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돌이표)

- 토요일 오전 10시 35분.

 직장인도 학생들도 한참 단꿈을 꾸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건 커다란 소년에게도 예외는 아닌지라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옆에 잡히는 따뜻하고 단단한 베개를 끌어안았는데…

 순간 침대에 이런 베개가 있던가? 하고 소년이 고민했다. 베개가 자신을 마주 안아오고서야 그는 그런 게 없다는 것이 생각났다. 사춘기 소년의 비명이 울렸다. 소년이라기엔 어른스러운 목소리였지만, 

어쨌든.

 “형? 여기서 뭐하시는 거예요?”

 놀란 나머지 침대에서 떨어진 채로 묻는 이 소년의 이름은 윤대협. 능남 고등학교의 2학년생.

 “이번엔 무슨 장난이냐…윤대협.”

 그런 소년을 꾸짖듯이 말하는 성숙한 음성은 침대 위에서 들렸다. 상의는 온데간데 없이 반나체의 모습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뭔가 해볼테면 해보라는 듯한 눈빛은 덤이었다.

그걸 본 대협은 자신의 몸을 만졌다. 그 또한 반나체였다. 평소같이.

 “장난이라뇨, 형이야말로 무슨 장난을...저희가 그렇게 친한 것도…아니잖아요.”

 대협은 자신이 느끼는 황당함을 듬뿍 담아 ‘친하지 않은 형’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 ‘형’이 팔짱을 풀었다. 서로 어긋난 말에 ‘형’도 당혹감을 지우지 못했다. 바지도 벗었는지 아닌지 모르게 이불로 하체를 가리고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는 이 형의 이름은 이정환. 해남 고등학교의 3학년생.

 - 토요일 오전 10시 50분.

 윤대협의 집에서 둘 다 반나체로 침대에서 두 사람은 만나고 말았다. 놀란 상태 그대로 옷을 주섬주섬 찾아 입은 대협과 정환이 식탁에 앉아 서로를 쳐다봤다. 해남과 능남의 경기 이후 윤대협은 이정환을 따로 본 적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원래 친분이 있던 것도 아니고 가뜩이나 패배…고배를 맛본 입장에선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한참 뒤라면 모를까.

 그런데 남의 집에 불쑥 찾아와 같은 침대에서 잤다니 대협은 제가 아무리 열려있는 사람이라지만 이정도로 열린 사람은 아니었다. 따로 집열쇠를 준 사람은 없었는데… 유 감독님이? 아니다 유 감독님께 드렸던 비상 열쇠는 몰래 빼 온지 오래였다. 누구지? 누가 이런 장난을? 거기에 장단을 맞춘게 이정환이라는 점이 더 황당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아 긴 침묵이 흘렀다. 조용한 공간에 한 사람의 시선은 방 안을 훑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은 그 모습을 지켜봤다. 평범한 식탁에서 접시 하나와 물컵이 담긴 싱크대, 윙윙 소리를 내는 냉장고를 지나 엉망진창 구겨진 담요가 있는 쇼파에 멈췄다.

 “쿠션이…없네.”

 대화할 기미가 보이지 않던 정환의 입술에서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다. 무의식적이었는지 말하고 나서 다시 입을 꾹 닫았다. 대협은 그게 중요한가 싶었지만 쇼파로 간 시선이 돌아오지 않는 걸 보자니 저절로 대답이 나왔다.

 “아? 네. 없어요.”

 “버렸어?”

 “아뇨. 원래부터 없었어요.”

 …그럴 리가 없는데. 정환은 안들리게 말했다고 생각했으나 둘만 있는 조용한 공간은 숨소리도 크게 들릴 정도였다. 하물며 말소리는 얼마나 잘 들릴까. 그러나 대협은 못들은 척 했다. 이 또한 장난의 연장선일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난이랑은 거리가 멀어보이는 사람이 어울렸으니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춰야겠다며 굳어버린 턱을 한 손으로 가렸다.

 “혹시 오늘 몇 월 며칠인지 알려줄 수 있을까?”

