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소년의 지구 생활기 轉
아, 드디어 지긋지긋한 지구에서의 삶도 끝이다. 이제 다시 광활한 우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새로운 행성에 방문을 할 수도, 새로운 문화를 즐길 수도,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손에 들어온 것이다. 5년이라는 시간을 꼬박,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행운이 어디 있겠는가. 분명 행운이었는데, 이런 행운은 또 없을 텐데. 사실 숨긴 게 있어. 그러니까 형만 원한다면.... 돌아갈 수 있어. 성찬의 고백에, 쇼타로는 묻고 싶은 질문이 무수히 쏟아지지만 목구멍에서 턱, 걸려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다. 어떻게 돌아갈 수 있는지, 진짜 이별의 순간이 다가온 건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떠났으면 좋겠는지.
쇼타로는 본능적으로 성찬에게서 한 걸음 멀어진다. 기쁜 표정을 지어야 하나? 아님 슬픈 표정? 왜 이런 걸 고민하고 있지? 또 한 번 찾아오는 혼란스러움에 쇼타로의 눈동자 색이 푸른색, 회색, 녹색 계열로 형형색색 바뀌기 시작한다. 타로 형, 쇼타로. 성찬은 한 걸음 더 다가가 쇼타로의 두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며 다시 입을 맞춘다. 쇼타로는 겨우 한 걸음 멀어졌다. 겨우 한 걸음. 앞으론 '겨우'가 아니겠지. 몇 만 광년일 수도, 몇 십만 광년의 거리로 멀어질 것이다. 항상 이렇게 손을 뻗으면 잡히는 거리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쪽, 쪽, 쪽, 쪽. 짧은 입맞춤이 여러 번 이어진다. 숨 쉬어, 진정하고. 입술이 닿은 상태로 천천히 말을 이어나가는 성찬의 모습에 쇼타로는 자신의 심장박동에 집중한다. 조금 더 몸을 붙이면 성찬의 심장박동까지 들릴 것 같았다. 형형색색 바뀌던 눈동자의 색이 천천히 푸른색으로 돌아온다.
도대체 쇼타로가 어느 부분에서 당황했는지 성찬은 감히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이제 자신이 해야 하는 일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 외계소년에게 자유를 주는 것. 좋아하는 만큼 집착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만큼 원하는 걸 손에 쥐여주는 것. 모르는 척 시계를 부수고, 쪽지를 버리거나 씹어 삼키는 상상을 수도 없이 많이 했지만, 여행 이야기를 할 때만큼 밝게 웃는 모습을 본 적 없었으니까. 다른 행성에 가면, 그 생명체들에게 내 이야기를 할까? 그때도 이렇게 웃을까? 웃었으면 좋겠다. 가장 좋은 추억이라고 자랑이라도 하고 다녔으면 좋겠다고 성찬은 생각했다.
외계소년의 지구 생활기 轉
자, 요약하자면.... 정성찬은 이틀 동안 자신이 자고 있을 때 같은 행성 생명체를 만났다. 그리고 그 생명체는 지구에 있는 걸 선택했다. 그것도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지구인이 죽기 전까지 곁에 있을 예정이므로 에너지는 이미 차고 넘치는 상황이었고, 그로 인하여 5년 정도의 에너지를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상황 설명 끝. 쇼타로는 성찬의 이야기를 듣고 고민에 빠졌다. 겨우 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에 지구에 남는 걸 결정하다니. 인간처럼 짧게 사는 생명체가 시들어 가는 걸 보는 것만큼 비참한 게 있을까?
“연락처도 받았어.“
“으응.“
“바로 갈 거야?“
“글쎄.“
성찬은 몇 주 동안 숨겼던 쪽지를 건넨다. 전화번호는 이미 휴대폰에 저장했지만, 차마 송 씨한테 연락을 하지도 못했다. 메신저에 이름을 추가하자 송 씨의 프로필 사진이 보였다. 아, 이 사람이 송 씨가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사진으로 보니 영락없는 지구인 커플 같았다. 부럽다. 사랑이라는 걸 확신하고 곁에 있기로 마음먹은 그 감정이.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 용기가 말이다. 쇼타로는 애정이라는 감정이 없다고 치자. 자신은 왜 겨우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 못 해서 빙글빙글 돌려서 말하고 있는 건가. 쇼타로가 기함하고 도망갈 것 같아서? 아님, 거절의 반응이 두려워서? 옆 반의 여학생도 거절을 각오하고 자신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당당하게 했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자신이 점점 최악의 인간이 되는 기분이 들어서, 허름해지는 느낌이 버거워서 성찬은 쪽지를 받고 주머니 안에 넣는 쇼타로를 말없이 바라볼 뿐이다. 그냥, 기억을 지워 달라고 할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최악이라는 사실까지도 기억하지 못하지 않을까. ...그럼 쇼타로도 쉽게 떠날 수 있지 않을까?
