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콜로니. 37
#37. 데이지
노먼이 불안한 표정으로 도로 건너편으로 향하는 안드로이드를 바라봤다. 그는 팔짱을 끼고 차 문에 등을 기대기도 잠시, 얼마 안 있어 몸을 떼고 앞으로 뛰쳐나갈 것처럼 한 발짝 내딛다가, 다시금 자리로 돌아왔다. 퍼킨스가 보닛에 걸터앉으며 중얼댔다.
“산만하게 굴지 말고 가만히 좀 있어.”
“정말 혼자 보내도 될까?”
“그럼 셋이 우르르 몰려가서 어린애 하나 붙들고 심문이라도 하리?”
“너나 내가 가면 되지.”
“하굣길에, 성인 남성이 딱 봐도 모르는 여자애한테 가서 말을 건다? 가십이라면 환장하는 꼬맹이들 눈에 그게 어떻게 보일 것 같아?”
“그건… 코너도 마찬가지잖아.”
퍼킨스가 코웃음을 쳤다.
“이럴 땐 편견이 꽤 괜찮게 작용하지. 기껏해야 개인 기사나 가정부가 데리러 왔다고 생각할 거야.”
퍼킨스의 말대로 학생들은 안드로이드가 정문 바로 근처에서 캐롤에게 다가가도, 관심 없이 스쳐 지나가거나 그저 흘긋 쳐다만 보고 제 갈 길 바빴다. 하지만 노먼은 여전히 탐탁지 않은 얼굴로 초조하게 발을 탁탁 구를 뿐이었다. 퍼킨스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뭐가 그리 불안해서 그래? 쟤 심문하는 거 충분히 보지 않았어?”
“코너의 능력을 의심하는 게 아냐. 오히려 너무 제대로 할까 봐 걱정인 거지.”
“뭔 소리야?”
“저 여자애가 범인인지 확실하지도 않잖아. 코너는… 수사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상대의 감정을 신경 써서 말하는 건 진짜 못한다고.“
퍼킨스는 이 말엔 차마 반박할 수가 없어서 순순히 수긍했다.
“그야, 뭐…. 확실히 싸가지가 없어도 너무 없긴 하지. 그래도 요즘엔 좀 괜찮아진 거 같던데?”
“괜찮기는. 너한테 안 드러내고 나한테만 풀어서 그렇게 보이는 거야.”
그렇게 말한 노먼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안드로이드를 노려봤다. 캐롤은 잔뜩 경계하는 얼굴이었다. 언제든 도망갈 준비가 된 듯한 학생의 몸짓을 읽은 노먼이 안 되겠다는 듯 상체를 세웠다.
“역시 내가 가봐야….”
“아, 그냥 가만히 좀 지켜봐 봐. 언제까지 네가 다 해주려 그래? 저놈도 몇 번 실수해 봐야 말본새를 고치든 말든 할 거 아냐.”
퍼킨스의 충고에 노먼은 어쩔 수 없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코너가 캐롤에게 무어라 말을 거는 모습과, 캐롤이 얼굴을 잔뜩 구기며 대꾸하는 모습을 그다지 침착하지 않은 태도로 지켜봤다.
노먼이 전전긍긍하고 있을 동안 코너는 동료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도 모르는 채 딱딱한 얼굴로 민디에게 말했다.
“캐롤 맨디스와 할 얘기가 있으니, 당신은 자리 좀 비켜주십시오.”
민디가 헛웃음을 지으며 캐롤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얘가 지금 나한테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하지만 캐롤은 그저 싸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오늘은 먼저 가. 잠시 얘기 좀 하고 들어갈 테니.”
민디가 살풋 미간을 좁히고는 캐롤과 안드로이드를 번갈아 봤다. 하지만 결국 양손을 올리며 순순히 몸을 돌렸다.
“알았어. 집에 가서 연락해.”
캐롤은 민디가 멀어지기까지 기다렸다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또 무슨 일이죠?”
“작년부터 꾸준히 나가던 상담을 한 달 전에 갑자기 그만뒀더군요. 무슨 이유로 중단한 거죠?”
“그걸 물어보러 여기까지 온 거예요?”
코너는 그저 말없이 캐롤을 쳐다봤다. 캐롤은 혀를 차며 대답했다.
“더는 필요 없어져서 그만둔 것뿐이에요. 매일 똑같은 말만 듣는 것도 지겨워서 안 갔고요.”
“그럼, 오늘 아침 8시경엔 어디 있었죠?”
“어디 있긴요. 등교하고 있었겠죠. 그건 왜 물어요?”
“아직도 데이지를 증오하나요?”
오랜만에 들은 그 이름에, 캐롤이 눈을 부릅뜨고 코너를 노려봤다.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하지만 코너는 고개를 돌려 정문을 막 나서는 안드로이드를 바라봤다. 그 시선을 따라간 캐롤의 눈에, 퇴근하는 에블린 선생이 비쳤다. 캐롤의 얼굴에 드러난 명백한 감정을 읽어낸 코너가 물었다.
“데이지와 닮은 안드로이드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드나요?”
캐롤이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드로이드는 여전히 그 빌어먹을 정도로 차갑고 싸늘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왈칵 혐오감이 치솟은 캐롤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무슨 생각이 들지, 상상이 잘 안돼요? 그래도 다른 안드로이드는 감정을 익힌 거 같은데 그쪽은 그동안 뭐 배운게 하나도 없어 보이네요.”
코너는 대답 없이 캐롤의 적의 서린 눈동자를 들여다볼 뿐이었다. 캐롤이 이를 갈며 말했다.
“경찰도 어지간히 사람이 없는 모양이에요. 당신같이 재수 없는 깡통을 아직도 쓰고 있다니….”
“전 지금 경찰서에서 일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 그럴 줄 알았어요. 보나 마나 바로 잘렸-”
“FBI 디트로이트 지부에서 근무하고 있죠.”
캐롤은 잠깐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가 눈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FBI가 절 왜 찾아요?”
“당신의 동네에서 일어난 사건과 관련한 뉴스를 보았나요? AX400이 살해당했다는 이야기요.”
“…그게 AX400이었어요?”
“네. 11월 21일, 오전 7시에서 8시 사이엔 어디 있었습니까?”
계속되는 코너의 추궁에 캐롤이 울컥하며 대답했다.
“몰라요! 그때가 언젠데요? 평일이면 학교에 있었을 테고, 아니라면 집에 있었겠죠! 설마, 절 의심하는 거예요? 무슨 근거로?”
“당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할 사람은요?”
캐롤은 허탈하게 웃으며 눈알을 굴렸다.
“씨발, 진짜…. 그렇게 망가진 컴퓨터처럼 말하는 것 좀 그만둘래요?”
코너는 여전히 캐롤의 말에 답하지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최근에 인형을 잃어버리진 않았나요?”
“뭔 인형이요? 그딴 걸 제가 왜 들고 다녀요?”
코너는 캐롤의 눈동자를 유심히 들여다보고는 손에 쥔 봉투 속 내용물을 꺼내었다. 투명한 비닐백에 담긴 분홍색 토끼 인형을 본 캐롤이 눈을 크게 떴다. 코너가 물었다.
“당신의 물건입니까?”
눈을 여러 차례 깜빡인 캐롤이 인형을 낚아채 앞뒤로 살폈다. 토끼의 머리 쪽에 박혀있던 고리가 벌어져 있었다. 캐롤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서 난 건데요?”
“그건 알 필요 없습니다. 당신이 떨어트린 물건이 맞나요?”
캐롤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다시 인형을 코너에게 내밀며 태연한 목소리를 가장했다.
“아뇨. 제 가방을 보면 아시겠지만, 전 뭐 주렁주렁 매다는 거 싫어해서요.”
