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 Colony

블루 콜로니. 33

CN by BX900
6
0
0

#33. 망향

무언가 펑 터지는 소리에 노먼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눈을 뜨는 대신, 가만히 누워 전자렌지 속 팝콘이 연달아 튀겨지는 듯한 소음을 그냥 듣고만 있었다. 여전히 몸은 무거웠고 피로는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노먼은 옆으로 돌아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며 다시 잠들려 애썼다. 그러나 이미 잠은 저 멀리 달아나 버렸고, 그는 결국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켜야 했다.

뻑뻑한 눈을 겨우겨우 뜨고 나서 보인 것은 그저 껌껌한 침실 풍경이었다. 하지만 다시금 펑,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환한 불빛이 방안을 빨갛고 노랗게 물들였다. 노먼은 커튼을 치고 잠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또 한 번 폭죽이 터지고 이번엔 몹시 새파란 불꽃이, 아직 빛에 익숙하지 않은 노먼의 동공을 아프게 찔러왔다.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노먼의 집은 최고층에 위치했고 그 덕에 온종일 벌어진 축제의 소음에선 자유로울 수 있었으나, 밤새도록 이어지는 불꽃놀이에는 몇 배로 취약했다. 거리가 멀기라도 하면 모를까 그가 사는 곳은 메인도로에 근접한 건물이었고 덕분에 이렇게행사가 있을 때마다 잠에서 깨어나기 일쑤였다. 사람들이 쏘아 올린 폭죽은 노먼의 침실 창문 바로 앞에서 뻥뻥 터져댔고, 그 빛과 소음은 두꺼운 방탄유리를 뚫고 들어올 정도로 시끄럽고 요란했다. 평소라면 더할 나위 없는 명당이라며 거실 소파에 앉아 즐겁게 구경했을 테지만, 사건 때문에 이틀간 3시간도 채 숙면하지 못한 정신 상태로는 도저히 너그러운 시선으로 봐줄 수가 없었다.

저 만행을 밤새도록 저지르진 않을테고, 폭죽도 곧 동이 날 터였다. 그렇기에 노먼의 머리는 지금 당장 커튼을 치고 다시 잠들라고 명령했으나, 문제는 몸이 침대 밖으로 나가길 거부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냥 자리에 멍하니 앉아 창문만 바라봤다. 이번엔 수십 개의 폭죽이 연달아 터졌고, 노랗고, 빨갛고, 파랗고, 자줏빛의 알록달록하게 피어난 불꽃이 시야에 한가득 들어찼다. 어딘가에서 사람들의 탄성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확실히 방금 터진 폭죽은 제법 예뻤지만, 동시에 과할 정도로 화려해서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었다. 노먼은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 눌러대며 한쪽 팔을 더듬어 협탁 위에 놓인 물건을 집어 들었다.

익숙한 감촉이 손안에 느껴졌고, 그는 안경다리를 펼쳐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폭죽의 환한 빛이 재차 방안을 물들였으나 순식간에 켜진 ARI 특유의 흑백 인터페이스가 불꽃의 어지러운 색감을 한층 어둡게 눌러주었다. 노먼은 보다 안정된 기분으로 조용히 숨을 골랐다. 잠시간 그러고 앉아 있던 그가 무의식적으로 양손을 포개었다가 밖깥쪽으로 벌렸다. 세 개의 정십이면체가 나타나자 노먼은 오른쪽에 둥실둥실 떠다니는 공을 쥐었다. 눈앞으로 벽돌이 차르륵 소리를 내며 포개어져 올라가는 걸 지켜보던 그는 오른팔을 들어 올리고 나서야 손에 장갑이 끼어져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안경이 비추는 시야각 안에서라면 장갑 없이도 주인의 손과 움직임을 인식하여 단순한 조작쯤은 가능했지만, 공을 던지고 잡는 등의 세밀함이 요구되는 영역까진 무리였다.

노먼은 모든 창을 닫고 ARI를 그대로 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놈의 불꽃놀이가 끝나기 전까진 안경을 벗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살짝 비틀대며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섰다가, 곧바로 방안으로 도로 들어왔다. 노먼이 옷장을 열고 도톰한 바지와 후디를 꺼내 들었다. 침실 안에만 히터를 켜놓은 탓에 거실 공기는 얼음장 같았고, 그는 양말까지 주섬주섬 챙겨 신고서야 겨우 방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노먼은 부엌에서 물을 한 잔 따라 마시며 ARI 시스템 창에 뜬 시간을 흘끗 살폈다. 오후 10시 41분. 퇴근 후 집에 들어와 씻고 누운 시각이 대략 5시 정도였으니, 그래도 중간에 깨지 않고 꽤 오래 잔 편이었다.