“성찬.“
“응.“
“찬아.“
“......응.“
“찬이라고 불러도 돼?“
최근 학교에서 애칭에 대한 이야기가 돌았는데, 그걸 적용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 누구도 자신을 찬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지만(심지어 부모님도 '성찬'이라고 불렀으니까.) 예외적인 상황으로 무조건 허용 범위를 주고 싶은 상대가 있지 않은가. 성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 될 게 뭐가 있어. 짧게 대꾸하자 쇼타로는 그제야 푸흐흐, 작게 웃는다. 그럼... 나만 부를 수 있는 쇼타로의 애칭은 뭐가 있을까? 쇼타로는 이미 모두가 타로라고 부르고 있었다. 타로, 타롱, 수달 등등. 이마저도 허술하고도 일방적인 관계 같아서, 성찬은 그저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쇼타로는 그날 밤 오랜만에 숲을 찾았다. 불시착했던 숲. 여기서 목에 망원경을 대롱대롱 달고, 미니 손전등을 들고 있던 열 살의 정성찬을 만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는 말이 지구에 있다던데, 숲엔 공사 예정 표시 표지판이 커다랗게 달려 있었다. 새로운 건물을 짓는다는 내용이었다.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외부인은 이곳을 떠나라는 암묵적인 경고 같아서 쇼타로는 미간을 좁혔다. 꼭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외계인은 지구를 떠나시오.>로 보이는 느낌에 우씨, 쇼타로는 표지판을 발로 걷어찬다.
처음으로 지구의 대지를 밟았던 울창한 숲. 정성찬을 만났던 숲. 자신이 지구를 떠나고, 공사가 시작되면서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잊혀질 것이다. 성찬도 겨우 몇 년만 그리워하다가 차츰 잊겠지. 짧은 삶을 사는 생명체는 망각의 축복이 있으니 말이다. 쇼타로는 풀숲에 앉아서 꺾인 꽃을 줍고, 꽃잎을 하나씩 떼어낸다. 운명에 맡기자. 그냥, 운명에 맡기는 거다.
머무른다, 떠난다, 머무른다, 떠난다, 머무른다, 떠난다, 머무른다, 떠난다......
쇼타로에게 다정함은 본성이라면, 운명론은 태생이었다. 귀찮다는 이유로 비행 자격증은 따지도 않았으면서, 오늘 천둥이 다섯 번 치면 돈을 다 털어서 새로 나온 최신식 시계를 구매해야지, 콧노래를 불렀더니 마른하늘에 천둥이 정확히 다섯 번 울린 어이없는 사건부터, 그 후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여행을 시작한 것도. 남들이 듣는다면 비웃을 것 같은 우연과 운명이 절묘하게 섞이면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 운명론자 앞에서 숲에 있는 표지판도, 꽃점도 모두 떠날 것을 알리고 있었다. 나도 안다구, 나도 알아. 쇼타로는 무릎을 모은 상태로 얼굴을 묻는다. 나도 진짜 떠나고 싶어, 그런데.....
알 수 없는 감정이 심장에서 튀어나오는 느낌이 공포스러웠다. 집에서 자고 있을 지구소년이 보고 싶었다. 누군가를 이렇게 보고 싶어 한 적 있었나? 쇼타로는 다시 한번 헛구역질을 한다. 우웩, 웩, 속에 담긴 무언가를 쏟아내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분명 치료제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아프고, 속이 울렁거리는데, 병에 걸린 것이 틀림없었다. 돌연변이가 되는 과정은 이렇게 다 아픈 건가?
며칠 뒤, 쇼타로는 아프다는 핑계로 결석을 했다. 지구인이라면 가장 중요한 열아홉에 결석 수가 많다고 걱정이라도 하겠지만, 외계인에게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성찬도 같이 결석하고 곁에 있겠다고 했지만, 쇼타로는 고개를 저었다. 잠만 잘 거야. 발걸음이 도통 떨어지지 않는 성찬을 보낸 후에, 쇼타로는 쪽지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이어지더니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세요.“
“나 좀 살려 줘.“
“.....시계 주인?“
“응.
대뜸 살려 달라는 말에, 곧 메시지로 주소 하나가 도착한다. 골목길에, 골목길. 주소의 끝엔 사람 하나 없을 것 같은 카페가 있었다. 문을 열자 갈색 머리의 예민하게 생긴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아, 지구인이 보기엔 모르겠지만 누가 봐도 외계인이었다. 그것도 동향의. 쇼타로는 성큼성큼 다가가서 남자의 눈을 빤히 쳐다본다. 육체적 성장이 멈추는 시기는 모두 다르기 때문에 대충 눈을 보면 나이를 알 수 있었다. 투명하면서도 깔끔한 갈색의 눈동자. ...뭐야, 나보다 어리네. 형이라고 불러. 쇼타로의 말에 남자는 지구살이는 내가 선배거든. 담백하게 대꾸할 뿐이다.
