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 인간 유형은…….”
“10대 여성이지.”
코너가 고개를 끄덕이자, 퍼킨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아까 네가 발견한 그 인형도 범인의 것일 확률이 높겠군.”
어딘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코너는 고개를 틀어 뒤쪽에서 걸어들어오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남색 재킷을 입은 증거대응팀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퍼킨스의 지시 아래 통제선을 치고 증거 표식을 군데군데 설치했다. 그 중 한 요원이 코너에게 다가와 물었다.
“당신이 현장에서 증거품을 회수했다고 하던데, 갖고 계십니까?”
“네. 여기 있습니다.”
코너가 인형과 머리카락이 든 증거 봉투를 넘겨주었다. 이를 받아 든 요원이 몸을 돌리려 할 때, 코너가 그를 불러세우더니 품에서 작은 카드 한 장을 꺼내어 건넸다. 요원이 제 손에 들린 물건을 내려다보곤 의아한 얼굴로 코너를 쳐다봤다.
“이걸 왜 제게…?”
“뭔가 발견하면 거기 적힌 번호로 연락해 주십시오.”
하지만 이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했다. 요원이 머리를 기울이고, 옆에 있던 노먼은 그저 헛웃음만 흘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현장을 살피던 퍼킨스가 그 모습을 보곤 성큼 걸어와 요원의 손에 들린 종이를 낚아챘다.
“미안합니다. 이 기계가 얼마 전에 명함을 받았는데, 신났는지 찌라시마냥 여기저기 흩뿌리고 다니는 중이라. 이건 무시하고 뭔갈 발견하면 그냥 당신의 팀장에게 얘기하세요. 그가 우리에게 따로 연락할 겁니다.”
“아, 예…….”
요원이 이상한 눈으로 코너를 쳐다보곤 자리를 떴다. 퍼킨스는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회수한 명함 세 장을 코너의 주머니에 꽂아 넣으며 경고했다.
“제발 부끄럽게 굴지 좀 마. 이건 정보를 얻어낼 게 있는 시민한테나 주는 거야. 전단지처럼 돌리는 게 아니라고. 알아들어?”
코너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퍼킨스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같은 FBI 요원에게 건넨 건 그나마 양호했다. 코너는 제 이름이 박힌 두툼한 명함 수백 장이 지급된 날 반짝이는 눈으로 사무실의 모든 요원에게 명함을 한 장씩 돌렸고, 노먼과 퍼킨스는 그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실실대며 지켜봤다. 그러나 건물 밖으로 나온 코너가 제 옆을 지나치는 모든 인간에게 명함을 나누어주는 걸 발견한 순간 두 사람은 다급히 쫓아가 코너의 개인 정보가 담긴 명함을 모조리 회수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퍼킨스는 왜 노먼을 필두로, 자신과 일하는 놈들이 죄다 꼴통 짓을 일삼는 건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좁은 골목이 몰려든 인간들로 혼잡해지자 셋은 밖깥으로 빠져나와 분주히 현장 감식을 시도하는 요원들을 지켜봤다. 코너는 노먼이 ARI를 집어넣자 데이터베이스에서 AX400에 대한 기록을 검색했고, 잠시 후 두 인간에게 넌지시 말했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안드로이드의 폭력 범죄는 2038년 2월에 최초로 발생했습니다. 그때부터 이 사건의 첫 희생자가 나온 2039년 11월까지, AX400에 습격받은 182명의 인간 피해자에 대한 사건 기록을 수집했습니다. 범인의 동기가 강한 분노라 하셨으니 단순 폭행이 아닌 중상해죄, 혹은 특수폭행 및 살인죄가 성립된 건수만 따로 분리한다면 총 74건으로 집계됩니다.”
“좀 많은데. 범행 장면을 직접 목격한 가족이 있는 케이스도 있나?”
코너의 LED가 노랗게 돌아가기도 잠시, 그가 대답했다.
