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 Colony

블루 콜로니. 34

CN by BX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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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계약

정적만이 가득 찬 집안에서, 유일한 소음이라곤 세탁실 너머로 들리는 세탁기의 덜컹댐뿐이었다. 둘은 한참을 대화 없이 앉아 있었다. 노먼은 노먼대로 마음이 몹시 심란했고, 코너는 코너대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인간이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도 모르고 그저 발가락을 꼼질대며, 러그의 감촉은 보기보다 간지럽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노먼은 턱을 괸 채 그런 기계의 모습을 살폈다. 퍼킨스가 자신의 뒤통수를 때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개짓거리 작작 하고 보고서나 써!' 그게 당시 퍼킨스가 노먼에게 한 말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얼얼하게 아려오던 뒤통수에, 노먼은 벌떡 일어나 퍼킨스에게 삿대질을 해가며 한바탕 싸웠다. 그리고 노먼은 9년 만에 그 일이 다시금 반복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코너. 여기서 살래요?"

코너가 눈을 깜빡였다. 그는 인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노먼이 덧붙였다.

"당신이 어느정도 돈을 모을 때까지만이요. 디트로이트 집값은 비싸요. 지금부터 모은다 해도 적어도 몇 개월은 제대로 된 집을 구할 수 없을 거예요."

“그 말은, 저보고 노먼의 동거인이 되란 뜻인가요?”

노먼이 동의의 뜻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코너의 LED가 노랗게 돌아가고, 그새 검색을 돌려보기라도 한 듯 그가 대꾸했다.

"이 집의 월세는 제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애초에 전 이렇게 큰 집이 필요 없어요.”

“월세는 됐어요. 남는 방도 있고, 당신이 들어온다고 딱히 식비나 관리비가 더 나가는 것도 아니니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보통 동거인이라면 집세를 반으로 나누어서 지불하는 것이 사회적인 약속입니다. 연인이나, 결혼한 사이라면 한 사람이 대신 지불하기도 하지만—”

노먼이 끼어들었다.

“꼭 그런 관계가 아니어도 잠깐은 같이 사는 경우가 있어요.”

“어떤 경우요?”

“음…. 여러 가지 있죠. 뭐,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다든지, 사정이 딱한 친구를 위해서라든지…….”

“친구요?”

“네. 친구요.”

코너는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친구의 사전적 정의는 ‘가깝게 오래 사귀어 정이 두터운 사람’을 뜻합니다. 제가 당신과 안 지는 30일밖에 안 되었고, 함께 있던 시간만 따진다면 고작 88시간입니다. 만 4일이 안 되는 시간이죠. 일반적인 ‘오래’의 정의가 최소 몇 개월, 많게는 몇십 년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저는 당신의 친구가 아니라 직장동료라 정의하는 게 합당해 보입니다.”

만약, 노먼이 퍼킨스였다면 이 순간 욕설을 걸쭉하게 내뱉었을 것이다. 하지만 노먼은 그의 파트너보다 성숙했고, 자비로웠다.

“그래요. 그럼 친구 말고,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쪽으로 가죠.”

“이해관계는 서로의 이익을 위해 손해도 함께 감수하는 관계란 뜻이죠. 전 집이 필요하니 노먼이 방을 제공해 준다면 이익이 되지만, 노먼은 방을 잃는 거니 손해밖에 남지 않는 불공정한 관계가 됩니다. 당신이 제시한 두 문장 모두 성립하지 않아요.”

“아, 그냥 좀…!”

노먼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가, 곧바로 입을 다물고 심호흡했다. 하마터면 내면의 퍼킨스가 튀어나올 뻔한 아찔한 상황이었다.

“친구든, 이해관계든, 그게 핵심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당신이 빨리 돈을 모아서 나가요. 그때 가서 차근차근 월세를 갚든가 하면 되죠.”

“돈을 모을 수 있는 시간 대비 이곳의 월세를 갚아나갈 시간을 비교하면, 그것 역시 매우 비합리적인 제안입니다.”

노먼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하고 싶다는 거예요? 여기서 살기 싫으면 그냥 그렇다고 솔직하게 얘기를—”

“다만, 제가 가사를 전담한다면 이해관계가 성립됩니다. 가정부 안드로이드의 평균 월급이면 세 들어 사는 금액 정돈 감당이 가능하죠. 노먼의 집을 관리하는 조건으로 제가 이곳에 들어온다면, 노먼에게도 충분한 이익이 될 겁니다.”

