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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소년의 지구 생활기 承


지구만큼 소란스러운 행성도 없을 것이다. 뉴스에선 매일 속보로 새로운 소식이 뜨고 있었고, 전쟁이 지속되는 나라, 평화로운 나라, 그리고 휴전 중인 나라 모두 공존하는 행성이었다. 참고로 한국은 휴전 중이야. 성찬의 말에 쇼타로는 원피스 77권을 읽다가 책을 슬금슬금 내려, 시선을 마주한다. 인간이란 생명은 너무 마음이 복잡해서 그래. 쇼타로는 남의 일인 것처럼 굴었다. (물론 남의 행성 일이니, 남의 일이 맞다.) 남은 기간 동안 설마 전쟁이 나겠냐는 태평한 말투로.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기적인 티가 났다. 역시 자신의 안위만 중요하지. 걱정하는 척이라도 하면 안 되는 건가. 성찬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풀고 있던 문제집을 덮고, 쇼타로의 곁에 앉는다. 지구인과 외계인의 루틴은 이렇다. 누구 하나가 곁에 오는 순간 자연스럽게 포옹을 하는 것. 성찬이 곁에 앉자 쇼타로는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성찬의 품에 안긴다. 지구 떠나면 포옹할 사람 없어서 어떡할래. 성찬은 괜히 무리수를 던지지만 쇼타로는 그저 웃을 뿐이다. 그러게, 성찬 없으면 어떡하지. 아쉬움 하나도 없는 말투. 그냥 다정함이 본성이라서 잘 받아주는 유연한 성격 말이다.

“성찬아, 너는 나 없어도 잘 살 거야.”

성찬은 쇼타로의 허리를 끌어안고 어깨에 입술을 묻는다.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이 아프다. 어떻게 장담을 하는 거지. 분명 꽤 아플 것 같은데. 정말 오랜 기간 동안 이 외계소년의 낮은 체온을 그리워하며 지낼 텐데. 성찬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는다. 쇼타로는 애정이란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었다. 유전적으로 반듯하게 잘렸다고. 어떤 우주는 애정 때문에 멸망하고, 무수한 전쟁을 겪었기에 그런 감정은 금기시된다며 어느 날 잠들기 전 조곤조곤 알려주었다. 성찬과 쇼타로는 각방을 썼지만, 아주 가끔은 성찬의 방 침대에서 같이 잠을 청했다. 이 좁은 슈퍼싱글에 남자 두 명이 누워 있는 게 퍽 웃긴 꼴이었지만, 성찬은 쇼타로의 숨결이 좋았다. 푸른 눈으로 반짝이며 이야기해 주는 우주 이야기, 킥킥 웃는 소리까지. 왜 그렇게 봐? 쇼타로는 아주 가끔 다정한 성찬의 눈빛에 고개를 기울였고, 성찬은 귀여워서. 담백하게 대꾸했다. 그럼 이 사랑스러운 외계소년은 만화책을 덮고, 눈을 감았다. 얼른 뽀뽀해. 그리고 입술이 자연스럽게 입술이 닿는다.

 쇼타로가 살던 행성의 옆 행성은 유일하게 생명체의 유전자에 애정이라는 감정이 존재했다고 했다. 물론 그 애정과 사랑 때문에 멸망해서 쇼타로의 행성에 난민으로 들어왔지만. 사랑에 온 우주가 말썽이구나, 성찬은 가만히 생각하며 쇼타로의 이야기를 들었다. 피곤한 감정이야아. 쇼타로는 질색하며 투덜거릴 때마다, 성찬은 애정을 고백할 길을 점점 잃었다. 사실, 누가 봐도 사랑 아니겠는가. 귀엽다는 말에 눈을 감고, 입을 맞추고, 한 침대에서 자고, 단둘이 있을 때 곁에만 붙으면 끌어안고, 어깨에 입술을 묻고...... 사실 성찬과 쇼타로가 하는 행위는 연인의 관계였다. 쇼타로는 단순히 소중한 관계라고 생각했지만, 성찬은 그 소중함보다 조금 더 음침했다. 애정을 고백하지 않는 건, 아마 제 곁의 외계소년이 애정이라는 감정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담하지 마.”

“뭘?”

“8년 동안 형만 기다렸어.”

“바아보오.”

“그러니까, ...이번에 떠나면 더 힘들 거야.”

“그건 걱정 마.”

내가 떠날 때 기억 지워줄게. 그러니까, 그 뿌듯한 표정의 쇼타로를 성찬은 잊을 수 없었다. 지워 달라는 게 아니었는데, 이 외계인이 무언가를 잘못 오해하고 있었다. 정말 단순한 방법 아닌가. '네가 그리워서 못 지낼 것 같아.'의 흐름이라면 응당 '나를 좋아하는구나.'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럼 기억을 지우지, 뭐.' 로 이어지는 게. 성찬은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쇼타로에게 화를 냈다. 쇼타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지만, 그 말간 얼굴에 성찬은 칼을 꽂았다. 감정 없는 외계인 주제에, 뭘 안다고. 쇼타로는... 상처 받은 표정보다는 맞는 말이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차라리 상처를 받지. 상처를 받고 어떻게 나한테 그렇게 말을 할 수 있냐고 증오라도 하지. 어쩜 저렇게 다정하고 등신같은데 사랑이 없을 수 있을까. 성찬은 울고 싶어졌다. 쇼타로가 지구에 온 지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남은 기간은.... 대략 1,600일 정도일 것이다.