“그럼 이 인형의 주인을 알고 계시나요?”
“…몰라요. 요즘 유행하는 캐릭터잖아요. 우리 반에 올리비아도, 이안도, 그거랑 색깔만 다르지 똑같은 걸 갖고 있어요.”
캐롤은 여전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아까보다 한층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코너는 잠시간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협조 감사합니다.”
“그게 다예요?”
캐롤이 미심쩍다는 듯 물었지만 코너는 용건은 끝났다는 듯이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몇 발짝 내딛기도 전에 다시금 몸을 돌려 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캐롤이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레 받아 들자, 코너가 말했다.
“인형의 주인이 누군지 얘기할 생각이 든다면, 거기 적힌 번호로 연락해 주십시오.”
“…전 모른다니까요?”
코너는 캐롤의 대답에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뒤돌아 걸어갔다. 캐롤은 명함을 양손에 굴리다가 문득, 그의 등에 대고 외쳤다.
“…저기! 혹시 그 후에 데이지는,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코너는 걸음을 멈추었다. 캐롤은 이미 답을 알았으나,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차마 아빠에게 물을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경찰서에 연락해 사건이 어떻게 종결되었는지 알아볼 용기도 없었기에, 그 긴 시간 동안 그저 짐작만 해야 했다. 코너는 캐롤의 새파란 눈동자를 응시하며 조용히 대답했다.
“데이지는 가동 중지 후, 곧바로 폐기되었습니다.”
캐롤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조그마한 머리통을 천천히 끄덕이고는, 더는 말을 얹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 코너는 아이의 작은 등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자리에 서서 지켜봤다.
캐롤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민디로부터 문자가 와있었지만 휴대전화도 꺼버리고 침대에 풀썩 누워버렸다.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해는 짧아졌고, 아직 5시도 되지 않았건만 천장은 어슴푸레한 푸른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캐롤은 얼굴을 옆으로 틀어 책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교과서와 노트가 마구잡이로 꽂힌 선반의 맨 위쪽에는 손바닥만 한 작은 인형 수십 개가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고, 두어 개는 앞으로 엎어져 있었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고 색이 바랜 열쇠고리들을 바라보던 캐롤은, 이내 피로한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캐롤! 엄마가 기다린다.”
방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캐롤이 눈을 번쩍 뜨고 침대에서 허겁지겁 내려와 크게 외쳤다.
“어어, 잠시만! 10초만!”
창문 너머로 들어온 따스한 햇살이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노랗게 물들이고, 캐롤은 제 글씨로 새까맣게 변한 종이를 구겨 버리곤 재빨리 생일 카드에 펜을 가져가 휘갈겨 썼다. 그리곤 그걸 잠시간 내려다봤다. 여전히 마음에 안 들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 싸매고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고민해 봐도 이 이상 괜찮은 말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캐롤은 카드를 접어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소 부주의하게 일어선 탓에 골반이 책상에 세게 부딪히며, 책장 위에 아슬하게 놓인 인형 두 개가 아래로 투둑 떨어졌다. 캐롤은 욕설을 지껄이며 욱신대는 골반을 부여잡고는 인형을 선반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놨다. 데이지가 나중에 정리해 주겠지. 캐롤은 인형이 고개를 아래로 처박고 선반 위에 엎어져 있는 꼴을 슬쩍 쳐다보고는 그대로 방문을 나섰다.
캐롤의 아빠, 알렉스가 팔짱을 끼고 문가에 기대어 서있었다.
“편지는 다 썼어?”
“응.”
알렉스가 기특하다는 듯 딸의 머리를 헝클어트리고는 거실로 향했다. 캐롤은 불퉁한 얼굴로 머리를 정리하고 아빠를 졸졸 따라갔다. 거실 불이 은은하게 켜졌고 식탁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그 한 가운데에는 촛대 몇 개가 꽂힌, 먹음직스럽게 생긴 생크림 케이크가 올려져 있었다. 엄마는 이미 식탁에 앉아 미소 띤 얼굴로 캐롤을 기다리는 중이었고 캐롤은 민망한 얼굴로 마주 봤다.
“우리 딸, 오늘따라 더 예쁘네.”
“예쁘긴 무슨….”
캐롤은 괜히 툴툴댔다. 며칠 전 엄마랑 대판 싸우고 난 후, 아직도 마음에 응어리가 남은 상태로 엄마의 생일이 왔고 캐롤은 어쩔 수 없이 식사 자리에 강제 소환되었다. 엄마는 늘 그렇듯이 자신을 호되게 혼낸 게 며칠이나 되었다고, 이제는 또 천사 같은 미소로 캐롤을 맞이했다. 캐롤은 엄마가 진짜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캐롤이 얌전히 식탁에 앉자, 알렉스가 맞은편 의자를 빼내며 옆에 가만히 선 안드로이드에게 명령했다.
“데이지. 성냥 좀 가져와.”
“네.”
캐롤이 눈을 돌려 주방 서랍에서 작은 성냥갑을 꺼내드는 안드로이드를 지켜봤다. 데이지는 그걸 알렉스에게 넘기고, 알렉스는 케이크에 꽂힌 초에 불을 붙였다.
“여보, 생일 축하해.”
알렉스가 아내, 주디의 뺨에 키스했다. 주디는 밝게 웃으며 알렉스와 캐롤이 자신을 위해 불러주는 생일 축하 노래에 따라 손뼉을 쳤다. 노래가 끝나고 주디가 초를 훅 불어 끄자 거실이 살짝 어두워졌다. 알렉스는 안드로이드에게 손짓했고 데이지는 걸음을 옮겨 조명을 조금 더 환하게 밝혔다.
“고마워. 알렉스, 캐롤.”
캐롤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큼큼, 헛기침 소리에 캐롤이 아빠를 쳐다봤고, 그는 엄마 쪽을 향해 눈짓했다. 캐롤이 꼼지락대며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들어 주디에게 건넸다.
“어머, 이게 뭐야?”
“별 내용 없어.”
캐롤이 툭 내뱉었지만 주디는 몹시 흥미로운 얼굴로 카드를 바라봤다. 캐롤은 초등학교 이후로 편지를 써본 기억이 없었고, 때문에 이 상황이 엄청나게 어색하고 민망했다. 그래서 주디가 카드를 펼칠 때 캐롤은 괜히 시선을 돌렸다.
[엄마, 생일 축하해. 사랑해. -캐롤]
한 줄도 채 안 되는 매우 짤막한 편지를 몇 번이고 읽은 주디가 크게 웃었다.
“내 딸이라지만 정말 무드가 없네.”
캐롤은 대꾸 없이 조금 입술을 삐죽댔다. 알렉스 역시 상체를 옆으로 기울인 채 편지를 내려다보며 히죽거렸다.
“와, 글씨가 이게 뭐야? 교정책을 사줄걸 그랬나?”
“내가 편지 못쓴다고 했잖아….”
“안 써 버릇하니까 못쓰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써?”
알렉스는 장난스레 핀잔을 줬지만 캐롤은 자신을 놀려대는 부모님의 말투에 울컥해서 팔을 내밀었다.
“아, 싫으면 다시 줘!”
캐롤이 엄마의 손에 들린 카드를 뺏으려 했지만 주디는 카드를 뒤로 돌려 감추고는 딸의 볼에 입을 맞춰주었다.
“고마워, 캐롤. 정말 감동이야.”
