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

Bunch of red roses

with. 로렌스


예술의 어원은 기술을 의미하던 말이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처음으로 '기술'을 필요에 의한 것과 기분 전환 및 쾌락을 위한 것으로 이분했다. 그렇게 전자가 기술이 되고 후자는 예술이 되었다. 예술은 단순히 미美만을 내포하지 않는다. 희로애락을 포함하여 예술에는 한 손에 꼽을 수 없으리만치 많은 것들이 함축되어 있다. 예술은 언제나 사람들을 향해 많은 것을 말한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오롯이 관찰자의 몫이며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하나의 언어와 다름없다. 케일럽은 예술이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단지 자신이 예술에 몸담은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예술을 접함으로 살아있음을 느낀다거나, 마른 감정에 단비가 내리는 것 같다거나 하는 우스운 이유 또한 아니었다. 케일럽은 예술이 언어로써 후대로 지속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어머니가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이유 역시 비슷했다. 때문에 케일럽 역시 예술에 돈을 쓰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후대에 전해질 언어들이 예술가들의 손에서, 몸에서 끊임없이 만들어질 필요가 있었으므로.

 

케일럽의 하늘색 눈이 불그스름하게 노을 지는 배경 속에 서 있는 줄무늬 하이에나를 담았다. 위니프리드 오스틴. 그녀는 동물들을 섬세히 묘사하는 뛰어나고 드문 재능을 가진 화가이자 삽화가였다. 그녀의 그림들을 한데 모아 열린 특별전은 그녀만의 담담하고 따뜻한 색채로 갤러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림 속 하이에나는 가만히 선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뒷발에 힘을 주고 당당히 선 하이에나의 눈빛과 섬세한 털의 표현이 인상적인 그림이었다. 그리고 케일럽은 자신이 그림 속 하이에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곳을 바라보는 하이에나를 보고 있는 자신이 있고, 그림을 바라보는 저를 보는 누군가의 시선이 있었다. 처음 시선을 느꼈을 때엔 우연히 잠시 닿은 시선이거나, 자신이 잘못 느꼈을 것이라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우연이 반복되면 그것은 더 이상 우연이 아니라고 했던가. 케일럽은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으로 모자라 슬며시 다가오는 듯한 인기척을 느꼈다.  

 

다가오는 인기척을 더는 무시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을 때 마주친 것은 말갛고 선한 인상의 얼굴이었다. 부유한 집안의 자제인가 싶은 남자는 몸을 살짝 굽힌 채 케일럽의 얼굴을 살펴보려는 듯한 자세를 하고 있었는데, 맑은 색의 녹빛 눈동자가 반짝이며 나이를 짐작하는 것을 어렵게 했다. 희미한 눈가의 주름과 짙은 갈색 머리칼 사이 드문드문 보이는 새치가 마냥 어린 나이는 아님을 말했다. 어딘가 낯이 익은 듯하면서도 낯선 남자는 시선이 마주치자 조금 멋쩍게 웃었다. 그러나 눈에 스민 것은 희미한 반가움이라, 케일럽은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다. 묘하게 낯이 익긴 한데, 자신이 이런 남자를 알고 있던가?

 

"우리가 아는 사이인가요?"

"삼 년 전 미국에서 발레 순회공연을 하지 않았나요?"

"…했습니다만."

"그때 꽃다발을 준 적이 있는데. 혹시 기억하시는지…?"

 

또렷한 발성과 영국인 특유의 발음을 들으며 케일럽은 서서히 그가 누군지를 기억해냈다. 발레뤼스가 미국 순회공연―성과라고는 좋게 말해봤자 실 두 가닥만큼도 건지지 못했던―을 했을 때, 뉴욕 공연을 마친 후 가드들과 실랑이를 벌여가며 화려한 꽃다발을 전해주고 사라졌던 남자. 이름은 알 수 없었다. 남자의 인상 뚜렷한 말투에서 그를 어렵지 않게 떠올린 케일럽이 남자 쪽으로 조금 돌아서며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기억합니다. 그때 무척 화려한 장미 꽃다발을 줬었죠.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러게요. 정말 이렇게 우연히 다시 만날 줄이야.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내밀어진 손을 맞잡은 남자가 가볍게 흔들었다. 웃음기 띤 얼굴 위로 과거의 얼굴이 겹쳐졌다. 퍽 신실한 얼굴을 하고서 자신이 더 감사했다고 했던가. 이렇다 할 성과를 건지지 못했던 미국 순회공연에서 남자가 주었던 장미 꽃다발은 케일럽의 기억에 남은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다. 그 기억을 남겨준 주인공을 삼 년 뒤 뉴욕의 어느 한 갤러리에서 마주칠 확률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케일럽이 사람의 인연이란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사이 악수를 주고받은 남자는 케일럽이 보고 있던 하이에나 그림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그림의 표현이 참 섬세하죠. 영국에 있을 때 본 적이 있어요."

"위니프리드 오스틴은 동물 묘사에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죠. 파리에서 전시를 본 적이 있어서 이번 뉴욕 전시에도 오게 됐어요."