“31건의 케이스에서 총 48명의 목격자이자 가족구성원의 진술이 검색되네요. 그중 10대에서 20대 가족이 있던 경우는…. 15건으로 추려집니다.”
“15건이라. 좋아, 일단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되겠군.”
“그중에 이곳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벌어진 사건이 뭔가요?”
노먼의 질문에 코너는 각 사건의 범행 장소를 살펴봤다. 그리고 곧바로 대답했다.
“린우드 대로에서 발생한 사건이 모든 기록 중 위치적으로 가장 가깝습니다.”
“린우드? 여기잖아. 어떤 사건이지?”
코너는 대답하지 않고 잠시간 침묵했다. 빚고리가 노랗게 돌아가고 한참 동안 사건 파일을 세세하게 훑은 그가 입을 열었다.
“피해자, 주디 맨디스. 사망 당시 41세. …작년 10월에 제가 맡았던 사건입니다.”
두 인간이 코너를 바라보았다. 코너는 눈앞에 사건 파일이 둥둥 떠 있기라도 하듯이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유가족은 두 명. 지금도 린우드 지역에 삽니다. 배우자인 알렉스 맨디스, 딸 캐롤 맨디스. 캐롤은 올해로… 16세네요.”
“무슨 일이 있었죠?”
“주디 맨디스가 쇼핑가에서 AX400 안드로이드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캐롤은 현장에 있던 목격자예요. 작년 10월에 안드로이드가 일으킨 강력범죄 사건이었고, 범인은 범행 직후 도주했기 때문에 사이버라이프에서 제게 포획 임무를 내렸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코너는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골목 앞에 주차된 밴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가 차 안에 놓인 박스에서 좀 전에 제출한 증거 봉투를 꺼내 들었다. 인형이 든 봉투 옆에는 따로 담아 놓은 갈색 머리카락이 있었다. 그걸 빤히 바라보던 코너는 머릿속에서 캐롤 맨디스와 대화하던 장면을 끄집어냈고 당시에 등까지 내려오던 캐롤의 머리카락을 기억해냈다.
어두운 금발처럼 보이는, 모래 빛의 연한 갈색 머리카락. 지금 그의 손에 든 증거품과 정확히 같은 색이었다.
센트럴 고등학교의 3층 복도. 민디는 손에 묻은 물기를 치마에 대충 문질러 닦으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첫 교시는 스페인어 수업이었다. 민디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장난을 치는 중이었다. 민디는 머리를 휙휙 돌려 여자 친구를 찾았다.
“뭐해, 캐롤?”
민디가 캐롤의 어깨에 얼굴을 올렸지만 캐롤은 어떤 반응도 없이 턱을 괴고 어두운 눈으로 창밖만 쳐다봤다. 민디는 캐롤의 시선을 따라갔고, 학교 건물을 둘러싼 잔디 위로 한 안드로이드가 급하게 걸어오는 걸 봤다.
“어라? 혹시 저 여자가 새로 온 선생인가?”
민디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창가에 몸을 기대며 말했지만, 캐롤은 그저 콧등을 찡그리며 혼잣말만 중얼댔다. 민디가 깜짝 놀라 캐롤을 쳐다봤다.
“아니, 네가 욕도 할 줄 알아? 우리 캐롤 다 컸네.”
민디가 캐롤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하지만 캐롤은 싸늘한 표정으로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댈 뿐이었다. 친구가 기분이 좋아 보이든 말든, 민디는 아랑곳하지 않고 캐롤의 책상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쉬는 시간이 끝날 때까지 캐롤의 머리를 이리저리 따주며 노닥거렸다. 잠시 후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아이들이 각자 자리로 돌아갔음에도 민디는 여전히 캐롤의 머리를 갖고 장난을 쳐댔다.
그리고 몇 분 뒤, 교실문이 열렸다. 아까 봤던 안드로이드가 안으로 들어오는 걸 본 민디는 그제야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여자는 가방을 교탁 위에 내려놓으며 사과했다.