외계소년의 지구 생활기 承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쇼타로는 크리스마스, 12월 31일, 그리고 새해까지 맞았다. 사실 성찬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미는 행위를 좋아하진 않았으나, 같이 길을 걷다가 거대하게 장식이 된 트리를 보고 눈을 반짝이던 쇼타로의 표정을 보고, 처음으로 트리를 배달시켰다. 트리 장식을 하던 날, 눈이 펑펑 쏟아졌다. 감자칩을 냠냠 먹으며, 트리의 꼭대기에 커다란 별을 다는 쇼타로의 모습을 성찬은 가만히 구경했다. 정말 이 외계소년 덕분에 별걸 다 하고 있었다. 꼬마전구에는 반짝, 빛이 들어왔다. 세계여행 중인 부모님에게 영상통화로 트리를 보여주자 깔깔 웃으며 보기 좋다고 했고, 그때 처음으로 쇼타로는 성찬의 부모님에게 인사를 했다. 쇼타로는 <잠시 신세를 지고 있는 외국인 친구>였다. 성찬의 부모님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혼자 놔두기 약간 미안했는데, 같이 있어서 다행이라며, 철 없는 아들 좀 잘 부탁한다고 다정하게 말했고, 쇼타로는 헤헤 웃으며 꾸벅, 인사를 했다.

“크리스마스에 받고 싶은 거 있어?”

“선물 주는 날이야?”

“우주엔 낭만이 없냐......”

“지구인이 낭만 중독이라니까.”

크리스마스엔 선물을 주고받는 날. 쇼타로는 굳이 이 지구에서 받고 싶은 게 없었다. 지금이 딱 행복했다. 5년의 세월이 너무 길었지만, 이렇게 봄, 여름, 가을, 겨울에 축제처럼 보낼 일이 연속적으로 있다는 건 반복적인 축복과도 같았으니까. 성찬의 생일에 처음 만났으니, 아직 겪어보지 못한 봄, 여름이 기다려졌다.

성찬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선물했다. 새 건 아니고, 어렸을 적에 사용하던 빈티지 제품이었다. 필름 한 팩과 같이 사용법을 알려주자 쇼타로는 최고의 선물이라며 성찬을 그대로 끌어안았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지구소년의 추억이 담긴 선물이라니. 기분이 고점을 찍고, 쇼타로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내 선물은...... 말끝을 흐린다.

“형, 선물 안 줘도 돼.”

“나 준비했는데.”

“아르바이트라도 한 거야?”


성찬은 순간적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쇼타로를 상상한다. 지구의 삶에 이제 겨우 적응한 쇼타로가 아르바이트라니. 우당탕 넘어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거 같아서 작게 웃음을 터트린다. 아르바이트는 무슨. 불시착한 것도 서러울 텐데 화폐를 벌기 위해 노동까지 한다는 건 별로였다. 쇼타로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풀더니 성찬의 손목에 채워준다. 이거 내 전부야, 너한테 맡길게. 

진짜 겁도 없었다, 이 외계인은. 이러다가 내가 홀라당 없애버리면 어떡하려고 쉽게 주는 걸까. 성찬은 손목시계의 화면을 바라본다. 남은 날짜와 알 수 없는 빛이 짧게 빛나고 있었다. 선녀와 나무꾼에서 선녀의 옷을 훔친 나무꾼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이렇게 주다니. 쇼타로는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었다. 자신을 다정하고 좋은 지구인으로 보고 있겠지만, ......생명체는 모두 이기적인 부분이 있었다. 지구를 떠날 생각만 하는 쇼타로도, 지구에 묶어두고 싶은 자신도 모두 이기적으로 굴고 있었으니까. 조금만 더 어른스러웠다면 이 시계를 풀고 괜찮다고 반납했겠지만, 성찬은 고맙다는 말만 남기고 시계를 가지기로 했다. 쇼타로의 모든 것, 이 외계소년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이걸 파괴하면 쇼타로는 나를 원망하겠지. 성찬은 괜히 심장이  쿵, 쿵, 쿵, 쿵, 뛰는 느낌이 들었다. 말간 얼굴을 한 상대 앞에서 비열한 상상만 하는 자신이 역겹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 더.”

“또?”

