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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소년의 지구 생활기 起

정성찬은 하늘이 빛나던 어느 날의 새벽을 잊지 못했다. 갑자기 번쩍, 불이 난 것처럼 밝아지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어둠이 훅 몰려오는 어떤 새벽. 작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망원경으로 새벽 내내 밤하늘을 구경하던 습관의 답례와도 같았다. 저 빛의 끝엔 뭐가 있을까? 순간적인 강렬한 빛에 비해 소음 하나 없었다. 가고 싶다. 갈까? 그래, 가자. 성찬은 모험에 강한 이끌림을 느꼈다. 목에 망원경을 걸고, 모험가 세트를 꺼내서 미니 손전등을 챙기고, 가족들이 일어나지 않게 까치발을 든 상태로 거실까지 살금살금, 그리고 아주 조심히 열리는 현관문. 끼이익, 소리에 안 자고 뭐하냐는 부모님의 불호령이 뒤에서 떨어지지 않길 바랐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현관문을 몰래 닫고, 성찬은 빛을 향해 달렸다.

마을의 숲에서 분명 빛이 났었다. 정확히 오렌지색과, 그리고 푸른색이 오묘하게 섞인 매우 인공적인 색 말이다. 새벽의 숲은 무섭도록 고요했다. 성찬은 유독 겁이 없는 편이었지만, 분명 낮엔 화려한 색을 가진 숲이었다면 빛 하나 없는 새벽의 숲은 한치 앞이 보이지도 않는 암흑과 마찬가지였다. 미니 손전등 ON 버튼을 누르자 희미한 빛이 새어나온다. 좋아, 이 정도 빛이라면 조금 더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 줘. 성찬은 제발, 제발 알 수 없는 빛의 근원을 알려주길 숲에게 기도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빛. 운석일까? 아님, 외계인? 허무맹랑한 상상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숲의 절반쯤 들어갔을 때, 성찬은 다시 돌아갈까 고민에 빠졌다. 더 이상 들어갔다가 길이라도 잃으면 어떡하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바라볼 때, 안녕? 작게 목소리가 들린다. 으악, 성찬은 새된 비명과 함께 몸을 돌려 손전등을 비추자, 얼룩덜룩한 탈색머리의 소년이 손전등의 빛에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아, 아, 죄송해요. 성찬은 차마 손전등을 끌 생각은 하지 않고 방향을 틀어 다른 나무를 비춘다.

“꼬마는 잘 시간 아닌가.”

“꼬마 아닌데.“

“몇 살인데?”

“열 살.“

“우와, 완전 꼬마!”

꼬마 아니라고. 성찬은 투정을 부리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소년은 배를 잡고 낄낄 웃었다. 웃는 소리가 호쾌해서 성찬은 황당한 표정으로 웃음이 멈출 때까지 가만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머리엔 이상한 선글라스를 쓰고 있고, 옷차림도 화려했다. 티비에 나오는 사람처럼. 연예인일까? 여러가지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올 때, 탈색머리의 소년이 생각을 뚫어버리는 질문을 한다. 여기 지구 맞지? 성찬은 이상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소년은 손목시계를 몇 번 삑, 삑 소리나게 두드리더니 아니이, 내가 불시착을 했걸랑. 알 수 없는 소리나 태평하게 하는 것이다. 불시착? 지구? 이상한 옷차림? 헉, 성찬은 외계인? 소리를 빽 질렀고,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니 외계인이 인간과 똑같이 생겨도 되는 건가? 정성찬이 살아온 십 년의 인생이 부정 당하는 것 같았다. 바보 같긴, 내 입장에선 너희가 외계인이거든? 소년은 유연하게 대꾸하곤 씨익, 웃는다. 치아엔 화려한 보석 같은 게 붙어 있었다. 겨우 열 살이지만, 성찬은 이 외계인은 웃는 모습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곧 탈색머리 소년의 손목시계에서 삐, 삐, 삐, 삐 경고음이 울린다.

“폭발하는 거 아니에요?”

“그건 아니고, 이제 가야 해서.“

“저 외계인이랑 대화 더 하고 싶은데.”

탈색머리의 외계소년은 경고음이 울리는 도중에 자신과 더 이야기하고 싶다는 지구인 꼬마가 황당했다. 보통은 이런 경고음을 들으면 지레 겁을 먹지 않나? 손목시계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손목시계로 말하자면, 비행 자격증이 필요 없는 최신식 휴대용 비행체로 꽤 거금을 주고 마련하였는데 아직 1세대라서 그런지 자잘한 고장이 너무 많았다. 그냥 비행 자격증을 따고 비행체를 살 걸 그랬나. 비행체는 덩치도 크고 투명막도 있으니, 잘 곳도 충분했을 텐데.  손목시계엔 경고 문구가 하나씩 뜨기 시작한다.

[ 비행 요망 ] [ 에너지 충전 필요 ] [ 비행 요망 ] [ 에너지 충전 필요 ] [ 배터리 없음 ] [ 배터리 없음 ]

경고 문구가 계속 뜨자, 외계소년은 우선 몸을 숙여 이 깜찍한 지구인 꼬마를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오늘 안으로 다시 올게, 약속. 그러자 인간 소년은 새끼손가락을 내민다. 이게 무슨 뜻이야? 외계소년이 고개를 기울이며 묻자, 우리는 약속을 이렇게 해요. 라고 답한다. 아아, 약속. 외계소년은 흔쾌히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지구의 하루는 24시간, 대충 배터리 에너지만 채우고 오면 다시 이 아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대화나 조금 하다가 다시 돌아가야지. 나름의 계획을 짜며 지구인 꼬마의 뺨을 검지로 콕콕, 누르고 붉은색 버튼을 누르기 전에,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진다.