얼룩덜룩한 탈색 머리의 소년이 그때 만난 지구인의 상대구나. 푸른색의 눈동자, 삼백 살쯤 넘었으려나. 이제 겨우 이백 살을 넘긴 자신에겐 확실히 형이었지만, 어려 보이고 말랑한 얼굴 탓에 굳이 호칭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형'이라는 호칭은 지구에만 있는 특유의 문화 아니겠는가. 그런 문화만 쏙쏙 배운 새파란 지구 새내기에게 굳이 호칭을 붙이고 싶지 않기도 했고. 송 씨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쇼타로가 먼저 입을 열길 기다린다.
“지구에 오고 나서 자꾸 아파.“
“어떻게?“
“이틀 동안 잠만 자고, 속도 안 좋고, 열도 나고.“
너는 답을 알아? 눈을 반짝이며 묻는 쇼타로의 모습에 송 씨는 별말 없이 갓 내린 커피를 건넨다. 외계인이면서 지구에서 아무렇지 않게 카페 사장 노릇을 하고 있다니. 가만 보면 앞치마가 꽤 잘 어울리기도 하고. 쇼타로는 각설탕 두 개를 떨어트린다. 퐁당, 퐁당. 나는 달달한 게 좋더라. 손님 하나 없는 지구의 카페에서 외계인 두 명이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하고 있다니. 지구인들은 알기나 할까. 송 씨는 의자에 앉곤 쇼타로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댄다. 아직 미열이 남아 있었다. 아, 오랜만에 느껴보는 적절한 온도. 성찬의 손은 마냥 뜨거웠는데, 이 남자는 역시 서늘한 체온을 가지고 있었다. 간만에 느끼는 적절한 온도에 쇼타로는 순순히 눈을 감는다.
“지구에 적응을 못한 걸까?“
“그건 아니고.“
“그럼?“
지구를 떠나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송 씨는 모든 말을 담백하게 했다. 아, 그게 뭐람. 쇼타로는 커피를 마시곤 각설탕 하나를 새로 꺼내 오독오독 씹는다. 혀끝에서부터 느껴지는 달달한 맛이 왜 이렇게 좋은지. 달달한 걸 먹으며 만화책을 읽을 때 성찬은 우주에도 달달한 음식이 많아? 라고 물어본 적 있었다. 바보 같은 질문. 단맛이 나는 폭포도 있는걸. 쇼타로는 각설탕 하나를 더 꺼내서 유심히 살펴본다. 정사각형의 깔끔하게 정제된 모양. 인간들은 이런 모양에 안정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흐트러지지 않는, 완벽하게 합이 맞는. 하지만 이런 완벽한 모양을 추구하는 종족치고는, 무용하고 흐트러지는 걸 낭만으로 여기는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아, 인간은 너무 어려워. 쇼타로는 각설탕을 입 속에 하나 더 집어넣는다.
“이름은 뭐야?“
“송은석.“
“와, 지구 이름으로 말하네.“
“당분간은 지구인으로 살고 싶으니까.“
송은석, 은석, 석. 좋아하는 사람이 지어줬단다. 은석의 행성은 돌이 많았고, 그걸 설명하다가 그 사람은 돌 석이 어울리겠다. 하고 킥킥 웃은 후부터 얼추 맞는 한자를 적어서 송은석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쇼타로는 꽤 낭만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래, 멸망한 옆 행성엔 유독 돌이 많았다. 놀러갈 때마다 발에 채는 돌을 보며 쇼타로는 유전자에 사랑이 있는 속과 매우 다르다고 생각하곤 했었으니까. 사랑은 겉으로 보기엔 말랑하고, 무용하나 때론 칼처럼 튀어나올 수 있는 위험한 감정이었고, ...아, 어떻게 보면 돌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지면 피를 보게 되니까. 그 이름이 괜히 애틋하고 귀하게 느껴져서, 쇼타로는 '송은석'이라는 이름 대신 '어이'라거나 '돌'이라고 칭했고, 은석은 부정하지도 않고 조용히 웃으며 반문했다.
“네 이름은 뭔데.“
“쇼타로.“
“일본 이름이네.“
“그래서 일본인 설정.“
“그 애가 지어줬어?“
“응, 타로 밀크티를 좋아한대.“
그 지구인의 이야기를 할 때 눈을 반짝이며 답을 하는 모습을 보며, 은석은 쇼타로의 머리를 한 손으로 대충 헝클어트린다. 아아, 하지 마. 성을 내는 모습조차 꽤 웃겼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대해 면역력이 없으니 크게 앓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과정이었다. 처음 겪는 애정이란 감정은 분명 유쾌하지 않을 것이니.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나 해 봐. 쇼타로의 말에 은석은 아무 말 없이 커피를 한 번 더 내리더니, 병원에 있어. 아프거든. 작게 중얼거린다. 지구에선 못 고치는 병이란다. 참 나, 드넓은 우주에 못 고치는 병이 어디 있다고. 그 누구보다도 쉽게 다른 행성에 갈 수 있는 놈이 꼼짝없이 묶여 있다는 사실에 쇼타로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은석은 나름 진지하게 말을 이어 나간다. 갑자기 자리를 비웠을 때 아프면 어떡해. 그리고 시간의 흐름도 모르고.
