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아(백업)

판도라의 상자

확밀아 / 브리튼채널 / 란슬검서

란슬롯과 검서의 이야기
삶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잔혹하다.


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성벽 바깥쪽은 아직도 대낮처럼 환했다. 희미하게 들리는 흥겨운 음악소리 사이로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마시는 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란슬롯은 발코니 난간에 기대서서 광장에서 흥겹게 춤추고 있을 사람들을 상상해봤다. 분명 얌전하고 내성적인 사람도 웃으며 그 사이로 뛰어들 정도로 행복하고 즐거운 풍경이리라. 란슬롯은 그게 기쁘기는커녕 야속하기만 했다. 그들이 무엇을 축하하며 밤새 놀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분명 이렇게 될 줄을 알고 있었고 또 각오하고 있었는데, 막상 그 일이 코앞에 닥치자 란슬롯은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등 뒤에서 발소리가 다가왔다. 팔을 뻗으면 닿을까 말까한 거리에서 멈춰 선 발소리의 주인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란슬롯을 불렀다. 란슬롯은 못 들은 척 시치미를 떼려했지만, 그랬다가는 다음 날에 그를 보기가 더욱 힘들어질 것 같아서 “불렀소이까?”하고 대답하며 몸을 돌렸다. 마냥 미숙해보였던 소년에서 듬직한 청년으로 성장한 아서가 우울한 얼굴을 하고 서있었다. 그 모습에 가슴 한 구석이 아려왔지만 란슬롯은 태연한 척하며 질문했다.

“무슨 일이 있었소이까? 경사스러운 일을 앞두고 왜 그리 울상을 짓고 있는 것이오?”
“경은……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순간 욱한 아서는 나무라는 어조로 대답하다가 곧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고 입을 닫았다. 그 자세로 가만히 있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하는 얼굴에는 억지로 꾸며낸 태연한 표정이 떠올라있었다. 아서가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란슬롯 역시 아서처럼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억지로 삼켜버렸다. 아서는 란슬롯의 옆에 서서 환하게 빛나고 있는 성벽 위의 하늘을 바라봤다. 란슬롯도 아서와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날이 샐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축제도 이제 시들해져가는지 아까보다 음악 소리가 많이 작아져 있었다. 음악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서있기만 했다. 음악이 끝나고 환했던 하늘이 도로 어두워진 다음에야 아서는 난간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아서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란슬롯에게로 고개를 돌려 처연하게 웃었다.

“고마웠네. …앞으로 잘 부탁하네.”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나의 왕은 귀공뿐이외다.”

아서가 자리를 떠난 후에도 란슬롯은 한참동안 발코니에서 서있었다. 몸을 때리는 차가운 바람이 남아있는 마음이며 미련을 모두 실어서 날아가 버릴 거라고 믿는 것처럼. 날이 밝으면 검술의 성을 다스리는 아서와 카멜리아드국의 기네비어 공주의 결혼식이 거행될 것이다.

연합 국가 체제가 막 자리를 잡았을 무렵, 카멜리아드 국왕이 서신을 보내왔다. 삼대 세력의 아서가 화평을 맺고 같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을 축하하는 말로 시작한 서신은 하루 빨리 기네비어와의 혼약을 시행해달라고 재촉하는 말로 끝나있었다. 검술의 성을 다스리는 아서와 꼭 맺어졌으면 한다는 말과 함께. 그제야 기네비어가 무엇 때문에 카멜롯에 있었는지를 떠올린 사람들은 난색을 표했다. 아서와 서포트 기사인 란슬롯이 연인 관계라는 것은 검술의 성에 소속된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기네비어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아서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애초에 기네비어가 아서와 약혼하게 된 것도 카멜리아드 국왕이 저 혼자서 정한 일이 아니었던가. 카멜롯에 와서 아서와 부대끼는 동안 기네비어도 나름 아서에게 정이 들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친구로서의 정이지 결코 이성으로서의 정은 아니었다. 그러한데 억지로 연인 사이에 끼어들어가 사이를 갈라놓으라니, 기네비어의 양심이 절대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기네비어가 아무리 저항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변할 수가 없었다. 검술의 성은 브리튼을 지배하는 삼대 세력 중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이었다. 연합 국가 체제를 세웠다고는 해도 그게 영원히 지속될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런 불안한 상황에서 카멜리아드 국왕이 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승리할 가능성이 제일 높아 보이는 세력과 손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그냥 버릴 리가 없었다. 본디 왕족의 혼약이란 그런 것이었다. 카멜리아드는 검술의 성에 비해 매우 작은 나라였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힘으로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카멜리아드는 기네비어의 고국이자 원탁을 관리하는 일족이 다스리는 국가였다. 현재의 브리튼은 호수와 원탁, 그리고 기사들을 기반으로 세워진 국가. 카멜리아드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 기나긴 내전으로 지친 백성들을 다시 내전의 불길 속으로 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 끝에 아서는 국가를 위해 기네비어와 혼인을 올리기로 결정했다. 기네비어가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며 말렸지만 아서는 이미 단단히 결심을 굳힌 뒤였다. 란슬롯은 아서의 선언을 듣고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왕은 국가를 위해서라면 자기 한 몸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버릴 인물이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언젠가는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처음부터 결말이 정해져 있던 이야기란 걸 알면서도 욕심내어 탐했다. 지금 정해져 있던 결말이 찾아왔다. 단지 그 뿐이었다.