“아, 이름이 뭐야?”

“성찬이요. 정성찬.“

“좋은 이름이네.”

“그쪽은요?“

“내 이름은 좀 어려워서.”


그럼 나중에 봐. 안녕, 성찬! 손목시계의 붉은색 버튼을 누르자 성찬이 발견했던, 그 빛과 함께 외계소년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마치, 애초에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오렌지색과 푸른색이 섞인 오묘한 색감과 함께. 얼룩덜룩한 머리색을 가진, 푸른색 눈동자와, 웃는 모습이 귀엽고, 귀에 번쩍거리는 귀걸이가 있었고, 옷도 화려하고...... 그리고 곧, 자신을 다시 만나러 온다고 했다. 9월 13일 새벽, 정성찬은 처음으로 외계인을 만났다. 집 냉장고엔 부모님이 사둔 생일 케이크가, 그리고 예쁘게 포장된 선물 상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좋은 티를 낼 수 있을까? 아무래도 부모님을 속일 연기가 조금 필요할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가장 완벽한 생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외계소년의 지구 생활기 起


9월 13일 오후 6시. 외계소년은 다시 지구에 착륙했다. 우주를 아무리 돌고 돌아도 배터리 충전에 오류가 생겨서 A/S 센터까지 다녀왔더니 불시착했던 장소의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얼마나 충전을 해야 하냐고 묻자 자그마치 5년이란다. 그럼 5년 동안 지구에서 지내야 해? 외계 소년은 빼액, 소리를 질렀다. 방랑하는 재미가 좋았는데 지구라는 행성에 꼼짝없이 묶이게 된 것이다. 5년쯤은 낭비해도 상관없잖아. 직원의 심드렁한 대답에 외계 소년은 괜히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든다. 비행 자격증 취득을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미뤘던 지난날이 원망스러웠다. 친구들은 고장도 잘 나지 않는 거대한 비행체를 가지고 신나게 여행하고 있을 텐데. 쇼타로는 입이 비죽 나온 상태로, 손목시계의 버튼을 누른다. 5년, 성찬이라는 꼬마랑 한번 잘 지내봐야겠다고 다짐하며.

약속과 달리 성찬은 자신을 기다리지 않았다. 완전 무례해. 허, 참. 역시 꼬마의 마음은 뒤죽박죽 갈대 같구만. 외계 소년은 해가 저물 때까지 숲에 벌러덩 누워 있는다. 정말 안 오네. 진짜 안 오네.....  아무래도 숲 밖에서 한번 찾아봐야겠다. 찾으면 잔소리나 왕창 해야지. 외계소년은 흙과 낙엽을 툭, 툭 털어내며 몸을 일으킨다. 다른 행성에서 누군가를 찾는 건 처음인데. 완전 떨려. 진짜 모험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손목시계를 확인하자 [ 에너지 충전 중. . . ] 문구가 뜨고 있었다. 숲 밖으로 빠져나오자, 작은 공원이 외계소년을 반겼다. 지구와 지구인. 아카데미 수업에서 공부한 적 있었다. 생명체가 살고, 무에서 유를 만든 종족.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지만, 그만큼 죽어가고 있는 행성. 공원을 괜히 몇 바퀴 정도 빙글빙글 돌다가, 다른 길로 나오자 가게들이 쫙 펼쳐져 있었다. 음식점, 카페 그리고 수학 학원, 영어 학원...이라고 적힌 간판도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여기서 어떻게 그 꼬맹이를 찾지. 아주 찰나의 절망에 빠지지만 결국 가장 근본적인 방법으로 시작하기로 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팔을 붙잡고 혹시 성찬이라는 애 알아요? 라고 물어보는 것. 다들 고개를 젓거나, 잘 모르겠는데.... 말을 흐린다. 와, 이거 쉽지 않겠는데.

“얘, 혹시 성찬이라는 꼬마 알아?”

“걔는 왜요?“

“알아? 아니, 내가 오늘 만나기로 했는데.....”

“… 목에 망원경 달고 있는 애요?“

“응, 응!”

...걔 죽었어요. 어두운 색 동그란 덩어리가 여러 개 있고,  베이지색 음료를 마시던 학생의 싸늘한 말투가 제대로 꽂힌다. 그럴 리 없는데. 겨우 몇 시간 만에 죽는다고? 괜히 심장이 쿵, 쿵, 쿵, 쿵. 뛰는 느낌에 외계 소년은 학생의 손목을 순간적으로 세게 붙잡는다. 제대로 말해 봐. 이마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 같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지구인은 나 같은 종족과 만나면 안 되는 건가? 그럼 이 학생도 죽는다는 걸까? 모든 물음표가 외계소년의 머리를 가득 채운다. 너 성찬이랑 무슨 사이야? 외계소년의 질문에도 학생은 답이 없다. 저 학원 가야 해요. 짧은 대꾸만 돌아올 뿐. 지금 이런 비상 상황에 무슨 학원을 간다는 건지, 외계소년은 학생의 손목을 더 세게 붙잡는다. 아파요. 여전히 싸늘한 말투다.

“어, 정성찬. 여기서 뭐 해?”

“대화 중. 먼저 들어가.”

