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중진담

10년 사귄 중년 대협정환

이유 없는 소고기는 없다 했던가, 이정환은 그윽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무시하고 테이블 위의 스테이크를 바라봤다. 몇 번이나 거절했는데도 지금 너무 힘들다며 꾸역꾸역 불러낸 곳이 유명한 파인 다이닝 식당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그대로 가버렸어야 했는데…정환은 그동안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고 자신이 살 테니 부담 없이 먹으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형은 가끔 멍-할 때가 있어서 걱정이에요.’

 ‘누가 누굴?’

 ‘하하, 진짠데?’

 

  네 말이 맞았다. 이정환은 냅킨을 들어 입을 닦고 그대로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정환아, 별거 아니야 그냥~ 너도 외롭고, 나도 외로우니까 가끔 이렇게 밥도 먹고 놀기도 하잖거지.”

 

  정환이 보고 있지 않았는데도 상대는 제 할 말만 이어갔다. 결혼이 족쇄라더니 지금 딱 그 꼴이다. 너무 힘들다. 너 말고는 아무도 진심으로 대해주지 않는다. 뭘 하자는게 아니라 그냥 이렇게 서로 외로움을 달래는 것만 하자…같은 말도 안되는 소리를 정환의 앞에서 주절거렸다.

 

  “우리가 이제 38살인가?”

  “그래서- 응? 응. 그렇지.”

 

  이정환은 햇수를 세며 놀랐다. 38살. 내일 모레 마흔이라니. 어디선가 ‘그렇네요?’하고 별일 아니라는 듯 답하는 목소리가 떠올랐다. 정환은 냅킨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일어났다.

끼이익하고 바닥을 끄는 소음이 헛소리를 하는 입을 조용히 시켰다.

 

  “철 좀 들어.”

  “…뭐?”

  “결혼할 때 행복하게 잘 살겠다고 했을거아냐, 배우자는 네가 이러는거 알아? 관계가 무너졌으면 고치      려고 노력을 해야지, 결혼이 신성한 건 상대에 대한 신뢰로 평생을 약속하기 때문 아니냐?”

  “정환아. 나 더 이상은 그렇게 못살겠어서-”

  “그럼 헤어지던가. 이게 뭐하는 짓이야.”

  “…”

  “간다.”

 

  정환은 이 모든 상황이 우스웠다. 불륜하자는 기혼자에게 결혼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는 미혼남이라니. 그렇다고 화를 내기엔 올해 이런 일을 자주 겪었다. 불륜 권유는 처음이었지만, 결혼 직전에 좋아한다며 고백한 직장동기나 고등학생은 됐을까 싶은 학생의 고백같은…학창시절엔 하나도 없던 고백이 최근들어 많아졌다. 받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나 낌새를 눈치채지 정환은 약속장소에 나가고 나서야 겨우 알아차렸다. 집에 돌아와 얘기하면 “그럴 줄 알았죠”라고 어쩐지 예상했다는 표정의 그녀석이 있었다. 

  이정환의 그녀석, 10년이나 더 된 인연이자 왼손 네 번째 약지의 주인인 그녀석은 그런 약속에 가지말란 얘길 한적이 없었다. 안좋은 얼굴로 돌아온 정환을 보고 “그럴줄 알았다”는 표정만 주구장창 할 뿐. 한번도 이정환의 사생활에 간섭하고 제지하지 않았다. 걱정은 많이 했지만. 정환은 그런 면을 편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으나, 오늘 같은 날엔 왠지 섭섭했다.

그래, 그냥, 딱 섭섭한 정도였다.

 


  “오늘은 표정이 더 안좋네요.”

 

  정환이 흔들리는 시야에 들어찬 남자의 모습을 바라봤다. 막 씻고 나왔는지 평소와 달리 내려간 머리카락이 안 그래도 어려보이는 남자를 더 어려보이게 만들었다. 잠시 멍하니 남자를 보던 정환은 남자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단 사실을 겨우 떠올렸다.뭐라고 했더라? 아, 표정이 안좋다고.

 

  “응.”

