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유메] 당신을 사랑하기에, 나는 오늘도
17.02.21 작업 완료
※세라피(@serapi__ff14 )님께 선물로 드린 글입니다.
※블리치(BLEACH)의 쿠로사키 이치고와 드림주 유메노 호고샤의 드림물입니다.
※공백미포함 7,862자.
※2017.02.21 작업 완료
당신을 사랑하기에, 나는 오늘도
1.
너, 그거 알아?
하나하키 병. 그게 뭔데?
뭐야, 몰랐어?
이름은 들어본 거 같은데.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꽃을 토하는 병이래.
헤. 신기한데.
신기하지! 그런데 병원에서는 치료할 수 없대.
불치병이야? 그럼 걸리면 죽는 거 아니야?
아니. 병원에서 치료를 못하는 것뿐이지, 치료법은 있어.
병원에서 못하는 치료라니. 그게 뭔데.
하나하키 병의 치료법은- -래.
낭만적이네.
2.
“…”
…어라. 문득,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순간 움찔했던 목소리의 주인은, 이내 익숙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제 목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또다. 또 안 나와. 답답하다. 목에 무엇인가가 걸린 듯 턱턱 막혀온다. 어째 숨소리가 쌕쌕 불안하게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기 분 탓일까. 한동안 잠잠하더니 결국은 또 시작이구나.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고. 놀랄 일도 아니지. 아마 계속 이럴 거야. 나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어. 제 목을 매만지던 목소리의 주인의 표정이 결연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불편함을 참아내는 표정인 것 같기도 했고, 고통을 삼켜내는 것 같기도 했다. 굳게 닫힌 입이 열리고, 덩어리들이 울컥울컥, 그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추락한다. 땅바닥에 크고 작은, 아름다운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꽃이 어디서 나왔느냐고? 바로 여기. 내 입에서. 꽃을 토하는 게 어디가 낭만적이라는 건지. 분명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의 말이겠지. 낭만적이기는 무슨, 아프기만 한데. 단순히 꽃을 토해 서 목이, 속이 안 좋다는 게 아니라 여기, 여기 내 마음도 아픈데. 그렇지만 말은 안 할게. 내가 아프다고 하면, 분명 날 걱정할 거야. 이 병이 일어난 게 다름 아닌 당신이라는 걸 알면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난 그걸 보기 무서우니까 말하지 않을 거야. 그냥 내 곁에만 있어줘. 내가 바라는 건 그거뿐이니까, 제발.
3.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아,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이치고는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통화목록에는 ‘누나’가 한 가득이었다. 며칠 전부터 꾸준히 쌓여있었다. 통화시간은 00:00.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그의 전화는 호고샤에게 닿은 적이 없었다. 이러니 그가 걱정이 안 되겠는가.
“…군. 쿠로사키 군?”
“응? 아, 미안, 이노우에. 뭐라고 했어?”
누나 생각에만 집중하느라고 주변의 소리를 못 들었나 보다. 이치고는 문득 귀를 뚫고 들려오는 오리히메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오리히메의 표정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쿠로사키 군, 표정이 안 좋아. 어디 아픈 거야? 치료할래?”
아, 티가 났나. 안 아픈 건 아니지만, 이건 그런 걸로 치료할 수 없을걸. 이치고는 머쓱하게 제 볼을 긁으며 슬그머니 오리히메의 시선을 피했다. 아픈 곳이 있던가, 잠깐 생각해보는 척하며 태연자약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 아픈 곳은 없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이노우에.”
다행히도 자연스레 넘어간 모양이었다. 오리히메는 이치고의 말을 그대로 믿은 듯했다. 그녀의 웃음은 누가 봐도 ‘아, 다행이야.’였다. 저기, 그런 표정 지으면 내가 미안해지잖아.
“그렇다면 다행이야, 쿠로사키 군. 그래도 아프면 꼭 말해줘야 돼?”
“그럴게, 이노우에. 고마워.”