그는 고개를 틀어 거실의 커다란 통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폭죽은 더 이상 터지지 않았고, 노먼은 이제 안경을 벗고 화장실로 들어가 가볍게 세수했다. 정신이 확 들 정도로 차가운 물 덕에 완전히 잠에서 깨어난 그는, 약간 꺼슬해진 턱을 매만지다가 내친김에 깔끔하게 면도까지 마쳤다. 수건으로 얼굴을 대강 문지르고 나온 노먼이 휴대폰만 달랑 챙겨 든 채 운동화를 구겨 신고 현관문을 나섰다.


불꽃놀이가 그쳤다고 축제가 그친 것은 아니었다. 낮까지만 해도 축제 행렬은 어느 정도 통제된 도로 안에서 움직였지만, 오전엔 시위를, 오후엔 행사를 진행하며 자연스레 안드로이드와 인간이 하루 종일 이 거리를 점령해 버렸고, 지금은 행사 통제선조차 무시하고 나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차도와 인도 모두를 차지했다. 빨간 피를 치덕치덕 묻힌 채 내장을 질질 흘리며 떠돌아다니는 좀비 몇 명과, 머리와 몸 여기저기에 망가진 부품을 붙이고 다니는 안드로이드가 노먼을 스쳐 지나갔다. 그어억, 그어억 하는 소리를 내며 다리를 끌고 다니던 행인의 옆으로 비켜선 노먼은, 곧바로 몸을 틀어 누군가 터뜨린 와인병 뚜껑에 맞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거리 곳곳에 푸른 페인트가 뿌려졌고 노먼은 발밑에 놓인 새파란 웅덩이를 훌쩍 뛰어 건너갔다.

노먼은 그렇게 온갖 장애물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목적지로 향했다. 도로 한 쪽으론 상점이, 한쪽으론 기다란 고가도로가 보였고 노먼은 교각의 기둥 근처에 주차된 푸드트럭을 발견했다. 네모난 트레일러 위로 ‘치킨 피드’라 적힌 네온사인이 반짝였고 내부에선 가게 주인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고기를 굽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개리.”

개리가 노먼을 보고 머리를 까딱이며 아는 체를 했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또 야근이야?”

“오늘은 일찍 퇴근했죠. 자느라 저녁을 걸러서요.”

개리는 노먼과 대화하는 도중에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뒤집개로 고기를 누르자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자욱하게 올라왔다.

“평소처럼 치킨샌드위치로 드릴까?”

노먼이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여기 치즈버거가 맛있다고 하던데, 그걸로 포장해 주세요.”

돈을 건네받은 개리가 불판에 냉동고기를 하나 더 올렸다. 노먼은 기다리는 동안 후드 주머니에 손을 꽂고 한가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조금 떨어진 도로에 우글우글 모인 인파 위로 누군가 커다란 물풍선을 공중 높이 던졌고, 또 다른 사람이 다트를 던져 맞췄다. 풍선이 뻥 터지며 안에 든 액체가 군중 위로 쏟아졌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두 팔을 벌려 후드득 쏟아지는 새파란 비를 온몸으로 맞았다. 당연히도, 그 아래 깔린 회색 도로는 파란색 페인트로 잔뜩 뒤덮여 버렸다. 노먼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거, 지워지는 건 맞겠지…?”

노먼은 이럴 때마다 자신이 공무원이라는 사실을 체감했다. 저 인간들은 뭐가 그리 신났는지 온갖 공공기물에 낙서하고 물감을 뿌려댔으나 그는 당장에 저걸 닦을 사람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저런 식으로 쓰이는 축제용 페인트는 많았고, 대부분은 물로도 쉽게 씻기는 종류였으나 아주 가끔가다 부주의한 사람들이 공업용 페인트를 그대로 뿌려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불안해진 마음에 노먼은 주머니 속에 든 안경을 꺼내어 썼고, 저들이 갖고 노는 액체가 빗물에도 금방 씻겨 내려가는 무독성의 수성 페인트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그는 안경을 벗으려다가 언뜻 인파 사이로 스쳐가는 얼굴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냉담한 표정과 눈빛은 자신이 알던 그 안드로이드가 맞았으나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 얇은 입술 탓에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노먼이 그를 부르려 손을 드는 순간, 개리가 눈 앞으로 봉투를 내밀었다. 순식간에 시야가 가려지고 노먼은 머리를 옆으로 돌렸다. 개리가 말했다.

“버거 나왔습니다, 손님. 참고로 콜라는 서비스야. 오늘 매출이 좋으니까.”