 

  완벽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그에 남자가 다가와 정환의 신발을 벗겼다. 그제야 정환은 자신이 현관에 앉아버렸다는 걸 알았다.

 

  “얼굴도 빨갛고”

  “그런가-”

 

  신발이 다 벗겨진 정환은 수면의 해파리처럼 흐느적거리며 쇼파를 찾았다. 남자가 정환의 허리를 잡았다.

 

  “술냄새 나네.”

  남자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뚜렷해진 윤곽에 정환은 술을 더 마신 것처럼 몽롱해졌다. 다시 대답이 없다가 걱정스러워하는 눈빛에 정환이 굳어버린 혀를 유연하게 굴렸다.

 

  “조금 마셨어.”

  세는 발음 하나 없이, 누가 봐도 이정환은 술 취한 사람같지 않았다. 다만 그 ‘누가’에 남자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으응, 그래요.”

남자는 말투에서 하나도 믿지 않는다는 티를 내고 있었다. 어찌저찌 소파를 찾아 누운 정환이 눈을 감았다. ‘그러고 자면 안 돼요’ ‘벗길게요?’ 작은 말소리가 정환의 귀를 간지럽혔다. 자장가로 삼았는지 정환은 감은 눈을 뜨지않았다.

 

“대협아.”

“이럴 때만 그렇게 부르더라, 이래서 집에서 먹으라고 한건데.”

 

정환에게 불린 대협이 읏차, 하고 기합을 넣더니 소파에 누워있던 정환을 앉혔다. 강제로 앉혀진 취객이 눈을 뜬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꼴 사납다.”

대협의 얼굴을 다시 마주하자 정환은 술기운이 반쯤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좀 깨요?”

“응. 미안하다”

“그래요.”

  말을 마친 윤대협이 일어나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내 컵에 따랐다. 정환이 보기에 그것은 꿀물 같았다. 건네준 꿀물을 마시고 보니 새삼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더 잘생겨 보였다. 그래서 이정환은 10년동안 단 한번도 말하지 않던 말을 꺼냈다.

 

  "결혼하자."

 

  알콜은 뇌의 억제기능을 마비시켜 머릿속 저편에 꾹꾹 눌러놓은 미련을 꺼내게 만들었다. 정환은 이 말을 이렇게 엉망진창인 상태에서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식사 때 일어난 일이 도화선이 되버렸고 그간의 아주 작은 섭섭함들이 한데 뭉쳐 막지 못했다. 막고 싶지 않았다. 10년동안 연인으로 지내며 결혼을 생각한건 자신뿐인건지, 이정환은 윤대협의 생각이 궁금했다. 

  동시에 10년 전 함께 티비를 보며 프로그램에 나온 가상 부부를 향해 "꼭 결혼이 필요한가?" 라고 말하던 윤대협이 떠올랐다. 그날 자신은 뭐라고 대답했더라, 기억났다. 아무런 말도 하지않았다. 어렴풋이 ‘나중엔 결혼해야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상대가 그렇지 않아보이니 꺼낼 수 없었다. 꺼낼 분위기도 아니었고 그저 가볍게 티비를 보며 보내는 주말에…이정환은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때의 이정환은 이 주제가 싸움의 원인이 될 것이라는 걸 꿰뚫어봤다.

 

  “아직도 취했나보네.”

 

  그러니까 이건 뒤늦은 전초전이었다. 이정환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윤대협은 “자러가자”고 말했다. 회피, 이정환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네가 건드리지 않는 내 책상 두 번째 서랍에 뭐가 있는지 아냐. 언젠가…나중에…하고 미뤄왔던 미래가 거기에 있다. 이정환은 파리를 쫓듯 손을 휘휘 저으며 윤대협의 손을 피했다.

  “형?”