은석의 말에 쇼타로는 아, 바보 같은 탄식을 뱉는다. 그래, 우주로 나가는 순간 시간의 흐름이 바뀐다. 감이 잡히지도 않을 만큼. 자신에게 겨우 하루가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성찬에게 8년이란 시간이 흘렀던 것이 완벽한 예시였다. 약을 구해서 오는 건 쉬웠지만, 지구를 떠나는 그 순간에 사랑하는 인간이 몹시 아플까 봐, 혹은 돌아왔을 때 감이 잡히지도 않는 시간이 흘러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그 순간이 두려워서. 답이 있음에도 이렇게 지구인의 행세를 하는 것. 제아무리 돌연변이처럼 애정이 삐죽삐죽 튀어나온다고 해도, 태생으로 애정을 쥐고 태어난 놈은 차원이 달랐다. 불쌍한 정성찬, 성찬아. 나도 애정을 쥐고 태어났다면 무조건적으로 네 곁에 있고 싶었을 텐데. 그럼 너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을 텐데.
“너 꽤 지구인 같아.“
“칭찬 고마워.“
“별말씀을.“
“그래서, 시계는 들고 왔어?“
은석의 질문에 쇼타로는 고개를 젓는다. 에너지 받으러 온 거면 지금 당장 줄 수 있어. 곧 이어지는 속삭이는 목소리에 쇼타로는 시계 없다니까. 불퉁한 의사를 보였고, 은석은 자신의 입술을 가리킨다. 입맞춤으로도 주고받을 수 있는 건 다 잊었나 봐.
쇼타로는 순간적으로 입술을 두 손으로 가린다. 입맞춤? 아무런 성애적 표현이 없이 가능한 수단이었지만, 이상하게 성찬과 입맞춤을 시작한 이후부터 공유 시스템보다 다른 쪽으로 비중이 쏠리기 시작했다. 뽀뽀는 소중하고 귀여운 존재와 하는 것, 그리고 키스는...... 사랑하면 하는 것. 입술을 가린 상태로 두 눈만 꿈벅이는 모습이 오히려 자신보다 더 지구인 같아서 은석은 크게 터지는 웃음을 겨우 참는다. 이게 사랑인지도 모르면서 하는 행동은 사랑에 빠진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으니.
“그 애 좋아해?“
“잘 모르겠어.“
그런데 확실한 건, 입을 맞춰야 한다면 그 애랑 하고 싶어. 쇼타로는 나지막하게, 그리고 가장 솔직하게 마음을 고백한다. 같은 종족이니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알 것 같아서. 굳이 쇼타로가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크게 앓고 있는 이유를 알려줘야 할까, 그 지구소년 곁에서 멀어지고,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모두 괜찮아질 일이었으니. 은석은 길게 고민하다가, 결국엔 쇼타로가 찾고 있는 해답을 알려주기로 한다. 사랑에 빠져서 아픈 거야, 면역력이 없어서.
사랑.
1.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집으로 돌아온 후, 쇼타로는 성찬의 방에서 사전을 찾아서 펼쳤다.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사...... 사랑. 사전적 정의로만 본다면, 쇼타로는 정성찬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 시기가 언제였는지 감이 잡히지도 않을 만큼. 8년 동안 자신만을 기다린 그 소년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귀엽다는 말은 잘만 하면서, 귀엽다는 말이 누군가의 입에 오르는 건 싫어하고, 눈 색이 바뀌는 걸 자신만 보는 걸 좋아하는 욕심 많은 지구인을 귀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니까? 그래, 사랑하니까.
쇼타로는 생각이 많아질 때, 욕조에 입욕제를 풀어 넣고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는 걸 좋아했다. 거품이 보글보글 터지는 느낌과 서늘한 체온이 녹는 느낌이 좋다고 말하자, 그 후부터 성찬은 항상 입욕제가 떨어지지 않게 사두곤 했다. 친절한 지구인, 바보 같은 지구인. 쇼타로는 거품 목욕을 하며 계속 사전의 같은 구간을 읽었다.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존재를.... 사전적 정의로는 사람만으로 제한을 두지 않았다. 그럼 인간은 동물을 사랑할 수도, 자신과도 같은 외계인도 사랑할 수 있는 걸까. 곧 도어락이 삑, 삑, 삑, 삑 울리자 쇼타로는 고개를 든다. (순간적으로 사전을 물에 빠트릴 뻔했지만, 운이 좋게 겨우 다시 붙잡았다.)
"욕실에 있어?"
"으응."
"거품 목욕?"
"웅."
"...들어가도 돼?"