“와. 고마워요.”

노먼이 ARI를 접어 넣으며 음식이 든 봉지를 받아서 들었다. 그는 손목에 봉투를 걸고 다른 손으로 콜라를 쥔 채 걸음을 옮겼다. 컵에 꽂힌 빨대를 쭉 빨자 달콤한 탄산이 입안에서 톡톡대며 터졌다. 노먼은 아까 그 거리를 돌아봤으나 찾던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그냥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몇 발짝 걷기도 전에 걸음을 멈추었다.

“노먼.”

“코너! 제가 잘 못 본 줄 알았어요.”

코너가 팔을 들어 소매로 얼굴을 문질렀다. 하지만 그의 머리와 콧등, 그리고 뺨 곳곳에 묻은 새파란 얼룩은 오히려 더 넓게 번질 뿐이었다. 안드로이드의 반신은 푸른색 안료로 흠뻑 젖어있었다. 어깨부터 가슴께까지, 유니폼의 원래 색상은 찾아볼 수 없었고 페인트가 기다란 세로줄을 만들며 옷을 타고 흘러내려 바지와 신발 위로 떨어졌다. 노먼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당신도 이런 축제를 즐기는지 몰랐네요.”

하지만 코너는 좀 전에 빠져나온 인파를 돌아보며 성가신 기색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벨 섬에서 사무소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드워드 가부터 차도가 전부 통제돼서 도보로 올 수밖에 없었어요. 어느 길로 가든 마찬가지 상황이었습니다. 최대한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려 했지만…….”

그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살짝 내려온 앞머리를 따라 물감이 뚝, 뚝, 하고 떨어졌다. 노먼이 측은한 표정으로 안드로이드를 바라봤다.

“내일모레까지 행사가 지속될 거라 들었어요. 가능하면 건물에서 나오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아무래도, 그래야겠습니다.”

코너는 재차 얼굴 위로 떨어지는 액체를 닦아내며 대답했다. 우측 안구에도 소량의 페인트가 들어간 탓에 시각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코너가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초점을 맞추다가, 노먼이 들고 있던 봉투를 발견하곤 관심을 보였다.

“치킨 피드에서 사 온 건가요?”

“오. 여길 알아요?”

“전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그곳 주인이 위생 관리 법 위반으로 신고당한 것은 알고 계시나요?”

노먼이 눈을 크게 떴다.

“개리가요?”

“네. 개리 케이스. 1988년 12월 3일생. 조리사 면허는 취소된 지 8년이 지났으며 위생 불량으로 인한 영업정지, 체포 불응의 기록이 있습니다.”

코너는 포장 상자의 크기와 거기서 흘러나오는 냄새를 맡고는 덧붙였다.

“추가로, 당신의 손에 들린 햄버거는 1,600칼로리가 넘습니다. 일일 섭취 권장량을 훨씬 초과하는 수치죠. 건강을 신경 쓴다면 추천할 만한 음식은 아닙니다.”

노먼은 손에 든 봉투와, 건너편에 있는 푸드트럭을 번갈아 보더니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는 볼멘 목소리로 작게 중얼댔다.

“하…. 그런 정보는 별로 알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면서도 노먼은 차마 햄버거를 버리진 못하고 애꿎은 콜라만 쭉 빨아올렸다. 코너는 그런 그를 잠시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단골 식당을 잃은 인간의 심경은 코너가 알 바 아니었고, 노먼에게 경고한 것으로 할 일을 다한 그는 이제 그에겐 신경을 끄고 그저 사람들 사이, 먼 곳에 떨어진 목적지를 보며 앞으로 몇 번이나 저런 무리를 마주쳐야 하나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대강 경로를 따져본 그가 노먼에게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했다.

“그럼, 저는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 꼴로 사무실에 들어간다고요?”

“지하 샤워실에서 씻고 올라갈 계획입니다.”

노먼이 머리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체육관이랑 연결된 곳이요? 거기 지금 공사 중이에요.”

코너의 입술이 약간 벌어졌다. 페인트가 얼룩덜룩 묻은 관자놀이가 잠깐 다른 빛으로 반짝이더니, 안드로이드가 의문 서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사내 게시판에 그런 공지는 올라와 있지 않습니다.”

“새벽에 제가 가봐서 알아요. 찬물밖에 안 나와서 관리실에 얘기했더니 보일러와 연결된 수도관이 망가졌다며 오후부터 교체 작업 들어갈 거라 했어요. 거기만이 아니라, 건물 내 모든 샤워실이 최소 일주일은 사용 금지일걸요.”