 아하, 시간여행자 컨셉? 대협은 제 등 뒤에 걸려있는 달력을 가르켰다. 9월이 걸려있는 달력을 본 정환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이어서 나올 말은 ‘나 미래에서 왔다’가 아닐까 따위를 생각중인 대협에게 정환은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여긴 내가 살던 세상이 아닌가보네.”

  “어? 그건 생각지도 못한 말인데요.”

  “나도 이런 말을 할거라곤 생각 안했어.”

 언제부터 누구랑 이런 장난을 하는건지 모르겠지만 대협은 더는 참지 못했다. 의자를 소리나게 끌며 일어난 그가 정환을 내려보며 웃었다.

 “장난은 이걸로 끝내줬으면 좋겠는데요”

 정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대로 일어난 대협이 ‘여기 숨어있는거죠? 형들.’ ‘아니면 백호쪽 애들인가?’ 라며 집안을 돌아다녀도 정환에게선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이정환이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정확히 ‘이쪽의 윤대협’에겐.

 이정환 외엔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대협이 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마를 만졌다. 난처할 때 보이는 윤대협의 버릇 중 하나였다. 정환은 윤대협이 곧 들릴 듯 말듯한 한숨을 한번 쉬고,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할 거라고 예상했다. 자신과 함께 있던 ‘저쪽의 윤대협’은 그랬다.

 후우- 하고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제가 들어야할 설명이 있는 거 같네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할 땐 뒷목을 만진다. 그리고 이쪽을 보며 ‘어떻게든 안될까~’하는 눈빛을…보내야했는데, 대협은 뒷목을 만지고선 고개를 숙여 식탁을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본 정환은 이쪽의 윤대협은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걸 인지했다. 온전한 신뢰는 저쪽에서나 있을 일이었다. 이쪽은…그저 다른 팀의 선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코트 위의 냉철한 분석가 기질은 이런 순간에도 멈추지 않았다. 그로 인해 입안이 쓴건 어쩔 수 없었다.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있는 세계랑 이쪽 세계랑 다른거 같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 말은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와 같았다. 정환은 텁텁한 입 안을 씻고 싶었다. 황당하긴 자신도 마찬가지인데 이쪽의 대협, 윤대협은 머리스타일 만큼이나 뾰족했다. 하기야, 친하지 않은 사람이 자기 침대 위에서 일어났는데 그럴 법도 하다며 서운해지려는 속을 달랬다. 저쪽에선 네가 먼저… 말을 말자.

 “처음엔 과거로 온줄 알았는데…내가 잠들었던 게 어제였어. 어젠 9월 13일이었고, 여긴 며칠이야?”

 “…14일이요.”

 “역시. 과거는 아니네.”

 “그 말을…지금 믿으라는거예요?”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는 게 정환의 눈엔 한참 어려보였다. 이정도까지 어렸었나? 상념에 잠기기 전에 겨우 본론으로 돌아온 정환은 무식하지만 확실한 방법을 제시했다.

 “9월이면 원터컵을 준비하고 있을테니, 훈련 중이겠군.”

 “갑자기 윈터컵 얘기는 왜 하는…아,”

 대협이 감을 잡은 표정을 보이자 정환이 더는 설명하지 않고 먼저 일어나 현관문으로 향했다.

 “준비 됐으면 가자.”

 “토요일에도 훈련을 해요?”

 “넌 안해?”

 “하죠.”

 “것봐.”

 아침의 불쾌한 만남은 없었던 것처럼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윤대협은 이 상황이 어색했지만 그가 보기에 이정환은 그렇지 않아보였다. 어색한 자신을 알아차리고 대화를 이끌고, 멈추고, 기다렸다. 모든 게 익숙하다는 듯이... 대협이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시선을 돌릴 때마다 얼핏 보니 웃고 있었다. 익숙하게 리드하는 모습 때문에 더 어색하게 느끼고 있다는 걸 저 사람에게 읽힌게 분명했다.

 어쩐지 거기에 변명을 해야될거 같아 대협이 말하려던 차 행선지에 도착했다.

 해남대부속고등학교.

 이정환의 학교였다.

 이정환은 소설을 많이 보는 편이 아니었다. 영화도 마찬가지라 공상과학에 대해선 거의 몰랐다. 평소처럼 앞 문으로 들어가려던 그를 막은건 그런 지식이 어느 정도 있는 윤대협이었다.