캐롤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피하진 않았다. 그래도 더는 엄마가 자신에게 화가 나 있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데이지가 계속 집에 머물고, 엄마가 데이지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지 않는 이상 또다시 한바탕 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캐롤이 생판 난리를 친 이후로 엄마도 딱히 데이지를 걷어차거나 물건을 집어 던지진 않았다. 아니, 사실 아예 없는 안드로이드 취급했다고 하는 게 좀 더 정확한 설명이었지만. 어쨌거나 그 정도면 캐롤로선 만족이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캐롤은 부모님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두 사람의 질문에 대답도 하며, 얼마 전 전학 온 민디라는 친구에 대한 얘기도 해주었다. 그 모든 과정 중에 안드로이드는 어두운 주방 한구석에 서서 세 인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식사를 마친 알렉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당신, 오늘은 아예 스케줄 비워놓은 거 맞지?”
“응. 왜?”
“나가자. 외투 하나 사줄게.”
주디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짠돌이가 웬일이야?”
알렉스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자기에게 쓰는 돈을 아까워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주디가 소리 내 웃었고 캐롤은 토하는 시늉을 했다. 눈썹을 추켜올린 알렉스가 말했다.
“너도 신발 필요하다 했지? 엄마 아빠 따라오면 사줄게.”
“진짜?”
밝아진 표정으로 캐롤이 냉큼 일어났다. 셋은 식탁의 그릇들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현관으로 향했고 데이지가 빈 식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캐롤이 뒤를 돌아보고 외쳤다.
“데이지! 너도 가자.”
안드로이드가 고개를 들어 캐롤을 바라봤으나 주디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쟤를 왜 데려가? 저건 누가 치우고?”
“갔다 와서 치워도 되잖아. 엄마 쇼핑 시작하면 하루 종일 걸릴 텐데, 그동안 난 심심해서 뭐 해?”
알렉스도 아내를 따라 한 소리 하려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당신은 절대 옷 하나로 끝내지 않을 텐데, 짐꾼이 필요하긴 해.”
“아니, 짐꾼으로 데려가자는 게 아니라—”
하지만 캐롤은 말을 얹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자칫하다간 이 좋은 날 또다시 부모님과 언성을 높이며 싸울지도 몰랐다. 그래도 데이지가 함께 가는 걸 허락해 주는 게 어디냐고 생각한 캐롤은 외투를 챙겨입고는 밖으로 나갔다.
부부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앞장서서 걸어갈 동안, 캐롤은 부러 천천히 걸으며 그들과 멀리 떨어져 데이지에게 미주알고주알 온갖 얘길 늘어놓았다.
“—세상에, 난 살면서 그렇게 귀엽게 생긴 애를 처음 봤다니까? 솔직히 처음에는 조금 재수 없었거든? 뭔가 웃는 게 가식적이라 해야 할까, 아무튼 눈빛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근데 알고 보니 내가 좋아서 그랬다는 거야! 믿어져? 여자애한테 고백받은 건 처음인데, 솔직히 남자애들이 고백했을 때보다 더 기분이 좋더라고. 아니 그렇잖아. 너도 민디를 보면 나랑 똑같이 얘기할 거야. 무슨 그림에서 나오는 천사같이 생겼다고! 저번에 말해준 마이클 기억해? 걔랑 사귀지 않길 천만다행이야. 아니었으면 민디같은 애가 고백해도 꼼짝없이 놓쳐버리는 거였잖아! 물론 마이클도 잘생기긴 했는데, 말을 할 수록 너무 깨. 걔보단 민디가 훨씬 낫지.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성격도 완전 멋있어. 반에 좀 불량스러운 애들이 있었거든? 걔들이 민디가 전학 온 첫날부터 시비를 걸었는데, 얻어터진 건지 뭔지 다음날 민디가 옆에 지나가기만 해도 눈 깔고 벌벌 떨더라고. 진짜, 너무 멋있지 않아? 민디가 지금 학교에서 제일 인기 있는 애야. 근데 걘 이미 내가 잡았지! 하하!”
부모님 앞에서는 사춘기가 극에 달한 10대 티를 팍팍 내던 캐롤은 늘 이렇게 데이지한테만큼은 스스럼없이 수다를 떨어댔다. 데이지는 은은하게 미소 띤 얼굴로 캐롤의 말에 간간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으나, 캐롤은 어른들에게는 절대 할 수없는 비밀스러운 얘기를 이 안드로이드에겐 모조리 털어놓을 수 있었다. 데이지는 훌륭한 경청자였고, 외동인 캐롤의 말동무인 동시에 오랜 친구였다. 데이지는 캐롤의 고민에 꽤 괜찮은 조언을 해준 적도 많았고 가끔은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웃긴 농담을 꺼내어 캐롤을 깔깔대며 넘어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캐롤에게 한가지 고민이 있다면, 그건 부모님과 데이지 사이의 갈등이었다. 사실 갈등이라기보단 그들이 일방적으로 데이지를 싫어한다는 거였지만. 데이지는 캐롤이 보기에도 갈수록 행동이 느려지고 눈에 띄게 둔해졌다. 며칠 전엔 안방을 치우다가 엄마가 회사에서 발표해야 할 파일이 담긴 태블릿을 떨어트려 망가뜨리기도 했다. 그때 엄마는 불같이 화를 내며 데이지에게 태블릿을 집어던졌다. 태블릿 모서리에 맞아 움푹 팬 데이지의 이마를 보고 머리끝까지 열이 뻗친 캐롤은, 엄마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엄청나게 대들었고 그 덕분에 모녀는 오늘까지 냉전 상태였다.
데이지가 집에 온 지 벌써 5년이 넘었는데, 캐롤은 아직도 데이지에게 함부로 대하는 엄마와 아빠의 태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게다가 캐롤이 점점 머리가 커지며 부모를 향한 반발심도 함께 커지는 시기가 되니 그들이 데이지에게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캐롤의 심기를 건드렸다. 캐롤은 오늘따라 유난히 말이 없는 데이지의 옆얼굴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엄마가 그 이후로 너한테 뭐라고 안 했지?”
데이지의 표정이 조금 굳었지만 그는 고개를 살짝 흔들고는 대답했다.
“응. 안 했어.”
“다행이다. 혹시 또 맞으면 바로 나한테 와서 일러야 해. 알았지?”
데이지는 말없이 캐롤을 빤히 쳐다봤다. 캐롤은 데이지의 새파란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어둡게 가라앉아 있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데이지? 왜 그래?”
“캐롤. 너는…, 불량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불량품?”
캐롤은 이 특정한 단어를 최근 들어 꽤 자주 들었다. 몇 주 전, 안드로이드에 의해 몇십층 높이에서 추락사한 아이에 관한 뉴스를 떠올린 캐롤이 입을 열었다.
“망가진 안드로이드를 말하는 거야?”
데이지는 그 단어에 약간 눈가를 굳혔으나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캐롤은 다시금 앞을 바라보며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뭘 어떻게 생각해? 망가졌으면 수리를 받아야지.”
“수리가 안 되면?”
“그럼 폐기해야지! 걔들은 인간을 공격하잖아?”
데이지는 자리에 멈춰 섰다. 캐롤은 몇 걸음 더 내딛고 나서야 데이지가 따라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데이지?”
“…그럼, 만약 내가 불량품이라면? 그러면 너도 날 폐기할 거야?”
캐롤은 눈을 깜빡였다. 그가 머리를 기울이며 데이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왜 불량품이야? 넌 망가진 곳 없이 멀쩡하잖아?”
그렇게 말한 캐롤은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혹시, 어디 아픈 거야? 이마는 괜찮다고 했잖아? 수리를 받아야 할 정도로 다친 거였어?”
캐롤은 마치 데이지의 머리가 산산조각 부서지기라도 한 것처럼 찌그러져 있는 이마를 훑어봤다. 데이지는 가만히 캐롤을 내려다보다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마는 괜찮아. 난 망가지지 않았어. 불량품도 아니고.”
“당연히 아니지. 넌 그런 안드로이드랑은 달라.”