“늦어서 미안. 도로가 막혀서 말이야.”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안드로이드를 쳐다봤다. 지난주까지 수업을 담당하던 스페인어 선생이 사고로 입원하게 되어 몇 주 간 임시교사가 대신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고, 그게 안드로이드란 것도 학생 특유의 발 빠른 소문으로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저 모델일거란 공지는 듣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그런 걸 공지한다는 것도 이상했지만, 어쨌든 이들은 안드로이드 선생을 실제로는 처음 봤기에 반쯤은 신기한 표정으로, 반쯤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교탁 앞에 선 기계를 바라봤다.
여자는 어깨 위로 늘어뜨린 머리를 낮게 묶고는 마커를 들어 보드에 자신의 이름을 썼다. 마치 컴퓨터로 입력한 듯 정교한 선으로 이루어진 알파벳이 한 글자씩 적혔고, 여자가 다시금 몸을 돌려 미소 지었다.
“당분간 너희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쳐 줄 에블린이라고 해. 잘 부탁한다.”
학생들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고, 그 멍한 눈동자에도 에블린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놀란 모양이네. 걱정마. 나름 교사 자격증도 있고, 너희만 한 꼬맹이들을 가르쳐 본 기간을 따지면 거진 8년 가까이 되니까.”
에블린의 말에 한 학생이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몇몇 아이가 그를 불안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에블린이 머리를 까딱이며 그를 지목했다.
“말해봐.”
“저… 제가 알기로 선생님은 가사 안드로이드인데, 스페인어를 가르쳐보셨다고요?”
반 곳곳에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봐온 타일러는 항상 어딘가 나사가 빠져있었고, 눈치 역시 더럽게 없는 편이란 걸 알고 있었으나 선생님 앞에서 저런 말을 내뱉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분명 본인이 한 질문이 어떤 의미인지 의식도 못 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학생들은 눈알을 굴려 에블린을 쳐다봤고, 놀랍게도 에블린은 여전히 웃음기를 잃지 않았다.
“이름이 뭐지?”
“어, 타일러입니다.”
“그래, 타일러. 네 말대로 난 가정부로 만들어졌어. 그렇기에 네 소매에 묻은 헤어젤이 네가 이제껏 시도한 것처럼 락스나 세제를 이용해서 지울 게 아니라, 레몬즙으로 충분히 적신 후 따뜻한 물에 담가놓으면 말끔하게 없어질 거란 사실도 알지. 그런데, 그런 걸 제외하고서도 가사 안드로이드의 멋진 점이 뭔 줄 아니?”
타일러는 머리를 살짝 흔들었고 에블린이 대답했다.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언어를 쓰는 가정과 기관으로 보내진다는 점이야.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중국어…. 아마 내가 못 하는 언어를 찾는 게 더 빠를 거다.”
에블린이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나는 작년까지 보육원에서 일했고 이미 두 가족과 50명이 넘는 아이들에게 스페인어와 독일어, 프랑스어를 가르쳐봤어. 그들은 이제 그 언어를 모국어만큼이나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알지. 그러니, 너희에게 이런 기본 문법 정도 가르치는 건 식은 죽 먹기야.”
아이들은 입을 헤벌리고 눈을 끔벅였다. 에블린이 본인의 이마를 톡톡 두들기며 장난스레 말했다.
“그리고 이건 다른 소린데, 내가 선생인 게 너희 입장에서도 편할 걸? 잘 봐. 여기가 파란색이면 너희는 아주 괜찮은 거고, 노란색이면 조금 언행을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어. 굳이 벌점을 받지 않고도 선생의 기분을 파악할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해?”
한 아이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그럼, 빨간색은요?”
에블린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뭘 물어? 바로 부모님 소환이지.”
아이들이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분위기가 조금 풀어지자 에블린이 교재를 펴며 물었다.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어?”
민디가 손을 번쩍 올리며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78페이지, 불규칙 동사 Estar에 대해 배울 차례입니다!”
“씩씩하네. 좋아.”