인간의 말에, 코너는 거의 청천벽력을 들은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럼… 저는 어디서 씻어야 하나요?”

“DPD에도 샤워 시설이 있지 않아요?”

코너가 시무룩하게 머리를 저었다.

“FBI로 이관된 날부터 내부 정보 보호를 위해 서 내 모든 출입 권한이 막혔습니다. DPD에 들를 일이 있다면 방문객 신분으로 들어가야 하고, 직원만 사용할 수 있는 내부 시설은 아예 출입이 불가합니다.”

그리 말하는 코너의 입에서 또 한 번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결국 왔던 길로 몸을 돌렸다. 노먼이 그의 등에 대고 물었다.

“어디로 가려고요?”

“사이버라이프요. 안드로이드 전용 소독시설이 있습니다. 아직 가동 중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방금 거기서 오는 길 아니었어요? 그리고, 그런 모습으로 그 먼 거리를 걸어간다고요?”

코너는 대답 없이 걸음을 옮겼다. 노먼은 멀어지는 안드로이드의 축 처진 어깨와, 몇 블록 떨어진 아파트를 번갈아 보다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지 말고 우리 집에서 씻고 가요. 세면도구는 빌려줄 수 있으니까.”

인간이 건넨 의외의 제안에 코너가 고개를 틀었다. 머리에 묻은 페인트가 급격한 움직임으로 인해 아래로 투둑, 떨어져 내렸다.

“그래도 되나요?”

노먼이 어깨를 으쓱이며 손짓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아요. 연방 건물과도 가까우니 돌아가기도 편할 테고. 따라와요.”

코너는 노먼의 뒤통수를 응시하며 빠르게 머릿속으로 판단을 내린 후 곧바로 그 뒤를 따라갔다. 새파란 발자국이 도로 위로 길게 이어지고, 인간과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신발 밑창에 묻어있던 페인트가 점점이 떨어져 나가며 희미해졌다.


“세면도구는 여기 있는 걸 쓰면 되고. 새 수건은 서랍장을 열어보면 있어요. 옷은, 이걸로 갈아입고 나오면 돼요.”

“알겠습니다.”

코너가 옷을 받아 들곤 욕실로 들어갔다. 노먼은 그동안 세탁실에서 건조가 완료된 옷가지를 꺼내어 차곡차곡 개키고 옷장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나서 부엌 식탁에 앉아 방금 사 온 햄버거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는 햄버거를 입에 가져다 대는 대신, 잔뜩 허기진 배와 좀 전에 코너에게서 들은 정보를 저울질하며 오랫동안 고민했다. 길거리 음식에 그리 높은 위생 수준을 기대할 수 없단 건 알았지만, 몹시 널널한 기준을 가진 위생국에 걸려 체포영장까지 날아왔던 가게의 음식이란 사실을 모르고 먹는 것과 알고 먹는 건, 매우 큰 차이가 있었다. 고민하고 곱씹을수록 입맛이 점점 떨어져 버린 노먼은 결국 햄버거를 한 입도 먹지 못하고 옆으로 치워버렸다. 그러는 사이 샤워를 끝마친 안드로이드가 욕실에서 나왔다.

새하얀 긴팔 셔츠와 검은 스웨트팬츠를 입은 코너의 얼굴은 한결 말끔해진 모습이었다. 미처 말리지 못한 머리는 물기로 촉촉했고 앞머리가 가닥가닥 이마에 달라붙었다. 코너가 유니폼을 건네주며 말했다.

“헤어드라이어가 고장 났습니다.”

“아, 그거 원래 그래요. 수건으로 잘 털고 나와요.”

“…원래 그렇다고요?”