응,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린다. 안녀엉. 욕조에 팔을 걸친 상태로 한 손엔 사전을 들고, 한 손으로는 손바닥을 쫙 펼친 상태로 인사를 한다. 젖은 머리카락, 입욕제, 거품, 발갛게 달아오른 쇼타로. 성찬은 애써 불순한 생각을 지우고, 가방을 내려놓고 욕조로 다가가서 허리를 굽힌다. 몸은 좀 괜찮아? 익숙하게 쇼타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손바닥이 이마에 닿는다. 따뜻한 물 덕분에 서늘하던 체온이 꽤 높아졌다. 응, 괜찮아. 긍정적인 말투에 안심을 하고, 다음으로 손에 들고 있는 사전으로 시선을 옮긴다. 갑자기 사전? 성찬은 굳이 말을 하지 않고 한쪽 눈썹을 올리며 고개를 기울이자, 쇼타로는 보고 있던 사전의 '사랑'에 대한 서술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콕, 짚어서 보여준다.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쪽지의 주인을 만나고 왔어."
"그래서?"
"걔가 나보고 사랑에 빠졌대."
손에 쥐고 태어나지도 않은 애정이 삼백 살이나 먹고 쥐게 되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나 사랑해? 쇼타로의 질문에, 성찬은 고개를 끄덕인다. 사랑한다는 말을 먼저 고백할 순 없어도, 사랑하냐는 질문엔 정직하게 고백할 수 있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답변에 쇼타로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킁, 코를 훌쩍이며 '사랑'이 적힌 사전의 페이지를 찢어내더니 구겨서 입 안에 욱여넣는다. 식도로 넘어가는 종이의 질감이, 마치 애정처럼 삐죽삐죽 다 튀어나와서, 상처가 날 것 같았다. 그런 거 먹으면 안 돼. 성찬의 당황한 숨소리에도 불구하고, 쇼타로는 팔을 뻗어 성찬의 교복 넥타이를 잡아당긴다. 아무런 효과도 없겠지만, 사랑의 정의가 적힌 부분을 씹어서 삼킨다면 잘린 유전자에서 이상하게 파생되고 있는 애정이, 이게 사랑이라고, 잘 이해하게 될 것 같았다. 그럼 열병 같은 것도 다 괜찮아지겠지.
성찬의 몸이 앞으로 쏠리면서 겨우 한 팔로 욕조를 지탱한다. 축축하게 젖은 쇼타로의 얼굴이 어딘가 후련하게 보이면서도 사랑스럽고, 그리고 슬퍼 보였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슬프게 만들고 있는 걸까? 쇼타로는 성찬에게 입을 맞춘다. 축축한 종이의 맛과 활자의 맛이 난다. 찬아, 나 아무래도 사랑에 빠진 거 같아.
성찬은 더 이상 타로 밀크티를 마시지 않았다. 어느 날, 품에서 탄산을 마시는 쇼타로에게 나도 마실래. 속삭이면, 마시던 빨대를 물려주며 요즘 타로 밀크티 안 마셔? 쇼타로는 물었고, 형 안고 있으니까 안 땡겨. 말간 표정으로 성찬은 대꾸했다. 그럼 자신이 없을 땐 다시 타로 밀크티를 마시는 걸까? 지구인은 역시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더 특이한 점은 성찬은 타인이 쓰던 빨대를 굳이 같이 쓰지 않았고 (학교에서 A군이 마시던 음료를 건네자 빨대를 빼고 마시거나 입을 대지 않고 마셨다.) 남이 먹던 걸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쇼타로가 쓰는 빨대는 아무렇지 않게 입술을 대는 것이었다.
"왜 내 빨대는 입에 대?"
"싫어? 하지 말까?"
"아니, 그냥 궁금해서."
형이니까. 담백한 대답과 함께 성찬은 쇼타로의 어깨에 입술을 묻는다. 정말이지, 사랑이라는 건 너무 어려웠다. 원래 무용하고 엉망진창인 건 정형화된 틀이 없었다. 각설탕처럼 답이 딱 나오면 좋을 텐데. 그러니까 모든 미디어나 책에서 나오는 사랑 이야기의 감정선이 다 다른 것이 아닐까. 그럼 빨대를 공유하는 것도 정성찬이 가진 사랑의 일부겠지? 너 나 무지하게 좋아하는구나. 책장을 넘기면서 킥킥, 웃는 쇼타로의 말에 성찬은 여전히 서늘한 체온의 상대의 허리를 감싸안는다.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랑한다고 답하고 싶지만,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차라리 욕조에서처럼 나를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고개라도 끄덕일 텐데. 사람이 점점 더 치사하고 옹졸해진다. 감정이 커지면 겁이 더 많아지고.
쇼타로와 성찬은 일주일에 한 번씩 은석을 만났다. 혹시나 모를 상황에서 시계를 충전해야 한다는 은석의 의견에 성찬은 마지못해 손목시계를 건넸고, 충전이 끝난 시계는 다시 쇼타로의 손목에 채워졌다. 이제 언제든지 쇼타로가 떠날 수 있었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자면 자고 일어났을 때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찬아, 나 아무래도 사랑에 빠진 거 같아. 쇼타로가 욕조에서 고백했던 날 이후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언제 떠나겠다는 말도 일절 나오지 않았다. 그저 학교를 다니고 시덥잖은 이야기나 나누면서, 일주일에 한 번은 은석의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는 것. 그리고 학교에선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하되, 집에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것. 그게 다였다.