 

  슬슬 윤대협이 이상한 낌새를 챘는지 부축도 거부한 채 자기 책상으로 가는 이정환을 뒤따랐다. 노트 하나와 메모지, 볼펜꽂이에 꽂혀있는 3개의 펜. 이정환의 성격을 보여주듯 깔끔한 책상이었다. 붙어있는 서랍 안도 마찬가지로 정돈되어 있었다. 정환이 첫 번째 서랍을 열어 손을 집어넣더니 “없네.” 하고 서랍을 닫았다.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닫아 닫은 사람도 지켜보던 사람도 놀라서 서로를 쳐다봤다. 이정환은 찬물을 뒤짚어 쓴 듯 술기운에서 깨어났다.

  술의 힘으로 열려던 두 번째 서랍을 못 연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는 손을 책상 위로 올리고 책상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괜찮냐며 말하는 상대에게 술김에 말한게 아니라 10년 전부터 생각했다. 고 말하자니 시간이 필요했다. 술냄새도 사라져야 했고 분위기도 좋아야했다. 이정환이 생각하는 완벽한 상황에서 말해야 했다.

 

  “나랑 결혼하는 게 싫냐?”

 

  고등학생도 안할 말투로 말하는 게 아니라…

 

 

 

 


  윤대협은 이정환의 생각보다 진중한 사람이었다. 애인이 되고나서 집을 합치기까지 몇 년이나 걸린게 그 이유였다. 개인공간에 다른 사람을 들이는 일은 대협의 인생에서 가장 큰 일이었다. 혼자 살아온 기간이 길었던 대협에게 집은 ‘나의 집’이었지 ‘우리 집’인 적은 없었다. 우리 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때까지 윤대협은 기다렸다. 부엌에서 요리하는 이정환에게 놀라지 않고, 쇼파에 앉아서 자신을 부르는 이정환을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고, 침대에 같이 눕는 이정환에게 더 있다 가라고 말하게 될 때까지. 대협에겐 정환이 모르는 그런 면들이 있었다.

 

  그리고 사실 애인이 여기저기서 고백받는 모습은 달갑지 않았다. ‘그래 우리 형이 멋지긴 하지’ 라고 생각하는 것도 한 두번이지 해가 지날수록 이정환의 모든 면이 물 익었다. 아니 원래 익었는데 사람들이 그 익은 모습을 쉽게 발견했다. 하지만 윤대협은 이정환의 생각보다 진중한 사람이었기에 그의 사생활이라 여겨 터치하지않았다. 윤대협이 아는 이정환은 별로 안좋아할게 뻔했다. 누구 애인인지 써 붙이고 다니는 건 어때요? 라고 농담조차 못했다. 커플링도 동거하고 한참 뒤에야 맞췄으니 말 다했지. 그리고 질투냐며 어리네. 하고 웃는 이정환을 보면 좀 분한 마음도 들었다. ‘겨우 한 살차이잖아요.’ ‘응 그래.’ ‘형,’ ‘응.’ ‘안 듣고 있죠? 지금.’ 이런 대화를 한 적도 있고… 분명 정환이 들으면 어리다고 하겠지만, 윤대협은 이정환에게 어느 정도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쿨하고 센스있는 애인. 그런거.

 

  “오늘은 표정이 더 안좋네요.”

 

  무슨 얘길 들었길래 술까지 마신걸까. 대협은 빨갛게 물든 정환의 얼굴을 보고 궁금증을 꾹꾹 눌렀다. 술냄새가 난다는 말에 조금 마셨다고 말하는 정환이 얄미워서 볼을 깨물어줄까 했지만, ‘대협아’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윤대협은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술 취할 때마다 저렇게 불러선 흐물흐물 녹아버리게 만든다. 물론 이건 정환에겐 비밀이었다.

 

  쇼파에 앉혀 놓으니 곧 잠이라도 들 것처럼 정환이 눈을 살포시 감고 있었다. 꿀물을 가져오자 술이 깼는지 미안하다 사과해왔다. 우리 사이에 뭘요. 새삼스럽네. 대협이 정환을 어떻게 안아서 침대에 옮길까 고민하던 중에 청천벽력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결혼하자.”

 

  정환을 안지 12년, 사귄지 10년만에 처음 들어보는 문장이었다. 결혼이요? 우리가? 갑자기?