에블린이 흡족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고 민디는 뒤에 앉은 캐롤에게 눈을 찡긋했다. 캐롤은 여전히 똥 씹은 표정으로 안드로이드만 노려보는 중이었다. 에블린이 교재를 흘끗 보고는 보드에 철자를 적어나가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Estar. 영어에는 Be 동사 하나만 존재하지만, 스페인어는 이걸 두 개로 나누면서 ser과 estar동사가 탄생했어. ser은 본질적이고 지속적인 특징을 갖고 있지만 estar은 임시적인 상태, 또는 위치를 나타내지.“
아이들이 열심히 받아적는 모습을 보며, 에블린은 그들의 필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가 다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이제 여기서 둘을 구분하는 쉬운 방법이 있는데 외워두면 어디 가서 써먹기 좋을 테니 잘 알아둬. PLACE의 앞 철자만 따와서 P는 자세, L은 위치—”
에블린은 굉장히 유창한 발음과 듣기 좋은 목소리, 그리고 딱 적당한 속도로 수업을 진행했고, 아이들이 집중을 잃어가는 모습이 보일 때마다 농담으로 간간이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는 지루하고 어려운 문법을 학생들의 수준에 맞춰서 쉽게 풀어주었으며 일상에 자주 쓰이는 문장을 알려주고 시험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도 언질해 줬다.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유쾌한 선생을 좋아했지만 유쾌한 데다가 수업까지 흥미롭고 재밌게 진행하는 선생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가사 안드로이드의 능력을 반신반의하던 몇 학생은 새로운 선생이 꽤 괜찮다는 걸 인정해야 했고, 하루에도 수십번씩 마음이 변하는 몇 학생은 이미 에블린을 모든 과목 중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생으로 등극시켜 주었다.
수업이 진행된 지 40분 가량이 흘렀고, 쉬는 시간이 가까워질 때쯤 한 아이가 친구에게 장난을 쳐댔다. 애써 무시하던 친구가 반복되는 장난에 열이 오른 나머지 저도 모르게 사납게 내뱉었다.
“씨발, 좀 귀찮게 좀 하지 마!”
나름 목소리를 낮췄음에도 그 소리는 꽤 크게 교실을 울렸다. 에블린이 고개를 휙 돌리자, 아이들은 조금 겁먹은 표정으로 선생과 욕을 내뱉은 남자애를 쳐다봤다. 에블린이 정색하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일어나.”
아이는 망했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일어났고, 에블린이 그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지?”
“마이크요…….”
“네가 쉬는 시간에 뭐라고 떠드는지는 상관 안 해. 하지만 지금은 수업 중이고, 나는 교사로서 이곳에 들어왔어. 선생을 조금 존중해줬으면 좋겠는데.”
마이크는 고개만 푹 숙이고 곁눈질로 옆자리의 친구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 친구는 모른 척 교재만 들여다볼 뿐이었다. 에블린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방금 네가 한 말, 스페인어로 뭔지 알아?”
“네?”
“Jódete. 따라 해 봐.”
“어…. Jódete?”
에블린이 피식 웃으며 끄덕였다.
“발음 좋네. ‘꺼져’, 아니면 ‘짜증 나게 하지 마’. 뭐 이런 뜻도 있는데, 대부분은 좆 까란 말로 쓰이지.”
아이들은 입을 떡 벌렸다. 그들은 어른, 특히 선생이 학교에서 저런 단어를 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에블린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몸을 돌려 보드의 글씨를 지우며 말했다.
“내 수업 중에 욕할 거면 스페인어로 욕해. 그럼 봐줄 테니. 대신 어디 가선 절대 쓰지 말고. 큰일 날 수도 있으니까.”
여기까지 말한 에블린이 갑자기 생각난 듯 급하게 덧붙였다.
“의리 없이 내가 알려줬다고 하지 마. 알았어? 잘못하면 이 시간이 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어. 수업 첫날에 잘린 교사라니 얼마나 쪽팔려?”