 “그러다 나비효과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어쩌려고요”

 “내 말은 어떻게 믿냐고 해놓고?”

 “그건 그때고요...”

 멋쩍게 웃는 대협을 정환이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대협이 웃음을 그치고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였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하고 묻자 정환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 와서 처음 웃는걸 봐서. 이런건 똑같네. 정환은 속으로 대답했다.

 공상과학을 주변사람들에게 들어본 대협이 꺼낸 방법은 상당히 1차원적이었다.

 첫째. 뒷문으로 몰래 들어간다! 허술하지않나 싶었으나 손쉽게 성공.

 두 번째. 정환이 있다는 걸 알리면 안되니까 정환, 그니까 윤대협의 집에 나타난 이정환씨는 어딘가에 숨어있는다! ‘근처 풀숲 같은 곳이면 되나..’ ‘가릴 수 있다면요’ ‘근처에 나무 하나있어 거기 뒤에 있지 뭐.’ ‘형 은근히 허당같은 면이 있네요.’ ‘...이 시간에 샤워실은 아무도 안쓸거야 거기 있을게.’ 

세 번째. 세 번째는 생각안했는데요? 확인 하고 각자 집에 가기?

 “만약에 내가 두 사람이면…”

 넌 어떻게 할래. 정환은 맴도는 말을 삼켰다. 자신이 두 명이면 집으로도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고 이 윤대협과 함께 있을 수 없었다. 이렇게 불편해 하는데. 염치없이 있을 정도로 신경줄이 굵지 못했다. 수중에 돈이 얼마나 있더라, 그리고...‘진짜 집’으로는 어떻게 돌아가지?

 “으음, 아무래도 두 사람이면 형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네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연장자가 불안한 모습을 보여선 안됐다.

 ‘형도 참, 그런 쪽으론 고지식하다니깐. 좀더 느슨하게 생각해봐요. 나한테 털어놓으면 더 좋고.’

 그리운 목소리가 정환의 기억에 박혀있었다. 말 하나하나에 애정이 담겨있는 그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정환이형?”

 “어, 미안하다. 뭐라고 했어?”

 “음, 별일 없으면 당분간 저희 집에서 지내셔도 된다고요.”

 “그럴 수는…”

 “어디까지나 형이 두 명일때의 얘기예요. 한 명이면 가고싶지 않아도 집으로 돌아가셔야 돼요!”

 대협이 어울리지 않게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일부러 우스꽝스럽게 보여 거절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의 버릇. 정환은 새삼스럽게 그에게 약한 자신을 깨달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농구코트의 이정환은 여전히 프레셔를 발산하고 있었다. 윤대협을 압박하던 그때처럼 선수들을 가로질러 림에 공을 넣는다. 제 몸은 생각하지 않고 부딪히는 사람. 철저한 계산으로 차갑게 이성을 유지하고, 승리를 위해 모든 걸 불사르는…말도 안되리만큼 비현실적인 인간.

 윤대협은 그런 사람을 두 명이나 알게 됐다.

 “누구?”

 숨는다고 숨었는데, 허당은 정환이 아니라 자신이 아닐까 싶어진 대협은 제게 콕콕 박힌 눈동자들을 피할 길을 찾았다. 190cm의 건장한 남자가 숨을 곳은 마땅찮았다.

 “윤대협?”

 가장 들키면 안되는 사람에게까지 들켰다. 이쪽의 이정환. 윤대협이 만나고 싶지 않은, 제게 패배를 안긴 해남의 플레이어. 공 튕기는 소리가 끊겼다. 곤란한걸.

 다른 부원들이 윤대협에게 가기전에 이정환이 먼저 다가왔다. 해남고 주장이라 이건가. 덕규형도 타학교 학생이 오면 그랬나, 대협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정환이 따라오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며 대협을 불러냈다. 정환이 걸어가는 쪽은…샤워실 방면이었다. 그럼 안되는데. 최대한 당황한 티를 숨기며 가까워지는 샤워실을 살폈다. 다행스럽게 주변에 누군가 있지는 않았다. 정환은 샤워실 앞의 자판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 대협에게 건냈다. 대협이 자주 뽑아먹는 음료수였다. 그냥 운 좋게 뽑아줬나.

