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혼녀가 없는 정환이형

1편 https://penxle.com/senmakilover/2009740324


그 날은 유독 건조하고 텁텁했다. 경기는 깔끔하게 끝났지만 마음 한 켠이 답답한 게 좋지 않을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정환의 눈 앞에 나타난 여자애는 낯익은 사람이었다. 기억을 더듬자 지금보다 더 조그만 여자애가 떠올랐다.

'싫어. 결혼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할거야'

'나도'

'흑발에 처연한 미인하고 할거라고!'

'그래'

'왜 자기들끼리 정하고 난리야!'

'그러게.'

그러면서 울어버렸지. 왜 다들 멋대로 정하는거냐며 둘이서 이런 저런 얘기도 했던 것 같다고 생각할 쯤

앞에서 억울하고 서운한 티를 내며 틱틱 거리는 모습이 이 애의 집에서 얘기가 나왔나보다.

어른들끼리 농담식으로 주고받은 말들이 이렇게까지 갈 일인가.

이정환은 이 여자애가 익숙했지만 여자애를 달래는 것엔 익숙하지 않았다. 가만히 들어주는 게 다였다. 불청객이 오지 않았더라면 여자애는 하소연 몇마디 더 하고 사과를 한 뒤 갔을 것이다. 날선 말을 주고 받을 필요도 없을거고…어차피 어른들이 지나가는 농담식으로 꺼낸 약혼이니 진짜로 하지도 않을테니까

예상치 못한 사람이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아니다 이건 핑계에 불과하다. 이정환은 어색한 침묵과 불편한 공기가 감돌았던 골목길을 지우고싶었다. 몸을 움직이면 사라지겠지. 

통, 통.

손 안에 잡히는 농구공이 무거웠다. 


주말이 오자마자 이정환이 한 일은 말 뿐인 약혼을 백지화하는 거였다. 어른들끼리 농담처럼 나왔더라도 두 사람의 인생을 맘대로 쥐는 건 옳지 못했다. 항상 뾰루퉁하게 바라보던 여자애의 얼굴이 무척 밝아졌다. '그동안 화풀이해서 미안해.' 라든가 '나중에 시합 보러갈게' 같은 말을 남기며 그 애는 옆자리에서 이정환을 지워냈다. 그 후 이정환은 며칠 뒤에 그 애가 누군가와 사귄다는 얘길 들었다. 그래서 그랬구나. 이정환은 소식을 전한 친구에게 고개만 까닥였다. 

집중하자 얼마 안남았어. 한바퀴만 더 돌면 끝이야.

근데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을 들었다. 왜 고양이를 죽여? 나쁜사람이네. 하고 넘겼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게 되기까지 윤대협은 오래걸리지 않았다.

시작은 별거없이 "어떻게 됐을까 두 사람은?" 하는 연속극 시청자같은 물음이었다. 그런 자신의 생각에 화들짝 놀라 다섯바퀴 돌 걸 일곱바퀴나 돌고 말았다. 윤대협은 속으로 괜히 손해봤다 손해봤어~하고 외치며 농구부가 모여있는 곳으로 설렁설렁 걸어가 치미는 궁금증을 지웠다.

머릿속의 8할이 농구 2할이 낚시여야 맞는건데.

윤대협은 0.1 정도에 불과한 궁금증이 몸이 쉴 때마다 살을 찌워가는 걸 느꼈다. 기초훈련시간마다 비집어 들어오고 물고기를 기다릴 때 날아들고 자기 직전에 슬그머니 나타났다. 

궁금증의 전제는 항상 같았다.

정환이형이 그랬다고?

코트 위의 이정환은 코트 위의 윤대협을 자극시키는 사람이었지만 코트 밖의 이정환까지 그럴리는 없었다. 그럴리는 없는데…윤대협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었다. 이불 속에 가려진 머리처럼 이 호기심도 가려지길 바랐다. 안타깝게도 그럴 일은 없었지만.

손가락에 난 거스러미처럼 한번 신경쓰기 시작하니 윤대협은 그 날이 계속해서 생각나고 거슬렸다.

우연찮게 만난 이정환을 보고 뇌를 거치지않은 말을 한 이유도 그러했다.

"형 괜찮아요?"

윤대협은 앞 뒤맥락없이 나온 말이 입 밖으로 나간 것에 놀랐다. 무의식적으로 입을 손으로 가리자 대답이 없던 이정환이 답해왔다.

"그렇지…?"

뭘 묻고싶냐는 듯 한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는 모습으로 되려 윤대협을 향해 물었다. 윤대협은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리며 나즉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뭔데?"

"제가 실수했어요."

그리고 작게 '실수라고 생각해요.' 하고 덧붙혔다. 가까이 붙어야 겨우 들릴 정말 작은 목소리로 

들은건지 못 들은건지 이정환은 시선을 살짝 위로 올리며 윤대협의 눈동자를 쳐다봤다.

" '그' 윤대협이?"

" '그' 윤대협은 뭐예요."

"그런 게 있어."

"뭔-데요-"

또 저렇게 말을 늘리네. 저번에도 그러더니 버릇인가? 그와 동시에 이정환은 윤대협이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 아닐거라 생각했다. 정말로 궁금했다면…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정환에게 번뜩 자신과 약혼녀(이젠 아니지만) 윤대협의 삼자대면이 스쳤다. 설마?

"혹시 물어보려던 게 사적인거냐?"

