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

이상한 남자와 헌책방

with. 헥터


파리에서의 답장이 이제야 도착했다. 케일럽은 어쩔 수 없이 휴가를 승인한다는 티가 잔뜩 나는 답신을 내려다보고 원래대로 접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자신의 서재로 쓰이게끔 만들어진 방은 아직도 어색했다. 케일럽이 뉴욕에서 한동안 머물겠다 결정한 이후, 저택에는 새롭게 방이 마련되었다. 케일럽은 자신이 처음 묵었던 손님방을 계속 쓰는 것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새롭게 방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담의 의지가 너무나 강해 결국 케일럽이 한 걸음 물러섰다. 케일럽은 이제 이곳에서 지내던 아홉 살이 아니었다. 그러나 마담에게 저는 아직도 보듬어 주어야 하는 아들 취급을 받고 있는 듯 했다. 그것이 상당히 불편했으나 케일럽은 스물 셋 인생의 절반 이상을 부모가 아닌 조부모 아래에서 자랐으니 그리움이 과하게 쌓여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넓게 생각하기로 했다. 미국에서 지내기로 한 것은 일단 기약이 없는 일이었으니 지내다보면 마담의 그리움도 서서히 희석될 것이다.  

 

이미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던 미국 생활이 확정되었으니 케일럽은 뉴욕에 대해 좀 더 알아갈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코람데오가 앞으로 어떤 식으로 움직이게 될지는 몰라도 미국에서의 생활이 단기간에 끝날 것 같지는 않았으므로 생활에 필요한 것들도, 취미생활에 필요한 것도 사야할 것 같았다. 물론 사람을 시키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일 테지만, 케일럽은 기사만을 대동해 직접 거리로 나섰다. 다른 것은 몰라도 미술용품만은 자신이 직접 골라서 사는 것이 만족스러울 터였다.

뉴욕의 거리는 여전히 북적이고 혼잡했다. 파리도 사람이 결코 적지 않았지만, 파리의 북적임과 뉴욕의 북적임은 느낌이 사뭇 달랐다. 무어라 딱 꼬집어 표현할 수는 없지만 뉴욕의 쪽이 좀 더 차가운 느낌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리저리 오가는 트램과 자전거, 차들의 대열에 끼어들어 지루하게 뉴욕의 시내를 달렸다. 케일럽은 현대적이고 높게 솟아 차 안에서는 그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건물들을 스쳐 지났다. 높은 건물들 사이에 끼인 것 같은 낮은 건물들을 간간이 발견하며 달리길 얼마간, 애초에 그리 빠르지 않았던 차의 속도가 더 줄어들자 케일럽의 시선이 기사에게로 향했다. 차라리 말을 타고 달리는 게 빠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케일럽의 머리를 스쳤다. 

 

"여기는 좀 더 막히네요. 찾으시던 미술용품점은 이 길로 조금만 더 가면 있어요."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인가요?" 

"그럼요. 10분이 채 안 걸릴 걸요." 

"그런 거면 걸어서 갈게요. 차로 오는 동안 물건 사고 있을 테니까." 

 

케일럽은 차가 잠시 멈춰 선 사이 문을 열고 내렸다. 차보다 사람의 발이 빠른 상황에 기사가 조금은 민망한 얼굴로 케일럽을 배웅했고, 케일럽은 그런 기사를 뒤로 하고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었다.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노신사가 곧은 자세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색색의 클로쉐 모자를 쓴 플래퍼 룩의 여성 세 명이 우아한 걸음걸이로 옆을 스쳐 지나고, 구두닦이 가방을 맨 아이와 기름때 묻은 오버롤을 입은 남자가 케일럽을 앞질러 걸어갔다. 바쁘게 혹은 느릿하게 거리를 걷는 사람을 사이에서 케일럽은 가게들의 간판을 하나하나 훑으며 천천히 걸었다.

케일럽에게 뉴욕은 짧은 유년기를 보낸 곳이었다. 어렴풋한 기억에 남은 도시의 모습은 현재와 사뭇 달랐다. 지금의 뉴욕은 제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 피해를 입지 않고, 채권국의 위치에서 세계의 경제를 주도해 나가는 진취적인 미국의 중심이었다. 파리가 예술가들의 도시라면 뉴욕은 자본의 집적지였다. 전에 없는 호황기를 맞이한 도시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곳곳에서 고층 건물들이 과거의 흔적을 밀어내며 하나의 군집체처럼 일어서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걷고 있던 케일럽이 까마득한 고층 건물 하나를 올려다보며 잠시 멈춰 섰다. 구름에 부딪쳐 산란하는 햇볕이 건물의 꼭대기를 또렷이 볼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눈을 찌르는 빛에 얼굴을 찌푸린 케일럽이 시선을 내렸다. 역시 회색을 연상시키는 칙칙한 뉴욕 같은 곳보다는 부드럽고 유연한 파리가 제게 맞는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곁에서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파리에서도 익히 겪어왔던, 소매치기의 손길이었다. 케일럽은 주인 모를 손이 제 주머니 속으로 안착하기 전에 손목을 잡아챘다. 몇 번 당하고 나면 익숙해지는 법이다. 케일럽이 소매치기로 돈을 잃은 것은 몇 년 전의 일이 마지막이었다.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힘주어 움켜잡은 손목을 따라 위로 올라가자 강렬한 적색의 머리칼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단정치 못한 머리칼 아래의 얼굴은 왜 갑자기 사람의 손목을 잡아채느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케일럽은 속지 않았다.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손목을 잡힌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지나치게 침착해 보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손이 들어가야 할 주머니를 착각한 것 같아서 잡아준 겁니다." 