아이들은 소리 내 웃었고 마이크는 조금 겸연쩍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시간을 확인한 에블린이 교재를 닫았다.
“첫날부터 숙제를 내줄 수야 없으니 오늘 배운 것만 잊지 말고 다음 주에 보자. 자기 전에 부모님께 Te amo라 해주고. 그럼, 수업 끝.”
에블린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종소리가 울렸다. 기막힌 타이밍에, 아이들은 신이 나 왁자지껄 가방에 책을 집어넣고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민디는 캐롤을 따라 교실 밖을 나가며 조잘댔다.
“에블린 선생님 진짜 잘 가르친다. 그치?”
캐롤이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역겨워. 안드로이드가 선생은 무슨.”
앞서가던 학생이 캐롤을 흘겨봤고, 캐롤은 그를 마주 노려봤다. 민디가 웃으며 손을 휘적였다.
“미안. 캐롤이 오늘 기분이 별론가 봐. 신경 쓰지 말고 꺼져. Jódete.”
아이는 어이가 없단 표정으로 민디를 째려봤지만 민디는 그를 완전히 무시한 채 캐롤과 팔짱을 끼고 계단을 내려갔다. 민디가 물었다.
“에블린 선생이 싫어? 내가 가서 뭐라 해줄까?”
“뭐라 하긴 뭐라 해? 네가 뭐라고 한다고 바뀌는 게 있어?”
“우리 엄마가 뭐라 하면 그 여자 정돈 바로 잘리게 만들 수 있지.”
캐롤은 가끔 민디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캐롤이 사물함에서 까만 운동복을 꺼내 들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됐어. 원래 선생이 돌아오면 어차피 자동으로 잘릴 거니까.”
그대로 장소를 옮기려던 그가 유난히 손이 가벼워 보이는 민디를 보며 물었다.
“왜 바지밖에 없어? 위에는?”
“어제 집에 가져갔는데 다시 가져오는 걸 까먹었어.”
캐롤이 눈을 찌푸렸다.
“넌 이제 매버릭한테 죽었다.”
“괜찮아. 다 방법이 있지.”
민디는 전혀 문제없다는 듯, 옆에서 캐비닛을 뒤적거리는 여자애의 어깨를 톡톡 쳤다. 아이가 뒤를 돌아보더니 민디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민디가 눈매를 예쁘게 접으며 말했다.
“저기, 애비. 나 체육복을 두고 왔는데, 혹시 상의만 좀 빌려줄 수 있을까?”
애비가 머뭇대며 말했다.
“나, 나도 오늘 필요한데….”
“다음 교시야?”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럼 딱 한 시간만 빌려주면 안 돼? 깨끗하게 입고 돌려줄게. 응? 매버릭 선생님 너무 무섭잖아. 제발.”
민디가 애비의 손을 은근하게 잡으며 반짝거리는 눈으로 쳐다봤다. 애비는 얼굴을 붉히며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캐비닛에서 상의를 꺼내 들었다.
“이따 꼭 돌려줘야 해.”
“고마워! 역시 너밖에 없어!”
민디가 애비를 꽉 끌어안고는 환하게 웃었다. 캐롤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몸을 돌렸고, 민디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애비를 내버려두고 헐레벌떡 캐롤을 따라잡았다. 둘은 체육관으로 향하는 길에 끊임없이 조잘댔다. 떠든 건 대부분 민디였고 캐롤은 이따금 대꾸만 할 뿐이었으나, 스페인어 선생 때문에 심기가 잔뜩 불편했던 캐롤은 민디 덕에 조금은 밝아진 기분으로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띄우며 체육관으로 들어갔다.
“캐롤! 손목이 아니라 어깨 전체를 쓰라고 말했잖아!”
매버릭 선생이 호루라기를 불고는 크게 외쳤다. 캐롤은 얼굴을 찡그리며 욱신대는 손목을 매만졌다.
“민디가 시범을 보여줬잖아. 스트라이크 존 안에 던지려면 끝까지 거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어야지! 눈 크게 뜨고!”