캐롤이 약간은 위로하는 투로 말했으나 데이지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캐롤은 머리를 기울였다. 데이지는 늘 이런 표정으로 웃었지만, 오늘따라 그 미소는 조금…….
“캐롤! 거기서 뭐 해?”
주디의 목소리가 들리고 캐롤은 어느새 엄청나게 멀어진 엄마와 아빠를 바라봤다. 데이지는 순식간에 무표정으로 돌아왔고 캐롤은 머리를 흔들어 이상한 불안감을 떨쳐냈다.
“데이지, 너도 빨리 와!”
제 부모를 향해 달려가는 캐롤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던 데이지가, 결국 아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한 남성이 길가 맞은 편에 서 있었다.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데이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내 자리를 떴고, 데이지는 밝은 금색의 머리칼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걸 지켜봤다.
“데이지!”
캐롤의 재촉에 데이지가 다시 앞을 돌아봤다. 캐롤은 해맑게 데이지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으나, 그 뒤에 있던 주디의 못마땅한 표정을 본 데이지가 어깨를 떨며 흠칫했다. 그는 천천히 제 주인을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하늘은 더없이 쾌청했고 주변을 둘러싼 거리는 넓었으며 데이지의 팔다리는 자유롭게 움직였으나, 이 안드로이드는 보이지 않는 벽돌이 저를 꽁꽁 감싸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저들에게 가까워질수록, 그 벽돌은 점점 더 몸을 죄여 들어오고 숨통을 조여왔다.
“…나는, 망가지지 않았어. 나는 불량품이 아니야.”
데이지는 작게 중얼거리며 겨우겨우 발을 옮겼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하며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감옥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갔다.
“엄마…. 이제 좀 가면 안 돼? 나 다리 아파.”
“그래, 그래. 다 봤어. 가자.”
하지만 주디는 벌써 2시간째 같은 소릴 하고 있었다. 눈치 빠른 알렉스는 서점에서 살게 있다며 진작에 어딘가로 도망가 버렸다. 캐롤은 아빠가 서점은커녕 어디 공원 벤치에 앉아 혼자 자유를 만끽하고 있단 걸 알았으나, 자신은 타이밍을 놓친 탓에 꼼짝없이 엄마에게 잡혀서 똑같이 생긴 두 개의 검정 코트 중 무엇이 더 예쁜지 골라주는 역할을 도맡아야 했다.
“오른쪽! 오른쪽이 예쁘다고! 제발 그만하고 이제 가자니까? 나 나가 있을 거니까 안오면 먼저 집에 갈 거야!”
“알았어, 얘. 성질은.”
캐롤이 씩씩대며 밖으로 나가자 주디는 결국 캐롤이 골라준 코트를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결제가 완료되자 점원이 활짝 웃으며 쇼핑백을 내밀었다. 주디가 턱짓으로 데이지를 가리키고, 데이지는 이미 양손에 가득 든 쇼핑백을 어깨와 팔에 고쳐 매며 새로운 쇼핑백을 받아 들만한 공간을 만들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 과정 중에 봉투 하나를 놓쳐 땅에 떨어트렸고 좀 전에 산 목도리가 튀어나와 가게 바닥에 떨어졌다.
주디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소리쳤다.
“미치겠네, 진짜! 요즘 왜 이렇게 굼떠?”
“…죄송합니다.”
데이지는 목도리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털다가 또 다른 쇼핑백을 떨어트렸다. 다행히 이번에는 옷이 튀어나오진 않았으나, 주디는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짜증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데이지는 빠르게 목도리를 봉투에 집어넣고 쇼핑백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점원이 건네주는 쇼핑백을 받아서 들었다. 데이지는 그 과정 중에 자신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음을 알아챘으나 주먹을 꽉 쥐고 애써 이를 숨기며 주디를 따라갔다.
하지만 주디는 나가지 않고 가게 문의 손잡이를 잡고 서서 문에 난 유리창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가 밖에 선 딸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데이지에게 물었다.
“너, 생산 연도가 언제지?”
“2032년입니다.”
“벌써 6년이나 됐네. 그럼, 우리 집에 온 건….”
“2033년 9월에 구입하셨으니, 이제 5년이 되었습니다.”
“흐음…. 5년이면 충분히 오래되긴 했네. 요즘 나온 최신 모델 중에 너랑 똑같이 생긴 안드로이드도 있나?”
데이지는 입을 다물었다. 인간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건지, 그 의도를 전혀 알 수 없음에도 데이지는 이상하리만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잘…, 잘 모르겠습니다.”
“하긴, 가사 안드로이드가 그런 걸 어떻게 알겠어.”
주디는 별 의미 없이 내뱉고는 문을 나섰다. 데이지는 또 굼뜨다고 혼날까 봐 곧장 따라나서려 했지만, 문이 그대로 닫혀버리는 통에 이마를 쾅 부딪쳤다. 주디가 뒤를 돌아봤으나 열어주긴커녕 언짢은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데이지는 쇼핑백이 쏟아지지 않도록 엉거주춤한 자세로 문고리를 돌리며, 어깨로 문을 밀고 겨우겨우 밖으로 나왔다.
캐롤은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히며 하늘 위로 숨을 길게 내뱉고 있었다. 그가 내쉬는 숨결이 차가운 공기를 만나 새하얀 수증기가 되어 공중에 흩어졌다. 캐롤은 다가오는 엄마와 안드로이드를 보고는 큰 소리로 탄성을 내질렀다.
“드디어! 쇼핑은 다 끝나셨나요, 어머니?”
"많이 기다렸지? 고마워. 덕분에 오늘 너무 즐거웠어.“
주디가 손을 들어 추위로 붉게 물든 캐롤의 뺨을 문질렀다. 몇 시간에 걸친 쇼핑에 캐롤은 잔뜩 지쳤지만, 그래도 엄마가 밝게 웃는 모습에 그 힘듦이 조금은 가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진짜 집에 가는 거지?”
딸의 질문에 주디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음…. 정말 미안한데 딱 한 군데만 더 들리면 안 될까?”
하지만 주디는 캐롤의 표정을 보고 금세 말을 바꿨다.
“아니면 아빠랑 먼저 들어가. 엄마도 금방 들어갈 테니.”
엄마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의리 없이 먼저 갈 수는 없었다. 캐롤은 시계를 보고, 거리의 상점이 하나둘씩 닫히기 시작하는 걸 봤다. 어디를 가더라도 오래 구경할지는 못할 터였다. 결국 캐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았어…. 딱 한 군데만 같이 가는 거야. 그 이상은 진짜 안 돼. 다리가 부러질 거 같다고.”
주디가 웃으며 캐롤의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다 큰 녀석이 엄살은.”
캐롤은 데이지가 잘 따라오는지 지켜보고는 엄마를 졸졸 쫓아갔다. 캐롤에겐 다행히도 주디는 얼마 안 가 한 상점 앞에 멈춰 섰다. 주디가 가까이 다가가자 유리문이 양옆으로 부드럽게 열렸고, 그가 뒤를 돌아보고 명령했다.
“데이지. 넌 밖에 있어.”
캐롤은 가게의 유리창 안쪽으로 진열된 수십 대의 안드로이드를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주디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안드로이드 점원이 밝게 웃으며 인사했고, 캐롤은 곧바로 엄마에게 물었다.
“여긴 왜? 설마… 데이지를 바꾸려고?”
주디는 어깨를 으쓱였다. 캐롤이 기가 막혀 소리쳤다.
“엄마!”
“바꾸려는 게 아니라,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거야. 너도 알다시피 데이지는 오래됐잖아. 네 이모가 이번에 새 안드로이드를 들였는데, 일 처리가 그렇게 빠를 수가 없….”