입술 벌려 봐. 쇼타로의 말에 성찬은 순순히 입술을 벌린다. 큭큭,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쇼타로는 성찬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더니, 발을 살짝 들어 그대로 입을 맞춘다. 말랑한 입술, 평소에 귀엽다고 할 때 하는 뽀뽀와 느낌이 달랐다. 벌어진 입술 틈으로 부드러운 혀가 파고든다. 키스를 이렇게 한다고. 성찬은 순간 당황해서 쇼타로의 어깨를 세게 쥘 뿐이다. 눈도 감지 못하고, 등신같이 몇 번 깜박이다가 쇼타로의 감은 눈에 시선이 닿는다. 빌어먹게 길고, 예쁜 속눈썹. 머리가 찌릿찌릿하면서도, 영 키스에 집중을 못 하자 쇼타로는 성찬의 아랫입술을 아프게 한번 물곤 단호한 말투가 이어진다. 나한테 집중해. 성찬은 눈을 감는다. 사랑이 담긴 키스가 아니었다. 기억을 주고받거나 지울 때 하는 쇼타로 종족들의 행위. 쇼타로의 혀와 입술에 조금 더 집중하자 순간적으로 감긴 눈에도 불구하고 머리의 한 부분이 번쩍 떠지는 느낌이다. 마치 자신의 머리에 폴더 하나를 생성해서 기억이라는 파일을 심는 것처럼. 쇼타로의 행성은 붉은색이었다. 지구와 크게 다른 점은 없었지만, 높은 건물은 없었고 자연적인 느낌이 강했다. 그러니까, 아름답다는 말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새 소리, 바람 소리, 어린아이들이 웃는 소리, 거대한 숲......

“나만 지구를 아는 건 치사하잖아.”

“그래서 키스한 거야?”

“응, 우리 행성도 아름답지?”

...아. 성찬은 거기서 네가 더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었다. 정말이지, 아무리 아름다운 행성을 봐도, 그 행성에서 태어나고 자란 소년을 이길 순 없을 것이다. 성찬은 대답을 하지 않고 쇼타로를 품에 안았다. 메리 크리스마스. 성찬은 대답 대신 대외적인 고백을 했고, 역시 지구인의 품은 따뜻하다고 생각하며, 쇼타로는 그 고백에 대한 답을 한다. 메리 크리스마스, 성찬.

그렇게 12월 31일엔 같이 제야의 종을 보며 카운트다운을 했고, 1월 1일엔 떡국을 만들어 먹었다. 모든 축제 같은 기념일을 폴라로이드 카메라에 담았다. 중요한 일이 있는 날엔, 자기 전에 일기를 썼다. 성찬은 일기의 내용에 궁금증을 느꼈지만 그럴 때마다 쇼타로는 일기장을 덮곤, 저리 가, 바보. 냉하게 대꾸하곤 했었다. 그렇게 쇼타로는 점점 더 지구의 삶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지구의 삶에 익숙함을 느낀다는 건, 이제 지구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을 했다는 뜻이었다. 인간이라는 종족은 정말 치열하게 살았다. 아무 능력도 없으면서 눈부신 발전을 한 건 치열함 때문일 것이다. 그 치열함 때문에 전쟁이 나고, 행성이 병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역설 아니겠는가.

밤하늘을 구경하다가 쇼타로는 성찬의 방문을 조용히 열고 잠든 성찬을 종종 구경하곤 했다. 새근새근, 자는 귀여운 지구소년. 나만을 기다렸던 그 소년. 손끝으로 뺨을 간지럽히면, 미간을 찡그리며 뒤척이는 모습까지 제 취향이었다. 어떤 생명체를 보고 취향이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만, 정성찬은 예외였다. 특별하고도 소중했으니까. 그래서 아주 가끔, 쇼타로는 자신의 행성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돌아가서 나이가 지긋한 현자를 붙잡고 이거 혹시 애정인가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만약에 애정이면 그 행성에서 돌연변이 취급을 받고 쫒겨나는 엔딩이겠지만. ...차라리 돌연변이면 이 애정이 넘치는 알 수 없는 지구소년에게 고백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내 유전자에 잘려진 애정이, 삐죽 튀어나온 것 같다고.

“...타로.”

“미안, 깼어?”

”왜 안 자.”

”나 원래 잠 많이 없는 거 알잖어.”

나랑 있을 땐 잘 자던데. 성찬은 잠에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옆자리를 비워주자, 쇼타로는 냉큼 침대 위로 올라간다. 너랑 있으면 이상하게 잠이 와. 작은 고백에 성찬은 바람 빠지게 웃었다. 지구인 다 됐네, 타로 형. 잠결이면서 자신의 등을 천천히 토닥이는 그 손길이 참 다정하다고 생각했다. 성찬은 줄곧 쇼타로에게 쓸데없이 다정하다고 시니컬하게 굴었지만, ...정말 다정한 건 자신이 아닌 지구인이었다. 아니, 정정. 지구인이 아닌 정성찬이었다. 같이 자자. 성찬의 낮은 목소리에 쇼타로는 눈을 감았다. 갑자기 잠이 몰려오는 울렁이는 느낌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다. 원래 하루에 한 시간만 자도 괜찮은 육체였는데, 꼭 지구인처럼 바뀌고 있는 것 같았다.




지구의 여름은 뜨겁다 못해 활활 타는 느낌이었다. 지구인보다 체온이 서늘함에도 불구하고, 생전 처음 느껴보는 폭염에 쇼타로는 맥을 못 맞추고 주로 집에 뻗어 있었다. 아주 가끔 쇼타로는 열병처럼 시름시름 앓았는데 그럴 때마다 성찬도 굳이 학교를 나가지 않았다. 지구인의 열아홉은 중요하다고 하던데. 제 곁을 지키고 있는 성찬을 보며, 쇼타로는 처음으로 시간의 흐름이 덜컥 무서워졌다. 혼자 다니는 삶이 익숙해졌는데, 지구 불시착 이후 모든 순간을 성찬과 함께하고 있었다.