쇼타로의 손목에 시계가 다시 채워진 이후로, 정확히 말하자면 쇼타로에게 떠날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긴 이후로, 성찬은 자신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쇼타로, 혹은 쇼타로의 시계를 부수는 꿈을 꾸곤 했다. 전자의 꿈보다 후자의 꿈이 더 끔찍했다. 성찬아, 이게 네가 말한 사랑이야? 모든 걸 잃어버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쇼타로의 얼굴이 생생했기에, 그런 기묘한 악몽을 꿀 때마다 성찬은 헉, 식은땀과 함께 벌떡 몸을 일으켰다. 거실에선 미디어 소음이 잔잔하게 울린다. 잠이 없는 외계인. 하루에 한 시간만 자도 괜찮다며 새벽엔 항상 말똥말똥한 얼굴로 만화책을 읽거나 거실에서 OTT로 미디어를 보곤 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팝콘을 와작와작 먹던 소리가 멈추고 창백한 푸른 눈이 성찬에게 꽂힌다. 악몽 꿨구나. 그리고 눈동자와 어울리지 않는 다정한 말투까지. 자신의 외계소년은 팔을 크게 벌려 성찬을 품에 안는다. 소파에 남자 두 명이 구겨져서 끌어안는 행색이 꽤 웃기지만, 그 누구도 웃지 않았다. 쇼타로는 그저 성찬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재워줄까? 속삭였고, 성찬은 덩치에 맞지 않게 몸을 조금 더 구겨서 쇼타로의 품에 파고들며, 영화 보자. 대꾸할 뿐이다.
"찬아, 지금 새벽 세 시인데."
"하루쯤은 안 자도 괜찮아."
"이거, 제목 무서워서 마음에 들어."
"참고로 이 영화 장르, 공포가 아니라 로맨스야."
"...지구인은 좋아하면 췌장도 먹니?"
성찬은 익숙하게 쇼타로를 끌어안고 영화 재생 버튼을 누른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간만에 호러 장르가 보고 싶어서 골랐더니 아쉽게도 로맨스란다. 지구인들 꽤 난폭하잖어. 쇼타로의 투정에 성찬은 나 공포 무서워해. 작게 속삭이자, 넌 우주는 못 가겠다. 꺄르르, 웃음소리만 돌아온다. 아마 우주를 두렵게 여기지 않는 인간이 있을까? 인간만큼 미지의 영역을 두려워하고, 경이롭게 여기는 존재도 없을 텐데.
내용은 간단했다. 췌장에 관련된 지병을 앓고 있는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 로맨스 클리셰가 듬뿍 들어갔지만 조금 다른 점은.... 여자 주인공은 췌장에 관련된 병이 아닌, 어느 날 갑작스럽게 죽었다는 점이었다. 보통 슬픈 (클리셰가 가득한) 영화를 보면 눈물부터 쏟는 성찬이었지만, 이 영화는 이상하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상황이 너무 비슷했다. 5년을 약속한 시간, 그리고 이젠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외계소년. 쇼타로가 5년 동안 곁에 머물러 준다고 해도, 이 5년의 기간 동안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장담할 수 있을까? 당장 내일 등교를 하다가 차에 치일 수도 있고, 기상천외한 재난 같은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그런 나약하고도 운명에 휩쓸리는 생명체. 그런 일이 일어나면 자신의 품에 있는 이 외계인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 슬픔을 주고 싶지 않았다. 혹여나 쇼타로가 자신이 죽기 전까지 곁에 있어 준다고 해도, 그런 헤어짐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이니.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한 이 관계가 재정립된다. 결국 불리한 건 쇼타로였다.
"타로. "
"응?"
"떠나고 싶어?"
"그런 질문 금지라니까."
"나 좀 봐."
푸른색 눈동자가 성찬을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에 내가 같은 종족이었으면 어땠을까. 송은석처럼, 애정 하나 기가 막히게 쥐고 태어난 혼혈이었으면. 그냥 어디 경치 좋은 행성에서 터를 하나 잡고, 오손도손 살 수 있었을 텐데. 아님 영원과 비슷한 시간을, 우주를 여행하면서 지낼 수도 있었고. 다이아몬드가 가득한 행성에서 제작한 그 피어싱도, 자신이 선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쇼타로가 말하는 모든 여행기에 자신이 존재할 수도 있었다. ...물론 같은 종족이라면, 이런 뽀뽀나 키스 같은 애정 표현은 형식적인 공유 시스템이라고 여기며 버석할 수도 있겠지만. 또 모르는 일 아닌가. 지구에 같이 불시착해서 애정 표현을 배울 수도. 지구인의 지독한 사랑 중독에 기함하면서도 편승해 입을 맞출 수도. 그렇게 터를 내리는 곳이 지구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성찬은 쇼타로의 이마에 한 번, 뺨에 한 번, 그리고 눈 아래의 점에도 한 번씩 입을 맞춘다. 아니면 그냥 8년 만에 만났던 그날, 쇼타로가 자신을 찾을 때 모르는 척을 했으면 어땠을까. 그럼 쇼타로는 평생 애정이 뭔지도 모르고 5년 동안 지내다가 미련 없이 떠날 수도 있었다. ...만약에, 떠나고 싶으면 떠나도 돼. 성찬의 말에 쇼타로는 가만히 두 눈을 깜박인다. 이제 내가 귀찮아?