이노우에의 치료를 따라갈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야. 안 그래? 평소와 다름없는 대화를 이어나가는 와중에도, 이치고의 머릿속은 호고샤로 가득했다. 이 누나가 왜 연락을 받지 않는 건지. 설마 또 며칠 밤샘으로 작업하다가 쓰러진 거라던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불현 듯 공포감이 이치고를 덮쳤다. 설마 아니겠지. 이 누나는 진짜 몸 좀 챙기라니까. 내가 몇 번을 말했는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깊고 무거운 어둠 속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는 기분이었다. 불안함에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침 내일은 주말. 이치고는 생각했다. 내일 날이 밝자마자 호고샤의 집에 가보기로.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그냥 내 기우이기를. 시간이 이렇게 늦게 간다고 느껴지는 건 난생처음인 듯했다.
4.
“-콜록.”
후드득, 붉은 꽃들이 방울방울 피어난다. 한참을 그렇게 꽃들을 뱉어내던 호고샤는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듯하자 쌕쌕 숨소리를 내며 자신이 토해낸 붉은 석산화들을 집어 올렸다. 석산화의 꽃잎들이 불쾌하게 끈적끈적하다. 꽃잎들을 만진 손가락에는 마치 꽃잎들에서 빻아낸 것 같은 붉은 물이 묻어있었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비릿한 피의 냄새가 난다는 거지. 호고샤는 하, 탄식 같은 신음을 내뱉곤 비릿하게 웃었다. 피 냄새가 나는, 피처럼 붉은 석산화라. 정말 멋진걸. 호고샤는 들고 있던 석산화들을 땅바닥으로 가볍게 내던졌다. 떨어진 석산화들이 데굴데굴 땅바닥을 굴러가다가, 먼저 버려져 나뒹굴고 있는 손위 형제들에게 부딪혀 멈추었다. 그 모습을 보던 호고샤는 문득 고개를 들어 자신의 방을 휘 둘러본다. 석산화 밭인가, 여기는. 장황하기도 하지. 시들어버려 말라비틀어진 석산화들. 시들어가고 있는 석산화들. 막 피어난 것처럼 선명한 붉은색의 석산화들. 그리고 방을 가득 채운 피 냄새. 멋져라.
멍하니 제 방을 바라보던 호고샤는 갑자기 들려오는 제 핸드폰 벨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받고 ‘네, 호고샤입니다.’라고 하려던 호고샤는 화면에 찍힌 ‘이치고’를 보고 멈칫했다. 묘한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을 보던 호고샤는 조용히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미안.”
응답을 기다리며 힘차게 울리던 벨소리는 얼마 없어 뚝 끊겨버렸다. 며칠 전부터 이랬다. 나를 찾고 싶은 듯, 끊임없이 전화를 걸었지, 너는. 그렇지만 미안. 나는 너를 볼 수 없어. 분명 걱정할 테니까. …앉고 싶어. 호고샤는 방 안을 빙 둘러본다. 식탁에도, 의자에도, 소파에 도 석산화들이 한 가득이다. …꼴도 보기 싫어. 호고샤는 얼굴을 찡그렸다. 발로 석산화를 치우며 제 앉을 공간만을 확보한 호고샤는 그대로 무너지듯 주저앉아 힘없이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보고 싶어,”
이치고. 불쑥 튀어나온 제 생각에, 호고샤는 헉, 숨을 들이키곤 입술을 짓씹으며 간신히 뒷말을 삼켰다. 내뱉으면 돌이킬 수 없을 거야.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참아, 유메노 호고샤. 그렇지 않으면. 호고샤는 토기를 느꼈다. 헛구역질이다. 아, 늦었어. 호고샤는 천천히 몸을 숙이고 입을 열었다. 이내 곧 방 안은 듣기에도 고통스러운 소리로 가득 차고, 피의 석산화가 제 몸을 뽐내며 송이송이 피어난다. 울지 마. 울면 무너질 게 뻔해. 버텨. 버티라고, 유메노 호고샤. 버티는 거, 네 특기 아니었어? 그렇게 다짐하면서도, 눈은 이미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있었다. 코가 시큰해져서,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눈물 때문인 걸까, 아니면.