동쪽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란슬롯은 결국 발코니에서 그대로 밤을 새고 말았다. 란슬롯은 해가 떠오르는 방향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마음을 접고 묻어둔다. 왕과 기사라는 관계로 되돌아간다. 이미 모드레드와 가웨인이 해보인 일이다. 그러니까 자신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저 그 둘보다 약간 더 아플 뿐이다.

결혼식은 소박하게 치러졌다. 란슬롯은 처음부터 끝까지 묵묵히 결혼식을 지켜봤다.



“아직도 믿겨지지가 않아.”
“뭐가?”
“전부 다. 내가 아서고, 형이 란슬롯이고, 가웨인과 모드레드도 있고… 그냥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집으로 바래다주는 길.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다시 태어난 아서는 여전히 모든 게 믿기지 않는지 반신반의한 표정이었다. 란슬롯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아서의 볼을 힘껏 꼬집었다. 방심하고 있었던 아서는 그대로 당해버렸고, 으아악하고 비명을 지르다가 무슨 짓이냐고 화를 내며 손을 쳐냈다. 란슬롯은 능청스럽게 왜 화내는지 모르겠다는 투로 대답했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면서.”
“그렇게 세게 꼬집을 필요는 없었잖아!”

아서는 버럭 화를 내며 란슬롯의 다리를 걷어차려 했다. 란슬롯은 요령 좋게 겅중겅중 뛰며 공격을 피했다. 제풀에 지친 아서가 씩씩거리며 포기하자 란슬롯은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사과했다. 아서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란슬롯을 노려보다가 홱 고개를 돌려버렸다. 지금의 아서는 예전의 아서와는 많이 달랐다.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운 건 똑같았지만 왕이라는 무거운 이름을 짊어진 예전과 달리 잘 웃고, 화내고, 장난치는, 그 나이 또래에 딱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때 역시도 왕의 책무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았을까? 란슬롯은 덧없는 생각을 하며 쓰게 웃었다.

아서는 아직 기억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란슬롯은 그 점을 아쉬워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더 이상 기억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전생에서 자신과 그가 어떻게 끝났는지 몰랐으면하고 바랐다. 그때와 지금이 다르다는 건 알고 있다. 기억이라는 상자 안에도 그 일처럼 뒷맛이 씁쓸한 것만 담겨있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애매한 희망만으로는 란슬롯의 상처와 두려움을 덮어버릴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지금의 아서도 자신의 곁을 떠날 것이다. 그때 그랬던 것처럼.

아서가 란슬롯을 불렀다. 상념에 젖어있던 란슬롯은 그 목소리에 이제 헤어질 때가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서는 그새 화가 풀렸는지 표정이 어둡다며 란슬롯을 걱정했다. 란슬롯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아서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상체를 숙여 이마를 맞댔다. 깜짝 놀란 아서는 “다른 사람이 보면 어쩌려고!”하고 외치며 팔을 휘저었다. 란슬롯은 아랑곳 않고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일어섰다. 너무 당황해서 말이 제대로 안 나오는지 아서는 팔을 앞으로 쭉 뻗은 자세 그대로 버벅거리고 있었다. 란슬롯은 큭큭 웃으면서 아서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주며 잘 가라고 인사하고는 성큼성큼 뒤돌아 걸어갔다. 뒤늦게 제정신을 차린 아서가 왁 소리를 질렀지만 란슬롯은 못 들은 척하고 계속 발을 옮겼다. 어느 정도 거리가 생기자 란슬롯은 뒤를 돌아봤다. 아서가 애꿎은 돌멩이를 걷어차며 걸어가는 게 보였다. 뒷모습만 봐도 단단히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란슬롯은 애틋한 눈빛으로 아서를 바라보다가 엷게 미소 지으며 다시 몸을 돌렸다.

상자가 열리는 건 막을 수 없다. 언젠가는 헤어져야할 때가 올 것이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후회하지 않도록. 상처받지 않도록. 자그마한 희망에 기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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