성찬은 덥다는 핑계로 집에 있을 땐, 서늘한 체온을 가진 쇼타로를 하루종일 안고 있었다. 야, 성찬아. 너 왜 이리 뜨거워.... 포옹을 밀어내지 못하고 축 늘어진 상태로 안겨 있으면, 성찬은 얼음이 가득 담긴 콜라를 입에 물려줬다. 그렇게 안고 있는 게 좋을까. 쇼타로는 천천히 생각하며, 성찬의 품에 가만히 안겨서 얼음을 와그작와그작 씹었다. 탄산음료는 진득하고 달았다. 쉽게 질리는 맛 같았지만, 절대 질리지 않는 미묘한 맛. 불시착한 자신과 상황이 비슷했다. 지구에서 5년 동안 지내라고 할 땐 말만 들어도 질린 상태였는데, 막상 살아보니 평생 살아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대신......


”성찬, 빙수 먹고 싶어.”

”먹으러 갈까?”

”응.”


대신 정성찬만 제 곁에 있다면. 이 지구에서 지내려면 지구소년이 필요했다. 지구엔 무수한 소년이 있지만 그중 유일한 소년. 폭염에 빙수가 먹고 싶다고 하면 바로 가자고 하는 유일무이한 소년. 아마 바다를 가자고 하면 당장 짐을 쌀 것 같은, 이 바보 같은 소년 말이다. 이게 애정일까? 쇼타로는 순간적인 혼란스러움에 웩, 헛구역질을 한다. 이걸 애정이길 빌어야 해, 아님 애정이 아니길 빌어야 해. 눈이 빙글빙글 돈다. 괜찮아? 걱정스러운 말투와 함께 뜨거운 지구소년의 손이 자신의 이마를 짚는다. 뜨겁다니까..... 결국 이 모든 순간이 다 성찬의 애정일 것이다. 이상하게 성찬과 있으면 종종 몸이 무거웠고, 잠이 쏟아졌다. 열병의 원인이 정성찬이면 어떡하지. 한 번도 다른 행성 생명체와 같이 있을 때 앓았던 적 없었는데.

나 졸려..... 쇼타로는 아주 약간의 잠투정과 함께, 성찬을 끌어안았다. 불덩이 같은 지구인의 체온. 마치 뜨거운 행성을 품에 안고 있는 느낌이었다. 한여름에 안고 있기엔 곤욕이었지만, 이젠 무언가를 안고 있지 않으면 허전했다. 너 없으면 이제 어떡하지. 쇼타로는 이 불안을 입 밖으로 뱉고 싶었지만 겨우 참았다. 정성찬이 존재하지 않아도 쇼타로는 계속 살아야 했다. 정성찬은 짧은 삶을 사는 인간이고, 자신은 몇 천 살을 살 수 있는, 그러니까 지구인의 입장에선 외계인이었으니까. 굳이 부담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분명 예전엔 아주 당당하게, 서로가 없어도 잘 살 거라고 대답한 적 있었다. 겨우 몇 달 전인데, 그땐 뭐가 그렇게 기고만장했을까. 기억까지 냅다 지운다고 뻔뻔하게 말했었다.

정말 기억을 지워도 괜찮을까? 이 기억을 나만 가지고 있어도 괜찮은 걸까? 지구의 대지에 두 발이 닿은 후부터, 지구 소년과 포옹을 나눈 이후부터, 알쏭달쏭한 인류애적 양심이 생기고 있었다. 감정 없는 외계인 주제에, 뭘 안다고. 성찬은 분명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화를 냈었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라서, 그 문장에 대한 타격감은 없었다. 감정이 없다고 능멸을 받아야 한다면, 받는 게 맞았으니까. 화를 내면서 분명 상처 받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눈동자가, 계속 쇼타로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런 눈을 하고 있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감당하지 못할 답이 돌아오는 게 두려웠다. 오래 살면 뭐 하나. 그깟 감정 하나 몰라서 이렇게 빙글빙글 돌고 있는데. 스스로를 한심하다고 생각하며, 쇼타로는 눈을 감았다.

쇼타로는 이틀 동안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성찬은 혹시 죽은 건 아닌가, 자고 있는 쇼타로의 숨결을 체크했다. 이렇게 몇 년 동안 못 일어나면 어떡하지, 덜컥 무섭기도 했지만 나 원래 몸이 안 좋으면 잠으로 채워. 라고 쇼타로가 지나가면서 했던 이야기를 용케 기억해냈다. 심장도 뛰고, 숨도 잘 쉬고. 열도 어느 정도 내렸으니 조만간 눈을 반짝, 빛내며 자신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지구를 닮은 창백한 푸른 점 같은 눈을 반짝이며. 성찬은 쇼타로가 좋아하는 과자를 잔뜩 사곤 습관적으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정확하게 하루씩, 남은 날짜가 사라지고 있었다.