“…망할 몸뚱이…”
호고샤는 제 몸을 원망이라도 하는 것처럼 툭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깜빡, 깜-빡, 깜-빡-.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졸려. 자도 될까.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어. 대체 며칠째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꽃을 토한 거였더라. 이제는 시간 감각도 무뎌졌다. …아니, 정정하자. 시간 감각만 무너졌을까. 온몸의 신경이 다 무너진 기분.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걸. 호고샤는 비릿하게 웃었다. 흐려지는 시야, 무거운 눈꺼풀, 아득하게 멀어지는 의식. 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푹 가라앉은 느낌이다. 호고샤는 몇 번 더 눈을 깜빡이다, 이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굳게 닫힌 눈꺼풀은 그만큼 무거워서 쉽게 열리지 않을 것 같았다. 편안한 걸. 그냥, 이대로 있고 싶어.
5.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분명 안에서 벨 소리 들렸는데.”
이치고는 호고샤의 집 앞에서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집 앞까지 와놓고도 그는 호고샤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망설였다. 혹시나 모를 불안감에 두려워졌기 때문일까. 심각한 얼굴로 입술을 짓씹곤, 이치고는 꾹 주먹을 쥐었다. 쾅쾅쾅쾅, 철문이 두드려지는 소리가 온 귀를 가득 메운다.
“누나, 누나!”
제발, 누나. 계속 문을 두드리는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반응이 없는 내부에 점점 불안해진다. 누나, 부탁이야. 간절한 그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내부는 조용하다.
“누나, 나 이치고야! 안에 있지. 문 열어줘. 누나!”
그러나 얻은 것은 아픈 주먹과, 웽웽 울려퍼지는 철문뿐. 이렇게 되면 강행돌파뿐인가. 으득, 어금니를 씹는 소리가 입안에서 윙윙 울려 퍼진다. 이치고는 조심조심 손을 뻗어, 도어 록을 열었다. 비밀번호는 몰랐지만, 뚫고 들어가야 했다.
“비밀번호… 보통 여자들이 비밀번호로 뭘 하지?”
자기 생일인가? 0815. 삐빅. 아, 틀렸어. 그럼 뭐지? 자기 핸드폰 번호인가? 꾹꾹꾹꾹. 삐빅. …이것도 아니야. 한시가 급한데. 얼른 들어가야 하는데. 도대체 뭐야. 빨리 머리를 굴려, 쿠로사키 이치고.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누나가 비밀번호로 할 만 한 건 대체 뭘까? 그러다 문득 제 머리를 치고 간 숫자 네 자리.
“…설마.”
설마, 설마. 그건 내 바람일 뿐이잖아. 네가 누나한테 뭐가 된다고 누나가 그걸 비밀번호로 설정해? 이치고의 머릿속에서는 격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쪽과, 그럴 수도 있다는 쪽. 만약 그렇다면 누나는 왜? 울렁거린다. …토할 것 같아. 몸이 휘청휘청, 균형을 잃고 흔들린다. 아찔해지는 시야. 벽에 손을 딛고 이치고는 간신히 버텨내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아. 식은땀이 흘렀다. 후, 숨을 뱉어내며 이치고는 제 입을 막았다. 무언가를 삼켜내는 것 같기도 했다.
“…”
한참을 그렇게 돌처럼 서있던 이치고는 이내 진정된 듯하자 고개를 들었다. 아니라곤 생각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정말 낮은 가능성이라도 있을 수 있으니까. 이치고는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했다. 단순히 제 바람인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래도. 버튼을 누르려 뻗은 손이 멈칫, 망설인다. 두근두근, 쿵쾅쿵쾅.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 이치고는 한 번 숨을 골랐다. 꿀꺽, 침을 삼키고는 그대로 숫자를 누른다. …0, 그리고 7… 그다음 1… 마지막으로 5. 0715. …이건 7월 15일. 다름 아닌 제 생일이다.
삐릭.
아까와는 다르게 경쾌한 전자음이다. 덜컹, 문이 열린다. …왜? 왜 내 생일이지? 열어놓고도, 이치고는 도리어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혼란스러운 듯했다. 그러나 이치고는 곧 고개를 세차게 젓고는 의지를 다시 다진 것처럼 결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6.
“누나!”