자신이 붙잡고 있는 학생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는 다른 학생. 둘이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걸 보니 같은 학교인가? 잠시만. 성찬? 정성찬? 외계소년은 순간적으로 비명을 빽, 지르며 붙잡고 있던 손을 놓는다. 너가 그 꼬마야? 언제 이렇게 컸지? 지구인은 이렇게 훅훅 크나? 외계소년은 학생의 뺨을 감싸쥐고 이리저리 돌려본다. 그러게, 그러고 보니 닮았다. 아니, 똑같이 컸네. 어두워서 잘 못 봤는데. 그나저나 왜 죽었다고 한 걸까. 그냥 자기라고 하면 될 텐데. 이거 놔요. 학생은 매정하게 외계소년의 손을 뿌리친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일까. 그 귀여운 꼬마에서 갑자기 소년이 된 것도 황당한데 이렇게 매정하게 군다고? 외계소년은 점점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하여튼, 지구인들은 무례했다. 죽어가는 행성의 주인들 아니랄까 봐.  

“왜 죽었다고 거짓말했어?”

“당신도 거짓말했잖아.”

“내가 언제?”

“바로 온다며.”

“겨우 그 시간을 못 기다린 거야?”

“당신에겐 8년이 겨우야?”

외계 소년은 8년 뒤, 9월 13일에 지구에 다시 도착했다. 정성찬은 그 외계소년만을 기다렸다.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장래희망을 모험가에서 우주비행사나 천문학자로 바꿀 만큼. 다시 만난다면 묻고 싶은 게 많았다. 하교 후, 숲으로 달려갔지만 외계소년은 오지 않았다. 최악의 생일이었다. 다음 날도 기다렸다. 그리고 그다음 날도, 다음 해에도. 하교 후, 숲에서 그 소년만을 기다렸다. 용서해 줄게, 지금이라도 와 줘. 비가 왕창 쏟아지던 날, 정성찬은 흐느껴 울었다. 정신과 의사는 생생한 꿈을 꾼 거라고 했다. 유년시절의 꿈을 현실로 여기는 사람들이 꽤 있단다. 성찬이 그 소년을 진짜라고 말할 때마다 약 처방은 더욱더 많아졌다. 부모님의 걱정은 더 늘어나고, 어떨 땐 정말 자신이 어디 위험한 정신병에 걸린 건 아닌가,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수면제와 안정제를 털어먹던 어느 날, 방송에선 외계인은 아마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생명체는 있겠지만, 지구에 사는 인간처럼 고지능을 가진 생명체는 아직 없을 거라는 내용이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지만, 성찬은  그 방송을 기점으로 타협하기로 했다. 열여덟이 되던 해, 그냥 그 순간을 꿈으로 여기자고. 아주 웃기고 황당하고 인생이 망가질 정도로 좋았던 꿈을 꾼 걸로 하자고. 그렇게 겨우 다짐했는데, 그때와 똑같은 복장에, 똑같은 얼굴을 한 외계인이, 자신의 팔을 붙잡고 꼬마 정성찬을 찾고 있을 때. 감히 그 '8년'의 시간을 '겨우'라고 치부했을 때. 알 수 없는 분노가 휩싸였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성찬은 외계소년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왕왕 분노를 쏟아냈다. 차라리 돌아오지 말지. 왜 돌아왔어. 당신은 분명 꿈이었는데. 분명, 현실에서 만났던 꿈이었는데......

분노를 쏟아내는 언어에서 경멸이 느껴지지 않는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원망은 있었지만 후회감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외계소년은 두 팔로 가득, 지구소년을 끌어안는다. 미안해, 미안해. 성찬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에, 자신의 이름을 익숙하게 부르는 그 느낌이 8년 전 새벽과 일치했다. 분명 처음 만났을 땐 이 외계인은 자신보다 훨씬 컸는데, 이젠 자신보다 한 뼘 정도 작았다. 당신한텐 겨우 하루였는데, 나한텐 8년의 시간이 지난 거구나. 정말 찾아왔구나. 나를 잊지 않았구나. 분노와 안도감이 섞인 기분은 꼭, 오렌지빛과 푸른빛이 섞인 것 같은 오묘한 느낌이었다. 성찬은 외계소년을 마주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어서 와.



열여덟이 되던 해, 성찬의 부모님은 세계 여행을 시작했다. 결혼할 때부터 있던 버킷리스트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정확히 열여덟의 기점으로 성찬은 더 이상 외계인에 대한 언급도 아예 하지 않았으니까. 정신과 약도 완전하게 끊었으니 마음 놓고 여행하기에 적당한 시기 아니겠는가. 세계 여행을 꼭 하고 싶다는 부모님의 소망에, 성찬은 찰떡같이 대학에 붙어서 합격 소식을 알릴 테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라고 했다. 아마도, 모험가의 피는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게 분명했다. 덕분에 그 기간 동안 이 외계소년과 함께 지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소파 되게 푹신푹신하다. 외계소년은 소파에 누워서 쿠션을 끌어안았다. 그 순진무구함에 성찬은 바람 빠지게 따라서 웃었다. 하고 싶은 질문이 너무 많았다. 그러니까 자, 여기서부턴 대충 질의응답 시간을 요약한 것이다. 