”너, 그 시계 어디서 구했어?”

”...예?”

”그거 지구 물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마트 앞에서 외계 물건인 걸 아는 지구인의 만날 확률은 몇 퍼센트나 될까? 성찬은 다시 한번 나사에 끌려가는 쇼타로를 상상했다. 아직 일어나지도 못한 애를 질질 끌고 가면 어떡하지. 성찬은 모르는 척 굴었지만 처음 보는 남자의 강력한 한 문장에 백기를 들었다.

”이 손목시계 우리 행성 건데.”

”뭐라고요?”


자, 그럼 질문을 바꿔야겠다. 마트 앞에서 쇼타로와 같은 행성의 외계인을 만날 확률은 몇 퍼센트나 될까? 아니, 지구라는 행성이 이렇게 허술해도 괜찮은 건가. 아주 지구가 아니라 외계인 밭이었다. 지구 정복, 영화에서만 봐야 할 문제가 아니었다. 외계인들이 불순한 마음만 먹는다면 이 지구를 정복하는 건 분명 쉬울 테니까. 

남자는 송 씨라는 성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것도 본명이 아니란다. 지구에서 지내고 있으니 그에 맞는 이름을 만든 거라고 했다. 카페 가서 이야기나 할까. 송 씨의 말에 성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민하게 생긴 미형의 얼굴. 말랑하게 생긴 쇼타로와 거리가 멀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송 씨라는 남자는 조각같이 잘생긴 쪽이라면, 쇼타로는 소동물을 닮은 귀엽고 예쁜 쪽이었다. 체크무늬의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부스스한 머리, 갈색 눈동자. 어느 지구인과 다를 바 없었다. 쇼타로는 아주 가끔 당황하거나 투정을 부릴 때마다 머리색과 눈동자의 색이 형형색색 바뀌곤 했다. 형, 당황했지. 성찬의 말 한 마디에 쇼타로는 거울을 보고 으아아, 또 이래. 눈을 깜박이며 평온을 되찾으려고 했고, 곧 푸른 눈으로 돌아오면 짜잔,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며 씨익 웃었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성찬은 먼저 질문을 던진다. 당신도 눈 색이 바뀌나요? 송 씨는 고개를 젓는다. 나는 혼혈이라서 안 돼.


”우주에도 혼혈이 있어요?”

”너희만 있다고 생각하는 게 건방진 거야.”

”예, 뭐......”

”그 시계 주인은 순혈인가 봐.”

”순혈과 혼혈도 차별이 있나요?”

”이게 무슨 해리포터인 줄 알아.”

와, 외계인이 해리포터도 알아. 성찬은 속으로 감탄했다. 차별 같은 거 없어. 송 씨는 심드렁한 말투로 말하며 커피를 홀짝 마신다.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이 바뀌는 것, 그리고 기억을 지우고, 줄 수 있는 능력은 순혈만 가능하다고 했다. 차별은 없었지만, 능력의 차이는 있었다. 그럼 그쪽은 무슨 능력이 있나요? 성찬의 질문에 송 씨의 침묵이 이어진다. 한심하게 보는 눈빛도 아닌, 그저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빛. 꼭 무슨 능력이 있어야 해? 날카로운 질문에 성찬은 고개를 젓는다. 그건 아니고요. 송 씨는 한참 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별 능력 없어. ...그냥, 지구인보다 오래 살아.

분명 오래 사는 건 인간의 오랜 염원이었다. 그 천하의 진시황도 불로장생을 염원했지만 실패로 눈을 감지 않았는가. 하지만 제 앞의 외계인은 퍽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능력이라고 하면서 꼭 저주 받은 표정으로.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해도 불행해서 죽을 것 같다는 얼굴 말이다. 

”지구에 계속 머무를 예정인가요?”

”응.”

”이유 물어봐도 돼요?”

”좋아하는 지구인이 있어.”


그 애가 눈감기 전까지 곁에 있으려고. 송 씨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을 했지만, 분명 입술이 아주 살짝 떨렸다. 아, 그래서 불행한 표정을 짓고 있었구나. 불로장생의 급으로 오래 살면서, 사랑하는 지구인은 겨우 백 살을 못 살고 눈을 감으니까. 쇼타로의 유전자엔 애정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애정이 어렵고, 낭만이 무겁다고 투덜거렸는데, 같은 행성 출신인 이 외계인은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사랑 덕분에 불행을 느끼고, 사랑 덕분에 그 상대가 눈을 감기 전까지 곁에 있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어떻게 된 걸까. 성찬은 조바심이 난다. 그 마음을 눈치챘는지, 송 씨는 성찬이 질문을 던지기 전에 입을 열었다. 내 어머니는 멸망한 행성 출신이야. 쇼타로가 말했던 멸망한 옆 행성. 뭐, 간단하게 말하자면 대통령이 사랑에 눈이 멀어서 행성을 팔아먹고, 그러다가 멸망하고, 다른 행성(쇼타로의 행성)에 난민으로 가고, 그렇게 돌연변이인 송 씨의 아버지와 눈이 맞아서 사랑하게 된 이야기. 그러니 송 씨는 유전자에 애정이라는 감각이 붙어 있었다. 너, 그 애 좋아하는구나. 송 씨는 성찬의 눈동자를 보니 대충 어떤 상황인지 감이 잡혔다. 불쌍한 녀석. 애정이 없다는 건,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는 뜻이었다. 제 아무리 다정해도, 결국 결여가 생기면 상처를 받는 것도 오로지 성찬일 텐데. 