헐레벌떡 문을 연 이치고는, 문을 열자마자 그대로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밝은 낮임에도 불구하고 커튼이 쳐져 있는 창문 덕에 방 안은 어두컴컴했고, 습했다. 방바닥엔 붉은 꽃들이 한 가득이다. 나, 이 꽃 알아. 그러니까, 석산화? 누나는 이 많은 석산화들을 대체 어디서 구해온 거지? 너무 많잖아, 이거. 심지어 건드리면 금방 부서질 것처럼 시들어버린 석산화들도 많은걸. 그러다 문득 코를 찔러오는 익숙한, 그러면서도 끔찍한 냄새에, 안 그래도 주름져 있던 미간이 더욱 깊은 주름을 만든다. …그런데 석산화 향기가 이랬던가? 아닌데. 이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점점 짙어지는 향기에 이치고의 표정은 더더욱 심각하게 굳어갔다. 이 냄새를 내가 모를 리가 없지. 그동안 질리도록 맡았는걸. 이건 꽃향기보다는… …피. 피 냄새다. 아까와는 다른 토기가 제 목을 치고 올라온다. 우욱.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아. 올라오는 욕지거리를 간신히 참고 집 안으로 들어선 이치고는 정말 덜컹 주저앉을 뻔했다. 제 눈에 들어온 것은, 피 냄새와, 석산화 사이에서 죽은 듯 잠들어 있는 호고샤.
“누나!”
신발을 벗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이치고는 그대로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파삭파삭, 시들어버린 석산화들이 그의 발에 짓밟혀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작게 철퍽철퍽 웅덩이를 밟는 것 같은 소리도 들린다. 보통 사람이라면 기겁을 했겠으나 이치고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호고샤 뿐이었다.
“누나!”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있는 호고샤의 머리를 받쳐 제 몸에 기댄다. 언제나 누나를 보고 싶었지만, 이런 식으로 보고 싶었던 것은 절대 아니었어. 안 그래도 마른 몸이 눈에 띄게 더 말라있고, 얼굴은 잔뜩 수척해져 있었다. 입가에는 피를 토한 흔적이 잔뜩 남겨져 있었다. 눈 떠 봐, 누나. 제발. 이치고의 바람과는 다르게, 아무리 흔들어도 닫혀있는 호고샤의 눈꺼풀은 평온했다. 작은 미동마저도 없다. 불안감이 엄습한다. 깊고 어두운 절망 속으로 빠지는 기분이다. 더 일찍 왔어야 했나. 그랬어야 했나. …설마, 아닐 거야. 이치고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제발 괜찮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표정에 드러난다. 제발! 누나, 누나!
“유메노 호고샤!”
마지막 외침은 절박하다 못해 절규에 더 가까웠다. 그의 목소리는 마침내 닿았을까. 긴 속눈썹이 움찔, 이내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눈꺼풀이 천천히 열린다. 탁한 회색 눈과 애절한 밤색 눈이 마주친다.
7.
얼마나 오래 잠들었던 걸까. 호고샤는 문득 자기를 부르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환청일까, 나를 부르는 사람은 없을 텐데. 그러나 자신의 이름을 부르든 목소리는, 자신이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목소리, 동시에 너무나도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 관심 꺼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낫지 않을걸. 멀어져야 해. 그러나 감정은 이성을 이겨버리고 말았으니. 호고샤는 올라가지 않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려서 그 목소리의 주인을 마주했다. 제 눈앞에서 저를 반기고 있던 것은, 저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람.
“…이치고?”
“누나. 나야. 이치고. 괜찮아?”
“…이거 꿈이야?”
이치고가 비밀번호를 알 리가 없을 텐데. 몰라야 하는데. …꿈인가 보다. 그렇지 않으면 이치고가 내 앞에 나타날 리가 없어. 일부러 연락도 끊고 살았는걸. 설마 현실이겠어.
“…응, 꿈인가 봐.”
호고샤는 천천히 손을 뻗어, 눈앞에 보이는 소년의 뺨을 쓰다듬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워. 꿈치고는 감각이 생생한걸. 만족스러운 꿈이야.
8.
“있지, 이치고. 나, 너 좋아한다?”
“…”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굳어버린 소년을 보며 호고샤는 킥킥 웃었다. 잠이 덜 깬 건지 비몽사몽. 평소에는 꺼내지도 못할 말이었는데. 꿈이란 건 대단하구나. 어차피 꿈이니까 좀 더 대담해져볼까. 볼을 쓰다듬던 손에 힘을 넣어 볼을 콱 꼬집는다.
