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 강탈기

제하여단 밸런타인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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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거기서 뭐 해?”

현관문을 열고 나오던 정여단이 눈살을 찌푸렸다. 웬 이상한 여우 가면이 집 앞에 서 있었다.

좀 허접하더라도 얼굴을 죄다 가리고 있었지만 알아볼 수 있었던 건, 쓰고 있는 남자의 체형이 너무 익숙했기 때문이다.

고우나 미우나 알아온 세월이 얼마인데, 숨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걸 괴상한 가면 하나 뒤집어 썼다고 해도 모를 리가 없다. 이제하였다.

“괴물이야.”

목소리부터 본인이라고 광고하고 있는데 참 당당했다. 가면 하나 뒤집어 쓰고 뻔뻔하기 짝이 없군.

“뭔 괴물인데 그게. 아니, 괴물이든 말든 왜 우리 집 앞에서 지…… 난리야?”

“너 욕 쓰려고 했지.”

“착각이야.”

“어머니께 이른다. 어머니! 여단이가 방금!”

“조용히 안 해?”

기겁한 정여단이 이제하를 냉큼 끌어당겼다. 손이 맞잡히자마자 이제하가 슬그머니 입을 닫았다. 가면 때문에 보이진 않지만 실실 웃는 게 보이는 것도 같았다. 열 받아서 한 대 까는 생각을 했다가, 주위에 사람이 지나가길래 다시 붙잡아서 고개를 황급히 치워버렸다. 이딴 괴상망측한 가면 쓰고 있는 게 보이면 쓰고 있는 당사자가 아닌 정여단이 되레 쪽팔릴 것 같았다. 얼굴 팔리는 게 쟤도 아니고 나라니. 불합리하다.

“그래서 진짜 뭔데? 연극이라도 시작했어? 여우 역할이야? 그거 자랑하러 온 거야?”

“괴물이라니까.”

“뭔 괴물. 여우 괴물?”

“아니, 초콜릿 강탈 괴물. 초콜릿 내놔. 초콜릿 주면 목숨은 살려 주지.”

되도 않는 괴물 흉내 목소리에 정여단의 미간이 살포시 구겨졌다.

“할로윈 지난 지가 언젠데 이제 와서 뒷북이야?”

“할로윈 때문 아니거든.”

“그럼 뭐…….”

라고 말하던 정여단은 뒤늦게 날짜를 헤아리고는 멈칫했다.

겨울 날씨. 코앞으로 다가온 겨울방학 밴드 합주. 그리고 다른 간식도 있는데 하필 초콜릿. 자연스럽게 입이 벌어진다.

더럽게 안 어울리는 여우 가면이 그제야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니, ……진짜?

“밸런타인데이가 언제부터 괴물 분장 하고 초콜릿 강탈하는 날이었는데?”

그게 더 어이가 없다. 진심으로 묻자 이제하도 쪽팔린 건 아는지 시선을 피했다. 이미 더 가릴 것도 없는 여우 가면을 만지작대면서 또 얼굴을 치운다.

“몰라. 아무튼 장난 당하기 싫으면 내놔.”

“그러니까 밸런타인데이는 초콜릿 안 주면 장난 당하는 날이 아니라니까? 작년 할로윈에도 안 했던 짓을 왜 하는 거야 지금?”

“진짜 장난 당하고 싶어? 여단이 너 잘 생각해. 여기 너희 집 앞이야. 내가 무슨 장난을 어떻게 칠지 누가 알아.”

이 자식 진짜 언제 철들지?

급기야 뻔뻔하게 헛소리 하는 걸로 노선을 잡았는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으면서도 꿋꿋하다. 정말 초콜릿 안 주면 끝까지 버티다 못해 졸졸 쫓아올 것 같았다. 그냥 쫓아와도 미친놈인데 저 가면 쓰고 따라오면 두 배로 미친놈이다. 그리고 쟨 진짜 미친놈이지.

“있어 봐.”