”그 시계 주인, 불시착했다고 했지?”

”네.”

”그럼 에너지 때문에 여기에 머무르는 거고.”

”5년 정도요.”

”나한테 충분한 에너지가 있어.”

”여기에 계속 머무를 예정이니까?”

”그래.”

필요하면 말해. 송 씨는 자신의 번호를 적어서 성찬에게 건넨다. 한쪽이 사랑을 느끼고, 한쪽이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차라리 빨리 끝내는 게 옳은 일이었다. 저 손목시계는 거의 목숨과도 같을 텐데 왜 지구인에게 맡겼을까. 후천적으로 애정이 결여된 놈도 이기적이지만, 지구인만큼 모든 감정을 가진 상태로 이기적인 생명체도 없을 텐데. 그럼 그 외계인도 애정이 있는 걸까. 성찬의 말만 들어보면 완벽한 순혈인데, 어쩌다가 애정이 생긴 건지, 아님 애정이 아닌 다른 감정이 있는 건지. 송 씨는 문득 시계의 주인이 궁금해졌다.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지구인이 사랑에 빠진 외계인. 자신과 같은 고향에서 온 외계인 말이다. 그리고 송 씨는, 손을 덜덜 떨며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받는 지구소년에게 진심으로 유감을 표했다. 

'지구를 떠날 수 있는 충분한 에너지'. 이 말을 듣는다면 쇼타로는 바로 자신을 떠날 게 분명했다. 이 지긋지긋한 지구를 떠날 수 있다고. 자신의 손목에 있는 시계를 강제적으로 풀어내고, 잘 지내라는 더 이상 다정하지도 않고, 따뜻하지도 않은 인사를 남기며. 그럼 쇼타로의 기억 속에 자신이 있긴 할까? 그렇게 오래 사는 생명체인데, 자신과 지냈던 1년이 안 되는 시간은 어떻게 보면 찰나가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성찬은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받았다. 손이 덜덜 떨렸다. 5년도 짧다고 할 때가 아니었다. 그냥 오늘의 일을 숨길까. 어떻게든 5년을 채우고, 채우고.... 그 뒤는 어떡하지? 쇼타로가 보는 앞에서 시계를 부술까? 아님 나 좀 사랑해 달라고 빌어볼까. 성찬은 울고 싶어졌다. 5년, 멀게만 느껴졌는데 이제 5년도, 지금 당장도, 그냥 결말이 이별이라고 생각하니 속이 뒤집힌다. 나 좀 좋아해 줘, 쇼타로. 내가 너를 이렇게 좋아하는데......



“다녀왔습니다.”

”어서오세용.”


쇼타로는 말끔한 표정으로 성찬을 반겼다. 이틀 만에 일어난 얼굴. 이제 좀 괜찮아? 성찬은 운동화를 벗으며 안부를 물었고, 쇼타로는 기지개를 쭉 켜며 개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자연스러운 포옹. 어디 다녀왔어? 쇼타로의 순수한 질문에 성찬은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한다. 네가 좋아하는 과자 사 왔어. 물론 순수한 외출 목적은 집에 있는 외계소년을 위한 과자를 사러 마트에 간 것이니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 후에 만난 외계인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니 결국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으응, 그렇구나. 쇼타로는 익숙하게 성찬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눈을 감는다. 

“성찬아, 너한테서 고향 냄새가 나. ”

”형한테선 지구 냄새 나.”

”우리가 너무 자주 안고 있었나?”

”싫어?”

”아니.”


난 싫은 건 안 해. 쇼타로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속도 없이 좋아서 성찬은 눈을 감았다. 고향 냄새가 난다고 할 때, 혹시나 들키면 어떡하나 심장이 조마조마했다. 같은 종족의 향이 따로 있는 건가? 일부러 모르는 척, 뻔뻔하게 지구 냄새가 난다고 받아치자 고개를 기울이며 손목에 코를 대며 킁킁, 맡는 모습이 귀여웠다. 그러니까.... 그냥, 비밀로 하자. 가슴속에 묻어두자. 오늘은 아무도 만나지 않은 것이다. 오늘은 그냥 쇼타로를 위한 과자만 사고 바로 귀가한 것이다. 외계인도 만나지 않았고, 카페도 가지 않았고, 당장 지구를 떠날 수 있는 에너지에 대한 이야기도 다 일어나지 않은 일로 하자고. 그냥 이틀 동안 더위로 크게 앓던, 나의 외계소년이 멀쩡해진 것만 기억하기로 마음먹었다.