A.  어떻게 지구 언어를 할 수 있어?

B. 아아, 이 시계에 자동 번역 기능이 있어. 그러니까 이 시계가 최신식 비행체인데... (...) 아무튼,  나 지금 지구 언어로 말하고 있는 거 아니야아. 


A. 지구에 얼마나 있어야 해?

B. A/S 센터에서 불시착한 곳 에너지가 필요하대. 충전 기간은 5년! 그러니까 5년 동안 있어야 해.


A. 부모님 여행 가셔서 당분간 여기서 머물러도 돼.

B. 정말? 진짜? 성차안….


A. 8년 만에 묻는 건데, ...이름은 뭐야?

B. 내 이름 지구 언어론 못 써. 번역도 안 되니까 정해 줘.


A. 내가?

B. 웅.


A. 뭐가 좋을까.

B. 아까 마시던 음료 이름 뭐야? 그 까만색 알맹이 있고, 베이지색 음료.


A. 타로 밀크티?

B. 이름 귀엽다. 좋아해?


A. 좋아해.

B. 그럼 나 타로라고 불러 줘.


A. 타로.

B. 아, 나 원래 이름에 '쇼'라는 지구 언어랑 비슷한 게 들어가니까.


A. 쇼타로.

B. 응,  어때?


A. 일본 이름이야.

B. 그럼 일본 지구인으로 5년 동안 지내지, 뭐.



타로 밀크티를 좋아하는 정성찬에 의한 이름. 타로. 8년 만에 만났는데 왜 얼굴이 똑같냐고 묻자, 이 얼굴로 평생을 살걸랑. 킥킥, 웃는 소리가 돌아온다. 죽기 전까지 그런 말랑한 얼굴로 사는구나. 어딘가 특권처럼 느껴졌다. 어느 나라에선 늙기 싫어서 젊은 피로 교체한다는 기괴한 뉴스가 계속 나오고 있는 세상인데. 쇼타로는 졸린 듯 하품을 한다. 저쪽 방에 침대 있어. 그 방 써. 성찬의 말에 쇼타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성찬에겐 8년이지만, 자신에겐 겨우 하루였다. 하루 만에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는가. 우주 몇 바퀴를 돌고, A/S 센터까지 찍고, 다시 지구로 돌아오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8년 뒤에 일어나는 거 아니지. 성찬의 뼈 있는 농담에 허얼, 쇼타로는 새초롬하게 눈을 흘기다가 다시 한번 성찬을 와락 끌어안는다. 그러니까 지구 시간으로 두 시간. 그 정도만 자면 충분할 것이다. 진짜 조금만 잘게. 두 시간 정도?  꽤 애교 있는 말투에 성찬은 8년간 쌓았던 모든 고독함과 화가 다 녹는 것 같았다. 겨우 다시 만난 지 몇 시간 만에 8년의 상처가 천천히 아물고 있었다. 숲에서 만났던 그  외계소년은 지금 자신의 곁에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료의 이름을 가지고, 5년간 자신의 곁에 있을 것이며, 지금은 자신을 안아주고 있었다. 푹 자도 돼. 성찬은 기꺼이 쇼타로를 마주 끌어안는다. 한 달 동안 자도 돼. 

두 시간 후, 쇼타로는 잠에서 깼다. 9월 13일, 오후 11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소파도 푹신푹신, 침대도 푹신푹신. 지구인은 삶의 질이 높구나. 어떤 행성에선 밀짚 위에서 자느라 죽는 줄 알았는데. 쇼타로는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와서 주방을 한번 둘러본다. 냉장고엔 가족 사진 여러 장과 편지가 붙어 있었다. 8년의 공백 동안, 이 사랑스러운 지구인은 정말 열심히 크고 있었다. 가족 사진 밑엔 성찬의 부모님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쓴 편지가 적혀 있었다. '9월 13일, 성찬의 12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9월 13일이 생일이구나. 9월 13일, 9월 13일..... 오늘이잖아? 쇼타로는, 으아악, 작게 경악한다. 그럼 8년 전 꼬마는 생일에 자신을 기다린 거구나. 완전 최악이었다. 분명 기다렸을 텐데.  당신에겐 8년이 겨우야?  라고 말한 걸 보니 꽤 긴 시간 동안 자신만을 기다린 게 분명했다. 쇼타로에게 8년의 시간은 짧았지만, 지구인의 평균 수명에 따르면 8년은 분명히 긴 시간이었으니. 나를 기다린 소년. 나만을 기다린 소년. 쇼타로는 냉장고 문을 열어본다. 네모난 박스가 있었다. 냉장고 문에 붙은 사진엔 고깔모자를 쓴 어린 성찬과, 부모님이 네모 상자 안에 있는 음식을 먹고 있었다. 생일엔 이런 걸 먹는 구나. 쇼타로는 네모 상자를 꺼내서 품에 소중히 안은 후 성찬의 방문을 열었다.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던 성찬은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다. 일어났어? 그리고 시선이 케이크 상자에서 멈춘다.

“있잖아.”

“응.”

“생일 축하해.”

“고마워.”

“너무 늦게 말해서 미안해.”

성찬은 시계를 바라본다. 11시 53분. 생일이 지나려면 7분이나 남아 있었다. 아슬아슬했어. 성찬은 농담조로 말하며, 케이크 상자를 가져간 후 초에 불을 붙인다. 지구인의 생일 루틴을 보여줄게. 지구인은 생일 축하 노래도 부르고, 케이크를 먹어. 초를 불기 전에 소원도 빌고. 쇼타로는 신기하게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생을 사는 만큼 태어난 날을 중요하게 여기는구나. 생일 축하 노래의 음은 경쾌했다. 사랑하는 성찬의 생일 축하합니다. 짝짝짝. 그리고 초를 불기 전, 두 손을 모아서 기도하는 성찬의 모습을 쇼타로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그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무슨 소원 빌었어? 쇼타로의 질문에 그런 거 말하면 안 이루어진다며, 샐쭉하게 대꾸를 하고 성찬은 촛불을 껐다. 들어주고 싶어서 그렇지이. 쇼타로의 말에 성찬은 5년 동안 내 생일 챙겨주면 좋겠다고. 담백하게 생일 소원을 알려준다. 그런 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들어줄 수 있었다. 9월 13일. 내년엔 자정부터 생일 축하 파티를 열겠다고 다짐하며 쇼타로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인다. 