 

남자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 케일럽이 그 옆에 선 채 그림을 바라보았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발걸음은 비슷한 속도로 움직였다. 누군가의 걸음이 다음 그림으로 넘어가면, 다른 이의 걸음도 다음 그림에 도착했다. 사람의 작품 관람 속도라는 것은 개인별로 그 속도가 천차만별이었지만 대체로는 비슷한 속도를 띄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어쩌다 보니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작품을 감상해나갔다. 대화는 드문드문 이어졌다. 많은 말이 오간 것은 아니었으나, 간간이 그림에 대한 느낌을 주고받을 상대가 나란히 작품을 보고 있다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다양한 종의 네 발 짐승들과 새들을 연필로, 수채화로 표현한 작품들을 눈에 담던 케일럽과 남자의 발걸음이 갤러리를 한 바퀴 돌아 출입구에 다다랐다.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가까이의 카페에 같이 가지 않겠어요? 베이커리 메뉴가 함께 있는 괜찮은 곳을 압니다."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나쁘지 않겠죠." 

 

조금 아쉬운 기색이 보이는 듯한 남자의 말에 잠시 고민한 케일럽이 선뜻 승낙의 뜻을 밝혔다. 어차피 제게는 다음 일정이 없었고, 삼 년 전 그가 건넨 꽃다발에 조금 더 감사함을 가지는 것이 옳은 일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케일럽은 갤러리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운전기사를 먼저 돌려보내고 앞장서는 남자를 따라나섰다. 마치 갤러리에서 그러했듯 나란히 걸음을 옮기며 케일럽은 통성명을 통해 그의 이름이 로렌스 하트이며 교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남자 역시 케일럽의 이름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이 곳인가요?"

"네. 여기 케이크 류가 아주 괜찮아요." 

 

카페 드 플로리스라는 이름이 천으로 만들어진 어닝에 큼지막하게 쓰인 카페였다. 가게 밖으로 내놓은 테이블은 이미 손님들로 제법 북적거렸고 가게 안의 상황 역시 비슷한 듯했다. '괜찮은 곳'이라던 로렌스의 말을 증명하는 듯한 바쁜 모습에서 사람들의 활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가게 안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로렌스의 추천에 따른 얼그레이 티 케이크와 레몬 드 크렘 쉬폰 케이크, 커피 두 잔이 오래 지나지 않아 테이블에 정갈하게 놓였다.  

 

"케이크 류는 다들 보통 이상이지만 이 쉬폰 케이크는 이 카페의 시그니처 메뉴죠. 먹어봐요."

 

로렌스의 친절한 권유에 케일럽은 옅은 레몬빛 크림을 끼얹은 듯한 모양새의 케이크를 잠시 내려다보다 포크로 한 쪽 귀퉁이를 잘라 입으로 가져갔다. 시그니처 메뉴라던 로렌스의 말대로 케이크는 상당히 뛰어난 맛을 갖고 있었다. 신선한 레몬 향과 상큼하면서도 부드러운 크림의 맛이 폭신하고 촉촉한 쉬폰 시트와 조화롭게 잘 어우러졌다. 맛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로렌스의 얼굴에 엷은 웃음이 번졌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됩니까?"

"괜찮습니다.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발레뤼스에는 언제부터 있었나요? 이전에도 발레에 관심이 많아 공연을 자주 보러 다녔었는데, 당신은 그때 뉴욕 공연에서 처음 봤거든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케일럽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1915년에 발레뤼스의 단원이 됐어요. 그리고 1918년부터 솔로를 하기 시작했으니까 그 이전 공연을 봤다면 무대에 있어도 보이지 않았을 거예요." 

 

드미 솔리스트 자리에 올랐던 것이 그 즈음이었다. 그때부터 솔로 파트가 생기기 시작했으니 그 이전이라면 군무를 추는 발레 무용수들 사이에 섞여 잘 보이지도 않았을 터였다. 케일럽은 새삼 그가 3년이나 지난 공연에서의 모습을 기억하고 자신을 알아봤다는 것이 조금쯤 신기했다. 

 

"뉴욕 공연이 굉장히 인상 깊었나 봅니다. 그때 미국 순회공연은 빈말로도 성과가 좋았다고 하기 어려웠거든요."

"뉴욕만 그랬던 것이 아닌가요?"

"네. 미국 공연 전체가 뉴욕과 비슷했었죠. 객석은 절반 정도가 차면 많다고 봐야 했고, 반응도 그다지 좋지 못했고."

"요즈음 미국은 아무래도 현재의 해소에 급급한 모습이니까요."

"말씀하신 대로 그런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어요. 거기다 아직까지 미국에서의 발레는 무용에 가깝고, 관중 앞에서 공연되는 예술이라기엔 토착 요소를 많이 갖고 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만큼 독특한 색채를 가져나가는 중이기도 하니까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지는 지켜봐야겠죠."

 

케일럽은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는 로렌스의 반응을 보며 미국에서 발레가 어떻게 발전하게 될지에 대해 사견을 몇 마디 덧붙였다. 케일럽이 생각하기에 미국에서 발레는 유럽에서 지켜왔던 정통성을 곧이곧대로 이어가진 못할 것 같았다. 그러기에 미국은 너무 다양한 이민자들의 문화와 춤을 끌어안고 있었고, 앞으로도 끌어안아 갈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미 들인 것을, 혹은 이전부터 있던 것을 배척하고 지워내는 일이 마냥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록하트 씨는 고전발레가 그 모든 것을 끌어안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뜻인가요?" 

"그렇죠. 고전발레는 정통성을 중시하고 나름의 체계와 규칙을 갖추고 있어요. 부드러워 보이지만 딱딱한 구석도 있다는 거죠."

 

고개를 끄덕이곤 커피를 두어 모금 마시며 생각에 잠겨있던 로렌스가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케일럽은 짧은 생각 후 새롭게 대답했고, 역으로 또 다른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돌려받으며 두 사람의 대화는 소소하게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윽고 온기를 잃은 커피잔이 바닥을 드러내 보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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