안드로이드의 제안을 들은 노먼이 손사래를 쳤다.

“됐어요. 그건 제가 불편해서 안 돼요. 여기 당신 생각만큼 비싸게 구한 집도 아니니까, 가사는 둘이 분담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당신이 집을 얼마에 구입했든, 동거인에겐 현재 시세에 따른 월세를 요구하는 것이 논리적입니다. 모든 이해관계에는 대가가 따라오고 대가 없는 친절은 상대를 얽매는 구속구가 되죠. 많은 사기 범죄가 이런 친절을 가장해 수많은 피해자를 만듭니다. 당신은 제게 친절을 베풀 이유가 없고, 그렇기에 저도 그 친절을 마음 편히 받을 수가 없는 겁니다.”

노먼은 얼이 빠졌다. 사기? 이 기계가 진심인가?

물론, 틀린 얘기는 아니었지만 이건 근래 들은 말 중 가장…. 가장 싸가지없는 단어 선택이었다. 만약 상대가 인간이었다면, 아니 적어도 상식이 탑재된 안드로이드였다면 곧바로 엉덩이를 걷어차 내쫓았을 것이다. 하지만 코너의 엉덩이에겐 천만다행으로, 이제 노먼은 코너라는 안드로이드를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였다. 이 기계는 지나치게 솔직했고 감정표현이 다른 안드로이드보다 훨씬 서툴렀으며 사회적 화술에도 지대한 애로 사항을 선보였다. 노먼은 벌써 걱정이 앞섰지만, 이러한 결정을 제안하고 쉽게 물리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수긍했다.

“그래요, 그럼. 대가는 당신의 노동력으로, 집세와 비교해 철저히 계산해서 받아낼게요. 나가기 전까지 제대로 관리해 줘야 할 거예요. 우리 집은 아주 비싼 곳이니까.”

“걱정마십시오. 지금 집 상태보다 다섯 배는 좋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제 집 상태가 어때서요? 물건도 많지 않고 다 제자리에 있는데요? 게다가 매일 청소기를 돌려서, 나름 바닥도 깨끗한 편인데….”

안드로이드는 본래의 담담한 얼굴로 노먼의 변론을 들었다. 하지만 노먼은 ‘깨끗’이란 말을 할 때, 코너의 콧등이 아주 미세하게 찌푸려지는 걸 똑똑히 봤다. 노먼이 말을 마치자마자 코너가 곧바로 받아쳤다.

“인간의 청결은 다분히 주관적인 기준으로 정의되죠. 하지만, 청결함의 척도가 높아질수록 쾌적함을 느낀다는 건 거의 모든 인간에게 통용되는 절대적인 사실입니다. 청소할 때 그 점을 감안하여 집안을 관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그건 맞긴 하지…. 노먼은 더는 이 기계와 사소한 걸로 말다툼하기 싫어서 그냥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았어요. 어디 한번, 안드로이드가 생각하는 청결의 기준을 보여줘 봐요.”

“그럴 생각입니다.”

몹시도 결연한 코너의 말에, 노먼은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저 기분 탓이라 여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리와요. 당신이 머물 방을 보여줄게요.”

코너도 일어나 그를 따라갔다. 노먼이 거실 벽에 난 스위치를 누르자 어둑한 안쪽 복도에 불이 환하게 켜졌다. 노먼은 방문 손잡이에 쌓인 먼지를 보고 겸연쩍은 얼굴로 헛기침했다.

“이쪽은 저도 안 들어간 지 오래라, 환기를 좀 해야 할 거예요. 그래도 여기가 제 방보다 넓으니까 봐줘요.”

코너는 방이 넓든 작든 상관이 없었다. 노먼이 문을 열자, 복도 불빛이 내부를 어슴푸레하게 밝혔고 코너는 노먼의 침실 구성과 거의 동일한 방 안을 마주했다. 노먼이 조명을 켜자 제법 넓은 침대가 곧바로 시야에 들어왔고 짙은 회갈색 프레임 위로 흰색 시트가 가지런히 덮여있었다. 옅은 베이지색의 나무 바닥재와 붉은빛이 감도는 참나무 협탁이 침대 옆에 놓였고 그 위로는 황동 재질의 스탠드 조명이 올려져 있었다. 맞은 편 벽면 전체에 설치된, 바닥재와 비슷한 색감의 미닫이문을 여니 붙박이장이 드러났다. 노먼이 말했다.