소원은 원래 비밀이니까, 정성찬은 거짓 소원을 고백했다. 5년 동안 내 생일 챙겨 줘. 하지만 진짜 소원은, 자신이 죽기 전까지 이 외계소년이 곁에서 생일을 챙겨주면 좋겠다고 빌었다. 8년을 기다리고, 겨우 5년. 분명히 금방 지나갈 것이다. 이미 이별이 정해진 것과 마찬가지인 이 만남은, 5년의 시작부터 서글퍼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8년 만에 보상받는 완벽한 생일이었다. 생일 축하해. 얼룩덜룩한 탈색머리의 외계소년이, 아니, 쇼타로가 작게 속삭인다.  9월 14일. 하루가 지났다. 손목시계의 예상 충전 소요 날짜가 1825일에서 1824일로 줄어들었다. 



외계소년은 영 지구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지구인은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교에 있고, 또 학원까지 간단다. 이러는 이유가 뭐냐고 묻자, 성찬은 성공하기 위해서...? 라고 답하곤 했다. 아니, 뭐 얼마나 성공하려고 자유시간도 없는 걸까. 완전 짧게 살면서. 쇼타로는 공부에 열중하던 성찬을 뒤에서 끌어안고 심심하다고 노래를 불렀다. 매일 여행만 하는 스펙타클한 삶만 살다가 지구라는 행성에 묶여 있어야 하니, 그것도 죽을 맛이었다. 여기 너무 지루해.  쇼타로의 한마디에 성찬은 괜히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어느 날 갑자기 지루하다고 사라지면 어떡하지.

“그 손목시계 있지.”

“웅.”

“처음 만났을 땐, 이동 가능하지 않았어?”

“아아, 비상용으로 한 번 쓸 수 있어.”

“그걸로 A/S 센터까지 간 거구나.”

“물론 우주도 몇 바퀴 돌았지만.”

“비상용 에너지로 우주도 돌고, 센터까지 갔다가, 지구로 돌아온 거고?”

“A/S 센터에서 불시착한 곳까지 갈 수 있는 에너지를 줬어.”

그럼 이제 못 가? 성찬은 조바심을 내며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을 뱉는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쇼타로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며 아아, 심심해. 그러니까 내가 여기에 있지. 배려 따윈 일절도 없는 속 편한 소리를 한다. 성찬의 심장에 아주 칼을 꽂는 매정한 소리를. 꼭 손목시계만 고쳐지면 자신은 상관도 하지 않고 떠나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눈동자는 지구처럼 푸른색을 하고 있으면서, 지구를 떠나려고만 하는 외계인이 미웠다. 미운 마음도 모르고, 그저 강아지처럼 성찬의 목덜미에 뺨을 부비던 쇼타로에게 성찬은 만화책 1권을 손에 쥐여준다. 지구인은 심심할 때 이런 것도 봐. 원피스 1권. 소년 만화와 모험 만화의 원조라고 불릴 수 있는 만화책이었다.

그 결과 쇼타로는 만화책에 아주 푹 빠졌다. 숨도 안 쉬고 만화책만 읽고, 밥도 먹지 않고, 공부를 끝낸 성찬이 곁에 와도 만화책만 손에 붙잡고 있었다. 중간이 없는 행동에 결국 성찬은 만화책을 뺏었다. 아, 왜애! 신경질을 퍽 내는 쇼타로의 모습에 황당한 건 오히려 성찬 쪽이었다. 무슨 외계인이 이래? 분명 ET나, 둘리나, 그런 애들은 이렇게까지 고집쟁이는 아니었는데. 나 좀 봐 줘, 공부 다 끝냈어. 성찬의 애절한 부탁에 쇼타로는 흥, 삐친 소리를 내더니 곧 뭐 하고 놀까. 푸른 눈을 반짝인다. 그러고 보니 눈 아래에 점이 있었다. 점 예쁘다. 성찬은 속에 있는 마음을 굳이 숨기는 편이 아니었다. 예쁘다는 고백에 쇼타로도 꺄르르, 웃더니 성찬의 눈 위에 있는 점과, 코에 있는 점을 손끝으로 살살 문지르며, 나는 이 점이 더 예쁘다고 생각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번역된 목소리가 너무 자연스러웠다. 실제 자기 행성으로 말하는 건 어떤 느낌일까. 삐로삐로, 이런 식으로 말할까. 쇼타로가 살고 있는 행성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이틀에 한 번, 성찬과 쇼타로는 같이 영화를 봤다. 주로 우주 이야기나, 외계인이 나오는 영화였다. 으하하, 지구인의 상상력이란! 쇼타로는 지구인의 상상력에 감탄했다. 맞는 부분도 있었고, 틀린 부분도 있었지만 우주에 있는 별과 행성을 볼 때마다 나름 비슷하게 구현을 한 부분이 신기했다.

“저렇게 생긴 외계인도 있어?”

“비슷하게 생긴 종족은 있지롱.”

“쇼타로는 지구인을 닮았어.”

“땡, 너희가 우릴 닮은 거야.”

“나 궁금한 거 있는데.”

“웅.”

“몇 살이야?”

“… 천 살 넘었을걸?”