대협의 머릿속은 비상사태였다. 빨간불이 흔들리고 지진이 울리는 그 안에서 내린 결론은

‘술 취했네’였다.

 

“아직도 취했나보네.”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겠지? 형은 어떻지? 괜찮은가? 힐끗 정환을 보니 술 때문에 올랐던 홍조가 가라앉은 듯 보였다. 그건 술이 깼다는 증거로 봐도 무방했다. 형은 무슨 그런 말을 술 마시고 와서 얘길해요…봐줘요. 오늘은. 대협은 손이 떨리지 않는 걸 확인하고 정환의 머리를 만졌다. 놀란 가슴이 천천히 진정됐다. 그리고 그런 윤대협의 손을 치운 정환이 부산스럽게 서랍을 뒤지는 모습에 윤대협은 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번도 이런 식으로 뭔가를 ‘뒤지는’ 행동을 한적이 없던 사람이었다. 쾅- 하고 신경질적으로 닫은 적도 없고…

 

  “나랑 결혼하는 게 싫냐?”

 

  분명 이정환이었다. 정환도 사람이니 심통이 날 수 있겠지. 날 수 있겠지만 오늘 이렇게 갑자기 날 사람이 아니었다. 대협은 이쪽을 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결혼”을 얘기하는 정환이 낯설었다. 심장은 진정될 기미가 없고 머릿속은 다시 빨갛게 물들었다.

 

  “형 한번도 그런 얘기 한적 없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갑자기 왜요.”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어.”

 

  마지막말은 귓속말 수준으로 작았다. 윤대협은 책상에 들어가 있는 의자를 끌고와 정환을 앉히고 맞은편에 섰다. 평소와 다른 정환의 행동이 그가 아직 술이 덜 깼음을 알렸지만 이 얘기를 유야무야 넘기면 안됐다. 대협은 그래서 여과없이 제 생각을 말했다.

 

  “지금이랑 뭐 다를게 있나요? 전 모르겠는데.”

 

  이정환과 결혼? 당연히 생각해본 적 없다. 윤대협에게 이정환과의 영원한 동거는 있어도 이정환과의 결혼은 먼 우주의 얘기였다. 너무 멀어서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얘기.

 

  “많이 다를거야.”

 

  정환의 두 눈은 여느 때보다 빛나고 진지했다. 대협은 많이 다를거란 말에 몸이 굳었다. 왜 달라야 하는지 모르겠다. 우린 지금까지 잘 살아왔던게 아닌가? 사랑하고 같이 살고 또 사랑하고...이렇게 사는게 좋은데 많이 달라진다면 더 안좋아 질수도 있다는 게 아닌가?

  “더 안좋아지는 쪽으로요?”

  “아니, 그렇게 안되게 할거야.”

  “왜 갑자기 이런 얘길 하는 거예요. 전 이대로가 좋은데”

 

  쿨하고 센스있는 애인따위 집어치우라지. 대협은 고개를 젖히고 천장을 쳐다봤다. 우리 집에서 우리가 함께 있는걸로는 답이 안되는건지. 결혼은, 윤대협에게 무겁고 상상외의 것이었다.

결혼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시작. 윤대협에겐 그랬다.

 

  “대협아 나는…”

  “또 그렇게 부르시네…”

 

  정환이 목이 마른지 혀로 입술을 적셨다. 후우- 하고 깊은 숨이 정환쪽에서 들리더니 말을 이어갔다.

  “나는 네가 법적으로 내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이정환이 평생 후회할 프로포즈였다. 윤대협은 그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뜨고 연신 깜빡였다.

  ‘네?’하고 되묻자 제정신인 정환이 들었으면 기절시키고 싶을 얘기를 줄줄 쏟아냈다.

 

  “보호자에 내 이름을 쓰고, 내 가족이라고 했으면 좋겠어.”

  “어…”

 

  제 보호자는 저희 부모님이긴하죠. 라고 대협이 말하려 했으나 정환의 일자로 닫힌 입매가 펴지지않을 것같아 관뒀다.