“?! 아, 아하. 아허, 누나!!”
“처음에는 말이야, 웬 영문 모를 이상한 코스프레나 하는 줄 알았더니.”
꿈이라서 아프지도 않을 텐데. 정말 현실감 있네. 졸지에 볼이 꼬집혀 아파하는 소년의 반응은 보이지 않는다. 손에 잡힌 부드러운 소년의 볼을 더욱 세게 꼬집는다.
“악!! 아흐다고!! 아악!!”
“그런데 언제 이렇게 빠져버려선 꽃도 토하고 피도 토하네. 이거 다- 너 때문이야. 알긴 해? 몰랐지?”
“아, 알게스니까 이거 노코 좀!”
“뭘 알겠다는 거야, 응?”
“아흐다고!”
“…나, 눈물 날 정도로 네가 좋아, 이치고.”
“…”
손에 들어갔던 힘이 풀린다. 짓궂음이 가득했던 목소리는 어느새 가늘게 떨리고, 소년을 바라보는 호고샤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촉촉하게 젖어있는 회색 눈동자가 밤색 눈동자를 올려다본다.
“꽃을 토하고 피를 토하고, 죽을 만큼 괴로운데도 네가 좋아서, 멈출 수 없었어. 나, 진짜 네가 좋아, 이치고.”
“…”
“…쭉 말하고 싶었어. 후련하네. …현실의 너는 절대 모르겠지만.
“…”
“…표정이 왜 그래, 이치고?”
심각하게 굳은 소년의 표정을 보곤, 호고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장난스럽게 킥킥 웃었다. 헤, 표정 좀 봐. 난 네 이런 표정 보고 싶어서 말한 거 아니거든! 호고샤는 손을 들어 소년의 이마에 꿀밤을 때렸다. 빡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진다. 좀 아프겠네.
“악! 또 왜 이러는데!”
“미간에 주름진다, 이치고- 내가! 표정 좀! 피고! 다니랬지!”
왜 내 말 안 듣는 건데? 괜한 심술에 딱콩딱콩. 그러다 꿍 소리와 함께 둔탁한 충격이 느껴진다. 이치고의 눈앞이 아니라 제 눈앞에 별들이 빙글빙글 돈다. 어? 아파. 어? 꿈인데 왜 아프지? 어?
9.
이거 지금 무슨 상황이지. 이치고는 졸지에 볼도 꼬집혔고 이마도 맞았다. 난 단지 누나가 걱정돼서 온 것뿐인데, 왜 난 볼을 꼬집히고 꿀밤을 맞는 거지. 볼과 이마가 얼얼하다. 이 누나가 정말. 이거 꿈 아니라고! 꿍, 제 머리를 호고샤의 머리에 부딪힌다. 제 머리도 아프다. 좀 살살할 걸 그랬나. 어쨌든 정신 좀 차려.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니 정신 좀 차린 모양이다.
“꿈, 아니, 야?”
“어, 꿈 아니야.”
놀란 호고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만 벙긋벙긋 거리며 이치고를 봤다. 아니, 이쪽도 놀란 건 마찬가지인데.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까. 이치고는 한숨을 쉬었다. 얼떨결에 고백을 들어버렸다. 좋다고 해야 하나?
“…그, 잊어버려, 이치고! 그, 그러니까.”
“…뭘 잊어버려.”
“그냥 다!”
“내가 그걸 왜 잊어버려.”
“…어?”
눈에 띄게 당황한 호고샤의 모습에 이치고는 픽,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고 보니, 저런 허술하고 귀여운 모습은 내게만 보여주는 모습이었지. 눈치가 없어도 더럽게 없었구나, 나. 그걸 아직까지 모르고 있었다니. 왠지 모를 기쁨과 뿌듯함에 벅차오를 때, 또 무엇인가 목을 치고 올라온다. 아, 또. …아냐. 이번엔 보여줘도 되겠지.
“…우욱.”
“?! 이치고. 왜 그래, 어디 아파?”