푸흡, 성찬은 물을 마시다가 그대로 뱉었다. 사레들린 듯 기침까지 여러 번 하자, 쇼타로는 이젠 익숙하게 성찬의 등을 토닥인다. 우주의 이야기나,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성찬은 자주 기침을 하곤 했다. 지구인은 너무 약하구나. 쇼타로는 자주 기침을 몰아서 하는 성찬의 건강이 걱정됐다. 기침 소리가 작아질 때쯤, 몇 살이라고? 성찬은 되물었다. 천 살은 농담이었는데 이렇게 진지하게 받을 줄이야. 쇼타로는 지구 나이로 자신의 나이를 천천히 계산한다. 어디 보자, 공식을 대입하면...... 정확하진 않지만 대충 삼백 살, 하고 후반쯤 지나고 있을 것이다. 대충 삼백 살 넘었을 걸? 태연하게 말하는 나이에 성찬은 그날을 기점으로, 쇼타로에게 '형'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아저씨나 삼촌이라고 붙이기엔 자존심이 상했으니까. 누가 봐도 소년처럼 생겼는데 삼촌이나 아저씨 호칭은 징그럽지 않은가. 나는 열여덟인데. 성찬은 붉어진 얼굴로 말하자, 쇼타로는 완전 애기. 갓 태어난 애기. 성찬을 끌어안고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물론 자신의 나이를 지구 나이로 환산한다면 성찬과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겠지만, 굳이 말해서 뭐 하겠는가. 애기는 좀... 아니지 않나. 더듬더듬 대꾸하며, 성찬은 쇼타로를 마주 끌어안았다. 쇼타로는 체온이 낮았다. 나쁘게 말하면 얼음장 같은 몸을 가지고 있었다. 감기 걸리겠다. 지독히도 지구인 중심적인 사고로 말하는 성찬의 모습에 쇼타로는 으응, 성찬은 따뜻해서 좋아. 다정하게 답했다. 지구인은 따뜻해서 좋았다. 쇼타로는 추위를 타지 않았지만, 그래도 따뜻한 생명체는 언제나 기분을 좋게 만들었으니까. 대신 자신의 몸이 너무 차가워서 성찬이 감기에 걸리는 건 아닐까, 쇼타로는 종종 걱정했지만 성찬은 괜찮다며 하루에 한 번은 꼬박 쇼타로를 품에 안았다. 쇼타로의 시점에서 지구인은 스킨십에 강한 종족이었다. 

지구 생활 50일쯤 지났을 때, 쇼타로는 교복을 입었다. 학교 생활을 권유한 것도 성찬이었다. 이유는 솔직했다. 불안함이었다. 나사에서 잡아가면 어떡하냐는 허무맹랑한 말에 쇼타로는 아주 약간 황당함을 느꼈지만, 나사에 잡혀가서 실험 당하는 꿈을 꿨다고, 하루종일 같이 있고 싶다는 부탁에 결국 백기를 들었다. 학교 한번 가 보지, 뭐. 지구인을 속일 수 있는 서류를 만드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위장 전입은 여행자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 아니겠는가. 얼굴까지 바꿀 수 있는 능력은 없었지만, 눈동자 색과 머리카락 색 정도는 필터로 쉽게 바꿀 수 있었다. 이름 쇼타로, 국적 일본, 나이 열여덟, 생일 11월 25일, 가족 관계 부모님 두 명, 부모님은 현재 해외 출장 중. 완벽하게 위조된 서류에 전학 절차는 쉬웠다. 여기까진 쉬웠고, 다른 지구인들과 지내는 것까지 좋았는데...... 공부가 문제였다. 하루종일 의자에 앉아서 수업을 듣는 게 얼마나 고역인지. 교과서는 또 무진장 쉬웠다. 지구인은 이런 걸로 어떻게 발전한 거람? 쇼타로는 수업보다, 지구인에 초점을 뒀다. 항상 성찬과 지내다가 새로운 지구인을 만나는 것도 꽤 모험 같은 일이었으니. 생각보다 지구인은 스킨십에 강하지 않았다. 성찬과 하루에 한 번씩 포옹을 했는데, 막상 지구인은 포옹은 무슨, 다정한 말 대신 껄렁껄렁한 농담과 욕설이 난무했다. 쇼타로는 성찬에게 배운 습관으로 친해진 친구들에게 마구 포옹했다. 포옹을 할 때마다 성찬은 쇼타로의 뒷목을 잡고 그러면 안 된다고 했지만 동그랗게 뜬 눈으로 우리도 매일 포옹하잖어. 라고 말을 하면, 더 이상 뭐라고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우리는 특별한 사이니까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성찬은 '특별'이라는 단어가 목에서 콱 막힌 것처럼 나오지 않았다. 만약에, 쇼타로에게 자신도 그냥 지구인 중 한 명이면 어떡하지. '특별'이라는 개념이 없으면 어떡하지. 결국 성찬은 잡았던 뒷목을 놓아준다. 그는 5년 뒤에 자신을 떠날 외계소년이었다. '특별함' 따윈 없을 것이다. 정성찬에겐 가장 특별한 존재가 되었는데. 역시 관계는 불공평했다.