그럼, 지금 제가 눈을 감고 있는 거로 보이세요? 캐롤은 한차례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이빨만 뿌득 갈며 공을 고쳐 잡았다. 공에 박힌 붉은 봉제선의 우둘투둘한 촉감이 손끝에 느껴졌다. 그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 훅 내쉬면서 고개를 돌려 민디를 바라봤다. 민디는 언제나 그렇듯 빙글대며 배트를 붕붕 휘두르고 까불대는 중이었다. 캐롤이 한쪽 다리를 들고 무릎을 굽힌 뒤, 다른 쪽 다리를 축 삼아 몸을 돌렸다. 상체를 잔뜩 비틀고 매버릭이 말한 대로 어깨 전체를 써서 팔을 휘두른 캐롤은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공을 휙 내던졌다.
됐다! 캐롤은 정확히 스트라이크존 안으로 향하는 공을 바라봤다. 그리고 민디는, 장난스러운 모습은 간데없이 날카로운 눈으로 배트를 세차게 휘둘렀다. 캉! 하는 소리가 들리고 캐롤은 시야에서 공을 놓쳤다. 하지만 매버릭과 민디는 정확히 같은 궤적을 따라 시선을 돌렸고, 이내 매버릭이 손뼉을 치며 혀를 내둘렀다.
“역시, 멜린다 베넷이야. 너무 깔끔해서 뭐 가르쳐 줄 게 없네. 야구는 어디서 배웠어?”
민디가 배트를 어깨에 얹으며 씩 웃었다.
“어릴 때부터 가끔 쳤어요. 하지만, 지금의 제 실력은 전부 선생님의 훌륭한 지도 편달 덕분이죠.”
학생의 귀여운 너스레에 매버릭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캐롤은 이번엔 자신도 꽤 멋있게 던진 것 같았는데, 더욱 멋있게 받아친 친구 탓에 자신이 받아야 할 칭찬마저 빼앗긴 것 같아 조금 심통이 났다. 캐롤의 입술이 삐죽이는 걸 본 민디가 매버릭에게 말했다.
“제가 캐롤 연습 좀 시켜줄게요. 선생님은 다른 애들 봐주세요.”
매버릭은 역시 모범생은 친구까지 잘 챙겨준다며 입바른 칭찬을 가득 퍼붓고는 자리를 떴다. 민디가 캐롤에게 다가와 말했다.
“조금 전엔 나름 잘 던졌어.”
“그런 말은 매버릭 앞에서 해주지 그랬어?”
캐롤의 핀잔에 민디가 능청스레 말했다.
“그럼, 저 선생이 널 신경 쓸 거 아냐. 난 누가 내 거에 관심 갖는 거 싫어.”
캐롤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민디를 바라봤지만, 민디는 진지해 보였다. 캐롤은 어쩔 수 없이 웃어넘겼다.
“넌 진짜 이상한 애야.”
민디가 어깨를 으쓱이며 맞받아쳤다.
“우리 엄마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닌가 보네.”
그리고 민디는 캐롤에게 다가와 공을 건네주었다. 캐롤이 또다시 어수룩한 자세를 취하자, 민디는 캐롤의 손등을 부드럽게 잡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쓰다듬으며 구종에 따른 파지법을 설명해 주었다. 그런 와중에도 민디는 계속해서 캐롤의 귓가에 바람을 불어가며 필요 이상으로 끈적한 목소리로 속삭여주는 걸 잊지 않았고 캐롤은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단 걸 알았으나 애써 신경을 끄고 설명에만 집중하려 노력했다.