“옷이나 짐은 여기에 보관하면 돼요.”

코너는 텅 빈 옷장 안을 살폈다. 아래 수납장을 당기자 드르륵 소리와 함께 함이 부드럽게 열렸다. 그가 넣을 옷이라곤 유니폼 몇 벌 뿐이었지만, 개인 옷장이 있다면 매번 옷이 더러워졌단 이유로 사이버라이프를 찾을 필요가 없을 터였다.

노먼은 코너가 방을 구경하는 걸 보며 자리를 옮겨 커튼을 쳤고, 거실에서 본 것과 똑같은 디트로이트 전경이 드러났다. 노먼은 커튼에 쌓인 먼지에 작게 재채기했다. 그가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

“어때요? 전망 끝내주죠? 다른 거 다 제쳐두고, 이것 때문에 여길 선택한 이유가 커요.”

코너가 노먼의 옆에 나란히 서서 밖을 내다봤다. 맞은편 건물 사이로, 1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서 흘러가는 디트로이트강이 보였다. 검은 수면 위로 완벽한 구체의 보름달이 잔물결에 비쳐 반짝이고, 하늘 높이 뜬 달은 서쪽으로 약간 치우쳐져 있었다. 코너가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매우 익숙한 흰색 빌딩이 눈에 들어왔다. 연방정부 사무소는 불이 훤히 켜져 있는 채로, 원래라면 이 시각에 코너는 저기 있었을 것이었다. 코너가 노먼의 말에 긍정하며 대답했다.

“괜찮네요. 위치도 가깝고요.”

코너로선 전망이 좋고 나쁘고는 판가름하기 어려웠으나, 적어도 아무것도 없는 벽보다는 관찰할 게 많은 도시 풍경이 마음에 드는 건 사실이었다. 노먼은 뿌듯한 얼굴로 코너를 돌아봤다.

“쓰고 싶은 대로 편하게 써요. 가구나 소품을 들여도 되고. 여긴 이제 당신 방이에요. 방 건너편에 화장실이 있으니 거기서 씻고요. 혹시 더 필요한 거 있어요?”

코너가 고개를 가로젓다가, 다시 끄덕였다.

“계약서를 작성하죠.”

“계약서요? 뭔 계약서요?”

“제가 이 집을 관리하는 대가로, 당신이 제게 동거인의 자격을 부여한다는 계약서요.”

“평범한 룸메이트끼리 무슨 계약서가 필요해요?”

“모든 거래는 계약으로 묶여있어야 법적 효력을 발휘합니다. 그게 바로 이해관계란 것이고요. 계약서가 없다면 상대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갈등을 키우는 원인이 됩니다. 허술한 계약서 하나가 전쟁을 일으키고 여러 국가를 무너뜨리기도 하는 만큼, 계약서는 꼼꼼히 작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그냥 자취방에 들어오는 것뿐인데 뭔 전쟁에 국가 타령까지…….”

노먼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으나 안드로이드는 타협이 불가하단 얼굴로 노먼을 바라봤다. 노먼은 한숨을 깊게 내쉬며 마지못해 인정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그게 마음이 편하다면, 당신 좋을 대로 해요.”

인간의 동의를 받아낸 코너가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집에 개인 태블릿이 있나요? 제가 계약서 초안을 작성하겠습니다.”

"지금 바로요? 그냥 내일 해요."

코너가 멈칫하고는, 노먼을 의아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주무실 건가요?"

"아뇨."

"무언가 할 일이 있으신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그냥 귀찮아요."

머리를 갸웃거린 안드로이드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단 표정을 지었다.

"주무실 것도 아니고,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할 수 있는데 왜 내일 해야 하죠? 미루는 습관은 좋지 않습니다."

노먼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천장을 쳐다봤다.

"아니…. 하, 그래요. 지금 해요."

코너가 몸을 휙 돌려 거실로 발을 옮겼다. 노먼은 앞이 아주 살짝 깜깜해진 것 같다는 착각이 일었다. 그가 터덜터덜 안드로이드의 뒤를 따라가며, 또 한 번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노먼은 식탁에 앉아 코너가 태블릿에 손을 얹고 계약서를 써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코너가 몇 가지 조항을 제시하면 노먼이 대답하는 식으로, 계약서는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확인하고, 이 아래 서명하시면 됩니다.”