정성찬은 대외적으로 무심했지만, 쇼타로 앞에서만 유독 독점욕을 내보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학교에선 쇼타로가 어두운 색의 눈동자와 머리색으로 지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교실에 단둘만 남아 있을 땐, 원래 눈동자 보여줘. 라고 성찬은 뻔뻔하게 요구했고, 쇼타로는 참으로 이상한 지구인이구나, 생각하며 필터를 풀었다. 지구를 닮은 눈.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지구를 표현한 단어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이건 나한테만 보여줘야 해. 성찬의 말에 쇼타로는 고개를 끄덕인다. 굳이 이유는 묻지 않았다. 성찬의 악몽처럼 들키면 나사로 잡혀가서 그런 걸까나.... 쇼타로는 고개를 기울일 뿐이다.

“너희도 특별함이라는 감정을 느껴?”

“당연하지.”

“그럼, 외계인은 애정 표현 어떻게 해?”

“그런 건 없는데.”

“사랑도 안 해?”

“아, 지구인은 뭐가 이렇게 낭만적이야!”

드라마에선 매일 사랑 이야기만 하고, 뭐 꼭 죽고 못 살 것처럼 굴어야 삶인가. 쇼타로는 성찬의 방에 편하게 누운 상태로 원피스 59권을 펼쳤다. 성찬은 새삼 쇼타로의 귀찮은 말투가 괜히 얄미워졌다. 지구인이 낭만적인 것도 있지만, 외계인이 너무 버석하다고 생각은 안 하는 건가? 성찬은 쇼타로의 머리카락을 대충 쓰다듬으며, 거기서 에이스 죽어. 스포일러로 복수를 시전했고, 아아악, 정성찬 최악이야아아.... 쇼타로는 작게 절규했다.

“그럼 뽀뽀는 어떤 의미야?”

“뽀뽀? 입술 쪽?”

“응, 입술 쪽.”

쇼타로의 종족에게 뽀뽀는 기억을 지우거나, 아님 자신의 기억을 주는 용도란다. (아니, 그런 능력도 있었어? 성찬은 마법사 같다며 놀라움을 표현했고, 쇼타로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능력이었지만, 놀라는 표정에 대한 답례로 브이를 표현했다.)  키스도? 성찬의 질문에 쇼타로는 자신의 혀를 내밀며 요거? 라고 묻곤,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기억과 관련 없이 뽀뽀나 키스라는 행위만 할 수 있었지만 굳이? 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걸 보니, 확실히 애정 표현은 아니었다. 하여튼, 낭만은 하나도 없구만. 성찬의 투덜거리는 소리에 쇼타로는 만화책을 탁, 덮고는 고개를 기울이며 묻는다.

“지구인의 애정 표현은 뽀뽀?”

“응.”

“너무 좋아하면?”

“그리고 너무 귀여우면.”


오케이. 너무 좋아해도 지구인은 뽀뽀를 하고, 너무 귀여워도 뽀뽀를 한다. 오늘의 지구 상식. 그러고 보니 어제 산책할 때 만난 지구인은 키우던 강아지한테 뽀뽀를 했었다. 아, 귀여우니까! 완전 이해했어. 쇼타로는 엄지를 척, 내밀었고 성찬은 그 모습이 꽤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럼 지금 뽀뽀를 해도 되는 걸까? 그냥 눈 감고 냉큼 입 맞추고, 지금 너 귀여워서. 이렇게 말하면 쇼타로는 어떤 반응일까. 꺄르르 웃으면서 마주 입을 맞출 수도 있을 것이다. 




“머리핀, 되게 귀엽다.”

“정말? 고마워.”

“응, 뽀뽀....“

이럴 줄 알았다. 다음 날, 같은 반 여학생의 핀을 보고 관심을 가지던 쇼타로의 입에서 귀엽다는 말이 나오자 성찬은 황급히 쇼타로의 어깨를 붙잡았다. 응? 이거 아니야? 라는 눈빛에 성찬은 고개를 저었다. 여학생은 뽀뽀? 당황한 목소리로 말하자 성찬은 쇼타로가 예전에 키우던 강아지 이름이 뽀뽀거든. 하하하, 억지로 웃으며 쇼타로의 손을 잡고 질질 복도 밖으로 끌고 나온다. 아, 이 외계소년 진짜 쉽지 않다. 복도로 나와서 시선을 마주할 때 귀여울 땐 뽀뽀해도 된다며? 나름 억울한 표정을 짓는 이 소년이, 지구인의 마음은 너무 어렵다고 머리를 싸매는 쇼타로가, 빌어먹게 귀엽고도 사랑스러워서 성찬은 다시 한번 천천히 말을 골랐다. 그러니까 뽀뽀는, 소중한 존재한테 하는 거야. 그리고 침묵. 쇼타로는 눈을 천천히 굴렸다. 그럼 성찬은 내가 소중해?

쇼타로는 학교에서 귀엽다는 소리를 종종 듣곤 했다. 헤헤, 웃는 모습이 강아지 같기도 했고, 누군가는 수달과 닮았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젠 귀엽다는 말을 들으면 '뽀뽀'라는 표현을 하지 않았지만, 쇼타로는 성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대화조차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식으로 바라보는 이상한 지구인.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쇼타로는 성찬의 눈치를 살폈다. 유독 '귀엽다'거나 쇼타로에게 애정 표현이 많이 꽂히는 날, 성찬의 기분은 저기압을 찍었다. 지구인은 친구가 너무 예쁨 받는 걸 싫어하는 걸까? 쇼타로는 최대한 머리를 굴렸지만 미디어에서 종종 보던 감정으로 답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당신 질투해? 라고 여자 주인공이 질문하면, 화를 내며 그래, 질투해. 라고 대답하던 남자 주인공의 관계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연애적 감정을 교류하고 있을 텐데. 쇼타로가 걸음을 멈추자, 성찬도 걸음을 멈춘다. 얼른 집에 가야지. 기분은 저기압이지만, 말하는 투는 다정하다. 다른 친구들한텐 무심하게 말하면서.

