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

Hypocrisy

개인로그


고래古來에 인간은 꾸준하게, 무언가를 두고 나누는 것을 참 좋아했다. 세상의 것들을 멋대로 나누어 분류하고 묶다가, 그네들 스스로도 다양한 기준으로 분류했다. 사람 간의 계급을 나누고, 특징으로 종을 분류한다. 사람만 해도 개인에게 따라붙는 꼬리표의 개수는 적어도 하나 이상이다. 나누는 잣대의 기준은 다양했다. 성별, 가진 부의 크기, 피부의 색, 타고 내려온 핏줄까지 기준은 무수히 많았다. 그 기준으로 사람들은 위와 아래를 정했다. 그 위아래가 공고해질수록 사람은 태어나기 전부터 위치가 정해지곤 했다. 케일럽의 시선이 테이블 위로 티팟을 내려두는 메이드의 부른 배에 가 닿았다. 저 배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흑인이 될 것이고, 그저 그런 혈통의 금전적으로 보통이거나 가난한 집안의 아이가 될 것이다. 

 

그렇게 나누어진 계급 혹은 등급의 아래쪽에 있다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라는 것 정도를 케일럽은 이해했다. 그 누구도 자신이 원해서 그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 하지만 요즘과 같은 때에도 사람은 태어난 순간 옛사람들이 공고히 해 온 계급에 끼워맞춰진다.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니 결국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위치를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이 백인 남성이며, 가진 부의 크기가 크고, 미국의 자산가와 프랑스 귀족의 피를 타고난 것처럼 사람이 자신의 위치에서 태어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룰렛처럼 운으로 결정된 것이라 해도. 조금 철이 들기 시작한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케일럽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케일럽이 지독한 차별주의자인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았다. 케일럽은 메이드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구박하지 않는다. 지나가는 걸인이 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시하지 않는다. 자신의 위치에서 그런 행동은 스스로를 깎아먹는 교양 없는 행동일 뿐이란 것을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한 존재에게 따라붙는 꼬리표는 때로 족쇄가 되기도 한다. 어찌 보면 기득권층일수록 많은 족쇄를 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일수록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 않은가. 신문에 인쇄된 '차별에 맞서 싸운다는'이의 얼굴 사진을 내려다보던 케일럽은 신문을 내려놓고, 뜨거운 찻물에 레몬 한 조각을 띄워주는 메이드에게 고마움의 뜻으로 고개를 짧게 까딱였다. 

 

메이드가 카트를 밀며 티 룸을 벗어나고, 케일럽은 내려놓았던 신문을 반으로 접어 옆으로 치웠다. 세상에 그런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줄 뿐, 저와는 별로 상관없는 내용의 인터뷰 기사였다. 이내 신문에 관심을 끈 케일럽이 깔끔한 색의 편지봉투를 집어 들었다. 불과 십여 분 전 자신을 코람데오 소속이라 소개하던 이에게 직접 전달받은 편지였다. 그가 우편물을 전달하기 위해 저택에 도착했을 때 케일럽은 잠시 외출을 한 상태였는데, 반드시 수신인이 직접 받아야 한다며 사십 분을 기다렸다 우편물을 전해주고 간 참이었다. 손잡이에 재규어가 조각된 은빛의 우편 칼로 봉투 입구를 가른 케일럽이 내용물을 꺼내들었다. 

[......와 같은 이유로 대행자 케일럽 멜빈 록하트의 승급식을 진행합니다.]

코람데오에 몸담게 된 이후 제게 새롭게 붙었던 '카펠라'라는 꼬리표가 코람데오의 자선사업에 보탬이 되도록 큰돈을 기부하여 '베가'라는 꼬리표로 바뀌게 되었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통지서를 잠시 내려놓은 케일럽은 자신이 코람데오에 투자했던 돈의 액수를 떠올려보려 노력했다. 가진 재산에 타격이 되는 액수는 아니었지만, 적은 액수의 돈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케일럽은 자신의 승급이 단순한 기부금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부금을 전달하고자 찾아갔던 당시의 대화를 더듬어본다면……. 

 

잠시 그날의 기억을 더듬던 케일럽이 통지서를 내려두고 찻잔을 들었다. 어찌 되었든 편지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며칠 뒤 있을 승급식에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베가가 되면 그때부터 코람데오 내에서의 발언권이 생긴다고 했던가. 언젠가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 이에게 들었던 내용이 문득 떠오른다. 그래봤자 베가 위로도 두 단계의 계급이 더 있으니 실제 발언권의 힘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마치 차의 씁쓸함 위로 희미하게 감도는 레몬의 향기처럼. 

며칠 뒤 케일럽은 리처드 맥도웰을 포함한 참관인 세 명이 보는 자리에서, 안젤리카 테일러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공연 때문이 아닌 다른 이유로 타인 앞에 무릎을 꿇는 일은 여전히 몹시 어색했다. 살면서 누군가에 무릎을 꿇을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한 탓이다.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내려다보며 잠시 그런 생각에 잠겨있던 케일럽이 별안간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선 안젤리카 테일러를 올려다보았다. '위대한 뜻에 따라 세계를 지키고 인류의 선함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을 바칠 수 있습니까?'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기이했다. 사실 이것을 말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케일럽이 입을 열었다. 내뱉는 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지난번에도 말했듯 난 인간의 선함이 힘을 가졌다고 믿습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숨겨진 능력을 지닌 마음이 선한 분과 함께 세계를 지킬 수 있어 기쁩니다."

 

그리고 고개를 든 얼굴과 마주친 것은 선명한 아이스 블루였다. 베일을 걷은 안젤리카 테일러의 단아한 얼굴이 서늘한 색을 품고 케일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초점은 맞지 않았지만 케일럽은 마치 그 눈을 똑바로 마주한 것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런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일까. 안젤리카 테일러는 이내 눈을 감고 검은 베일 아래로 다시 얼굴을 감추었다. 얼굴을 보여주는 것은 신뢰의 의미일까, 혹은 정말 무언가를 꿰뚫어 보려는 것일까. 케일럽이 그런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비쥬를 하듯 양 뺨 위로 가벼운 키스가 떨어져내렸다. 베일 너머 흐릿하게 보이는 감긴 눈을 쳐다보았다.

문득 안젤리카 테일러가 하는 이 일련의 행위들이 가진 의미가 궁금했다. 그저 의미 없는 허례허식일 뿐인가? 그러나 케일럽은 그녀가 어깨를 짚는 순간 모든 생각이 다섯 걸음쯤 뒤로 물러나는 것을 느꼈다. 외부의 자극에 의식이 환기된 것이다. 안젤리카 테일러를 올려다보며 케일럽은 눈을 깜빡였다. 이건 처음으로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팔다리에 언제나 잔재하던 피로감이 사라진 몸의 상태가 낯설다. 케일럽은 그제야 코람데오의 눈 먼 성녀가 가진 능력의 힘을 조금쯤은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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