몇 주 뒤, 성찬은 옆 반 여학생에게 고백을 받았다. 공개 고백이었다. 쭈뼛쭈뼛하게 서서 성찬에게 큰 목소리로 고백을 하는 모습이, 그리고 친구들이 사귀라고 연호를 하는 모습까지 쇼타로에겐 새로운 광경이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성찬의 표정, 그리고 붉어진 얼굴로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는 여학생의 모습. 사랑을 하면 보통 상대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고 하던데, 그럼 저 귀엽게 생긴 여학생과 사귀게 되면 이제 우리는 자주 못 보게 되는 걸까.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쇼타로는 처음으로 마음이 불편해졌다. 왜 불편한지 이유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었다. 암흑 속에서 손톱만 한 보석을 찾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8년 동안 자신만을 기다린 지구소년이, 이제 지구소녀만을 위한 존재가 되는 게 속이 뒤틀렸다. 그렇다고 정성찬이 자신만을 기다려야 하는가? 그건 또 아니었다. 앞뒤 생각이 하나도 맞지 않았다. 이게 뭐야, 짜증 나. 쇼타로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고, 곧 고백에 대한 답이 돌아온다. 

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로 시작하고, 미안해. 로 끝나는 담백한 거절 인사였다.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정성찬이 좋아하는 사람은 누굴까. 일단 사람이라 했으니까 자신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면 그것도 문제였다. 좋아해서 뭐 하려고. 자신을 좋아해서 좋을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왜 속이 뒤틀렸는지. 지구인들은 항상 이런 찝찝한 기분으로 사는 걸까? 수업 시간 그리고 쉬는 시간, 하교 시간까지 쇼타로는 사고가 멈춘 것처럼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속이 답답해서 헛구역질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쇼타로, 집에 가자. 익숙하게 곁에 서서 몸을 은근히 붙이며, 말을 거는 성찬의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또 사르르 풀리는 기분이다. 아, 내가 뭐 하는 짓인지..... 아주 감정이 널뛰고 있었다. 쇼타로는 끙, 앓는 소리를 한번 내고 미쳤다 생각하고 지구인처럼(정확히 말하자면 최근 쇼타로가 보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여우 같은 지구인처럼) 굴어보기로 한다. 

”나 아파.”

”어디가?”

”머리도 좀 아픈 것 같고......”

”업어줄까?”

평소 같았으면 거절했지만, 쇼타로는 냉큼 등에 업혔다. 서늘한 체온이 성찬의 등에 느껴진다. 의도치 않게 내가 업은 건 인간이 아니라 외계인이구나. 성찬은 새삼 한 번 더 느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아직 열병이 덜 나았나? 그러고 보니 하루 종일 쇼타로의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기도 했다. 무슨 말을 걸어도 어딘가 다른 생각에 빠진 것처럼 굴었으니까. 생각과 걱정이 꼬리를 물고, 또 꼬리를 물 때쯤 쇼타로가 성찬의 귀를 아프지 않게 앙, 하고 물었다. 아! 소름 돋는 느낌에 하마터면 쇼타로를 떨어트릴 뻔했다. 성찬은 귀가 깔끔하구나? 다정한 목소리에, 성찬은 부디 얼굴에 열이 오르지 않길 바랐다. 이 마음이 들키지 않길. 형, 이런 것도 남한테 하면 안 돼. 주의를 주는 목소리에 쇼타로는 메롱, 혀를 내밀며 한 번 더 귀를 문다. 아마 귀에 잇자국이 났을 거다. 귀가 뜨겁다. 아니, 괜히 목덜미까지 홧홧해지는 느낌에 성찬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쇼타로는 작게 속삭였다. 나도 알지롱.


”걔, 귀엽던데.”

”누구?”

”오늘 너한테 고백한 애.”

”귀엽다고 뽀뽀하면 안 된다.”


아, 안 하거든! 쇼타로가 빽, 소리를 지르자 성찬은 큭큭, 작게 소리내어 웃는다. 네 눈에는 별로 안 귀여워?  쇼타로의 질문에 성찬은 한참 그 여학생의 얼굴을 떠올린다. 귀엽게 생기긴 했지만, 자고로 귀여움이란 외모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지 않는가. 정성찬에게 귀여움은 외모뿐이 아닌, 행동이나 분위기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서 업힌 상태로 발목을 까딱까딱 흔드는 모습이라거나, 귀를 앙, 물고 작게 웃는다거나, 콧노래를 흥얼거린다거나, 가끔 이상한 선글라스를 쓰면서 이게 우리 행성 유행 패션이라고! 대뜸 소리치며 어때? 묻는다거나. ......그냥 아예 모든 귀여움의 정의가 이 외계소년을 향하고 있었다.


”나 내려 줘.”

”아프다며.”

”빨리.”

”제멋대로야, 아주.”


골목길을 돌 때쯤 쇼타로의 때아닌 투정에 성찬은 이게 연애가 아니면 뭘까? 라는 생각을 아주 잠시 했다. 단지 쇼타로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할 뿐, 결국 이 지구라는 행성에선 이 유대감은 사랑이라는 단어로 칭했으니까. 쇼타로의 발이 땅에 닿자, 성찬은 몸을 일으켜 쇼타로의 앞머리를 정돈해 준다. 자신의 외계소년은 꼭, 지구인의 손이라도 탄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형,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만져도 가만히 있을 거야? 이상한 질문에 쇼타로는 고개를 기울이며 푸른 두 눈만 깜박인다.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정성찬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게 자신이라는 것도. 