"그것 참 친절하기도 하네."

 

퉁명스러운 말과 함께 손목을 빼내는 남자는 날카로운 듯 하면서도 다른 의중이 있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머리의 색을 옮겨 담은 듯한 눈이 케일럽을 직시하고 있었다. 케일럽의 푸른 눈이 남자의 붉은 눈을 가만히 마주했다. 

 

"앞으로는 아무리 상황이 궁해도 잘못된 주머니를 찾아들어가는 일은 없었으면 하네요." 

 

담담한 케일럽의 말에 남자는 아무래도 짜증이 솟은 것 같았다. 조금 치켜 올라간 눈매로 노려보는 모습이 퍽 사나웠다. 그렇게 쳐다보기에 무언가 할 말이 있는가 했는데, 남자는 그대로 몸을 돌려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남자가 인파 사이로 스며들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선명한 붉은 머리칼을 눈으로 좇았다. 어디선가 다시 또 소매치기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험부담이 있는 그런 것보다 좀 더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잠시 고민했으나 케일럽은 이내 그 생각을 털어냈다. 남자의 인생은 남자가 알아서 할 것이다. 솔직한 마음으로 소매치기의 대상이 자신만 아니면 상관없었다. 

 

전혀 예정에 없던 만남 덕분에 케일럽은 정체에 시달리던 기사보다 늦게 미술용품점에 도착했다. 중간에 대체 어디를 다녀온 건지 묻는 기사의 눈빛을 모른 척 흘려보내며 케일럽은 그를 피해 미술용품점 안으로 사라졌다. 작은 가게인가 했더니 안쪽으로 제법 깊어 결코 작지는 않은 가게였다. 적어도 케일럽이 찾는 것들은 다 있을 것 같은 곳이었다. 먼저 도착했던 기사가 복잡한 틈을 비집고서 차를 세워놓고 기다리는 동안 케일럽은 당장 쓸 만한 것들을 이것저것 구입했고, 부피가 있는 캔버스 같은 물건은 배달을 부탁한 다음 느긋하게 가게를 벗어났다. 케일럽이 언제쯤 나올지 오매불망 기다리며 가게 안을 기웃거리던 기사는 이 복잡한 곳에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내심 기뻐하는 듯 보였다. 차에 오른 케일럽은 창문 너머로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붉은 머리는 다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일주일 후, 케일럽은 영영 다시 만날 일이 없을 줄 알았던 붉은 머리의 남자를 다시 마주하고 있었다. 핏빛을 연상시키는 짙은 색채의 머리칼은 기억에서 쉽게 지울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때문에 케일럽은 남자의 머리색을 본 순간 선명히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날의 일을 떠올린 것이 케일럽뿐만은 아니었던지, 케일럽을 알아본 남자가 잠시 얼굴을 구겼다가 풀었다. 일주일 전 보았던 짜증 솟은 얼굴과는 뭔가 달라 보이는 표정이 남자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그것에 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케일럽은 자신이 들어선 공간을 둘러보았다. 실례일진 모르나 중고서적들이 쌓여있는 헌책방은 별로 남자가 있을 공간 같지는 않았다. 가게를 약탈하기라도 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소매치기는 그만두기로 했나 봐요."

"하루 대신 일 해주는 거야. 정상인 연기 중이니까 그냥 감상해."

 

그런 거였나. 케일럽은 남자의 얼굴을 보고 느꼈던 묘한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정상인을 연기하는 중이라 했으니, 그 말인즉슨 꾸며낸 얼굴이었던 것이다. 케일럽은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있거나 바닥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책들을 훑어보며 여상한 어투로 툭 내뱉었다. 

 

"보기보다 인생을 피곤하게 사는 타입인가 보군요."

"설마. 나는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을 때만 연기해."

 

가볍게 대꾸하며 비죽 웃어 보인 남자가 찾는 책이라도 있느냐 선뜻 물어왔다. 그 모습이 정말이지 헌책방에서 착실하게 일을 하는 사람 같아서, 케일럽은 의외라는 시선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와의 첫 부딪힘이 미수에 그친 소매치기인 탓인지, 생각하는 바를 감춘다거나 하는 의례적인 예의가 차려지지는 않았다. 더불어 남자의 앞에서는 굳이 어떠한 척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실제는 그렇지 않아 보이는 이가 다른 모습을 꾸며내 연기를 한다는 점에서 공교롭게도 케일럽은 남자에게 이상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배역을 연기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어떠한 것이었다. 이런 남자에게 동질감을 느낀다는 것에 기분이 몹시 불편했지만 어쨌든 그러했다. 

 

"정상인 연기를 한다고 일까지 정상적으로 하는 건 의외고요." 

"정상인은 배역이고, 멀쩡히 일하는 게 연기잖아. 당연히 정상적으로 일해야지."

"그런가요? 참 독특한 사람이네요. 멀쩡히 일하는 연기를 한다면 어울려 주죠. 로비스 코린트의 화집을 찾고 있어요. 1890년도에 나온 화집인데..."

 

남자는 케일럽이 읊어준 책에 대한 정보 몇 가지를 가지고 금세 책을 찾아냈다. 사실 헌책방에 이 화집이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던 케일럽이 모호한 눈빛으로 제 손에 들린 화집을 내려다보았다. 절판된 화집을 이렇게 구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긴 했다. 멀쩡히 일하는 게 연기이니 정상적으로 일하는 게 당연하다는 남자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굉장히 불성실해 보이는(혹은 그런 이미지를 남긴) 남자가 책을 쉽게 찾아준 것은 정말이지 이상했다. 케일럽은 혼란함이 넘실거리는 눈을 깜빡이곤 헌책방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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