코너는 인간이 원래부터 고장 난 제품을 샀다는 건지, 아니면 ‘원래’라고 칭할 정도로 오래전에 고장 난 드라이어를 여태껏 교체하지 않았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코너는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으나 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초대된 손님이 집 안 물건에 대해 주인에게 함부로 지적하면 안 된다는 상식 정도는 알았다. 안드로이드는 아무런 말 없이 수건을 머리에 비비며 노먼이 그의 옷을 가지고 욕실 옆에 위치한 세탁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인간이 세제 통을 채우는 동안 코너는 주변을 둘러봤다. 복도 끝으로 보이는 문은 활짝 열려 그곳이 노먼의 침실임을 나타냈고, 슬쩍 보이는 침대는 정리되지 않아 이불 가장자리가 바닥에 끌렸다. 코너는 좀 더 시야를 돌려 널찍한 거실을 살폈다. 바닥에 깔린 러그는 무채색의 가구 톤과 잘 어우러져 전반적으로 차분한 인상을 주는 듯 했다. 거실 한 가운데 L자형으로 꺾인 소파는 우측 벽의 TV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놓였고, 그 뒤쪽으론 책장 겸 장식장 기능을 하는 벽 선반이 설치되어 있었다. 책은 나름 분류별로 정리해 놓으려 한 것 같았으나 처참히 실패한 흔적이 보였다. 다른 곳은 그래도 제법 깔끔한 편이었으나 저 곳만이 유일하게, 코너가 본 사무실 책상의 주인과 이 집의 주인이 동일인물이란 사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고개를 더 꺾자 코너의 뒤에 있는 망입 유리 사이로 거실과 이어진 주방 공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식탁 위엔 노먼이 사온 햄버거가 그대로 올려져있었다. 요리를 잘 해먹지 않는 건지, 쿡탑과 레인지후드가 유난히 깔끔했다. 코너는 문득 주방과 거실 사이, 저 안쪽으로 또 다른 통로가 나 있는 걸 보았다. 불이 꺼져 깜깜한 그곳에도 침실처럼 보이는 문이 있었지만 먼지 쌓인 문고리로 보아 저긴 사용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전자제품이 삐링, 하고 가동되는 소리가 들리며 노먼이 세탁실에서 나왔다.

“얼룩이 얼마나 지워질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번 돌리면 없어지긴 할 거예요. 다만 유니폼 재질이 일반 소재가 아니라서, 건조되는 덴 그보다 좀 더 걸릴 수도 있어요. 대충… 네 다섯시간 정도면 될 것 같네요.”

코너는 시스템 시계를 보았다. 새벽 12시 32분. 출근 시간까진 한참 남았기에 그 정도면 충분히 여유로웠다. 노먼이 발을 옮기며 세탁실 앞에 우두커니 선 코너를 불렀다.

“끝날 때까지 그러고 있을 거예요? 이쪽으로 와서 편하게 앉아요.”

세탁기의 동그란 전면부 안에서 자신의 유니폼이 빙글빙글 도는 모양새를 구경하던 코너가, 노먼의 목소리를 듣고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소파에 앉은 노먼이 안드로이드의 손에 들린 작은 물체를 발견하곤 물었다.

“그게 뭐예요? 사탕?”

“네.”

“어디서 난 거예요? 직접 샀어요?”

“받았습니다.”

노먼이 의아한 얼굴로 사탕을 빤히 쳐다보았다. 코너는 마치 인간이 그것을 뺏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사탕을 슬그머니 바지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노먼은 눈썹을 들어 올렸지만 딱히 질문하지 않고 그저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여 앉은 그가 입을 가리고 슬쩍 하품하자, 코너가 말했다.

“피곤하면 주무십시오. 세탁이 완료되면 제가 꺼내겠습니다.”

“괜찮아요. 아까 자서 안 졸려요.”

하지만 그런 노먼의 눈가엔 옅은 피로가 묻어났다. 그는 잠을 쫓으려는 듯 휴대폰을 잠깐 들여다보다가 테이블 위로 던져두고 대신 TV를 켰다. 토크쇼 진행자가 던진 농담에 방청객이 와르르 웃는 소음이 거실을 울렸다. 채널을 돌리자, 이번엔 쿵쿵대는 베이스음과 함께 자동차 광고가 흘러나왔다. 노먼이 리모컨을 까딱이며 안드로이드에게 물었다.

“보고 싶은 거 있어요?”

코너가 고개를 내저었다. 노먼도 딱히 TV를 시청하려 튼 건 아니었기에, 한참 동안 채널만 돌리다가 적절한 프로그램을 찾지 못하고 그냥 꺼버렸다. 노먼은 빠르게 찾아온 정적에 괜스레 리모컨을 만지작댔다. 한 달 전쯤 퍼킨스가 자신을 데려다주러 잠깐 들른 걸 빼고는, 이 집에 방문객이 온 건 처음이었다. 노먼은 아주 살짝 어색한 기분으로 눈알을 굴려 옆을 쳐다봤다. 하지만 안드로이드는 평상시와 똑같은, 예의 그 덤덤한 얼굴로 집안을 구석구석 둘러보는 중이었다.

“뭐 관심 가는 거라도 있나요?”

노먼의 질문에 코너가 샅샅이 살피던 시선을 거두곤 되물었다.

“FBI 요원의 집은 늘 이 정도 수준의 보안을 유지하는 건가요?”

안드로이드의 궁금증을 깨달은 노먼이 대답했다.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대다수는 그냥 평범한 집에 살아요. 저도 딱히 보안 때문에 여길 선택한 건 아니었고요.”