성찬아, 나 진짜 지구인 되면 어떡하지. 대답 대신 진심이 담긴 걱정에 성찬은 푸하하,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나랑 죽을 때까지 같이 살자. 성찬의 기묘한 고백에 쇼타로는 처음으로 유연하게 받지 못한다. 머리카락을 정돈하던 이 바보 같은 지구소년의 손을 붙잡고 자신의 뺨에 갖다 대며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아주 작게 속삭일 뿐이다. 응, 내가 진짜 지구인이 된다면...... 물론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겠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 아닌가. 우주엔 기묘한 일이 찰나의 순간에 탄생하고 소멸하고 있으니까. 지구인이 된다면,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른다고 해도, 기꺼이 사랑한다고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을 때까지 같이 살자는 말에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형, 아직도 떠나고 싶어?”

”바보 같은 질문은 금지야.”


성찬은 정말, 오랜 기간 동안 묻어둔 질문을 던진다. 자신의 손바닥에 뺨을 부비며 눈을 감는 외계소년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질문과 동시에 성찬은, 처음으로 이별 연습을 준비하기로 했다. 쇼타로가 지구인이 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우리는 절대로 안 될 거라는 통보와도 마찬가지였다. 첫사랑이 외계인이라서 어떡할까. 너무 임팩트가 강해서, 두 번째 사랑은 하지도 못할 것 같은데.

쇼타로는 성찬의 손목을 한번 바라본다. 열심히 에너지가 충전되고 있을 것이다. 아직도 떠나고 싶냐는 질문에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했지만, 차마 그렇다고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왜냐면.... 지구엔 정성찬이 있으니까. 자신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빛을 가진, 8년을 기다리고, 기꺼이 자신을 업어주고, 제멋대로 굴어도 귀엽다는 눈빛과, 소중하게 여기는, 마치 간과 쓸개를 다 빼서 줄 것 같은 녀석이 있었으니까.


”지구인은 어떨 때 키스하고 싶어?”

”응?”

”귀엽고 소중하면 뽀뽀하는 거라며.”

”키스는 그런 거 없어.”

”그럼?”

”사랑하면 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 사랑이 도대체 뭔데. 쇼타로는 대뜸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짜증 나. 이런 감정이 사랑인가? 어렸을 때 읽은 동화책에선 애정이란 감정은 딱 두 가지 부류로 칼같이 잘라져서 설명하고 있었다. 너무 좋아해서 한 행성을 멸망시킬 수 있는 감정, 그리고 너무 좋아해서 모든 걸 포기할 수 있는 감정. 모두 다 성숙하지 못한 무용한 감정이었다. 지구의 역사를 읽어봐도 사랑 때문에 망한 나라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모든 지구인은 사랑노래를 부르고, 미디어에선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사랑이 그렇게 아름다운가? 이 감정이 정말 애정이라면, 사랑만큼 침울하고, 혼란스럽고, 엉망진창인 감정은 없을 텐데.


”한 가지는 말해 줄 수 있어.”

”뭔데?”

”나는 가끔 형이랑 키스하는 생각을 해.”

”우리 했잖아.”

”기억 주는 거 말고.”


...그리고 나랑만 했으면 좋겠고. 결국 좋아한다, 사랑한다. 는 직설적인 표현만 들어가지 않을 뿐, 고백을 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불행하게도 쇼타로는 그만큼 눈치 없는 바보가 아니었으므로. 여전히 이 행성을 떠나고 싶냐고? 이제 확답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에 머무르고 싶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그것 또한 대답할 수 없었다. 이런 엉망진창인 감정에 인생을 걸 수 없으니까. 쇼타로는 성찬의 옷깃을 쥐고, 자신에게로 당겨 입을 맞춘다. 아무래도 돌연변이의 유전자로 태어난 게 틀림없었다. 정상적인 유전자에서 결국 삐죽, 애정이란 감정이 튀어나온 것이다. 약으로 치료가 될까? 아플 때 잠으로 컨디션을 조절하는 것처럼, 지구인이 감기에 걸리면 약을 먹는 것처럼, 치료제가 있는 걸까?

성찬은 쇼타로의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톡 튀어나온 앞니가 꽤나 사랑스러웠다. 첫 만남 땐 치아에 보석 같은 걸 달고 있었는데 지구 생활을 하면서 뗀 것조차 사랑스러웠다. 그래도 귀에 있는 피어싱은 포기 못 한다는 듯, 이 피어싱은 다이아몬드가 가득한 행성에서 샀구, 쫑알쫑알 여행기를 말하는 모습이 생생했다. 여행 이야기를 할 때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던 외계소년. 결국 애정이라는 허울만 좋은 감정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건 자신이었다. 입술이 떨어지고, 성찬은 나지막하게 고백한다. 사실 숨긴 게 있어. 그러니까 형만 원한다면.... 돌아갈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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