그 윤대협이 뭐냐고 알려달라고 하려던 윤대협이 움찔거리며 이정환의 옆에서 조금 떨어졌다. 변뎍규가 고생했겠네. 저렇게 숨김없이 사는 후배라니. 그런 점은 좋기도 하고 지금처럼 어색할 수도 있겠지만. 두 뼘만큼 떨어진 윤대협을 그대로 둔 채 이정환이 피식 웃었다.

"어디가서 거짓말은 못하겠네."

그러자 윤대협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이정환이 편한 얼굴로 있어서 였을까, 아니면 뚝뚝 떨어지는 음성에 미련 하나 보이지 않아서 였을까. 멀어진 거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래서…괜찮은거죠?"

윤대협은 아차 싶었다. 또 입을 가리기엔 몸의 반응이 늦었고 다시금 이정환이 윤대협을 향해 '왜?'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걸 입밖으로 소리내어 말하진 않았다. 그러게요 왜 그럴까요? 제가 왜 이러는 걸까요? 이정환에게 그렇게 묻고싶었으나 윤대협은 이것 또한 답은 찾을 수 없고 서로 의문만 품게 되는 이상한 질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뭐 그렇지."

똑같은 대답. 똑같은 온도. 길어지는 침묵… 평소 같았으면 이정환쪽에서 물꼬를 틀어 말하지만 지금같이 사적인 대화를 해본 적이 없는 사이여서 이정환도 적잖이 난감한 상태였다.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지 가늠되지 않았다. 해남 녀석들이라면 선의 정도를 알았는데 지금의 윤대협은 알아채기 어려웠다. 이정환이 자신이 변덕규였다면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할 쯤, 윤대협은 계속해서 실수를 눈감아주는 이정환의 태도에 점점 이성의 끈을 놓고 있었다. 여기까지 물어봐도 되는거야? 하면서

"그럼 결혼 하는거예요? 그분이랑?"

"뭐?"

아아닌가보다. 윤대협이 눈을 깜빡이며 놀란 티를 냈고 이정환은 황당하다는 얼굴을 지우지 않고서 말했다.

"그렇게까지 궁금해 할 사안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네가' 라는 주어가 빠진 문장은 상냥한 듯 보였지만 결국엔 선이었다. 농구 코트 위에 그려진 하얀 선처럼, 내가 그 선을 밟았구나 한번도 안했던 짓을 지금 해버렸구나. 윤대협은 안쪽이던 바깥쪽이던 선을 넘어가야한다고 생각했다. 골 밑을 지킬지 골을 노릴지 선택해야만했다.

"궁금해요."

그동안의 주춤거림은 이 때를 위해서였는지 능남의 에이스는 공격적이었다. 적어도 이정환이 느끼기엔 그랬다. 당황하고 떨어져서 뭔가 생각하더니 갑자기선을 넘어왔다. 심판이 없는 이정환의 코트에 불쑥 보지 못한 사람이 들어왔다. 호루라기 소리 대신 숨소리가 들렸다.

"형이 그사람하고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고, 형이 뭐했는 지 궁금하고…농구할 때 빼고 그게 계속 궁금해요."

"…"

"왜 이럴까요?"

"…"

"형은 알아요?"

이정환은 윤대협과 자신이 서 있는 이 곳이 농구 코트가 아니고 둘 사이에 공이 없다는 사실이 조금 아득했졌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라면 좋으련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윤대협을 쳐다봤다. 이미 확신에 그득 차 있는 눈동자는 열정적이고 무모했다. 

"글쎄"

그래서 그는 가장 손쉽고 무난한 대답을 골랐다. 잘모르겠다, 알 것같다. 이런 식으로 대답했다간 해일같이 뭔가가 자신을 덮칠 것 같았다. 지금만해도 알수 없는 긴장감이 꺼려지지 않았다. 이정환은 자신이 호루라기를 불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제가 알고 싶다고 하면…도와주실래요?"

"내가 어떻게?"

그렇게 대답하길 기다렸다는 듯 윤대협이 손을 쓱 내밀었다. 길쭉하고 하얀 사기같은 손이었다.

"형만 할 수 있어요."

"아닐 거 같은데."

공 없이 달려오는 윤대협이 해일처럼 몰아쳤다. 해일은 피해야하는데 이정환에게 피한다는 것은 곧

포기였다. 그는 한번도 피하지않았다. 포기하지않았다. 어떤 두려움이 닥쳐도 그 끝에는 찬란할 것을 알기에 그게 승리던 패배던간에 그에게 도피란 존재하지 않았고 어쩌면 이번에도…이번에도…?

 윤대협은 손 안에 느껴지는 감촉에 고개를 내렸다. 단단하고 거친 손이 맞잡고 있었다. 제왕 이정환이 피하지 않으면 해남 이정환도 피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엄지로 맞잡힌 손등을 슬슬 쓸자 아주 짧게 그 손이 떨렸다. 벌써부터 놓고싶지 않았다. 윤대협은 마음이 하라는대로 그 흐름을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기왕이면 상대도 그러길 바랐기에…며칠 간의 불면은 이걸로 퉁 칠 수 있었다. 그러고도 남았다.

"그래서 뭐부터 해야하지?"

이쪽이 거짓말을 못하는 윤대협이라면 그쪽은 알지 못하는 이정환일거라고 윤대협이 속으로 말했다.

이 말도 언젠간 하게 될거라고 여기며 아주 조금 얕은 수를 써보기로 했다.

"우선은…"

손 하나조차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붙은 윤대협이 이정환에게 속삭였다.

'형이 원하는 것부터, 그리고 다음엔 제가 원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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