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혼녀가 있는 정환이형

모브녀와 약혼한 정환이형(집안끼리의 약혼느낌으로)

우리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다. 비호감과 호감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호감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관계긴 하지만 그렇다고 편하게 말을 주고 받고 시간을 보낼 사이는 아니라는 얘기다.

"그래서, 어쩔건데?"

그러니까.

"어쩔꺼냐고 이정환."

이런 걸 볼 정도의 사이는 아니라는거다.


윤대협의 일과는 이랬다. 연습, 경기, 그리고 낚시. 간간히 잠도 채워주고···그게 능남고 안에서든 타학교든 똑같았다. 친선경기를 마치고 악수와 함께 뒷풀이를 말하는 사람들을 냅두고 나간 이유란 그랬다. 불편해서 피한 게 더 불편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만들 줄 알았더라면 절대로 안나왔을 거라며 후회했다.

"왜 말을 못해?"

평상시 듣는 낮고 울리는 고함소리가 아닌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높게 찌르는 음성이 한 사람을 향해 매섭게 몰아쳤다. 검은 긴 생머리에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여학생에게 아무말도 못하고 서 있는 남자는 여학생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컸다. 거기다 햇볕에 그슬린 피부는 누가 보면 남자가 여학생을 해코지하는 게 아닐까싶은 걱정이 들 수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다행히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인적이 드문 으슥한 골목이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인적이 드문 장소를 찾는 사람이 그들뿐만은 아니었다는 점.

벽에 기대서 여학생을 내려다보고 있던 남자는 불꽃처럼 쏘아보는 눈동자가 부담스러웠는지 시선을 피했다. 갈 곳 잃은 남자의 눈이 이리저리 돌다 골목 사이로 삐쭉 튀어나온 머리통을 발견하고 말았다. 모르는 사람의 머리통이었다면 좋았을텐데, 잔디처럼 뾰족하게 올라온 머리는 흔하지 않았고 높은 담장을 겅중 넘어 머리통이 보일 정도의 장신은 하물며 더

"하아...나중에 얘기하자."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여학생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무척이나 친숙해보이는 손짓이었고, 그걸 받은 여학생도 익숙한듯 남자의 손을 내버려두고 깔깔대며 웃었다.

"너 방금 쓰레기같이 말한 거 알아?"

"제발."

"이정환의 입에서 '제발'이라는 소리까지 듣고 나도 출세했네?"

남자는 어깨에 올린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여학생은 불퉁한 말을 쏙 집어넣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짧은 시간에 여학생은 남자가 찾았던 그 '머리통'을 발견했다. 여학생의 몸이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멀리서보면 마치 포옹을 하는 것처럼 그만큼 가까이 붙어있었다. 높고 낮은 목소리는 웅얼거림으로, 속삭임으로 바뀌어갔다. 타닥 타닥 가벼운 발소리가 골목으로 점점 가까워졌다. 

"저기요- 어머."

모퉁이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민 여학생은 청순한 긴 생머리의 미인이었다. 본의아니게 두 사람에게 대화를 엿들은 사람이 된 잔디머리에 장신인 삐쭉 머리통의 주인은 제 뒷머리를 긁으며 골목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하...엿들을려는 건 아니었는데요."

"…그러니까 나중에 얘기하자고 했잖아."

윤대협은 남자를...처음보는 얼굴로 이쪽을 보는 이정환을 아는 척 해야하는지 고민했다. 고민하기가 무색하게 이정환은 윤대협을 보고 흠,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걸 본 여학생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는 사람?"

"능남 윤대협."

"아아~ 그."

'그?' 그게 뭔데.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화제가 돌려지자 윤대협은 불편한 내색을 숨기지 못했다. 단 몇초였지만 그랬다.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겠지. 다시 웃는 낯으로 돌아온 윤대협이 작별인사를 하려할 때 였다.

"비록 경기는 못갔지만 친구들한테도 듣고 쟤한테도 들어서 궁금했는데~ 팬이에요 윤대협 선수!"

아. 익숙한 겉치례로 무장한 여학생은 수줍게 웃으며 윤대협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인기 에이스 선수는  그 손을 잡고 흔들었다. 악수가 끝나고도 여학생은 윤대협의 앞에서 조잘거렸다. 청순한 미인께서는 작은 새와 같이 귀엽고 말이 많았다. 여학생의 말을 한귀로 흘리고 있으니 언제 왔는지 이정환이 여학생을 어깨를 잡았다. 농구공을 쉴새없이 튕기고 쳐낸 손이 힘을 쭉 빼고선, 여학생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얘기 중이었잖아."