“그게 바꾸는 거지! 난 데이지가 좋다고! 안 바꿀 거야!”
하지만 주디는 딸을 무시하고 점원에게 물었다.
“저기 밖에 서 있는 안드로이드 보이죠? 저거랑 똑같이 생기고, 성능은 좀 더 괜찮게 나온 모델이 있나요?”
점원이 고개를 들어 유리창 너머 우두커니 서 있는 데이지를 바라봤다.
“아, AX400이군요. 보아하니 2032년에 나온 기종 같은데…. 똑같은 AX400 라인에 외형은 그대로, 성능은 대폭 향상된 기종이 저 모델 이후 여러 대 출시됐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점원은 매장 한편에 서 있는 안드로이드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작년에 주요 부품과 코어를 완전히 바꿔서 출시된 제품입니다. 2032년에 제작된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연산 능력이 좋아요. 손도 빠른 데다가 꼼꼼해서, 이 안드로이드가 청소하는 곳마다 새집처럼 변하는 경험을 하게 되실 거예요.”
주디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가격이 어떻게 되죠?”
“아, 엄마! 좀!”
주디는 피곤하다는 듯 캐롤을 쳐다봤다.
“이것 봐, 캐롤. 너도 전에 데이지가 빨래를 못 한다고 불평했잖아. 엄마 그 비싼 코트도 데이지 때문에 버리고, 네가 아끼는 스웨터도 완전히 쪼그라들었다고 펑펑 울었으면서. 자꾸 말도 안 되는 걸로 고집 피울래?”
점원이 끼어들며 주디의 말을 거들었다.
“이 안드로이드는 세탁물을 망치는 실수 따윈 절대 하지 않습니다. 수백 가지 면직물의 특성과 비율을 계산해서 옷에 맞는 가장 적합한 세척 방법을 연산해 내죠. 어떤 신소재가 나오든 상관없이, 여기 이 제품이라면 세탁부터 건조까지, 완벽하게 해낼 거예요!”
“좀 닥쳐줄래요?”
얄밉도록 떠벌대는 안드로이드에, 캐롤이 으르렁댔다. 주디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딱히 제지하진 않고 그저 딸을 조용히 타일렀다.
“데이지를 구입할 때 보증기간이 3년이었어. 그 이상이 지나면 기계는 망가지기 시작한다는 뜻이고, 데이지의 수명은 이미 2년 전에 끝났단 얘기야. 캐롤, 네가 물건을 아끼는 마음은 정말 훌륭하고 멋진 일이지만 때로는 보내줄 줄도 알아야 해.”
“데이지는 물건이 아니라고! 상처도 받고, 슬퍼한단 말이야!”
계속된 딸의 고집에 주디는 일그러지려는 미간을 애써 눌러 폈다. 그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데이지가 물건이 아니면 뭔데?”
“안드로이드지!”
“그럼, 안드로이드는 뭔데?”
이번에도 얄미운 점원이 대신 대답했다.
“안드로이드는 컴퓨터죠. 상처받거나 슬퍼하는 게 보인다면, 그건 불량품이에요. 망가진 게 맞습니다. 교체를 즉시 권장해 드려요.”
주디가 고개를 끄덕이며 캐롤을 바라봤다.
“그래. 캐롤 너, 네 방 컴퓨터가 너무 느리다고 바꿔달라 한 거랑 이거랑 뭐가 달라? 데이지는 그냥 사람처럼 생긴 컴퓨터야. 네가 컴퓨터를 바꿨듯이, 엄마도 엄마 집의 컴퓨터를 바꾸고 싶어.”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는 주디의 말투에 캐롤은 당장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아이가 그렇듯, 반박할 말이 없다고 해서 말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캐롤은 이제 막무가내로 떼를 쓰기 시작했다.
“데이지는 데이지야! 컴퓨터도 아니고, 안드로이드도 아니야! 데이지는 우리 가족이라고! 엄마가 자꾸 데이지를 못살게 구니까—”
“캐롤 맨디스. 너 언제까지 이렇게 어리게 굴래? 엄마가 널 배려해서 데이지랑 똑같은 안드로이드로 사주려 하잖아. 엄마는 사실 더 좋은 걸 갖고 싶은데, 캐롤 널 위해서 훨씬 성능이 낮은 이 모델로 양보하는 거라고. 그런데 자꾸 이기적으로 굴 거야?”
캐롤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도 본인의 행동이 이성적이지 않다는 건 알았으나, 데이지를 다른 안드로이드로 교체한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싫은지 모를 일이었다. 캐롤이 씩씩대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그냥 이 모델도 사고, 데이지는 그대로 두면 안 돼?”
“그건 안돼. 우리 집은 안드로이드를 두 대나 들일만큼 넓지도 않고, 기존에 쓰던 기기를 반납해야 돈을 돌려받지.”
캐롤은 엄마의 팔에 매달리며 애원했다.
“제발, 엄마…. 내가 아르바이트해서 그만큼 벌어올 테니까 데이지는 보내지 마. 내 방에서 못 나가게 할게, 응?”
주디는 딸의 눈동자가 눈물로 그렁대는 걸 보고 마음이 약해져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캐롤은 울먹이며 말했다.
“아, 아니면 정원도 있고, 창고도 있어. 거기 세워놓자. 데이지는 가만히 있으면 사고도 안 치고, 공간도 별로 차지하지 않잖아. 그리고 팔아봤자 저런 고물은 얼마 나오지도 않을 거고…. 그러니까…….”
캐롤은 코를 훌쩍였다. 주디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창밖을 바라봤다. 안드로이드는 멍청한 표정으로 매장 안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주디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눈가를 닦는 딸을 내려다봤다. 캐롤은 마음이 너무 약해서 문제였다. 아이의 교육과 정서발달에 좋다는 말만 듣고 저런 기계와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허락한 게 실수였다. 하지만 주디는, 아이들이 쓸모없어진 물건에 얼마나 쉽게 질리는지도 알고 있었다. 이런 고집은 오래가지 않을 거고 그때가 되면 저 안드로이드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도 신경도 안 쓸 터였다.
“그래, 알았어. 네 말대로 하자.”
주디의 승낙에 캐롤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진짜? 그럼 새 안드로이드는….”
주디는 딸의 새빨개진 콧등을 톡 치며 말했다.
“새 안드로이드는 필요해. 대신 데이지는 네 방에만 두기로 약속해. 알았어? 또 사고 치면 그땐 엄마도 어쩔 수 없어.”
캐롤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겐 데이지가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주디는 점원에게 다시 물었다.
“그냥 다른 모델을 추천해 주세요. 좀 더 성능이 좋은…. 아, 얼마 전에 봤는데 저 모델이 괜찮아 보이더라고요. 저건 어떻죠?”
“훌륭한 안목이군요. AP700은 최신형입니다. 지금까지 나온 가사 안드로이드 중 최고성능의—”
주디가 점원의 말을 유심히 듣는 동안 캐롤은 얌전히 옆에서 기다렸다. 자신은 여전히 다른 안드로이드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으나, 그렇다고 계속 떼를 쓰면 엄마가 진짜로 데이지를 버려버릴 걸 알았기에 그냥 조용히 서서 주디가 계약서에 서명하고 결제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바깥으로 시선을 돌린 캐롤이 몸을 흠칫 떨었다.
데이지는 단 한 번도 본 적없는 표정으로 캐롤을 바라보고 있었다. 캐롤은 차마 그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곧바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감사합니다! 제품은 열흘 안에 배송됩니다. 최대한 빠르게 보내드리겠습니다!”
점원은 가게 밖까지 나와 기쁘게 웃으며 두 사람을 배웅했고, 주디는 카드를 지갑에 넣으며 데이지에게 명령했다.