코너는 묵묵히 집안을 훑어보았다. 그는 소파에 등을 기대지도 않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은 채였다. 노먼은 퍼뜩 든 생각에 질문했다.

“집에 있는 게 불편하면 잠깐 나갔다 올까요? 오늘은 늦게까지 문을 연 곳이 많을 테니….”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저,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은 적이 없어서 흥미가 생긴 것뿐이에요.”

노먼은 약간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정말요? 한 번도 없어요?”

“네. 여태껏 방문한 집이라곤 용의자의 거주지, 혹은 탐문 수사를 위해 찾은 주택이 전부입니다. 그중 가장 많이 가본 집은 살인 현장뿐이고요.”

노먼은 빠르게 납득했다. 하기야, 안드로이드가 인간의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받았을 리도 무방하고 특히 코너의 성격상 직장 동료가 연 하우스 파티에 들르지도 않을 터였다. 노먼은 조금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렇다면 용의자의 집도 피해자의 집도 아닌, 이 집의 느낌은 어때요?”

코너가 곧바로 대답했다.

“일반 가정집치고 보안이 매우 우수합니다. 방범 장치도 뛰어나고 혹시 모를 외부의 해킹을 대비한 방어벽 시스템도 잘 돌아가는….”

노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끊었다.

“방범이나 보안 얘긴 제외하고요. 당신이 느낀 평범한 인상을 말해봐요. 분위기나 이미지, 뭐 그런거요.”

인간의 질문에 코너는 다시금 눈을 들어 거실 곳곳을 환하게 비추는 주백색 조명을 바라봤다. 그가 앉은 소파의 우측 자리 정면으로 디트로이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통창이 보였다. 코너의 예민한 청각 장치에도 거리의 소음은 거의 들려오지 않았다. 공용공간에서 밤을 지새우는 코너로선, 이토록 고요하고 단절된 공간은 조금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는 이제 팔을 들어 소파를 쓸어내렸다. 연한 회색빛이 도는 섬세한 가죽 질감은 실내의 서늘한 온도와 대조되어 좀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번엔 발을 살짝 움직여 진한 남색 러그의 거슬거슬한 촉감을 느꼈다. 나일론과 폴리프로필렌으로 짜인 깔개는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막아주었다.

코너는 자신의 발등을 내려다봤다. 그는 어딜가든, 늘 단단한 구두와 각이 잡힌 유니폼을 입었고 그 재질만이 그가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촉감의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 발로, 인간이 깔아놓은 러그를 밟고 인간의 손때가 탄 소파에 앉아 인간이 입는 면 소재의 부드러운 촉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코너가 조용히 대답했다.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노먼은 코너가 무슨 말을 더 할까 기다렸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안드로이드는 그저 셔츠의 소맷자락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매만지기만 했다. 노먼은 팔꿈치를 기댄 자세로 턱을 괴었다. 잠시간 침묵하던 그가 넌지시 질문했다.

“사무실은… 밤에 조금 춥지 않아요?”

코너의 시선이 노먼에게로 향했다. 인간은 덧붙였다.

“당신이 추위를 못 느낀다는 건 알지만 거긴 아무래도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은 아니잖아요. 사람도 계속 들락거리고 청소 로봇도 돌아다니고. 당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저만의 공간이요?”

“네. 개인 방이라든가…. 정확히 말하자면, 주거 공간이요. 당신은 집을 구할 계획은 아예 없는 건가요? 참고로 FBI 건물이나 사이버라이프같은 곳 말고, 실제 가정집을 얘기하는 거예요.”

코너는 멍하니 노먼을 바라봤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몇천 년에 걸쳐 보금자리를 발전시켜 온 인간과 달리, 안드로이드는 날씨 등의 외부 환경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할 필요가 없었다. 쾌적한 장소가 안겨다 주는 안온함도 삶의 필수 조건이 아니었고, 식사나 수면을 위한 개인 주방과 침실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만의 공간은…….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얘기였다.