노먼은 태블릿을 받아 들고 빽빽한 계약서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맨 위에 적힌 <동거인 계약서>란 글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고, 아래로 수십 개의 조항이 기록되었다.

제1조: “노먼 제이든”은 집 전체의 청소와 관리를 “코너”에게 책임 전담 시행한다.

제2조: “코너”가 이 전조의 작업을 시행하기 위하여 소요되는 청소용품 및 소모자재는 “노먼 제이든”의 부담으로 한다.

제3조: “노먼 제이든”은 매월 발생하는 관리용역비를 대신하여, 침실2와 화장실 2의 권리를 “코너”에게 완전히 넘겨준다.

제4조: 거실, 부엌, 세탁실, 복도, 신발장은 “코너”와 “노먼 제이든”이 공용으로 사용한다. 모든 공용공간과 공용가구는 먼저 자리 잡은 사람이 그 자리를 뜰 때까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며, 리모컨을 쥔 사람이 TV 채널을 돌릴 권한을 차지한다.

여기까지 읽은 노먼이 미간을 올리며 물었다.

"안드로이드가 TV의 소유권을 주장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바로 머릿속으로 볼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방송사에 수신료를 지불하지 않는 이상 불가합니다. 고작해야 인터넷에 올라온 편집된 영상만 확인할 수 있어요. 자금을 조금이라도 확보해야 하는 시점에, 쓸데없는 데서 지출을 늘릴 순 없습니다. 그리고 이건 당신을 배려한 조항이기도 합니다. 제가 머릿속으로 영상을 스트리밍하는 동안 당신은 ARI를 사용할 수 없어요.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리모컨 넘겨줄 테니 그냥 TV로 봐요. 모든 방송국의 모든 영상, 당신이 보고 싶은거 전부 볼 수 있게 해줄테니."

노먼이 피로한 눈으로 다시 태블릿을 바라봤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페이지가 계속해서 이어졌고, 노먼은 지겨움이 가득한 얼굴로 마지막 항목까지 쭉 읽어 내려갔다.

제50조: “코너”가 관리 용역을 성실히 이행치 않을 경우, 또는 “코너”가 관리용역업 등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인정된 경우에는 “노먼 제이든”은 본 계약을 언제든지 해약할 수 있다. 단, 계약의 해지 시에는 정당한 사유와 증거자료의 제출이 필요하며 “코너”가 이를 인정하지 않을 시, 법 집행인 “리처드 퍼킨스”에게 승인을 얻어 시행할 수 있다.

제51조: 본 계약기간은 2039년 11월 1일부터 2039년 11월 30일까지로 하며, 추후 통보가 없으면 자동으로 연장된다. 일방적인 계약 해지 시, 해지 당사자가 상대에게 월세의 50%를 지급한다. 월세의 기준은 해지 당일의 부동산 시세로 결정한다.

계약서가 겨우겨우 끝에 다다랐고, 한차례 눈을 굴린 노먼이 손가락을 들어 제 이름을 휘날려 썼다. 코너가 태블릿을 받아 들고는 빙긋 웃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기계의 입매가 위로 한껏 올라간 것을 본 인간은 마음이 약간 싱숭생숭했다. 코너는 지금 정말 기분이 좋아 보였고, 노먼은 코너가 이런 표정을 짓는 걸 딱 한 번 목격했다. 자신이 안드로이드에게 FBI에서 함께 일하자 했던, 바로 그날.

하지만 이번엔 노먼이 마냥 친절을 베푼 것도 아니었다. 코너는 청소부터 설거지, 빨래, 정리 정돈 외, 집안의 모든 관리를 도맡아 하겠다 했고, 노먼은 집안일에 손 하나 까딱 안 하는 게 계약 조건이었다. 자신이 맡은 일을 노먼이 대신한다면 코너로선 온전하게 역할을 수행한 것이 아니니 동거인의 자격을 잃어버린다나 뭐라나…. 안드로이드는 별생각 없이 나름의 논리와 계산으로 이 항목을 적었겠지만, 이건 거의 반쯤은 제 목에 올가미를 건 협박과도 같았다. 다른 모든 것도 아닌 그 조건 하나가 노먼을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다.

노먼은 찝찝한 얼굴로 코너의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저도 잘 부탁해요.”

노먼과의 악수로, 계약 상대와의 의례까지 완벽히 마친 코너는 계약서 원본을 노먼과 본인의 메일로 전송하며 덧붙였다.