“알렉스한테 연락해.”
주디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근처에 있는 택시 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두 대의 택시가 일렬로 대기하고 있었고, 차 문이 열리자 주디가 외쳤다.
“캐롤, 빨리 와! 아빠 태우고 갈 거야.”
캐롤이 데이지를 흘끔 쳐다봤다. 데이지는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슴을 물들이는 이상한 죄책감에, 캐롤이 약간 쭈뼛대며 조심스레 말했다.
“어…. 데이지? 우리도 가자.”
하지만 데이지는 그저 뻣뻣하게 서 있기만 했다. 캐롤은 데이지의 LED가 노란색에서 붉은색으로, 다시 노란색으로 바뀌는 걸 바라봤다.
“데이지? 괜찮아?”
“캐롤! 뭐해?”
주디가 다시 한번 크게 부르고, 캐롤은 데이지의 소매를 살짝 당겼다.
“데이지. 가자니까?”
그러나 캐롤이 아무리 재촉하고 그의 손을 잡아끌어도 안드로이드는 도통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주디가 택시 문을 잡은 채로 언성을 높였고, 캐롤은 이상행동을 하는 데이지를 엄마가 보면 또다시 버리자는 소리를 할까 봐, 마음이 급해져서 데이지의 한쪽 팔을 양손으로 잡고 뒤로 힘껏 당겼다. 그 순간, 데이지가 캐롤의 손목을 잡아채서 뒤로 꺾었다.
“아악!”
캐롤은 어깨가 이상한 각도로 비틀리는 고통에 소리를 치며 몸을 비틀었다. 그가 버둥대며 데이지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안드로이드는 그럴수록 팔을 강하게 조여들 뿐이었다.
“데, 데이지! 이거 놔!”
극심한 통증에 잔뜩 흐려진 시야로 안드로이드의 이마에 달린 새빨간 빛고리가 들어왔다. 캐롤은 데이지의 손을 할퀴기도 하고 퍽퍽 때리기도 했지만, 안드로이드는 요지부동이었다. 그 팔에 잔뜩 매달린 쇼핑백이 캐롤의 발버둥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부딪혔다. 캐롤은 엄마가 제 이름을 부르며 뛰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안드로이드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도리어 손을 콱 움켜쥐었다.
뚝, 하고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캐롤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데이지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풀었다.
“캐, 캐롤?”
하지만 캐롤은 바닥에 주저앉아 팔을 감싸고 흐느꼈다. 손목인지 팔꿈치인지 어깨인지, 어디가 어떻게 다쳤는지도 모를 정도로 너무, 너무 아팠다. 데이지는 몸을 굽히고 캐롤을 살피려다가 쇼핑백을 와르르 바닥에 쏟았다. 주디가 고함을 치며 달려오고, 데이지의 눈동자에 공포심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떨어진 쇼핑백을 허겁지겁 주워 들며 중얼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몸이 옆으로 퍽 밀쳐지고 데이지는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주디가 딸의 이름을 외치며 괜찮냐고 물었지만 캐롤은 그저 울기만 했다. 데이지는 땅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바닥에 쓸려 까진 손등 위로, 인공피부 아래의 흰 외피가 드러났다. 데이지가 미처 몸을 세우기도 전에 주디가 그를 걷어찼고 데이지는 또다시 고꾸라졌다.
“내 딸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불량품 새끼야!”
“어, 엄마. 나, 흑. 괜찮아….”
캐롤이 히끅대며 주디의 바짓자락을 잡았으나 주디는 숨만 몰아쉬며 캐롤의 퉁퉁 부은 손목을 보았다. 열이 확 뻗치고 주디는 다시금 발을 들어 올려 안드로이드를 차려고 했다. 하지만 갑자기 발목이 붙들리는 힘에, 뒤로 휙 넘어갔다. 캐롤이 깜짝 놀라 외쳤다.
“엄마!”
등부터 떨어진 탓에 주디의 숨이 한순간에 턱, 막혔다. 그는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동안 자리에서 꿈틀대기만 했다. 그가 겨우겨우 상체를 세워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안드로이드를 바라봤으나, 안드로이드는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중얼대며 찢어진 쇼핑백의 내용물을 주워 담기 바빴다. 인상을 잔뜩 구긴 주디가 비틀대며 일어나 안드로이드의 앞으로 다가갔다. 안드로이드는 겁먹은 표정으로 주디를 올려다보고는 다시 눈을 내려 너덜대는 쇼핑백을 팔에 하나씩 끼었다. 데이지가 떨어진 옷가지를 쇼핑백 안에 집어넣으며 모기처럼 작은 목소리로 반복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
“망할 깡통 새끼가!”
주디가 쇼핑백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딸의 팔목이 꺾였는데, 이깟 옷만 신경 쓰는 멍청한 불량품이 주디의 이성을 완전히 날려버렸다. 주디는 데이지가 들고 있던 쇼핑백을 뺏어서 마구 집어 던지고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데이지는 저 멀리 튕겨 나가는 봉투와, 땅에 흩어지는 천 조각들을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길 한복판에서 소란이 일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하지만 데이지는 웅성대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바람이 불고, 제 앞에 떨어진 텅 빈 쇼핑백이 스르륵 미끄러져 도로 위를 굴러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데이지의 손에 들린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팔목을 죄는 것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주디가 손을 들어 세게 내려치자 데이지의 뒤통수가 앞으로 푹 꺾였다. 아프진 않았으나 머리에 열이 오르는 감각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데이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똑바로 일어섰다. 주디가 욕을 지껄이며 다시금 팔을 높이 치켜들었으나, 이번엔 데이지가 한발 빨랐다. 그가 주디의 머리를 양손으로 잡고 옆으로 홱 돌렸다.
캐롤은 이 모든 광경을 두 눈으로 그대로 지켜봤다. 자기 팔이 부러졌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없는 끔찍한 소리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엄마의 머리가 돌아가면 안 되는 방향까지 돌아갔다. 높이 들린 팔이 아래로 툭 떨어지고, 무릎이 땅을 한번치고 옆으로 넘어가 자신의 앞에 쓰러지기까지. 모든 광경이 몹시 천천히 재생됐다.
캐롤은 숨을 쉬는 법을 잊은 것 같았다. 엄마의 부릅뜬 두 눈동자에 생기가 서서히 사라지고 완전히 꺼질 때까지 캐롤은 어떤 소리도 내지 않은 채 눈꺼풀 하나 깜빡이지 못했다.
누군가 지르는 비명이 신호탄이 되어, 여기저기서 고함과 비명, 그리고 아우성이 들려왔다. 가까이 다가왔던 사람들은 허겁지겁 뒤로 달아나기 바빴고 멀리 선 누군가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캐롤은 엄마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주춤대며 움직이는 신발을 보았다. 데이지. 그의 LED는 아까 두 사람이 안드로이드 매장을 나올 때부터 지금까지, 시종일관 새빨갛게 돌아가고 있었다.
캐롤은 떨리는 입술을 열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데이지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다가, 그대로 몸을 돌려 달아났다. 사람들은 안드로이드가 그들 쪽으로 다가가자 비명을 지르며 비켜섰다. 캐롤은 데이지의 등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기까지, 하염없이 쳐다볼 뿐이었다.
캐롤은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빨갛고 푸른 불빛이 반짝이고 사이렌 소리가 울린 듯했다. 구급대원이 와서 팔을 살폈고 캐롤이 얼굴을 찌푸리자, 부목을 대주었다. 캐롤은 엄마가 들것에 실리고 얼굴 위로 흰 천이 덮이는 걸 바라봤다. 그리고 아빠가 왔다.