캐롤이 보는 민디는 모든 선생이 좋아하는 아이였다. 공부를 잘하기도 했거니와 천사 같은 외모에 사근사근한 말투는 그를 싫어하기도 어렵게 만들었다. 그런 특성은 몇 아이들에겐 질투와 시샘을 불러일으켰지만, 민디는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아이들을 거친 언행과 태도로 휘어잡으며 초반부터 아주 기를 눌러놓았다. 민디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어 보였고, 캐롤은 그런 친구를 동경했다. 조금 변덕스럽기도 하고 남이 토로한 고민에 대해 지나치게 무신경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민디처럼 완벽한 애가 좋다고 들러붙는데 이를 거부할 아이는 많지 않았다. 캐롤은 민디가 제 허리를 지분대는 걸 무시하고 붉어지는 안색을 가까스로 감추었다. 민디는 여전히 귀여운 얼굴로 생글댔기 때문에 캐롤은 저를 바라보는 친구의 눈빛이 아까 공을 칠 때처럼 선뜩하게 벼려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점심 식사 후에 오후 수업이 이어지고, 이내 마지막 종소리가 울렸다. 아이들의 시끄러운 목소리와 친구의 이름을 불러재끼는 고함소리가 복도에 가득했고 캐롤과 민디는 캐비닛에서 가방을 꺼내 들어 계단을 내려갔다. 활짝 열린 정문 탓에 찬 바람이 안으로 들이쳐서, 둘은 재킷을 여미고 하교하는 애들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나갈 차례를 기다렸다. 캐롤이 문득 민디의 가방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 키링은 어딨어?”
“응?”
민디가 가방을 앞으로 돌렸고, 끊어진 고리만 달랑거리는 지퍼를 발견했다. 민디는 눈을 크게 뜨고 바닥을 휘휘 둘러봤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건 아이들의 다리와 신발뿐이었다.
“언제부터 없었지?”
“나야 모르지. 어제는 있었던 거 같은데…. 하굣길에 떨어트린거 아냐?”
“아냐. 집에 갔을 때도 잘 달려있었어.”
“흠…. 그럼 오늘 등교하면서 떨어졌나봐. 너무 신경 쓰지 마. 내가 다시 뽑아줄게.”
캐롤의 위로에도 민디는 눈을 찌푸리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입꼬리를 올렸다.
"어디에 떨어트렸는지 알겠다."
"그래? 어딘데? 같이 가보자."
민디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늦었어. 너무 귀여워서 누가 주워갔을거야."
그러면서 민디는 눈꼬리를 살짝 내리며 캐롤에게 애교를 부렸다.
"잃어버려서 미안해. 하나만 더 뽑아주라. 더 깜찍한 애로."
캐롤은 괘념치 않은 얼굴로 끄덕였다.
"알았어. 이번엔 좀 더 튼튼한 걸로 골라볼게."
인형뽑기는 캐롤의 전문이었고, 그가 민디를 앞지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특기였다. 캐롤은 자신이 인형을 뽑을때마다 민디가 온갖 호들갑을 떨며 칭찬하는 모습을 보는게 좋았다. 친구의 흔쾌한 승낙에, 민디는 기쁘게 웃으며 캐롤의 팔에 꼭 들러붙었다.
잠시 뒤 둘은 정문을 나섰다. 아이들이 도보와 잔디를 가로질러 각자의 집으로 향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캐롤은 얼굴을 스치는 싸늘한 공기에 몸을 부르르 떨며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얼마 안 가서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캐롤? 왜 그래?”
덩달아 멈춰 선 민디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캐롤은 작게 입을 벌리고 멍하니 앞만 바라볼 뿐이었다. 민디가 캐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아이들이 뛰어가는 사이로 한 안드로이드가 둘을 향해 걸어오는 중이었다. 짙은 갈색 눈동자가 캐롤을 마주봤고, 캐롤은 뒤로 살짝 주춤했다. 민디가 눈썹을 찌푸렸다.
“누구야? 아는 사람이야?”
하지만 캐롤은 대답하지 않았다. 발이 묶인 듯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안드로이드의 표정과 눈빛은 뇌리에 단단히 박혔던 기억 그대로, 몹시도 차갑고 싸늘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캐롤은 작년의 악몽이 다시금 눈앞에서 생생히 재생되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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