"편의상 계약 일자는 작성일인 11월 1일로 적었으나 제가 집에 방문한 실제 시각은 10월 31일 23시 57분입니다. 이 집에 머문 추가시간 3분을 입주 가정부의 시급으로 역산하면, 2달러 18센트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제가 노먼한테 지급해야 할 금액입니다.“

"됐어요. 그거 받아서 뭐에 써요."

코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뭐든지 확실한 게 좋습니다. 다만 저는 현금이 없으니, 비슷한 가치의 현물을 지급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코너는 몸을 살짝 뒤로 젖히고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코너가 팔을 빼 들어 노먼에게 막대 사탕을 내밀었다.

"현 시세로 3달러 63센트의 가치를 가진 제품입니다. 차액인 1달러 45센트만큼, 제가 오늘 제공해야 할 노동시간에서 분할 차감하겠습니다. 59초 동안 개인 휴식 시간을 가질테니 방해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면서 코너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미친 안드로이드. 노먼은 사탕의 포장지를 벗기면서 생각했다. 그는 벌써 후회 중이었다. 퍼킨스가 지금 이 상황을 봤다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언젠가 이 꼴이 날 줄 알았다며 노먼을 비웃겠지. 노먼은 체념한 얼굴로 파란색 사탕을 입안에 집어넣었다.

“오? 레몬인 줄 몰랐어요. 생각보다 맛있네요.”

노먼이 사탕을 혀로 굴리며 말했지만, 안드로이드는 대꾸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딱히 하는 것도 없어 보이는데 굳이 개인 시간이랍시고 노먼을 무시하는 게 뻔했다. 노먼은 방해하지 않고 옆에 앉은 안드로이드를 구경하며 사탕을 빨아 먹었다. 츕츕 거리는 소리가 이어지고 안드로이드의 미간이 아주 살며시 찌푸려졌다. 노먼은 계속해서 사탕을 핥았다. 코너가 드디어 눈을 뜨고 성가시단 어투로 말했다.

“조용히 좀 드십시오.”

“먹으라고 준 거잖아요?”

“시끄럽습니다. 소리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드세요.”

노먼은 황당하다는 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입안에 든 사탕 때문에 발음이 뭉개져서 나왔다.

“어떤 가정부 안드로이드가 고용인한테 이래라저래라 해요?”

“전 가정부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동거인입니다. 집세를 내기 위해 가정부 안드로이드의 일을 하는 것뿐이죠. 그러니 우린 수평적 계약 관계고, 제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지켜야 할 규칙을 세운 겁니다. 당신도 예외는 없어요.”

“…아. 그냥 없던 일로 할게요. 당장 내 집에서 나가요.”

“전 11월 30일까지 여기서 살 권리가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하려면 노먼이 제게 위약금을 물어야 해요.”

코너가 계약서의 마지막 조항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노먼이 콧등을 찌푸렸다.

“뭔 이런 악덕 판매원 같은…. 이제 보니 사기꾼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잖아.”

“문서에 서명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다음부턴 약관을 꼼꼼하게 읽어보십시오.”

노먼이 사탕을 으득, 깨물었다. 설탕 결정이 부서지며 안에 든 레몬 맛 당액이 흘러나왔다. 노먼은 대번에 시어진 입맛에 미간을 구기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걱정마요. 당신 때문에라도 그렇게 할 거예요."

쩝, 입맛을 다신 노먼은 시곗바늘이 4시를 가리키고 있는 걸 보며 크게 하품했다.

“계약서 작성도 끝났고, 세탁은…. 아직 좀 남았겠네요. 전 잠깐 눈 좀 붙여야겠어요.”

사탕의 색소 탓에 새파랗게 물든 노먼의 혀를 본 코너가 충고했다.

“양치는 하고 주무십시오. 당은 구강 건강에 치명적인 물질입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관리인님.”

노먼이 반쯤 감긴 눈으로 화장실로 향했다. 인간의 등을 가만히 지켜보던 안드로이드가 눈꺼풀을 내려 계약서 맨 밑에 적힌 두 개의 서명을 바라봤다. 그걸 보는 코너의 입가에 작게 미소가 맺혔다. 코너는 이내 태블릿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간이 씻는 소리가 욕실 문 너머로 들려왔다.

코너는 부엌과 거실의 조도를 낮추고 복도 조명을 희미하게 조절한 후, 처음으로 갖게 된 자신만의 공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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