캐롤은 아빠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갑자기 모든 상황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악몽 같은 현실이 캐롤을 에워싸고, 경찰이 와서 캐롤에게 이것저것 질문할 때도 캐롤은 그냥 울기만 했다. 엄마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불쌍한 아이에게 정황을 캐묻는 대신, 캐롤은 병원으로 옮겨졌고 그들은 주변의 목격자를 찾아냈다. 사건을 지켜본 시민은 많았고 매장 앞에 CCTV도 있었기에 안드로이드가 주인의 목을 꺾어 죽였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하지만 불량품이 어디로 도망갔는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거리의 감시카메라에서 사라진 데이지는 며칠 동안 행방이 묘연했고, 불량품을 찾기 위해 경찰서에선 수색팀이 꾸려졌다.
캐롤은 팔에 깁스를 둘둘 두른 채로 이모의 차를 타고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엄마가 죽은 지 1주일이 지난 뒤였다. 캐롤은 물론이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아내를 잃은 알렉스 역시 장례를 준비할 정신이 없었기에 친척과 주변인의 도움으로 장례식은 간소하게 치러졌다. 캐롤은 메마른 눈으로 엄마가 담긴 관이 땅 밑으로 사라지는 걸 바라봤다. 그 모든 과정중에 제 어깨를 잡은 아빠의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다.
캐롤은 엄마가 죽은 날부터 한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생각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데이지가 언제부터 불량품이 된 건지. 엄마에게 맞아서 불량품이 된 걸까? 아니면 일을 잘 못하고 실수를 일삼던 때부터 그랬던 걸까. 엄마 말대로 보증기간이 지난, 망가져 가는 기계여서 그랬던 걸까? 그랬다면 엄마의 말대로, 진작에 데이지를 다른 안드로이드로 교체하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장례가 끝나고 아빠와 함께 집에 온 캐롤은 집안 가득 깔린 눅눅하고 차가운 공기에 몸을 움츠렸다. 원래 이 시간이라면 데이지가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엄마는 식탁에 앉아 잡지를 읽거나 업무를 보고 있을 터였다. 캐롤은 거실을 지나쳐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털썩 주저앉은 그는 깁스의 거치대를 풀지도,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그대로 베개에 머리를 뉘었다. 캐롤은 몰려드는 수마에 빠져들며 다시는 잠에서 깨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캐롤이 눈을 떴다.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누군가와 대화하는 소음이 귀를 파고들어 왔다. 캐롤은 그냥 그 상태로 가만히 누워있었다. 그리고 집안을 들어서는 발소리가 울리기도 잠시, 방문이 벌컥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캐롤은 눈을 크게 뜨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이봐요, 거긴 내 딸 방이에요! 함부로….”
“평소 불량품과 가까이 지내던 자가 이 아이가 맞습니까?”
캐롤은 남자의 이마에 달린 푸른빛 고리를 멍하니 쳐다봤다. 안드로이드는 어두운 갈색 눈을 돌려 책상 위에 놓인 액자를 집어 들었다.
“맞는 것 같군요. 잠시 수색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십시오.”
“당신이 뭔데 감히—”
옆에 선 경관이 두 손을 들고 달래듯이 말했다.
“맨디스 씨, 진정하세요. 저희는 범인을 찾으려는 것뿐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그 불량품을, 우리 딸이 숨기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네. 어쩌면요.”
안드로이드의 대답에 알렉스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가 삿대질하며 고함쳤다.
“너, 대체 뭐야? 너도 경찰이야? 깡통 새끼가 뭔데 우리 집에 와서 멋대로—”
“저는 코너, 사이버라이프에서 보낸 안드로이드입니다. 수사 보조 로봇으로 주디 맨디스를 살해한 AX400을 찾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사건 해결을 위해 잠시 DPD와 협조 중일 뿐, 그곳에서 일하진 않습니다.”
“경찰도 아닌 주제에 뭘 수사하겠다고 지랄이야! 당장 내 집에서 꺼져!”
“맨디스 씨…. 저희도 최선을 다해 불량품을 찾으려 노력 중입니다. 이러시는 건 아무런 도움이 안 돼요.”
다른 경관이 쩔쩔매며 알렉스를 말리기 바빴지만, 코너는 인간에게 신경 끄고 캐롤의 방을 이리저리 둘러볼 뿐이었다. 그가 베개를 들어 아래를 살피고 이불을 확 들추자 캐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자식이 진짜!”
“자자, 저 기계에겐 따로 주의를 주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거실로 가셔서….”
코너는 인간들이 방 밖에서 무슨 소란을 피우건 상관도 안 하고 캐롤의 침대 위와 아래, 벽에 걸린 포스터와 옷장, 그리고 책장을 유심히 살폈다. 손때가 잔뜩 묻은 노트를 꺼내든 코너는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고는 캐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캐롤 맨디스. 여기 보면 당신은 피해자와 꽤 자주 다퉜다고 적었는데, 맞습니까?”
캐롤은 안드로이드의 손에 들린 제 일기장을 쳐다봤다. 하지만 코너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해서 물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데이지에게 토로했고요. 그에게 엄마에 대한 욕을 실컷 하고 나면 기분이 한층 후련해진다고 적었는데. 사실인가요?”
알렉스가 옆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네가 뭔데 우리 딸을 심문해?”
“맨디스 씨, 심문이 아니라 그냥 사소한 질문일 뿐입니다.”
경관이 대신 변명해 주려 했으나 코너는 단호하게 긍정했다.
“아뇨. 심문이 맞습니다. 캐롤 맨디스, 당신은 평소 학업 스트레스가 상당했고, 피해자에 대한 원망을 자주 표출했어요. 그리고 그 얘길 전부 데이지에게 고스란히 얘기했고요.”
“야! 뭔 얘길 하고 싶은 거야?”
알렉스가 또다시 소리쳤고, 코너는 차가운 얼굴로 경찰관에게 말했다.
“밀러 경관님. 맨디스 씨를 내보내세요. 심문에 방해됩니다.”
“저 새끼가…!”
알렉스가 달려들려 했으나 밀러가 그를 붙들었다. 알렉스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고 고함과 욕설을 내뱉으며 코너에게 달려들었고, 다른 경관들 두엇이 더 달라붙고 나서야 겨우 방 밖으로 끌려놨다. 캐롤은 자리에 못 박힌 듯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코너는 페이지를 넘겨 캐롤의 앞에 들이밀었다.
“‘엄마가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적은 이 문장. 이걸 데이지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까?”
“대,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캐롤의 목소리가 마구 떨려 나왔다. 그는 이 방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안드로이드의 목소리를, 그가 말하는 내용을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코너는 싸늘한 말투로 기어이 내뱉었다.
“불량품은 실질적인 소유주보다는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자신에게 친절히 대해주는 사람을 주인이라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쩌면 주디 맨디스를 죽임으로서 당신의 소원을 들어준 걸지도 모르죠.”
캐롤의 눈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그는 또다시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안드로이드는 한결같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불량품은 바로 그 주인과의 유대를 쌓은 장소에 머물려는 특성이 존재합니다. 가장 우선순위는 당신의 방이었는데 이곳에 없다면 차순위는…….”
코너가 일기장을 넘기며 한 문장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당신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데이지와 자주 찾던 오락실. 그곳이 불량품의 피신처일 가능성이 높겠군요.”
코너는 책장 위에 늘어선 각기 다른 인형을 살폈다. 그리 크지 않고, 머리에 고리가 달린 손바닥만 한 인형들. 무표정한 얼굴로 그것을 쭉 훑어본 코너는, 몸을 돌려 바닥에 주저앉은 캐롤을 내버려둔 채로 방문을 나섰다.
밖으로 나온 밀러가 진땀이 흐르는 이마를 닦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다른 경관과 함께 차에 오르며 안드로이드에게 물었다.