 

  “우린 지금 가족이잖아요. 같은 집에 살고, 같이 밥먹고, 같이 자고, 사랑하고…”

  “법적으론 아니지”

  “…법적인게 중요해요? 그게 형의 가족이 되는 기준인가요?”

 

  이정환과 윤대협은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주먹을 내세웠다. 먼저 이정환이 윤대협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다른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아.”

 

  오랜 시간동안 사귀면 좋은 점도 나쁜 점도 많았다. 지금은 나쁜점이 활용되고 있었다. ‘상대가 상처받는 말’을 너무 잘 안다는 점. 윤대협이 주먹을 꽉 쥐고 이정환에게 맞부딪혔다.

 

  “형은 저 말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보는게 중요한거 아니에요?”

 

  승리자나 패배자 없이 부상자만 남은 싸움이었다. 정환은 울렁거리는 속이 숙취이길 바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런거 아냐.”

  “형, 너무 흔들지마요. 어지러워”

  “응. 어지럽다.”

 

  대협은 깊게 한숨을 쉬고 정환의 허리를 잡고 일으켜세웠다. 무겁고 잘 끌리지도 않는 정환이 야속하고 여전히 사랑스러워 윤대협은 미칠 것 같았다. 미워 죽겠어야 하는거 아닌가? 질질 끌다시피 침대에 데려와 눕히자 정환이 대협의 손을 잡아왔다.

 

  “그런거 아니다.”

  “알았어요.”

  “진짜로 그런거 아니니까...나중에…”

  “네. 나중에 형 깨면 얘기하던가 해요. 저도 오늘은 좀 힘드니까. 좀 봐줘요. 응?”

  “미안.”

  “그럼 얼른 자요. 그래야 나도 자지.”

  “그래.”

 

  정환은 이 때 그냥 잤어야했다. 이 후로 이정환은 한동안 술을 마시지 않았고 그에 윤대협은 집에서라면 괜찮을지도 모르는데? 하고 대꾸했다. 단 한마디가 사람의 기분을 바꿀 수 있다면, 이 때의 정환은 그 한마디가 이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말했었다.

  “일어나서…”

  “응?”

  “…에……그거. …거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

  “형? 자요?”

  형-?

  정환의 의식은 거기까지였다. 일어났을 때는 해가 중천에 떠 있었고 이정환은 지난 밤의 모든 일을 기억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늙어서 주책’이었다. ‘뭘 믿고’ ‘대책없이 무슨 짓을’ 옆에 아무도 없어 다행이라고 여기며 제 이마를 세 번 퍽퍽 때리던 이정환은 다리를 질질 끌고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에는 하얀 종이가 놓여져있었다.

 

[형, 저 오늘 8시쯤 들어오니까 저녁 같이 먹어요.]

 

  이정환은 다시 이마를 세 번 쳤다.

 

 

 

  7시 50분. 8시에 온다던 윤대협은 7시 50분에 집에 왔다. 이건 7시야. 8시쯤이 아니라.

정환은 그렇게 생각하며 허리에 두른 앞치마를 벗고 식탁 의자에 걸어두었다.

 

  “일찍 왔네.”

  “응. 일찍 왔죠~”

  “…?”

 

  어딘지 텐션이 높아보이는 윤대협을 아래 위로 살피며 정환이 가까이 다가갔다. 어제의 자신처럼 술을 마시고 온건 아닌지 숨을 들이마셨다. 제 몸에서 나는 향기와 같은 향기만 날뿐이었다. 오다가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보다싶어 먼저 부엌으로 돌아가려했다. 대협이 정환의 허리를 잡고 어깨에 턱을 올려놓지만 않았더라도

 

  “형.”

  “왜.”

  “저 20호예요.”

  “뭐가?”

  “형도 그렇죠?”

  “뭐…”

 

  정환은 순간 스쳐가는 기억이 있었다. 어젯밤 그냥 잤어야하는 순간에 자지 않고 저지른 일.

‘두번 째 서랍에…’

 

  “잠깐 놔봐”

  “하하하. 이거 봐봐요.”