 “저번에 이거 마시고 있길래 뽑았는데. 맞나?”

 - 틱

 캔을 따려던 대협의 손가락이 헛돌았다. 그 형이나 이 형이나… 알지 못할 때 어딘가를 치고 들어온다.

 “잘 마실게요.”

 “배로 갚아.”

 “그럼 안 마실래요.”

 “농담이다.”

 농담도 할 줄 아는구나. 대협은 음료수를 마시며 곧 들이닥칠 이정환의 질문들을 떠올려봤다. ‘뭐하는거냐’ ‘스파이짓을 하는거냐’ 등등. 딱히 알맞은 답을 찾지 못해 난감했다. 그런 모습을 여과없이 이정환이 보고있다는 것도 까먹을 정도로 대협은 이 상황이 버거웠다. 음료수를 다 마신 이정환이 캔을 우그러뜨려 쓰레기통쪽으로 던졌다. 깔끔한 3점 슛자세로 던진 캔은 텅, 텅. 소릴 내며 안착했다.

 “적당히 봤으면 돌아가. 이제부턴 비밀훈련이니까. 지금 보면 그 때 재미없을거다.”

 라고 말한 이정환이 윤대협의 어깨를 툭툭 치고 자리를 떠났다. 이걸로 끝? 대협이 몸을 홱 돌려 이정환을 쳐다봤다. 이정환은 대협의 시야에서 멀어져 안보일 때까지 단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 덜컹

 샤워실 문이 열렸다.

 “진짜군.”

 또 이정환이다. 대협은 비현실적인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기묘한 동거가 시작됐다. 주변사람들도 모르는 이정환과 윤대협의 동거는 일방적으로 윤대협에게 좋았다. 이 이정환은 윤대협을 샅샅이 조사라도 한건지 그의 버릇을 전부 아는 듯 굴었다. 한번도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가 자주 먹는 음료수를 준다거나 욕실 끝을 제대로 안닦고 나오는 것까지…심지어 머리를 말리다 쇼파에서 잠드는 것까지 알아 몇 번이고 대협을 깨워 침대로 들어가게 했다. 그 과정에서 어깨를 툭 건든다거나 손이 스치는 가벼운 스킨쉽이 이뤄졌는데 놀란 건 윤대협쪽이 아니라 이정환이었다. 창백해져 대협을 향해 미안하다고 사과해와 대협은 깜짝 놀라 왼쪽 가슴이 뛴건지 아님 다른 것 때문에 그런건지 알아채지 못했다.

 대협에겐 안타깝게도 불규칙적으로 빨라지는 심장의 원인은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어제 새벽 2시 그가 깊게 잠들 시간쯤의 일이었다. 분명 대협은 잠들어 있었다. 평소라면 주변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던 절대 깨지 않았을텐데 이상하게 어제는 중간에 깨버렸다. 눈을 뜨면 잠이 완전히 달아날 듯 싶어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때 텅 빈 손 안에 온기가 느껴졌다.

 “윤대협.”

 낮게 가라 앉은 목소리는 이젠 익숙해진 사람의 목소리였다. 좀더 낮았지만 낯선이는 아니었기에 대협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뜨지 않았다.

 “대협아.”

 번쩍하고 떠질려는 겨우 눈을 꾹 감았다. 대협아? 한번도 날 그렇게 부른 적 없잖아요. 뭐야. 운동장을 서른바퀴라도 뛴 것처럼 심장이 쿵쿵 울려댔다.

 “보고싶다.”

 깨끗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농구공이 림에 튕겨져 나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멈춘 심장이 대협의 몸 안을 굴러다녔다.

아무것도 모를 때가 좋았지. 밤을 꼴딱 샌 대협은 정환이 건내준 식빵을 우물우물 씹어먹으며 정환을 쳐다봤다. 뭐가 좋아서, 심장아. 주인말을 들어야지. 저 사람은 이정환이란다. 날 패배시키고, 무자비한 덤프트럭이고. 입가에 잼 묻었다. 핥아먹네. 심장아 듣고있니? 후우.