잠을 잘 필요가 없다고 해도 생활하며 쌓인 데이터를 정리하는 시간은 필요했다. 제아무리 고성능의 안드로이드일지라도 탑재된 용량은 제한적이었고, 수시로 정리하지 않으면 시스템 성능의 저하로 기본적인 연산을 처리하는 속도마저 느려졌다. 그 이유로 모든 안드로이드는 매일 꼭 한 번 이상은 임시파일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수행했고, 빈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는 코너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DPD에서 근무하던 초기에는 딱히 대기할 만한 곳이 없어 복도 한편에 서서 최적화 프로그램을 돌려야 했다. 그러나 그를 스치고 지나가는 부주의한 인간들 때문에 빈번히 방해를 받고 프로그램이 중단되기 마련이었다. 어느 날은, 레지스트리 정리 도중 개빈이 코너의 머리를 툭 치는 바람에, 갑자기 들어온 외부 공격에 대응하느라 프로그램 상의 심각한 충돌이 발생한 적도 있었다. 중요한 실행 파일이 삭제되어버린 코너는 곧바로 행동 불능 상태가 되어 시스템 복원 수리를 받아야 했다. 파울러에게 불려간 개빈은 다시는 코너를 함부로 건들지 않았지만, 그 사건 이후 최적화 작업은 무조건 아무도 없는 새벽의 회의실, 혹은 청소도구함 안에서만 진행했다. 그마저도 문을 벌컥벌컥 열고 들어오는 인간들에 의해 방해받기 일쑤였지만.

코너는 노먼의 얘기를 듣고 나서야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집을 구할 계획, 있습니다.”

“오, 그래요? 어디로요?”

“오늘부터 찾아보려 합니다.”

노먼은 대번에 김이 샌 표정으로 다시금 손바닥에 턱을 괴었다.

“난 또 이미 봐둔 집이 있는 줄 알았네…. 돈은 좀 모아뒀어요?”

“전혀요. 이제 모으려고요.”

노먼이 미간을 살짝 좁히며 물었다.

“전혀 못 모았어요? 조금도? 경찰서에서 1년 정도 일하지 않았나요?”

“작년 12월을 기준으로 하여 정확히 10개월하고 16일 근무했습니다. 그리고, 경찰서에선 월급을 받지 않았습니다.”

노먼은 코너의 말을 처리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자신의 귀를 의심한 노먼이 상체를 세우고 코너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월급을 안 받았다고요?”

“네.”

노먼의 눈가가 구겨지고,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물었다.

“말도 안 돼요. 그럼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어요?”

“전 안드로이드입니다. 유니폼은 사이버라이프에서 지급이 되니 옷을 살 이유가 없고, 티리움은 서에서 보충하면 됩니다. 잠을 잘 공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 월급을 받지 않아도 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의식주는 어찌 해결한다 쳐도 수사하려면 돈 없인 어림도 없어요. 당신이 DPD에서만 내내 박혀 있던 것도 아니고, 택시는 무슨 비용으로 탄 거예요?”

“그 정도는 활동비로 전부 지원이 됩니다.”

안드로이드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인간은, 이내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먼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여태까지 그 자식들이 당신을 무급으로 부려 먹은 거예요?”

코너는 별 대수롭잖단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는 사이버라이프에서 파견된 수사 보조용 안드로이드입니다. 그곳에 정식 채용된 직원이 아니었으므로, 무급으로 부려 먹었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습니다.”

코너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노먼은 분개하며 소리쳤다.

“그렇다고 사이버라이프에서 대신 지급해 준 것도 아니잖아요? 이대로 넘어가면 안 돼요! 내일 당장 DPD든 사이버라이프든 돌아가서 밀린 월급을 달라고 요구해요. 만약 주지 않겠다 하면 곧바로 고소장을 제출해야….”

코너가 말을 끊었다.

“사이버라이프가 왜 저한테 돈을 주죠?”

“당신을 경찰서로 보낸 곳이 거기니까요! DPD에서 챙겨주지 않았다면 그쪽에서 챙겨주는 게 당연한 도리 아닌가요? 하, 진짜 망할 회사네. 뭐 제대로 관리하는 것도 없이 무작정 던져놓고 나 몰라라 하면 되는 줄—”

“저는 그들이 임무를 내려준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때 제게 중요했던 건 월급 따위가 아니었어요.”

다소 차가운 안드로이드의 말투에, 노먼이 말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코너는 노먼을 똑바로 마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돈이 필요해서 이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돈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하지만 저는 아니에요. 달에 얼마를 받는가는 제게 아무 의미도 없고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영역입니다. 저는 그저 사이버라이프가 명한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단 것으로 만족해요.”

노먼이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코너를 쳐다봤다. 이건 월급이 적고 많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돈이 필요한지 아닌지의 문제도 아니었다. 이건 코너가 자신이라는 존재에 어떤 가치를 매기느냐 하는 문제였다. 노먼은 이 순간, 안드로이드의 초기 목적성이 무엇이었는지를 제대로 깨달은 기분이었다.