결국 이번에도 져주면서, 정여단이 들고 있던 가방을 그에게 안겼다. 얼결에 받아 든 이제하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초콜릿이라고 할 건 아니지? 여단아?”

“거기서 딱 기다려.”

가방 정도는 안겨 줘야 안 도망가는 걸 알고 안 쫓아오지. 시큰둥하게 말한 정여단이 그대로 근처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홀로 남은 이제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가방을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딸랑 소리가 들렸다.

정여단의 손에 들려 있는 건 제법 비싼 초콜릿 8구짜리였다.

“……진짜 줄 거야?”

“달라며? 주지 마?”

“아니. 줘.”

“대신.”

초콜릿을 건네줄 것처럼 들어 올린 정여단이 이제하의 손에 닿기 전 팔을 내렸다. 삐끗한 이제하가 불만스러운 눈빛을 하자 정여단이 팔짱을 끼고 눈짓했다.

“가면 벗어.”

“뭐?”

“내가 뭔지도 모르는 여우 괴물에다가 초콜릿까지 바쳐야 해? 벗어. 가방은 내놓고.”

강제로 맡은 가방이 강제로 뜯겨 나갔다. 인질로 삼을 가방마저 잃어버린 이제하가 부랑자처럼 섰다.

안 할 거면 말라고 정여단이 턱짓했다. 일말의 미련도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못 벗겠다고 하면 진짜 안 주고 휙 가버릴 것 같아서, 이제하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가면에 손을 댔다.

허접하기 짝이 없는 가면이 결국 내려가는 걸 빤히 보다가, 정여단이 피식 웃었다.

“민망한 건 아나 보다 이제하.”

귀만큼이나 제법 붉어진 얼굴로 이제하가 볼멘소리처럼 말했다.

“나도 수치와 양심이란 건 있거든 여단아. 와, 아까 지나가는 사람이 나 보고 흠칫해서 돌아가는데 순간 벗을 뻔했어.”

“거기서 가면 안 벗었다는 거부터가 없다는 거 아냐?”

“……빨리 초콜릿 줘. 괴물이 아니라 이제하가 장난 치기 전에.”

가면을 냅다 치워버린 이제하가 손을 내밀었다. 정여단은 어깨를 으쓱였다가 더 장난 치지 않고 그에게 초콜릿을 내밀었다. 이제하가 초콜릿을 받아 들 때까지 피하지도 장난 치지도 않았다.

초콜릿을 받아 든 이제하가 이제 됐지? 하며 다시 주섬주섬 가방을 메는 정여단을 빤히 응시했다. 그 시선에 정여단은 턱짓했다.

“또 뭐. 줬잖아.”

“진짜 줘?”

“아까 그거 물어봤거든 너.”

“밴드 연습 가?”

“어. 공연이 코앞이야. 그러니까 방해하지 말고 이제하 너도 가라. 나 더 늦으면 진짜 지각해.”

감상 남기고 싶으면 나중에 하라고 말하면서 정여단이 진짜 그를 스쳐 지나갔다. 과장이 아니라 진짜 더 지체하면 지각이다.

그래도 오늘은 좀 일찍 나와서 다행이다. 머릿속으로 악보를 그려보면서 지하철 역 쪽으로 뛰려는데 별안간 옷자락이 붙잡혔다. 늦었다니까. 거짓말 아니고 진짜라고 말하려고 고개를 돌리려는데 별안간 후드 모자가 묵직해졌다.

“그건 너 먹어 정여단.”

괜히 밴드 사람들한테 나눠 주지 말고! 냅다 덧붙인 이제하가 옷자락을 놓고 갑자기 등을 밀었다.

지각인 것도 있고, 냅다 밀어버리기에 얼결에 지하철 역까지 달렸던 정여단은 지하철에 앉아서 뒤늦게 모자에 달린 것을 빼냈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정여단은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렸다.

안에 들어 있는 건 사탕이었다.

‘할로윈이랑 밸런타인을 헷갈리더니 화이트데이랑도 헷갈리네.’

사탕을 주머니에 밀어 넣고 정여단은 등을 기댔다.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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