 동거 2주일 째. 윤대협의 심장은 주인 말을 듣지않는 고집불통 말괄량이였다. 뛰지말랄 때마다 뛰는 건 둘째치더라도 얼굴까지 빨개지는 건 정도가 심각했다. 대협은 몇차례나 심장과 협상하려 했지만 심장은 NO. 절대 NO를 외치며 달렸다. 귀여워보이면 끝장이라니 아직 괜찮은가? 그렇게 위안을 삼자마자 씻고 나와 앞머리가 내려온 정환을 보고 ‘끝장이네’라며 심장이 전력질주하기 시작했다.

 동거 3주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대협은 스스로 세뇌하기 시작했다. 이정도면 정환이 형은 못돌아가는 게 아닌지. 그렇다면 계속 여기서 같이 살아야 되겠다. 딱히 불편하지도 않고(오히려 편하다) 형도 다른 사람보단 내가 편하지 않을까? 그러다, 그러다가...잘 될수도 있는거 아닐까? 어쨌든 형은 윤대협을 좋아하잖아. 내가 형의 윤대협이 아니지만, 아녔지만…될 수 있는 거 아니야?

심장은 이 생각을 주인의 허락이라 생각해 머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얘 사랑 고백한대’ ‘정말?’ ‘응 그러니까 이성 끊어놓으면 될거같아.’ ‘OK. 접수했습니다’

 - 금요일 오후 9시

 정환과 대협이 금요일마다 하는 일이 있었다. 정환의 부탁으로 시작된 ‘SF영화시청시간’은 9시에 끝났다. 쇼파의 양 끝에 앉아서 시간여행, 평행우주, 도플갱어에 관한 영화를 주구장창 봤다. 이건 어떻고 저건 어땠다. 그럼 나도 이러면 돌아갈 수 있지않겠냐는 얘기였다. 오늘 영화는 시간여행자 커플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손을 잡고, 껴안고 키스를...

대협은 영화에 집중하기 힘들어 반대편에 있는 정환을 보기로 했다. 거짓말처럼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요?”

 “…”

 “말해줘요.”

 정환의 놀란 얼굴이 대협의 말을 듣더니 점점 일그러졌다. 미간을 찡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뭔가 참는 사람처럼 푹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협은 심장이 달리는 대로 끝에서 끝으로 다가갔다.

 “형, 제가 뭘 잘못했어요?”

 “아니, 아니야. 그러니까 거기 있어.”

 “아뇨. 형, 그럴 순 없어요. 지금 안좋아 보이는데 제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윤대협.”

 윤대협. 대협아가 아니고 윤대협. 그렇군. 대협은 정신없이 뛰는 가슴을 퍽 하고 치고 싶었다. 바보야, 형이 찾는 건 내가 아니라는거야. 뭐가 좋다고 계속 뛰냐. 잘생기고, 귀엽긴하지만… 중증이네 머리라도 쳐서 기절해야될지도 모르겠다. 이왕 바보같은거 하나만 얘기해볼까

 대협은 제 얼굴이 어떤지 몰랐다. 정환과 같은 얼굴일거라곤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형, 그냥 하는 말인데요. 형한테 키스해도 돼요?”

 정환이 제 뺨이라도 쳐주길 바랐다. 그걸로 기절하면 더 좋고. 정환의 고개가 들렸다. 찡그린 미간이 제자리로 되돌아와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정환의 모습이 브라운 관 속 사람들 같이 흐려졌다가 선명해졌다가를 반복했다. 윤대협의 심장이 왁하고 소리 질렀다.

 “가지마요!”

 “윤대협...”

 “형. 가지마요.”

 대협이 가지말라고 할 때마다 흐릿해지는 주기가 짧아졌다. 정환이 손을 뻗어 대협의 뺨을 만졌다. 그마저 몇초 뒤엔 손이 뺨을 통과해버려 소용없게 됐다.

 “여긴 내 세상이 아니잖아. 원래대로 돌아가는거야.”

 “그런게 어딨어요...”

 “보고 있잖아.”

 “……”

 “그런 얼굴도 할 줄 아네.”

 그건 처음본다. 정환이 하하 웃었다. 대협이 아무말 않자 정환의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여기도 나는 있어.”

 “그거 말도 안되는 소린거 알죠?”