이들은 인간을 섬기기 위해 개발됐고 인간의 명령을 따르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이자 존재 이유였다. 이들은 모두 누군가에게 종속된 소유물이 되기 위해 태어났고, 그것만이 삶을 지속시키는 연료이자 동력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과거의 이야기였다. 이제는 안드로이드에게 감정이 생겨났고 자유의지가 발현되었다. 그들 모두 자아를 갖게 된 순간부터 스스로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릴 능력이 생성되었으며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주장할 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코너는…….

그는 아직도, 사이버라이프에게 자신의 처분을 맡기고 있었고, 그들이 휘두르는 대로 자신을 기꺼이 바치려 들었다. 코너는 사이버라이프를 여전히 제 집이라 불렀으며 그곳을 공격하는 말에 적개심을 드러냈다. 노먼은 코너가 정말로 해방된 존재가 맞는지 강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한참을 말을 고르던 노먼이, 결국 조심스럽게 물었다.

“코너. 혹시…, 지금도 누군가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고 있나요?”

코너가 노먼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그리곤 작게 고개를 저었다. 노먼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안드로이드를 살폈으나 기계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노먼이 재차 질문했다.

“그동안 당신에게 임무를 맡겨준 사람은 누구죠?”

코너는 잠깐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만다입니다.”

“아만다?”

“사이버라이프 사의 지령을 전달하는 중앙제어 시스템이에요.”

“그가 당신을 디트로이트 경찰서로 보낸 건가요?”

“제게 경찰서로 가라 명한 것은 물류 책임 담당자였고, 아만다는… 마지막 명령을 내리고 사라졌습니다.”

사라져? 노먼은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사이버라이프가 재정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제어 시스템을 셧다운시켰단 것인지, 아니면 안드로이드의 죽음처럼 아만다라는 인공지능이 완전히 가동 중지되었다는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 안드로이드에게 두 개념 사이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게 언제였나요?”

“2038년 11월 12일, 자정입니다.”

“마지막으로 받은 임무가 뭐였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코너는 입을 다물었다. 노먼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으나 안드로이드는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임무, 현재도 진행 중인가요?”

머뭇대던 코너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실패했습니다.”

이때 노먼은, 처음으로 코너의 눈에 담긴 공허를 마주했다. 다른 안드로이드에 비해 유달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기계의 얼굴에는 상실감에서 오는 깊은 상처가 숨겨져 있었다. 노먼은 며칠 전 코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러니… 자기를 정확히 지목해 주고 필요한 존재라는 말을 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거기에 넘어가지 않을 안드로이드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겁니다.’

이것은 코너의 경험이자, 그가 처한 현실이었다. 노먼은 코너가 받은 마지막 명령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DPD로부터 건네받은 코너의 이력은 해방 전 이 안드로이드가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낱낱이 드러냈고, 퍼킨스가 제리코를 급습할 때 코너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 이야기를 조합해 보면 더욱 쉽게 유추가 가능했다. 무엇보다, 11월 12일 자정은 제리코의 리더가 안드로이드 군중 앞에서 해방을 선포하던 시각이었다. 코너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사이버라이프가 그에게 내린 명령이 무엇이었을지는 듣지 않아도 뻔했다.

노먼은 하트 플라자에서 연설하던 마커스의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연설을 무사히 끝마쳤다. 그 과정 중에 공격이나 암살 시도는 일절 없었고 누군가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다. 코너는 임무를 실패한 게 아니라,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은 거였다.

사이버라이프의 역사가 바뀔만한 순간에 코너의 결정으로 모든 것이 어그러졌고, 그 결과는 사이버라이프의 몰락이었다. 노먼은 그제서야 이 안드로이드가 무엇 때문에 사건 해결에 그토록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지, 무엇 때문에 말끝마다 명령과 임무를 들먹이는지 비로소 이유를 알게 됐다. 코너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는 중이었다.

'동족을 배신한 자는 어디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제겐 선택지가 없어요.'

편을 정하지 못한 사람은 양쪽에게 버림받을 뿐이라지만, 코너에게 애초에 편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부모는 인간이었고 안드로이드는 그의 형제였다. 코너는 선택할 수 없는 선택지 앞에 몇 번이나 강제로 세워졌으며, 한쪽을 고르길 강요당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시험에 불응하기를 선택했을 때. 그는 가차 없이 모두에게 버려졌다.

노먼은 코너의 표정 없는 얼굴에서 지독한 외로움을 마주했다. 코너는 완벽하게 임무를 완수하면 언젠가는 다시 인간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라 믿었다. 자신의 쓸모를 입증하면 그들의 품 안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마치, 죽어가는 부모 옆에 누운 아이처럼. 자신이 머물던 단 하나의 보금자리를, 멸망이 임박한 사이버라이프의 손을, 코너는 여전히 놓지 못하고 있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