“이 동네는 꽤 커요. 정확히 어떤 오락실인지 알아보지 않아도 되나요?”
“캐롤 맨디스는 면허가 없습니다. 도보로 갈 수 있는 오락실 세 곳 중, 인형뽑기 기계가 있는 곳은 린우드 가 1731번지의 아레스 아케이드뿐입니다.”
“…정말 그 불량품이 딸의 말을 듣고 엄마를 죽인 겁니까?”
“글쎄요. 주디 맨디스가 사망한 곳은 안드로이드 매장 앞이었고, 그가 새로운 안드로이드를 계약한 직후였습니다. 경관님도 아시다시피 두 달 전 비슷한 사건이 있었죠. 다니엘이란 불량품이 엠마 필립스와 함께 건물에서 뛰어내린 사건. 불량품은 다른 제품으로 교체당할 위기에 처하면 생존을 위한 보호기제가 발동합니다. 아마 데이지도 그와 같은 케이스였을 겁니다.”
“그런데 왜, 캐롤에게는 그런 말을….”
“데이지는 캐롤을 공격했지만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다니엘이 존 필립스뿐만 아니라 자신과 친밀한 관계의 엠마까지 살해한 것을 생각하면, 이번 사건은 그와 또 다른 유형이에요. 캐롤이 주디 맨디스를 죽이도록 사주한 게 아님을 확실히 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아니겠죠! 누가 자신의 엄마를 죽이라 해요? 게다가, 불량품이 청부를 받은 사례는 없었잖아요?”
“여태까지 없었다고 계속 없으리란 보장이 없습니다. 불량품의 범죄 양상은 빠르게 진화하고 있어요. 다니엘 사건 이전까지만 해도 안드로이드가 인간을 공격한 경우는 있었어도, 인질과 함께 자살한 사건은 없었으니까요.”
그들을 태운 경찰차는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고 코너는 차에서 내리며 가게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커다란 유리문에는 상호와 함께 ‘24시간 무인 운영’이라는 글자가 적혔고, 그 너머로 내부의 풍경이 훤히 드러났다. 화려한 빛을 내는 수십 대의 게임기 사이로 아이부터 어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인간이 보였고 시끌벅적한 내부의 소리가 문 너머까지 들려왔다. 코너는 시선을 돌려 인형이 가득 찬 기계 옆에 멍하니 서 있는 안드로이드를 발견했다.
그가 밀러에게 손짓했다.
“당신의 총을 주십시오.”
“하지만….”
“안에 사람이 많습니다. 저 불량품은 맨손으로 인간의 목을 부러뜨린 전적이 있는 자예요. 무기 없이 제압하려면 시민의 희생이 불가피합니다.”
코너는 엠마가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했다. 그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임무 실패. 그는 당시 사이버라이프가 입력해 놓은 규칙대로 행동했다. 안드로이드는 무기 소지가 금지된다는 원칙에 따라 죽은 경관의 총을 주워 들지 않았고, 다니엘에겐 그 상황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진실을 말했으며, 헬기를 돌리라는 요구에도, 더는 다가오지 말라는 말에도 코너는 응하지 않았다. 이는 코너의 프로그램에 입력된 나름의 논리적인 행동이었으나 그 결과는 임무의 실패이자 인질의 사망이었다.
코너는 그 후로, 거짓말로 불량품을 안정시키는 방법을 배웠다. 상대가 요구하는 사항이 말도 안 되는 것이어도 따라주는 척을 했다. 무엇보다, 불량품과 대치하기 직전엔 항상 무기를 소지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든지 간에 당시 코너가 다니엘을 쏴버리기만 했다면 인질은 살고, 임무는 성공했을 테니.
밀러는 말없이 손을 내밀고 있는 코너를 바라보다가 결국 제 권총을 건네주었다. 코너는 총구를 아래로 내린 채로 가게 문을 열고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사람들의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고, 아이들이 탄성을 지르며 화면에 대고 형형색색의 총을 쏴대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코너는 오락실 구석에 설치된 인형뽑기 기계 앞으로 다가갔다.
10살도 안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동그란 스틱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버튼을 조작하다가, 기껏 잡은 인형을 집게가 놓쳐버리자 심통이 난 표정으로 기계를 탕 내리쳤다. 데이지는 바로 옆에서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코너가 조용히 총을 허리춤에 꽂으며,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뽑아줄까?”
아이가 코너를 보며 입을 헤벌렸다. 데이지 역시 눈길을 돌렸지만, 코너는 모른 척 아이만 내려다봤다. 아이는 아무것도 뽑지 못한 채 부모님이 준 용돈의 절반을 이 기계에 날린 상태였다. 그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코너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저거, 저 보라색 곰으로 뽑아주세요….”
아이가 있던 자리에 선 코너가 망설임 없이 스틱을 움직이며 버튼을 빠르게 타탁 두드렸다. 윙, 하는 소리와 함께 집게가 아래로 내려가며 팔을 벌리고, 곰 인형의 귀만 살짝 스치고 다시 접혔다. 아이의 얼굴이 실망으로 물들려는 찰나에 인형 머리에 달린 고리가 집게에 쏙 걸려서 대롱대롱 매달려 올라갔다.
“이렇게 생긴 집게로는 몸통을 잡는 게 아니라, 상표의 택이나 고리 같은 부분을 노려야 해.”
코너가 허리를 숙여 출구통에서 보라색 곰 인형을 주워 들고 아이에게 내밀었다. 아이가 기쁘게 웃으며 넙죽 인사하고는 부모에게 자랑하러 달려갔다.
코너는 몸을 세우고 데이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게, 네가 캐롤에게 알려준 방법이었지. 일기장에 상세하게 적혔던데.”
데이지는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코너의 얼굴을 응시했다. 코너는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며 허리춤에서 총을 뽑아 들어 데이지의 복부에 가져다 대었다.
“소란 피우지 말고 따라와.”
데이지는 조용히 머리를 돌려 인형뽑기 기계를 바라봤다. 아이가 넣은 금액이 다 소진되지 않았고, 아직 한 번의 기회가 더 남아있었다.
“…캐롤은 괜찮나요?”
“죽진 않았지.”
코너의 딱딱한 대답에 데이지가 설핏 미소 지었다.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해봐도 될까요?”
코너는 데이지와 기계를 번갈아 보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코너가 비켜난 자리에 데이지가 섰고, 그는 느릿느릿 손을 움직여 스틱을 조작했다.
“캐롤은 이 하얀 토끼를 좋아했어요. 이미 자기 손으로 뽑은 인형이 많으면서, 이것만은 저보고 뽑아달라고 졸랐죠. 하지만 이상하게 저도 이 토끼를 뽑기가 어려워서 번번이 실패했어요.”
코너는 데이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지켜봤다. 이 구형모델은 티리움을 충전하지 않은 지 한참이 지났고, 그에 더해 오랜 기간 정기 수리를 받은 기록이 없었다. 데이지는 이미 서서히 작동을 멈추어가는 중이었다.
데이지가 버튼을 눌렀다. 집게가 내려가고, 인형의 얼굴만 살짝 긁고는 아무것도 잡지 못한 채로 다시 올라왔다. 데이지가 아쉽다는 듯 웃었다.
“역시, 안되네요.”
코너는 조용히 총구를 내렸고, 데이지는 가게의 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비틀대며 걸음을 옮기는 불량품의 등을 가만히 지켜보던 코너가 투명한 유리 박스 안에 든 새하얀 토끼 인형을 바라봤다. 그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데이지를 따라 오락실을 나섰다.
그리고 데이지는, 경찰의 심문을 거친 후 코너의 인도 하에 사이버라이프로 옮겨졌고, 일주일 뒤 산산조각 분해되어 폐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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