화들짝 놀라 자신을 살펴보려는 호고샤의 몸짓에 이치고는 손을 뻗어 거부의 뜻을 내보였다. 자신은 괜찮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씩 웃어주었다. 뭔가를 끌어올리는 것처럼 힘들어 보이던 이치고는 이내 곧 입을 열었다. 이치고의 입에서도 꽃들이 떨어진다. 호고샤는 그 모습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너도? 그리고 떨어진 꽃은. 호고샤는 이치고가 뱉어낸 꽃들을 살펴본다. 익숙한 꽃이다. 절대 모를 리 없는 꽃. 이 꽃은… …어?
“…무슨 꽃인지 알겠지?”
10.
호고샤는 놀라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겨우 끌어당겨 고개를 끄덕였다. 목에서 삐그덕 소리가 나는 것도 같았다. 이걸 내가 모를 수 없어. 커다랗고 노란…
“…해바라기.”
해바라기. …나의 탄생화, 나의 꽃. 호고샤는 땅바닥에 떨어진 해바라기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해바라기를 집었다. 손에 쥔 해바라기와 이치고를,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번갈아보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눈치 챘을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자신이 원했던 일일 지도 모르겠다. 다만, 전혀 그럴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혼란스럽다. 왜? 네가 왜? 왜 이걸. 그렇게 생각해도 돼? 언제나 내가 바라왔던 것. 그렇게, 그렇게 해석해도 되는 거야, 이치고? 정말, 진자로? …어떡해,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벅차올라서, 너무 벅차올라서 울 것 같아.
“…좋아해, 누나.”
“…”
“꽃을 토할 만큼 고통스러웠는데도, 멈출 수가 없었어.”
“…”
“내가 토하던 꽃은 해바라기. …해바라기를 보면 누나가 생각나서, 토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어.”
“…”
“좋아한다고, 유메노 호고샤.”
호고샤는 그 말을 듣고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소년을 바라보며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어, 그러니까, 그… 이건. 그러니까.”
…혼란스러워. 너무나도 혼란스러워서, 생각마저도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내뱉은 말은 결국.
“…울어도 돼?”
눈동자가 흔들린다. 호고샤는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이치고를 본다. 이치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러나 싱긋 웃고 있는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울어도 돼. 그러곤 손을 뻗어 저보다도 훨씬 작은 그녀를 끌어안아주었다. 넓고, 따뜻하고, 포근한, 저가 좋아하는 사람의 품. 왠지 긴장이 탁 풀어져서, 울음을 주체할 수 없어. 울고 싶지 않은데, 그런데 울고 싶어. 어떡해? 결국 호고샤는 울음을 터트렸다. 저가 짝사랑하는, 아니, 이제는 제 연인의 품에서 운다. 그동안의 괴로움과 고통을 모두 토해내는 것 같은, 절규에 가까워 보이면서도, 희망에 가득 찬 울음이다. 방 안에 그녀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품에 안고 있는 이치고는 우느라 들썩이는 그녀의 등을 말없이 토닥여줄 뿐이었다. 이제 괜찮아, 누나. 괜찮아. 이제 사랑하자, 우리. 우리가 토하던 꽃은 이제 서로의 마음에 품은 채로, 이제는 사랑하자.
11.
당신을 사랑하기에, 꽃을 토하는 병, 하나하키 병. 나을 일은 영원히 없을 줄 알았는데. 당 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이 당신에게 닿을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혼자만의 감정으로 가슴속에 품고 살아갈 줄 알았는데. 혼자만의 감정이 아니었구나. 혼자만의 감정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이기적이기도 하지. 처음에는 나 혼자만 이어도 좋으니, 당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했는데, 정작 이렇게 되니 너무나 기뻐서 절로 웃음이 나와. 응, 그래. 사랑하자, 우리. 우리가 토했던 꽃들만큼, 우리가 아파했던 만큼 사랑하자, 우리.
언제나 답답하게 막혀있던 목도 뚫렸고, 시도 때도 없이 울렁거리던 속도 고요하게 가라앉았고, 아팠던 심장도 이젠 멀쩡하다. 이젠 꽃을 토할 일은 내일도, 모레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꽃들이 서로의 주인을 찾았기에, 서로의 사랑이 서로의 주인을 찾았기에.
12.
하나하키 병의 치료법은 사랑이 이뤄지는 거래. 그래야 낫는대.
낭만적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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