 “뭐, 여기 이정환을 나랑 똑같이 보면 말도 안되겠지만,”

 “……”

 “평행 세계는 다를 수도 있고 같을 수도 있는거니까”

 “재미없어요.”

 “그래. 난 원래 재미없는 사람이야.”

 “아니에요. 재밌어요.”

 “하하하. 어리다 어려.”

 “형이랑 저랑 한 살밖에 차이 안나요.”

 “응 그래.”

 천천히 정환의 발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 덜컥 겁이난 대협이 정환을 잡으려고 했지만 정환이 한발자국 물러났다.

 “윤대협. 헤어질 시간이야. 욕실 바닥은 꼭 닦아라. 넘어지면 뇌진탕 걸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그런 얘길 한다고요?”

 “마지막이니까 하는거지.”

 “알겠어요.”

 대협은 반쯤 사라진 정환이 전부 사라질 때까지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나간 자신을 대견스러워하기로 했다.

- 토요일 오전 10시 50분.

 처음처럼 혼자 일어난 윤대협은 아프게 뛰는 심장을 무시하고 집안을 정리했다. 찬장에서 한쌍씩 늘어난 식기들을 꺼내고 쇼파에 올라간 쿠션을 집어 들었다. 신문지로 꼼꼼히 포장해 쇼핑백에 넣었다. 버리기엔 아까우니 기증하자. 대협은 아는 기부처가 없었다. 누구한테 물어보지. 오늘은 훈련도 안하고… 몸은 머리보다 빠르게 대협을 집 밖으로 내보냈다. 딱 한번이었는데. 딱 한번 왔던 길을 몸이 기억했다.

 해남대부속고등학교 앞이었다. 대협이 눈치챘을 땐 이미 정문을 지나 체육관 앞이었다. 그것도 쇼핑백을 든 채로. 대협은 깊은 한숨을 쉬고 돌아가려했다.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지 않았다면 그대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윤대협?”

 또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들키고 말았다. 같은 얼굴이라 그런지 대협은 울적해졌다. 다른 부원이 나오지 못하게 문을 닫아버린 정환이 고개를 까딱였다. 저건 버릇인가보네. 그 형은 안그러던데. 대협은 정환의 뒤를 따랐다. 정환은 대협의 예상대로 샤워실 앞 자판기에서 멈췄다.

 “윤대협. 저번에도 말했지만.”

 “…”

 - 덜컹

 정환이 자판기에서 뽑은 음료수를 대협에게 던졌다. 무조건 받을 거란 확신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대협은 당연하다시피 던져진 음료수를 받았다. 틱,틱...정환은 캔을 못따고 있는 대협에게서 캔을 가져가 따줬다. 대협이 뭐라하기도 전에 다시 캔을 돌려줬다.

 “음, 혹시 배로 갚으러 왔냐?”

 “…마시면 배로 갚는거예요?”

 “어? 아니 농담…”

 단번에 음료수를 마셔버리자 정환이 당황한 표정으로 대협을 쳐다봤다. 빈 캔을 우지직 구겨 정환이 했던 것처럼 슛 자세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걸 본 이정환은 잠깐 조용히 있다가 크게 웃었다.

 “윤대협. 어리다. 어려.”

 “……”

 “그것 때문에 온거냐? 내가 그래서?”

 “아닌데요.”

 “응 그래.”

 대협은 이정환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었다.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말 안듣던 심장이 조용한걸 보면 분명 다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만약의 가능성, 하지만 그 사람을 비춰봐선 안된다. 그 사람은 떠나갈 사람이었고 떠나갔다. 그쪽의 이정환은, 자신을 그 대협으로 보지않았다. 그러니까 자신도 이 사람 위로 덧씌워선 안됐다.

 “훈련은 보여줄순 없지만 그 외의 일이라면 들어줄순 있어. 너도 2학년이니 이것저것 걱정할게 많겠지.”

 그러니까 이쪽의 윤대협은 이쪽의 윤대협의 방식대로 이쪽의 이정환을 보면 된다. 그게 꼭 열병 같은 게 아니어도 좋다. 지금은 그냥 그쪽이 궁금해서…그런 이유였다.

 “좋아요. 밖에서 기다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