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

케일럽 개인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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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세상은 잔잔했다. 주변에서 어떤 격랑이 몰아쳐도 아이의 세상에 들어오면 그것은 작은 파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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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햇살 아래 어느 날 아이는 동생을 밀쳤다. 자신의 공을 동생이 가져간 뒤 흠집이 생겼다는 이유였다. 도련님, 아무리 화가 나도 아직 어리고 약한 동생을 그렇게 밀치면 안 돼요. 유모가 말했다. 무릎이 까진 동생을 보듬는 유모를 멀거니 서서 내려다보던 아이는 고개를 기울였다. 화 안 났어요. 그 말을 들은 유모가 거짓말을 하면 나쁜 아이라 가볍게 꾸짖었다. 화가 난 얼굴인데 왜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도련님. 대꾸할 말을 잃은 아이는 더더욱 알 수 없어졌다. 자신이 화가 났나? 아이는 생각했다. 자신은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단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똑같은 피해를 줬을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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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어린아이의 몸으로 버텨내기엔 더욱 더 어려운 여정이었다. 가야한다고 했기 때문에 배에 올랐다. 아이의 곁엔 항상 선생이 함께했다. 춤을 가르치던 선생. 그는 긴 여정 동안 아이의 보호자였다. 선생은 보호자로서 아이를 살뜰히 챙겼고 돌보았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몸은 본래 약하디 약한 것이라, 아이는 자주 어지럼증을 느꼈고 대부분의 시간을 잠에 빠져 보냈다. 많이 힘들지? 조금만 더 버티자. 선생이 말했다. 머리를 쓰다듬는 선생을 올려다보며 아이는 눈을 깜빡였다. 이건 힘든 건가요? 이번에는 선생이 눈을 깜빡였다. 힘들어서 얼굴이 파리한데 무슨 말을 하는 거니. 어른스러운 것도 좋지만, 힘들 땐 힘들다고 말할 줄도 알아야 해. 선생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아이는 입을 닫았다. 자신은 힘든 것이 아니라, 몸이 조금 이상해진 것뿐이라고 생각하며. 

 

긴 여정 끝에, 아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조부와 외조모를 마주했다. 아이는 몇 걸음 앞에서 팔을 벌린 외조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오길 바라고 있는 걸까 생각하는 사이 선생이 가볍게 등을 밀며 말했다. 뭐 하니, 할아버지께서 안아보려고 기다리시잖아. 그 말에 선생을 올려다 본 아이는 이내 타박타박 걸어가 그 팔 안에 가만히 몸을 맡겼다. 외조부의 품에서는 독한 향기가 났다. 가만히 선 아이의 등을 도닥인 외조부가 이내 아이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 단단한 어깨를 감싸며 외조모가 물었다. 아가, 할미와 할아비를 만나는 것이 반갑지 않니? 고개를 기울인 아이가 답했다. 심장이 콩콩 뛰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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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그립지 않니?

그리운 것 같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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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갖고 싶던 거였으니까 마음에 드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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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발레 아카데미 입학을 축하한다. 기쁘지 않니?

아마도 기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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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낯선 남자를 만났다. 외조모는 그를 의사 선생이라 불렀다. 케일럽, 하고 싶었던 걸 하게 된다는 건 어떤 거지? 의사 선생의 질문에 아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고 싶었던 걸 하게 된다는 건 이득이 되는 일이다. 이득이 된다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아이는 입을 열었다. 좋은 일이죠. 고개를 끄덕인 의사 선생이 다시 물었다. 좋은 일이 일어나면 선생님은 기뻐. 기쁜 건 어떤 걸까? 그 질문에 아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좋은 일이 곧 기쁜 일이라는 사실은 그동안 보고 들은 것으로 익혔다. 그렇다면 기쁘다는 것은 어떤 거지? 아이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의사 선생은 참을성 있게 아이의 대답을 기다려주었고, 고민 끝에 아이가 내놓은 대답이라고는 '잘 모르겠어요'가 다였다. 이후로도 아이는 의사 선생과 몇 가지의 문답을 더 주고받았다. 

 

의사 선생은 외조모와 외조부에게 아이가 감정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말했다. 그 외에도 무언가 많은 말들을 하는 것 같았지만 서재 문 너머로 아이가 엿들을 수 있는 것은 그 한마디 정도였다. 의사와 문답을 주고받는 일은 어딘가 아플 때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감정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는 게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그렇다면 감정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일은 나쁜 일이라는 의미였다. 때문에 아이는 감정을 익혀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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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주변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들의 표정, 몸짓, 말투, 목소리의 높낮이를 살폈다. 개개인의 차이는 있었지만, 드러내는 표현들에서 여러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는 화를 내게 되는 상황을 이해했다. 화가 난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를 익혔다. 즐거운 사람의 반응을 익혔고, 기쁜 사람의 반응을 익혔다. 슬픈 상황이 어떤 것인지, 감정에 따라 몸이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되는지를 알아갔다. 상황에 맞는 반응과 감정이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미완성의 아이는 후천적으로 완성에 가깝도록 만들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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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의 여름,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선 아이는 거의 모든 감정을 인식했고 이해했으며 표현할 줄 알았다.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듯, 필요에 따라 감정 표현을 사용할 줄 알았다. 외조모와 외조부의 안심하는 눈빛을 보며 아이는 감정을 익힌 것이 옳은 일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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