"그런 뜻 아니야."
"내가 갔으면 좋겠어?"
"영화처럼 나는 내일 당장 죽을 수도 있고."
"갑자기 철든 것처럼 행동하지 마."
여기서 성찬의 말에서 틀린 부분은 없었다. 교과서적인 구구절절 옳은 말. 5년 동안 곁에 있는다고 해도 내일 당장 죽을 수도 있는 게 생명 아니겠는가. 만일 내일 갑자기 정성찬이 죽는다면? 아직 소중한 사람을 크게 잃어 보지 않았으니, 미디어의 오열하며 가슴을 부여잡는 감정이 멀게 느껴졌다. 나도 그렇게 울게 될까? 확실한 건 아마 평생을 가슴에 묻고 살겠지. 지구라는 행성에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가장 귀하게 여긴 존재가 나고 자란 행성에, 더 이상 그 존재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쇼타로는 이번에 질문을 바꿔서 던진다. 나를 왜 사랑하는 거야? 이번에 성찬은 대답하지 않는다. 질문이 그대로 돌아올 뿐이다. 형은 왜 나를 사랑하는데?
"타로, 맞지?"
"아, 안녕."
"나 기억해? 성찬이한테 고백하다가 차였는데."
"응, 기억해."
"바보 같지."
바보? 어디가 바보 같다는 걸까? 쇼타로는 미간을 좁히며 궁리했다. 어느 부분에서도 바보 같은 구석은 없었다. 용기를 내서 고백하는 것. 그것만큼 현명하고 대단한 일은 없을 텐데. 나는 대단하다고 생각해. 쇼타로의 말에 여학생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성찬이한테 한 번 더 고백하고 싶어서.... 말끝을 흐린다. 아, 여기서 뭐라고 해야 할까. 최근 지구인의 사고가 나름 가능해진 쇼타로는 머리를 최대한 굴렸다. 하나, 정성찬은 자신을 사랑한다. 둘, 일방적인 사랑보단 쌍방향적인 감정일 것이다. 셋, 하지만 언젠가 정성찬의 곁을 떠나야 한다. 넷, 그럼 정성찬은 혼자 있어야 한다. 다섯, 기다리는 기간은 정해지지 않았다. 여섯, 그러므로 정성찬은... 자신을 기다리면 안 된다.
쇼타로는 웃음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도 억지로 웃는 타입이었다. 입꼬리를 올려 웃으면 모든 생명체는 호감을 표시했으니까. 성찬이를 많이 좋아해? 여학생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인다. ... 만약, 만약에 자신이 지구에 불시착 하지 않았으면, 그렇게 성찬을 만나지 않았다면 , 사랑에 볼을 붉히는 지구인과 평범한 연애를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질 것이다. 이기적으로 행동한다고 좋아질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 그러니까,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어이, 돌."
"왜."
"나, 이제 떠날 때가 된 거 같아."
"정성찬은."
"내가 없어도 곁에서 챙겨줄 수 있어?"
무슨 여기가 지구인 보호소도 아니고. 은석은 각설탕을 병에 가득 채우며 투덜거린다. 퉁명스러운 말투와 달리 한참 뒤에 고개를 대충 끄덕인다. 리필된 각설탕을 기다렸다는 듯 쇼타로는 오독오독 씹어 먹는다. 안 떠날 것처럼 굴더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어. 은석은 쇼타로의 맞은편에 앉아서 턱을 괸 상태로 가만히 바라본다. 각설탕 하나는 입 안으로, 각설탕 하나는 커피 안에 퐁당 넣곤 서서히 녹는 모습을 지켜본다. 분명 애정도 삐죽삐죽 튀어나오는 느낌이었지만, 언젠가 커피에 각설탕이 녹는 것처럼 부드럽게 스며드는 날이 올 것이다. 쇼타로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걔한테 기회를 한 번 더 주려고."
"많이 슬퍼할 텐데."
"그러니까 곁에 있어줘."
원망도 다 들어주고, 나에 대해서 욕을 하면 같이 욕을 해줘. 쇼타로의 말에 은석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소중한 존재의 죽음과 삶을 생각하면,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과 답이 입술 끝에 매달린다. 나를 사랑해? 혹은 나를 왜 사랑해? 그리고, 너를 사랑해. ... 그러니까, 그 마음만큼 성찬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싶었다.
