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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밀아 / 브리튼채널
이런 이야기를 해서 정말 미안해. 그 말을 끝으로 모드레드는 무언가에 쫓기듯 컴퓨터 종료를 클릭했다. 아직 종료되지 않은 프로그램이 있다고 알리는 메시지 창이 모니터에 잠시간 떠있다가 사라졌다. 모드레드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안 하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전에 이 방에서 살던 사람이 붙여놓은 야광별이 하나 보였다. 그 별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면 거짓말처럼 그때가 생생히 눈앞에 펼쳐졌다. 점차 주황빛에서 보랏빛으로 변해가는 하늘에서 고개를 내밀던 샛별. 희미하게 퍼져가는 검은 연기. 코를 찌르는 비릿한 피 냄새. 느릿하게 해가 넘어가는 서쪽 하늘이 유난히 붉게 물들어있었다.
모드레드는 자기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모두들 상처를 치료할 생각도, 숨을 거둔 동료를 옮길 생각도 안 하고 그저 앞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모드레드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오른팔을 봤다. 마검 클라렌트. 이번에는 그때처럼 인자 구조를 바꾸지 않았고, 프로그램을 활성화할 시간도 충분했기에 검에 침식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석양을 받은 검의 검붉은 빛이 액체가 되어 그대로 흘러내릴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앞으로 몇 분 후면 착각이 아니게 되겠지만. 모드레드는 검에서 시선을 떼어 다시 앞을 바라봤다. 저 멀리서 한 손에는 횃불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조잡한 무기를 든 사람들이 지평선을 까맣게 물들이고 있었다. 메마른 표정으로 앉아있던 기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궁을 공격해오는 무리들은 다름 아닌 브리튼의 백성들이었다. 한때 아서왕을 칭송했던 그들은 이제는 소리 높여 왕을 공격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혁명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었지만 모드레드는 어떻게 그게 혁명이고 정당성을 얻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세 아서가 정말로 부도덕한 왕이었다면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편에서 같이 싸웠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드레드가 아는 세 명의 아서왕은 결코 부정하고 부도덕한 왕이 아니었다. 대대손손 칭송받아야 마땅할 성군은 아니었을 지라도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진실했던 사람들이었다. 요정들은 쉬지 않고 아서왕은 폭군이 아니었노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귀족들의 간교한 계책과 타락한 성직자의 감언이설에 눈이 먼 사람들은 믿으려하지 않았다. 설득은 먹히지 않는다. 광기에 휩싸인 사람들은 무기를 들고 왕궁을 공격해온다. 이 상황에서 모드레드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호수가 파괴된 후에도 살아남은 기사들을 규합하여 왕궁으로 향하는 길목을 막는다. 본디 왕을 베기 위해 만들어진 검으로 백성들과 병사들을 베어 넘긴다. 모드레드에게 주어진 임무를 아는 사람들은 그더러 백성을, 나라를 배신했다고 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먼저 왕을 배신한 것은 그들이 아니었던가. 지금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은 그들이 아닌가. 모드레드는 자기에게 쏟아지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또 한 명 기사가 쓰러졌다. 이성을 잃은 병사들이 검으로, 창으로, 농기구로 그 몸을 유린했다. 모드레드가 홀로 쓰러진 기사를 둘러싼 무리들을 돌파하여 구출하러 갔지만 기사는 이미 처참한 모습으로 숨을 거둔 뒤였다. 죽음을 애도할 새도 없이 등 뒤에서 작은 낫 하나가 모드레드의 어깨를 찍었다. 이를 악물고 몸을 돌리며 뒤에 서있던 농민의 가슴을 벤다. 가까이에 있던 다른 사람이 “프란츠!”하고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죽여라!”하고 외치자 메아리처럼 이곳저곳에서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모드레드는 이를 악 물고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자기를 향해 달겨드는 사람을 공격하려는 순간, 썩은 나무 등걸이 힘없이 부러지는 것처럼 오랫동안 정비를 받지 못해 쇠약해져있던 몸이 무너졌다. 왼쪽 무릎에 힘이 빠져 그대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는다. 클라렌트에 접속 되어있던 오른팔이 뒤로 날아갔다. 날에 풀물이 들어있어야 할 텐데 붉게 물들어있는 낫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모드레드는 이제 끝이라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목숨도, 아서왕과 엑스칼리버의 전설도 모든 것이.
낫이 남아있는 왼쪽 어깨에 깊숙이 박혔다.
그대가 보기에는 어떤가? 이게 올바른 왕국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검을 잡아라!
태양처럼 눈부시게 빛나던 그가 언뜻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조잡한 창이 오른쪽 허벅지를 꿰뚫었다.
왕을 우습게 보지 마. 내 왕국에서 안이한 비극 따위 허락하지 않아!
누구보다도 강하고 당당하던 그녀가 언뜻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낡은 검이 옆구리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미안해요. 항상 당신에게는 무거운 짐만 짊어지우네요.
달빛만이 비추는 어두운 방에서 그가 울면서 웃었다.
또 다른 검이 왼쪽 가슴을 찔렀다.
기사가 절명했다. 그러나 이성을 잃은 병사들은 계속해서 그 몸을 검으로, 창으로, 농기구로 유린했다. 그곳에 있던 모든 기사들이 차갑게 변한 뒤에야 사람들은 소리 높여 자신들의 승리를 축하했다. 해는 이미 오래전에 저문 뒤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왕을 죽이기 위해 태어났던 기사가 왕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은 셈이었다. 위태롭게 지속되던 성검시대는 모드레드의 사망을 기점으로 완전히 몰락하고 만다. …왜곡과 파괴는 모드레드 역시 피해갈 수 없었다. ‘배신의 기사’는 부각되고 ‘심판자’는 약화되었다. …요정들이 기록을 공개한 뒤에야 성검시대를 잠식하고 있던 깊고 어두운 악의가 벗겨지게 되었다. 아서왕과 기사들의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모드레드는 ‘왕국의 심판자’외에도 끝까지 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나라를 지키려 했던 ‘최후의 기사’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존 A. 헬릿, 「성검의 몰락」 전 3권 중 3권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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