 

  허리를 꽉 잡은 윤대협이 보여준건 자기 목이었다. 길고 하얀 목에 매달린 은색 체인에 반지 하나가 걸려있었다. 이정환이 8년전에 사두고 두 번째 서랍에 고이 모셔놓기만 한 그 반지가대협의 목에 걸려있었다.

 

  “끼려고 했는데 작더라고요. 언제 산거예요?”

  “8년 전에…”

  “와. 그땐 커플링도 안 맞췄을 땐데? 제 손가락 사이즈는 어떻게 알고?”

  “잘 때 손으로 대충 재봤지.”

  “와. 무섭다. 정환이형.”

 

  말은 그래놓고 얼굴은 여전히 싱글벙글이었다. 뭐가 좋은거지. 우리 어제 분위기 완전 안좋지 않았나? 정환은 모르겠다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대협에게 물었다.

 

  “우리 어젯밤에 싸우지 않았냐?”

  “그랬죠.”

  “그런데 왜 풀렸어?”

  “…좋아서요. 형이 좋아서.”

  “그게 뭐야.”

 

  정환은 납득하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대협은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두 번째 서랍에 있는 그거, 네거야.’ 하고 잠들어버린 이정환에 윤대협은 늦은 밤에 가끔씩 서랍을 열고 웃고있던 정환을 떠올렸다. 하지만 쿨하고 센스있는 애인인 대협은 궁금하지 않은 척 하며, 언젠가 알려주길 기다렸다. 안알려주면 어쩔 수 없다 여겼다. 그런데 이렇게 분위기가 안좋을 때 갑자기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보란다. 윤대협은 아주 조금 고민했다. 침대에 일어나면서 고민, 책상 앞에 서서 고민, 두 번 째서랍을 열면서 고민-했는데. 

서랍 안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까만 벨벳 상자가 눈에 익었다. 반지케이스. 자고있는 정환을 흔들어 깨우고 싶었다. 프로포즈한거예요? 프로포즈였어? 황당함을 금치 못하고 케이스를 들어올렸다. 손 때하나 타지 않은 케이스를 열어보자 열어본적도 없는 것처럼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심플한 디자인의 은색 반지 한쌍이 대협을 반겼다. 지금이라도 정환을 깨울까 싶었다. 케이스와 반지를 구경하던 대협의 눈에 반지 안쪽의 각인이 보이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이름과 함께 새겨진 날짜가 8년 전이었다. 윤대협 이라고 적힌 반지를 냉큼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보았다. 손톱까진 들어가던 반지가 중간부터 들어가지 않았다. 8년 사이에 자랐다. 아니면 사이즈를 잘못 알았거나. 알려준 적도 없었는데… 

  대협은 반지를 손바닥 안에 넣고 꽉 쥐었다. 작다. 이렇게 작은게 이렇게 행복하게 만들 수 있구나. 윤대협은 이정환이 말하는 결혼의 필요성은 아직 잘 몰랐다. 하지만, 8년 전의 반지를 아직도 가지고 있으면서 이제와 말한 이정환이 좋았다. 이런 마음도 모르고 쿨쿨 자고 있는 이정환이 좋았다. 그러니까 아직 몰라도, 무겁고 두려워도 같이 있다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행복할 거 같았다. 그래서였다. 다른건 필요없이 정환이 좋아서…

  아마 정환도 윤대협이 좋아서 그랬다는 걸 대협은 알았다. 대협이 나의 집이 우리집이 됐다고 생각했을 때 정환 역시 나에서 우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도 여전히 모르는 점이 많았고 서툴렀다. 분명 처음부터 지금까지 ‘함께라면 뭐든 괜찮을거야’라고 다짐했는데, 둘 다 불안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술 기운을 빌어 정환이 껑충 뛰어와줬으니 이제 자신의 차례였다. ‘형처럼 껑충 뛰지못하겠지만 뛰어볼께요.’

 

  


  이정환이 지우고 싶은 취중 프로포즈가 윤대협에게 제대로 먹혀들어갔다. 대협은 종종 이 얘길 로맨틱하다는 듯 꺼냈고, 이정환은 들을 때마다 제 이마를 손바닥으로 쳐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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