제대로 된, 평범한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자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정말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8년 전에 우연히 만나고, 그렇게 8년을 기다리고, 그리고 또 만남이 이어지고.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하게 살 수 없는 삶이었다. 지구인은 우주에 너무나도 많은 낭만을 가지고 있었다. 어떠한 낭만적인 사건이 자신에게 다가오길 바라지만, 사실 개인의 삶으로 파고든다면 말이 좋아 낭만이지, 실상은 거대한 지옥 같은 재난과도 같았다. 평범한 삶을 뒤흔드는 사건이니까. 거기에 중독되면서 그걸 낭만으로 치부하다가, 눈을 감기 전에 후회를 하는 것이 당연한 순리 아니겠는가. 이게 옳은 일 맞지? 쇼타로의 질문에 은석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한다.
"쇼타로."
"왜애."
"너도 꽤 지구인 같아."
은석은 저번에 들었던 말을 그대로 쇼타로에게 돌려준다. 이기적이고, 살아남기 위해서 유전자까지 잘라버린 종족. 그런 녀석이 처음으로 남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건 참... 인간다웠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행동이었다. 정성찬의 영향일까. 아님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점점 바뀌고 있는 걸까. 쇼타로는 잠시 고개를 기울이더니 산뜻하게 웃는다. 칭찬 고마워.
성찬의 생일이 정확히 일주일 남았다. 그 일주일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지. 작년 성찬의 생일 소원처럼 5년 내내 생일을 축하해 주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이별하기 전 마지막일 수도 있는 생일은 꼭 챙겨주고 싶었다. 오히려 떠나고 싶으면 떠나도 된다고 말한 성찬의 배려가 눈물 나게 고마웠다. 만약에 가지 말라고 발목이라도 붙잡았으면...... 또 한참을 망설였을 수도 있었다. 지구에 오면서 미련이라는 감정까지 배운 탓에 삶의 무게가 조금 더 무거워졌지만, 은석은 그것 또한 사랑의 일부라고 했다. 애정만 딱 생기는 게 아니라 그로부터 파생되는 감정이 무수히 많았다.
현관문 도어락을 누르고 문을 열자, 방문을 열고 거실 쪽으로 나오는 성찬과 시선이 마주친다. 안녕. 오늘따라 어색한 말투가 이상하지만 성찬은 다녀왔어? 다정하게 안부를 묻는다. 학교에서도 만났으면서. 바보 같아. 정말, 바보 같았다. 쇼타로는 운동화를 벗지도 않고 팔을 뻗는다. 찬아, 나 안아 줘. 성찬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천천히 다가와서 쇼타로를 품에 안는다. 키스도 할래. 끝없이 이어지는 요구 사항에도 성찬은 기억 없애는 거 아니지. 간단한 농담을 던지며 입을 맞출 뿐이다.
"찬아."
"응."
"나 일주일 동안 인간처럼 살아볼래."
"그럴까?"
"연애도 하고."
"그러자."
인간의 혀는 따뜻하고 말랑했다. 성찬은 아주 가끔 쇼타로와 키스를 끝내고, 혀가 차갑고 축축해. 라고 말하곤 했다. 별로야? 쇼타로의 질문에 성찬은 푸하하, 웃더니 다시 입을 맞추곤 속삭였다. 아니, 기분 좋아. 입술이 떨어지고, 다시 한번 쇼타로는 까치발을 들어 입을 맞춘다. ... 아, 우리가 언젠가, 정말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때도 나를 선택해 주면 좋을 텐데.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기회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선택하면 좋을 텐데. 그렇다고 불확실한 미래에, 성찬의 곁에 다른 이가 있어도 원망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맹세할 수 있었다. 그게 당연한 순리니까. 같이 나이를 먹고, 얼굴의 주름을 만지며, 하하호호 느긋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서 한평생을 사는 것. 외계인인 자신은 절대 해줄 수 없는 것이었으니.
아랫입술도 한번 물고, 성찬의 혀끝도 아프지 않게 물자, 성찬은 자연스럽게 쇼타로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일주일 동안 인간처럼 살아볼래. 라는 말이 결국엔 이별 통보라는 것 쯤은, 성찬은 알 수 있었다. 성찬은 입술을 붙인 상태로 말을 이어나간다. 타로, 하고 싶은 말 다 해도 돼. 느릿한 언어. 서로의 코가 가볍게 닿고, 성찬은 기꺼이 이별 통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한다.
지구인들의 심장은 항상 말썽이었다. 실제로 심장병이 있는 경우도, 아님 미디어에서 이별을 하거나 상처를 받을 때도 '심장이 멈출 것 같아.' 라는 표현을 쓰곤 했으니까. 가장 중요한 부분이 심장이면서, 가장 약점인 부분. 쇼타로는 난생 처음으로 심장이 콕, 콕,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느낀다. 예민하고도 날카로운 쇠붙이가 심장을 후벼파는 기분. 애정에는 너무 많은 고통이 수반되고 있었다. 쇼타로는 숨을 한 번 참고, 곧 천천히 호흡한다. .... 성찬아, 그리고 우리 이별하자. 남은 기간 일주일. 성찬의 생일까지 일주일이 남은 시점에서, 쇼타로는 완벽한 사랑 고백과 동시에 이별을 통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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