“야, 야. 성찬아. 나 귀엽대.”

“알아.“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

안 그래도 귀여움을 잔뜩 받고 있어서 속이 뒤집히는데, 이 속 편한 외계소년은 귀여움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굳이 언급을 한다. 누구는 학교에 같이 다니자고 말한 걸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구만.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모든 걸 쏟아내고 싶지 않았다. 고장난 시계로 혹시나 자신을 떠날 것 같았으니까. 이 지구인은 이상하고 무섭다고 에너지 충전까지 한참 남은 손목시계를 가지고 도망가면 어떻게 제정신으로 살겠는가. 나사에 잡혀가는 꿈을 꿔서 자리를 비운 사이에도 시야에 두고 싶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집에 돌아왔을 때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쇼타로를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쇼타로는 이기적이니까. 자신이 짝사랑 중인 이 외계소년은 떠나는 것에 미련도 없고, 운 좋게 5년 동안 곁에 있는다고 해도 에너지 충전만 끝나면 자신을 떠날 테니까.

“없어, 타로 형.”

“학교에선 형이라고 안 부르면서.”

“학교에선 동갑이잖아.”

그럼 성찬은 내가 소중해? 라고 질문을 던졌던 날, 성찬은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8년의 시간을 기다린 지구인에겐 소중함은 당연한 것 아닐까. 분명 처음 만났을 때, 열 살의 정성찬은 목에 망원경을 걸고, 미니 손전등을 들고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금은 자신이 성찬을 약간 올려봐야 했지만. 쇼타로는 애정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아니,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로 표현되는 범우주적인 애정이 존재했지만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사랑에서 죽고 못 사는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종족 자체에서 발생하지 않은 감정이었다. 구전설화를 들어보면, 아주 예전엔 애정이라는 감정이 있었는데, 그 애정으로 전쟁이 나고 행성이 몇 번이나 망하니 어느 순간부터 애정에 대한 유전자를 모두 제거했단다. 애정은 생명체나 행성을, 크게 보면 우주를 멸망시킬 쓸모없는 감정이라고 했으니. 교과서에선 애정이라는 사적인 감정으로 행성을 멸망시킨 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침묵이 이어진다. 애정이라...... 쇼타로는 하나의 수를 던진다. 자신을 8년 동안 기다렸던, 지구인만 알아들을 수 있는 편법으로.

“나 오늘 좀 귀엽지 않아?”

어두웠던 머리색은, 얼룩덜룩한 탈색 머리 색으로, 눈동자는 푸른색으로 돌아온다. 성찬은 맹세할 수 있었다. 이 외계소년은 자신이 본 그 어떤 생명체 중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귀엽고, 아름답고, 또 이기적일 것이라고. 성찬은 쇼타로의 뺨을 감싸쥐고, 가볍게 입을 맞춘다. 쪽, 쪽, 쪽, 쪽. 한 번이 아닌, 여러 번의 버드 키스가 이어진다. 자신의 소중한 지구소년의 질투를 달랠 법은 이 방법밖에 없었다. 이게 애정인지, 아님 우정인지 확신할 수 없었으나, 저기압의 정성찬은 자신의 취향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이 차갑다며 투정을 부리면서도 더 끌어안고, 우주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하며, 말도 안 되는 상상력을 신나게 이야기하는 지구소년이 제 취향이었으니까. 틀렸어. 성찬은 조용히 편법이었던 질문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 그것도 오답으로. 왜 오답이지. 나 오늘 귀엽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그걸로 이 지구소년은 질투로 저기압이었고, 그래서 알아들을 수 있게 편법도 썼고, 알아들었고, 뽀뽀도 했고. 완벽한 정답인데. 쇼타로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까치발을 들자 성찬은 자신도 모르게 쇼타로의 허리를 두 팔로 끌어안는다.

“뭐가 틀렸는데?”

“형, 진짜 바보구나.”

“지구인한테 들을 소리 아니거든.”


얼른 집에 가자. 성찬은 저기압에서 아주 약간 풀린 목소리로 답하지만 오답 소리에 심통이 제대로 난 쇼타로는 몸을 더 기울이며 정답을 알려 달라고 왁왁, 소리를 키웠다. 하여튼, 이상한 곳에서 집착하는 부분이 있었다. 오늘만 귀여운 거 아니야. 성찬은 속삭이며 말을 이어 나간다. 원래 귀여웠어.

그러니까, 이 못말리는 지구소년의 얼굴엔 애정이 가득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봤던 그 표정. 쇼타로는 차마 그 얼굴을 보고, 나를 좋아하니? 라고 물어볼 수 없었다. 좋아한다고 하면 뭐 연애라도 하게? 어차피 시한부 연애였다. 자신에겐 연애라는 감정이 가위로 반듯하게 잘려져 있었다. 하필 이런 종족을 만나서 유감이었다. 자신이 옆 행성에서 태어났다면 지독한 사랑을 했을 텐데. 물론 이미 멸망하고 없겠지만. 바아보오 같아아아. 쇼타로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끝을 늘이며 집에 가자. 귀가를 재촉한다. 뽀뽀면 충분했다. 애정이 없다고 해도 소중한 존재랑 나누는 입맞춤은 행복했으니까. 기억을 주거나 지우는 행위가 아닌, 그저 입맞춤 행위로서도. 쇼타로의 손목시계에선 에너지 충전까지 1763일이 남았다는 알람이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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