"그랬지. 근데 나중에 하자며?"

"아 그럼 저는 이만-"

이때다. 윤대협은 놓치지않고 빠져나가기 위해 이정환을 살폈다. 날 보내줘 이 불편한 자리에서 꺼내줘. 애타는 마음으로…이정환이 그런 윤대협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장 차이로 한참이나 작은 여학생이 볼 수 없던 무언의 사인은 윤대협을 살렸다. 인사도 했으니 가도 되겠지.

"그런 얘길 여기서 왜 해"

"그런 얘기? 너랑 내 미래인데 빨리 정해야할 거 아니야"

미래? 자리를 피하기 위해 빠릿하게 움직이던 다리가 멈췄다. 호기심은 고양이도 사람도 죽일 수 있다.

"무슨 미래까지"

이정환은 그런 윤대협의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어서 가라는듯이 쳐다보는 눈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약혼이 결혼되는 거 한 순간이야 이정환."

"에?"

아차, 실수…윤대협은 너무 놀란 나머지 쇼 프로그램의 관객처럼 얼빠진 소리를 내뱉은 입을 손으로 가렸다. 계속하세요. 윤대협의 눈동자는 그리 말했고 이정환의 눈동자는 여전히 단호했다. 가.

"그건 내가 아니라 네 집에 물어야지. 난 내 뜻 분명히 밝혔어."

팔짱을 끼고 여학생을 쳐다보는 이정환은 코트 위에서와는 사뭇 달랐다. 코트 위에선 그렇게 박력있게 달려들고 변수를 즐거워한 남자가 이 곳에는 한없이 단호하고 피곤해보였다. 이 불편한 자리를 떠나고 모르는 척 해야하는데 윤대협은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코트 밖의 이정환은 흥미로웠다. 불편함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정환은 그런 윤대협을 알아차린건지 아닌지 자기 말에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있던 여학생을 돌려보냈다. 뭐라고 말하려는 여학생을 꾸역꾸역 돌려보낸 이정환은 한참동안 아무말도 없었다. 

"자리 비켜드릴까요?"

윤대협이 떠나려한 건 그래서였다. 생각해보니 너무나 사적인 상황이었다. 반대로 자신이 이정환이었다면? 화가 났을지도 모르겠다고. 아무 사이도 아닌데, 오히려 이런 상황을 보여주고 싶지 않는 상대일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들키다니.

"지금? 왜?"

이정환은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윤대협을 보고있었다. 정말로 "왜 지금 비킨다고 하는건데?"하는 얼굴이었다. 윤대협은 되려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그러니까...불편할테니까요?? 아닌가요? 아닌가?'하며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바보같이 중얼거렸다.

"이미 끝난거니 뭐…"

"아-"

"왠만한 사람들은 알고있으니까"

"그래요?"

난 처음 알았는데…윤대협은 스스로 유치해지지않기로 했다. 그걸 말해서 어쩌려고? 진짜 어쩔건데.

"코트 밖에서 일어난 일을 코트 위에서 보는 녀석한테 보여줄 필욘 없지."

"그런가요?"

이정환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서 자길 보는 윤대협을 보더니 풋 하고 웃었다.

"그래. 반대로 생각해봐. 내가 네 사생활을 알면 얼마나 신경쓰이겠어"

"그래요? 신경 쓰여요?"

"그럼 넌 신경 안쓰여? 지금 이 상황."

"쓰이죠."

"그런거야."

"그런거구나."

한 뼘이나 큰 녀석이 자신의 말에 고개를 무작정 끄덕이는걸 보며 이정환은 코트 위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아직 어린 1학년과 노력이 빗은 2학년과 의지가 되는 자신의 3학년들이 보고싶어졌기 때문이다.

"비밀로 해요?"

아까 전 약혼녀와 이정환처럼 옆에 붙은 윤대협이 속삭였다. 이정환은 자신을 향해 눈동자를 굴리며 눈치를 보는 윤대협이 꽤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서 자신의 1학년에게 하듯이 손을 뻗어 머리를 꾹꾹 누르며 쓰다듬었다. 

"상관없지만, 아. 북산엔 말하지마라. 시끄러워질테니"

생각만으로도 시끄러운지 고개를 저은 이정환이 우두커니 서 있는 윤대협을 두고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간다. 나중에 보자 윤대협."

"네에..."

윤대협은 흐뜨러진 머리를 만지며 이정환이 사라진 골목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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